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수업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판미동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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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 한 남자의 고백이 있다. 삶의 모든 것을 잃고 절망앞에 선 한 남자의 고백. 이제 그는 가족과 있지 않다. 산 속에서 홀로 살며 산에 올라오는 사람들, 숲 속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내주고 잠자리를 내주기도 하는 남자. 그 남자는 다른 이들에게 성자 비슷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질문을 한다. 왜 이렇게 사느냐고. 그는 양을 기르며 치즈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몇조각씩 나눠준다. 사람들은 그에게 양치기냐고 물어보고, 치즈를 파느냐고 물어본다. 그는 그저 양을 기르니 양치기요, 산에서 거주하는 사람일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들의 질문에서 남자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본다.

 

  이 남자의 고백이 시작된다. 남자는 '사랑하는 노라'에게 고백을 한다. 노라를 처음 만났던 그때, 처음 등산을 갔던 때, 아버지가 없었던 노라와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던 마테오. 남자는 조곤조곤 노라에게 편지를 쓰듯 말을 건넸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장 행복이 넘치는 시기에 갑자기 잃어버렸던 가족. 그의 번민, 상처, 고통이 시작되었다. 가족을 잃은 고통으로 너무도 힘든때 바에서 만났던 한 여자 라리사. 라리사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랑했던 가족을 잃은 마테오는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그런 자신과 마주할 수 없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고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힘들어 자신의 삶을 되는대로 살아가며, 술에 의지하고, 사랑하는 이를 새로 만나지만, 너무도 뒤늦게야 깨달았을때 사랑하는 이는 이미 떠나고 없다. 이럴때 그가 할 수 있는건 뭐가 있을까. 오래도록 방황을 하고, 그가 안식을 찾았던 산에서 머물게 된 것이다.

 

  그는 한때 의사였고, 가족을 잃었고, 또 하나의 가족이 될수도 있는 이를 잃었다. 자신의 아픔이 너무 커 자신의 곁에 다가오는 사람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산 속에서 홀로 살며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

 

우리 자신한테서 벗어나기. '너무 늦었다'는 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내 삶은 너무 앞으로 달려가 있었어.

너무 앞으로.

너무 늦게.

너무 씁쓸하게.

너무 고통스럽게.

피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럽게. (68페이지)

 

 

 

  어쩌면 살아가는 일은 영원을 향한 수업중일지도 모른다. 연습일 뿐이다. 과거에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매순간 우리는 실수를 하고 고통을 받는다.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을 몰라 헤매기도 한다. 어느 것이나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작가 수산나 타마로의 작품을 『마음가는 대로』와 『엄마의 다락방』을 읽고 이번 작품을 읽었는데,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위로 받는 느낌들, 그로 인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되찾고, 삶에 대한 안식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인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삶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얻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 한다는 것.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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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가 있다면 돌런갱어 시리즈 3
V. C. 앤드루스 지음, 문은실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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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본다. 우리 부모의 삶이 불행했다면 나는 그 불행을 이어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부모의 불행에서 피하고자 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내가 만약 부모의 불행을 이어받았다면 내 아이들 또한 내 불행을 이어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행복한 삶을 살고 싶고, 부모의 불행을 멀리하고 싶을 테니까. 할수만 있다면 부모의 불행으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을 테니까.

 

  이제 안정된 삶을 살것 같았다. 자신들을 다락방에 가두었고, 코리와 캐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비정한 엄마의 시대도 막을 내리고, 이제 캐시의 행복한 삶만 남았다. 줄리언과의 첫 결혼에서 얻은 첫 아이 조리, 둘째 아들 바트, 그리고 두번째 남편 폴과의 결혼 생활. 캐시의 모든 것이었던 폴과의 행복한 결혼생활도 끝이 났다. 이제 캐시의 머리칼에서는 흰머리칼이 보이고, 머잖아 캐시는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조리와 바트의 이야기. 조리와 바트가 장을 번갈아가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나 새아빠 크리스와 엄마 캐시와 함께 살고 있는 조리와 바트. 매년, 일 년에 한번씩 조리의 할머니를 만나고, 아빠 크리스의 어머니를 만나는 일들을 반복했다. 열네 살의 조리, 아홉 살의 바트는 오래전 크리스와 캐시가 다락방에 갇히게 되는 나이와 비슷했다. 삶은 반복되는 것 같다. 캐시와 크리스의 불행이 자식들인 조리와 바트에게로 옮겨간 것 같았으니까.

