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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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그리고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최근에 읽은 사랑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들이다.  

   

고미숙의 책은 쉬우면서 현실적인 어찌보면 노골적이었으며, 루만의 책은 너무 어려웠다. 프롬의 책은 읽으며 연신 '왜 좀 더 어릴때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내 마음속에 지나간 과거의 '사랑'에 대한 못다한 아쉬움이 많나보다) 어찌보면 말 그대로 이 책에는 사랑에 관한 '기술'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디우의 책은 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에 관해 성찰하게 만들었다. 

난 예전부터 서로 죽고 못사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가 되는 듯한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싫어했다.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우리는 하나야,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니가 기쁘면 나도 기뻐!"하는 꼬라지를 믿지도 않거니와 납득이 가지 않았으며 싫었다. 즉흥적이고 오히여 이런 사랑이 난 사려깊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디우의 이 책이 맘에 든다. 사랑을 '둘의 무대'로 말하는 이 책이. 사랑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문제와 어려움은 필연적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다른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에서의 '불협화음'도 필연적이다. 사랑은 두 남녀(때론 두 남남, 두 여여)의 만남에 의한 '둘의 무대'의 생성, 시작 즉, 사랑의 '선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무대가 형성되고 난 후 갖은 난관을 극복해가며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당연히 그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성찰과 사유는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며 생각하며 그  뜻한 바를 현실로 실천해야 사랑도 가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2011.1.11 

ps : 다음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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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햇빛눈물 2011-01-13 12:28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 감사합니다. 님의 블로그에도 좋은 내용이 많으시네요. 종종뵙으면 좋겠네요.
 

전국의 핫트랙 매장에서 매월 초에 배포되는 클래식 전문 무료 월간지 <La Musica>가 있다. 작년부터 교보문고를 들를때마다 챙겨보고 있다. 음악가에 관련된 기사라든가, 신간 리뷰 코너는 아주 유익하다. 가끔은 리뷰 기사를 읽고 관심가는 앨범을 구매하기도 한다. 

내가 음반을 리뷰할 수 있는 수준은 당연히 안되니, 매월 초 이 책을 본 후 내가 관심이 가는 음반들을 정리해 볼까 한다.

1. 교향곡, 관현악곡  

     

   

Wagner-The Ride of Valkyrie-Klaus Tennstedt-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at Tokyo 1988

단연, '이 한장의 명반'시리즈로 나온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1989년에 녹음한 말러 교향곡 1번이다.(DVD로도 나와있다. 가격이 좀 쎄지만 노려볼만 하다) 고클래식을 통해 이 음반의 발매 소식은 작년에 들었다. 고수분들에 의해 전설적인 음반으로 칭송되는 놈이다. 작년 7월에는 같은 지휘자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988년 로열페스티벌 홀 실황으로 말러 교향곡 5번 음반이 역시 '이 한장의 명반'시리즈로 나왔다.  

리뷰 기사를 옮겨 보면 이렇다. "거장이 죽기 8년 전 음악적으로는 거의 최만년에 행당하는 이 시기에 이 기념비적 녹음이 탄생했다. ... 무게중심이 완전히 4악장에 쏠려있는 불균형적인 연주이다. ... 텐슈테트는 특히 균형잡힌 고른 음햠의 구현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1악장의 젊은이의 발걸음은 음침하고 무거우며 개파와 이후의 관악 파트는 4악장의 전투적인 장면을 예견하는 것처럼 육중한 무게감을 지닌다. 랜틀러 또한 엄청난 무게감으로 엄습해오는데 기저를 긁어대는 중저음의 현악군은 거의 짓이긴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폭력적인 느낌이 강하다. 성부의 고른 음향의 구현이나 디테일의 구현, 과장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인한 소화불량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승리로 압축되는 집약적인 4악장을 듣는다면 이 모든 불만이 일거에 해소되는 해방감을 느낌 수 있을 것이다."   

 

말러 교향곡 1번의 백미는 4악장 Stürmisch bewegt(격렬하게 움직이며)이다. 말 그대로 격렬하게 연주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음반 중 가장 맘에 드는 말러 1번은 가리 베르티니의 쾰른 방송 교향악단의 1991년 일본 선토리홀 실황 녹음이다. 작년에 EMI 전집으로 구입한 것이다.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연주가 맘에 들었었다. 그 전에는 고클래식에서 다운 받은 야샤 호렌슈타인의 1969년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말러 시리즈로 진행된 1번 연주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듣는 내내 몸이 들썩들썩 거릴 정도로 나에게는 흥겹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공연이었다. 서울시향의 말러 2번과 1번은 향후 음반화 된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두번째도 역시 말러 교향곡 1번이다. 얀 빌렌 데 브린트의 네덜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반이다. 그런데 좀 특이한 말러 1번이다. 지금 흔히 듣는 말러 1번은 형식이 4악장이다. 이 판본은 1906년 유니버셜 에디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음반은 1893년 함부르크 공연 버전으로 녹음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엄밀히 애기하면 이 음반은 교향곡 1번 D장조가 아닌 '2부분으로 구성된 교향시' '타이탄'인 것이다. 흔히 들을 수 없는 곡이기에 한번 구매해 들어보고 싶은데 SACD라 가격이 거의 보통 CD의 두배이다.  

