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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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178쪽

전쟁 때 학살로 가족들을 모두 잃은 시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누군가의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향한다. 하와이에서 고된 노동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을 때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난다. 독일의 유명 화가였던 그는 영수증에 낙서처럼 그린 그녀의 그림을 보고는, 자신과 함께 독일로 가자고 한다. 마티아스가 가는 곳마다 그런 제안을 해 데려온 여자가 여럿인 줄 몰랐던 시선은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따라 뒤셀도르프로 향한다. 뒤셀도르프에 도착하고나서야 마티아스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시선은 폭력적인 마티아스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 앞에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요제프 리가 나타난다. 그는 시선이 진짜 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이것을 알게 된 마티아스는 더욱 교묘하게 시선을 괴롭혔고 급기야 시선은 마티아스를 떠나기로 한다. 시선이 떠나자 마티아스는 유서를 남겨놓고 자신의 집 4층에서 뛰어내려 죽는다.

사랑했기에 나의 배신을 견딜 수 없었다 썼고, 그럼에도 그림과 집과 모든 재산을 내 앞으로 남겼으므로 나는 온 유럽의 증오를 받아내야 했다.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마녀가 되었다. 미디어는 지금보다 느렸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금 사람들 못지않게 가십을 사랑했다. 조롱헤서 폭력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훨씬 짧았고 말이다. 창문으로 날아드는 깨진 판석, 집 앞에 버려지는 오물, 길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위협들이 도를 넘어섰다. 마티아스가 바란 대로였다. 아무도 그의 의도를 해득하지 못했고, 돌바닥에 깨진 그의 머리가 마지막으로 계획한 것들은 차곡차곡 실행되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178쪽

"유명세는 모든 걸 왜곡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어"(61쪽)서 사람들은 마티아스의 유서만 믿었고, 시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보려하지 않았다. 시선은 그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요제프 리와 함께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선으로부터,』는 시선의 10주기를 앞두고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절대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던 시선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10년만에 처음으로 그들만의 특별한 '제사상'을 준비한다. 그들은 한때 시선이 머물렀던 하와이를 여행하며 각자 가장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들을 제사상에 올리기로 한 것.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시선'을 추억하며 그녀의 생각을 더듬어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선'의 삶은, 20세기를 살았던 여느 여성들과는 달리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티아스와의 관계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비록 그 관계 때문에 더이상 그림은 그릴 수 없게 됐지만, 여느 여성들이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가 없었다면 매일 육체 노동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선' 자신 또한 그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심시선'이라는 이름은 정세랑 작가의 돌아가신 할머니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바꾼 것이라고 하는데,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작가의 말」)고 한다.

20세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런 '운'을 가지기 힘들었다. 작가가 진짜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시선'처럼 살 수 없었던 20세기 여성들의 삶일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 때의 역겨움

173쪽

한편, 함께 여행을 간 가족들 중에는 시선의 손자 '규림'이 있다. '규림'은 최근 친구들 사이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학원을 그만두고 학교를 옮기고 싶어했다. 규림은 '도영'과 여사친 '한빛'이 부딪칠 때마다 특별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는데, 규림의 휴대전화가 꺼져있던 사이 규림 역시 포함되어 있던 단톡방에서 사건이 터졌다. 도영이 한빛의 사진을 합성해 남자 아이들이 있던 단톡방에 올린 것이다. 도영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 규림은 아무것도 모른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한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규림에게 서운함을 표현했다. 규림이 억울하다고 하자 한빛은 평소 그의 태도를 지적하며,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무마시키는 미소였다고, 도영보다도 꼴 보기 싫었다고"(172쪽) 한다.

그 죽은 남자가 사촌 큰누나에게 염산을 던졌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 때의 역겨움을 온 가족이 똑똑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규림 자신은 도저히 같은 짓을 할 수 없었다.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스스로가 가해에 더 가까웠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전된 배터리와 나쁜 타이밍 이전에 멍청하고 멍하게 방조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173~174쪽

어떤 인과는 명확히 기억되어야 한다.

