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401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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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사



1. 맨홀 뚜껑을 쳐다보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ㅏ ㅗ ㅜ ㅓ" 가 동그랗거나 각진 맨홀 뚜껑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지하에서 두드리는 노크소리, 살려달라는 비명소리 같았다. "맨홀(ManHole)" 인간이 구멍이요 구멍이 인간이라는 상징 같다. 인체에 뚫린 다양한 구멍으로 드나드는 것들, 구멍은 입구이자 출구다. "ㅏ ㅗ ㅜ ㅓ"가 교묘하게 구획을 나눈 미로다. 입구도 막혔고 출구도 막힌 미로다. 이런 미로는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져야 한다. 2차원이 아닌 3차원 미로다. 내 마음대로 맨홀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을 부려 보았지만, 이 시집에 실린 장시(長詩) 〈맨홀 인류〉는 구멍으로 써 내려간 역사다.



김혜순 시인의 리듬이 좋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에 걸쳐 있는 소금 호수 사해에 몸을 맡긴 기분이다. 어떠한 힘을 가하지 않고도 내 몸을 붕, 띄우고 '몰디브에서 모히또'한 잔을 주문해 마시는 기분이다.




2. 메모


- 유령학교 17쪽 부분

나는 유령학교에 근무한다/ 이 동네에선 유령된 지 10년 지나면 자동으로 제도권 유령이 된다/ 나는 신참 유령들에게 수업을 한다/ (···)/ 우선 머리에 책을 올리고 발을 땅에 대지 않고 걷는 연습/ (···)/ 공중에 떠서 잠드는 법을 연습시킨다/ 관 속에서의 우울증 극복법이라든지/ 지하 시체보관실에서 더운 공기 내뿜지 않는 법/ (···)/ 춘설처럼 창궐하는 유령연습 한번 해볼까요?/ 그러면서 숙제 안해오는 유령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유령학교 졸업하고 제도권 유령밖에 될 게 없나니,/ 쳇!




- 상처의 신발 28-30쪽 부분

상처에 발을 집어넣는다/ 상처를 신고 다닌다/ 아니면 상처가 냄새나는 발을 품고 다니는 건가/ 상처는 나를 위한 피고름 틀이다// (···)/ 상처로 지은 신발은 배를 가른 닭의 목구멍/ 내가 발을 집어 넣으면 작은 갈비뼈들이 우두둑 부러진다/(···)






- 정작 정작에 140-142쪽

정작 꽃집에는 없는 것, 흙/ 정작 새집에는 없는 것, 하늘/ 정작 물고기집에는 없는 것, 바다// 우리집에 없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겠지?//(···)// 높은 집이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추락한 인부의 이빨이 들어 있네/ 먼 집이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담벼락에 붙은 늙은 엄마의 손바닥이 들어 있네// (···)// 꿈 밖에서는 알아들었는데 꿈속에서는 정작 못 알아듣는 말, 우리집/ 모여 살 때는 알아들었는데 정작 정작에/ 나 죽은 다음에는 못 알아듣는 말, 우리집/ 다음 생에선 엄마아빠오빠동생 우리 우리 어떻게 알아볼까?//(···)



- 그림자 청소부 148-150쪽 부분

내 몸이 지상에서 잠깐씩 빌려 쓰는 부동산/ 내 그림자 오천 장이 배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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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나희덕 지음, 신철 그림 / 나라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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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글, 신철 그림,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나라말


1. 사람마다 수건을 접는 방식이 다르듯 역사도 시도 사람마다 다르다 역사와 예술은 틀린그림 찾기가 아니라 숨은 그림 찾기 먼지가 수북이 쌓인 빛바랜 책 세로쓰기로 된 책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 책 같은 젖은 수건 같은 역사


수건은 돌고 돈다 등 뒤에 숨겨왔던 마음을 놓고 냅다 뛰던 아이의 신발이 벗겨지고 쫓아오던 수건에게 붙잡혀도 웃는다 부끄러워 빠진 이빨이 부끄러워 얼른 자리를 채운다


