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좋은 내용의 글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적 문제를 지리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인것 같다. 지리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지리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런 좋은 연구사례들이 많이 발굴되고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ps : 수소문 끝에 석사논문을 얻게 되었다. 책이 학교로 오면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 겠다. 기대된다. 나도 언젠가는... 

'노숙인'관련 책이 뭐있난 검색을 해보니 임영인 신부의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란 책이 나온다. 책 추천사에 이런 글이 있다. “이 책에는 임영인 신부가 직접 부딪히고 경험한 노숙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의 병들고 지친 육신 속에 감추어둔 아프지만 따듯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차가운 거리에서,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가슴으로 쓴 글들이다. 이 책은 노숙인들의 인간승리를 이야기하는 신파극도 아니고, 어떤 선량한 사람이 불량한 사람들을 선도했다는 위선적인 가식도 아니다. 사회구조적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메마른 투쟁의 구호로 선동하는 글들도 아니다.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사랑하는 한 사제가, 그 사랑의 빛으로 바라본 이웃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행복해지길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히길 바란다. 삶의 의욕과 새로운 희망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책의 이야기들은 큰 힘을 주리라 확신한다.” 읽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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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10.9.10 827호   나는 노숙인을 보았다 

한 대학원생이 70여 일 동안 서울역 노숙 생활을 하며 지리학의 시선으로 바라본 노숙인들…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의 생활을 몸으로 기록한 이야기  
 
경희대 지리학과 석사과정 김준호(29)씨는 지난 1월1일부터 3월13일까지 70여 일 동안 서울역에서 노숙인들과 섞여 노숙 생활을 했다. 그동안 노숙인 연구에서 많이 사용된 설문조사나 인터뷰 등으로는 이들의 실제 경험과 인식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류 사회와 단절된 노숙 세계에 직접 들어가 그들의 미묘한 행동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피는 ‘참여관찰’을 통해 내부자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이 기간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할 수 없이 집에 들어가 잔 5일을 빼고는 꼬박 노숙인으로 생활했다. 끊임없이 주변 노숙인들과 대화·접촉을 시도했고, 그 결과를 틈틈이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거리 노숙인이 생산하는 차이의 공간에 대한 연구: 서울역 거리 노숙인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거리 노숙인들은 주로 ‘공공 공간’에서 생활하는데, 그들에게 공공 공간은 일반 시민이 경험하는 공공 공간과 다르다. 즉 공공 공간에 담지된 ‘공공성’이 거리 노숙인에게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씨는 공공 공간을 주류 사회가 만들어낸 ‘지배의 공간’으로 바라보고, 이런 지배의 공간을 거리 노숙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만들어내는 공간을 ‘차이의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씨 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현장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를 통해 노숙인 문제 해결의 실천적 대안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현재 서울시 집계에 따르면, 서울역 일대에서 거리 노숙을 하는 인원은 150여 명 정도며, 쪽방 등에서 잠을 자는 인원까지 합친 서울시 노숙인은 1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전국적으로는 거리 노숙인 1천~1500명, 쉼터 입소자 3천~4천 명, 부랑인 시설 입소자 1만여 명, 쪽방 생활자 6천여 명,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만화방이나 사우나 등에서 자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편집자-

필자가 ‘참여관찰’을 통해 접한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 중 중점적으로 관찰한 것은 8명이다. 〈표1〉은 이들의 인적 사항과 주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필자가 참여관찰을 실시한 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서울역 일대에서 같이 지낸 사람들로, ‘코트누나’를 제외하고는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했다. 필자가 관찰한 거리 노숙인의 수는 80명이 넘었고, 이들 중 실제로 접촉한 노숙인도 5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동성이 강하다는 거리 노숙인의 특성상 이들을 모두 지속적으로 접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밝히려는 ‘차이의 공간’이 이들 8명에게만 국한된 특정한 사례는 아니다.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이 보편적으로 생산해내는 대표적인 ‘차이의 공간’을 이들의 구술과 행동을 중심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 표1.등장인물의 인적 사항과 주요 특징.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 수면의 공간-자는 곳이 우선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서울역 광장에 나가보면 여기저기서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거리 노숙인들이다. 늦은 밤이건 대낮이건 서울역 광장이나 서울역사 안에서 잠자는 거리 노숙인들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들이 자는 공간이 결코 ‘잠자기 위해’ 기획되거나 조성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잠자라고 만든 공간이 아닌 곳에서 자는 것’, 바로 거리 노숙인들이 생산해내는 첫 번째 ‘차이의 공간’인 ‘수면의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지며, 이곳은 거리 노숙인들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공간이자 역동적인 공간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수면의 공간은 어떤 동기와 방법으로 생산되는지, 즉 ‘집’이 없는 거리 노숙인들은 어떻게 공공 공간인 서울역 인근을 ‘수면의 공간’으로 전유(교환가치를 극복한 사용가치로 이용 및 참여)하는지, 1월부터 3월까지 관찰한 서울역 거리 노숙인을 통해 살펴보자.
  
 
» 그림1.서울역 거리 노숙인의 공간문화지도
 

낮잠이 생명인 노숙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이 2010년 1월부터 2월까지 ‘수면의 공간’으로서 생산하던 ‘차이의 공간’은 ①신역사 내 대합실과 ②지하도다. 그리고 3월께 추위가 누그러지기 시작하면 ③서울역 광장과 구역사 앞거리와 ④서부역 앞거리가 여기에 추가된다(그림1 참조). 물론 육교 등과 같이 다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2010년 1~3월에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거리 노숙인은 위 네 군데 중 한 곳에서 자려고 노력한다.

한겨울, 특히 올해 겨울처럼 혹한과 폭설이 동반된 겨울이라면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면의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개인의 기호를 떠나 삶과 직결된 문제로, 바깥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개방된 공간, 즉 육교나 거리 등은 잠을 잘 수 있는 곳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실내 공간, 즉 대합실이나 지하도에서 잘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필자가 노숙한 기간 중 폭설과 혹한이 극에 달했던 1월 초·중순에는 지하도마저 ‘수면 가능한 공간’에서 제외되는 날이 많았다. 결국 한겨울의 거리 노숙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합실에서 자려고 노력하는데, 여기에는 서울역에서 실제로 노숙을 하는 사람만이 알고 있고 또 갖고 있는 ‘지식’과 ‘시공간 리듬’이 동원된다.

필자가 참여관찰을 위해 처음 서울역을 방문한 날, 어디서 자야 할지, 어디서 뭘 먹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을 때 ‘최형’과 ‘형님’이 시계탑을 스윽 보더니 내뱉은 말이다. 
  
 
» 표2.‘최형’의 시공간 리듬 
 

최형: 젊은 놈이 왜 이렇게 비실거려? 뭐 아무튼 좀만 참어. (신역사 쪽을 가리키며) 어차피 지금은 저~서 못 자니까. 니가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이 시간에 저기서 잘라치면 공안 놈들 득달같이 달려올 거다.

형님: 여기서 살아남을라면 니가 니 몸 잘 챙겨라. 졸리다고 그냥 여기서 디비자면 바로 골로 간다. 암튼 저서(대합실) 잘라면 이따 9시 반쯤에 들어가서 잠깐 자고 나왔다가 2시쯤 다시 기들어가야 하니까 지금은 여서 쇠주나 한잔해.
 

