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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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스콧 피츠제럴드를 생각하면, 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 속 주인공이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 1920년대의 한가운데 예술가들이 모여있던 한 장소로 가서 신기한 경험을 하는 내용이었다. 영화에서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가 술을 마시며 파티를 즐기던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좋아하여 번역가로도 활동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엮은 책으로 술에 기대어 악화일로의 길을 걷던 와중에 쓴 소설과 에세이가 실려 있다. 마지막에야 드러났던 생의 진면목이 아름다움의 형태로 드러났다. 암울한 시대 절망을 딛고 새로운 광명을 찾으려고 애썼던,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1920년대에 피츠제럴드는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어 유럽 여행 중이었다. 성공에 힘입어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여행은 알코올 의존증과 신경쇠약을 불러왔다.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삶은 여러 작품의 인물과 배경으로 나타났는데, 작품 속에서 우리는 삶의 한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이국의 여행자에서 젊은 부부는 유럽 여행 중이다.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중에서 가깝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행 장소에서 마주치는 부부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켈리 부부가 행복할 때는 행복한 모습으로, 건강이 나빠져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는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그 부부와 친해지고 싶지 않다고 여긴다. 자신들과 거울처럼 닮았음을, 그 모습이 자신들의 모습임을 깨닫는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삶을 들여다본다. 자기의 삶을 작품 속에 투영시켜 더 나은 삶을 도모하고자 함일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한순간에 어그러진다. 바람을 피운 남편은 건강을 위해 멀리 요양을 떠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남겠다고 한 아내를 향한 마음은 절망의 다른 모습이다. 작품의 진가는 오랜 시간이 지나 드러나기도 한다. 크레이지 선데이처럼.


 

무라카미 하루키가 고등학교 때 읽고 깊이 감탄했었던 작품 바람 속의 가족을 보자.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생을 망친 의사가 거대한 토네이도를 만나 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약국을 운영 중이던 의사는 동생의 아들이 머리에 총알이 박혀 목숨이 위태로워도 손이 떨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포탄 소리가 기관총 소리 같은 탁탁거리는 소리로 들렸던 토네이도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집이 사라진 풍경을 생각해보라. 절망밖에 없는 상황에서 의사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조카의 머리에서 총알을 빼준다. 아빠를 잃은 어린 소녀를 생각하는 것 또한 새로운 변화다. 아마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으리라. 희망을 찾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며 아빠를 잃은 소녀를 딸처럼 생각하며 변화를 꿈꾼다.


 

그의 삶은 새로운 식림(植林)을 필요로 했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토양이 그 숲의 성장을 다시 한번 지탱할 수 있기를 그는 바랐다. 그의 토양은 최고의 토양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귀 기울이고 관찰하는 대신 과시하는 약점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211페이지, 어느 작가의 오후중에서)

 


아내는 요양 중이고, 빚이 쌓였으며 딸을 돌보아야 하는 작가는 글을 쓰지 못해 고민이다. 산책을 나서 본다. 새로운 풍경을 보면 글을 써지지 않을까, 바깥 공기를 쐬면 괜찮지 않을까.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한다는 건 남다를 것 같다. 더군다나 20년 전에 번역했던 작품을 다시 엮는 작업은 어떻게 보면 큰 즐거움이지 않을까.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고 다듬어 새로운 작품으로 내놓은 작업 말이다.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피츠제럴드의 후기 작품집이다. 물론 사십 대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작가의 마지막 즈음에 쓴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망가진 3부작을 비롯해 다섯 편의 에세이는 작가의 상황을 좀 더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열정과 활력이 너무 이른 시기부터 끊임없이 졸졸 새기 시작한 그 틈이 어디인지 알아내야 했다. (332페이지, 취급주의중에서)


 

인생이 낭만적인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너무 이른 시기에 거둔 성공의 대가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이를 통해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돈이라는 주요 목표가 당연시되고 흔들리는 명성이 그 매력을 잃었을 때, 나는 영원한 해변의 카니발을 찾아 꽤 오랜 세월을 허비했다(솔직히 나는 그 세월을 후회할 수 없다). (354페이지, 젊은 날의 성공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츠제럴드를 좋아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영미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역과 해설, 후기가 수록되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피츠제럴드의 자전적인 경험이 응축된 후기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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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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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신작 알림이 뜨자 반가움이 먼저 들었다. 언젠가 신작이 나왔나 하여 인터넷 서점에 정세랑이라는 이름을 검색해본 적도 있다. 애타게 기다렸던 작가가 설자은 시리즈로 돌아왔다. 열 권쯤 출간되면 더 좋을 역사 추리물이다. 더군다나 남장 여자라니, 로맨스 소설 같지 않은가.

