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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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필브릭, 사악한 책, 모비 딕, 교유서가, 2020

 

허먼 멜빌의 "모비 딕"1회독 한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대체로 책의 편제에 따라 저자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을 뽑아 해석과 그 의미를 써내려간다. 그렇다고 텍스트 중심의 분석적인 문체는 아니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해당 장면의 철학적, 종교적, 서사적, 인물적 해석을 시도한다. 분량은 적은 책이지만 한 번도 이 책을 보지 않은 사람이 따라가긴 힘들 것이다. 반대로 오래 전에 모비 딕을 읽어 대충의 얼개는 아는 독자나 나처럼 막 모비 딕을 읽은 사람은 이 책을 읽고 다시 모비 딕을 펼칠 것이다.

 

- 사실 나는 가장 최근에 모비 딕을 읽었을 때에야 페달라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페달라와 마닐라에서 온 노잡이들은 그냥 지옥 같은 장식물로 갖다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에이해브를 에이해브로 만드는 핵심 요소였다. 어떤 지도자도, 아무리 미치광이라고 해도 내부 조언자나 계속 부추기고 다그치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48

 

“...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천상의 것에 대한 직관, 이 조합으로 신자가 되지도 불신자가 되지도 않고 양자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슈메일은 관대한 불가지론자일 뿐 아니라 즉흥적 언어의 마법에서 깨달음을 얻는, 기지 넘치며 심오한 시인이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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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모비 딕 1~2 - 전2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허먼 멜빌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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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맬빌, 황유원 옮김, 모비 딕 1, 문학동네, 2019

 

줄거리는 단순하다. 흰 향유고래인 모비 딕의 공격에 한쪽 다리를 잃은 피쿼드 호의 선장인 에이해브, 1등 항해사 스타벅, 2등 항해사 스터브, 3등 항해사 플래스크, 작살잡이 퀴퀘그와 선원으로 승선한 화자 이슈미얼이 승선한 범선이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모비 딕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이슈미얼만 살아 남고 모두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줄거리가 짧다고 해서 그 내용이 가볍다는 건 절대 아니다. 백과사전에 가까운 고래에 대한 상세한 설명, 성경에 레퍼런스를 둔 수많은 상징, 언어유희, 고래잡이 배에 관한 상세한 묘사, 인류의 모든 군상들이 모두 한 배에 탄 듯한 인물 설정 등.

 

 

 

'모비 딕'이라는 존재에 대해 악이나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평면적 해석을 넘어서서, 신이라는 존재에 버금할 만한 초월적 상징, 인간의 욕망, 에이해브가 고래를 쫓는 것이 아니라 고래가 에이해브를 쫓는 것이라는 약간 운명론적인 해석까지 다양하다. 종교와 인간이 이룩한 물질문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더불어 생태학적으로, 페미니즘적으로도 토론할 거리가 충분하다. 그래서 읽어도 읽어도 다시 읽게되는 마치 마르지 않는 바닷물처럼 이 책의 넓이와 깊이는 가늠할 수 없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에서 작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손에 놓지 않았던 책이라고 해서 찾아서 읽게 되었는데, 왜 그녀가 끊없이 대륙과 해양을 여행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고 파편을 모은 듯한 "방랑자들"의 형식이 모비 딕에서 차용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1950년 대의 동명의 영화와, 영화 "하트 오브 더 씨(2015)" 크리스토프 샤부테의 그래픽노블을 함께 보면 좋겠다. 난 우선 멜빌의 단편집과 위 그래픽노블을 읽고, 다시 모비딕 1,2권을 읽을 생각이다.

 

 

-이슈미얼: 창세기 16, 아브라함과 이집트인 시녀 하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자, 하갈과 함께 광막한 사막으로 내쳐져 그 이름은 관용적으로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자를 뜻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으로, 이삭은 유대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37

 


- 에이해브(Ahab)는 불길한 이름이다. 열왕기상1628절에서 2240절에는 우상을 숭배하여 폭정을 일삼았던 아합왕과 그의 방종한 왕비 이세벨 이야기가 나온다. 168쪽 각주

 

 

- 펠레그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선실을 당당히 가로지르며 외쳤다. “다들 저 인간이 하는 말 좀 들어보라고. 한번 생각해봐! 당장이라도 배가 가라앉을지 모르는 판에! ‘죽음심판이라고? ? 돛대 세 개가 전부 뱃전을 처박아 계속해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대고, 앞뒤 좌우 할 것 없이 사방에서 파도가 우리를 덮쳐오는데, 그 와중에 죽음심판을 생각한다고? 헛소리! 그럴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유 따윈 없어. 에이해브 선장과 내가 생각했던 건 바로 목숨이야. 어떻게 하면 선원을 모두 살릴 수 있을지-어떻게 하면 임시 돛대를 세울 수 있을지-어떻게 하면 가장 가까운 항구로 갈 수 있을지, 그런게 내가 생각했던 거야.” 186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포경 보트에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만하고 쓸모 있는 용기란 위험에 맞딱뜨렸을 때 그 위험을 똑바로 헤아리는 데서 생겨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226

