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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 - 1996 보스턴 글로브 혼북 대상 수상작 ㅣ 상상놀이터 8
애비 지음, 원유미 그림, 전하림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9월
평점 :
어찌보면 작고 연약한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을 이기고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아동문학의 전형적인 모티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아동문학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새롭게 나오고 있으며, 여전히 사랑받는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작고 약한 주인공에게 일체화를 느낄 수 밖에 없는 데다가, 뻔한 이야기라 생각되어 읽기 시작하지만 그 뻔함을 비트는 요소들을 만나면 오히려 더 재미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러하다.
파피
애비 글 / 원유미 그림
보물창고
딤우드 숲 속. 이야기의 시작에는 작은 생쥐 두 마리가 등장한다. 파피와 래그위드. 원어로 보면 Poppy, 양귀비꽃 이라는 이름과 ragweed, 돼지풀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두 마리 생쥐를 바라보는 한 마리의 수리 부엉이도 있다. 이름은 미스터 오칵스.
파피와 래그위드는 친구처럼 보인다. 래그위드가 파피를 '자기' 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더 친밀한 사이일 수도 있다. 이 숲에서는 미스터 오칵스의 허락없이는 돌아다닐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무슨 이유인지 허락없이 넓은 공터로 왔다. 숲을 다스리는 것이 수리부엉이라고 생각하는 파피는 두려워하며 계속 돌아가자고 하지만, 래그위드는 파피에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몰라' 라고 지적하며 두려워할 것 없다고 이끈다. 그러나 곧 래그위드는 지켜보던 수리부엉이에게 잡아 먹혀버린다. 밤톨군은 "응? 주인공 아녔어? 벌써 죽어버리다니. 부엉이 나빴어~!" 라고 중얼. 사실 나도 래그위드의 대사들을 곱씹고 있던 터라 초반에 사라져버린 것에 놀라긴 했다. 주인공 파피를 성장시키기 위한 전형적인 클리셰 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읽는 이에게는 미스터 오칵스가 저절로 공동의 적이 되어버린다. 초반부터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어버린 것.
미스터 오칵스가 파피를 마저 잡으려고 달려들지만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다. 수리 부엉이가 생쥐를 쫒는 장면은 생생한 묘사 덕분에 더욱 긴박감이 넘친다. 간신히 인간이 버리고 간 낡은 집, 그레이 하우스라는 생쥐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오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레이 하우스에 사는 생쥐 가족의 수가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근방에서 더이상 충분한 식량을 조달하기 어렵게 된 것. 그래서 생쥐들은 미스터 오칵스에게 근방에 새로 생긴 뉴하우스로 이사할 수 있도록 허락 받기로 한다. 왜 생쥐들이 부엉이에게 허락을 받게 된 걸까?
파피의 아버지이자 생쥐들의 대장인 렁워트는 미스터 오칵스가 생쥐를 잡아먹는 나쁜 무리, 특히 고슴도치로 부터 생쥐들을 보호해주고 있으며, 그 대가로 미스터 오칵스를 지도자로 받아들이고, 그레이하우스를 벗어날 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생쥐들은 실제로 고슴도치를 본 적은 없으나 미스터 오칵스의 말대로 가시를 쏘아 생쥐를 잡은 후 조각조각 내어 먹는 사악하고 교활한 생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외부에서 온 생쥐였던 래그위드는 언제나 그런 생각들에 반기를 들며 질문을 하던 생쥐였었다. 왜 오칵스라는 작자에 대해 두려워해야하는가. 왜 오칵스는 그런 것을 요구하는가. 왜 오칵스는 고슴도치와 생쥐를 구분하지 못해서 우리의 안전을 침해할 수 있다고 하는가 등. 그의 의심은 타당해보였으나 다른 생쥐들은 그의 의심이 늘 불편했었다. 파피는 래그위드가 사리지고 나서야 그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마음 속에 작은 의심의 씨앗이 싹튼 것.
생쥐 무리들의 대표단이 미스터 오칵스에게 이사에 대한 허락을 구하자, 그는 파피가 자신의 규칙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파피는 처음에는 스스로를 탓한다. 그러다가 '우리가 이사를 가지 않으면 미스터 오칵스가 얻을 수 있는게 뭐지?" 라고 생각해본다.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고학년쯤 되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안다. 이들을 위한 동화에서도 이제 주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파피는 뉴 하우스에 무엇이 있을지 직접 확인해보기로 한다. 두렵지만 큰 용기를 낸다.
작은 생쥐 파피가 뉴 하우스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을 더 키운다. 여우를 피하다가 고슴도치를 직접 만나기도 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고슴도치를 직접 만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진실을 깨닫게 된다. 파피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을 깨달으며 계속 성장한다.
단지 네가 누군가를 두려워한다고 해서
그 작자가 하는 마을 전부 믿을 필요는 없단다
- 제13장, 이른 아침, p150, 고슴도치 에레스의 말 중에서
파피가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들은, 그녀의 모험을 함께 하는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부당한 권위라는 것에 대해, 말로만 전해들었던 소문의 이면에 있을 진실에 대해, 용기에 대해..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뉴베리 상' 을 세 번이나 수상한 글 작가의 내공은 이 책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 또한 '보스턴글로브 혼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 임에도 중간중간 허를 찌르는 전개라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유머코드라던가, 담고 있는 메시지도 참 좋다.
다시 표지를 들여다 본다. 책을 읽기 전에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사 눈에 들어온다. 파피의 귀걸이, 파피가 손에 들고 있는 바늘처럼 보이는 어떤 것. 파피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것들. 초반에 사라졌지만 끝까지 존재감을 잃지않는 래그위드라는 생쥐의 흔적. 표지의 보이는 것들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