 

세번째는 후기 바로크 시대 독일 작곡가인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의 <식탁음악(Tafelmusik)>이다. 텔레만은 바흐와 헨델과 같은 동시대인으로 생전에는 그들보다 더 유명세를 떨렸다고 한다. 식탁음악은 말그대로 식사 때 그 옆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말한다. 특히 17∼18세기의 궁정이나 귀족사회에서 즐기던 일종의 사교음악을 이른다. 왕후·귀족들이 연회 때나 그 밖의 장소에서 전속음악가에게 연주시켰다고 하며 텔레만은 《타펠무지크 Musique de Table》라는 제목의 곡을 많이 작곡했다고 한다. 리뷰 기사를 보면 "'식탁음악'이라는 제목대로 여흥음악으로서도 일급이겠지만 사실 제목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게 대단히 복합적이고 조직적인 걸작이다. 마치 여러 코스의 만찬에 어울리듯 세 파트가 저마다 서곡(모음곡), 사중주, 여러 악기를 위한 협주곡, 트리오, 독주 소나타와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하나하나는 서로 다른 다양한 악기 편성과 양식을 통해 당대 유럽 음악의 모든 요소를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집에서 아들과 아내와 밥먹으며 한 번 들어봐야 겠다. 뭐 집에서 먹는 '집밥'이 '타펠뮤지크'에 어울리는 코스요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입맛에는 와이프가 해준 '집밥'이 더 맛있으니 어울릴수도 있겠다. 리뷰기사에 비교대상 음반 중에 라인하르트 괴벨 지휘의 무지카 안티쿠아 쾰른(Musica Antiqua Köln) 연주의 Archiv 음반이 고클래식에 올라와 있으니 우선 다운 받아 들어보고 구입을 결정해야 겠다.  

 

2. 협주곡 

 

협주곡으로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집으로 에밀 길렐스, 조지셀 지휘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1968년 녹음 앨범이다. 디지털리마스터링을 거친 앨범으로 3for1으로 할인 가격이 약 15,000원이다.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 편이다. 근데, 음반을 많이 들어보지도 않고 귀도 예민한 편은 아닌것 같지만 다른 음반들에 비해 EMI의 녹음은 내 귀에는 좋지 않은 것 같은 것 같다. 이상할 정도는 아니지만... 리뷰 기사는 이렇다. "평생에 걸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고 걸출한 명반을 남긴 길렐스와 베토벤의 인연은 남다르다. 강하고 엄정한 해석과 무게감 있는 터치로 어떤 곡에서든 그 개성을 발휘했던 길렐스의 모습을 오랜만에 엿볼 수 있는 기회다. ... 이 음반에서 가장 돋보이는 연주는 길렐스가 가장 아꼈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4번의 황홀한 아름다움이다. 1,2,5번의 완성도도 걸출하며 특히 5번 '황제'의 경우엔 길렐스의 호방한 스케일과 테크닉이 화려하게 살아난 작품이지만 3번, 4번 연주가 지닌 길렐스적인 매력은 대단한 것이다. (3번)첫 단추를 여는 단호한 터치. 노크 주제의 엄정함과 조지 셀이 긴장력을 높이며 서포트. 특히 선율선을 멜랑콜릭하게 휘감아 강함 속에 유연한 노래결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길렐스의 피아니즘은 천의무봉에 가깝다. 주제 선율의 아름다움을 풀어놓는 칸타빌레는 4번 협주곡에서 그 극대화된 아름다움을 증폭시킨다. 마치 초콜렛처럼 녹아내리는 벨벳 감촉의 아우라의 연주처럼, 길렐스는 피아노 협주곡 4번에 환상성과 서정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다." 나도 언제 단순히 좋다가 아닌 '초콜렛처럼 녹아내리는 벨벳 감촉'이라는 구체적인 감상평을 쓸수 있을까나? ㅋㅋ 

3. 실내 / 독주 

    

 