 

말도 못 하는 멍청한 짐승에게 복수라뇨!” 스타벅이 소리쳤다. “녀석은 맹목적인 본능에 따라 선장님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미친 짓이에(310)! 멍청한 짐승 때문에 격분하는 건 말이죠, 에이해브 선장님, 제게는 신성모독으로 보입니다.” 311

 

“... 이보게, 눈에 보이는 대상은 모두 두꺼운 종이로 만든 가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삶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행위 속에서-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경우,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이성적인 무언가가 비이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거푸집을 내미는 법이지. 만일 뭔가를 찌를 생각이라면 바로 그 가면을 꿰뚫어야 해!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 무슨 수로 밖으로 나갈 수 있겠나? 나에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그 벽이야. 아주 바싹 다가선 벽이지. 가끔은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네. 하지만 아무러면 어때. 녀석은 나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괴롭히고 있단 말이야. 나는 녀석에게서 난폭한 힘과 그 힘을 북돋워주는 헤아릴 수 없는 적의를 느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말로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지. 그 흰 고래가 대리인이건 본체건 간에,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쏟아부을 거야. ... ”311

 

선실. 선미 쪽 창가. 에이해브가 홀로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희고 흐릿한 항적을 남긴다. 내가 어디를 항해하건 바다는 창백하고, 두 뺨은 그보다 더 창백하다. 시샘하는 파도가 내가 낸 길을 삼켜버리려고 옆에서 비스듬히 부풀어오른다. 뭐 그러라지. 어차피 내가 한발 더 앞서나간다.

저기 저 언제나 넘칠 듯 가득차 있는 술잔 가장가지로 따스한 파도가 포도주처럼 얼굴을 붉힌다. 황금빛 이마는 푸른 바다의 수심을 잰다. 태양은 잠수부가 되어-정오 때부터 천천히 잠수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간다. 내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 끝없이 계속되는 언덕이 나를 지치게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혹시 내가 쓴 왕관이 너무 무거운(317) 일까?

 

은하수의 새하얀 심연을 바라볼 때, 우주의 비정한 공허함과 광대무변함을 희미하게 보여주면서 소멸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것은 그 색의 무한함이 벌이는 짓일까? 혹시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이라기보다는 가시적인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의 결합체인 것은 아닐까 광활한 설경이 소리 한 점 없이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의미로 가득차 있는 것, 색이 아니면서도 모든 색이 응집된 무신론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꺼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367

 

그래, 우연, 자유의지, 숙명-이것들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로 엮인 채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항로에서 벗어날 일 없는 숙명의 곧은 날실, 그것이 다른 실과 교차할 때 일어나는 모든 진동은 사실 그 작용을 돕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여전히 주어진 실 사이로 자신의 북을 자유로이 움직여대고 있다. 그리고 우연은 그 행동반경이 숙명의 직선 내로 제한되고 옆으로의 움직임은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르지만, 이처럼 둘의 지시를 받을지라도 우연 또한 차례로 숙명과 자유의지를 지배하며 결과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는(399) 역할을 한다.




허먼 맬빌, 황유원 옮김, 모비 딕 2, 문학동네, 2019

 

하지만 그 철커덕거리는 쇠사슬에 매인 것은 배가 아니라 고래의 거대한 사체였다. 머리는 선미에, 꼬리는 선수에 묶인 고래는 이제 그 시커먼 몸뚱이를 선체에 바싹 붙인 채 누워 있었는데, 높이 솟은 활대와 삭구를 시야에서 가려버린 밤의 어둠 속에서 보면 이 둘, 배와 고래는 같은 멍에를 쓴 거대한 수소들이, 한 마리는 누워 있고 또다른 한 마리는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25

 

향유고래의 거대하고 얌전한 머리 위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명상이 낳은 수증기가 덮개처럼 드리워(164)져 있고, 그 수증기는 마치 천국이 향유고래의 생각을 보증하는 도장이라도 찍은 양 무지개의 찬양을 받고 있다. (···) 그와 같이 이따금 신성한 직관이 내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의심의 짙은 안개를 뚫고 솟아나와 그 안개를 한줄기 천상의 빛으로 불태워버릴 때가 있다. (···)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이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165

 

네덜란드의 포경법 1695

. ‘잡힌 고래는 그것을 잡은 자의 소유다.

