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도 나름 조금씩 그리고 비논리적이고 문제적이긴 하지만 글을 쓰려 노력한다. 책을 읽은 느낌을 밖에서 보는 여러가지 현상들을, 느낌을 그리고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 아들과의 일들에 대해 쓰려 노력하고 있다.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생각은 많지만 왜 그 생각들이 글로는 잘 써지질 않는걸까하는 의문과 이제까지 나이 먹으면서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하는 자괴심이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라는 말처럼, 나도 이제는 조금 더 정교해졌으면 한다. 정교해졌으면 그때는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으면 한다. 최소한 내 아들이 철이 들기 전까지 그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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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2.6  여기가 로두스다⑶ : 글쓰기

만약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는 말이 맞다면, 우리네 학교는 왜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서와 토론뿐만 아니라 글쓰기를 거의 하지 않는 곳이 우리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을 풍요롭게도, 정교하게도 형성하지 않는다면, 학교는 왜 존재할까? 대학이나 기업이 요구하는 ‘학생 줄세우기’를 위해서인가?  

얼마 전 모든 학생들에게 신분 석차를 매기는 수능시험이 지났는데, 초등학교부터 12년 동안 정규교육을 받은 고3 학생들 중 대학이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를 스스로 쓰는 학생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우리 학교의 참담한 실상이다. 다른 글도 아닌 자기소개서를 말이다. 이 엽기적인 현실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육부 관료들이나 학교 관리자들, 교사들 또한 엽기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을 자기 언어조차 갖지 못한, 도무지 자기 생각이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는 이 ‘경쟁의 아수라’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잘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라, 우리는 사람과 사회에 관해 공부한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주체적 자아로 살기 위해서다. 마치 “고래는 포유동물이다”라는 명제로부터 고래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고래와 포유동물에 관해 공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우리가 국어를 비롯해 역사, 지리, 사회, 경제, 윤리, 철학 등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자명한데, 그런 공부의 일상에서 필수적인 게 글쓰기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은 정답을 요구하는 정밀과학이 아니라, 사고력, 논리력, 인식능력과 감수성을 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 글쓰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곧 인문사회과학 공부가 사라졌다는 것에서 멀지 않다.

글쓰기는 각자가 자기 생각을 정리·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주체성과 다양성의 토대가 된다면, 주입식 암기는 학생 모두에게 같은 내용을 주입·숙지하도록 하는 과정으로서 기존 질서와 체제에 대한 자발적 복종과 획일성을 낳는다. 우리 사회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소수의 사람들이 학교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배를 통해 그런 계기를 갖는 것도, 글쓰기가 사라진 것으로 알 수 있는, 학교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죽인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군국주의 일제 치하의 제도교육이 지배세력이 강제한 이념과 의식을 주입·암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민주공화국의 공교육에서는 글쓰기를 살렸어야 마땅했으나 일제 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위에 대학 서열화에 학문을 적응시키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 글쓰기는 자기표현의 한 방식으로서 사회적 존재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질 수 있는 본원적 욕구의 하나다. 그런데 대부분은 ‘나중에’ 쓴다고 말한다. 그 나중은 끝까지 나중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나중에 쓴다고 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쓸 일이다. 또 글을 최종적으로 나오게 하는 신체부위가 엉덩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우리 학생들이 글쓰기에 공포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주장·견해)을 써야 함에도 정답을 찾으려 애쓰기 때문이며(없는 정답을 찾으려 하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글쓰기 훈련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그것은 주체적 자아 형성에서 빠질 수 없는 과정이다. 이른바 국격을 높이고 싶은가. 그 길은 먼 데 있지 않다. 모든 학교에서 암기 대신 글쓰기를 허하라. 국격을 넘어 문화사회로의 발돋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리영희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사상의 은사로 불리는 선생은 나에겐 감히 덧붙인다면 루쉰, 사르트르와 함께 글쓰기의 스승이었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ps : 내가 또는 사람들이 항상 마음속으로라도 '글쓰기'에 대한 욕구를 갖는 것이 "사회적 존재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질 수 있는 본원적 욕구의 하나"라고 하는 글에서 나의 욕구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ps : 퍼뜩 생각나는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이다. 집에 있는 책도 있으니 기회되면 찬찬히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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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에 읽은 숲의 서사시를 생각나게 하는 내용이다. 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단순한 나무심기만은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전지구적인 여러 운동을 진행하는 이들이 명심해야할 점 한가지, 비정부기구 같은 외부단체도 중요하고 자본금도 중요하지만, 그 지역에 터를 박고 있는 지역민이 중요해야 한다는 점이다. 

 

곡물과 나무의 ‘상생’ 배고픈 아프리카의 희망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4호] 2010년 09월 03일 (금)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하루가 또 지나가고, 부르키나파소에 석양이 내려앉는다. 이곳 야쿠바 사와도고의 농장에서는 훨씬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수염이 희끗희끗한 농부 사와도고는 자신의 나무와 밭을 살펴본다. 그에게서 나이보다 훨씬 젊은 사람의 여유가 느껴진다. 사와도고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지만, 농업 분야에 임업을 접목시킨 산림농업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선구자이다. 최근 몇 년간 서부 사헬 지대를 변모시킨 이 새로운 농업 기술은 빈곤 인구가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방식 가운데 가장 유망한 사례로 꼽힌다.

사와도고는 뿔닭 20여 마리를 가둔 울타리에 그늘을 드리우는 아카시아와 대추나무 부근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 지역에서는 제법 규모가 큰 20ha의 농장은, 대부분 몇 세대 전부터 사와도고 집안이 소유한 땅이다. 1972~1984년의 극심한 가뭄 이후, 사와도고 일가는 이 땅을 포기했다. 연평균 강수량이 20% 감소하면서 사헬 지대의 식량 생산이 급격히 줄었고, 드넓은 대초원 지대는 사막으로 변모했으며, 기근으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퇴비에서 싹튼 나무가 축복이 되다

사와도고는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사고의 변화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는 몇 세기 전부터 현지 농민이 사용해오던 ‘자이’라는 기술을 부활시켰다. 별로 깊지 않은 구멍을 파서 드문드문 오는 비를 작물 뿌리에 집중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는 물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자이의 크기를 더 늘렸다. 하지만 사와도고의 방식에서 획기적인 부분은 건기 동안 여기에 퇴비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쓸데없는 낭비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자이 구멍 속으로 물과 양분을 집중시키자 사와도고의 작물 수확량이 늘어났다. 예기치 못한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퇴비에 섞여 있던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와 수수의 밭고랑에서는 나무의 싹이 올라왔고, 몇 차례 발아기가 지나자 몇 피트는 족히 되는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면서 작물 수확량을 늘렸다. 사와도고는 “황폐화된 땅을 소생시키는 이 기술을 적용한 이후, 우리 가족은 기후가 좋은 해나 안 좋은 해나 식량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사와도고가 개발한 산림농업 기술은 이미 부르키나파소뿐 아니라 주변국인 니제르, 말리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어 수십만ha의 준사막 지대를 비옥한 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지역에서 30년간 연구하고 있는 네덜란드 지리학자 크리스 레이 박사는 “사헬 지대, 그리고 아프리카 전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생태학적 이변”이라고 설명한다.

나무가 주는 수확 증대와 많은 혜택

이것은 기술적 용어로 ‘인공 천연 갱신’(Assisted Natural Regeneration)이라 부르는 방식이다. 나무를 작물 재배에 도입해 생기는 이점은 여러 학술 연구에서도 확인되었다. 나무는 바람으로부터 어린 새싹을 보호하고 토양의 수분을 지속시키며, 나무의 그늘은 뜨거운 태양 열기로부터 작물을 지켜준다. 낙엽은 땅 표면을 덮는 짚의 역할을 하여 토양의 비옥도를 높여주고, 가축 사료로 사용된다. 기근 때는 일부 나뭇잎이 식량으로 쓰일 수도 있다.
인공 천연 갱신 방식의 예찬자인 레이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에는 농부들이 네댓 번이고 밭에 씨를 뿌려야 했다. 씨앗이 바람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가 바람막이 역할을 해 이제는 한 번만 씨를 뿌려도 된다.”

자이 기법을 비롯한 용수를 모으는 기법들은 지하수층을 되살리는 데도 기여했다. 레이 박사는 “1980년대에는 지하수층이 연간 약 1m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인공 천연 갱신 기술과 다른 용수 확보 기법이 도입된 이후 인구가 늘었는데도 지하수층이 5m 더 깊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17m까지 늘어났다. 니제르에서도 유사한 효과가 나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와도고는 나무에 더 많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의 농장은 이제 경작지라기보다는 숲에 가깝다. “나무가 더 좋아졌다. 다른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나무가 많으면 많을수록, 수입은 더 늘어난다.” 나무는 가지를 다듬어 내다파는 등 또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토양에 이로운 작용을 하여 새로운 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조성함은 말할 것도 없다. 사와도고는 산림의 비중을 높이면서 나무를 땔감이나 건축 자재를 비롯한 다양한 용도로 내다팔 수 있었다. 전통 약재로도 활용된다. 현대적 치료법이 드물고 값도 비싼 지역에서는 무시 못할 이점이다.

이 지역 농민이 나무를 심는 건 노벨상 수상자이자 활동가인 왕가리 마타이가 케냐에서 그린벨트 운동을 벌이며 주창한 방식과 다르다. 마타이의 방식은 훨씬 돈이 많이 들고 위험도 크다. 이곳 농부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자생적으로 올라오는 싹을 관리하고 보호해주는 것뿐이다. 서부 사헬 지대와 관련한 연구에서는 심은 나무의 80%가 1~2년 후 죽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생적으로 올라온 나무는 그 지역 고유종이어서 생명력이 강하다. 돈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말리의 농경지 곳곳에서도 나무들이 자란다. 소쿠라의 가난한 농가에서,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뱃가죽이 늘어져 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생활이 점차 나아지고 있으며 상당 부분은 나무 덕분이라고 한다.