Hamelin plays Hamelin - Étude No.8 'Erlkönig' after Goethe

 독주곡 앨범으로는 수많은 초절기교 작품으로 청중들을 놀래켜 왔던 슈퍼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의 “단조에 의한 12개의 연습곡”이다. 이 연습곡을 만들기 위해 아믈랭은 무려 25년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을 가장 이해하는 자는 다른 이가 아닌 작곡자 자신일 것이다. 그러니 “단조에 의한 12개의 연습곡”은 아믈랭의 연주를 우선 들어야 할 것이다. 리뷰 기사는 이렇다. "아믈랭이 직접 작곡한 12개의 에튀드는 그 압도적인 특성이 극한으로 발휘되어, 장대한 화성의 울림과 마치 거대한 종처럼 울리는 피아노의 파도같은 스케일을 느낄수 있는 곡이다. 끊임없이 파되며 휩쓸고 사라지는 두터운 화성 속에는 곡에 대한 그의 완벽한 장악력과 능수능란하게 피아노를 주물러대는 장인의 솜씨를 느낄수 있다. 각 에튀드는 거장들의 스타일을 따랐다. 쇼팽, 리스트, 파가니니, 로시니, 스카를라티 스타일이라고 적혀있는 제목은 이 작품의 유래가 거장들의 비루투오적인 유산에 그 뿌리가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찾아 보니 하이페리온에서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3번도 있다. 쇼팽 피아노 소나타를 좋아하는데 기회되면 한번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예전에 클래식 처음 시작할때 막연히 사고 싶어 산 DVD가 있다. "Euroarts Premier Collection - Piano"라고 DVD 8장으로 된 박스세트다.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다니엘 바렌보임 피아노 지휘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곡 사이클이 DVD 2장에 들어있다. 사서 다른 것보다 이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박스세트에 아믈랭 DVD도 있다. 찾아서 다시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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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1-01-13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빛눈물님~~~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시간이 나면 님의 서재를 처음부터 둘러봐야겠어요~~~~.^^;;
밤이 깊었습니다,,,편안한 밤 되시길요..

햇빛눈물 2011-01-13 12:2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단지 조아라 할 뿐입니다. 배워가고 있는중입니다. 오히려 나비님의 블로그에는 저의 '감정'을 깨워주는 내용이 많어서 제가 오히려 찬찬히 둘러봐야할듯 합니다.
 

국가의 문제, 사회의 문제, 신자유주의의 문제, 자본주의의 문제... 문제 투성인 사회이다. 세계화를 애기하며 다국적 세계자본의 국내 자본시장 잠식을 문제삼으며 무분별한 자본의 흐름을 방기하는 친자본적 정부를 질타하고 있다. 규제를 애기하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들은 그렇게 문제시하는 '세계화'된 사회에서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 희생되는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에 대해, 북한의 힘없는 민중에 대해, 굶주린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가끔 세종문화회관 앞 거리를 걷다보면 거리에서 'save the children'같은 국제적 비영리단체에서 나와 회원가입 및 관심을 촉구하는 행사를 하는 경우를 본다. 나나 대부분 지나가는 행인들은 핸드폰에 책에 음악에 옆 사람과의 대화에 또는 귀찮아서 무관심으로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나 또한 그러니 어쩌라 말 하기는 낯뜨거운 일이다.(그래도 몇몇 사회단체에 기부활동은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사회문제에 뛰어든다면 그것도 어찌보면 재미없으며 사회에 또다른 문제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누군가 하겠지하는 마음을 누구나 한다면, 고종석씨가 말하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의무"가 어쩌면 "무관심은 인류의 의무"로 변해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비관적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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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2011.1.5  인류가 과연 21세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21세기의 첫 10년이 흘렀다. 인위적으로 새긴 시간의 금에 무슨 별다른 뜻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새로운 연대는 희망과 동행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류가 새 세기를 맞으며 막연히 품었던 희망은 지난 10년간 속절없이 무너진 모양새다. 9·11 사건을 빌미로 삼은 서남아시아 지역의 전쟁은 지난 10년 내내 포연을 멈추지 않았고, 그 포연이 마침내 한반도에서까지 피어올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요약될 10년간의 경제 질서도 크고 작은 금융위기를 낳으며 인류를 불안으로 몰고 있다. 계급과 문화(종교)와 국가 이성은 그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난 10년을 갈등의 한가운데로 밀어붙이는 열정의 기원이었다. 그것들은 때로 나란했고, 때로 교차했다.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소속을 잊고 인종주의자가 되었으며, 이슬람 전제국가의 지배계급은 서방 기독교 세계의 지배계급과 거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혼돈이었다. 그 혼돈 속에서 피아의 구분, 적과 친구의 구분은 쉽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은 그런 피아의 구분, 적과 친구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우리 시야 안의 가까운 앞날에는 올 것 같지 않다. 아니, 영원히 오지 않을 것도 같다. 그것이 근원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 단계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상적 세상이 오기 전에 인류는 제 욕망들을 발산하는 과정에서 멸종할 수도 있다. 우리의 배려가 자신이나 직계가족 바깥으로까지 번지는 법은 거의 없다. 이웃의 슬픔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 용해되거나 심지어 기쁨의 원료가 되기까지 한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자신이나 가족이 의제(擬制)라는 과정을 통해 동심원을 그리며 집단으로, 지역으로, 국가로 번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우리'와 '그들'의 구별은 엄연하다. '형님 예산' 에피소드는 그 구별의 천박한 일단이다.