그때가 밤 9시를 지날 즈음이었는데, 그 시간에는 역사 내부 대합실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은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데서나 드러누워 자지 않는다. 이는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자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건 ‘지배의 공간’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1~2월에 거리 노숙인들이 대합실에서 (밤에) 잠을 잤던 요령은 다음과 같다. 우선 시민의 시선과 공무원의 단속이 줄어드는 퇴근시간 이후, 즉 밤 9시30분에서 10시30분 사이에 대합실에 들어가 눈을 붙인다. 그러면 얼마 안 돼서 공안의 순찰이 이루어지고, 새벽 1시에 물청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노숙인들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쫓겨난다. 그러다 새벽 2시를 넘기면 노숙인들은 다시 대합실 안으로 슬슬 들어가는데, 그때부터는 출근을 위해 시민들이 모여드는 7~8시 전까지 선잠을 잘 수 있다. 물론 이런 시간 패턴이 항상, 그리고 누구에게나 똑같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 거리 노숙인들이 전략적 실천을 통해 ‘특정 시간대’에 ‘특정 공간’을 ‘수면의 공간’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와 함께 지하도에서 박스를 깔고 있던 중 ‘난형’은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필자가 불안해하자 이렇게 말했다. 
 

난형: 괜찮아 인마. 어차피 쟤네도 다 구색 갖추기용으로 저×× 하는 거야. 그니까 그냥 열심히 깔기나 해. 쟈들이 모라 할라치면 그냥 자는 척하거나 아픈 척해 대충. 근데 그럴 일이나 있을라나 모르겄다. 여긴 그냥 가끔 쟈들이 미쳐서 맘먹고 올 때가 있는데, 그때만 잠깐 나갔다 들어옴 돼. 아마 쉼터로 데리구 가려고 할 거다. 근데 그게 누가 한번 얼어 뒤져야 쟈들이 좀 말이라도 걸지 ××.
 

날씨가 조금씩 풀리는 3월에는 대합실과 지하도 외에도 서울역 광장과 구역사 앞거리, 그리고 서부역 앞거리가 ‘수면의 공간’으로 추가된다. 그러나 이들은 ‘낮잠’을 자기 위해 간간이 이용되는 공간일 뿐, 밤에도 여기서 자기엔 3월의 날씨는 아직 너무 춥다. 대부분의 거리 노숙인들은 여전히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 각종 편의시설을 이용하기에도 좋은 ‘실내 공간’에서 자기를 희망한다. 다만 한파로 인해 도저히 외부에서 잘 수 없던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 시간에 한정해) 어떻게든 얼어 죽지 않고 눈을 붙일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났을 뿐이다. 
 

“저주받은 노숙인의 서부역 앞거리”

한편 이렇게 ‘낮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추가되는 시기가 되면, 거리 노숙인의 시공간 리듬은 더욱 역동적으로 조절된다. 그 이유는 거리 노숙인에게 낮잠이 중요한 일과이기 때문인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인들의 ‘낮잠’과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 일반인들은 ‘나인 투 식스’(9 to 6)와 같이 정해진 일과 시간이 있고 이와 엄밀히 구분되는 수면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으로 확보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거리 노숙인에게는 보장된 수면 시간(과 공간)이 없다. 요컨대 일반인들에게 낮잠은 부족한 수면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추가로’ 만들어내는 시간인 경우가 많지만, 거리 노숙인은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채우기’ 위해 낮잠을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합실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상당수 거리 노숙인이 (비록 스스로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잠을 ‘끊어서’ 자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일률적인 패턴은 없으며, 개인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리듬을 조절한다. 표2는 ‘최형’이 1~2월과 3월에 각각 잠을 자던 시공간 리듬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 노숙인에게는 인간이 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요소인 의식주(衣食住)가 골고루 결여돼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욕구보다 의식주가 먼저 해결돼야 하는데, 그중 ‘주’(住)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수면의 공간’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된다. 왜냐하면 ‘의’(依), ‘식’(食)과 달리 ‘주’는 이동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즉, 정부나 민간단체에서 거리 노숙인에게 ‘의’와 ‘식’을 제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찾아’오지만, ‘주’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거리 노숙인에게 ‘주’에 해당하는 ‘수면의 공간’은 다양한 ‘거리 노숙 지도’를 그리는 데 가장 기본이 된다. 요컨대 뒤에 언급할 ‘취식의 공간’이나 ‘구걸의 공간’, 그리고 ‘부유의 공간’ 등은 ‘수면의 공간’이 먼저 확보된 이후에 형성되는 것으로, 그 순서가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음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선생님’의 말이다. 
 

이 선생님: 우리가 백날 외쳐봐야 정부에서 집 안 나와. 그런데 밥! 이건 안 줄 수가 없어. 니가 생각을 해봐. 여기가 무슨 아프리카도 아니고, (거리 노숙인 중 누군가가) 배고파 죽었다고 한번 뜨면 나라님한테도 참~ 안 좋거든? 그니까 내 말이 뭐냐 하면 (필자를 가리키며) 목숨 걸고 잘 데 만들라는 거지.
 

또 ‘수면의 공간’은 거리 노숙인 간 ‘유대가 형성되는 장소’다. 다음은 1월 말 필자를 포함한 5명의 거리 노숙인이 잠을 자기 위해 서울역 2층 대합실에 모였을 때 나눈 대화의 일부다.
 

삼촌: (꼬깃꼬깃해진 사진을 ‘에이스형’에게 보여주며) 흐흐, 자 봐. 이쁘지? 내… 내 따… 딸이야.

에이스형: 와, 형님! 이렇게 이쁜 딸 숨겨놓고 있었소? 아, 고놈 참 형님은 안 닮았나 보네. 그래 뭐, 가끔 연락은 하고?

삼촌: 흐, 하지. 오… 오늘도 했다.(침묵)

에이스형: 나중에 딸내미 볼 때 나도 좀 보여주소!

난형: 아, 형님(‘삼촌’을 가리킴)! 고만 좀 우쇼! 이제 안 그러기로 한 거 다 까먹었나? 


이런 대화는 새벽 4시30분께, 공익요원과 역무원, 철도 공안요원들이 돌아다니며 우리를 쫓아낼 때까지 계속됐다. 그날 밤 우리는 아무도 잠을 자지 못했고, 모두들 낮잠으로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이렇듯 ‘수면의 공간’은 단순히 몸을 누이고 잠을 자는 공간으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거리 노숙인들 간 무수히 많은 정서적·감성적 소통과 교감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잠자기 위해 모인 이들은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들 하나하나부터 가족 이야기, 노숙 진입 이전의 생활 이야기, 앞으로의 꿈에 관한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고 교감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악화되기도 한다. 이른바 관계가 형성되고 또 견고해지는 공간, 요컨대 ‘유대 형성의 공간’으로서 ‘수면의 공간’이 작동하는 것이다.
  