6ha의 땅을 보유한 우마르 갱도는 조와 수수를 재배한다. 10년 전, 그는 영국과 말리가 산림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만든 조직 ‘사헬 에코’(Sahel Eco)에 조언을 구했다. 오늘날 그의 땅에는 거의 5m 간격으로 나무가 심어져 있고, 물도 더 많아졌다. 그는 자신의 장방형 곳간을 보여주었다. 창고마다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다음 수확기 혹은 그 이상까지 식량이 확보된 상황이다. 한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대부분 곳간이 한 집에 하나씩밖에 없었다. 땅이 늘어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곳간을 서너 개씩 갖고 있다. 가축도 더 많아졌다.”

말리의 엥데 지역에 사는 농부 살리프 갱도는 ‘바라호곤’이라 부르던 예전의 농민 단체를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시켰는지 이야기해준다. 이 단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수목 관리를 독려해왔다. 그러다 식민지 시절(1898~1960) 프랑스 식민 정부가 모든 수목 자원을 국가 소유로 하고, 벌목업자들에게 채벌권을 매각했다. 이 규정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어, 가지치기를 하거나 벌목을 하는 농민은 처벌받았다. 게다가 차후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농민들은 싹을 뿌리째 뽑아버렸고, 이런 행태가 지속되자 토양은 더  척박해졌다.

1990년대 초, 산림요원들의 고약한 행태에 화가 난 농민들이 이들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자, 말리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농민이 자기 땅에 있는 나무의 소유권을 갖게 하는 법을 표결에 부쳤다. 농민들은 ‘사헬 에코’가 홍보운동을 벌인 다음에야 이런 법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후 인공 천연 갱신 농법이 빠르게 확산된다. 인공 천연 갱신 기법을 옹호하는 호주의 농학자 토니 리나우도는 니제르에서 이런 방법이 실질적으로 적용된 건 정부가 벌목 금지 규제를 풀어준 뒤라고 말했다. 나무가 자라게 하려면 농민이 벌목할 권리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공 천연 갱신 방식은 서부 사헬 지대 전체로 퍼지고 있다.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성과를 확인함에 따라 농민에게서 농민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자연스레 확산된 것이다. 산림농업 덕분에 이제는 미국 지질조사소가 분석한 위성사진에서 니제르와 나이지리아의 경계 구분이 가능해졌다. 대대적인 나무심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나이지리아는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가 토양이 거의 헐벗은 상태가 돼버렸다.

2억 그루의 나무, 기적이 자란다

2008년 위성사진을 본 레이 박사와 리나우도 교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농민들이 그렇게 많은 나무들을 자라게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위성사진과 현지 조사 결과를 취합한 레이 박사는 니제르에서만 나무 2억 그루가 자라고 있고, 토질이 악화된 토양 약 3125㎢가  되살아난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 자료를 보면, 니제르 남부에서 산림농업을 실시한 지역이 지금의 가뭄을 가장 잘 이겨내는 지역과 일치한다. 레이 박사는 나무가 가뭄을 극복하는 데  경제적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005년 가뭄 때, 농민들은 벌목한 목재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곡물을 살 수 있었다.

일종의 무상 지식에 해당하는 인공 천연 갱신 방식은 외부 지원에 전혀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학 지구연구소장이 주창하는 새천년 농촌 개발 모델과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삭스의 농촌 개발 계획은 종자, 비료,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한 시추 구멍, 임상 연구 등 농업 개발에 필요한 일련의 서비스를 농가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이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매력적이기는 하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새천년 농촌 개발 계획은 농촌 각 지역에 엄청난 투자를 요구하며, 여러 해 동안 외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속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프리카에 새천년 농가 수십 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십억 달러를 외부에서 지원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해외 지원은 사실상 끊긴 상태다.

물론 외부 주체들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건 사실이다. 정보 공유를 위해 무척 저렴하게 재정 지원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인공 천연 갱신 방식이 서부 사헬 지대에서 효율적으로 환산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정보 공유 덕분이었다. 농민이 앞장서서 뛰어들어 이 방식의 이점을 동료 농민에게 알렸지만, 이들에게 핵심적인 도움을 준 건 리나우도 교수, 레이 박사, 사헬 에코 등 소수 활동가 및 비정부기구들이었다. 레이 박사는 이들 모두 ‘자발적인 아프리카 녹화사업 참여’를 통해 인공 천연 갱신 방법이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로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확신하며, 에티오피아 대통령에게 이런 뜻을 전했다.

한편 사헬 지대를 이렇듯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든 지구온난화에 제동을 걸어줄 조치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 같은 적응 방식은 그 어떤 형태라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기에 방출되는 온실가스양을 줄이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획기적인 조치라도 기온 상승 앞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글•마크 허츠가드 Mark Hertsgaard
<더 네이션> 기자. 2009년 11월 19일 <더 네이션>에 게재된 기사.  

 

ps : 그리고 얼마전에 나온 데이비드 몽고메리의 <흙>도 관련 책으로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동아일보 2010.11.27  인류, 살고 싶으면 흙을 보호하라

흙이 줄면 식량이 줄고 문명 쇠퇴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은 흔히 미스터리로 불린다. 이런 유적을 만들 만큼 번성했던 문명의 흔적을 지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대 지구우주과학부 교수인 저자는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흙에서 찾는다.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은 토양이 비옥하고 산림이 우거진 이스터 섬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 비탈에도 경작을 하면서 토양이 침식됐다. 퇴적물의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200∼1650년에 원시 겉흙의 대부분이 깎여나갔다. 경작지가 줄고 식량 생산이 감소하면서 문명은 급속히 쇠퇴했다. 흙의 소멸은 문명의 붕괴로 이어졌다.

한 줌 속에 미생물 수십억 마리가 사는 흙은 생명의 터전이다. 하지만 흙은 재생시간이 더딘 한정된 자원이다. 농사에 중요한 흙의 두께는 1m도 안된다. 이는 지구 반지름(6380km)의 1000만분의 1을 조금 넘을 뿐이다. 기반암이 풍화되고 유기물이 활발하게 움직여 겉흙 10cm가 만들어지려면 수백 년, 수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반면 오늘날 농지에서 흙 2.5cm가 사라지는 데는 평균 40년이 걸리지 않는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흙의 역사였다. 성경의 ‘아담’은 히브리어로 땅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온 말이다. ‘이브’는 생활을 뜻하는 ‘하바’에서 왔다. 흙과 삶의 결합이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의 뼈대다. 수메르, 이집트, 황허 등 고대 문명은 비옥한 토양에서 꽃폈다.

하지만 관개, 화학비료, 그리고 노동의 집중 투입에 기댄 현대 농법은 흙을 착취했다. 토착 언어로 ‘초록 섬’을 뜻하는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는 토질 저하로 한 나라가 어떻게 쇠락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프랑스 식민지시대 아이티 고원에서는 커피와 인디고(천연염색 원료) 플랜테이션으로 대규모 침식이 일어났다. 1804년 세계 최초로 노예에서 해방된 시민들이 공화국을 세운 뒤에도 토양침식은 계속됐다. 인구가 늘고 토지를 잘게 쪼개서 배분하면서 묵히는 땅이 거의 없었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더 가파른 산허리까지 경작을 했고 1986년엔 전 국토의 3분의 1이나 되는 흙이 사라진 불모의 땅이 됐다. 궁지에 몰린 소작농들은 도시의 빈민촌을 이뤘고, 이는 2004년 정부를 무너뜨린 폭동의 원인이 됐다.

반면 아이티에서 80km 떨어진 쿠바는 흙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 성공한 사례다. 농기계와 비료, 살충제에 의존하던 쿠바 농업은 1980년대 말 옛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수입하던 식량이 끊기면서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당시까지 쓰이던 투입물의 반입이 봉쇄되자 쿠바의 농업은 지식집약적 농업으로 바뀌었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버리고 응용생물학과 농업생태학을 토대로 무경운농법(땅을 갈지 않고 작물 잔재를 표면에 남기는 방법)과 생물학적 해충 방지법을 널리 보급했다. 새로운 농법을 도입한 지 10년도 안돼 쿠바의 식량 생산량은 이전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오늘날 문명의 영속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농업 수확량을 유지해야 한다”며 새로운 농업의 철학적 기초를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흙을 산업적 체계가 아닌 생물학적, 생태학적 체계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흙, 물, 식물, 그리고 미생물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뿌리를 두고 지역의 토지 조건과 환경을 고려하는 농업생태학을 저자는 대안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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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2.6  거가대교·경전선 KTX 개통경남의 교통지도 ‘확’ 바뀐다  

서울·부산 접근성 대폭 커져 


» 오는 14일 개통되는 거가대교 모습. 거가대교가 개통돼 부산시와 경남 거제시가 연결되면 두 도시의 거리가 60㎞로 줄어들면서 통행시간도 50분으로 크게 줄어든다. 경남도 제공

이달부터 경남에 교통 대변혁이 일어난다.
부산과 거제를 바닷길로 잇는 거가대교가 14일 개통되고, 다음날에는 경전선 복선전철 삼랑진~마산 구간에서 열차 운행을 시작한다. 6일에는 화물 전용인 부산신항 배후철도도 본격 개통된다. 한꺼번에 일어나는 경남의 물류 변화는 부산을 포함한 영남권 전체 주민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된다. 

  
 
» 경남지역 교통 대변혁 현황도 
  
■ 부산과 거제는 이웃 부산 강서구 가덕도와 경남 거제시 장목면을 연결하는 거가대교는 3.7㎞의 국내 첫 침매터널을 포함한 8.2㎞ 길이의 왕복 4차로 자동차 전용도로다. 거가대교 양쪽의 접속도로까지 포함하면 33.84㎞에 이른다.