지구 식량 자원이 넉넉해도 세계 도처에 굶는 이들이 수두룩하듯, 대한민국 경제력이 그 주민 집단 모두를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어도, 우리 주위에는 굶는 아이들이 지천이다. 휴전선 북쪽에서 굶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연평도에서 죽은 이들을 그저 '운 나쁜' 사람들로 여기거나 '우리'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도구로 삼을 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평화 체제를 만들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게다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몇 곱으로 멀어진다. 팔레스타인의 일상적 죽음들과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이 애달파 내가 피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가. 세계화는 사정없이 진행되지만, 우리는 세계시민이 되지 못했다.

세계화는 진행되지만, 우리는 세계 시민이 되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의 최첨단 금융업이든 한국의 원시적 대부업이든 파리아(천민) 자본주의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이 파리아 자본가들이 단기적 '먹튀'에 집착하는 것은 대중의 분노에 따른 사회 불안정 때문이지만,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나누어 대중과 화해할 생각이 없다. 위키리크스가 최근 폭로했듯, 미국의 세계 경영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천민적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선양했던 시민적 자유는 그 후손들의 손에서 무자비하게 훼손되고 있다. 청와대의 대포폰이나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삼성SDI의 노동자 불법 도청을 그 위에 포개는 것은 자연스럽다. 게다가 4대강 사업이라니.

물론 생태근본주의자들의 이상주의적 실천은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고, 그것이 꼭 바람직한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이미 도를 넘어섰다. 이른바 4대강 사업은 인간의 정신 나간 탐욕이 낳은 참혹한 풍경이다. 박테리아에서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지구 생태계의 구성원 모두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형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인류가 지구 생태 역사상 결코 있어본 적 없는 잔혹한 포식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적어도 조금씩은 생태주의자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과학 소설이나 에세이들은 흔히 먼 미래를 그린다. 그러나 인류가 과연 21세기라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인류가 지난 10년간의 행태를 계속한다면, 쉬이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 힘들다. 그러나 낙관주의는 인류의 의무다. 노예에서 농노로의 변화가 발전이었다면, 농노에서 임금노동자로의 변화가 발전이었다면, 우리는 또 다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계급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구속되지 않은 세계시민으로의 발전을, 지구 만물의 너그러운 맏이로의 발전을.

고종석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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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런 개념있는 기업가(?)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단순히 싸게 해서 많이 이익본다는 단순한 경제논리에 사로잡혀있기보다는, 제대로된 서비스로 제대로된 기업활동을 하는.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은 대부분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난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영화들 보면 부시고, 터지고, 깨지는 장면을 떠올리면 대부분 스펙타클한 화면만을 생각하지 미처 생생한 소리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씨너스 이수. 집에서 멀지 않으니 언제 한번 저 상영관에 가서 조용히 귀 좀 호강시켜 줘야겠다. 물론 주위에 팝콘이나 콜라 빨대 물고 있는 인간들이 없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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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1.10  “이제 영화관의 경쟁력은 음향입니다" 

운영하는 극장들에 거액 들여 최적 설비 갖춰
작품 맞춰 수시로 리세팅…“미쳤다고들 해요”
주옥같은 영화 선별 ‘시네마 큐레이터’이기도   

 

사운드로 승부하는 ‘씨너스 이수’ 정상진 대표 

지난해 5월 서울 용산에서 경험한 <아이언맨 2>는 최악이었다. 문제는 내용도, 화질도 아닌 사운드였다. 최대한 올린 듯한 볼륨은 귀를 왕왕 울려대고, 고음역은 귀청을 찢을 듯하고 저음역은 너덜거렸다. 특히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 깜짝 등장하는 콘서트, 전기채찍을 휘두르는 위플래시(미키 루크)와의 대결 장면 등에서는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차라리 고문이었다.