303쪽

최근 정치, 문학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직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 대신 "피해 호소인" 혹은 "문제 제기하신 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 또한 이런 쪽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여기저기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냉정함을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판단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2차 가해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한 권의 책에, 최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모든 입장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반갑다. 당연히 그 입장은 내가 조리있게 정리할 수 없었던 내 생각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 166쪽

이런 문장도 마음에 들었고, 세심하게 출처를 밝힌 작가의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 속에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직업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직업과 관련하여 인터뷰를 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지만 혹 누가 될까 소중한 이름들을 가려두고자 한다"(「작가의 말」)는 이런 마음 씀씀이도 좋았다. 사적으로 나눈 대화를 그대로 소설에 쓰거나 소설로 타인의 삶을 강제로 아웃팅한 작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들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작가로서 그녀의 문장들이 아직 완숙되지 않았다는 것. 읽다보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이 튀어나왔다. 지금껏 조금 다른 장르의 글들을 써왔고, 나와 관심사가 달라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래도 영화와 미디어를 즐기지 않는 탓일까.) 앞으로 나아갈 그녀의 행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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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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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십니까」 _157쪽

원래부터 집순이는 아니었다. 주말이 되면 산으로, 바다로 꼭 뛰쳐나가야 했고 계절마다 색색이 피는 꽃들을 모두 보고와야 했던 사람이었다. 요즘처럼 매일 집과 회사를 쳇바퀴처럼 돌고 있어도 답답하지는 않았는데, 6월에는 꼭 제주도를 가보고 싶었다. 6월이면 곳곳에 만개하는 수국을 보고 싶었고, (원래는 생일에 맞춰 올라가고 싶었지만 제주도의 장마는 좀 더 일찍 찾아온다고 하니) 장마가 오기 전에 한라산도 다녀오고 싶었다. 이때쯤이면 끝날거라고 생각해서 예매해뒀던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내년 6월에는 꼭 다녀올 수 있기를 바라며. (사진으로 볼 수 밖에)

이달 대중교통 이용 요금은 '0'원일지도 모르겠다. 자가용만 이용해서도, 일 없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서도 아니다. 되도록 동네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평소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장기화되면서 시간이 더 지나더라도 예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전의 일상이 점, 선, 면의 방식이었다면 선은 지우고 면은 축소해 '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요즘. 관계와 사회적 접촉면의 확장 속에 있던 우리는 이제 일상의 다른 국면을 맞았다. 157쪽

몇 달 째 나의 대중교통 이용 요금은 '0'원이다. 집과 회사 근처에서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무증상 확진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어딘가를 방문하는게 조심스럽다. 내가 아니라 '나 때문'이 될까봐.

우리가 4월에도 물리적 거리 두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유행은 피할 수 없더라도 대량의 환자가 발생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다. 조금 불편해지고 외롭거나 막막해졌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의료진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사명감으로 버티며 통과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세를 고쳐보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란 말할 수 없이 나약하기도 한 존재라서 다시 이렇게 글을 쓰려고 혼자 앉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단절감이 무겁고, 많은 사람에게서 나로 이어졌던 관계의 선과 함께 공유했던 장소와 시간들이 그리워진다. 159쪽

 

 

 

「안녕이라고 말해주지 못한 이별들」_206쪽

지난주에 이모가 돌아가셨다. 지속적인 치료와 돌봄이 필요해서 요양원에 계셨는데, 몇 달 동안 면회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바람에 한달 전부터 아무것도 못 드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찾아뵐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입맛이 없으셔서 잘 못 드셔서 가족들이 찾아갈 때마다 겨우 드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더 일찍 기력이 쇠하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엄마와는 18살이나 차이가 나서 외할머니 같았던 이모. 마침 장례식장도 코로나 거점병원 안에 있어서, 아주 가까운 친지들을 제외하고는 조문도 받지 않았고 집집마다 대표로 1명만 조문을 받아서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코로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이렇게 외롭게 만든다. 가족이, 가족다울 수 없게 만드는 코로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줘서 잔인한 바이러스"라고 한 정은경 본부장의 말이 생각난다. '안녕이라고 말해주지 못한' 나의 이별.

할머니와의 이별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엄마는 할머니에게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없어? 하고 물었다고 했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답이 나일 리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떤 대답이든 좀 마음이 서운할 수 있다고 예감하면서도 누구였어? 라고 물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다 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주었다. 다 보고 싶다. 21쪽

 

 

 

「사랑하죠, 오늘도」_115쪽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 22쪽

김금희 작가의 글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다. 이렇게 담담한 고백이 또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의 사랑을 확신하며 말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이 구절 때문에 나는 이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소설이 아닌 일상 속 그녀 모습이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양희처럼, 그녀 역시 담담하게 보내는 일들이 많았고 멋부리지 않는 글들이 좋았다.