거가대교를 이용하면 부산 남해고속도로 지선 어귀부터 거제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거리가 현재 140㎞에서 60㎞로 줄어들고, 통행시간은 2시간10분에서 50분으로 줄어든다. 부산~거제 통행차량의 기름값 절감액만 연간 1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부산지역 병원과 쇼핑·문화시설 쪽은 거제·통영 등 서부경남지역 이용객들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반대로 거제는 부산의 관광객들이 대거 몰려올 것으로 기대한다. 부산~거제 구간을 출퇴근하는 이들도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통행료는 개통을 열흘도 남겨놓지 않은 5일 현재까지 결정되지 않고 있다. 거가대교 민간투자사업자인 지케이해상도로㈜는 40년 동안 도로를 운영하며 통행료를 받을 예정인데, 승용차 기준 1만원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이에 대해 거제시민 2082명은 통행료가 너무 비싸고 징수 기간도 너무 길다며, 지난 3일 감사원에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통행료는 내년 1월1일부터 부과되며, 14일부터 연말까지는 무료다.

■ 고속철도로 서울 간다 현재 마산역에서 서울역을 갈 때 새마을호를 이용하면 4시간58분이 걸리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려면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고속철도로 갈아타야 한다. 하지만 경전선 삼랑진~마산 41.9㎞ 구간 복선전철이 개통되면 마산역에서 서울역까지 고속철이 운행돼 도중에 갈아타지 않고도 3시간이면 서울역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경남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는 170만명이 모여 사는 창원·김해·밀양 등이 고속철도의 직접 이용권역에 포함된다. 2012년에는 마산~진주 구간에도 복선전철이 개통될 예정이다.

운행횟수는 편도 기준 주중 7차례, 주말 24차례로 정해졌으며, 마산·창원·창원중앙역이 정차역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각 역에 정차하는 횟수와 주민들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진영역의 정차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요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직 예매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6일에는 하루 26차례 왕복 운행하면서 부산신항 물동량을 처리할 부산신항 배후철도가 개통된다. 부산신항에서 낙동강역까지 44.8㎞이며, 진례역에서 경전선과 합쳐져 진영·한림정·낙동강역을 함께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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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캠브리지 대학 교수의 신간이 나왔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그들은 우리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선진국'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프레시안에 연재된 정승일씨의 서평에 대해, 엄밀히 애기하면 서평에 나오는 특정 설명에 대한 반론이 연이어 실렸다. 사회디자인연구소라고 하는 곳의 김대호씨의 글인데, 상당히 길다. 요점은 정승일씨는 '복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반면, 김대호씨는 '복지'가 정당한 '상벌체계'를 약화시켜 건전한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정승일씨의 노무현 비판도 나와 김대호씨의 반발을 산 것 같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파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편가르기는 나쁘지만 편의상 정승일씨는 '반노', 김대호씨는 '친노'인 듯하다. 

어제 일요일 오랜만에 노트북을 꺼내 아주 긴 이 두 글을 정리했는데, 아들이 자다 말고 날 습격(?)해 몽땅 날라가 버렸다. 그러면 안되는데 살짝 짜증이 나 아들한테 말도 안하고 째려(?) 봤더니 내 옆에서 밍기적밍기적 거린다. 자기도 뭔가 미안한 듯, 살짝 말도 걸면서...그래도 내가 말을 안하니 방바닥만 보고 밍기적 거리더라. ㅋㅋ 어찌나 귀여운지!! 날라가 글 생각을 하면 짜증이 나지만...  

장문의 김대호씨의 글은 나중에 정리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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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 

[프레시안 books]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2010-11-12 

<법철학>의 서문에서 "지혜(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아오른다"고 말한 철학자 헤겔. 그는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대작 <정신현상학>의 집필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문을 써내려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눈앞에 '시대정신(Zeitgeist)'이 어슬렁거리고 있다며 감격해한다.

그 순간 헤겔이 목격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깃발 아래 프러시아를 점령하여 수도 베를린의 (우리의 광화문에 해당되는) 중심가에 나타나 자신의 군대를 순시하던 나폴레옹의 말 탄 모습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이 시대의 나폴레옹은 과연 누구일까?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11~12일 서울에는 글로벌 경제 위기와 무역 전쟁, 환율 전쟁의 해법을 찾고자 각국 정상들이 모였다. TV에는 회담의 의장인 이명박 대통령의 분주한 모습과 함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비쳐졌다. 두 사람은 G20 회의에서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이라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진영에 서 있다.

이번에 모인 120개 글로벌 기업의 CEO들 (여기에는 삼성의 이건희,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SK의 최태원 회장 등이 끼어 있다) 역시 서울 한복판에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시대정신으로 찬양한다. 작은 정부, 부자 감세와 복지 재정 축소(긴축 재정), 대형 할인점 규제와 같은 기업 규제 철폐, 공기업 민영화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지속을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는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G20 회의와 거의 동시에 번역·출간된 장하준의 새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부키 펴냄)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유 시장이라는 허구"에서 시작해서 "금융 시장은 덜 효율적일수록 좋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주류 경제학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들을 용감하게 펼쳐나간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선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치경제학 이야기보따리를 독자들 앞에 풍성하게 펼쳐 놓는다.

성장과 분배, 트리클다운과 펌프

  

전작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순희 옮김, 부키 펴냄)에서 장하준은 주로 개발도상국들의 '성장' 이슈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도 이어진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없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는 주장을 통해 가난한 개발도상국도 한국이 1960~70년대에 취했던 적극적 정부 개입과 산업 정책(industrial policy)을 취함으로써 경제 개발과 경제 성장에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3년 전에 나온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로 개발도상국 독자를 겨냥한 것과는 달리 이번 책은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 독자를 위해 기획되었다. 이 책은 G20 회의를 주최할 정도로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독자의 고민, 즉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진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준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실제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은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는데 실패"했다며 비판한다. 또 그는 부자들에게 부를 몰아줌으로써 자유 시장 경제학이 기대한 것, 즉 '윗부분에서 창출된 보다 큰 부(보다 큰 파이)가 아래로 흘러내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며들 것'이라는 이른바 '트리클다운(trickle down)의 원리'도 실제로는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선진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패키지는 부유층 감세와 금융 자본주의화를 통해서 부자들에게 부를 집중시켜 줌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자들은 생산적 투자 확대보다는 금융 자산 투기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경제 성장 지체'와 '고용 없는 성장', '늘어나는 근로 빈곤층(working poor)' 현상을 발생시켰다.

트리클다운 이론에 대응하는 장하준의 이론은 펌프(pump)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부유층에 집중된 부가-중력(즉 '자유 시장' 원리)의 자연스런 작용에 의해-가난한 계급에게 한 방울 한 방울 흘러 떨어지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느리고 부족하다. 따라서 아예 전기 펌프를 설치하여 부를 콸콸 아래로 이전시키는 것이 경제 성장의 혜택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기에 훨씬 더 쉽고 빠른 길이다. 그 펌프가 바로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라는 펌프를 설치한 경제는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복지국가라는 큰 정부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일하는 기업과 산업이 시장 비효율성 문제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새 직장을 구하는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기업과 산업의 구조 조정에 크게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지국가는 기업과 산업의 효율적 구조 조정과 고부가 가치화를 보다 용이하게 하고, 그 결과 경제는 더욱 빨리 성장한다.

공정과 공평, 자유 시장과 국가 개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공정'과 '공평'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 준다. 장하준은 "잘 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라는 잘 알려진 사실을 지적하면서, 자유 시장 경제학은 이러한 상식적 팩트마저도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장하준은 이어 미국의 버스 운전사와 한국 또는 멕시코의 버스 운전사가 하는 일은 동일한데도 임금 격차가 수배 또는 10배나 난다는 사실이 과연 공정·공평한가라는 윤리적 문제도 제기한다. 물론 이러한 나라 간 임금 격차는 각국이 국경을 개방하여 노동 이민 시장을 완전 자유화하면 금세 사라진다.

자유 시장 경제학의 관점을 수미일관되게 적용한다면 미국의 버스 운전사가 멕시코의 버스 운전사보다 10배의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미국은 멕시코로부터의 노동 이민을 무제한 허용하는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정의(justice)와 공정(fairness)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전신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상품 및 서비스의 국제적 이동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만을 자유화할 뿐 결코 노동 이민의 국제적 이동까지 자유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 시장 이론을 따르는 미국 정부의 멕시코 국경 통제는 날로 살벌해지고 있으며, 세계 어디서나 이 이론은 보수주의적 민족 차별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한편으론 자유 시장 경제학의 논리적 자가당착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정과 공평에 관한 자유 시장적 접근의 한계를 보여준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무제한적인 노동 이민 시장 자유화에 합의할 수만 있다면, 한미 FTA도 그렇게 공정·공평하지 못한 협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사회디자인연구소 등 우리나라 진보·개혁 세력 일부에서 제기하는 '공정 사회' 관점의 복지국가 비판론에 대해서도 이야깃거리를 준다. 예컨대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는 복지국가보다는 정의와 공정·공평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공평이 1차 분배 구조인데 반해 복지국가는 2차 분배 구조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그리하여 사회디자인연구소는 1차 분배 구조의 불공정성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오히려 1차 분배 구조에서의 시장 논리(즉 자유 시장)를 더욱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좌파' 정책을 구사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적 분배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노동 시장 유연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이 책에서 잘 지적하듯이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의 복지국가에서도 자유 시장에서 형성되는 '청소부'와 '사장님' 간의 임금 격차는 한국과 미국만큼이나 크다. 즉, 김대호의 표현에 따르면 1차 분배 구조에 있어 북유럽은 미국 및 한국보다도 더 불공정한 사회이다.