할아버지 칠순 잔칫날 색동옷을 입고 춤추던 아들과 하나도 안 변한 동창들의 얼굴을 새겨 넣은 수건 삶아도 삶아도 냄새가 나고 삶아도 삶아도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의 끄트머리를 잡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야 했던, 퉁퉁 부은 얼굴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 사각의 링 안으로 수건을 던져야 했던 역사



하늘을 물들이는 형형색색의 수건들과 자식 같은 이태리 타올
누군가를 잊으려고 손사래를 치는 동안 당신의 영혼은 부단히 헹구어진다
바닷바람에 말라가는 미역처럼 단단해진다
눈 빠지게 기다려도 눈은 빠지지 않고 눈에 밟히는 것들만 생생한 수건의 역사



젖고 마르고 젓다가 말다가 너덜더덜해진 수건의 역사를 새로 쓰기로 한다
저녁을 먹고 수건을 개킨다 차곡차곡 서랍을 쌓는다 쏟아진 하품이 쌓인다



2.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시배달’을 단행본으로 묶은 책이다. 맨 뒤편의 작품 출전을 보니 2007년-2009년에 출간된 시인들의 시들이 상당수다. 시 소개와 여덟 아홉 줄 정도의 시인의 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편마다 그림이 있고 실린 시들도 부담 없이 읽기에 좋은 시들이다.




* 메모


- 김선우, 〈낙화, 첫사랑〉, 36쪽 부분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장옥관, 공기예찬 64-65쪽 부분

공으로 얻은 공기 채운 마음/ 공처럼 둥글어져서/ 푸들푸들 가로수가 강아지처럼 마냥 까부는데/ 페달 밟으니 바퀴 버팅기고 있던 살대가 모조리 지워지고 동그라미 두 개만 떠오른다/ (···)

- 김혜순, 첫, 76-77쪽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 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



- 문정희, “응”, 116-117쪽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164쪽 부분

푸른색. 떄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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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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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집, 사월 바다, 창비
#도종환 #사월바다



1. 어머니가 췌장암 판정을 받으신 지 오년 만에 완치되셨다. 발견도 어렵고 발병 후 삼 년 이내 생존율이 십 퍼센트 미만인 병을 이겨내셨다. 2011년 이후로 당신은 분명 살아 계신데 죽은 것 같다. 분명 살아났는데 죽은 것 같다.



흐르는 물에 여러 번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독이 내 몸속에 남았다. 논할 수 있어도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출근길 지하철 승강장 반대편에서 엄마가 손을 흔들었다. 반대편 지하철이 도착했고 당신은 사라졌다. 당신은 지하철에 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있는 이편으로 건너오고 계실까.

‘아침식사 됩니다’는 국밥집의 비뚤빼뚤한 글씨가 엄마를 닮았다.



2. ‘사월 바다’는 엄마를 닮았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꾸만 세수를 하는 엄마의 얼굴을 닮았다. 한없이 다정하고(서정시) 한없이 매섭다(정치적인 시). ‘거세개탁(擧世皆濁)’에도 홀로 독야청청이 아니라 나와 가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더불어’ 가잔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가 ‘희망의 이유’다.




3. 메모


- 나머지 날 12-13쪽 부분

나물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 겨울 저녁 68쪽

찬술 한잔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겨울밤은 좋다 /(···)/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 쓰던 붓과 화선지도 밀어놓고/ 쌓인 눈 위에 찍힌 산짐승 발자국 위로/ 다시 내리는 눈발을 바라본다/ (···)/ 그동안 너무 뜨거웠으므로/ 딱딱한 찻잎을 눅이며 천천히 열기를 낮추는 다기처럼/ 나도 목을 눅이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 ‘거새개탁’은 굴원의 「어부사(漁夫辭)」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온 세상이 탁한데 나 홀로 맑다(擧世皆濁我獨淸)



- 이릉대전 98-99쪽 부분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에서도 질 때가 있고/ 마지막 성 하나를 넘지 못하고/ 무너지는 운명도 있다는 걸 공명은 알고 있었다/ (···)



- 희망의 이유, 126-128쪽 부분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 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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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좋은 책 - 포개지고 번져가는 이야기들
김행숙 지음, 조성흠 그림 / 난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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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사랑하기 좋은 책, 난다
#김행숙


1. 김행숙 시인의 독특한 산문집. 안데르센의 동화《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사랑에 관한 소설과 시, 철학, 그리스 로마신화, 영화를 재료로 사랑에 관해 쓴 한 편의 소설 같은 철학책 같은 서평집 같은 시집 같은 책.