2020년 1월,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 권위와 관행에 맞섰던 그녀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퍼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가 괜히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다가 여전한 호의를 숨기지 못해 돌아가는 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랑하죠, 오늘도,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 라고.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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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6-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글프네요. 지인이 돌아가셔도
문상도 못하는 상황이라니.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디스토피
아의 전초가 아닐지...

어제 다녀온 화성 궁평항 가는
길의 들꽃들은 정말 이뻤습니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김희정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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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비선형 세상에서, 날수를 세면서!

1982년 이탈리아 토리노 출생.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소수의 고독 』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발표된 적이 있는) 소설을 발표해 이탈리아에서 권위있는 문학상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가 중국을 넘어 이탈리아에서도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2월 29일. 도시 전체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의 작품을 읽은 적도 없고,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이런 사실들의 나열만으로도 나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염의 시대'를 함께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며 이 공백기를 보내기로 했다. 뉴스 예보를 주시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이해하고 싶어서다. 때때로 글쓰기는 균형을 잡기 어려울 때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게 하는 바닥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이 전염이 우리 자신에 대해 폭로하는 것에 귀를 막고 싶지 않다. 두려운 비상사태가 종료되면, 우리의 일시적 자각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질병의 본질이다. 10쪽

코로나가 우리 도시를 덮쳤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외출을 할 수 없어서 집에서 머물며 평소보다 책 읽을 시간이 훨씬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즈음 내가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매일매일 늘어가는 '숫자'들 뿐이었다. (참고로 4월 28일, 오늘이 우리나라에 코로나 환자가 처음 발생한지 10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한다. 정말 우리는 미치도록 숫자만 세고 있구나.)

거리는 멀지만, 이탈리아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나보다. 심지어 이 책을 쓴 작가까지도.

아마 전염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수를 세는 것 외엔 없기에 그 구절이 생각났을 것이다. 우리는 감염자와 완치자, 사망자의 수를 세고, 입원자의 수와 학교 결석 일수를 센다. 주식 시장에서 날아간 수십억과 마스크 판매 수, 진단 시약의 결과가 나오는 시간을 센다. 감염원으로부터의 거리, 예약 취소된 호텔 방 수를 세고, 우리의 유대 관계와 단념한 것들을 센다. 그리고 날수를 세고 또 센다. 특히 이 비상사태가 시작되고 서로 떨어져 지낸 날수를 센다. 75~76쪽

몇 년 동안 보려고 미뤄뒀던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특보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밤 늦도록, 완전히 지칠 때까지, 계속해서. 81쪽

그는 지금의 시대를 '미친 비선형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확진자의 증가세가 선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이고 폭발적으로, 비선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은 본래 비선형적이다.(21쪽)

이렇게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가 중국을 주시하지 않았고, 밀라노는 지방 도시를 신경 쓰지 않았으며, 남부 이탈리아는 북쪽을 보지 않았고, 나머지 유럽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투명하지 않은 정보 제공, 자극적인 제목만 뽑는 언론들, 전염병처럼 유포되는 가짜 뉴스들, 이런 것들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날수를 세면서, 슬기로운 마음을 얻자.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 77쪽

작가는 3월말까지 글을 썼으며, 편집은 4월 7일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길지 않은 글들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똑같은 전염병을 겪고 있는 작가의 글을 이토록 신속하게 책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렇게 빨리 돌아갈 수 있구나. 그러니까 전염병의 확산속도도 그렇게 빠를테지만.) 무엇보다 양심적인 책값도 마음에 든다. 심지어 인세는 코로나 감염자를 치료하는 이탈리아 현지 의료단체와 구호단체에 전액 기부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서 빨리 '전염의 시대'가 끝나고, 예전처럼 서로 왕래하며 지내는 시대가 오길 바라며.

여태껏 일상생활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정확히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정상 상태가 한순간에 우리가 지닌 가장 신성한 것이 되었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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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든 독서메모지(떡메모지) 나눔합니다!

 

 

 

 

제가 원하는 떡메모지가 없어서 직접 디자인하고 인쇄한 떡메모지 입니다.

소량 인쇄가 안돼서 제작하다 보니, 제가 40년 넘게 써도 다 쓸 수 없을만큼 양이 많아졌어요.

제가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제작업체에 따르면 권당 100장씩이라고 하네요.

1년에 책 100권 정도 읽으시는 분들께 딱인 용량이죠?

 

비접착 메모지구요, 다이어리나 책장에 저처럼 붙여서 사용하실 수 있어요.