그런데도 북유럽 나라들은 부자 증세와 복지 재정 지출을 통해 부를 위로부터 아래로 적극적으로 이전시키는 복지국가 펌프를 설치한 덕택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사회 정의와 공정· 공평을 달성하였다. 자유 시장에서 그 가격이 결정되는 1차 분배 구조상의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유 시장을 더 강화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 개입 특히 복지국가적 개입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정의·공정이 먼저냐 복지국가가 먼저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정의·공정을 달성하기 위해 자유 시장 정책을 쓸 것인가 아니면 국가 개입(특히 복지국가 정책)을 할 것인가이다.

기회 평등과 실질적 공정성

공정·공평의 문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기회의 평등이냐 결과의 평등이냐의 문제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기회의 평등'을 적극 옹호하며, 공평한 기회 제공은 공정 사회를 이루는 출발점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가난한 집 아이도 교육받을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 자립형 사립학교를 늘리더라도 가난한 아이들도 입학할 수 있는 특별전형 제도를 도입하면 기회 균등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장하준은 이 새 책에서 과연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고 해서 사회가 '공정'해지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설령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집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면, 그리고 집에 공부할 책도, 책상도 없다면, 그들은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제공하여 이들이 굶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공립도서관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무상으로 책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나아가 가난한 집 부모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노동) 시장'('기회 균등'의 시장)이 아닌 복지국가적 개입에 의해 적절한 소득과 교육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차라리 빨리 일자리를 찾아 돈벌어오라고 다그칠 것이다. 이렇듯 기회의 균등은 그 자체의 '형식적 공정성'에 불과한 바, 그것이 '실질적 공정성'으로 승화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의 균등'도 필요하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는 가난한 집 부모들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전제로 정부가 소득보조금을 제공하는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의 대성공으로 사회에서의 '공정성'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서울 G20 회의의 '나폴레옹'은 바로 브라질 대통령 룰라였다고 할 수 있다.

'성찰적 진보'를 위한 정치경제학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달리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선진국에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리틀아메리카'(미국식 선진화)냐 아니면 '빅 스웨덴'(북유럽식 선진화)이냐의 두 가지 선진화 방향을 놓고 여전히 고심하는 우리나라 진보·개혁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장래의 진보·개혁 재집권을 구상하는 '성찰적 진보'임을 자부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는 진정으로 '신자유주의 좌파'의 시대였다. 그것은 두 대통령과 집권 정당만이 아니라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세대 즉 386(486) 세대 전체의 문제였다. 이 세대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양상은 다양하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386 세대는 '굴뚝 산업'을 넘어설 '지식 기반 경제론'에 열광했다(지금도 이것은 여전하다). 그들은 굴뚝 산업을 대표하는 재벌계 대기업의 이건희와 정몽구 등 구태의연한 재벌 총수가 아니라 '지식 기반 경제'를 대표하는 새롭고 '멋진 자본주의'의 대표자인 빌 게이츠와 스티븐 잡스(그리고 우리의 안철수)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정보통신 기술(IT)과 인터넷을 통해 달성될 정보화 사회 또는 탈산업화 사회(다니엘 벨과 앨빈 토플러)에서는 '상호 소통적 민주주의'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피터 드러커의 탈자본주의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진보·개혁 진영에서 나타난 IT와 인터넷에 대한 이러한 열광과 기대는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미국의 경우 빌 클린턴 대통령과 로버트 라이시 노동부 장관이 그러했고, 영국의 경우 토니 블레어와 앤소니 기든스의 신노동당이 그러했다. 당시 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이 내건 '제3의 길' 노선은 부자 증세 및 복지 국가 지출 등 전통적인 진보적 정책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무관심했고, IT 및 인터넷에 대해서는-미국 민주당과 빌 클린턴을 열렬히 후원한 빌 게이츠 및 앨빈 토플러와 더불어-열광적으로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IT 및 인터넷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서도 영국, 미국, 한국의 '신진보주의(제3의 길)' 세력들은 실리콘벨리의 벤처 왕국과 벤처 캐피탈 천국을 뒷받침한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이 주도하는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이 1980년대부터 추진해온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의 정책과 이론을 이들은 '신진보'의 이름으로 대폭 수용한 것이다.

서구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초반 이래 386 세대 전체에서 IT와 인터넷, 탈산업화, 세계화와 개방에 대한 열광적인 방향 전환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각종 정책들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지식 기반 경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는 도발적 주장을 통해 이 세대의 통념을 무너뜨려 버린다.

나아가 장하준은 영국 신노동당과 미국 민주당이 '제3의 길' 노선의 일환으로 주장해온 '사회투자국가' 이론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즉 영국의 신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은 경제 성장과 연계되지 않는 노인 및 어린이를 위한 사회복지 예산은 줄이면서(복지국가 축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투자국가'라는 미명 하에 대학 교육 등 학교 교육은 대폭 강화하는 노선을 추구했다(우리나라의 경우 유시민이 그러하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회투자국가 이론의 비현실성을 비판한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률이 매우 낮은 스위스의 생산성이 대학 진학률이 매우 높은 미국·한국 등보다 훨씬 높다는 '스위스 패러독스'라는 테제를 통해, 직업 및 경제 활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지 않은 일반 교육의 무조건적 확대만으로는 나라와 국민을 부유하게 만들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밖에도 장하준은 우리나라에서도 진보·개혁 NGO들이 많은 관심과 열성을 가지고 전개해온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날리고 있다. 정부 보조금이 없다면 성공적인 모델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 역시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한다는 지적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은 "금융 시장은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 테제에서, 서유럽의 금융 허브로 발돋움하여 융성하던 아이슬란드의 경제가 어떻게 글로벌 금융 위기의 와중에서 사상누각처럼 붕괴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기획되어 이명박 정부가 여전히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 금융 허브' 정책이, 우리 경제와 국민 개개인을 불안정한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얼마나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지를 지적한다.

장하준이 이 책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동북아 금융 허브 전략 역시 '지식 기반 경제(신경제)' 담론과 '제3의 길' 담론이 없었다면 정책적으로 추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정신과 진보·개혁 집권 플랜

2004년 3월 유례없는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의 업무가 정지되자 광화문 거리는 수십 만 명의 시위대로 넘실댔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청와대 안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읽고 있던 책은 바로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 권오규(노무현 정부에서 그 후 재정경제부 장관까지 지냈고 한미 FTA도 밀어붙인)가 추천한 영국 보수당 마거릿 대처의 일대기였다.

물론 대통령의 개인적 독서 취미까지 일일이 뭐라고 할 수는 없으며, 당시 노무현은 김훈의 <칼의 노래>도 읽었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의 수십 만 진보·개혁 세력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통령이 마거릿 대처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청와대의 386 참모진의 모습이었다. 2년 뒤 감세 정책과 함께 한미 FTA를 밀어붙이면서 "신자유주의 좌파면 어떠냐?"라고 반문한 노무현의 행동은 한 개인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386 세대 전체의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장하준 역시 전형적인 대한민국 386 세대이다. 군부 독재와 경제적 후진이 여전하던 1980년대 초반의 한 개발도상국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다. 그가 쓴 책들에는 그 나라와 그 시대의 고민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의 책들은 식민지 역사와 전쟁의 참화, 그리고 가난한 1950년대와 60년대에 태어나 경제 개발과 정치적 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한 한 젊은이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아가 그의 이번 새 책은 이제는 개발도상국 딱지를 떼고 선진국을 향해 도약하는 우리나라의 여러 고민고리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선사하고 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감세냐 증세냐, 제3의 길이냐 복지국가냐 등등의 고민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장하준 교수는 우리나라 386 세대의 잘못된 지향성과 허상들(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에 대해 적극적으로 애정 어린 비판을 가한다. 나아가 향후 한국을 비롯한 영국의 진보·개혁 세력(영국의 신노동당)이 재집권을 구상한다면 어떠한 경제 사상적 기초 위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영국의 <가디언>이 새로 선출된 신노동당 당수에게 장하준과 점심을 하라고 권유한 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하준의 책은 민주주의를 꿈꾸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던 이 나라의 386 세대의 필독서이다. 더 정의롭고 더 공정한 세상을 꿈꾸는 모든 젊은이들과 장년층들 역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시대정신은 G20 회의가 열린 이 나라의 길거리마다 이 책의 독자들과 함께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노무현은 알았다…장하준·정승일의 착각 또는 헛발질 

[프레시안 books] 진보의 길을 말하려면, 현실에 발을 딛어라!   2010-11-19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경제학)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이다. 국내외에서 이 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이 책의 논리를 정면 비판하는 서평을 보냈다.

김대호 소장의 글은 '프레시안 books' 15호(11월 12일자)에 실린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호의적인 서평(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에 대한 반론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진보·개혁 진영의 길 찾기의 취지에서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을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이 글은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이 쓴 "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에 대한 답 글이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서평이 아니라, 정승일·장하준의 오래된 착각과 궤변에 대한 촌평이다. 이들의 주요 주장을 제대로 비평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의 지면이 필요한데, 이번 글은 정승일의 서평에 나오는 두 사람의 공통된 착각과 궤변에 국한해서 비평하려고 한다.