물이 반쯤 있는 비커에 ‘사랑’ 한 방울 떨어뜨렸을 뿐인데 사랑은 물속으로 번져가며 독특한 색깔과 향기를 보이고 풍긴다. 책은 얇지만 그 밀도가 높아 자꾸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한국 남자와 이란 여자의 사랑 얘기를 쓰게 됐을까.




2. 한국 남자와 이란 여자가 사랑을 했다. 유라시아와 페르시아의 기후만큼이나 둘은 참 달랐다. 여자는 콧대가 높다. 문자 그대로 콧대가 높아 여자는 코를 낮추는 성형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남자는 모음탈락이 심한 페르시아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녀의 코와 그의 발음은 어색하고 서툴렀다.


그는 테헤란로에서 일한다. 콧대 높은 빌딩 위로 구름이 지나간다. 그는 하늘을 보며 카스피해를 건너온 푸른 바람과 푸른 그늘, 푸른 침묵의 부력으로 떠오르는 이슬람 사원, 포플러 나무그늘 아래에서 속삭이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는 여전히 비키니 보다 부르키니를 사랑하고 이란의 스키장과 함성으로 가득찬 아자디 스타디움을 동경한다.



어둠에도 색이 있다. 꿈속에서 그녀는 매일 다른 히잡을 쓰고 나왔다. 그녀의 이름을 딴 골목이 이 도시에 있으면 좋겠다. 그녀를 위해 그는 세이렌의 노래를 닮은 시를 썼다.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이름이 같은 비를 맞으며/ 비에 젖은 책과/ 비는 피했지만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저만치 날아가는 우산과 뒤집힌 치마를 만난 적이 있다/
한쪽 눈만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 해독할 수 없었던 너의/ 뭉개진 글자 같은 비밀의 페이지는 넘기고/ 다른 것을 틀리다고 생각했던 나의/ 빌미의 귀퉁이를 접어둔다/ 비가 오는 밤이면 벽에 박힌 못의 대가리로 숫자들이 무게중심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름만 같았던 소녀가 다른 도시로 건너오고 있다.”




3. 메모


- 내게 할머니는 사랑스럽고 유쾌한 노인이었다. 나는 신랄한 어마하고 있을 떄보다 유쾌한 할머니하고 있을 떄가 훨씬 마음이 가볍고 좋았다. (···) 어쨌든 엄마가 내게 시니컬한 평론이라면 할머니는 농담으로 버무린 소설에 가깝다. 11쪽

- 3월의 잔설같이 연약한 육체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으로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 그 순간, 내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녀의 쭈글쭈글하고 검버섯이 핀 피부 위로 비늘들이 돋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무지갯빛 비늘들이 할머니의 죽은 몸을 반짝이게 했다.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슬픔 너머에서 펼쳐지는 미지의 풍경이었다. 12쪽



- 나는 소설(샤오루 궈의 소설,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사전)을 읽는 내내 Z의 서툰 언어가 매우 적절할 뿐 아니라 매력적이라고까지 느꼈는데 그래서, 사랑의 언어는 본래 서툰 언어가 아닐까, 외국어가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었다. 49쪽



- 김화영 선생님의 「책, 독서, 교육」이라는 에세이에 보관되어 있는 짧은 연애편지.

나는 문맹의 성인들을 모아놓고 이른바 ‘영희와 바둑이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 글자를 깨치는 것이 느린 피교육자들은 가령 고향에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서 편지가 오면 나에게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달라고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사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부부 사이의 가장 내밀한 마음의 표현을 제3자를 통해서 해독해야 하는 딱한 사정에 내가 참여한 것이다. 하루는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냈더니 백지 위해 손바닥을 펴서 짚은 채 각 손가락의 윤곽을 따라 연필로 서투르게 줄을 그은 손의 그림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그 밑에는 어렵사리 판독한 결과 ‘저의 손이어요. 만져 주어요.’라는 뜻으로 읽혀지는 애틋한 글이 딱 한 줄 씌어져 있었다.



