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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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43명의 승객(승무원을 포함하여)을 태우고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에어프랑스 006편은 예고에 없던 난기류를 만나 위기를 겪은 후 무사히 착륙한다. 그리고 세 달 뒤 6월, 동일한 여객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고 관제탑에 구조신호를 보낸다. 비행기와 기장의 이름을 확인한 관제탑은 혼란에 빠져들고, 곧 북미 방공 사령부(NORAD) 가 개입하며 국가안보의 문제를 적용하여 특수한 프로토콜 42를 실행시킨다. 프로토콜 42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아노말리

L’Anomalie

에르베 르 텔리에 장편소설

민음사



「아노말리」 는 초반부부터 여러 시간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등장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 서로 연관없어 보이는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오는지, 또 그들의 이야기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추리하듯이 읽어보게 된다. 이후 미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나서야 왜 그들이 등장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6월에 착륙한 승객들은 자신들이 6월에 착륙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3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사' 되었다. 3월에 먼저 착륙한 자신이 존재했던 것.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이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6월의 비행기를 뉴저지 공군 기지로 비상착륙 시키고, 과학자들을 소집하여 원인을 밝히려고 애쓴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인들, 철학자들도 모여 다방면으로 분석하지만 다양한 가설만 세울 수 있을 뿐 뚜렷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다. 이 과정은 SF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노말리」 는 ‘이상’ ‘변칙’이라는 의미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어? 당신이 둘이라는 걸?” 소설 속 이 대사가 작품의 주제를 보여준다. 소설은 뉴욕에서 파리로 비행기를 타고 온 인물들이 3개월 후 똑같은 여객기를 타고 온 자기의 분신과 만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SF 장르가 흔히 구사하는 사고실험이다.



조르주 페렉,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마르셀 뒤샹 등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들이 포함된 문인 집단 울리포(OuLiPo, 잠재적 문학의 작업실) 의 일원인 에르베 르 텔리에는 '제약(contraintes)을 도구로 사용하는 문학' 을 이 책 「아노말리」 에서도 구현해낸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문인과 수학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문학적 실험 집단인 울리포는 일견 창작의 자유를 방해하는 듯 보이는 제약(contraintes)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문학을 일상적 기능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새로운 잠재력을 끌어내려고 했다고 한다. 수학, 과학, 생물학, 음악 혹은 뚜렷한 규칙성을 띠는 놀이 등에서 제약을 찾아내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일정한 규칙을 세운 후 그에 따라 글의 형식과 구조를 변형하는 문학 실험이  「아노말리」 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지 궁금해하며 읽게 되기도 했다. 좀 더 검색해보니 현재까지 울리포 공식 웹 사이트(www.oulipo.net) 에 등재된 잠재문학 작가들은 서른여덟 명이라고.



물론 이런 문학적 실험을 분석하고 찾아내지 않더라고 이야기의 서사만으로도 흥미로운 소설이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3월과 6월의 인물로 나뉘어 3개월 간의 시간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이후 각자의 삶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겉으로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실제로는 청부 살인 업자인 블레이크, 시한부를 선고받은 비행기 기장 데이비드 마클,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활동하는 나이지리아 뮤지션 슬림보이, 한때 사랑했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앙드레와 뤼시, 엄마에게도 말못한 비밀을 가진 어린 소녀 소피아와 엄마인 에이프릴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각 인물들간 관계들의 양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몰입하게 한다. 작가가 각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데 서로 다른 문체를 사용하는 형식실험을 시도했기에,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이 되고,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미스터리가 되며, SF 와 철학을 넘나들기도 하는 단편들이 모인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아노말리」 는 등장인물들 중 하나인 소설가 빅토르 미젤이 쓴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장치 또한 재미있다. 