 

  친아빠를 닮아 아름다운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형 조리를 동경과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는 바트. 그들이 놀았었던 이웃집 저택에 누군가 이사오게 되고, 이웃집 저택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과 만나게 된다. 이웃집 저택에서 집사일을 보고 있는 노인으로부터 일기장을 건네받고, 바트는 일기장 속의 주인공인 맬컴 흉내를 내게 되며 점점 이상하게 변해간다. 그 와중에 조리는 부모의 과거를 기억해낸다.  

 

 

  점점 이상해져가는 바트를 바라보는 캐시와 크리스는 그가 변해가는 이유를 알수 없어 안타깝다. 바트가 변해가는게 이웃집의 검은 옷의 여인과 집사라는 걸 눈치채는 조리. 그동안 부모에게 비밀로 했었지만 더 두고 볼 수 없어 부모인 캐시와 크리스에게 알리고 그들은 알게 되었다. 이웃집 여인이 자신들의 엄마였음을. 어떻게 그녀가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로 인해 점점 노인의 말투를 닮아가고 정신이 이상해지는 바트를 바라보는게 너무 아팠다. 또다른 복수를 위해 나타난 것인가.

 

  비운의 가족사가 그들의 아이들을 빗겨가길 바랬지만, 빗겨가 행복하게 살았다면 이 이야기는 계속되지 못했을테지. 계속되는 불운한 삶을 이어가기에 어떻게 될지 궁금함에 계속 읽게 되는게 또한 시리즈의 매력 아니던가. 계속될 것 같았던 캐시와 크리스의 이야기가 끝나가고 그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계속 될수 밖에 없었다. 다락방의 꽃들이었던 그들이 이제 늙어갔다. 그들이 부모를 바라보았다면 이제 자식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삶이 된 것이다. 삶은 그처럼 변해가고 또 어느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변한 없는 삶을 살지도 모른다. 내 부모의 삶, 나의 삶, 내 아이들의 삶이 제발 같지 않길. 시간이 갈수록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래본다. 나 또한 어느새 내 부모의 삶을 바라보다 아이들의 눈에 비춰지는 부모의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의 눈에 내 삶이 행복해 보인다면 좋을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부모의 상과 비슷하게 느낀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캐시와 크리스의 삶을 보며 내 삶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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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예수
고진하 지음 / 비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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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특정한 종교에 속해있지 않아 종교에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어느 종교의 서적에도 부담없이 이야기를 읽을 수가 있다. 스님이 쓴 글이라든지, 수녀님 혹은 신부님이 쓴 글에도 내 마음에 다가오는 글을 받아들이고 글쓴이의 마음을 닮아보려 애쓰는 편이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때, 표지와 제목에서부터 기독교의 색채가 강했다. 이 책 또한 특별한 부담감없이 읽을수 있겠지 하는 마음과 너무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하면 어떻게 할까 라는 약간의 우려가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것, 자기가 바라는 것을 보기 때문에 자칫 나와 맞지 않다고 해서 거부감부터 갖지 않으려 했던 마음도 있었다.

 

  책의 첫머리 '여는 시'에서 정호승 시인의 시를 먼저 만났다.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으로 시작하는 정호승의 「시인 예수」를 만나면서 그 우려를 없앴다. 예수를 일컬어 '시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시는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하느님을 생각하면 하느님에 관한 시를, 사랑하는 님을 생각하면 님을 생각하는 시로 읽혀진다는 것을 알겠다. 내가 무심코 읽었던 시들도 저자는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한 시로 읽었던 것이다.  