공정과 공평이라는 안경 
 
먼저 나는 정승일·장하준과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한국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게 해주는 안경 하나를 제시할까 한다. 그것은 사회적 상벌 체계 혹은 공평이라는 안경이다. 좋은 개념은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게 해주는 안경 역할을 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라는 개념은 진보의 통찰력을 많이 떨어뜨리는 '불량 안경'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통합을 담보하는 사회 운영의 원리가 곧 '정의'다. 이 핵심은 유한한 자원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 간의 경쟁과 협력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경쟁(게임) 규칙이다. 단순화 하면 정의는 승자도 패자도 억울함 없이 그 결과에 승복하는 '사회적 상벌(incentive-penalty)' 체계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르게 서야 사회가 가진 자원, 에너지가 적재적소로 흘러가서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정의(합리적 경쟁 규칙)의 양대 지주는 공정과 공평이다. 영어에서는 이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다 "fairness"로 표현한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를 명백히 구분할 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과 일본 민주당은 최상위의 정치적 가치로 취급한다. 한국은 미국, 영국의 영향 때문인지 공정과 공평이라는 개념이 좀 모호하다.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의 통상적 용법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공정은 '경쟁 기회·조건·출발선의 평등'과 '반칙 없음'과 '결과에 대한 승복'을 의미한다.

한편, 공평은 '결과의 합리적인 불평등', '합리적인 평가 보상 체계=상벌 체계'를 의미한다. 차별할 이유가 없을 때는 평등이 곧 공평이기에, 일상에서는 공평과 평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언어 습관에 근거하여 공정은 경쟁의 입구, 즉 출발선(starting line) 관리 원칙으로, 공평은 경쟁의 출구(finish line) 관리 원칙으로 단순화 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공정은 경쟁 과정의 반칙 없음과 결과에 대한 승복도 포함한다. 이명박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한 것은 나름대로 한국인의 언어 습관을 잘 감안한 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명박은 왜 평등한 기회라고 하지 않고 공평한 기회라고 했을까? 평등과 공평을 혼동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 뒷걸음치다 쥐 잡았는지 모르지만, 공평한 기회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는 한국의 '기회(지역) 균형 선발 제도'나 미국의 '적극적 기회 보장 제도=소수 집단 우대 제도(affirmative action)'. 영국의 '아동 발달 계좌(Child Development Account)'에서 보이듯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불우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약자 보호=강자 차별) 의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격차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문제

한편, 합리적인 평가 보상 체계=상벌 체계로 등치 되는 공평은 승자·강자의 이익 수준과 패자·약자에 대한 배려 수준을 정하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공평은 흔히 '고위험 고수익, 저위험 저수익'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의미를 파고들면 많이 기여한 존재는 많이 먹고, 전혀 기여하지 못한 존재는 굶어 죽으라는 비정한 자원 배분 원칙이 아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을 위한 자원 배분 원칙이기에 경쟁 결과 나타나는 격차(차별이나 특권)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정하는 원칙이다.

상식적으로 기계적 평등이나 승자와 패자 간의 너무 적은 격차는 사회적 상벌 체계를 무력화하여 가치(부)의 총량을 늘리지 못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패자·약자에게조차도 불행한 사회를 만든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사회주의 몰락으로 또 1970년대 영국이 앓은 복지병으로 증명되었다.

반면에 사회적 최소한이 너무 낮은, 승자독식·과식의 매몰찬 상벌 체계는 인간의 본능의 하나인 도덕 감정(측은지심, 동정심)에 위배되기도 하지만, 전쟁과 다를 바 없는 격렬한 투쟁과 재기불능의 나락에 빠진 패자의 승복 거부를 초래하여 승자가 누릴 이익과 혜택을 무색하게 만든다.

사실 모든 경쟁의 출구는 또 다른 경쟁의 입구이기에 승자의 독식·과식은 출발선의 평등을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패자로 하여금 억울함에 치를 떨게 하여 승복 거부 사태를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경쟁(경제 활동) 참여자의 저변을 좁혀 사회적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 한국과 미국의 경제 사회 발전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평성을 구현하는 것이 어렵고 중요한 것이다.

不患貧 患不均

중국 공산당은 공평의 원류로 공자 계씨(季氏)편의 통찰을 들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후와 사대부는 토지가)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불공평)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모자람(寡)이나 가난(貧)보다 불공평(不均)과 불안(不安)을 먼저 걱정한다는 것은 일찍이 상과 벌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가(한비자)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경상남도 도지사 김두관의 오래된 좌우명이기도 한 "不患貧 患不均(가난이 아니라 불공평을 걱정한다)"사상은 2000년 이상 사상적 상극으로 알려진 유가와 법가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자신들의 핵심 가치를 성장과 복지로 설정하는데서 보듯이, 아직도 모자람(寡)과 가난(貧)을 핵심 화두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답답한 일이다.

어쨌든 승자와 패자 간 격차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 한마디로 사회적 상벌 체계는 나라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고, 정치 세력의 역관계에 따라 다르다. 또한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서도 다르다. 예컨대 주변 나라들이 빼어난 인재나 기업에 대해 아낌없이 보상한다면, 이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수 없이 보상을 좀 더 해줘야 한다. 그래서 한 때는 국가들 간에 법인세 인하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북유럽 국가에서 유지되는 사회적 상벌 체계(고율의 세금, 보편적 복지, 작은 사회적 격차=높은 평등도)가 영국, 미국, 한국, 중국의 발전을 담보하라는 법은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공정과 공평 이전의 문제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정과 공평 이전의 기본 문제가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합의된 규칙을 경쟁 참여자들이 준수(승복)하는 것이다. 이는 주권자(국민)나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칙 혹은 범법을 처벌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 강자들이 법 위에 군림하면서 숱한 반칙을 저질러왔기에-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미명하에 삼청교육대와 정치활동규제법을 만든 전두환이 대표적이다-선진국에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반칙과 특권 철폐, 권력자나 강자의 전횡을 견제하는 "진짜 법치주의"와 3권 분립, 비대하고 자의적인 검찰 권력 견제하기 등이 강조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기본 문제는 경쟁의 출구와 입구를 연결하는 경쟁 방식이나 경쟁 장(場)의 문제이다. 이는 곧 유한한 자원과 가치를 배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공직자 선출·임용제도(고시, 공시, 선거)와 입시제도 개혁이 큰 정치·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해 있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경쟁 방식의 문제는 선진국에서는 그리 큰 정치·사회적 이슈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합법적 제도적 불의의 온상으로, 성장과 통합의 발목을 잡고 있는 중차대한 모순이다. 이 문제를 건너뛰고 공평한 기회나 적극적 기회 보장을 얘기할 수 없고, 복지도 얘기할 수 없다.

경쟁 방식의 문제는 경쟁의 출구에서의 불합리한 격차(불평등), 곧 불공평 문제로 귀결된다. 경쟁 방식을 바꿔서 경쟁자를 배제하든, 부정 출발을 하든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실력이나 사회적 기여에 비해 훨씬 많은 권리, 이익을 회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경쟁 방식이 중요한 것은 주된 경쟁 방식=자원 배분 방식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인지, 정치가 키를 쥐고 있는 국가인지, 아니면 시장, 국가, 역사·문화, 집단 간의 역관계 등이 얽히고설킨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지나친 격차(일명 양극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이 만든 격차

예컨대, 오피스 밀집 지역의 점심시간에 손님이 줄서는 식당과 손님이 없어서 파리 날리는 식당의 격차는 패자들조차 감히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격차다.

물론 이 정도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은 한국에서 그리 많지 않겠지만, 어쨌든 자유로운 선택권이 작동하여 만들어낸 수많은 격차(교회 간 양극화, 인터넷 유통이 만들어낸 양극화 등)와 그에 대한 대처 방식은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일본, 한국 등 문명국들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정한 사회 안전망 제공, 후유증 적은 산업 구조 조정과 적절한 변화 감속·완충(규제) 장치, 금융 지원, 경영 노하우(컨설팅) 지원 등이 그 정책 기조일 것이다. 물론 한국은 시장이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기에 특별히 독·과점 방지, 공정 거래, 소비자 보호 관련된 정책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세계화, 지식정보화, 자유화의 흐름이 거세진 1990년대 이후에는 주된 자원 배분 방식이 자유로운 소비자 선택권이 작동하는 시장인 경우는 신자유주의-양극화 시비가 나올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등지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정치·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미국, 일본, 중국의 정치권이나 지식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비나 양극화 시비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왜 일까?

추측컨대 양극화라는 개념이 격차의 크기만 주목할 뿐 격차의 다양한 성격을 묻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신자유주의 시비를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시장 근본주의)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신자유주의 개념을 확대해 버리면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의 현대 자본주의 그 자체라서, 한국, 중국, 브라질의 경제·사회 정책도 몽땅 신자유주의로 뭉뚱그려져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가 만든 격차

그런데 한국 사회는 시장이 아닌, 국가의 규제(법, 제도)나 재정에 의해 배분되는 자원의 비중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너무나 크다. 토지 주택 관련 거대한 규모의 불로 소득이 대표적이다. 이는 국가가 쥐고 있는 소유권·담보권 제도, 토지 이용 규제 등에 의해 생성되고 분배된다.

