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문의 비밀 -상 - 백탑파白塔派 그 두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백탑파, 그 첫번째 이야기인 『방각본 살인 사건』에서 활약한 스무살의 이명방이 스물여섯이 되었다.
신분의 벽 때문에 출사하지 못한 백탑 서생들 중에서 간서치 이덕무가 처음으로 적성현의 현감 벼슬을 얻어 부임하게 된다. 정조는 열녀문을 내려 달라는 소가 빗발치자 이명방에게 거짓 열녀를 찾아내라고 하명한다. 이명방은 이덕무와 함게 적성현으로 내려가, 그 고을에서 올린 열녀 김아영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김아영은 부부연을 맺은지 얼마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던 그녀는 2년동안 열심히 일해서 기울어 가던 시댁의 살림을 일으킨 다음 목을 매달고 자결하게 된다. 그녀는 행동이 방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학문에도 능했기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기에는 완벽했다. 그러나 이명방과 화광 김진은 그런 완벽함이 의심스러웠다.
 
『열녀문의 비밀』은 연암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을 모티브로 쓴 것으로,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에 대한 고민을 제기하고 있다. 고문과 금문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문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르는 사람과 사상에가지 확대된다. 고문을 따르는 사람들은 흔히 보수 세력이라 불리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다. 금문을 따르는 사람들은 백탑파 서생들을 위시한 새로운 사상, 실학이나 서학을 전파하려는 개혁가들이다. 개혁가들은 개혁군주라 믿었던 정조가 『열하일기』의 문체를 경계하자 자신들마저 경계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아직 자신들이 나설 때가 아님을 한탄한다.
 
2.
김탁환은 소설 속 박지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문도 한때는 금문(今文)이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되네." (『열녀문의 비밀(上)』, p45)

 

그렇다. 지금 우리가 고전(고문)이라 부르며 읽고 있는 것들도 그것이 쓰여진 당시에는 금문(今文, 지금의)이었다.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처럼 금문(禁文, 금지된)이었던 것들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모든 금문(今文, 지금의)이 고문(고전)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금문이 고문이 되기 위해서는 세월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수많은 글들 중에서 유독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고문(고전)으로 읽혀지는 것은 그 세월과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정조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작가가 이런 오류를 범하면서도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열하일기』가 궁금해진다.

 

3.

「열녀함양박씨전」은 저자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지내면서 쓴 한문단편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열'을 높히 사기 위함이 아니라 '열' 때문에 자신을 버려야 하는 폐단을 말하고자 하였다.

 

「열녀함양박씨전」의 줄거리

통인 박상효의 조카딸인 박씨는 대대로 현리를 지낸 하찮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릴 때부터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효도가 극진하였다. 19세에 함양의 아전 임술증에게 시집갔으나, 술증이 본디 병이 있어 성례한 지 반년이 못 되어 죽었다. 박씨는 예를 다하여 초상을 치른 뒤 며느리의 도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기다가 남편의 대상 날에 약을 먹고 죽었다. 박씨는 정혼한 뒤 술중의 병이 깊음을 알았으나 성혼을 하였으며, 초례를 치렀을 뿐 끝내 빈 옷만 지킨 셈이었다. 작가는 박씨가 젊은 과부로서 오래 이 세상에 머문다면 친척들의 연민을 받고 또 이웃사람들의 망령된 생각도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상기가 끝날 때를 기다려 지아비가 죽은 그 날 그 시각에 죽음으로써 그 처음의 뜻을 이룬 점을 기리고 있다.

 

2007/11/1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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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살인 사건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첫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1.

'백탑'은 현재 서울 탑골 공원 자리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부르던 것으로, 그 백탑 근처에 살면서 함께 지식을 교류했던 이들을 '백탑파'라 불렀다. 이 백탑파에는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을 비롯해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출사하지 못한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총 출동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김탁환 작가는 이 백탑파들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 추리 소설 시리즈를 기획했으며, 『방각본 살인 사건』은 이 백탑파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이다.

 

2.

"따뜻한 필사의 시대를 아십니까?"