 

  저자 고진하는 총 서른여섯 편의 시를 소개하며 시에 깃든 자신의 생각과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일상의 생활속에서도 삶의 성찰을 할수 있었다. 이를테면 장독을 닦는 일또한 자기 안에 깃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임을,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인 것을 알려주는 글들이었다.

 

 

  우리나라의 시인들뿐만아니라 세계의 유명한 시인의 시도 만날수 있었다. 헬렌 켈러의 시를 만나볼까.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115페이지, 헬렌 켈러 「행복의 문」 중에서)

 

  눈이 보인다고 해서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볼수 있는지도 모른다. 시에서처럼 우리는 닫혀진 문만을 보고, 헬렌 켈러는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 했다.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166페이지, 정현종 「경청」 중에서)

 

  보는 것 만큼 듣는 것의 의미를 잘 가르켜주는 정현종의 시이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다른 이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기의 말을 더 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내 주변의 이들을 봐도 그렇고,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와 집에 있다보면, '내가 오늘도 말을 많이 했구나' 하는 걸 느끼는 경우가 꽤 있다.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어주는 이였는데 언제부터 내가 더 말을 하게 되었을까. 꼭 필요한 말만 하자고 다짐하지만, 어느새인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자주 반성한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내가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는 시간을 종종 갖는다. '경청'이라는 뜻을 잊지 말고 늘 경청하는 자세를 갖자, 이렇게 생각해본다.

 

  에밀리 디킨슨의 「짧은 노래」라는 시를 제시해주고, 자기 상처를 돌보면서 고통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어지는 것이구나. 인의 상처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자비의 원천은 놀랍게도 자기 상처에서 나오는 구나 (291페이지) 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수 밖에 없다. 맞다. 내 상처가 깊었을때에야 비로소 타인의 상처도 보이는 것이리라. 받았던 상처에 대한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글이었다. 손을 모아본다. 내가 염원하는 것에 대해. 모아놓은 손에 깊은 숨을 불어넣어 소원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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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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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인터넷 서점 메인에서 오랫동안 이 책이 올려져 있어서 저절로 이 책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플래너리 오코너』라는 소설은 어떤 소설일까 내심 궁금했고, 작가의 이름은 눈여겨 보지 않은것 같다. 작품을 받고서야 이 책이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소설선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플래너리 오코너라는 작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처럼 많은 단편 소설을 많이 써냈던 작가인가 싶었다. 얼마전에 노벨문학상 수상을 했던 미국의 단편작가 앨리스 먼로 외에 새로 알게 된 작가였다. 생소했지만 서른한 편의 단편을 읽는동안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 세계를 조금은 알게 된것 같았다. 내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세계를 알면 얼마나 알겠냐만 그래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게 있었다.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글에서도 말했지만, 사실 대중들에게는 장편이 더 편하게 읽힌다. 소설의 내용을 읽느라 날밤을 새우기도 하고 더한 감동을 받기도 하는 것이 장편소설이다. 그에 반해 단편 소설은 내용이 짧지만 함축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도 생긴다. 그래서 단편이 어렵다고도 하고, 단편 리뷰 쓰기는 굉장히 힘들다. 여러 편의 단편에 대해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쓰는게 마음이 자꾸 흐트려지기도 해 늘 어려운 부분이 단편소설 리뷰쓰기다.