지난 4일 뒤늦게나마 서울 사당동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씨너스 이수 정상진(43) 대표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아 그때요? 우리는 리콜상영을 했어요. 당시 스크린 뒤 저음역 스피커인 서브우퍼 8개 중 4개가 터진 거예요. 어쩌다 오는 분들은 잘 모르지만 자주 오는 관객들은 금방 알아요. 예매 관객들한테 모두 알리고 극장에 현수막을 붙였어요. 그 자리에서 다시 보여드린다고. 영화관에서 리콜한다는 얘기 처음 듣죠? 우리는 가끔 하거든요.” 
 
영화관 통로 천장에 쓰인 ‘모든 것이 끝나고 남는 건 필름뿐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이 재미있다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등의 구절에 정 대표의 고집이 묻어나고 상영관 입구 벽에 쓰인 ‘19,200와트, 세계 최강의 사운드시스템, 롤링스톤스가 고집한 전설의 파워앰프 EV-P3000, 세계 최초 영화관 사용’이란 문구에 자부심이 배어 있다. 다른 극장의 출력 규모가 7000~8000와트임을 아는 이는 안다는 투다.

“문제는 설비, 즉 돈입니다. 200석 규모의 상영관이면 앰프가 있는 영사실에서 스피커가 달린 스크린까지 100m 정도 되죠. 그 거리에 싼 케이블을 깔면 출력이 70%밖에 안 나요. 나머지 30%를 볼륨으로 커버하려니 왕왕 울리는 거죠. 앰프도 그래요. 4웨이 스피커의 경우 적어도 최소 10개 이상이 필요한데 보통 영화관에서는 4개가 고작이죠. 그렇게 되면 소리가 섞이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1개관 설비에 통상 8000만~1억원이면 될 것을 씨너스 이수에서는 9억원을 들였다고 한다. 순도 99.9999의 3㎜ 선 네 가닥을 꼬아서 만든 스피커 케이블은 1m에 100만원짜리 특제다. 그리고 석 달에 한 차례 상영관마다 마이크 5대를 설치하고 사운드를 점검해 다시 세팅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소리의 틀어짐을 바로잡는 것이다. 큰 영화가 들어올 때는 별도로 한다. 여벌 설비를 갖춘 것도 자랑이다. 스피커가 터지면 영화 상영중에도 컴컴한 스크린 뒤로 가 갈아 끼운다. 알 만한 관객들은 이수에서의 영화 관람을 ‘소리로 경험하는 4디’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죽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영사실과 사무실 직원 사이에서 정 대표는 ‘정틀러’라고 불린다.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싫어서 붙인 이름은 아닌 눈치다.

“남들은 당연히 ‘또라이’라고 하죠. 돈 엄청 날렸어요. 애초 과장된 영화적인 소리를 내는 돌비시스템을 모르고 하이파이 개념으로 접근하면서 비싼 스피커가 뻥뻥 나갔거든요. 주변에서 만류를 많이 했어요. 제이비엘(JBL)에서 수십억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시스템을 만드는데 네가 어떻게 하느냐면서요. 해보지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실패해도 일단은 해보자고 덤볐어요. 그래서 2004년에 개관한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내 씨너스 이채와 씨너스 이수는 상영관마다 설비가 다 달라요. 결국엔 프런트의 경우 피에이(PA: 대중용 음향 확성 장치)로 결론을 내렸지요.” 서울 이화여대 모모하우스는 그 실험 덕에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게 됐다. 일본 영화관 업계에서도 그를 불러 자문을 받을 만큼 음향 전문가가 됐다. 

그는 대학 영화과 재학 때의 경험으로 소리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했다. “영화를 제작할 때 녹음실에서 들어보면 대사가 잘 들려요. 그게 영화관에 가면 뭉개져 안 들리는 거예요. 특히 아주 낮은 남자의 목소리나 높은 여성 목소리가 그렇더군요. 대사 한마디에 테마가 들어 있을 수 있는데 말이죠. 괜찮은 영화를 영화관의 잘못으로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면 문제죠. 13.1 채널이고 15.1 채널이고 뭐고 대사가 잘 들리는 영화관을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앞으로 경쟁력은 음향이라고 했다. “완전 에이치디 홈시어터의 화질은 영화관을 능가합니다. 영화관 스크린이 더 크다지만 일단 영화에 빠져들면 그 차이는 느낄 수 없어요. 온라인 동시개봉 시대가 되면 영화관의 경쟁력은 사운드밖에 없습니다. 집에서는 쿵쾅거리지 못하지만 영화관에서는 그게 가능하거든요.”

더불어 그가 표방하는 것은 시네마 큐레이터. 갤러리에는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설명하는 큐레이터가 있는데, 영화관에서는 왜 표만 팔고 마느냐는 거다. 2008년부터 매달 ‘미니씨어터’ 이름으로 다시 보고 싶은 추억의 영화, 재능있는 신인 감독의 쇼케이스, 진가가 묻혀버린 보석 같은 영화를 선별 상영해 왔다. 월·화·수·목 저녁 8시 고정이다. 이번 1월에는 중국 작가주의 영화의 현재를 대변하는 자장커 감독의 <24시티> <무용> <스틸 라이프> <세계>를 튼다.