 


소설의 배경이 신문왕이 통치하던 통일신라시대다. ‘전쟁이 끝난 통일신라는, 한껏 융성을 향해서 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먼 시대를 거울삼아보는 일은 언제고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는 작가의 말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소설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자은 시리즈는 삼국유사 시리즈 다음 버전 같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설자은은 미은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당나라 유학이 예정되었던 오라비 설자은이 죽자 그를 대신에 유학길에 올랐다. 자은과 외모가 비슷하고 머리도 비슷하게 좋다는 이유였다. 셋째였다가 첫째가 된 호은의 이상한 판단 때문이었다.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 드디어 금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배에서 누반박사가 되려고 했으나 나라가 망해버린 백제 출신의 목인곤을 만났다.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추리 형식의 소설이다.

 


배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과 손바닥에 붉은 글씨가 새겨진 업화 사건, 길쌈 대회의 부서진 베틀, 월지에서 매잡이의 죽음 등 설자은의 식객이 된 목인곤과 함께 활약한다. 속을 알 수 없는 설호은, 산학이 뛰어나 집안 살림을 이끄는 설도은, 죽은 설자은의 연인이었던 산아, 위압적인 몸으로 나의 흰 매가 돼라고 말하는 왕까지 등장인물의 면면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에게 펼쳐질 미래다.

 


일찌감치 자은이 여성이란 걸 알아차린 인곤은 자은을 위해 어깨를 넓게 보일 물건을 만들어 주고 곁에서 자은을 돕는다. 설자은과 한때 연인이었을 거로 보이는 산아의 부탁으로 압화 사건을 해결하고, 자은의 부탁을 산아가 들어준다. 그런 자은이 탐탁찮은 산아의 지아비 진오룡의 견제와 질투 섞인 눈빛은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소설에서 과거의 역사를 알게 된다. 물론 설자은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설자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의 생활과 생각은 과거의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자료 조사와 더불어 작가의 상상력으로 빛나는 캐릭터가 탄생되었다. 여성의 몸으로 남성들 세계에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낼 독보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자은에게 일어날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갈 인곤과의 티키타카 케미도 기대해볼 만하다.


 

더군다나 다음 시리즈부터는 왕의 매가 된 설자은의 활약이 시작될 터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목인곤과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갈 텐데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여성의 몸으로 남자 행세를 하는 설자은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미스테리 소설이 주는 즐거움은 사건의 해결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주인공의 재치가 빛나는 순간이다. 여성을 숨기고 남성으로 살아야 하는 자은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며, 말없이 옆에서 챙겨주고 배려하는 목인곤의 존재가 이 소설을 더 빛낸다. 역사 속 이야기들과 지명 하나가 하나의 사건, 이야기로 나타나 흥미롭다. 다음 시리즈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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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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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의 클레어 키건이 11년만에 발표한 중편소설로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맡겨진 소녀처럼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오래전 아일랜드의 1985년에 다다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바라봄과 동시에 아일랜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머무를 수 있다.

 


사십 대를 바라보는 남자가 바라본 세상은 녹록지 않다. 문 닫는 회사들이 속출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가족들이 있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세탁소에는 젊은 여성들이 하루 종일 신발도 없이 세탁 작업을 하며 먹을 것이 충분찮아 보인다. 석탄·목재상 빌 펄롱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석탄 배달을 갔다가 석탄광에 갇혀 있던 한 아이를 발견했다. 하룻밤을 갇혀 있었던 소녀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내와 딸 다섯 명이 있지만 수녀원에서 아이가 받는 취급이 못내 안타까웠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가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44페이지)


 

만약 펄롱이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간다면, 그의 삶은 아주 불편해질 것은 당연하다. 수녀회는 그의 딸들이 다닐 학교와도 연관되어 있으며 교회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가 수녀원에서 소녀를 발견하고 돌아왔을 때 마을에서는 벌써 소문이 퍼졌었다. 한 식당의 주인은 그에게 조심하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들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라는 얘기였다.