특히, 제가 기록하고 싶었던 부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읽었는지, 독서 기간이었어요.

그런데 이 부분이 디자인된 떡메는 없어서 직접 만들게 됐어요.

 

제가 원래 이런 거 소소하게 만드는 거 좋아해서요,

상업적인 목적 전혀 없이 제 사비로 직접 만든 떡메이니, 필요하신 분들은 덧글 남겨주세요.


 

 

단, 두 가지 조건 이 있어요.

우선 저랑 소통하고 있는 서재 친구분들이면 좋겠구요,
제가 나눔한 보람 있게, 받으시고 나서 잘 사용하고 있는 모습 한번만 보여주시면 좋겠어요.

그럼, 기쁜 마음으로 제가 내년에도 새로운 버전으로 만들어서 나눔해 보도록 할게요.


* 신청은 덧글로 남겨주시면 되세요. (선착순 아닙니다.)

* 발송은 1권씩(100장) 우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택배비는 부담스러워서요.)
* 디자인도용은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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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20-01-10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이런것도 만드셨군요! 전 꼼꼼하지 못해 다른분에 양보하겠습니다 ㅎ

2020-01-11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뒷북소녀 2020-01-11 17:09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정말 별거 아니라서요.^^ 부담 갖지 마시고 받으셔도 돼요. 비밀덧글로 배송정보랑 성함 남겨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2020-01-12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3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20-01-18 09: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목요일에 받았고요~ 어떻게 작성해볼까 해서 뒷북소녀님 페이지 다시 들어왔어요.
다시 보니 글씨도 잘 쓰세요 ^^
(갑자기 손글씨 쓰려니 ~ ㅠㅠ )

잘 사용하겠습니다.
일단 시험삼아 사용해 본 내용은 페이지에 남겨 두었습니다.
https://blog.aladin.co.kr/rainaroma/11443585

서니데이 2020-01-1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모지 디자인이 예뻐요. 나누시는 마음도 따뜻합니다.
뒷북소녀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자이온 2020-12-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지금도 가능할까요?

뒷북소녀 2020-12-07 13:29   좋아요 0 | URL
아, 아쉽게도 모두 나눠주고 지금은 없어요 ㅠㅠ
 
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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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노동(고용)은 사람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가! 내일을 대비할 수 없어서 걱정인 우리들에게!

2020년의 첫 날, 첫 책으로 선택했다. 예전에 읽었던 『딸에 대하여』가 좋은 인상으로 남아서 '김혜진'이라는 작가 이름만 보고 선택한 책인데, 책을 읽으면서 화도 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새해 첫 날엔 좀 더 희망차거나 각오를 다질 수 있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주인공과 같은 심정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을 일했다. (9쪽) 그러던 어느 날 부장이 불러서 갔더니 명예롭게 퇴직시켜줄테니 이제 그만 사직서에 사인을 하란다. 부장의 말처럼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는 계속 다녀보겠다고 했다. 아직 퇴직 이후이 일들을 준비해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직장인들이 그럴 것이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다른 일을 준비할 겨를 혹은 여유가 없다.

그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하고 준비할 만한 시간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 오늘 해야 하는 일은 많았고 그걸 다 해내면 어김없이 하루가 끝났다. 그의 하루라는 건 처음부터 그의 능력과 노력, 수고에 맞게 잘려져 있는 것이었다. 무언가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겨우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쪽

그가 계속 회사를 다닐려면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는 벌써 세 번째 교육 대상자가 됐고, 세 번째 교육이 끝나면 최종 평가서가 나오고 평가 점수에 따라 그의 업무나 업무지가 변경될 수도 있었다. 회사에서 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책을 읽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의 업무와 지정도서 내용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회사가 원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아마도 회사는 처음부터 모범답안이라는 것을 정해 놓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의 보고서 내용이 어떻든 간에 평가점수를 나쁘게 매기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평가점수가 좋지 않았던 그는, 그동안 해왔던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 지역 상품 판매 부서로 발령이 났다. 터미널 근처 거점 판매센터라는데, 말만 '거점'이지 '거점' 삼아서 영업을 할만한 곳이 없다. 상품을 판매하지 못하면 둘째 달부터는 기본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자신의 담당 구역을 돌아다녔다. 공단지역이라서 주로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았는데, 그는 그들의 편리(예를들면, 인터넷이 안되면 고쳐주는)를 봐주며 조금씩 인심을 얻기 시작했고 둘째 달에는 드디어 상품을 하나 판매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회사는 그의 이런 영업 판매 방식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출장비를 받고 수리를 해주는 직원들과 업무가 겹치게 된다고 말이다.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그동안 돈돈하게 얻어뒀던 인심까지 잃어갔다. 그 외국인 근로자들도 서운했을 것이다. 계약하기 전에는 공짜로 수리도 다 해주더니, 정작 계약을 하고나자 콜센터에 접수하라고 하니.

