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기분파 운전면허 학과시험 문제은행 (1종.2종 공통) - 2020년 개정된 문제를 수록한 최신판 + 시험장 가면서 보는 족집게 306선 수록 2020 기분파 시리즈
도로교통공단 지음 / 에듀웨이(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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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전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스무살 예비 성인들에게 있어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오래전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면허를 받을 때의 그 긴장감과 설레임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서 학과시험을 등록하고 시험장 주변에 보따리 장수들이 노점에서 파는 학과시험문제집 한권을 사들고 집에 올 때의 그 기분이란...

당시에는 운전면허 학과시험문제집이 예전 수능시험 문제집처럼 달력 넘기듯이 위로 넘기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앞장의 예상문제를 푼 후 넘기고 뒷편으로 돌려서 또 다른 문제를 푸는 식으로 제본이 되어있었기에 수험생 입장에서는 사뭇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이나 사진보다는 대부분이 흑백 잉크로 인쇄된 글자 위주의 순수 이론 문제집이었기에 사실 면허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진짜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안전운전을 위한 유용한 지식을 습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만나보게 된 2019년 운전면허학과시험 최신판을 보게 된다. 내가 면허시험을 본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학과문제집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많이 달라진 점을 보게 된다. 우선 책의 제본도 일반적인 책과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어서 수험생으로 하여금 문제를 푸는데 있어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졌다. 본서의 가장 큰 특징은 내용면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예제들을 수록했다는 점이다.

우선 문장형, 사진형, 안전표지형, 일러스트형, 동영상형으로 문제의 유형을 세분화해서 실제 시험장에서 만나게 될 문제에 대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출판사의 세심한 기획의도를 엿보게 한다. 주목할만한 점은 마지막 동영상형의 문제들이 수록된 단원에서 두드러진다. 역시 내가 시험을 보던 시대와는 벌써 많은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는 내용 중 하나가 QR 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서 교통 동영상을 보며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말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운전면허학과시험문제집의 놀랄만한 진화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단원은 평가모의고사문제가 수록되어 있기에 수험생 독자는 모든 예제를 풀이해보고 마지막 실전감각을 익힐 수 있다. 더불어 모의고사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중간점검해 볼 수 있기에 안성맞춤이다. 운전면허 시험이 많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본서에 수록된 기출문제를 꼼꼼히 풀어보는 노력만 기울인다면 학과시험 통과는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학과시험을 통과하고, 코스 기능시험을 치루고, 마지막으로 도로주행까지 치루었던 그 시험의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운전면허시험을 보고, 면허가 손에 쥐어졌을 때의 그 감격은 누구에게나 동일할 것이다. 누구는 한번에 붙었다느니 누구는 철전팔기로 붙었다느니 하는 차이를 가지고서 웃음꽃을 피우지만 결국 도로에 나가서 귀중한 생명을 보호하며 교통법규를 지키고 운전자의 바른 태도로 운전을 해야하는 막중한 책임이 운전면허증의 깊은 의미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운전면허시험 준비는 사실 제법 진지한 마음가짐과 자세로서 임해야 할 시험 중의 하나이다.

운전면허학과시험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첫걸음인 본서 <기분파 운전면허 학과시험문제은행>을 통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도록 하자! 그러면 언젠가 자기 손에 주어진 운전면허증을 받아들고 기뻐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서 안전운전 베스트 드라이버로 거듭날 날도 머지 않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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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로마서 주석 세계기독교고전 41
마르틴 루터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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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개봉하여 300만명이라는 적지 않은 관객을 동원했고, 한국 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다빈치 코드' 라는 영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숨겨진 비밀에 대해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들간의 쫓고 쫓기는 긴장감을 잘 묘사한 영화였는데 내용 중 '오푸스 데이'라는 카톨릭 단체에서 파견된 사제가 윗옷을 벗고, 채찍과 같은 고문도구로 자신의 몸을 치며 혹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의 솟아나는 정욕과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서 엄격한 규율에 바탕을 둔 고행을 통해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 영혼이 진정한 쉼과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이 옳은가 생각한 적이 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의 저자인 '마르틴 루터' 는 16세기 중세 어두운 터널과 같은 시대를 살다간 인물로서 우리에게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익히 알듯이 루터는 젊은 시절 세찬 폭풍우 속에서 자신이 서 있는 주변의 큰 나무를 두 동강 내버리는 벼락을 목격한 후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과 내면은 여전히 구원에 대한 확실함이 없는 공허함과 두려움의 상태 그대로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만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은 그의 어두운 영혼에 한줄기 환한 빛으로 다가온다.