김탁환 작가의 또다른 작품인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에 등장하는 메인 카피이다. 책을 읽기 위해 일일이 필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찍이 활자 기술이 있었지만, 활자 인쇄는 궁이나 관에서 필요한 책을 찍기에도 바빴다.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읽으려면 필사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중종 때가 되면 사가에서도 활자 인쇄가 이루어진다. 이것을 '방각본'이라 하며, '방각본' 덕분에 소설이 더욱 활개를 치게 된다.

 

3.

9명을 살해한 혐의로 매설가 청운몽은 능지처참형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날 똑같은 수법의 살인이 또다시 일어난다. 20살의 금부도사 이명방은 자신이 조사해서 처형한 청운몽의 사건을 다시 쫓기 시작한다. 청운몽은 백탑파 서생들이 아끼던 매설가였다. 사건을 쫓던 이명방은 백탑파 서생들과 인연을 맺게 되고, 꽃에 미친 화광(花狂) 김진의 도움을 받으면서 친구가 된다.

금부도사 이명방은 종친으로 대대로 대가 곧은 집안의 자제였다. 그런 그에게 능지처참형을 당한 매설가 청운몽을 감싸는 백탑파 서생들이 예쁘게 보일리가 없다. 처음에는 오해와 충돌도 있었지만, 차츰 백탑 서생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빠지게 된다.

조선의 이노베이터였던 정조는 백탑 서생들의 재주를 아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승이라 여기며 따르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한 소설들을 경계하며 문체반정을 단행한다. 이명방은 자신의 주군인 정조와 영원한 지기임을 믿었던 백탑 서생들 사이에서 갈등한다. 갈등하는 이명방에게 무조건 따르는 것이 충심은 아니라고 조언하는 이도 있다.

과연 충심이란 무엇이며,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 고민은 백탑파 시리즈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잘 것 없는 것, 무색무취한 것, 아름답고 앙증맞은 것. 그게 바로 위험하니라. 딱 부러지게 무엇인가 분명한 입장에 선다면 옳고 그름에 따라 가까이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겠으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저도 모르게 빠져들며 끝내는 어긋나 버리는 것, 그게 바로 소품이나 소설에 깃든 병폐인 게다."

(『방각본 살인 사건 (下)』, p. 74

 

4.

김탁환은 매설가이다. 그는 끊임없이 소설과 매설가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그동안 그의 작품들 속에서 매설가인 서포 김만중이나 연암 박지원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소설을 경계했던 정조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소설을 쓰는 김탁환 작가의 마음을 발견했다.

 

"원래 이 소설이란 놈은 변화무쌍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예술이니까요.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 삶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진다면 매설가인 저로서도 큰 행복입니다."

(『방각본 살인 사건 (下)』, p. 148

 

2007/11/1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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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끝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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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항상 쌍방향으로 뿜어지는 핑크빛은 아니다. 때론 누군가만의 일방통행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론 방향을 잘못 잡아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있다. 살다보면 그런 때가 종종 찾아온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 하루라도 괜찮아, 단 한번이라도 사랑하는 그 사람과 연인인 척 해보는 것도 괜찮아. 그러나 항상 생각하는 것만 쉬울 뿐이다.

 

이선 프롬, 유난히 겨울이 긴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살고 있는 그는 좀처럼 사람들과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나이 52세, 그를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사람들은 그가 왜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어느날 그 마을을 찾은 낯선 남자,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을 가지고 있었던 이선 프롬의 썰매를 타게 된다. 며칠 동안 함께 했던 그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을 것 같던 이선이 드디어 말문을 연다.

 