 
» 그림2.‘수면의 공간’으로서 서울역 대합실의 계급별 공간 배치 
 

조금이라도 ‘집’에 가까운 ‘벽’ 근처로

‘수면의 공간’이 갖는 마지막 특징은 ‘계급이 드러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거리 노숙인의 세계에는 그들만의 룰과 계급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공간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합실과 지하도 같은 실내 공간의 경우, 힘있는 노숙인이나 장기 노숙인은 (대합실의 경우) TV 근처 의자와 벽 쪽, (지하도의 경우) 통로 중앙 쪽에 주로 위치하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노숙인이나 노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노숙인들은 (대합실의 경우) 출입구 주변과 콩코스로 진입하는 통로 근처, (지하도의 경우) 출구 쪽 통로와 지하도 교차지점 부근에서 주로 잠을 잔다(그림2 참조). 그런데 ‘힘있는’ 노숙인은 꼭 신체적 조건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노숙인 사이에서 끊임없는 사회화 과정이 지속되는 동안, 그룹 내에서 자연스럽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노숙인과 그렇지 못한 노숙인이 나뉘게 되며, 이는 곧 노숙인 세계에서 ‘힘’이자 ‘권위’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계급별 공간 배치는 ‘공공 공간의 사적 공간화’ 때문에 발생한다. 즉 거리 노숙인들이 ‘수면의 공간’을 전유하는 과정은 공공 공간에서 자신의 ‘집’을 찾는 것과 같은데, 이를 위해 ①추위(혹은 더위)의 영향을 가능한 받지 않는 (환경적으로) ‘안락한’ 공간, ②공간의 경계, 즉 ‘구분선’이 있는 공간(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위를 지나다니는 시민의 발을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거리 노숙인에게 ‘벽’의 존재는 그나마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요인이며 따라서 ‘벽’ 근처에 붙어 잠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집’(혹은 방)에 가까운 ‘수면의 공간’을 조성하려 한다), ③개인의 ‘고정된’ 공간을 동시에 추구한다(대부분의 거리 노숙인들은 자신만의 ‘고정된’ 잠자리를 갖고 있다). 여기에 부합하는 공간이 대합실의 경우 TV 근처 의자와 벽 쪽이 되고, 지하도의 경우 통로 중앙 쪽이 된다. 따라서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은 ①번과 ②번에 해당하는 공간을 선택한 뒤, ③번처럼 ‘고정적’으로 이용하려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공간이 서로 ‘겹치고’ 결국 힘있는 노숙인이 공간 ‘선택’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한편 낮잠을 위한 공간으로 주로 이용되는 실외 공간에서는 (실내 공간에 비해) 좀더 큰 공간적 범위에서 계급에 따른 공간 배치가 드러난다. 그림3과 같이 서울역 광장과 구역사 앞거리가 주로 ‘주류’ 거리 노숙인의 공간이라면, 서부역 앞거리는 ‘타자화된’ 거리 노숙인의 공간으로 전유된다. 요컨대 여성 노숙인, 나이가 아주 많은 노숙인, 굉장히 어린 노숙인, 성격적 결함으로 동료 노숙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노숙인, 악취가 심한 노숙인, 대인기피증이 심한 노숙인 등은 거리 노숙인 세계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타자화된’ 그룹은 낮잠을 자는 데서도 ‘주류’ 그룹이 주로 포진한 서울역 광장이나 구역사 앞거리를 이용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한산하고 눈에 덜 띄는 서부역 앞거리 쪽으로 밀려난다. 이어지는 구술 자료는 ‘코트누나’가 한 말로, 거리 노숙인 사회에서의 계급과 이에 따른 공간 배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코트누나: 지들(서울역 광장 쪽의 거리 노숙인을 가리킴)이나 나나 어차피 다 똑같은 그지들인데, 뭐 그렇게 싫은 것도 많고 잘난 것도 많은지. 아무튼 난 여자치고 길바닥에서 진짜 오래 버티는 거야. 다른 여자들? 둘 중 하나야. 한 달도 못 가거나 아니면 미쳐버리든가. 여기가 그래 원래. 여기서도 여자는… 여자라서 안 돼. 더러운 조선이지. 그지들도 남자가 상전이고 여자는 이×× 이고… ××. 총각은 저쪽 넘어가서 같이 어울려. 여긴 저주받고 태어난 사람들이 벌받는 데야.
 

이처럼 노숙인 사이의 계급 관계는 서부역 앞거리를 일종의 ‘처벌의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다.
 

2. 취식의 공간-동료와 함께 먹어야 한다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이 ‘취식의 공간’으로 전유하는 곳은 주로 무료급식이 이뤄지는 지점, 즉 ①구역사 앞거리, ②육교, ③지하도였다. 한편 요즘의 서울역에는 길거리에서 밥을 먹는 거리 노숙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 바로 얼마 전에 개장한 ‘따스한 채움터’ 때문이다. 따스한 채움터는 서울시가 서울역 광장의 거리 급식을 실내 급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지난 5월4일 개장한 실내 급식장으로, 이곳이 생기면서 거리에서 취식하는 노숙인의 모습은 현저히 감소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노숙인들의 거리 취식은, 그들에 대해 진중히 고찰해볼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거리 노숙인들이 ‘취식의 공간’을 생산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체화된 지리 지식’인데, 이는 ‘취식의 공간’이 단순히 ‘끼니를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게 사용된다. ‘에이스형’과 ‘김간지’의 대화를 살펴보자. 
 

에이스형: 아무튼 오늘은 □□(주변 무료급식 기관 중 한 곳)로 가서 먹자. ‘김간지’형 지금 몇 시야? 천천히 걸어가지 그랴?

김간지: 아 거기 말고 ○○(□□와 다른 무료급식 기관)로 가자. 난 당최 □□ 거는 짜서 못 먹겄으니까.

에이스형: 알았소. 거기로 갑시다. (필자를 부르며) 아야~ □□는 내일 나랑 한번 가보고 오늘은 ○○로 가자. 가서 한번 맛보고 입에 맞나 봐라.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이 ‘취식의 공간’으로 특정 장소를 이용한다고 할 때, 결코 아무 데나 주저앉아 밥만 먹지 않는다. 요컨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 데나 상관없다’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그들은 개개인의 취향과 선호도에 따라 ‘동료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공간’ ‘시민의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공간’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 등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생산해낸다. 서울역 거리에 정착한 지 3~4개월 정도 지난 거리 노숙인이라면 ‘언제 어디서 제공되는 무료급식이 어떤 맛인지’를 줄줄이 꿰고 있다. 따라서 ‘입맛’과 ‘기분’에 따라 선별적으로 배식을 받는 경우가 발생한다. 결국 이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는 ‘좀더 감성적인 어떤 것’이 포함된 행동임을 의미한다.
 

정보교환의 공간, 무료급식

한편 ‘취식의 공간’은 단순히 식사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으로만 이용되지는 않는다. ①(사회적) 유대 형성의 공간과 ②정보 교환의 공간으로 동시에 작동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앞서 언급했듯 ‘취식의 공간’을 전유하는 과정에서 고려되는 요소 중 하나는 ‘동료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취식의 공간’ 역시 ‘수면의 공간’ 못지않게 거리 노숙인 간 수많은 소통이 발생하는 장소로 기능하는 것인데, ‘수면의 공간’이 주로 ‘감성적’ 유대 형성의 공간이었다면 ‘취식의 공간’은 주로 ‘사회적’ 유대 형성의 공간으로 작동한다. ‘수면의 공간’에서의 유대 형성이 ‘개인적’ 일을 서로 나눔으로써 감성적인 부분의 교류가 활발히 일어난다면, ‘취식의 공간’은 서로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대화가 주를 이루면서 거리 노숙인 사회 내에서의 상호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한 무료급식소에서 배식을 받아 식사를 하며 ‘에이스형’과 ‘김간지’가 대화한 내용의 일부다.
 

에이스형: 그 누구냐, 그 남박사(노숙인 중 한 명을 지칭) 옆에 있던 갸는 뭐여? 뭣 좀 하다 온 거 같던데. 혹시 형님 아쇼?

김간지: 걔 기름때 만지다 왔다는 거 같던데? 마누라가 집 팔아먹고 튀었다드만. 우리보다 한~참 덜된 놈.(웃음)
 

‘취식의 공간’이 갖는 두 번째 특징은 ‘정보 교환의 공간’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거리 노숙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취식의 공간’에서 교류됨을 의미한다.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나눈 또 다른 대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선생님: 그런데 넌 아까 어디 갔다 온 거냐.

난형: 엊그저껜가? 사랑 뭐시기에서 커피 풀었잖아여. 그거 오늘도 있다고 해서 또 갔다 왔습니다. 아마 지금은 끝났겠네. 구정 때 걔네 한 번 더 온다더라구여. 그때 제가 한번 모실게여.