 

서두에서 묘사한 영화 속 사제와 같이 자신의 고행을 통한 스스로의 노력과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한 노력은 모두 다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만이 가능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나고 의로우신 한 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바로 마르틴 루터의 영혼을 사로 잡았다.

 

본서는 바로 이와 같이 루터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은 신약성경 로마서의 말씀을 주석한 주석서이다.로마서는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책으로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의 정수가 가득한 말 그대로 진리의 보고 그 자체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 중 가장 중요하다고 꼽히는 로마서는 문체가 유려하고 의미 전달에 있어서 매우 학구적이라고 평가되어지는 서신서이다. 이러한 로마서를 탁월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주석해서 출간한 책이니 본서의 가치는 이루말할 수 없이 크다. 얼마 전 서평한 책 중에 <존 웨슬리의 일기>가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이며 순회 전도자로서 한평생을 바친 존 웨슬리 목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을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웨슬리의 회심 또한 앨더스게이트 거리의 어느 모임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읽혀지고 있던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은 본서가 가진 그 가치를 한층 더 빛내준다.

 

우선 본서는 로마서가 16장으로 되어있기에 내용의 구성면에 있어서도 동일한 진행 순서를 따른다. 각 장의 구절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신학적 견해와 더불어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주석한다. 로마서를 읽어 본 그리스도인 독자라면 로마서가 말하는 핵심 주제를 알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신칭의' 즉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가장 중요한 명제이다. 로마서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와 율법도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하는 능력이 없음을 말하며 오직 인간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루터를 회심하게 만든 1장 17절의 말씀을 루터는 어떻게 주석했을까 매우 궁금했고, 본문을 통해 그 부분을 접하고서 루터의 탁월함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한 고심함의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루터는 분명 회심하기 전 영화 속 사제와 같이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스스로 고행을 하며 인간의 의를 의지했던 사람이었다. 즉 의로운 행함만이 인간 영혼 구원의 근거라고 여겼던 자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뒤로하고 진리에 눈 뜬 이후 그는 아마 인간의 노력과 행함에 대해 터부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다는 사실을 볼 때 행함에 대한 그의 견해는 별로 우호적이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루터는 자신을 회심으로 이끈 1장 17절의 주석을 통해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단초를 남긴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라는 말은 신자의 믿음이 점점 더 자라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이가 자신의 삶 속에서 점점 더 의로워진다는 계속된 성화를 의미한다. 루터는 바로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인간의 노력과 행함을 통한 자기의의 추구에 대한 진저리쳐지는 경험 속에서 루터는 신자의 삶은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얻지만 믿음을 통해 구원받고 의로워진 진정한 신자의 삶과 그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착한 행실을 통해서 증명되어져야 한다는 균형잡힌 성화의 개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즉 신자의 믿음과 행함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간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루터의 비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인간의 율법과 노력, 선한 행실, 극도의 금욕과 자기절제, 청빈한 삶, 구제와 자선 등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상의 열심이 인간 영혼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로마서의 저자 사도 바울은 말한다. 공교롭게도 로마서의 저자인 회심 전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엄청난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그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대반전의 서신을 작성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컬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로마서의 주석을 동일한 경험을 했던 마르틴 루터가 기록했다는 사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복음의 정수가 담긴 로마서를 펼친 후 본서를 함께 놓고 읽어 내려간다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메시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싹트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본다.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차분히 성경과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펼쳐들고 그 안에 담긴 진리의 만찬을 경험해보는 것은 초여름 더위를 맞이하여 일종의 깊은 영적 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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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자유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2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김찬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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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인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는가? 교회를 다니다보면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우리는 로보트와 같이 명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서는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매우 철학적이고 난해한 저서이지만 <신앙감정론>,<원죄론>과 더불어 3대 주저로 뽑히는 가장 돋보이는 저작이다. 본서는 인간의 의지가 가지는 자유에 대한 거대한 지적 담론이다. 에드워즈가 살았던 당시 18세기 미국 뉴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알미니안주의의 거센 사상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는 인간의 책임과 선택에 대해 더 큰 비중과 관심을 기울이는 알미니안주의가 이야기하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한 부패한 교리에 대해 맞서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 그분의 거룩함이 훼손될 수 밖에 없는 사상적 위기 속에서 에드워즈는 그의 평생에 걸친 지성적 훈련의 총체를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거룩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쏟아부어 탄생시키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본서 <의지의 자유>이다.

