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51 | 15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목수 김씨의 나무 작업실
김진송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어릴적 우리집 옆집에는 목수 아저씨가 한분 계셨다. 덥수룩한 머리에 수염, 너털 웃음을 지으시는 소박한 모습의 아저씨. 사실 어릴적에는 그 아저씨를 아버지로 둔 옆집 언니가 매우 부러웠었다. 항상 멋진 물건들을 손수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 언니가 나이가 들어 더이상 어릴적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책상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운좋게도 그 책상을 물려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찌나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만들었던지, 네모난 책상에서 뽀족한 모서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랍 손잡이도 둥글게 깍아서 예쁘게 모양을 내놓았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책장도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진 책상이었다. 그런 물건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아버지를 둔 언니가 정말 부러웠었는데, 정작 그 언니 자신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목수'라는 직업은 전문직이라기보다는 서민적인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목수는 목수일 뿐이다.

 

처음 이 책의 표지에 스케치 되어있는 도안들(디자인들)을보면서 나는 DIY 관련 서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장 두장 책을 넘기면서 그건 나의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DIY와는 거리가 먼 책이다.

목수 김씨는 국문학과 미술학을 공부하고, 목수일을 시작한지 겨우 10년 밖에 되지 않는 초보 목수이다. 사실 한 분야에서 10년 동안 일을 했으면 숙련직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초보는 아닐텐데, 목수 김씨는 자신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는 시대에 따라 연금술사가 되기도 하고, 기술자가 되기도 하며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과거든 현재든 그냥 나무를 다루는 목수일 뿐이다. 예술가도 디자이너도 아니다.

 

목수는 물질의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다만 물질의 변형이 주는 이로움을 생각할 뿐이다.

목수는 목수일 뿐이다. (p. 343)

 

목수는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

 

목수가 예술가도 디자이너도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목수는 예술적인 감각을 살려서 디자인을 하며 물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목수 김씨가 말하는 목수는 단지 이 산 저 산 굴러다니는 나무들을 구해서, 그 나무들을 보고 쓰임새를 생각하며, 나무의 형태나 결을 따라서 디자인하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다. 예술성을 고려해서 디자인을 만들고, 그 디자인에 어울리는 나무를 구해 물건을 만드는 것은 목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목수는 어느 누구보다도 나무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나무의 성격과 심성을 잘 파악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물건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목수는 나무에 칼을 대고 잘라내지만, 어찌보면 나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단지 재료와 용도를 연결해주는 데 필요한 절차이기는 한데, 이미 재료가 결정되고 용도가 분명해지면 그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단순한 통로를 찾아내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지... 쓰임을 찾다보면 디자인은 뒤따라지고, 거기서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아닌가?...아름답게 보여야 한다거나 세련되게 보여야 한다는 의도를 디자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게 우선되어서는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이지. 물론 그게 예술가와 목수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p. 279~280)

 

소박해도 목수가 좋다.

 

영화 속에서 나무를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매우 화려하고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목수 김씨는 아직도 초보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박한 목수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아졌다.

나무는 쇠붙이나 플라스틱과 같은 다른 재료들에 비해 매우 소박한 재료이다. 그러니까 그 나무를 다루는 사람은 소박할 수 박에 없다. 자신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는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 목수 김씨. 소박해도 나는 그런 목수 김씨가 좋아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로빈슨 크루소 네버랜드 클래식 32
다니엘 디포우 지음, 김영선 옮김, N.C. 와이어스 외 그림 / 시공주니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어 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으려고 책을 펴는 순간 『로빈슨 크루소』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분명 어릴 적에 읽었던 책인데, 큰 줄거리만 떠오르고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나는 읽었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세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내가 읽었던 책은 이야기가 요약된 동화책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로빈슨 크루소'를 소재로 한 얼마나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로빈슨 크루소』를 완역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하니 당연히 어릴적 내가 읽었던 책은 완역본이 아닐 수 밖에. 그러니까 분명히 읽었음에도 읽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 책은 절대로 동화책으로 요약될 수 없는 소설이다. 일단 분량이 그러하고, 내용도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모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네버랜드 클래식 시리즈>니까 동화책이겠구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전에 나왔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완역본을 읽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즐거움이 아닐까.

 

로빈슨 크루소, 그는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배를 탄다. 그는 운이 좋게도 여러번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그 기회를 스스로 뿌리치고 또다시 배를 타게 된다. 그러나 배는 침몰하였고, 그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버려지게 된다. 무려 28년이라는 세월동안 말이다.