삼촌: 치… 치약도 나왔다던데? 흐, 그나… 저나… 구정이네. 이… 이제… 여… 연말에 걔네 다시 오… 오나?

난형: 건 아직 모르겠네. 걱정 마쇼, 형님! 제가 정보통 한번 풀라니까. 근데 아마 오지 않겄나?
   
 
» 밥을 먹는 때는 노숙인 사이에 정보를 나누는 시간도 된다. 2008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에 서울역 앞에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3. 구걸의 공간-‘꼬지’는 필수가 아닌 선택

상당수 시민은 거리 노숙인의 구걸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일견 맞는 말일 수 있다. 필자가 노숙 생활 일주일을 갓 넘겼을 때쯤 동료 노숙인들은 구걸을 ‘해볼 것’을 종용했다. 
 

에이스형: 너도 이제 슬슬 꼬지(구걸하는 행동을 지칭함) 뛰어야지? 이 바닥에서 오래 살려면, 아! 아니지… 이 바닥에서 빨리 뜨고 싶어도 똑같애! (광장 쪽을 가리키며) 저기 한번 갔다 와! 어, 그래. (광장을 걸어가던 한 여성을 가리키며) 쟤로 하자. 가서 내가 말한 대로만 해. 앞에 가서 또 빌빌대지 말고. (필자가 구걸을 통해 1천원을 얻어 돌아오자 같이 있던 난형과 함께 박수를 치면서) 아 거 ×× 쓸 만하구만. 원래 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인마~ (2천원을 더 쥐어주며) 이거 보태서 물(술을 지칭하는 표현임) 좀 사와라.
 

요컨대 구걸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해보라는 것’은, 그들에게 구걸이 꼭 굶주린 배를 채우거나 반드시 필요한 생필품을 사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래는 동료 거리 노숙인들의 몇 번의 구걸 시범과 필자의 구걸 훈련이 한두 차례 더 이루어졌을 때쯤 ‘에이스형’이 필자에게 한 말이다. 
 

에이스형: 왜 이 짓(구걸)을 하냐고? 원래 여기서는 밥도 나누고 술도 나누고 다 나눠. 다 나누는데, 담배는 안 나눠 인마. 근데 너 여기서 담배 안 피우는 사람 봤냐? 못 봤지? 걔들은 다 어디서 난 거야 그럼? 둘 중 하나야, 걔네 다. 담배를 꼬지하든가 돈을 꼬지해서 담밸 사든가. 뭔 소린지 알겠어?
 

이처럼 ‘에이스형’에게 구걸은 담배와 같은 기호품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실제로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은 대부분 흡연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담배 보관용’ 담뱃갑을 소지하고 다닌다. 이른바 ‘꼬지’로 얻은 담배를 족족 갑 안에 채워넣기 위해서다. 담배가 남아 있든 그렇지 않든, 기회만 되면 꼬지를 통해 갑 안에 담배를 확보해둔다. ‘에이스형’이 말한 것처럼 대다수 거리 노숙인들이 담배를 나눠 피우는 데 인색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밥이나 술에 비해서는 냉정한 편이다. 결국 흡연을 지속하려면 담배를 얻거나 담배를 구입할 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담배든 돈이든) 꼬지를 할지언정, 일용직을 비롯한 직업을 갖는 데 굳이 미련을 두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담배나 커피, 혹은 술이라는 기호품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력시장을 통해 일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구걸’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거리 노숙인에게 구걸이란 ‘죽지 않기 위한 필연적 행동’이라기보다 ‘삶,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한 선택적 행동’이며,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먹고살기 위한’ 구걸이 아니라 ‘부수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구걸이 훨씬 많다
 

꼬지와 짤짤이, 구걸의 ‘감’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이 ‘구걸의 공간’으로 생산하는 장소는 유동인구가 많으면서 ‘감시와 규제’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 요컨대 ①서울역 광장과 ②육교다. 이 밖에도 ③‘짤짤이’(거리 노숙인의 은어로, 휴일 등을 이용해 주변 교회나 성당, 예식장, 각 자선단체 등을 돌며 구걸하는 행동) 공간이 ‘구걸의 공간’으로 존재하지만, 이는 그 범위가 매우 넓고 종류 또한 다양하다.

서울역 광장에서 10대로 추정되는 남성 무리에게 구걸을 시도했다 실패한 필자에게 ‘최형’과 ‘에이스형’은 이렇게 말했다.
 

최형: 인마야! 너 형이 뭐랬냐? 남자 학생놈들한테는 달려들지 말라고 내가 안 그랬냐?! 아, 이래서 꼬지도 짬밥대로 가라고 하는 거야. 뭣하러 뺀찌 먹고 기분 드~러워지냐? 그 ××들이 뭐 보태준 거 있다고.

에이스형: 너가 정 꼬지해야겠다 싶으면 그냥 아가씨한테 가 인마. 저기 좍~ 봐라! 널린 게 가시나들이구만. 왜 애먼 놈한테 갔다가 뺀찌나 먹냐 인마.
 

이처럼 서울역 거리 노숙인에게는 경험적으로 터득한 ‘감’이 있는데, 이는 ‘시간과 대상, 그리고 구걸할 내용에 따라 차별적으로 공략’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거리 노숙인들이 꼽는 구걸 대상 순위는 (구걸할 내용이 ‘돈’일 경우) 첫 번째가 20~30대 여성, 두 번째가 10대 여성이며, 세 번째는 20~30대 남성, 네 번째 40대 이상의 여성,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10대 남성이다. 그리고 담배를 ‘꼬지’할 경우의 구걸 순위는 첫 번째가 20~30대 남성, 두 번째가 40대 이상의 남성이며, 세 번째는 10대 남성이다. ‘시간’에 따라 차별화된 전략도 있다.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낮에는 ‘살랑살랑’하게, 밤에는 ‘딸랑딸랑’하게” 해야 한다. 즉 낮에는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소극적인 자세로, 그리고 정말 ‘구걸답게’ 꼬지를 시도한다면, 밤에는 좀더 뻔뻔하고 위압적인 자세로, 그리고 ‘강탈에 가까운’ 꼬지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낮에 구걸을 하는 거리 노숙인들 중에 굉장히 깔끔한 복장을 한 사람이 종종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말이 되면 인근 교회와 성당, 예식장 등은 전부 ‘구걸의 공간’으로 포섭된다. 이른바 ‘짤짤이 공간’이 추가되는 것이고, 공간에 따른 차별화 전략이 여기서 나타난다. 필자에게 ‘짤짤이’를 권유하며 ‘김간지’는 이렇게 말했다. 
 

김간지: 너도 여기랑 여기 좀 다듬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음, 이번주에 짤짤이 한번 같이 돌아볼래? 와 ×× 이거구나 할 거야 너. 요 옆에 쭈욱 나가면 ○○교회 있지? 그리고 저 건너편에서 ○○ 방향으로 고개 하나 넘어가면 ○○웨딩홀인가 뭐 그거 있지? 그런 데 가서 꼬지 치는 거야. 별거 없어. 특히 교회 같은 데는 은혜받겠다고 오는 ××× 같은 ×들이 많아서 여기서 하는 거랑은 게임이 안 돼, 게임이. 그냥 함 따라와바 인마. 그리고 내일쯤엔 박박 좀 씻고 와. 윗도리는 내가 빌려줄 테니까.  