 


모든 소설이 그렇듯,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게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직장을 잃은 가족의 아이들에게 동전 몇 개를 주는 일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추운 날 야적장의 자물쇠가 얼어 모르는 집의 문을 두드렸을 때 친절한 여주인은 끓인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건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펄롱의 내면은 복잡하다. 아내 아일린과 다섯 명의 딸들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삶을 꿈꾸었다. 친절을 베푼 여자와의 소박한 삶은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미시즈 윌슨의 배려와 보살핌을 받았던 때, 자기의 아빠가 누구일까 궁금했던 때를 떠올렸다.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면서 어렸을 적 선물로 받고 싶었던 지그소 퍼즐을 갖지 못했던 크리스마스의 쓸쓸함 등을 말이다. 선물을 받지 못했을뿐더러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는 어린 소년이 울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라. 아버지의 존재를 애타게 기다렸던 그는 결혼을 한 후에도 미시즈 윌슨에게 자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어쩌면 부잣집 핏줄일 거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걸까. 우연히 누군가의 말에 의해 친아버지를 짐작할 뿐이다.

 


한 남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따뜻하다.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다정한 마음으로 바라볼 줄 알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 그뿐일까. 가족을 사랑하는 그는 다른 삶을 향해 자기가 짜놓은 틀 안에서 엇나가지 않는다. 평등한 삶을 바라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세상에 맞설 용기를 얻는 게 아닐까.


 

이 소설은 배우 킬리언 머피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하니 영화를 기다려봐도 좋겠다. 두 번 읽은 소설, 감동의 의미는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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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퓨테이션: 명예 1~2 세트 - 전2권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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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TV 시리즈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원작자 세라 본의 신작 소설이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레퓨테이션: 명예는 영국의 노동당 하원의원이 집 현관에 잠금장치를 여러 개 설치하고 지역구 사무실에 테러에 대비한 패닉룸을 마련했다고 밝힌 실제 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소설이다.

 


엠마 웹스터는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리벤지 포르노법안을 통과시키며 여성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인물이다. 푸드 뱅크에 가야하는 아이들, 즉 엠마의 학생들의 가난에 분노했기 때문에 지방 의회의 정치에 입문했다. 엠마는 지역구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한편, 트위터(X) SNS에서 악플에 시달린다. 정치인이지만 여성으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것 같다. 딸 플로라가 자기를 괴롭히던 레아의 나체 사진을 찍어 다른 아이에게 보내면서 사건화된다. 함께 리벤지 포르노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언론의 역할을 했던 마이크로부터 딸의 기사를 쓰겠다는 말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마이크가 여성 의원 3명이 사는 집 계단참에 떨어져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엠마 웹스터는 살인 사건 용의자로 경찰에 붙잡힌다.





 

소설에서 강력하게 표현하는 주제는 여성 정치인으로서 미디어에 노출된 삶과 악플, 언어폭력, 살해 협박에 관한 두려움과 공포다. 자녀를 언론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정치인으로서 자신도 보호해야 한다. 명예를 지켜야 했다. 정치인으로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걸 막아야 했다. 정치인이 하나의 사건으로 미디어에 노출되면 그들의 가족의 일상이 무너진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기나긴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다. 왕립기소청은 엠마가 마이크를 의도적으로 살해했을 거라고 유죄를 주장할 것이며 엠마의 변호사는 배심원단의 마음을 무죄로 이끌어야 했다. 엠마는 명예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언론이 보고 싶어 한 장면은 내가 극도의 불안을 표출하는 모습이었다. 취재진의 무례한 태도가 생방송으로 고스란히 나가더라도 언론은 독자와 시청자를 흥분시킬, 급격히 전개되는 감정적 스토리를 원했다. 세상의 이목을 받는 여성은 과거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반드시 협조해야 한다. 그 중요한 사실을 잊은 탓에, 나는 언론이 내게서 등을 돌리는 상황을 맞게 될 터였다. (1, 261~262페이지)


 

사건이 발생하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말이다. 같은 여성 의원으로 한 집에 살았지만 정작 중요한 시점에 기소청에게 호의적인 증인이 된 줄리아가 있는 반면, 클레어는 함께 살던 집을 나와 거처할 곳이 마땅찮았던 엠마에게 방 하나를 내주고 재판이 있을 때마다 힘이 되어 주었다. 증인의 답변에 따라 배심원들의 생각은 엠마를 살인자로 보기도, 동등한 직업인으로 보기는커녕 성적인 용어로 성적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여성 배심원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거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마이크와 함께 일했던 기자 레이첼은 엠마가 바랐던 증인과는 달랐다. 오히려 사생활 감시와 스토킹에 대하여 공인이라면 당연한 목표물이 되는 셈이라고 했다. 엠마에게 호의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두려움과 위협당하는 상황에서도 공인으로서 그마저도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생각해보니 TV에 나오는 배우들이나 방송인들에게도 우리는 정치인과 같은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공인으로서 어느 정도의 의무는 필요하지 않냐고 말이다.