본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주제와 관련된 용어들의 정의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펼쳐지는 내용들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을 숙지하도록 돕는다. 가령 의지의 본성, 결정, 필연성, 불가능성, 불능, 우연성 등과 같은 용어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보통 우리가 사전적으로 알게 되는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 바탕 안에서 설명되어지고 있기에 독자들의 집중력과 이해력이 요구되어지는 대목이다. 2부에서는 그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의지의 자유가 가능한가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고, 3부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지의 자유가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필수적인지에 대한 고찰이며 마지막 4부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던지는 여러가지 사상적 추론의 근거에 대한 고찰을 담는다.

본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자주 등장하는 용어 몇가지를 알아보면 이렇다. 의지는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기능, 능력, 마음의 원리를 말한다. 자유는 의지의 결정대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힘을 말한다. 의지작용행위는 선택행위, 선택과 동일한 의미로서 마음의 기울어짐이나 경향으로서 중립은 없다. 즉 마음이 보기에 가장 강력한 동기가 의지를 결정한다.

 

알미니안주의는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의지는 중립성을 가지며 필연성을 배제하고, 우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어떠한 의지적인 행위들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그 의지의 행위는 어떠한 위부의 원인에 영향받지 않은 채로 행해진다는 것이며 완전한 우연과 자기결정에 의지의 자유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자신을 칼빈주의라고 불러도 자신은 괘념치 않는다 라고 말했듯이 칼빈주의는 의지의 자유에 대해 인간의 의지가 기우는 경향성으로 설명하고, 필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어떠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이 필연적으로 좋아하는 행위 또는 자신의 마음이 기우는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보인다는 점이며 이것이 바로 의지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도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으로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지의 중립성을 주셨기에 인간 의지의 작용을 미리 아실 수 없으시고 그렇기에 우연성에 기인하여 선택하시고 작용하신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 행위에 대해 확실히 예지하고 계시며 우연성이 아닌 도덕적 필연성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선택하시고 이끌어가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온전한 거룩함과 탁월한 지혜, 우주적 주권을 가지신 상태로 확실한 예지에 바탕하여 필연적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선택하시고 작용하신다는 것이다.