거리 노숙인의 일부는 이와 같이 ‘짤짤이’를 즐겨한다. 그런 부류의 거리 노숙인들은 대체로 말끔하다. 실제로 ‘김간지’의 경우 다른 노숙인들과 달리 의복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대다수 거리 노숙인들이 ‘짐이 늘어나는 것이 싫어서’ 꼭 필요한 의복을 제외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짤짤이 공간’에서는 대체로 깔끔하고 정돈된 복장과 용모를 내세워 구걸에 임하는 전략이 사용되는데, ‘짤짤이 뛰려는’ 대상 공간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씩 바뀐다. 가령 교회에서는 (‘김간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어두운, 그리고 동시에 착실해 보이는 인상과 복장”으로, 예식장에서는 “당당하고 빠른 템포로” 구걸을 해야 한다. 물론 거리 노숙인들만의 경험적 ‘감’에 기초한 내용이다.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한편 ‘구걸의 공간’은 단순히 구걸의 장소일 뿐 아니라 ‘정체성 확립 및 자존감 고취의 공간’으로도 작동하는데, 이는 ‘시민’과의 만남, 그리고 ‘거지’와의 차별화를 통해 발현된다. 
 

이 선생님: (필자를 가리키며) 너, 꼬지가 쪽팔려? 그렇지? 쪽팔리지? 이거 안 한다고 굶어죽는 것도 아닌데 왜 해야 되나 싶지 않아? 간단해. 너 꼬지 말고 사람들이랑 자연스럽게 말 섞을 기회 있어? 없을걸? 넌 젊은 놈이 여기서 평생 살 것도 아니고 밖으로 나가야지 인마. 그러려면 꼬지라도 부지런히 해봐. 한푼두푼 벌어오라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랑 계속 만나야 되니까 그런 거야. 불쌍하게 돈 달라고 비는 게 아니야. 잠깐 빌리는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게 맞는 거야.

에이스형: 내가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뭔지 알아? ‘그지××’야 ‘그지××’! 너 내가 그지로 보여? 너나 나나 우리가 그지야? 아니잖아! 돈 없으면 다 그지야? 너 내가 저기 한복판에 엎드려서 돈 달라고 비는 거 봤어? 못 봤지? 바로 그게 내가 그지××들이랑 다른 점이야! 난 필요 없어, 돈! ××게 쪽팔리게 엎드려서 돈 달라고 그 ×× 같은 거 난 안 해! 그러는 ××들이 진짜 그지야, 그지. 요런 데서 산다고 다 그지가 아니라고. 우린 당당하게 허리 쫙 펴고 어깨 쫙 펴고 면상 똑바로 들고 그렇게 말하잖아! 안 준다는 놈 붙잡아놓고 사정해 우리가? 아니잖아 인마! 그리고 쟤네들(시민들을 가리킴)은 서로 담배도 안 빌려 펴? 다 하잖아! 우리도 똑같단 말이야! 가다가 담배도 좀 얻어 피고 그러는 거지. 있으면 좀 없는 사람 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렇다고 진짜 그지처럼 우리가 ‘담배 한 개만…’ 이러는 것도 아니고 ××. 너도 인마 어디 가서 쪽팔리게 굴지 마. 그지×× 취급받기 싫으면. 


요컨대 서울역 거리 노숙인은 ‘거지-노숙인-(주류 사회의) 시민’, 혹은 ‘거지-노숙인과 시민’이라는 계층성을 견지하고 있는데, 구걸을 통해 스스로를 ‘거지가 아닌 노숙인’, 혹은 ‘거지가 아닌 시민’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구걸’은 주류 사회와 엮일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며, 구걸 행위 자체를 하나의 ‘사회적 행위’로 봄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주류 사회와 다른 ‘이질적’ 집단이 아닌 주류 사회와 ‘어우러지는’ 집단으로 위치시킨다. 바로 ‘구걸의 공간’의 한 단면인 ‘정체성 확립 및 자존감 고취의 공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노숙인들은 대부분 거리에서 부유할지라도 시설에는 가지 않겠다고 한다. 2005년 10월24일 서울역 안에서 웅크리고 앉은 여성.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4.부유의 공간-그들의 시간은 ‘현재’만 있다

지금까지 세 가지 ‘차이의 공간’, 즉 ‘수면의 공간’ ‘취식의 공간’ ‘구걸의 공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잠을 자지도, 밥을 먹지도, 그렇다고 구걸을 하지도 않을 때,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부유(浮遊)의 공간’을 통해 이를 살펴보자. 아래는 필자가 노숙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식사를 한 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동료 거리 노숙인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이 각각 대답한 내용이다.
 

이 선생님: 뭘 하냐고? 뭐하고 싶은데? 뭐해야 될 거 같은데? 생각나는 거 있어? 어? 와서 어깨라도 주무를래? 어? 다 그래 여기 사람들. 여기가 회사야? 학교야? 여긴 우리 집이잖아. 이게 다 니 거야. 아무거나 하고 아무거나 생각하면 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고. 피해만 안 주면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널 쥐어팰 놈도 없어. 그럼 넌 뭘 할래? 뭐가 하고 싶어?

코트누나: 나라고 좋아서 이래? 돌아갈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찾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 별수 있어? 하루하루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는 거지. 그래도 시설엔 죽어도 안 가. 시설 가서 눌어붙지 말고 여기서 세월아~ 하면서 사는 게 나아. 적응되면 이거만한 것도 없으니까. 누가 뭐라고 하기를 해 아니면 매일매일 뼈 빠지게 일해야 하기를 해? 사람들 눈치? 그거 금방이야. 조금만 있어봐. 곧 그리 될 거야.
 

필자가 접한 거리 노숙인들의 공통점은 뚜렷하게 뭔가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장기적 비전을 토대로 진행되는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위한 행위들로 일상이 채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거리 노숙인의 시간축은 철저히 ‘현재’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즉 일반인들과 달리 ‘과거’와 ‘미래’가 없는 것인데, 있더라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거리 노숙인에게 ‘과거를 거울 삼아, 그리고 미래를 대비하며’라는 개념 따위는, 현재를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구호일 뿐이다. 
 

실망을 최소화하기 위한 시간 개념

그들의 시간 개념이 이처럼 조정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실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며, 또 다른 하나는 ‘노마드(nomad)적 삶 자체를 즐기게 됐기 때문’이다. 아래의 진술은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 이유를 각각 잘 보여준다.
 

난형: 난 여기 있는 다른 애들처럼 몇 년씩 이 바닥에서 굴러본 것도 아니고 딱 1년 됐어, 딱 1년. 처음에? 너랑 똑같았지 ××야. 나도 악착같이 모아서 여기 빨리 뜨려 했고 실제로 일도 ×나게 열심히 했고. 근데 지금 왜 이래 내가? 여기가 다 그래. 쎄가 빠~지게 노력해도 앞이 안 보여 앞이. 그게 처음엔 모질게 이 악물고 버텨도 점점 희망이 없어져. 그럼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너 그거 알지? 사형수랑 무기징역수랑 누가 더 미쳐버릴 거 같은지? 당연히 무기징역수란 말이지! 사형수는 죽으면 땡이야. 근데 무기징역수는? 걔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야. 왜냐? 희망이 있거든! 혹시나 하는 그런 거! 그게 사람 피 말리는 거야. 여기도 똑같애.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언젠간… 언젠간… 계속 이러는 거야. 그런데 현실은? ×도 없다 이거지~. 그럼 어떡해? 별수 있나. 희망을 버리는 거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담주 걱정은 담주에!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이 ××로 사는 거야. 내 필에 충~실하게! 오케이?