. ‘놓친 고래는 먼저 잡는 자가 임자다. 201

 

그런데 죽을 준비를 완전히 다 끝마치고 관이 자신에게 딱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퀴퀘그는 갑자기 원기를 되찾았다. 이윽고 목수가 만(348)든 관은 쓸모가 없어진 듯 했다. 그리하여 몇몇 선원들이 기쁨에 찬 놀라움을 표하자, 그는 자신이 갑자기 나은 이유를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위태로운 순간에 이르자 문득 아직 다 끝내지 못한 육지에서의 자잘한 의무들이 떠올랐고, 그래서 죽음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는 분명히 말하길,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죽고 사는 것이 퀴퀘그 자신의 독자적 의자와 희망에 달린 문제냐고 물었다. 그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만일 사람이 살기로 결심하면 그저 아픈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는 게 퀴퀘그의 생각이었다. 349

 

송두리째 지나가버린 내 삶의 거센 파도여, 아득히 먼 대양의 끝에서 지금 이곳으로 밀려와 집채만한 파도와도 같은 나의 이 죽음을 더욱 높이 일게 해다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는 못하는 고래여, 너를 향해 나는 힘차게 나아간다. 최후의 순간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고, 지옥의 한복판에서 너를 찌를 것이다. 오로지 증오만이 가득한 내 마지막 숨결을 너에게 내뿜어주마.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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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위한 사전 - 시는 어느 순간에도 삶의 편
이원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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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 시를 위한 사전, 마음산책, 2020

 

‘시 한 송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2016. 3. 3. - 2020. 1. 31.)한 원고를 묶었다.

 

- 시 없이, 시와 만난 순간만으로 책을 엮었어요. 만난 시를 내보이지 않고 시와 만난 순간을 기록하는 방식. 만난 시와 보다 섬세하게 닿기 위하여 필요한 사전 같은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10쪽

 

책머리에 적힌 것처럼 이 책은 연재된 시에 관한 짧은 산문의 모음이지만 연재 당시와 달리 이 책에는 해당 시가 없다. 하얀 벽에 비친 그림자의 모양을 보고 사물의 모양과 크기와 질감 등을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 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보았다. 책의 볼륨을 현격히 줄이면서 동시에 해당 시편들의 저작권 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이라고 의심해보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시에 관한 해설이 아니라 독자적인 산문집으로 읽는 것이 좋겠다. 시라는 배경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글자들이 춤을 추는 풍경이랄까. 생크림케이크의 생크림 자체가 무척 맛있고, 시어와 시의 일부 구절이 토핑이나 별사탕처럼 첨가되어 있어 풍미를 돋운다. 거듭 읽어보다가 가끔은 그 시를 찾아보아야겠다. 검색엔진에 ‘시 한 송이’와 해당 시의 제목을 넣으면 금방 시를 찾을 수 있다.

 

 

 

- 「희망의 임무」(이브 폰푸아)

 

희망이라는 퍼드덕거리는 작은 새를 두 손이 감싸고 있음을 상기해야 해요. 각자의 두 손 안에 작은 새를 머물게 하는 것. 새의 발과 접힌 날개를 내리누르지 않는 것. 두 손으로 감싼 새의 심장을 가늠해보는 것. 두 손 안에 보듬고 있는 새(54쪽)의 발과 날개와 눈을 동시에 느끼는 것. 램프로 저 너머의 희망을 밝히는 것. 희망의 의무이지요. 55쪽

 

- 「풍경」(김종삼)

 

달력에 기억하고 싶은 생일을 써넣는 일로 한 해를 시작해요. 멀어진 사람, 몇백 년 전 사람의 생일도 있어요. 양력이면 요일이 새삼스럽고 음력이면 날짜가 새삼스럽죠. 생일을 써넣어야 한 해의 달력이 시작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57쪽

 

- 「친밀감」(김미령)

 

경계가 없다면 형태도 없지요. 형태는 다른 것과의 구분인 동시에 닮은 것과의 연대이지요. “하나의 형태를 이루려는”의 방향이 대화라면, 서로의 질감은 “경계”이지요. 83쪽

 

- 「달 이불」(윤병무)

오늘도 달빛 덮고 잠들어요. 오늘은 반만 덮어요. 반달이거든요. 달도 오늘은 반만 덮고 잠들어요. 보이지 않는 반은 잠들지 않는 나의 반이 덮어주고 있거든요. 오늘은 반달이라면, 나도 반만 잠드는 날, 달도 반만 잠드는 날, 그러니까 달과 나는 반반 이불을 덮고 지내는 사이. 나의 반은 달빛을 덮고 자고 나의 반은 반달을 덮어주고, 이런 모양이죠.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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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탄생 민음의 시 275
유진목 지음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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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유진목 시집, 작가의 탄생, 민음사, 2020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신, 인간과 동물, 나와 아버지, 나와 어머니