처음 그는 스스로 '탕아'임을 자처하며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한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혼자서 무인도에서 살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곧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기는 커녕 어떻게 하면 이 무인도에서 잘 살 수 있을까를 철저히 계산했다. 그래서 농사도 짓고, 염소도 길렀다. 다음 수확기까지의 식량을 계산하고 거처도 3곳이나 마련했다.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섬에 자신처럼 난파당한 배의 선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들이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이 확보될 때까지 데리러 가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곳에서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철저하게 로빈슨 크루소가 혼자인 공간, 철저하게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공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마치 문명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담을 쌓고 울타리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또 문명사회에서 사용하던 도구들을 그대로 재현해서 만들어 내기도 했다. 자신이 생명을 구해준 원시인 프라이데이에게 친구가 아닌 '주인님'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가르쳐 주었고, 급기야 그는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자신을 무인도를 다스리는 총독이라고 소개를 했다. 28년 동안 무인도에서 생활하면서도 그는 전혀 문명의 흔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크루소가 좀 덜 철저하고, 좀 더 인간미가 넘치는 크루소였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바램이다.

아마도 다니엘 디포가 이 책을 썼을 18세기 당시에서는 크루소처럼 철저하게 문명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인물이 필요했겠지만 말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다니엘 디포가 각색해서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실제의 인물이 난파를 당해 머물렀던 칠레의 페르난데즈 제도를 '로빈슨 크루소' 섬이라고 이름 붙여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들끊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죄짓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뉘우치는 것은 부끄러워한다.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마땅한 행동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반성은 부끄러워한다. (p. 29)

 

사람들은 오늘 사랑하는 것을 내일은 미워한다. 오늘 찾아 헤매는 것을 내일은 버린다. 오늘 바라는 것을 내일은 두려워한다. 아니, 그 생각만으로도 부들부들 떤다. (p. 241)

 

인간을 지배하는 신은 인간이 사물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한계를 아주 좁게 정했는데, 이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런 위험을 모두 보게 된다면 마음이 어지럽고 가슴이 내려앉을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런 일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둘러싼 위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으로써 인간은 평온하고 차분할 수 있는 것이다. (p. 2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뚱한 표정을 짖고 있는거야? 도대체 저 멍한 눈빛으로 뭘 보고 있는거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예쁘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녀석들, 조금은 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금새 친숙해져 버려서 자꾸 보고 싶어지는 녀석들.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이 더 땡겼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야기에서는, 2%이든 98%이든 어딘가가 부족해 보이는 가족들이 종종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등장하는 '나(미쓰코)'와 아빠는 사랑하는 엄마를 병으로 잃게 되었다. 평소 열심히 엄마를 간호하던 아빠는 엄마가 떠나는 날만 곁에 있지 않았다. 혼자서 무서운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던 미쓰코는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쓰코의 동네에는 오래되고 낡은 '아르헨티나 빌딩'이 있었다. 그 빌딩은 마치 유령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배웠다는 소문 때문에 '아르헨티나 할머니', '아르헨티나 빌딩'이라고 불렀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마치 마귀 할멈과 같은 모습으로 가끔씩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고양이를 잡아 먹고 산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엄마가 죽고 6개월이 지났을 즈음 석재상을 정리한 아빠가 딸인 미쓰코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도대체 아빠는 무슨 생각으로 엄마가 떠나던 날도 보이질 않더니, 이제는 아르헨티나 빌딩까지 가서 사는걸까.

무성한 소문을 뒤로하고 미쓰코는 사실 확인을 위해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아빠는 아빠만의 세계를 만들며 살고 있었고,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미쓰코 또한 그곳이 싫지 않았다. 미쓰코는 아빠가 왜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겉모습은 볼품없는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이상해 보이는 아르헨티나 할머니와 함께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 만들어 살게 된다.  

 

퇴근하는 길, 밀리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무리 차가 밀려도 워낙 짧은 거리여서 책을 읽고 앉아있을 틈이 없었는데, 이 책은 워낙 얇은데다가 그림까지 있어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읽기 시작해서 버스에서 내리면서 다 읽고 말았다.