최형: 난 여기가 좋아. 솔직히 니가 믿을랑가 모르겠는데, 내가 길바닥 1년차 때까지 모은 돈에서 좀만 더했으면 난 여기 진~작에 떴어. 근데 그때쯤이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여기 나가면… 그래… 나가면 뭐? 나가서 그래도 대학 물 좀 먹은 놈이라고 뻐기면서 ×라게 일하고, 가족이랑 같이 아등바등 살고. 뭐 뻔한 거 있잖아. 근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내가 도대체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지? 아 니가 생각을 해봐. 군대 빼고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가 어딨어? 안 그래? 너도 이제 슬슬 여기 생활 적응되지 않아? 내가 알려준 대로만 하면 여기만큼 편한 데가 없어.
 

대부분의 서울역 거리 노숙인들은 ‘난형’ 혹은 ‘최형’의 마인드로 생활한다. 한편 ‘부유의 공간’은 ①유대 형성의 공간, 그리고 ②존재를 드러내는 공간(혹은 은폐의 공간)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먼저 유대 형성의 측면을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수면의 공간’과 ‘취식의 공간’이 각각 ‘감성적’ ‘사회적’ 유대 형성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면, ‘부유의 공간’은 ‘그룹 (재)형성’을 위한 유대 형성이 발생하는 장소다. 즉 ‘감성적’ ‘사회적’ 유대 형성이 가능하려면 우선 기본적 친밀감 형성이 전제돼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유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령 ‘최형’과 ‘난형’은 2월 중순까지만 해도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서울역 광장과 굴다리에서 술을 마시던 중 마찰이 일어나면서 3월에는 다른 그룹으로 각각 갈라섰으며, 반대로 ‘에이스형’과 ‘김간지’는 잘 모르는 사이였으나 ‘부유의 공간’에서 접촉하고 소통하면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으면서 은폐하는 사람들

‘부유의 공간’은 ‘존재를 드러내는 공간’(혹은 은폐의 공간)으로도 작동한다. 서울역에는 노숙인 관련 단체나 언론인이 종종 방문하는데, 다음은 거리 노숙인에 대한 르포 기사를 쓰기 위해 한 기자가 찾아온 날 ‘이 선생님’이 한 말이다.
 

이 선생님: 난 항상 기자들을 보면 반갑게 맞아줘. 그래야 기사를 잘 써주거든. 근데 보면 내가 뭐라 씨부리든 지넨 지네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겠다 이거야. 그래도 기자들 오면 나 또 잘해줘. 내가 세상과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리고 난 우리들이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으니까. 좀 제대로 말이야. 그래야 마냥 불쌍한 놈 적선해주듯 우리를 안 볼 거 아니냐. 


서울역 노숙 공간 중 지하도와 육교는 (서울역 광장 등에 비해) 폭이 좁다. 이는 일반 시민들이 서울역 광장이나 역사 내부를 통과할 때 거리 노숙인을 마주치는 경우와, 지하도나 육교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거리 노숙인을 마주치는 경우가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즉 심리적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인데, 거리 노숙인들이 지하도나 육교에서 ‘부유’할 때는 주로 길의 양옆 쪽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시민들은 양옆에 늘어서 있는 거리 노숙인들 사이를 지나쳐야만 지하도를, 그리고 육교를 건널 수 있는 것인데, 이때 시민이 느끼는 공포감이나 불쾌감은 넓은 공간에서 거리 노숙인을 마주쳤을 때에 비해 훨씬 크고 강하다. 다시 말해 노숙인들이 전혀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른 공간에서와 똑같은 행동과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게 그곳은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공간이 된다는 뜻이다. 요컨대 ‘부유의 공간’에 거리 노숙인이 단지 ‘존재’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곳은 시민들에게 ‘공포의 공간’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결국 거리 노숙인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은폐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서울역 거리 노숙인이 생산해내는 네 가지 ‘차이의 공간’에 대해 간략히 살펴봤다. 이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바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첫째, 거리 노숙인들은 주류 사회의 입맛에 맞게 형성된 공공 공간을, 일상의 소소한 실천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 전유하고 있다. 둘째,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용함으로써 생산되는 ‘차이의 공간’은, 생존 차원의 ‘욕구’뿐 아니라 욕구 이상의 감성적 차원이 결합된 ‘욕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기로 만들어지며, 일반 시민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도구’(시공간 리듬이나 지식, 혹은 그들만의 차별화된 시간 개념 등)가 여기에 사용되고 있다. 셋째, ‘차이의 공간’을 통해 거리 노숙인을 바라본 결과, 그들에 대한 주류 사회의 시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거리 노숙인은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을 한다”는 식의 기존 입장에 대해 필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노숙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기를

물론 이런 주장들을 일반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모든 거리 노숙인이 일률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리 노숙인을, 그리고 그들의 삶과 문화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관찰한 필자의 시도를 통해, 그들에 대한 기존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환기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글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이 글을 접하는 누군가가 거리 노숙인을 바라볼 때, 그저 ‘무능력하고 의지가 결여된 존재’나 관심과 동정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으로만 여기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한 번씩 숙고해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준호 경희대 지리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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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 일주일에 한번씩 연재되는 중동고 철학교사 안광복씨의 글이다. 재미나게 보고 있다. 음식과 관련된 글이기에 스크랩한다. 예전에 '무한도전'이라고 하는 프로에서 뉴욕의 한 식당에 팔 한식 메뉴를 개발하고 직접 판매하는 코너가 나온적이 있다.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왜 우리들은 우리 고유의 음식인 '한식'을 해외 그것도 유럽, 미국, 일본에 알리려 할까? 아니 '알리려'는게 아니라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닐까? 꼭 그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한식'은 우리의 전통이기 이전에 우리의 '생존'이며 그냥 그 자체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지 인위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때가 되면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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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 10.11  한식의 세계화는 '어불성설'

4. 차폰, 잔폰, 짬뽕 - 우리는 왜 배추김치를 포기 못할까? 



고추는 유럽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 유럽인들은 고추를 ‘빨간 후추’(red pepper)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추는 후추에 비해 너무 매웠다. 게다가 고운 가루로 만들기도 마뜩잖았다. 일본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달달한 맛에 익숙한 그들에게 고추는 ‘머리가 벗겨지게 하는 맛’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마늘과 산초(山椒)는 이미 우리 음식에 널리 쓰이고 있었다. 산초는 비쌀뿐더러 손질하기도 만만찮다. 반면, 고추는 잔뜩 열리는데다가 기르기도 쉬웠다. 고추는 빠르게 산초를 대신해 갔다.

장인용이 쓴 <식전>(食傳)에 따르면, 고추가 인기를 끈 데는 김장김치도 큰 몫을 했다. 김치는 채소를 소금에 절인 음식이다. 그런데 소금을 많이 치면 김치 맛이 써진다. 그래서 조상들은 김치에 젓갈을 넣었다. 하지만 젓갈의 비린내는 어떻게 할까? 고추는 이 물음에 답이 되었다. 맵고도 달콤한 고추는 젓갈의 비릿함을 채소와 잘 어우러지게 했다.

요새 김치는 일본에서도 인기다. 한번 굳어진 입맛은 언어와도 같다. 그만큼 바뀌기 어렵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서 김치는 일본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인류학자 주영하 교수는 그 이유를 ‘매운맛’에서 찾는다. 일본인들이라고 매운맛을 피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와사비는 김치의 고추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와사비 덕택에 생선 비린내가 가시지 않던가. 일본 우동집에는 고춧가루같이 생긴 ‘시치미가라시’(七味唐辛子) 통이 놓여있다. 고추, 후추, 산초, 겨자, 채종, 마(麻) 열매, 진피, 7가지 재료로 만든 조미료다. 시치미가라시의 맛은 고춧가루만큼이나 맵고 강하다.