내용의 방대함과 매우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길을 잃어버린채 출입구를 찾아 다시 뒤로 돌아간 적이 수차례 있었다. 이후 '헨델과 그레텔' 동화에 나오는 빵부스러기를 길에 떨어뜨려서 이정표 삼으려고 했던 그 심정 그대로 옆에 그냥 노트 한권을 두고 책을 읽으며 난해한 용어들과 문장들을 적어놓고 본문 내용들과 대조해가며 깊은 지성의 바다 속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을 보냈다. 결코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지만 책이 가지는 가치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함을 느낀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의지의 자유가 중립성과 우연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창세기의 인간 원죄 교리를 양보해야하는 엄청난 신학적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따 먹게 된 의지는 중립성을 가지기에 선악과를 따먹은 이 도덕적 행위는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 벌어진 일임으로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원죄의 책임이 없다라는 의미가 된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에게 원죄의 근원, 죄악을 만들고 인간이 타락하도록 방임하신 분이라는 오명을 덧씌우게 되는 신성모독적 결론으로 귀결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그분의 우주적 주권과 탁월한 지혜를 가지시고, 도덕적 필연성에 기반하여 가장 아름답고 선한 선택과 결과를 도출하신다는 에드워즈의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이라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교리가 공격받게 될 것이며 나아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일방적 은혜보다는 인간의 협력과 인간의 책임이 공존함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의 그 부패한 교리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인간 의지의 자유를 인정한 것인가? 에드워즈가 말하는 의지의 자유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를 말한다. 온 우주적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그 광대하고 독보적인 주권 속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갖고 누린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지금 영국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프리미어리거 축구 선수 손흥민이 10살짜리 초등학교 축구 선수와 일대일 한판 대결을 펼친다고 가정할 때 초등 축구 선수는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볼을 드리블하고 손흥민 선수를 제친 후 골문으로 돌진해서 슛을 쏠 수 있는 자유와 의지가 있다. 그러나 결국 전체적인 축구 경기의 틀 안에서 볼 때 그 경기의 결과는 10살짜리 초등 축구 선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프리미어리거 손흥민 선수에 의해서 컨트롤 되어짐을 의심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 또한 이렇다.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과 주권 속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 의욕에 대해서 이미 예지하고 계시며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섭리, 경륜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경영해 가신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큰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함에 의해 드라이브되는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안에서 누리는 의지의 자유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며 안전한 자유이기에 그렇다.

에드워즈는 두번의 대각성 운동을 경험했으며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본주의적 사상의 거센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수호해야만 할 매우 중요한 시대적 사명을 자각했다. 인간의 원죄를 부인한 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안주의 등의 신학적 오류와 부패한 교리에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 삶의 지성적 노력을 쏟아부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세권의 책 중 한권인 <의지의 자유>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나님이 주신 차갑고 날카로운 이성과 예리한 지성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목회자의 따뜻한 심성은 그의 신학과 철학적 주장이 피상적인 하나의 지식의 체계를 자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증거이다. 수 많은 사역일정 속에서도 하루 13시간을 공부하는 철저한 지성적 노력과 치열한 준비가 없었다면 아마 당대에 몰아닥쳤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사조를 거슬러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죽을 것만 같았고,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던 <신앙감정론>은 본서에 비해 이해도 쉬웠고, 술술 읽혔던 기억이 있는 데 사실 본서는 그에 비하면 몇배는 어려운 책이다. 워낙 에드워즈가 신학이나 철학적 사고에 능통했던 비범한 인물이었고, 지금까지도 신학자들은 물론 일반 철학계에서도 에드워즈의 논의를 관심갖고 연구한다고 하니 뭐 다른 할말이 더 필요하겠냐만서도 그렇기에 나와 같은 범인의 사고와 이해력으로는 사실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책 중 한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발견하게 되는 사실 한가지는 지금의 조국 교회와의 연결선상에서 에드워즈의 논제들을 관련짓지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70~80년대 양적으로 큰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 개신교가 어느 순간 주춤하며 양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질적으로도 목회자들의 부패와 타락, 교회의 세속화와 혼합주의의 만연 등으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요즘 우리는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사상적 혼탁함을 경험하며 그에 맞서 싸운 에드워즈의 저작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것은 비본질이 본질을 뒤집는 상황 속에서 어렵고 이해할 수 없지만 본질을 붙잡고 회복하는 것만이 한국 교회가 살수 있는 길이며 신자들의 삶이 진리의 터전 위에 서도록 돕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를 진리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 삶을 불태우며 하나님과 시대 앞에서 몸이 바스러지는 지성적 헌신을 다했던 위대한 영적 거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걸출한 수작 <의지의 자유>를 이 시대 바른 신자의 삶을 살기위해 깨어 몸부림치는 용기있는 신자들에게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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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세계기독교고전 32
존 밀턴 지음, 귀스타브 도레 외 그림,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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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교회 주일학교에서 아담과 하와에 관한 창세기의 말씀을 많이 들으면서 자라온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의문을 가질만한 생각 중 하나가 바로 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어서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런 세상을 살아가도록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 또한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수천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그 죄의 영향력을 그대로 물려주는 죄의 전가와 같은 신학적 문제들을 일으키는 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시절을 보내었다. 그러면서 고교시절 존 밀턴의 <실낙원>이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지만 무엇인가 고전이 가지는 그 특유의 묵직한 느낌으로 쉽사리 손이 가지 않은 책 중 한권이었고, 이번에 드디어 존 밀턴의 대표적 저작인 <실낙원>을 만난다.