  그리고 이에 대해 보고 기억하고 예감하고 쓰는 나

  를 바라보는 또다른 나


  화자에서 분열된 수많은 자아와 

  수많은 자아들이 한데 뭉쳐진 거대한 자아가 

  한데 섞여 공존하는 

  마치 양자물리학처럼 보이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시, 산문, 희곡이자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인간에 관한 이야기



- 작가의 말

나는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

 

- 미시령

 

아버지/ 우리가 함께였을 때/ 사람이었던 것을 / 잊지 않고 있어요// 그사이 흐려진 유리를 닦아/ 아버지가 나와 같이/ 거기에 있도록 했다. 32쪽

 

 

- 파로키

 

파로키가 무엇인지 인간은 물을 것이다.// 파로키는 인간이 아닌 모든 것/ 살아 있을 필요가 없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 59쪽

 

- 할린

 

내가 할린을 찾았을 때/ 할린이 알려 준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혼자서 죽을 것이며/ 죽고 난 뒤에는 죽은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죽고 난 뒤에 나는 죽은 것을 알고 싶었다.// 할린이 물었다. 죽은 것을 알아서 무얼 할려고?// 내가 죽은 것을 말하자면 누리고 싶었다./ 더 이상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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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 황현산 유고 평론집
황현산 지음 / 난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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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난다, 2020

 

 

- 2012년부터 2017년까지 계간『문예중앙』에 연재했던 길지 않은 글 모음집이다.

이육사, 백석, 전봉건, 김수영, 김종삼, 최하림, 박서원 같은 우리나라 시인과 아폴리네르, 발레리처럼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의 작품의 일부와 평이 실려 있다. 본격적인 비평과 시에 관한 평문의 중간 쯤에 이 글은 발을 걸치고 있어서, 너무 난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글이라 반갑다. 마치 시에 관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 같다고 할까. 특히 부록 형식으로 담긴 「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은 비평가 뿐 아니라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둘 만한 충고와 바람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을 징검돌 삼아 대산문학상 수상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을 읽어볼 참이다.

 

 

- 김종삼, 「어디메 있을 너」부분

 

학교와 그 사이/ 새들의 나래와 깊은/ 숲속으로 스며 든/ 푸름의/ 호수와// 학교와 그 사이에/ 石家 하나/ 鐘閣 하나/ 거기에 너는 있음직 하다 150-151쪽

 

- 김종삼, 「베루가마스크」

그 부근엔,/ 당나귀 귀같기도 한 잎사귀가/ 따 위에 많이들 대이어 있기도 하였다./ 처마 밑에 달린 줄거리가 데룽거렸던/ 어느 날엔/ 개울 밑창 파아란 해감을 드려다본 것이다. 내가 먹이어 주었던 강아지 밥그릇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에도 / 이 앞을 지나게 되었다. 157-158쪽

 

- 최하림, 「광목도로」219-220쪽

 

어둠과 함께 온 기억들에 싸여 나는/ 나를 밝혀주지 못하는 불빛을 본다/ 빛이 멀면 편안하다 죄가 많은/ 우리는 죄들이 두렵고 어둠이 내려서/ 아름다우니 어둠에 몸 섞는다/ 이런 밤 새들은 얼마나 조심스레/ 그들의 하늘을 날았던지/ 내 영혼은 어디를 방황했던지/ 검은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길들은/ 보이지 않게 밤으로 이동하고/ 새로이 추억이 짐짝처럼 마른 나무 밑에 쌓인다/ 시간이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흘러간다/ 시간을 따라서 광목도로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곳이 있을 것이다/ 잠시 유숙할 집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만은 사랑이었고 배반이었던 여자도 어디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너를 버리고 달려간다/ 그래서 세상은 고통스럽고 일어서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하다/ 내 가슴은 사직처럼 무너져 내린다/ 예감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밤으로 간다 잘 있거라/ 한 번도 힘껏 꽃잎 피지 못하고/ 한 번도 힘껏 돌아보지 못한/ 가여운 말들아 내 딸들아

 

- 박서원, 「연장통」257-258쪽

 

무엇부터 버려야 할까// 낡은 의자 다리를 고치는 망치?/ 한 번은 고슴도치도 때려잡은 일도 있는,// 또 오렌치빛 외투 속에 감추고 다닌 적이/ 있던 잭나이프?// 못은 그동안 모서리마다 진저리치게/ 했지// 아침이면 배달되는 신문은/ 송곳으로 이곳저곳 구멍이 났어// 연장통은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수시로 집 안을 들쑤셔놓곤 했던 거야/ 참 긴요한 물건들이었는데.// 하지만 이젠 버려져야겠지// 새집엔 새 연장들이 필요하니까/ 방금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우기던/ 것들이지만,// 난 명령한다. 차렷!//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새 아침을 여는 것은/ 아닌 것을//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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