작가는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인터뷰에서 “내 자신의 분신과 대면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하면서 쓴 소설”이라며 “자신의 분신과 대면할 때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여덟 명의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라고 말하고,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각 인물들의 특징에 맞는 문체로 텍스트 구현했다”며 “살인 청부업자 이야기는 스릴러 법칙을 지켜가면서 썼고, 작가 이야기는 문학분석적 장르로 만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분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다보면 살짝 결은 다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Double)」 , 그리고 다비드 칼리 글, 클라우치아 팔마루치의 그림책 「누가 진짜 나일까(Le Double)」 도 떠오른다.  「아노말리」 에서 자신의 분신을 마주한 인물들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주인공 골드랴낀과 비슷한 과정을 겪은 인물은 누구일까 생각도 해보고( 비슷하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 실제로 내가 나의 분신을 마주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게도 된다.  「아노말리」 속에서 소설가 빅토르 미젤과 인터뷰를 진행하던 한 방송인은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일단 비현실적인 기분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 존재 여부가 의심스러우면 볼을 꼬집어 보는 걸로 충분하죠. 그리고 또 하나의 나는 내 비위를 맞춰 주지 않는 거울 같지만 내 비밀까지 다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죠. 그렇게 노출이 되면 나는 변화 혹은 도피를 결심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삶에 둘이 있으면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뜻이죠. 틀림없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아, 다 허무하구나, 아파트, 직장, 물질적인 것 전부가.... 내면의 알맹이,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것에 집중하겠지요.


- p435~436,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자신이 가상이 아닌가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부분은 영화 <매트릭스> 가 저절로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의 시간이 착각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한 세기도 거대한 컴퓨터 프로세서에게는 찰나에 불과할까요? 그러면 죽음은 뭐죠? 그냥 한 줄 코드상의 '엔드(end)'?


- p281



 「아노말리」 는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드물게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 참고적으로 지금까지 공쿠르상 수상작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이라고. ) 공쿠르상(The Goncourt Prize) 은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 상으로, 프랑스의 아카데미 공쿠르(Academie Goncourt)가 "그 해 최고의 그리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 작품" 과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노벨문학상, 맨부커상과 함께 세계 3개 문학상 중 하나로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공쿠르(Edmond de Goncourt)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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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아이, 노드 -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공모전 제11회 수상작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55
박지현 지음 / 현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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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분석학자이자 심리 상담 전문의인 클라리사 에스테스 박사의 명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Women Who Run With the Wolves / 1992년) 는 신화, 전설, 동화에 담긴 의미를 융의 원형 심리학과 여성지향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심리 치유서다. 「대지의 아이, 노드」 의 작가는 이 책에서 노드(NOD)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노드는 '육체와 심리가 한데 섞이고 서로 영향을 주는 곳’을 뜻하며, 

‘이곳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고 상상과 영감의 창고이며, 

모든 자연이 치유되는 곳’이라 설명되어 있었고, 

나는 곧 이곳이 아이들의 상상력이 피어나는 잠재의식을 뜻함을 직감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대지의 아이, 노드

박지현 글, 그림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공모전 제 11회 수상작

현북스




'대지의 아이' 라는 제목에서 얼핏 땅의 요정 같은 신비로운 생명체를 떠올렸다. 그러나 등장하는 주인공은 우리 아이들과 같은 현실 속 평범한 아이다. 다만 아이에게는 칠흙처럼 까만 머리카락 사이에 몇 가닥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있었다. 아이가 행복해 할 때마다 머리카락은 더욱 환하게 빛났다. 





남들과 다르면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노드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주인공 노드는 그런 시선들이 무섭다. 그리고 학교의 선생님은 노드의 엄마에게 학교에서 시선을 피해 홀로 있는 노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노드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미용사에게 부탁한다. 문득 아이만의 개성을 없애버리고 남들과 비슷한, 튀지 않는 아이를 길러내고자 하는 우리의 교육 현실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매우 서글프다. 