 

17세기초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존 밀턴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드러내어 21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적인 작가의 길을 준비한다. 청교도 혁명으로 세워진 크롬웰 정부에서 관료의 일을 감당했고, 이후 왕정복고를 통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질고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운좋게 살아남아 세계 문학과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기념비적 대서사시인 <실낙원>을 집필하게 된다. 왕정복고로 인해 재산과 생명의 위협으로 점철된 인생 말년이었지만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원죄와 타락으로 인해 낙원인 에덴을 잃어버리게 되는 인류의 최대 비극이자 재앙의 출발점이 되는 이야기들을 한편의 대서사시로 탄생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특별히 본서가 가지는 두드러지는 집필 방식의 특징은 바로 서사시로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쓰여졌다는 것이다. 보통 서사시들이 가지는 압운이라는 집필 상의 규칙들을 성가신 장애로 여기고, 과감하게 문학적 군더더기를 걷어냄으로서 많은 독자들이 딱딱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본서의 내용 자체가 이야기하는 주요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점은 존 밀턴의 천재성과 개척자적인 위상을 보여주는 항목이다. 총 12권으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천사들 가운데 자신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사랑한 천사장 루시퍼와 그와 함께한 하늘의 천사 1/3의 동반 타락과 반역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이들이 받게 된 지옥 심연의 형벌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또한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의지와 세심한 계획 가운데 지구라는 곳에 에덴을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제 3의 존재들을 만드시고 그들을 그곳의 주인으로 임명하신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시기함으로서 유혹하는 사탄의 활동이 등장한다. 마지막 세번째는 사탄의 유혹으로 마침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의 진노 아래 급기야는 낙원 밖으로 내쳐짐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창세기만 펼치면 확인할 수 있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범죄에 관한 기사를 통해 밀턴은 인간의 연약함을 올바로 직시하고,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앞에서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해야 할 필요를 말한다. 또한 선과 악으로 대립하는 무형의 실체들에 관한 성경의 주제를 통해 밀턴 그가 살았던 17세기 영국과 유럽의 시대적 배경과 사상의 흐름 속에 있어 왔던 청교도와 카톨릭, 왕정과 공화정 같은 전혀 다른 두 세력간의 다툼에 대한 시대를 꿰뚫는 문학적 혜안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밀턴의 천재성은 그가 본서를 통해 단지 구약 성경 창세기 3장의 내용 자체를 토대로 한편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탁월함은 책 한권에 그리스, 로마 신화와 그가 쌓아왔던 인문학적 지식을 토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창조와 원죄, 인간의 타락과 저주와 같은 신학적 주제로서는 인간론에 해당하는 상당한 지식의 총체를 이루어 내었다는점이다. 성경이라는 씨줄과 신화와 유럽의 시대정신을 이끌었던 인문학적 지식을 날줄로 하여 당시 영국과 유럽의 기독교 지성 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까지 종교를 불문하고 누구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문학적 얼개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밀턴의 진정한 문학적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본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종교를 떠나 다양한 배경의 독자들에게 고전으로서의 예우와 합당한 가치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최초의 인간에게 지고한 순종을 요구하시며 자신의 의지를 당신께 복종하길 원하셨던 그 하나님의 원대한 우주적 계획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증명하길 원하시며 그에 대한 선물로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렸던 최초의 낙원을 제 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시키신다. 눈에 보여지는 에덴이라는 낙원의 회복이 아닌 산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하나님 아버지와의 회복된 관계가 어쩌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제 2의 에덴으로서의 낙원이 아닐까?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고, 결렬된 관계를 친히 복구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낙원으로 주신 이 우주적이고 위대한 사건이야말로 밀턴이 말하는 실낙원의 온전한 회복이다. 그리고 실제로 밀턴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낙원의 회복을 그린 실낙원의 후속편과 같은 저작으로서 <복낙원>을 집필하게 된다.