- ‘괜찮다’가 사랑의 서술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사랑의 접속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사랑의 문법이다. 96쪽



- 사랑은 ‘액체적’이다. 녹이고, 빠뜨리고, 섞이고, 끓고, 합쳐지고, 흐르고, 퍼지고, 스미고, 나눠지고, 증발하는 그 모든 액체적 현상이 사랑의 다양한 모양새이자 속성이다. 눈물은 사랑의 액체 중의 액체가 아닐는지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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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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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경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유희경



1. 나의 ‘오늘 아침 단어’를 보기 위해 폰 메모장을 펼친다. ‘도어락, 잘못된 비밀번호, 골목’ 아마도 샤워 하다가 생각난 단어를 재빨리 메모해 놓은 듯. 왜 그런 단어를 적어 놓았는지 나도 모른다.



막다른 골목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고 나를 쏘아보는 밤.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 죽어라 집으로 뛰어갔는데 복도식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왜 16층에서 내려오지 않을까. 미치겠다. 겨우겨우 어찌어찌 6층 집 앞에서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렀는데 자꾸 오류가 난다. 분명 골목은 내 뒤를 쫓아오고 있을 텐데. 꿈속의 단어였나 보다. 이상의 시처럼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의 꿈을 꾸었던 걸까.




2. 유희경의 시는 슬프지만 유머가 있어 아프지 않다. 인기척을 듣고 이중의 자물쇠를 채우는 이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내 손목을 안으로 끌어 당겨줄 것 같은 가족처럼 포근하다. 나처럼, 당신처럼 어긋난 사랑에 아파하고, 매번 실패하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후회하고 그래도 미래에는 이럴지도 몰라, 라며 막연한 기대를 하는 주체와 수시로 만나게 된다. 현실 없이 지극히 현실적인 시, 화이트보드에 남은 희미한 마커처럼 잔상에 남는 시 그리고 ‘내일 아침 단어’가 있어 겨우 눈 감을 수 있는 오늘 밤.



- 꿈속에서 11쪽

잠든 것들이 거리로 나갔다/ 긴 소매들은 소매를 접었다// 입김이 남이 있는 창문/ 불이 꺼지지 않는 들판/ 날아오르는 바람과/ 걸어다니는 발자국들// 가슴만 한 신음을 낳고/ 누군가 밤새 울었다//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안겨 있는 나를 보았다/ 하얗게 빛이 났다/ 나머지는 어두웠으므로// 비명 같은 내가/ 빈 종이 되었다





- 珉 20쪽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 그 얘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 당신의 자리 21쪽

나는 당신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당신 발밑으로 가라앉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 (···) 당신은 내 오른쪽의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내 머리 위에 흔들리는 이가 있다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



- 낱장의 시간들, 25-27쪽
한낮의 태양이 가득했다 산책이 시작되었다 너는 저음의 걸음을 이끌고 그곳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 그날 밤은 떠올리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낱장의 시간들이 날려 오고 손끝의 힘이 풀려나갈 때 오후의 개가 너를 따라온다 (···) 지금은 그저 假定의 시간 이제 사람들은 창문의 한 귀퉁이를 발견할 것이다 (···)



- 텅 빈 액자 108쪽

눈 덮인 지붕과/ 궁핍의 나무를 떼어낸다/ 서러운 그림이다// 그림의 그의 것이다/ 그가 직접 걸어둔 것이다/ 등 너머 실팍한 마음이/ 이제야 먼지처럼 날린다// 거실 옆 부엌에는/ 그릇을 깨먹은 여자가 있다/ 잔소리하듯 하얀/ 그릇됨의 속살// 떼어낸 자리가 환하다/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없어진 나날보다/ 있었던 나날이 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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