책 속 주인공 노드는 꿈 속에서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노드의 꿈속 공간들은 나무와 풀, 해초와 산호가 등장하는 환상적인 공간이다. 숲의 초록과 바다의 파랑, 현실 속 노드를 표현하는 검정과 잠재의식 속의 개성적인 노드를 표현하는 듯한 소녀의 흰색과 노랑이 보여 주는 색의 대비가 눈을 사로잡는다. 꿈 속의 소녀는 노드에게 "넌 특별해", "너 자신을 잃어버리면 안 돼" 라는 응원을 들려주면서 노드가 잃어버렸던 것을 돌려준다. 작가는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자신 안에 잠재된 무한한 대지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치유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의 중요함’ 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대지의 아이' 였던 것. 우리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대지를 품고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림책에서 전통적으로 자주 다뤄졌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노드의 특이하고 마법같은 세계는 보는 사람을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빛과 그림자를 사용한 방식, 잘 조절된 색상 팔레트,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디자인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 앤서니 브라운, 수상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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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벽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54
지혜림 지음 / 현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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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달과 구름의 모습만 보면 동양화 속의 신선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풍경인데, 마을 속 집들의 모습은 유럽의 어느 산 속 마을 풍경 같기도 하다. 몽환적인 표지다. 노란색 땅 위의 핑크색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파란 '벽' 이 보인다. '벽' 이란 단어와 일러스트가 맞물려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단절'.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공모전 제 11회 수상작인 「파란 벽」 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파란 벽

지혜림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현북스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등장한다. 산꼭대기와 바다 가까이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판화기법으로 작업한 듯한 색 톤과 일러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책 소개를 살펴보니 '에칭으로 작업한 듯한' 이란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 작업한 듯한.. 이라고 하면 실제 작업은 다른 작업이라는 뜻일까? 디지털 작업 같은? ) 펜이나 연필로 종이 위에 직접 그리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선의 효과가 특징인 에칭 기법은 금속판을 부식시켜 섬세하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금속판의 차가움과 잘 계획되고 정리된 화면의 느낌이 특징이라고 한다.




평화롭게 서로 잘 지내던 이 두 마을은 큰 파도가 아랫마을을 집어삼켜 버리면서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잃은 아랫마을 사람들이 살기 위해 윗 마을로 올라오려고 하자, 윗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눠 갖자고 할 거야', '나쁜 병균을 옮길지도 몰라' 라며 걱정한다. 결국 누구도 넘어오지 못 할 장벽을 쌓는다. 



윗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일까.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아랫 마을보다는 윗 마을의 상황에 가깝게 말이다. 최근 사례를 떠올려보면 예멘 내전을 피해 제주특별자치도로 무비자 입국한 예멘인 500여명이 난민 지위를 신청했던 제주 난민 사례도 있고, 코로나 위기로 인한 제노포비아 (낯선 것, 이방인이란 뜻의 제노(xeno)와 싫다는 의미인 포비아(phobia)를 합쳐 만든 말로, 외국인 또는 이민족 집단을 혐오, 배척하는 것 현상을 뜻한다. 악의가 없어도 자기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일단 경계부터 하는 심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 또한 떠올려보게도 된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벽을 쌓았던 도널드 트럼프 때의 상황은 책 속 모습과 매우 닮아 있기도 하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던 이곳에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파란 벽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 담고 있는 주제는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보게 하지만, 이야기의 서사는 어렵지 않고, 권선징악적인 마무리는 전래동화처럼 쉽게 다가가게 하는 느낌이다.  




다양한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고 그림 속에 담는 것을 좋아한다는 지혜림 작가는 팬데믹을 겪으며 인종, 연령, 성별 간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짓는 일들을 보았다고 하면서, '재난과 같은 상황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도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고 상대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어내지 못한 차별과 혐오의 양상을 이번 그림책에 담았다' 라고 전한다. 