 

절대 진리는 없으며 오직 상대성만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 세대 속에서 어쩌면 <실낙원>이 가지는 입지는 약화될 수도 있다. 세상은 하나님이라는 절대 진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을 믿는 신자된 독자들은 세상의 소리와 무형의 압박 속에서 상대성을 용인하도록 도전받는다. 이러한 모습은 본서를 읽어본 독자라면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의 내용 그대로이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뱀으로 분한 사탄은 하나님의 지순한 창조물인 아담과 하와에게 신이 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은 없으며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순간 누구나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상대성과 다양성을 미덕으로 제시한다. 나는 과학기술과 인류 문명의 비약적 발전과 더불어 하나님이라는 절대 진리에 대해 거부하는 이러한 시대정신의 거센 도전이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결코 약해지지는 않으리라 본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된 독자들로서 혼탁한 세대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흐름을 읽으며 어떠한 삶의 태도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제 2의 낙원을 올바로 받아내고, 살아내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원한다면 밀턴의 문학적 천재성과 시대를 읽는 혜안이 고스란히 응축된 위대한 저작 <실낙원>을 한번 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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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
사마광 지음, 푸챵 엮음, 나진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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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이 떠들썩하다. 패스트트랙이니 공수처니 하면서 여야간의 당쟁이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추잡스러운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정치권의 당쟁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정치체제가 발현된 이후 어느 한 시대, 한 나라도 예외 없이 항상 있어왔던 필요악이었기에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지만 지금처럼 자신들의 당리당략에 목을 메고 아귀다툼 하듯 달려드는 모습은 모양새가 영 보기 좋지 않을 뿐더러 탐욕스럽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결국 정당 정치라는 것이 내면 깊이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보면 전부 자신들의 권력욕과 명예욕, 물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고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그런 유치원생도 비웃을만한 거짓말은 입밖에도 꺼내지 말자! 그냥 솔직히 남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내 말 한마디에 만인이 두려워 떨며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고 싶고, 나의 이름 석자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역사에 길이 남으며 자자손손 놀고 먹어도 될 만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이 나라 정치인들의 가장 큰 목적 아닌가?

이 나라를 떠나 국적을 파버리고 싶다는 미친듯한 갈망이 샘솟는 요즘 한권의 책을 만난다. 역대 제왕들의 교과서, 세종대왕이 곁에두고 탐독하였고, 모택동과 시진핑이 사랑한 바로 그 책, <자치통감>이다. 북송 시대를 살다 간 위대한 역사가 사마광이 지은 본서는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까지 1362년에 걸친 중국 역사의 중심 축을 이루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집대성한 대작이다. 본래 294권이라는 어마무시한 분량으로 집필되었지만 내가 만나게 된 본서는 '푸챵'이라는 유능한 중국인 편집자가 후대에 전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치통감의 정수 58편을 엄선하여 편집 한 것을 이번에 현대지성 출판사를 통해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이라는 제목 하에 출간한 저작이다.

책의 제목에서 풍겨져 나오듯이 고대 중국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를 통한 역사 속에서 정치, 경제, 민족, 병법, 인간관계 등의 다양한 이슈들을 통해 그 안에서 정치의 바른 원리를 발견하고, 인간 세상사의 다채로운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가도록 돕는 이른바 정치와 행정의 가이드북과 같은 역할로서의 쓰임새는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크나큰 도움으로 다가온다. 선조들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 삼고 그 안에서 탁월한 삶의 지혜를 배워 이 시대가 맞닥뜨린 각종 난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본서는 매우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는 위대한 저작 중 한권이다.