그는 2007년부터 해마다 11월이면 여성을 위한 성담론장인 ‘핑크영화제’도 열고 있다. 여기서는 50여년 동안 에로스를 소재로 실험정신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명맥을 이어온 일본의 핑크영화를 상영한다. 제작비 300만엔, 촬영기간 3~5일, 35㎜ 필름 촬영, 베드신 4~5회, 러닝타임 60분이라는 룰만 지키면 자유로운 창작이 보장되는 일본 독립영화의 한 장르로 감독들의 등용문 구실을 하기도 한다.

“남산자동차 극장, 씨너스 이수, 씨너스 이채 등 영화관 세곳을 운영한다니 부자라고 해요. 지금이라도 청산을 하면 부채만 150억원 정도 돼요. 죽을 때까지 못 갚을지도 모르죠. 그럴 바에야 즐겁게 살자는 게 제 모토입니다. 영화관 건물을 사무실로 임대하면 지금보다 세배 정도 더 벌 수 있어요. 실제 그러라고 권하는 이도 있어요. 앞으로 30년간 작은 수금 가방을 들고 남의 사무실을 전전하는 거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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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1.10  “동해 표기 많이 찾아내면, 독도 자연스레 우리땅”
[한겨레가 만난 사람] 국제지도수집가협 한국대표 김태진씨 


» 일년에 절반은 유럽의 고지도 경매시장에서, 나머지 절반은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인터넷 도서유통 사업가와 ‘동해·독도 지킴이’로 살고 있는 김태진씨가 연초 <한겨레>를 찾아 그동안 수집해온 한국 고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애국자냐고요? 외국서 오래 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되지요. 저 역시 1988년 미국 땅을 밟은 순간부터 한번도 ‘한국’을 잊은 적이 없으니까요.”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영어 원서 전문 인터넷서점 티메카(TMECCA)를 운영하고 있는 재미동포 김태진(47)씨의 대답은 지극히 모범적이다.

물론 그의 말처럼, 나라 밖으로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들 한다. 이런저런 꿈이나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이 땅을 떠나 사는 동포들에게 ‘조국’의 의미는 한층 절실해진다. 한국산 라면 한가닥에 눈물나게 감동하기도 하고, 이국의 도시에서 풍기는 김치찌개 냄새를 쫓아 하루종일 뒷골목을 헤매기도 하고, 소박한 향수에서부터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 경기를 보며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며 일희일비하고…, 이런 정서들을 애국심의 발로라고 친다면 700만명을 헤아리는 재외 한인 누구나 예외없이 애국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또다른 명함인 고지도 전문 사이트 ‘파인드 코리아’(www.findcorea.com) 운영자로서는 100% 정답은 아니다. 그에게 ‘애국’은 일상의 업이자 삶의 주요한 목적이다.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 대표인 그는 동북아역사재단 중심으로 추진중인 서양 고지도 확보 ‘전쟁’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 바로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동해’와 ‘독도’를 지키는 싸움이다. 한-일뿐만 아니라 중-일, 중-러 사이의 영토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신묘년 새해 그는 어떤 ‘영토 수호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까?

-우선 ‘파인드 코리아’가 궁금하다.

“세계 지도, 엄격하게 얘기하자면, 16세기 서유럽인들이 신세계 신대륙을 찾아 동양으로 탐험에 나서면서 작성되기 시작한 서양 고지도 가운데 한국, 동해, 독도가 표기된 지도들을 수집해 공개해 놓은 사이트다. 2005년부터 최근까지 확보한 세계 20여개 대형박물관의 고지도 4000여개의 목록과 한국 관련 고지도 원본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2009년 8월15일, 광복절을 기념해 사이트를 열었는데 1주일 만에 일본인 해커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학술연구용으로 회원에게만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회원인 한 대학교수로부터 제자들을 비롯해 국내 연구자들이 고지도의 원본을 실제로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얘기를 듣고 100여장(5억원어치)을 제공하기도 했다. 성신여대 지리학과 대학원 과정에서 이 사이트를 활용한 석사 논문 2편과 박사 논문 1편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큰 보람이다.”