 


엠마는 하원의원이 되기 전 역사 교사로 일했다. 딸 플로라의 음악 선생인 캐럴라인이 남편과 바람이 나 이혼한 상태다. 전 남편 데이비드와 플로라와 함께 살았던 집을 자신의 방식대로 바꾼 캐럴라인을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상황이다. 딸 플로라를 위해 재판 상황을 알려야 했을 때, 데이비드보다 캐럴라인이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캐럴라인의 입장에서도 엠마는 불편한 상대다. 데이비드를 가로챘다는 죄책감에 엠마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입장이었다. 캐럴라인의 입장에서 엠마가 유죄로 확정되어도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재판 진행 상황을 보며 같은 여성으로서 엠마를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 압권이었다. 한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할 수 있겠다. 여성의 연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치인은 자기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언론이 필요하며(도움을 받으며), 언론에 의해 매장당하기도 한다. 정치인과 톱스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수년간 쌓아왔던 명예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현재 인터넷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좋지 않은 일로 연루되었을 때 노출되었던 아이를 걱정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입방아를 찧게 되겠지만 결국은 이해하지 않을까. 엠마의 상황과 두려움을 우리 모두 기본적으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연대가 여성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그걸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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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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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진 한 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캐니언의 프로포즈>라는 사진으로, 스냅사진 작가인 빌 모리의 휴대폰으로 찍었다. 그랜드캐니언의 가장 아름다운 절벽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의 프로포즈 장면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 프로포즈하는 커플을 찾았다. 빌 모리의 사진은 큰 인기를 끌어 사람들은 그들이 사진을 찍은 장소를 찾아내 비슷한 구도의 사진을 찍었다. 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로 밝혀졌으며 실종 신고를 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사진이 찍혔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사진을 찍은 것은 빌 모리가 아닌 로버트라는 사실을 밝혔다.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의 전화를 받았다. 미술학원 교사로 일하면서 지원금을 받아 예술 활동을 했지만, 그러는 사이 집의 전세금은 점점 내려갔고 현재는 음식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중이었다. 로버트 재단의 창작 프로그램 지원을 받게 되었다. 16주간의 미국 체류 비용과 함께 4주간의 전시회와 함께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했다.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 재단에서 선택한다는 조건이었다.





 

로버트가 다름 아닌 였다는 게 문제랄까. 언젠가 어느 억만장자가 자기가 키우던 반려동물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문구용품 회사의 회장 발트만이 자기의 딸 리나의 사진을 찍은 로버트의 영향으로 편안해했고, 로버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로버트 재단의 창작 프로그램에 안이지가 참여하게 되었던 거다. 재단에서 로버트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 산책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필요했다.

 


소각 시스템은 인간의 삶과도 비슷하죠. 인간은 언젠가 죽습니다. 재활용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저 일회용일 뿐이지요. 불타버릴 쓰레기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늘 소각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생을 지레 포기하지도 않고. (181~182페이지)


 

말이 통하지 않은 개와 함께 산책과 식사를 하고 대화한다고 생각해보라. 로버트의 말을 대니가 1차로 전달하고 영영 통역에서 영한 통역으로 안이지에게 전달되는 언어들은 우주 너머로 가는 것 같았다. 재단 이사장인 개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인간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로버트의 말을 자기들 필요에 의해 전달하고 예술가의 마음을 사려 하지 않았나. 더군다나 예술가의 마음을 훔치려 했다.


 

작가는 16주 동안 작품을 만들고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소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구조다. 혼신을 다한 작품이 소각된다고 생각해보라. 애틋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작품을 지키고 싶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품은 곧 작가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드는 생각, 똑같은 작품을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다.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작가가 자기의 작품을 똑같이 그린다고 해서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세한 차이가 드러날 텐데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만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다급한 상황에서 자기의 작품을 구해왔다고 치자. 원래 소각하려던 작품인지, 다시 그린 작품인지. 어떤 게 진짜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작품은 희귀성이 있어야 유명해지는 법인가. 소각할 때 비로소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인가 보다. 그러한 효과를 기대하고 작품을 소각하는 미술계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 같았다. 재단 이사장이라고 개와 마주한 예술가를 상상하니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유지하고 살아가려 애썼던 거다. 자기의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작품을 만들고 그 진가를 찾아 나설 수많은 예술가의 마음을 훔치려고 하지 않았나. 한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 같기도, 게임 같기도 했다. 작가의 마음을 불태우는 작업,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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