역사서 장르가 다소 부담스러운 독자들도 한번 펼친 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를 통해 독자를 중국의 역사 속 한가운데로 빨아들이는 책이 가지는 큰 원초적 흡입력은 대단하다. 나 또한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상당 분량을 마시듯이 읽어 내려갔는데 58편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이어지지 않고 단편적인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기에 어려운 역사 속 인명과 지명, 고대 중국 특유의 그 수 많은 나라 이름들과 같은 복잡성에 읽기 전 기부터 질리는 독자들에게 오히려 이 단편적 구성은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내용의 요지는 권력암투, 당리당략을 위한 끊임없는 당쟁, 권모술수와 이전투구, 시기와 질투, 모략과 배반, 음해와 이간질을 통한 암살, 군주의 주색잡기와 기행, 파행적 정치 행보, 끊이지 않는 주변국과의 전쟁과 도탄에 빠진 민생에 관한 이야기 등이 책 전면에 편만히 기록되어 있다. 읽다보면 무척 흥미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권력의 허무함과 그 허망한 권력을 좇기 위해 죽고 죽이는 암투를 통해 서로 물고 물리는 지독한 아수라장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역함을 느낀다. 더군다나 이것이 모두 지어낸 픽션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무대 가운데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들의 한장면임을 기억하면 더 진저리쳐진다. 그러나 이렇게 혼탁한 이야기들 속에 몇편의 미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후한의 한장제 시절 중앙 정치 무대를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있는 자신의 패밀리인 외척에 대해 어떠한 상과 벼슬도 내리지 못하게 했던 마태후의 그 강직함과 깨끗한 심성은 후대에 청렴함과 깨끗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야기이다. 또한 당나라 태종의 아내였던 장손황후는 아녀자로서 결코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며 검소하고 검약한 모습으로 아랫사람들과 자녀들을 돌보고, 남편인 태종을 보필하여 군주의 부인으로서 후세에 길이 남는 모범을 보인 여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권력 한번 손에 넣고, 어떻게든 한자리 해 먹으려고 아귀다툼하는 소인배들이 들끓는 현대 정치판의 탐욕스러운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항상 견지해야할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그럼 이 책이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아닌 나의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고 나에게는 어떠한 가르침을 베푸는가에 관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필요한 교훈이 가득한 역사 대작이기에 일개 개인인 독자들의 삶과는 깊은 연관성을 찾기 어려울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본서를 통해 다시 한번 내 삶과 나를 둘러싼 삶의 정황들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통찰을 얻는다. 믿음과 배반, 시기와 질투, 음해와 이간질, 끝이 없는 명예와 재물을 향한 욕심과 탐닉 등 인간 관계 안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삶의 이슈들이 고대 중국 역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주제들과 놀랍게도 일치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처자식 먹여살려야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자신의 밥 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힘 가진자에게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굽신대지만 반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상대적 약자에게는 차갑게 돌변하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리더들, 나에게 필요할 때는 친구지만 필요성이 사라질 때 너무나 쉽게 인간관계를 토사구팽해버리는 리더들, 자신의 기준으로 능력이 있어보이는 사람들은 따뜻하게 대함으로서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지만 자신의 기준에 못미치는 사람은 그냥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관계의 간격을 두고 그러한 사람들은 챙기지 않는 리더들, 1인자에게 잘보이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어줍잖은 권력을 사용하여 약자들을 컨트롤하는 1인자 그늘 아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간신배 같은 리더들,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모두 다 자기 밥줄 지키기와 사람들에게 받는 명예와 인기, 자신의 자아성취를 통한 만족감을 위해 쇼를 행하는 리더들...열거할수록 토 나올정도로 역겨운 행태들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더 징그러운 사실은 이런 모습들의 사람들을 실제로 내가 경험했다는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런 시대에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그러나 본서를 통해 깨닫게 되는 반전 교훈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한순간에 나 또한 위의 나열한 모습의 사람으로 분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미 나도 저런 흉칙한 괴물의 모습으로 평가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태후, 장손황후와 같이 자신들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채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삶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잊혀져야 하고, 처절하게 낮아져야하며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내 존재감이 완전히 잊혀져야 하는 삶. 내 자아가 온전히 소멸되는 삶을 추구하는 것만이 자치통감을 관통하는 그 인간사 치열한 각축장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는 길이다. 쉽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도 현대의 정치판과 인간사 모든 관계들은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난 시대상 그대로를 반영한다.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을 통해 고대 중국 역사 한복판에서 혼탁한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인생의 해답을 발견하기 원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기꺼운 마음으로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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