-애초부터 고지도 연구나 수집에 관심이 많았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88년 미국으로 유학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을 걸쳐 노스럽대학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했다. 99년 한국-미국-유럽을 잇는 인터넷서점 티메카를 창업했다. 처음엔 모든 종류의 책을 취급하기도 했지만 점차 한국 쪽 수요가 많은 영어나 외국어 원서 유통에 집중해 지금까지 국내 공공기관에 납품하고 있다. 그러다 2005년 국립중앙도서관을 통해 한국 관련 고서나 고지도를 구입해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조사에 나섰다. 이전까지 한국은 일본을 통해 간접구매를 해왔는데 그때부터 옥션·크리스티·소더비 등 국제 경매시장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서양문물 개방은 그렇다 치고, 한-일 강제병합 시기부터만 잡아도 무려 1세기나 일본에 뒤진 셈이다.”

‘동해·독도 표기’ 서양 고지도 공개사이트 운영
정부기관 의뢰로 수집의 길…4천여 목록 모아
“한국해·독도 모두 나온 ‘아틀라스’ 낙찰 기뻐”

-그러고 보니 창업 초기 아마존닷컴에 도전하는 유망 벤처기업가로 소개된(<한겨레> 2000년 7월24일치) 적도 있는데?

“그때는 정말 야심만만했다. 이스트우드북스에서 5년간 국제 도서시장을 섭렵하면서 50만여권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갖췄고, 1만5000여개의 전세계 학술세미나 정보, 전문학술포럼 네트워크도 서비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아마존에 뒤진데다 자금력도 달려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고지도 경매에 뛰어들면서 로스앤젤레스 사무실을 접고 2006년 뉴욕으로 옮겨 제2 창업을 했다. 그날이 바로 8월15일이어서, 앞으로 해마다 기념할 만한 일을 하자고 결심했다. ‘파인드 코리아’가 그 시작인 셈이다.”

-고지도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별로 없었다면 쉽지 않았겠다.

“그래서 우선 한국 관련 고지도의 목록과 소재 조사에 몰두했다. 1년 만에 1000개의 목록과 이미지를 파악해서 제시했더니 모두들 놀라워했다. 첫출발이 좋았다. 2007년 소더비에서 1735년판 프랑스 지도 제작자 당빌(D’Anville)의 지도첩 <아틀라스>(신중국지도첩)를 낙찰받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전도(Royaume de Coree)와 함께 한국해(Mer de Corea·동해)·울등도·독도가 모두 표기된 가장 오래된 서양 고지도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15년 앞선다. 청나라 강희제 때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주문해 최초의 실측지도인 <황여전각도>를 제작했는데, 선교사들이 이 정보를 몰래 본국에 보내 당빌이 옮겨 그린 것이다. 이 지도첩에는 일본만 나온 지도에 ‘한국해’로 표기한 것도 들어 있다. 이를 계기로 국내 주요 기관들의 구매 대행도 맡게 됐다.”

-서양 고지도에서 우리나라와 ‘동해’는 언제부터 등장하나?

“16세기 식민지 개척에 나서면서 항해용 ‘해도’를 작성하는 연대와 일치한다고 보면 된다. 마젤란과 바스쿠 다가마의 포르투갈에서 시작해 스페인, 콜럼버스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순이다. 특히 인쇄술이 발달한 18세기 프랑스 제작본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한국해·동방해·동해 등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인쇄본으로는 1595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세계전도에 ‘조선해’(Mer de Corai)가 처음 등장한다. 원본은 이탈리아의 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어 구할 수 없다. 이 원본을 보고 필사한 1615년 고딩호 제작본이 있다. 우리나라가 등장하는 필사본으로는 1568년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것으로, 스페인 마드리드도서관에 있다. 더 오래된 것은 페르시아에서 제작한 것으로 ‘신라’가 등장하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내가 경매에서 구입한 가장 오래된 지도는 1594년 제작된 인쇄본으로 2009년 초 옥션에 나왔다. 2000만원쯤. 우리나라를 여러개의 섬으로 그려놓았는데, 쓰시마도 포함돼 있다. 일본 역시 여러개의 섬을 ‘새우머리 모양’으로 나열해놓았다. 최근엔 1646년 제작된 더들리(Dudley)의 ‘조선해’ 표기 원본도 구했다.”

-지금까지 우리 쪽에서 공개한 고지도에는 ‘한국해’와 ‘독도’ 표기가 많은데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가?