단적으로 1960~80년대 서울 강남과 수도권 신도시를 개발할 때 대부분의 토지를 국·공유지로 확보했더라면(이 때는 충분히 가능했다), 1980년대부터 공공 임대·전세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했다면,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담보권을 제한하는 LTV(주택 담보 인정 비율) 규제나 DTI(총부채 상환 비율) 규제 등을 도입했더라면, '기업 도시'나 '혁신도시' 지정을 더 신중하게 했더라면 부동산으로 인한 비효율과 절망과 고통은 지금의 10분의 1 수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는 부동산 관련 각종 규제는 한국 관료를 비롯한 노블레스의 근로 소득 약탈, 불로 소득 수취 공작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에 압도적으로 책임이 있는 불합리한 격차는 이 뿐 아니다. 한국의 청소년 인재-이는 수백조 원의 금융 자산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몇 개의 '士'자 직업의 이면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면허증의 숫자 규제와 지나친 독점권 보장(변호사법, 의료법 등)이 버티고 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한국 공공 부문(공무원, 공기업)의 매력과 공공 부문-민간 부문의 격차도 마찬가지다. 행여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격차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로 인해) 민간 부문이 세계화, 자유화된 시장의 파도에 휩쓸려서라거나, 민간 부문이 못나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한심한 소리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각종 복지 혜택을 무더기로 제공하여, 복지 재정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복지병을 만들어내는 기초생활보장제도(혹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의 불합리한 격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의 산물이다. 한편, 식당 아줌마와 건설 노가다(일용 잡부)로 상징되는 하층 근로자의 처우가 15~20년 동안 거의 답보 상태인 것은 중국(조선족)과 동남아시아의 단순 근로자의 대량 수입(방치)과 이들의 노동권에 대한 과소 보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피아 전설이 떠도는 이유

세간에 관료와 기업과 이익집단이 결탁한 마피아-재정경제부, 국토해양부(도로), 교육부, 보건복지부, 국세청, 검찰 등-에 대한 전설이 떠도는 것은 관료가 쥐고 있는 유·무형의 규제권(토지 이용 규제권, 처벌권 포함)과 재정 할당권이 지역, 산업, 기업, 개인의 명운을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정치 갈등이 격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주식회사 한국의 신화를 만든 발전국가의 유산이자, 분단과 냉전의 유산이다. 1997년을 전후하여 확 풀어버린 것은 산업, 무역, 금융 관련 규제일 뿐이다. 노동 관련 규제는 풀었다고 할 것까지 없다. 정리 해고제는 거의 수사 이상이 아니었으니까! 관련 노동법 때문에 정리 해고 사태가 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한 것은 관료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유·무형의 권능을 순순히 놓게 할 만큼 한국 정치가 유능하지도 않았고, 관료가 스스로 자신의 권능을 내 놓을 정도로 공공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관료나 국가에 대한 관심이 민영화, 규제 완화, 감세, 복지 축소 여부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항시 선진국의 문제의식과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식민지 지식인(이념정책의 오퍼상)의 오랜 관성 아니면, 대·공기업 조직 노동의 사상·이념적 영향력 때문이 아닐까?

나는 한국 정부를 두고 GDP 대비 정부 재정 규모나 인구 대비 공무원 숫자를 기준으로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를 따지는 것은 저울로 달 것을 자로 측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접근이라는 얘기다. 복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한국 정부는 시장과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크고 강한 정부였다. 거칠게 말하면 공공성과는 담쌓은 일종의 마피아들이 장악한 정부였다. 적어도 거기에 크게 휘둘리는 정부였다.

지금은 재벌 대기업과 이익집단이 정부를 쌈 싸먹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피아라고 표현하니 매우 사악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이들의 도덕성과 공공성은 모든 것에 앞서서 재선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나, 검찰 공화국을 꿈꾸는 정의의 사도(?) 검찰이나,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과 노동조합 간부 정도는 된다고 보아야 한다. 처지와 조건에 따라 우리만큼 선하고, 우리만큼 악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치밀하고 정교한 견제 감시 장치가 없기에 평범한 관료가 마피아의 일원으로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정부 시절에 관료의 행태를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검찰의 현주소는 그 실패의 기념비다.

앞에서 길게 국가에 압도적 책임이 있거나 주요한 책임이 있는 모순을 이야기 한 것은 오로지 시장화, 민영화, 규제 완화, 복지, 세금에 관심이 집중된 반신자유주의 프레임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시장, 국가, 사회가 합작한 격차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한국의 고질적인 모순도 오직 하나의 요인에서만 발원하는 것이 아니다.

전임 교수와 시간 강사의 부당하고도 극심한 처우 격차를 생각해 보라. 한국의 시간 강사는 전임에 비해 실력이나 노력이 많이 부족해서 처우가 낮은 것은 아니다. 대학의 가혹한 이윤추구 탓도, 대학 간 과도한 경쟁 탓도 아니다. 오히려 대학의 서열 구조로 인해 대학 간 경쟁이 구조적으로 어려워서 문제다. 하여간 신자유주의의 산물은 아니다. 국가가 사용자라면(몽땅 국립대학이라면) 공기업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듯이 재정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 낼 사람이 학위의 효용을 의심하는 학생과 학부모인 한 그렇게 해결할 수도 없다. 복지로 시간 강사 문제를 완화 할 수는 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가 아닐까?

그 외에도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극심한 격차, 대기업·공기업 생산직의 급격한 노령화(노동시장의 수준에 비해 너무 높은 고용 임금 수준), 수도권 집중과 지방의 총체적 피폐화 등도 기본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와 힘 있으면 전후좌우 보지 않고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몰염치하게 추구하는 뿌리 깊은 문화, 관행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이 문제들은 복지로 고통을 약간은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선진국에서 보기 힘든 현상

사실 좋은 학과 및 학벌을 따기 위한 사교육 열풍, 해외 유학 열풍, 고시·공시 열풍, 과도한 스펙 쌓기, 시간 강사 문제, 최악의 자살률과 저출산 고령화, 낮은 고용률과 너무 낮은 청년 고용률, 좀체 줄지 않는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 문제 등은 선진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의 개방화, 자율화, 민영화, 규제 완화 수준이 유달리 높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복지 수준이 낮아서 악화되는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핵심 원인이 아니다.

핵심 원인은 선망하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그 생활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다수의 일자리가 사회 통념에 비해 너무 열악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인양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몽땅 1997년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상륙한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고작 대안으로 내 놓은 것이 획기적인 복지 확대이다. 당연히 복지가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과장한다.

이들의 실천적인 귀결은 1987년 이후 진보 동네의 부동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노동권 옹호, 자본권 억압"이다. 당연히 노동이 아닌 자영업자와 공식 실업자와 사실상 실업자와 청년층에 대한 대책이 없다. 자본이 노동을 매우 무서워하고, 고용을 엄청난 부담으로 느끼는 한 고용 확대는 쉽지 않기에,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도 사실상 없다. 복지국가론에서 오직 유효한 것은 세금을 통한 공공 부문 확대와 보건-의료-복지 스펙을 강화하여 사회 서비스 일자리를 확대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권 강화, 자본권 억압"을 중심에 놓는 한 청년 세대와 미래 세대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온데간데없다. 물론 복지는 이 문제를 약간은 완화하는 측면은 있다. 그런데 보수는 이 정도 수준의 대책도 없다. 그래서 비극인 것이다.

벽을 등지고 얻어맞는 주먹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비상 등으로 인해 강력한 구조 조정 압력은 어느 나라나 동일한데 한국 사회가 유달리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벽을 등지고 얻어맞는 주먹의 충격이 큰 것처럼, 한쪽이 꽉 막혀있는 상태에서-경쟁, 유연화, 구조 조정 등 시장 원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영역이 많다-주로 힘없는 존재들만 거친 글로벌 시장의 파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한국은 공공 부문, 자격증 부문, 대기업 조직 노동 등 힘 있는 쪽은 너무 과잉 보호되고, 힘없는 쪽은 너무 과소 보호되고 있다. 전자 쪽으로는 시장 원리가 너무 통하지 않고 후자 쪽으로는 규제 완충 장치 없이 시장 원리가 너무 거침없이 통한다.

그래서 국부적으로 노동권의 과보호가 나타나고, 국부적으로 자본권의 과보호가 나타난다. 국부적으로는 복지 과잉병이 전반적으로는 복지 과소병이 나타난다. 그 결과 한국의 제대로 된(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 직장의 처우는 우리의 생산력 수준이나 경제 구조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 반대다.

이는 한국 자본의 노동과 고용 확대에 대한 무서움 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는 선진국 중에 2만 달러대에 한국만큼 자본이 노동을 무서워 한 나라가 또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노동이 백기 투항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의 이중 왜곡으로 인한 패악은 우리의 소득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복지 수준과 지나친 장시간 노동과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토지 주택 관련 제도 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기 마련이다. 이는 이익집단에 밀리고 마피아 집단에 휘둘리는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대학, 종교, 시민단체)이 있다.

나는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인양 강조하는 사람들이 GDP 대비 복지 재정 수준과 공무원 숫자와 국민건강보험 보장률 등을 수없이 강조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경제·사회적 인프라에 해당하는 상벌(평가 보상) 체계, 경쟁 방식, 정치 행태, 1인당 GDP 대비 부문, 직업, 직능별 처우 수준, 노조와 이익집단의 행태, 의료 공급 기관의 성격(한국처럼 민간 의료 공급기관의 비중이 높은 나라는 별로 없다), 사회 투명성 등은 모르는지 애써 외면하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얘기하지 않는다.

왜 1차 분배 구조가 문제인가, 왜 정의가 먼저인가?

원래 승자와 패자의 이익 수준을 정하는 주된 장(場)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라면, 국가의 조세, 재정, 복지 정책을 통하여 승자와 패자의 격차와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된다. 출발선의 평등을 의미하는 적극적(공평한) 기회 보장 정책으로 말한다면 '적극성(공평성)'의 수준을 때론 전진, 때론 후진시키면 된다. 사회적 최소한 수준도 때론 상향, 때론 하향시키면 된다.

이는 한국, 영국, 미국, 스웨덴 등 모든 문명국 정치 세력들의 공통 과제이다. 물론 진보와 보수 정치 세력 간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선이 달라 정권 교체가 일어난다. 요컨대 선진국은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 구조를 통해서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높이고, 출발선의 평등 정책만 실현하면, 글로벌화된 시장의 폭력을 완충하고, 경제·사회적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은 그 정도로는 약과다.

왜냐하면 한국은 전쟁과 분단(휴전)으로 인해 원래 국가가 비대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만큼 그리 공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 아래서는 수출 기업(재벌 대기업), 전문 지식인, 공공 부문 등에 대한 특권, 특혜(지대) 할당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원래 성공한 변칙, 편법은 오래 가는 법이다.