이선은 화학자나 엔지니어를 꿈꾸며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병을 얻어 드러눕자 시골로 내려온다. 아버지가 나으면 다시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다. 이때 그의 사촌 누이인 지나가 어머니의 병간호를 도우러 온다.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선은 자신보다 일곱살 위인 지나와 결혼을 하고 다시 도시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나가 병을 얻고 만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한창 꿈을 꾸며 나아갈 때에 그는 또다시 주저앉고 만다. 아픈 지나 대신 집안 일을 돕기 위해 지나의 사촌 조카인 매티가 그들의 집으로 온다. 병 때문에 항상 신경질적이고 이선보다 훨씬 늙어보였던 지나와는 달리, 매티는 발랄함을 간직한 처녀였다. 이선이 그런 매티에게 핑크빛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예쁜 그녀에게는 다른 청년이 있었고, 그는 지나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그녀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해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아픈 아내가 다른 마을에 있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간 것이다. 온전히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하루라는 시간이 생겼다. 아내가 없는 집 안에서 매티는 전날 아내가 이선을 맞이했던 모습 그대로 그를 맞이한다. 그 얼마나 꿈꾸었던 모습인가. 그러나 더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나 그녀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건만 왜 이렇게도 까닭 없이 행복한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손을 댄 적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단둘이 밤을 같이 한 일이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게 되면 인생이 어떠하리라는 환상을 보여 주었고, 그런 달콤한 광경에 찬물을 끼얹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그가 무엇 때문에 행동을 삼갔는지 아마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 101~102)

 

「우리는 다시는 이렇게 단 둘이 있을 수 없겠지」 하고 말하고 싶었다. (p. 103)

 

아무리 아픈 여자더라도 그녀들만의 고유한 직감만은 발휘되는 것일까. 집을 비웠던 아내 지나가 남편의 미묘한 감정을 눈치채 급기야 매티를 쫓아내려 한다. 매티는 이 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이선은 밤새 고민한다. 지나와 헤어지고 매티와 함께 서부로 갈까. 그러나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매티를 행복하게 해 줄 만큼의 돈은 커녕 서부로 갈 여비조차 없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혼자 남게 될 아픈 아내도 걱정이 됐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음날 그녀를 역까지 바래다 주는 것 밖에 없었다. 정말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인가.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온 적이 없었던 이선, 항상 무언가에 의해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남아 있었을까. 매티를 바래다주러 역으로 향하던 그는 갑자기 느릅나무가 있는 곳으로 썰매를 돌린다. 얼마전 그는 느릅나무 아래서 썰매를 태워주겠다고 매티에게 약속을 했었지만 지키지 않았다. 썰매를 잘못 몰면 느릅나무에 부딪혀 죽을 수도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는 바로 지금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맷, 겁내지 마! 저 느릅나무 속으로 돌진할까 봐 겁이 났었지?」

「아저씨만 같이 계시면 전혀 겁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그렇지만 여기는 참으로 위험한 곳이야. 조금만 비켜 갔더라도 우린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머리카락만치도 안 틀리게 거리를 잴 수가 있지 ─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씀이야.」

「전 아저씨가 제일 정확한 눈을 갖고 있다고 늘 말하지요……」 (p. 168)

 

그녀와의 약속은 지켰지만 더이상 그녀와 함께 할 수는 없다. 다시 역으로 향하려는 이선을 그녀가 붙잡는다. 머리카락만치도 안 틀리게 느릅나무를 비켜갈 수 있다는 것은 정확하게 느릅나무와 부딪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선과 매티는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썰매를 탄다.

 

「오, 맷. 난 널 보내지 못하겠어!」

「아, 저도 떠나지 못하겠어요!」

「맷,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떡하면 좋아?」

「지금 우리가 서로 헤어진다면 어디 간들 무슨 소용이야?」

「이선 아저씨! 이선 아저씨! 다시 한번 썰매를 태워 내려가 주세요.」

「어디로 내려간단 말이냐?」

「저 비탈길요. 지금 당장요. 다시는 우리가 올라오지 못하게 말이에요.

바로 저 느릅나무로 말이에요. 아저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서로 떨어질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이선 아저씨, 제가 아저씨와 헤어진다면 어디로 가요?

전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아저씨도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 (p.170~172)

 

이선, 그가 그 어떤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처음으로 행한 일이 바로 느릅나무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돌진은 실패했지만 그들은 그 날 이후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선과 메티가 느릅나무를 향해 썰매를 돌진시키는 장면에서 내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파문은.