문득 면지를 오래 들여보게 된다. 벽은 마을 단위가 아니라 개인들도 쌓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벽을 올렸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 벽은 스스로를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강렬한 그림들이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느낌으로 들려주네요. 길게 설명하지 않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색상과 디자인을 멋지게 사용한 독창적이면서도 굉장한 그림들입니다. 조금 큰 아이들까지도 잘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앤서니 브라운, 심사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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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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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문명」 에 이은 고양이 시리즈 「행성」 시리즈를 읽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세계로 오랫만에 초대되어 즐겁다. 인간 이외의 존재를 통해 인간에 대해 이야기해왔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작품 속에 늘 등장해왔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또한 이야기의 중간마다 존재감을 뽐낸다.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은 어느새 확장판까지 나왔으며, ESRAE (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 Etendue) 란 이름으로 「행성」 에서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웰즈 가문의 인물들 또한 등장한다. 이번에는 로망 웰즈 교수가 등장한다. 작가의 팬들에게는 익숙한 설정이지만 새로운 팬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갈 수도 있으려나.





행성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열린책들



전작 「문명」(Sa majesté des chats, 2019) 에서 프랑스 시뉴섬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던 고양이 바스테드와 그 일행들은 「행성」 에서 미국에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야기 초반의 등장인물(동물?) 들이 전작에서 이어지는 터라 자세한 소개 없이 곧바로 사건으로 진입하고, 몇몇 캐릭터들은 초반에 사망하기도 한다. 이 책으로 <고양이 시리즈>를 시작한 독자라면 살짝 허망하기도 할 듯. 



미국은 <프로메테우스> 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쥐의 간을 공격해 파괴하는 독감 바이러스를 개발했지만, 이내 쥐들은 바이러스에 대처할 방법을 찾았다. 결국 사람들은 고층 빌딩으로 몸을 피한 뒤 1층에서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모두 박아 지상과의 연결을 원천 차단한다. 그렇게 미국에서는 공중 생활을 하는 인간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힘겹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으나 배 위에서 쥐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던 바스테드 일행들은 맨하튼의 고층 빌딩에 사는 이들에게 구조된다. 이곳의 공중 세계는 집라인을 설치해 타워마다 자리 잡은 공동체 간에 교류가 가능하다. 도르래 장치에 매달린 의자를 타고 빌딩간을 이동해 다닌다. 그 외에 자율 비행이 가능한 드론을 활용한 수송 시스템을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주식은 쥐다. 빌딩의 아래층에는 버섯도 재배하고 지붕에서는 소량이지만 과일과 채소농사도 짓는다. 전력은 태양광과 풍력 발전으로 해결하고 빗물을 물탱크에 받아서 쓰고 있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바스테드는 '무서운 번식 속도와 놀라운 진화 능력을 보여주는 한 동물 종의 침략을 받고 이곳에 쫓겨 와 있는 현실(p146)' 을 슬퍼한다. 



미국의 공동체는 유럽처럼 무종교인 대 종교인, 가난한 자들 대 부자들의 대결로 내전이 벌어진 게 아니라, 미국이라는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다양한 공동체 간에 동시다발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들은 이것을 <부족 전쟁>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현재는 101인의 부족 대표단이 모여 회의에서 다수결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다. 이들은 의장을 선출하며, 현재의 의장은 힐러리 클린턴. ( 맞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이다. ) 바스테드가 나중에 힐러리 클린턴과 부딪히며 의견대립을 할 때, 그녀에 대해 쏟아놓는 평가는 신랄하다. 



이렇듯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실존 인물들을 교묘하게 이야기 속에 등장시킨다. 책 이야기를 종종 나누는 회사 동료 중에 찰스 부코스키를 언급하며 자신의 이루지 못한(?) 이상형이라며 농담을 하고는 했었는데, 당시 작가의 마초성(?)에 대하여 나름 치열하게 대화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스테드가 미국에 와서 만난 고양이의 이름이 부코스키라는 것을 읽으며 웃음을 터뜨린 이유다. 



주인공 바스테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여러 평가들을 읽다보면 조금씩 뜨끔하게 되는 부분들을 만난다. 어찌보면 제 3의 눈을 통해 지식을 쌓은 바스테드 자체가 동물에서 인간화된 것은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다. 


