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지음, 김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 폴 사르트르 소설집, 김희영 옮김, 벽, 문학과지성사


1. 장 폴 사르트르. 이름만으로 묵직함이 느껴진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작가로 호명되지만 자신은 실존주의자로 불리기를 거부한 사람. 이 소설집에 실린 5편의 소설(「벽」「방」「에로스트라트」「내밀」「어느 지도자의 유년시절」)은 존재에 대한 탐구와 실패과정을 형상화했다. 죽음을 앞둔 죄수, 정신병을 앓는 남편의 곁을 지키는 여인, 파괴를 꿈꾸는 검은 영웅, 성불구자의 아내,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초현실주의에 빠져드는 고등학생. 양상은 다르지만 하나 같이 존재를 찾는 과정에서 ‘벽’에 부딪치는 주인공들이다.




존재란 무엇일까. 벽이란 무엇일까. 벽은 존재를 확인케하는 타자다. 벽을 붙잡고 고함치고 주먹을 휘두르고 머리를 박는다. 벽에 오줌을 갈기고 낙서를 한다. 벽은 장애물이라기보다 존재를 이끄는 마부 같다. 벽에 구멍을 내고 벽 너머를 훔쳐보는 일, 언젠가는 높아만 보이던 벽을 타고 넘어 다른 무엇을 보고픈 욕망일 실현하는 과정이 삶에는 있다. 그 사다리가 정신분석이나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생태주의 같은 사상이나 관념이다.

주제는 매우 무겁지만 서사나 형상화가 잘 된 소설들이라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 메모 -



* 어느 지도자의 유년 시절


“뤼시앵 플뢰리에는 키다리 아스파라거스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책상을 바라보고, 공책을 바라본다. 내 이름은 뤼시앵 플뢰리에이지만, 그건 단지 이름일 뿐이다. 나는 잘난 척한다. 잘난 척 하지 않는다. 잘 모르겠다. 그건 별 의미가 없다.’ 194쪽


“내가 날 찾던 곳에서는 날 찾을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5
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솔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 작가는 소설과 시를 쓴다.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201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옆구리를 긁다」를 읽은 기억이 있다. 시인은 ‘나’에 집중한다.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계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골똘하다. 말의 꼬임을 지나치게 않아 표면적으로는 잘 읽힌다는 것도 장점이다.

 

 

* 메모

 

 

- 모래 10-11쪽 부분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 2014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임솔아, 옆구리를 긁다 66-67쪽

 

빈대가 옳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쥐 한 마리를 사이좋게 찢어먹는

걸 구경하다가 아무 일 없는 길거리에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성

스러운 강물에 두 손을 적시다가 모를 일이지만 풍경의 어디선가

 

빈대가 옳았다 빈대는 안 보이고 빈대는 안 들리고 빈대는 안 병

들고 빈대는 오직 물고 물어서 없애려 할수록 물어뜯어서 남몰래 옆

구리를 긁으며 나는 빈대가 사는 커다란 빈대가 되었다

 

비탈길을 마구 굴러가는 수박처럼 나는 내 몸이 무서워지고 굴러

가는 것도 멈출 것도 무서워지고

 

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 새처럼 그 새가 필사적으로 날아가고 있

었다는 사실처럼 제자리인 것 같은 풍경이 실은 온힘을 다해 부서지

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래들이 있다

 

빈대는 나 대신 나를 물어 살고 빈대는 나를 물어 나 대신 내 몸을

발견한다 빈대가 옳았다 풍경을 구경하다가

 

심사평)“빈대가 옳았다”로 시작해 “빈대가 옳았다”로 나아가기까지의 이미지의 변주를 시도한 수작, 주체를 존재와 비존재의 전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장소가 되게 하는 ‘빈대’는 역동적이고 다면적으로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힘차고도 세심한 상상의 기류라고 할 수 있다. (김기택, 이수명)

 

 

- 아홉 살 41-43쪽

 

나는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는 도시를/ 망가뜨렸다.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더 오래 게임을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나의// 시민들에게 미안하지/ 않다. 아무래도/미안하지가 않다./ 약간의 사고와 불행은 나의 시민들을 더 성실하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494
서효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효인 시집, 여수, 문학과지성사




1. 2015년 여름휴가 떄 전주를 찾았었다. 내리쬐는 햇볕과 한옥마을을 꽉꽉 채운 사람들의 행렬이 숨막히던 전주. 『혼불』의 작가 '최명희문학관'을 방문했었다. 마침 느린 우체통 이벤트가 있어서 엽서 한 장을 써서 집으로 보냈다. 정확히 일 년 뒤에 도착했다.



서효인의 세 번째 시집 『여수』는 '느린 우체통'이다. 두 권의 시집에서 보여준 당돌함이나 시니컬한 정서는 많이 순화되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간과 장소, 그때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시인이 몸에 심어 놓은 빨간 우체통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보낸다.


시집의 제목은 대부분 전국 각지의 지명이고, 시편마다 그곳의 특징과 개인적인 사연이 언급되고 있지만 어떤 제목을 붙여도 어울릴 것 같은 시들이다. 더불어 내가 자란 곳과 내가 가본 곳과 가보고 싶은 곳에 대해, 누구와 가면 좋을까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메모



- 여수 9-11쪽 부분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 이태원 14-15쪽 부분

도처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른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기를 바라며 걸음의 볼륨을 높인다. (···)// 동물보다 산업보다 무서운 인간의 직립, 걸어 떠난 당신은 지금 지구 바깥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의 공포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번화가의 가나 사람을 껴안는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떄부터 우리는 최대한의 보폭으로 살아왔고 여기에 이르렀다.//



- 강릉 18-19쪽 부분

강릉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우리가 게으르기 떄문이었지. 게으름을 사랑하자고 오징어들이 말한다. (···) 어디든 끝이 보이는 곳에 가닿고 싶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고 성질머리가 차가운 이곳의 산맥은 품고 있던 눈을 오래 참은 울음처럼 쏟아냈다. (···) 파도가 거품을 내고 거품을 업은 파도가 다시 거품을 덮는다. 끝 속의 끝에서 다른 끝이 나타난다.