일본에서 ‘김치 붐’은 매운맛 인기와 함께 왔다. 김치는 매운 음식의 하나로 일본에 소개되었다. 반대로, 매워진 일본 음식은 우리 음식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김치의 캅사이신은 매우면서도 달고 시원한 맛을 낸다. 반면, ‘불닭’ 같은 음식의 매운맛은 고통스러울 만큼 얼얼하다. 일본에서 요리를 배운 이들은 미국에서 건너온 핫소스를 음식에 넣는 법을 익혔다. 우리 길거리 음식에는 이제 핫소스가 고추장만큼이나 익숙해졌다. 국제화된 입맛은 고추보다 매운 칠리 고추에도 거침없어졌다. 이처럼 음식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바뀌어 간다.

입맛이 바뀌는 데는 식재료 사정도 큰 구실을 한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식생활개선운동’을 벌였다. 쌀이 부족한 상황, 사람들이 외국에서 들여오는 밀가루를 좋아해야 식량걱정이 줄어들 테다. 정부는 국수나 빵 같은 밀가루 음식 요리법을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서민 음식은 싸고 흔한 식재료를 따라 흘러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밀가루 음식에 익숙해진 까닭은 여기에도 있다.

그럼에도 음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입는 옷과 사는 집은 서양식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럼에도 우리의 밥상에는 여전히 밥과 김치가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음식은 자존심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김치보다 기무치가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플 이유도 없을 테다.

사실, 문화를 대표하는 음식도 실은 역사가 길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본의 스시는 불과 100여 년 전에 생겨났다. 스시는 에도(도쿄)에서 즉석에서 만들어 팔던 ‘패스트푸드’였다. 중국 옌지(연길)에는 ‘개고기거리’가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의 대표음식으로 개고기 탕과 찰떡, 김치와 냉면을 꼽는단다. 그러나 옌지에서 개고기거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북적이기 시작했다. 개고기가 여행상품인 ‘소수민족음식’으로 알려진 탓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평양냉면, 개성보쌈, 전주비빔밥 등은 언제부터 유명했을까? 평양, 개성, 전주 등 알려진 음식이 있는 곳은 1910년대에 이미 도시의 모습을 갖춘 곳들이다. 조선시대부터 관청이 들어서서 상가가 일찍부터 발달하기도 했다. 식당이 자리 잡기에 좋은 조건이다. 이처럼, 집에서 먹던 음식보다는 식당의 먹거리가 고향의 대표음식으로 뿌리를 내린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보면 음식이 문화상품으로 바뀌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식의 세계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입맛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제각각이다. 한국 음식이 세계적인 상품이 되려면 당연히 현지인의 입맛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중국의 ‘차폰’은 일본으로 건너가 ‘잔폰’이 되었다. 우리에게 와서는 고추기름이 들어간 ‘짬뽕’으로 바뀌었다.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바뀐 기무치도 김치와는 다른 맛을 낸다. 그렇다면 한식의 세계화를 외쳐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차피 세월이 흐르면 우리가 전해준 음식도 그곳의 ‘고유한’ 먹거리로 바뀌어 버릴 테다.

우리에게 쌀은 이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너무 많이 남아돌아서 동물사료로 쓰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반면, 우리의 식량 자급률은 형편없이 낮다. 사람들이 밥 대신 밀가루 음식을 더 좋아하게 된 탓이다. 전통적인 한국의 밥상은 우리에게서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식의 세계화는 과연 무엇을 뜻할까? 세계인의 입맛에 맞춘 한식은 도리어 우리 식탁의 국적(國籍)을 없애 버리지 않을까?

배추 값이 삼겹살보다 비싼 요즘이다. 그럼에도 배추김치를 포기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만큼 김치는 우리 삶에서 뗄 수 없는 일부분이다. 정말 소중한 것은 어려울 때 더 절실해진다. ‘돈이 되는 아이템’으로 한식의 세계화를 고민하기에 앞서, 음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다잡는 일부터 먼저 고민해야 할 때다.

배추파동은?

2010년, 많은 비 등 이상기온으로 작황이 나빠지자 채소 가격이 크게 올랐다. 배추와 상추 가격이 삼겹살보다 비싸지는 모습까지 나타났다. 중간상인이 폭리를 취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양배추로 김치를 담그자는 청와대의 해프닝에 이르기까지, 배추를 둘러싼 소동이 계속되고 있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http://news.nate.com/view/20101011n0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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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Ormandy 지휘, Philadelphia Orchestra 1972년에 녹음된 앨범의 표지이다. 고클에 찾아보니 CD 정보는 BMG-JAPAN (BVCC38054)이다. 시중에서 고가의 Blu-spec CD로 온라인에서 본 듯 한데, 정말 표지때문에 가지고 싶은 앨범이다. 그나마 지금은 품절이다. 물론 오먼디와 필라델피아 커플의 이 음반도 좋은 연주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표지가 더 매력적이다. 

정말 싸한 여주인공의 멜랑콜리한 웃음기. 알듯 말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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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큐 영화에 관한 소개 글을 보는 순간 봐야 겠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머리속을 메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하고 있었을까? 정부는 뭐하고 있었을까? 왜 항상 이렇게 외부에서 먼저 우리 내부의 것들을 먼저 끄집어 내도록 내버려 둘까? 창피한 일이다. 하긴 창피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이제 더이상 창피함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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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장단에 푹 빠진 외국인, 우리 가락을 영상에 담다 

다큐멘터리 영화 < 땡큐, 마스터 킴 > 은 우리를 자랑스럽게도, 그리고 부끄럽게도 만드는 영화다. 외국의 유명 재즈 뮤지션에게 깊은 음악적 영감을 준 사람이 우리 전통 무속인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그러나 그 무속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우리 손이 아니라 남의 손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영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상반된 감정이 더욱 복잡하게 뒤엉킨다. 우리 전통음악을 이토록 깊이 읽어주다니, 이렇게 잘 정리해서 보여주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러 번 놀라게 된다. 그러나 이런 영화의 후반부 제작비를 일본 NHK에서 후원했다는 사실과, 해외 유명 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국내 영화제에서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시사IN 조남진 사이먼 바커(왼쪽)와 엠마 프란츠(오른쪽)는 '탱큐, 미스터 킴'으로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재즈 드러머로 꼽히는 사이먼 바커는 2005년까지 7년 동안 열일곱 번이나 한국을 찾았다. 주로 공연을 위해서 왔지만,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틈을 내 동해안 별신굿 명인인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김석출 명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의 공연 실황을 담은 CD를 듣고 완전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소원은 한 번만이라도 김 명인을 직접 만나는 것이었다. 김 명인은 장고 솜씨가 일품이었다. 즉흥 음악의 대가여서 김명곤 전 장관은 '신이 내린 명인'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김석출 명인을 찾는 이유를 귀담아들은 음악 친구 엠마 프란츠는 이를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기로 결심했다. 17년 동안 재즈 가수로 활동하며 33개국에서 공연했던 그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목마른 재즈 음악가가 80세가 넘은 한국의 무당을 만나면 무엇인가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그녀의 감독 데뷔작이다.

의기투합한 두 오스트레일리아 재즈 뮤지션은 다시 한국을 다섯 번 더 방문했다. 그렇게 스물두 번의 방문 끝에 어렵게 김석출 선생을 만날 수 있었고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어렵사리 후반 작업을 마치고 김 명인에 대한 오마주 영화 < 땡큐, 마스터 킴 > (원제 '무형문화재 제82호(Intangible Asset No.82)을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영전에 바쳤다.

번번이 실패하던 이들이 김 명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원광디지털대학교 김동원 교수(전통공연예술학과)가 길잡이로 나서준 덕이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15년 동안이나 활동했던 그는 "스승의 구실은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자신을 딛고 더 멀리 더 깊이 갈 수 있게 받쳐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첼리스트 요요마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의 멤버이기도 한 그는 바커와 김 명인의 다리가 되어주었다.