어쩌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신의 의지를 꺾이고, 그 외부의 힘을 핑계 삼아 더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이선 프롬이 지금의 나 혹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절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그렇다고, 그래서 내 의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더라도 내 탓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외치며 더이상 무언가에 부딪히려 하지 않는 나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사는 것은 살아 있어도 무덤 속에 묻혀 있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했다. 정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2007/10/2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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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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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탑'은 현재 서울 탑골 공원 자리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부르는 것으로, 그 백탑 근처에 살면서 함께 지식을 교류했던 이들을 '백탑파'라 불렀다. 이 백탑파는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을 비롯해 책만 보는 바보로 유명한 이덕무,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출사하지 못한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총 출동한 그룹이다.

작가 김탁환은 이 백탑파를 주인공으로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에 이어 시리즈의 마지막인 『열하광인』을 펴냈다. 이 백탑파 시리즈에는 이명방이라는 금부도사가 등장한다. 그는 다른 백탑파 서생들과는 달리 종친으로 20살에 금부도사가 되어 살인 사건들을 차례차례 풀어 나가며 임금의 신임을 얻기도 한다. 『열하광인』에서 그는 어느새 서른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며 백탑 서생들과 어울리고 있다.

조선의 이노베이터였던 정조는 백탑 아래 모인 서생들을 아꼈다. 서얼이라는 신분 덕분에 출사하지 못한 그들에게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규장각에서 검서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문체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정조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보여준 문체를 잡문체라 규정하여 금했고, 고문의 문체를 따르도록 하는 '문체반정'을 단행한다.

백탑 서생들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며 그들이 가보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꿈꾼다. 그리고 스스로를 '열하광인'이라 칭했다. 이 '열하광인'들이 하나 둘씩 죽게되고, 금부도사 이명방이 살인의 용의자로 지목되자 그들은 진짜 '열하광인'들을 죽이려 하는 자들을 찾기 위해 뛰어 다닌다.

 

사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부분을 읽은 이후 한번도 제대로 된 완역본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한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는 고전이라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읽어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하광인』은 그렇게 어렵게만 다가왔던 고전에 관심을 가지게끔 만들어 주었다.

이 한 작품을 읽기 위해 나는 총 6권의 책을 읽어야만 했다. 백탑파 시리즈를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었던 것은 마지막 작품인 『열하광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첫번째 『방각본 살인사건』, 두번째 『열녀문의 비밀』에 비해 재미는 적었다.

 

2007/11/11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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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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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 여덟. 아직도 나는 '소녀'를 자처하고 있고, 여전히 무언가를 꿈꾸고 있는 철없는 어른이다. 어른이라고, 이 나이에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은 초등학생이나 꿈꿀법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이곳 저곳을 방황하기만 하는 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철이 덜든 탓에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좌절하거나 실망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문제는 문제다.

 

『달의 바다』에는 나와 같은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보다 한살 어린 그녀는 한가지 꿈만 꾸고 있지만 불행히도 5년째 실패의 고배만 마시고 있다. 또다시 실패의 소식을 접한 날, 그녀는 온동네를 뒤져 감기약 200알을 산다. 그러나 할머니의 뜻밖의 부탁으로 '자살 기도'를 잠시 유예하기로 한다. 그날밤 그녀는 꿈을 꾸게 된다. 200알의 감기약을 먹으려고 물을 마시다가 배가 불러 도중에 포기하는 꿈,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장면에 웃음이 나왔다. 약을 먹고 죽는 것은 다른 방법과 비교해 우아한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그 많은 물을 마시고 볼록하게 튀어 나온 배를 상상하니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고모는 할머니의 희망이었다. 할머니의 희망대로 고모는 공부도 잘했고 좋은 학교도 들어갔다. 결국 고모는 우주비행사가 되어 할머니가 꿈꿔왔던 것을 대신 밟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미국으로 가서 고모를 만나고 오라고 했다. 그녀가 만난 고모는 할머니가 믿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고모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적 소녀에게 꿈을 심어 주었던 고모, 어른이 된 그녀를 고모는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 (p. 127)

 

작가 정한아의 나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물론 그녀보다 더 어린 나이에 문단에 발을 디딘 작가들도 많지만 말이다. 어린 작가의 발랄함이 문체에서 느껴졌고, 그녀가 꿈꾸었던 것들도 보였다. 그래서 쉽게 읽혀졌고, 읽는 내내 즐거웠다.

 

2007/10/2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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