- 학교 연못 81-83쪽 부분

허우대 빈약한 그들 뒤로 아랫입술을 비쭉 내민 너를 보았을 때, 나는// 아가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비밀로 하는 편이 좋겠다./ 신입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한다./ 너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마음에 더러운 연못을 만든다.// 캠퍼스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너머에/ 너는 아랫입술이 약간 돌출해 있었고/ 나는 가장 빠른 뜀박질로 연못을 끼고 돌아 너에게 가지만/ 연못이 자꾸 거대해졌다. 생일의 용기를 자랑하는 자들이/ (···)// 연못에 들어가기로 한 건/ 입술 때문만은 아니다./ 입술은 살 밖으로 노출된 심장이다. 너의 심장을 핥으며// 나는 아가를 생각했다.// 너의 아가가 되고 싶어서 연못을 돈다./ 몸에 물을 묻히기 시작한다./ 병든 엄지발가락부터 연못에 담근다./ 네 입에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난 좀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클 - 하린 시창작 안내서
하린 지음 / 고요아침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시클》은 ‘시 클리닉’의 준말이다. 시 때문에 아프고 가려운 사람을 위한 책. ‘시란 무엇인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 대신 문예창작학과에서 가르칠 법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책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시가 매우 많다(임승유, 황인찬, 안미옥, 기혁, 강성은, 이혜미 등). 또한 본문의 오른쪽 여백에 해당하는 길섶에 해당 본문의 핵심단어나 문장을 배치해서 그 부분만 넘겨가며 읽어도 빠른 시간 내에 요지를 파악할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시 창작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나 일반인이라면 이만큼 꼼꼼하게 짚어주는 시 창작실기론을 찾기 힘들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은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1. 발목의 표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루터기에 앉아/부어오르는 저녁을 본다// 숨어 울다가/햇살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지문도 발자국도 없는/강의 얼굴// 턱밑까지 차오른 숨은/가라앉았지만/눈물이 발목을 붙잡는다// 젖은 운동화 끈을/ 그루터기에 칭칭 감고// 저 흐르는 얼굴 속으로 들어가/ 뒤꿈치를 살짝 들고// 숨을 참는 순간과/ 거두는/ 그 풍부한// 경계의 표정을 지나야/ 건너 마을에 다다를 텐데// 발목의 뿌리는/ 여전히 깊다



2. 허은실 시인의 첫 시집. 손등으로 밀가루 반죽을 꾹꾹 눌러 뽑아낸 가늘고 긴 가락에, 따뜻한 육수를 붓고 약간의 고명을 얹은 엄마표 국수가 생각난다. 시인은 ‘확장’보다는 ‘응축’의 방식으로 최대한 절제하며 발설하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망설이며 삼키는 말들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울대가 출렁거리는 모습. 눈물은 흐를 때보다 삼킬 때가 더 슬프다.



시의 종류를 거칠게 서정, 이미지, 리얼리티로 나누어 보면 여성성을 1, 2, 3부는 서정이 주를 이루고 4부에서는 리얼리티가 강한 현실비판적 시가 많다. 시인이 평소에 가졌던 인식을 4부에서는 당차게 쏟아내고 있다. 국수만 먹으면 한두 숟갈 나물비빔밥이 생각나는데 4부가 맛보기 비빔밥처럼 흥미롭다.



* 메모



- 이별하는 사람들의 가정식 백반, 16-17쪽 부분

아비는 춘궁이었네/ 기별 없이 찾아온 딸에게/ 원추리를 끊어다 무쳤네// 풋것은 오래 주무르면 맛이 안 나지// 꽃들에게 뿌리란 얼마나 먼가/ 이 맛은 수몰된 마을의 먼 이름 같아요// 아비는 오래 얼려둔 고등어 한 손을 내었네/ 고등어는 너무 비린 생선이에요/ 잡히면 바로 죽어버린다구요// 비린 날엔 소금으로 창자를 닦거라// 그런데 아버지 기일에 왜/ 미역국을 끓이셨나요// 너를 좋아하다가 죽은 남자가 있다는구나/ 새 옷을 지어다 태워주었다// 세상에 미역처럼 무서운 것이 있을까/ 한 줌이었던 것이 이토록/ 방안에 가득하잖아요// (후략)




- 윤삼월 26-27쪽 부분

노인들은 화투점을 본다// 매화 벚꽃 낭창하니/ 부음이 들려오기 좋은 날이다// 햇빛에서는/ 개 꼬실르는 냄새// 치매에 걸린 가지들 아래// 배드민턴 흰 공이/ 하늘을 잡았다 놓는다// 피어 조화가 되는 꽃들/ 산 채 묻힌것들의 눈빛을 닮는다/ 죽은 아이들이 뜬 눈으로 태어나 휘둥그레하다//





- 입덧 50-51쪽 부분

익숙하던 것들이 먼저 배반하지/ 그러므로 어느 날/ 밤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너의 멜로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 검은 행에 변종의 언어가 파종될 때/ 냉동실에는 수상한 냄새들/ 친밀한 너를 혐오한다// (중략)// 별을 낳기 위해/ 중력을 거부해야 하므로/ 소화되지 않은 말이/ 밑구녕이 거꾸로/ 치밀어올라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