처음부터 영업이라고는 배운 적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영업할 수 없는 곳에 밀어 넣고 어떻게든 뭐든 팔아보라고 다그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덫에 걸려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덫이라고 생각하자 정말 그런 것처럼 생각됐고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 83쪽

영업 실적이 나빴던 그는 다른 곳으로 또다시 파견됐다. 이번에는 지방 소도시 시설1팀으로 발령 났다. 1년간 수리, 보수 및 설치 업무를 담당하고, 업무 평가가 좋으면 재고용을 보장한다는 회사의 약속이 있었다.(125쪽) 오랫동안 현장팀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으니, 비록 몸이 힘들더라도 (다른 사람 몫까지 더 열심히) 열심히 일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고객의 나쁜 평가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조작되었을지 모른다. 고객은 아주 사소한 트집을 잡았을 수도 있는데, 회사에서 부풀린 것일지도. 왜냐하면 그는 미운털이니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일방적인 업무 배제였다. 출퇴근 명부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고, 더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는 대기 발령 상태였다. 하지만 노조에 가입하고 반년이 지난 뒤에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제 더이상 본사 소속 직원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존 월급의 80퍼센트를 보장하고 단일 직무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하청업체 소송으로 일하다가 현장 업무가 모두 완료되면 본사 소속으로 복귀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새로운 발령지에 도착해서 보니 그가 맡은 업무는 마을 주민들의 반대가 심한 곳에 송전탑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작업을 하는 시간보다는 마을 주민들과 부딪히고 어깨 싸움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슨 단체에서도 다녀가고 뉴스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의 신상이 털리기도 했다.

78구역 1조 9번. 그가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부여받은 소속과 이름이다. 이제부터 그는 '9번'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를 '9번'이라고 부른다. 그도 직장동료들을 '3번'이나 '7번'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진짜 이름은 더이상 필요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존중 받을 수 있는 그들의 역할이나 업무가 없는 것처럼.

그는 지금껏 해온 이 일이 자신의 일이고 그 외에 다른 일은 할 마음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시 처음처럼 어떤 일에 매달릴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168쪽

'9번'이 된 그는 달라졌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일도, 그저 회사에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진행한다. 노동(고용)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노동(고용)에 점점 잠식되어가는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사는 회사일 뿐이다. 가끔씩 회사(대표 일가)를 상대로 의리 혹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회사는 영리를 추구하는 이익단체일 뿐이다. 자신의 영리에 반하는 것은 그냥 두지 않는다. 회사 따위에 의리를 기대하는 우리가 잘못된 것이다. (라고 늘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우리를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말도 제발 거둬두길. (쓰다보니 흥분해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새해 첫 날이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기운을 얻고자 했는데 영 틀려버렸다. 물론 소설적인 설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왠지 어딘가에는 있을법한 이야기. 이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무엇과도 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부당한 일을 겪고 있을까. (그나마 그는 회사에 노조가 존재해서 명예 퇴직이라도 제안받을 수 있었을텐데.) 게다가 노동(고용)에 사로잡혀 그날 그날의 소확행만 추구하는 내가 그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암담하다. 직장인들의 가장 큰 꿈이 사직서를 던지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 사직서를 당당하게 던지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

그가 아는 삶의 방식이란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이 자라온 것과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누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113~114쪽

해선을 괴롭히는 건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들이었다. 내일을 대비할 수 없다는 사실. 대비할 수 없을거라는 걱정. 168쪽

생각해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들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놓아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냇다.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신을 막아서기만 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 하나쯤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두 가지 마음이 들끊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걸지도 몰랐다. 223~224쪽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어떤 일을 발견하게 될 거였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일이 되는 순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지 알게 될 거였다. 그 일을 지속하기 이해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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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03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노동! 전 존 버저의 신간 노동 3부작을 노리고 있습니다.

뒷북소녀 2020-01-03 15:18   좋아요 0 | URL
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다른 제목이 있는건지 못 찾겠어요 ㅠㅠ

2020-01-03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8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