오랜 병환으로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김석출 명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었다. 김 교수는 김 명인이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에둘러가며 우리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감독은 한국의 유명 국악인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현장의 생생한 소리를 들어보라며 지리산 오지로 그들을 안내했다.

낫으로 길을 낸 진창길을 헤치며 올라가 만난 사람은 배일동 명창이었다. 지리산 폭포 아래 오두막을 짓고 하루 16시간씩 소리를 가다듬던 그는 7년째 독공 중이었다. 멀리서 온 손님들을 옹색한 바위 위에 앉혀두고 소리를 들려주었다. 바커는 그의 둔탁하지만 애절한, 강렬한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오고무의 달인 등에게 음악적 깨달음 얻어

장구의 대가 고 박병천 명인(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과 오고무의 달인 진유림 명인도 동해로 가는 여정에 만났다. "정신병자를 고치려면 자기도 정신병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박병천 명인에게서는 우리 음악의 혼을, 장단과 호흡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라는 진유림 명인에게서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끌어올리는 우리 음악의 기를 읽었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바커는 깊은 음악적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힘을 빼는 법을 배웠다.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힘을 주고 내지르는 것만이 아니라 힘을 빼고 억제하는 것으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탱큐, 미스터킴 동해안 별신굿 기능보유자였던 김석출 선생은 세상을 뜨기 사흘 전 사이먼 바커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주고 가르침을 주었다. 
 
이 음악 여행의 마지막, 사이먼 바커는 드디어 김석출 명인을 만난다. 김 명인의 병치레를 위한 굿판이 열리는 자리였다. 한바탕 굿판이 벌어진 후 사이먼 바커는 조심스럽게 김 명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든넷, 노구에도 불구하고 김 명인은 또랑또랑하게 자신의 음악관을 벽안의 제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사흘 뒤 눈을 감았다. 불과 하루 동안의 가르침이었지만 바커는 김석출의 마지막 제자였다.

< 땡큐, 마스터 킴 > 을 보는 동안 관객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김석출과 그의 음악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 음악의 넓이와 깊이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이먼 바커의 팬들은 변화된 그의 음악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전보다 음악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팬들이 먼저 알아챘다. 내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즈와 굿의 만남이 거둔 음악적 성과를 인정받은 곳은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스였다. 엠마 프란츠는 "사이먼의 뉴올리언스 공연에서 '새롭다'는 음악적 평가를 얻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즉흥성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 재즈 뮤지션들이 주목했다"라고 말했다. 바커는 김동원 교수·배일동 명창과 함께 크로스오버 재즈 밴드 '다오름'을 조직해 '김석출을 위하여' 등의 곡을 발표했다.

NHK가 후반 작업 지원하고 판권 확보

생전에 무속음악을 한다 하여 괄시받았던 김석출 명인처럼 무속음악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 역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기를 원했지만 영화제 측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소개했다. 오히려 해외에서 호평받았다. 2009년 더반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사이먼 바커와 엠마 프란츠는 이 영화 제작을 위해 그동안 공연해 번 돈의 거의 전부인 4억원을 투자했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손을 벌렸지만 제작비가 부족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우연히 영화제에서 일본 NHK 관계자를 만났다. 그 관계자는 30년 전 김석출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사람이다. 그는 NHK가 후반 작업 비용을 댈 수 있게 주선해주었다.

이 영화의 전 세계 배급권은 NHK가 가지고 있다. 프란츠는 NHK 측에 한국만은 따로 판권을 확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 이를 국내 독립영화 배급사인 인디플러그에 넘겼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 땡큐, 마스터 킴 > 은 한국에서 프리미어 개봉을 할 수 있었다. 바커가 김석출 선생을 만나는 과정만큼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도 험난했다.

시사INLive |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 입력 201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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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의 경박성'이라. 가벼움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행동이 아닌 말만 앞서는 이 부류 사람(나도 나름 이 부류라 생각하지만)들의 특성이라고 해야하나. 나름 진보라 하는 이들이 나름 반성해 봄직한 내용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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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0.11  진보의 경박성에 관해

자본력이 약한 신문은 이른바 진보세력에게도 만만한 동네북인가, 얼마 전에는 해학과 풍자를 담는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난에 쓰인 ‘놈현 관장사’라는 표현에 반발하여 국민참여당 유시민씨가 ‘한겨레 절독’을 말하더니, 최근에는 북한의 3대 세습 문제에 관한 민주노동당의 입장을 비판한 신문 사설을 문제삼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 절독’을 선언하고 나섰다.
경기도 수원의 한 독자가 지적한 대로 한국의 신문은 보수신문과 진보신문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몰상식한 신문’과 ‘상식적인 신문’으로 나뉘는데, 흥미로운 일은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의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종종 듣는 데 반해 스스로 보수라고 말하는 사람의 ‘조중동’을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적용될 듯싶지만, 나는 그보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의식이 성찰과 회의, 고민 어린 토론 과정을 통해 성숙하거나 단련되지 않고 기존에 주입 형성된 의식을 뒤집으면 가질 수 있는 데서 오는 경박성, 또는 섬세함을 통한 품격의 상실에 방점을 찍는다.

신문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용히 끊으면 그만일 터인데 소문내거나 선언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이런 경박성에는 진보를 택한 자신에 대한 반대급부 요구도 담겨 있다. 경향이나 한겨레가 자기들 요구에 반드시 부응해야 한다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관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세계는 일단 지극히 부정적으로 형성되는데, 그중 일부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독서나 특별한 경험을 통해 그때까지 형성한 의식을 뒤집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성찰과 회의, 고민이 생략됨으로써 ‘극도의 부정’이 ‘극도의 긍정’을 낳고 ‘모 아니면 도’ 식의 시각만 남아 섬세함이나 균형감각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북한 내정에 간섭하는 것과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게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섬세함까지 필요하지 않음에도 삼대 세습을 비판하면 내정간섭이며 반북이 되므로 남은 선택지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의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심지어 “진정한 진보는 용납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까지 포용할 수 있는 톨레랑스를 가져야 한다”(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박경순 부소장의 말)는 궤변까지 나온다. 톨레랑스는 차이를 용인하라는 것이지 용납할 수 없는 것을 포용하라는 게 아니다.

북한 관련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에겐 고정관념처럼 떠오르는 말이 있다. 프랑스 파리 15구에서 만난 한 식당 주인의 “고픈 배는 나중에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모든 것은 나중에 채울 수 있지만 지금 주린 배는 나중에 채울 수 없다. 그럼에도 사르트르가 강조한 ‘지금 여기’에 관심이 더 큰 나는 북한의 3대 세습에 비판적이면서도 북한에 쌀을 보내지 않는 이명박 정권에 더 비판적이며, “권력이 (선출되지 않는) 시장에 넘어간” 한국 사회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의 세습 문제와 독재자의 딸 박근혜씨가 가장 강력한 차기 대선후보라는 점을 되돌아보자고 주문한다.

그러나 통일과업을 지상명제로 주장하고 그것을 진보의 자격조건인 양 강조하는 세력이 북한의 세습체제가 앞으로 굳어질 때 통일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자기부정이 아닌지 묻고 싶다. 북한 세습체제는 우리의 통일 여정에서 분명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리영희 선생도 지적했듯이 통일은 남북 양 체제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북한의 세습체제를 그대로 둔 채 그리는 통일의 상은 어떤 것인가. 이 간단한 질문에도 ‘말하지 않는 게’ 민주노동당과 당대표의 ‘판단이며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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