 

  『플래너리 오코너』 또한 마찬가지였다. 31편의 단편. 739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 읽기 전부터 지레 질리기부터 했다. 장편이라면 반겼겠지만, 단편이라는 것 때문에 부담이 작용했던 것이다. 작품 속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주된 단어는 검둥이, 농장, 종교, 뿌리깊은 삶에 대한 성찰이었다. 이는 작가가 살았던 미국 남부지방의 모습들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농장을 꾸려나가는데 있어 일하는 사람을 부렸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을 잃고 여자 혼자 힘으로 농장을 꾸려나가야 할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이마저 없으면 농장이 어떻게 될까 알수 없어 할수 없이 사람을 써야만 했던 이들의 고충이 보였다.

 

  일년내내 꽃을 피우는 제라늄 화분이 발코니에 몇개 있다. 흰색, 분홍색, 빨간색의 꽃을 계절에 상관없이 볼 수 있어 좋아하는 화분이기도 하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중 첫 작품의 제목은 「제라늄」 이다. 딸과 함께 살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온 한 영감이 아파트 건너편의 제라늄을 간절히 기다리며 시골 생활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 있다. 비록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고향에서 제라늄을 잘 키웠던 이, 사냥을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묻는 이야기도 있다. 좋은 사람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는 사람, 정도가 아닐까. 어떤 것에도 내 편일것 같은 사람. 플래너리 오코너는 '좋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좋은 시골 사람들」은 어쩌면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먼저  「좋은 사람은 드물다」를 보자면 플로리다에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여행을 포기하게 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다 사고를 당했다. 가족들에게 온 남자들. 그들은 부적응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좋은 가문의 출신 사람같다고 말해보지만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단편 「좋은 시골 사람들」에서는 다리가 불편해 의족을 하고 있는 딸 조이와 함께 생활하는 프리먼 부인의 농장에 성경 책을 팔러온 청년이 있었다. 자신을 시골사람이라고 하자, 프리먼 부인은 '좋은 시골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에요!'(377페이지)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시골 사람이면 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프리먼 부인과 딸 조이에게 그 남자는 어떻게 했을까. 좋은 시골 사람의 모습을 보여줬던가.

 

 

 

  우리도 때론 프리먼 부인처럼 시골 사람들(시골 출신의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적으로 선량한 사람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고, 시골 인심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한 것 같다. 그런 것을 이용하는 남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설들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보는 것, 시골 출신이라고 뜨내기 청년에게도 믿을 수 있는 것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소설이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가 끝까지 좋은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지만 작가는 프리먼 부인의 입을 빌려 그 다음 이야길 한다. '게다가 우리는 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요.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는 법이에요. 그게 인생이에요!. (377페이지) 프리먼 부인이 자신이 한 이 말을 더 일찍 깨달았으면.

 

  잘못된 생각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도 있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같은 경우다. 스스로의 공허를 채워넣기 위해 선행을 욱여넣어, 정작 자신의 아들은 돌보지 아니하고 감옥에 갇혔던 소년을 선도하고자 했다. 그 일이 자신이 해야 할일, 자기에 대한 위로였던 것. 미국 남부지방을 배경으로 한 작품속에서 종교적인 갈등과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에 대한 삶의 성찰을 바라볼 수 있었다. 

 

  긴 단편 만큼 책을 읽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로 인한 서른한 편의 단편 때문에 머릿속에 꽤 복잡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난다음 다시 읽어보면 플래너리 오코너란 작가에 대해 좀더 알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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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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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기억들이 또렷이 떠오르는 걸 발견한다. 나는 제법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네 살 적에 있었던 일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편이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기억들. 명절이면 친구들과 한복을 입으며 강강술래를 하던 일. 보름날이면 친구들과 모여 나물과 밥을 비벼 먹던 일. 그리고 고민 있을때마다 꾸던 꿈에서 나오던 내가 살았던 시골길. 그 길을 걷던 나. 잊혀질 만도 한데 마치 그림을 펼쳐놓은 것처럼 그대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기억속에 남아있다.