한편, 토지, 주택 관련 제도는 관련 규제를 쥐고 있거나 개발 정보가 빠른 존재들의 불로소득 흡입 장치였다. 요컨대 한국은 시장 자체도 그리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지만, 설사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국가의 손아귀에, 그것도 그리 공공적이지도 않는 국가의 손아귀에 너무 많은 것이 쥐어져 있어왔던 것이다.

한편, 1987년 이후 등장한 노동운동, 민중운동은 '단결하면 힘 생기고 투쟁하면 쟁취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사는 곳에서 시장 원리(소비자 선택권)를 몰아내고, 오로지 더 많은 경제적 잉여를 끌어오려고 해왔다. 사회적 기여, 부담, 의무와 권리, 이익, 혜택의 균형이나 건강한 가치생산 생태계를 만드는 쪽으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보수 지배층이 그랬듯이 더 많은 불로소득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오른쪽으로도 확 굽어지고 왼쪽으로도 꽤 굽어진 이중 왜곡 사회가 되어 버렸다. 우파적 가치(과잉 시장=과소 보호/규제)의 과잉과 좌파적 가치(과소 시장=과잉 보호/규제)의 과잉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진정한 우파적 가치의 과소와 진정한 좌파적 가치의 과소가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은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 구조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 1차 분배 구조의 하나인 시장의 정상화(독과점과 불공정 거래 해소와 소비자 보호 등)도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지만, 설령 그것을 푼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가 명백하다. 한국은 선진국이 오래 전에 끝낸 정치, 행정, 사법, 언론의 민주화 문제와 선진국이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과잉 시장(과소 보호)과 과소 시장(과잉 보호)의 상호 의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힘 있는 존재들의 양반화, 귀족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는 진보 동네에서 '잘 작동하는 시장'의 의미와 효과를 그 누구 못지않게 강조하는 사람이지만, 실은 한국에서 시장 원리가 구조적으로 통할 수 없는 분야가 너무나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장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공평은 국가와 시장과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결하는 핵심 개념이다. 모든 불의는 결국 사회적 상벌 체계의 왜곡으로, 억울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평의 눈으로 보면 이명박과 제3의 길이 강조하는 공평한 기회의 의미와 한계가 보인다. 복지국가론자들이 강조하는 너무 낮은 사회적 최소한의 문제도 보인다. 노무현 정부의 좌절과 2007~8년의 진보 참패의 원인도 다 보인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불공정과 불공평 중에서 주로 지역 간 균형 발전 문제와 조·중·동과 재벌의 반칙을 주로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민생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수많은 합법적 제도적 불의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가난에 대해서도, 불공평(不均)에 대해서도 미온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오래된 통찰

지금 민주노동당은 슬그머니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대표 상품처럼 팔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백안시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복지국가 이전에 자주국가(미국에 덜 빼앗기는 국가) 내지 통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이 생각은 분명히 틀린 생각이지만 한국 사회는 복지 이전에 뭔가 중차대한 모순이 있다는 통찰 하나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통찰이 1980년대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나의 통찰은 민주노동당의 아주 오래된 흐릿한 통찰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평국가를 부르짖는 것은 한국 사회는 전쟁, 분단과 발전국가의 유산으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민주주의, 공화주의, 시장 경제의 외상값(화전민과 도적 행태)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제3의 길'과 정승일, 장하준의 착각

이제 이명박, 정승일, 장하준, '제3의 길'의 주장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자.

이명박은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하였다. 노무현이 강조한 반칙, 특권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ABR(Anything But Roh)'이 정체성이니까 봐 주자. 하지만 경쟁 방식의 문제와 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이를 건너뛰고 바로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비약한 것은 그냥 봐 줄 수 없는 맹점이다.

한편, '제3의 길'은 경쟁의 입구 관리 정책, 즉 기회, 조건, 출발선의 평등 정책(공평한 기회 보장=적극적 기회 보장)을 특별히 중시하였다. 이것의 핵심은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회의 재분배'에 주력하는 것으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 노동자들 내부의 지식(숙련) 격차를 줄이고(연대 지식 정책), 고용 가능성을 높여 일을 통한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계도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경쟁 방식의 문제도 심각하고, 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 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출발선의 평등(적극적 기회 보장)을 이루더라도 승자독식·과식이 문제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승자도 아닌 사람의 독식·과식도 심각한 문제다. 부동산 불로소득, 부모 잘 만난 사람, 공공 부문, 국가의 규제(자격증) 부문, 대공기업 조직노동의 처우는 승자의 과다 이익으로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승일, 장하준도 '제3의 길'의 공평한 기회 보장 정책을 비판했다.

"설령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집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면, 그리고 집에 공부할 책도, 책상도 없다면, 그들은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제공하여 이들이 굶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공립도서관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무상으로 책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비판 역시 복지를 강화해서 '적극적 기회 보장'을 내실화하자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내 얘기는 그렇게 적극적 기회 보장을 내실화 한다 하더라도, 한국 청소년 중에서 가장 우수한 아이들 대부분이 공무원이 되려고 하고, 국가의 규제 산업이자 내수 산업 영역으로 집중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글로벌 경쟁이 일어나는 부문, 민간 부문으로 우수한 아이들이 훨씬 많이 달려가도록 사회적 상벌 체계를 짜야 한다는 얘기다.

정승일은 "복지국가라는 큰 정부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일하는 기업과 산업이 시장 비효율성 문제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새 직장을 구하는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기업과 산업의 구조 조정에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한국도 사회 안전망이 튼실하면 2009년의 쌍용자동차 사태나 2001년의 대우자동차 사태가 터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거나 감추고 있다. 북유럽은 부문(공공-민간), 산업, 직업, 직능 별 고용 임금 격차가 매우 작다. 대충 그 나라 1인당 GDP의 0.8~1.5배 수준에서 오락가락한다. 한국 같으면 승자, 강자가 억울해 할 정도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교육 지표나 보건 의료 데이터(Health Data)를 통해서도, 직접 가 본 사람들의 목격담을 통해서 확인된다.

단적으로 북유럽의 교사들의 임금, 공무원들의 임금, 사회 서비스 노동자들의 임금, 전임 교수와 시간 강사의 임금 등을 보면 안다. 북유럽은 격차가 전반적으로 적긴 하지만,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처우가 관철되고 있다. 처우가 성과, 직무와 연동 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소득이 높은 사람도 있긴 있겠지만, 높은 세금과 튼실한 복지를 통해서 재분배 기능이 잘 작동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과장이다.

북유럽 같은 상벌 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본질적으로 지대(rent)를 추구하는 사교육 열풍, 고시·공시 열풍이 있을 리 없다. 또 복지 부담자와 복지 수혜자가 거의 일치하게 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좀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낸 만큼 돌려받는다. 따라서 세금에 대한 저항도 적다. 공공 부문이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기에 규모 확대도 쉽고 축소도 쉽다. 노동시간까지 짧으니 고용률도 매우 높다. 은퇴자나 실업자에게 1인당 GDP의 0.7배 수준의 연금이나 실업 수당을 장기간 지급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당연히 구조 조정에 대한 저항도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은 제대로 된 직업 직장의 평균적 처우는 GDP의 2.5~5배다. 생산력 수준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처우(직무 직능급)? 그런 개념 없다. 수익 많이 올리고 교섭력 있으면 얼마든지 올리는 것이 상식과 관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실 전 세계 노동계급 운동의 전통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직장이 속출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살인적 경쟁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저(loser)'가 된다. 루저 의식을 가지면 결혼도 출산도 미루게 되어 있다.

한국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경제 산업 구조에다 세계 경제 지각 변동의 진원지인 중국에 인접한 관계로 엄청난 구조 조정 압력은 피할 수 없는데, 구조 조정을 무슨 악인양 결사 저지하려 하고 시장 임금 수준보다 월등한 처우를 누리려고 한다면, 그 곳의 고용 확대는 지극히 어렵다. 급속한 고령화는 필연이다. 나는 국민연금이나 실업보험을 어떻게 설계하든 1인당 GDP의 1.5~2배를 장기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인당 GDP의 2.5~3배를 받았던-이는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자들에 비해 좀 낮은 것이다-쌍용차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구조 조정에 대한 극렬한 저항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잘 나가는 부문의 생산도, 부유층의 소비도 다 세계화되어 있는 현실을 되돌릴 수 없다면 '트리클다운 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세금을 통한 소득 재분배(복지국가 펌프 작동)는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 전에 사회적 상벌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지가 획기적으로 강화되면 한국 사회의 수많은 고질병들이 거의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서 불공정과 불공평이 만연해 있는 한, 그리고 그 격차가 지극히 불공평한 한, 특히 세금을 주도적으로 사용할 공공 부문이 무슨 양반처럼 인식되는 한 증세 자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격차를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즉 사회적 기여와 부담에 따라 공평하게(정의롭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 격차를 가능한 줄이고, 출발선의 평등을 이루는 것을 중심에 놓고 모든 조세, 재정, 사회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상, 경제·산업 구조상 우리가 북유럽처럼 격차가 적은 사회로 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국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맞는 경쟁 방식(자원 분배 방식)과 사회적 상벌 체계는 많은 것을 투명하게 하고(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채 시비나 신의 직장 시비는 주요한 정보가 국회와 언론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직업 및 직능이 선진국에서는 1인당 GDP 대비 어느 정도의 처우를 누리는지를 따져보면 된다. 사실 공정과 공평은 본질적으로 계량을 하는 것이기에 투명하지 않고, 평가 잣대가 없고, 평가 계량 시스템이 부실하면 절대로 작동할 수 없는 가치다. 일본 민주당이 자신들의 핵심 가치로 투명, 공정, 공평한 사회를 표방한 것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폼만 좋은 헛스윙