“‘파인드 코리아’의 지도 목록을 분석한 김민희(성신여대 석사 논문)씨의 내용을 보면, 16세기까지 중국해·동양해로 나오다 1615년 고딩호 제작본부터 한국해가 등장해 18세기 후반까지 한국해 160개, 일본해 21개로 압도적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서 역전당한다. 특히 19세기 초 나가사키에 살았던 네덜란드 학자 시볼트가 서양 지도의 전범으로 꼽히는 <항해도첩>(라 페루즈·1797년)을 근거로 제작한 일본 지도를 서구에 소개할 때 원본의 ‘한국해’를 ‘일본해’로 고친 영향이 크다. 19세기 전반에는 ‘일본해 66개, 한국해 34개, 병기 4개’로, 후반에는 ‘일본해 71개, 한국해 4개, 병기 1개’가 된 상태다. 같은 대학의 최미선씨는 석사 논문에서 ‘세계 주요 100대 지도 사이트’를 분석했는데, 일본해 41, 병기 3, 복합 10, 무표시 46개였다. 지금 현상적으로는 우리 쪽이 불리하게 보이지만 역사적 연원과 배경을 차근차근 따져서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접근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18C 한국해 ‘압도적’ 19C 일본해로 ‘역전’
세계지도 ‘동해 병기’로 바꾸는게 1차 목표
“미 의회 미분류 고지도, 한국 주도적 참여를”

-다른 인터뷰에서 ‘한국의 아킬레스건’도 있다고 했던데.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곤여만국전도>(보물 제849호)의 필사본이다. 16세기 말 중국에 천주교를 최초로 전래한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든 목판 인쇄본을 선조 때 베이징에서 파견됐던 사신 또는 소현세자 일행이 가지고 왔고, 1708년 숙종 때 관상감에서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바로 ‘일본해’로 적혀 있어 현재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첫번째 증거로 제시해 놓고 있다. 물론 우리 학자들은 ‘단지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일본 쪽 바다를 일본해로 부른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실제로 ‘동해-창해-일본해’처럼 두 나라 연안과 그 사이 공해를 구분해 적어놓은 사례도 있고, 19세기 초 일본인이 제작한 <신정만국전도>처럼 ‘한국해’로만 표기한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그동안 고지도 찾기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거나 곤란한 경험이 있다면?

“우선 ‘곤여만국전도’를 놓쳐서 아쉽다. 전세계에 원본이 7개쯤 있는데, 일본은 3개나 갖고 있고 나머지도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된 상태여서 구하기가 어렵다. 최근에 드물게 경매에 나와 한국 기관들에 구매 제의를 했으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값(100만달러)이 비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당장 우리 쪽에 유리한 사례만 찾으려는 경향은 문제다. 또 유럽의 경매시장이나 책박람회, 고서점 등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기 때문에, 단순히 동해나 독도 지도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아주 가치있는 물건들도 종종 발견하는데 한국이 아닌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팔릴 때가 많아 안타깝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60돌을 넘어 참전 미군 세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소장품들이 경매시장에 쏟아져나오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든든한 후원자가 없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끼리 과열 경쟁하는 것도 문제다.”

-한국 정부나 학계 등에 제안하고픈 얘기가 있다면?

“감히 바람이 있다면 고지도 찾기를 비롯해서 동해·독도 관련 조사와 연구작업이 꾸준히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졌으면 한다. 정부 쪽에서는 정책과 물적 지원이 중요하다. 국가 예산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일본이나 미국처럼 민간기업 쪽에서도 후원자로 나서줬으면 좋겠다. 기관이나 개인마다 별개로 진행하다 보니 연구가 진전되지 못하고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학계에서는 연구 성과의 공유와 연대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고지도에는 대부분 고어가 쓰여 있어서, 지리학자들만으로는 해독이 어렵다. 언어학이나 문화인류학 같은 연관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도 절실하다.”

-그동안 경험에 비춰 동해·독도 지키기 전략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사실상 국제 경매시장에서 홀로 뛰다 보니 벅찰 때가 많다. 일본은 알려진 경매 전문가만 4명이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의 사서가 지난해 들려준 일화다. 회원 1명이 1회 4개씩 고지도 열람이 가능한데, 어느날 한국 외교관 10명이 왔다 가더니 1주일 뒤에 일본에서 20명이 몰려오더란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일본의 전략을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출발은 100년 뒤졌지만 지금이라도 정보의 기선을 제압하면 재역전할 수 있다. 미 의회 도서관만 해도 대부분 아시아 지도인 고지도 7000여개 가운데 1000개만 분류된 상태인데, 한국 정부가 후원을 제공해 분류작업을 주도한다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다. 세계지도협회 총회 같은 국제행사 때 한국 연구자들을 인턴으로 파견해 전문인력을 키우고 정보망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유용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세워놓은 실천전략이 있다면?

“비전문가로 출발한 까닭에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고 전문가들의 조언이 아쉬울 때가 많았는데 2009년 일본 관련 강연회에서 처음 뵌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님의 조언과 감수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는 것’이라는 말씀을 지침으로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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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www.evernote.com 2014-04-19 05:28 
    전지연-지리관련소식 - “동해 표기 많이 찾아내면, 독도 자연스레 우리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