 

  사십이 넘은 지금. 이십대, 삼십대에서는 정신없이 삶을 사느라 현재의 시간을 중요시하고 미래의 시간만을 위해 살았던 것도 같다.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 사십대의 나이에 적응을 하다보니 이제 삶의 여유가 생겼다. 다른 이를 위해 살기 보다는 나를 위해 살수 있는, 내 삶의 여유가 생겼다. 여기서 삶의 여유라는 건 경제적인 것보다는 마음의 여유라고 해야 더 옳다. 삶의 중반을 넘어선 지금의 나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사십대가 싫지만은 않다. 받아들이기 힘들기만 했던 사십대에도 나는 친구처럼 함께 하는 여유가 생겼다. 나이들어 좋은 점, 이런 것도 있구나 싶다.

 

  2014년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한 노벨문학상의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에 읽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난뒤 꽤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난 것이다. 『지평』이란 제목이다. '지평'하면 떠오르는 것은 평야의 끝, 지평선이 먼저 떠오른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러한 지평을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에서 미래를 이끌어주는 지평이라는 제목을 택했다. 짧다면 짧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이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의 자신도 있는 것. 희미해진 과거의 기억속의 사람이 문득 생각나는 것. 그 기억을 붙잡을 단어 하나, 사람의 이름 하나에도 반가움이 들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현재 60대를 살아가는 한 남자가 영원히 불가사의로 남을지도 모를 기억의 파편들을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생각해본다. 머릿속에 떠올려보지만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버리고 만다. 검정 몰스킨 수첩을 옷 안주머니에 담고 다니며 메모를 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깜박거리며 떠올랐던 기억을 수첩을 찾아 메모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육십이 되어보지 못한 나는 상상이 안가지만, 지금의 나도 가끔씩 확연했던 누군가의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나오지 않을때의 느낌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91페이지) 

 

  기억을 잊는다는 것. 슬프다. 내가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잊혀진다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나의 기억을 잊는 일일 것이다. 보스망스가 수첩속에서 발견한 이름, 메로베. 이 사람이 누구일까, 아무리 기억속을 더듬어봐도 누군가의 성인지 이름인지 헷갈리기만 했다. 하지만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보스망스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젊음의 짧은 시간을 함께 했던 마르가레트 르 코즈와 함께 사무실을 썼던 남자였다. 이제 마르가레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리의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났던 여자였다. 마르가레트는 어떤 사연인지 몰라도 한 남자를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했고, 보스망스 또한 폭력적인 어머니를 피해 도망치는 중이었다. 열등감과 두려움을 공존한 이들은 파리의 짧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그가 기억하던 마르가레트와의 파리의 거리는 지금의 베를린의 거리와는 또다른 거리였다. 파리의 거리는 두려워하던 것들로부터의 피하고자 하는 거리, 미래를 꿈꾸었던 거리였다면,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은 과거의 기억, 기억속의 파편들을 생각하는 거리였다.

 

그래, 우리는, 마르가레트와 나는 끊임없이 밤기차를 탔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그 시절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혼란스러웠고, 서로 아무런 연관 없는 무수한 짧은 장면드로 뚝뚝 끊겼다. (163페이지)

 

  이 부분을 읽는데 문득 스무살 시절에 밤기차를 탔던 일들이 생각난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탔던 밤기차. 창밖을 내다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까만 어둠만 가득했던 그때. 누군가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밤시간을 견뎠던 그때. 아마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혼자서 밤기차를 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시간들이 너무 길게 느껴질 것이므로. 그때는 그 시간도 금방 흘러갔다. 마치 젊음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듯, 그때 밤기차를 탔던 그 시간들은 아주 짧았다. 보스망스가 마르가레트와 보냈던 파리에서의 짧은 시간을 사십 년이 지나서야 기억을 했듯.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마르가레트를 만날지도 모른다. 먼 훗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잃어버렸던 옛사랑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었던 미래는 결국 오늘이 되어 돌아왔다. 비슷한 거리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잔잔한 파문을 일게 한다. 이런 그의 소설이 좋은 건 비단 나뿐일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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