이 외에도 정승일·장하준의 얘기는 너무 많은 허점이 있다. 기회가 닿으면 세세하게 비판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아무리 타격 폼이 힘차고 멋있어도 공을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이론의 양대 조건인 이론적 정합성과 현실적 정합성 중에서 현실적 정합성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종이 낭비요, 독자들에게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정승일·장하준은 정치인들이 정치적 수사로 떠벌이는 자유 무역론과 세계화 예찬론과 시장 중시론(신자유주의)이라는 가설(모델)에 대해서 해박한 역사 지식과 경제학 지식을 동원하여 멋지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고민은 그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장하준이 멋있게 두들겨 팬 가설들은 보수의 가설도, 중도의 가설도, 진보 우파의 가설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두 분은 멋진 헛스윙을 했을 뿐이다. 멋진 헛발질을 했을 뿐이다. 이론적 정합성은 있어도 현실적 정합성은 없기 때문이다. 정승일, 장하준은 한국 사회의 이념 정책적 고민의 현주소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양극화, 신자유주의는 불량 안경

나는 신자유주의가 만악의 근원이라면, 아니 핵심적인 모순만 되어도 정말 좋겠다. 보편적 복지가 만병통치약은 아닐 지라도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 몇 개라도 해결해 준다면 정말 좋겠다. 박정희식 중상주의 정책을 좀 더 도덕적이고 민주적이고 유능한 제2의 박정희를 모셔서 펼칠 수 있도록 세계 경제 무역 환경이 허용하면 정말 좋겠다. 정말 마음 편하겠다. 하지만 현실을 뜯어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한국 대학의 문제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대학의 서열 구조는 악명이 높다. 이는 그 이면에 대학(학과, 학벌)을 통해서 생산되는 특권, 특혜가 크고, 배제, 차별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 중의 고질이기에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한편 대학 교수 요원에 관한 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심각하다. 교수 노동권의 과보호(이른바 중고품 시장의 미형성)와 생산력 수준 대비 너무 높은 처우의 문제도 심각하다.

대학 지배 구조(재단)의 불투명성과 전횡으로 인해 평가 보상 체계에 대한 신뢰 확보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인구 구조로 보나 한계에 이른 대학 진학률로 보나 수업료를 낼 학생 숫자가 태부족하다. 대학 수학 능력이 의미가 없는 학생들이 3~4년간의 시간과 수천만 원의 돈을 허비하고 있지만 다 함구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의 문제는 과잉 생산된 교회 및 목회자 지망생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예술대학과 그 졸업생 문제이기도 하고, 이공계 문제이기도 하고, 좋은 일자리를 찾아 헤메는 청년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이 1960년대 이후 고속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좋은 기회(일자리)를 양산하던 낙관적 전망이, (1987년과 1997년을 계기로 완전히 국면이 바뀐 상황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생긴 문제이다.

그런데 이 심각한 문제들 중에서 복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양극화라는 모호한 개념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세상을 단순 명쾌하게 보게 해서 속은 편할지 모르지만 진보의 통찰력을 몹시 떨어뜨리는 불량 안경임이 분명하다.

19세기 조선의 개화 노선

1987년 6월 항쟁, 7~8월 투쟁, 직선제로 상징되는 1987년의 정신과 관성을 혁신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1990년 전후해서는 주사파와 사노맹으로 상징되는 극좌파 운동이 있었다. 곧이어 한국노동당과 민중당으로 상징되는 합법 정치 운동이 있었다. 가장 최근의 진보 혁신 시도는 노무현 정부와 노무현의 유연한 진보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혹자는 뉴라이트 운동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 혁신 운동과 진보에 무차별 빨간 물감 뿌리기 행동-네가 청년 시절에 한 짓을 내가 알고 있으니 공개적으로 반성, 전향하라-을 결합한 것이었다. 매우 고약한 행동이자 서글픈 운동이었다. 어쨌든 노무현은 정부를 책임지고 운영하면서 진보의 짙은 그늘을 보고, 거칠지만 과감한 진보 혁신 시도를 하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유연한 진보론이 그 기념비가 아닐까 한다. 물론 노무현은 좌절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이 좌절한 지점에서 진보가 지적으로 훨씬 후퇴해버렸다는데 있다. 노무현의 경험, 통찰을 거의 흡수하지 못했고, 오류와 한계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노무현의 정신 내지 사회 정책의 총 노선은 '제3의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칙, 특권 해소,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이라는 가치를 중시한데서 보듯이 한국 사회의 기형성을 적어도 그 좌측의 비판자들보다는 훨씬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남아있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시장 경제의 외상값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특히 다양한 층위의 不均(불공평)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담대한 진보론은 단순화하면 노무현 정부가 너무 소심해서(사회투자국가론이나 수용하고), 복지 재정을 폭발적으로 늘리지 못해서, 양극화에 대한 반발로 민심의 이반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나는 단견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를 대표 상품으로 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사회적 약자와 빈자의 그늘은 그런대로 보지만, 진보가 만든 그늘은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이들은 복지 부족으로 인한 고통은 잘 보지만, 不均(불균)으로 인한 고통, 즉 힘 있는 자들과 노블레스들이 자신들의 기여와 부담에 비해, 또 우리의 경제 산업 구조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인 처우를 누림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공정한 경제도 언급하지만 문제 제기의 빈도, 강도는 복지와 비교할 수가 없다. 혁신적 경제는 복지의 부산물 정도일 뿐이다.

이렇듯 진보 동네에서 나오는 그 어떤 복지국가 담론을 뜯어 봐도 1987년의 짙은 그늘을 문제 삼는 담론을 찾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때려잡고, 비정규직 엄격히 제한하고, 최저 임금 확 높이고, 복지 펌프를 잘 가동해도 (청년들의 로망인) 공무원 수준의 직업 직장 수백만 개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복지로라도 고통과 절망을 좀 완화하겠다니 갸륵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수는 복지병이나 떠들고 삽질이나 하고 있으니…. 하지만 청년 세대와 일천 수백만 3비(비정규직, 비임금 근로자, 비경제 활동 인구에 숨어있는 실업자)층 입장에서 복지국가론은 미봉책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국지적으로는 보수 가치와 진보 가치가 과잉이지만, 전반적으로 진정한 보수 가치와 진보 가치가 과소한, 한마디로 사회의 상벌 체계라는 척추 자체가 좌로 우로 구부러진 기형 사회라는 내 주장은 1987년적 패러다임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뉴라이트의 그림자와 노무현의 그림자와 생태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분단 건국의 그늘, 산업화의 그늘 뿐 아니라 민주화의 그늘, 노동권 강화의 그늘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짙게 드리워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직까지 진보의 주력군은 1987년 거리에서 공장에서 농촌에서 이룩한 신화가 자부심으로, 또는 부채감으로 남은 사람들이기에, 감히 1987년의 신화와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나의 진보 혁신론이 얼마나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기회가 없는 청년 세대와 거대한 비기득권층을 생각하면, 또 압축적으로 성장한 만큼 압축적으로 조로하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보수도 진보도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종교 등)도 왜곡시켜 온 사회적 상벌 체계의 정상화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내 주장은 19세기 중반의 조선으로 치면 일종의 개화 노선이 아닐까 한다. 양반의 부당한 특권 철폐, 상공업 장려, 중상주의, 국방력 강화, 사농공상-남존여비 사상 등 전근대적 제도, 사상, 문화 개혁 노선과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지국가론으로 대표되는 여타 진보 혁신 노선은 본질적으로 양반의 부당한 특권 철폐, 사농공상 등 전근대적 제도를 혁파하자는데는 미온적인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주류적 당파로부터 주먹이 날아오지만, 한국을 살리는 길이자, 진보 재집권의 길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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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진이의 웃음. 2010.11.25

어제 천안에 갔다 왔다. 어머니께서 외삼촌댁에서 배추를 받아 놓으셔서
가지러 갔다 왔다. 수업 끝나고 일찍 나와 혼자.

다행히 차가 막히지는 않았다. 배추 50포기 정도에 무 한포대 사과 한 박스. 배추를 보니 엄마가 다 미리 다듬어 놓으셨다. 그 많은 배추를. 마음이 짠해진다.

올라오는 길.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으나, 톨게이트에서 서초IC까지 막혀, 10분이면 올 거리를 50분이 걸렸다. 차 막히는건 시간의 문제도 있지만 사람 성격에 너무 않 좋은 영향을 미치는 듯 하다. 어찌나 짜증이 나는지. 와이프는 어차피 막히는거 짜증 좀 내지 말라지만, 내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막힐때면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건 어쩔 수 없다.

장모님 집에 들러 배추와 무를 옮겨 놓고 집에 오니 9시가 넘었다. 규진이는 자고 있는 시간. 밥을 먹고 잠깐 TV를 보고 있는데, 방에서 규진이와 와이프가 나온다. 잠자기에 실패한 것이다. 규진이가 내가 보고싶었는지, 날 보자 마자 '씩' 웃으며 소리를 지른다. 근데, 웃음이 다르다. '눈웃음'을 치는게 아닌가. 전에 보지 못하던 얼굴 표정이다. 순간 드는 생각. 언제 저런 웃음 짓는 법을 배웠을까? 예전에는 그렇게 웃지 않았으니, 분명 저 웃음은 배운걸 것이다.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배웠겠지. 그 애기는 규진이와 같은 어린 아이는 모든것을 배울 수 있다는 애기이다. 어른들이 하는 말, 행동 등 모든 것들을.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전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이다.

내가 화내면 화내는 법을 배우고 내가 웃으면 웃는 법을 배우고 내가 책을 보면 책 읽는 모습을 배울 것이다. 무섭다. 책임이 무겁다. 조심해야겠다. 가끔 학교에서 아이들을 볼때 정말 아이들이 싫을 때가 있다.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저 애는 정말 이상해.' 근데, 결국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라는 생각이든다. "이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다, 단지 나쁜 부모만이 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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