문득 인간이란 존재의 문제가 뭔지 알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행복보다 불행을 위해 쓴다. 인간들은 신이라는 것을 상상해 만들어 내고 그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죽인다. 인간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바람을 피운다고 상상하고 그 사람과 헤어진다. 훌쩍거리는 집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커플끼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종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 영속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 p124




미국 쥐들의 대장은 알카포네라는 이름의 쥐다. 유럽의 쥐보다 덩치가 큰 종이다. 이 쥐들은 고층 건물의 아래층을 이로 갉아 무너뜨리고 만다. 동화 <아기돼지 3형제>에서 가장 튼튼한 집은 벽돌집이었건만, 현실 속 벽돌집 같은 곳이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쥐들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불을 다룰 줄 알았던 전작 「문명」 의 빌런 티무르마저 미국에 도착하여 알카포네와 연합을 이루고야 만다. 



바스테드는 인간 부족들의 앞에 나서 자신이 이 상황을 해결할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하며, 이에 대한 대가로 103번째 부족의 대표자격을 달라고 주장한다. 고양이들을 새로운 부족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고양이 바스테드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과대망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고양이라는 평을 받곤 하는 바스테드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씩 무리를 이끄는 리더로서 변화해가는 모습이 흥미롭다. 바스테드는 현재 인간의 역사를 통해 '독재'에 대한 흥미를 내비치는 중이다. 



내가 전투에 임하는 자세를 봐서 알겠지만 나는 <순한 고양이>가 아니에요. 효율을 추구하는 고양이죠. 나에 대한 판단은 후대가 내릴 거예요.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작은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단이 요구되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진 사람들보다 착해 보이긴 하겠죠. (.. 중략)


최악의 독재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린 뒤 사랑하는 가족과 헌신적인 시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생을 마감한 반면, 개혁가들은 제거되거나 처형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나는 강한 지도자로 사람들 위에 군림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p239~241



이후 인간의 102개 부족( 이야기 중반에 기갑 여단 장병들이 102번째 부족으로 합류했다 ) 의 총회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계속 싸워대는 것을 보며 바스테드는 인간들은 오로지 자존심 때문에 상대를 반박한다라고 말하며, 남과 다른 점으로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지 공통점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은 이렇게 <앞뒤가 막힌>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얼마든지 시각을 확장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2권에서의 바스테드의 변화가 더욱 궁금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서둘러 다음 권을 펼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몰랐던 지식들을 서술하고, 주인공들은 물론 함께 읽는 독자들도 그 지식들을 통해 변화하도록 이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 지식들과 관련된 사건과 모험 요소, 그리고 상상력들이 덧붙여지면서 흥미로운 서사들을 완성한다. 이번 권에서 나는 '오스카, 비스마르크의 고양이' 에 대한 토막 지식이 재미있었다. '언싱커블 캣 샘(Unsinkable Sam)' 혹은 불침묘 샘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제공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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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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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친구들끼리 입소문이 나며 함께 읽어보자고 권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이 책 「아노말리」도 먼저 읽었던 책 친구가 함께 읽어보자며 선물해준 책이다. 책 표지의 느낌부터가 내 취향.



아노말리

L’Anomalie

에르베 르 텔리에

민음사

에르베 르 텔리에는 레몽 크노, 조르주 페렉, 이탈로 칼비노 등 세계적 작가들과 마르셀 뒤샹 같은 예술가들도 함께한 실험적인 문학 창작 집단인 ‘울리포(잠재 문학 작업실)’의 회원이자 2019년부터는 모임의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한데, 『아노말리』는 울리포 작가로는 처음 공쿠르상을 탄 작품이자 르 텔리에가 울리포에 바치는 오마주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된다. '울리포' 라는 창작집단이 궁금해진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시금 시작되는 열 개 이상의 소설로 이루어진 (역시 울리포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와 『아노말리』를 비교해 언급하며, 자신은 장르 소설이 아닌 ‘장르들로 이루어진 소설’을 쓴 것이며, 독자가 『아노말리』를 읽으며 완전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온라인 책 소개 중에서

주말 독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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