그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항상 어렵다. 얇고 짧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면 무엇인지도 모를 여운이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뚱한 표정을 짖고 있는거야? 도대체 저 멍한 눈빛으로 뭘 보고 있는거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예쁘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녀석들, 조금은 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금새 친숙해져 버려서 자꾸 보고 싶어지는 녀석들.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이 더 땡겼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야기에서는, 2%이든 98%이든 어딘가가 부족해 보이는 가족들이 종종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등장하는 '나(미쓰코)'와 아빠는 사랑하는 엄마를 병으로 잃게 되었다. 평소 열심히 엄마를 간호하던 아빠는 엄마가 떠나는 날만 곁에 있지 않았다. 혼자서 무서운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던 미쓰코는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쓰코의 동네에는 오래되고 낡은 '아르헨티나 빌딩'이 있었다. 그 빌딩은 마치 유령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배웠다는 소문 때문에 '아르헨티나 할머니', '아르헨티나 빌딩'이라고 불렀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마치 마귀 할멈과 같은 모습으로 가끔씩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고양이를 잡아 먹고 산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엄마가 죽고 6개월이 지났을 즈음 석재상을 정리한 아빠가 딸인 미쓰코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도대체 아빠는 무슨 생각으로 엄마가 떠나던 날도 보이질 않더니, 이제는 아르헨티나 빌딩까지 가서 사는걸까.

무성한 소문을 뒤로하고 미쓰코는 사실 확인을 위해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아빠는 아빠만의 세계를 만들며 살고 있었고,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미쓰코 또한 그곳이 싫지 않았다. 미쓰코는 아빠가 왜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겉모습은 볼품없는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이상해 보이는 아르헨티나 할머니와 함께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 만들어 살게 된다.  

 

퇴근하는 길, 밀리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무리 차가 밀려도 워낙 짧은 거리여서 책을 읽고 앉아있을 틈이 없었는데, 이 책은 워낙 얇은데다가 그림까지 있어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읽기 시작해서 버스에서 내리면서 다 읽고 말았다.

그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항상 어렵다. 얇고 짧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면 무엇인지도 모를 여운이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긍정적인 말의 힘 - 어떤 사람도 마음을 열게 하는
할 어반 지음, 박정길 옮김 / 엘도라도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긍정적인 말의 힘

 

굳이 이 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의 힘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적으면 함부로 지껄인다'고 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는 그 사람의 사고의 폭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 맹자는 '말이 쉬운 것은 결국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멀리 가지 않고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우리의 속담만 보더라도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말에 지배당하고 있다

 

내가 맨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였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나는 마주치는 직장 동료들마다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얼굴을 잘 모르니까 내가 아침에 인사를 한번 건넨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던 사람들도 자꾸 거듭되다 보니 서로가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살다보면 항상 좋을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살려고 해도 때로는 몸이 아파서, 또 때로는 마음이 아파서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없는 상황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저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사람이야, 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릴 수가 없어서 내 자신을 속이며 또다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게 된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내뱉는 말이라서, 그래서 내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말인데 사실은 내가 내뱉은 그 말에 내가 지배 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말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우리가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 할 어반은 고등학교 교사로서,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말의 힘을 전파하고 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 대신 힘이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말을 하고, 아침에는 사건사고로 가득한 신문을 보는 대신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를 하며, 고래도 춤추게 만드는 칭찬을 하라고 한다.

 

'긍정적인 말의 힘'보다는 '진심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그는 긍정적인 말의 힘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한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심'의 힘이다.

아무리 칭찬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도 '진심'이 빠진 말은 입에 발린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어린 학생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긍정적인 말을 받아들 일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세상의 때가 묻은 사람에게 '진심'이 빠진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말 속에 뼈가 있다고 했다. 긍정적인 말의 힘도 좋지만, 그것보다 나는 '진심'의 힘을 믿는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진심이 있고, 그 진심이 통하다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더불어 더 큰 힘을 발휘하려면 말의 힘을 빌려 '진심'을 표현하면 될 것이다.

 

'말의 힘'과 함께 '글의 힘'도 알아야 한다

 

간혹 말과 글 중에 어느 것을 더 조심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박을 벌이는 경우를 접하곤 한다. 한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을 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글은 한번 씌여지면 오랫동안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말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도 한다.

나는 긍정적인 말의 힘을 강조하는 책에서 많은 오탈자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들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읽은 책은 1쇄도 아니고 무려 32번째로 찍어낸 책이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작가 할 어반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소한 것일지라도 이런 것들은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51 | 15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