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양장 한정판)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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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컨설턴트인 저자는 왜 철학책을 썼을까?

 

게이오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저자가 주로 한 일은 컨설팅이었다. 그는 조직 개발, 혁신, 인재 육성, 리더십 분야의 전문 컨설턴트였고, 현장에서 철학적 사고로 문제를 해결해 온 경험을 살려 유수의 비즈니스 스쿨에서 기업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단다. 그런 그가 쓴 철학 인문서라니, 제목에서부터 어떤 내용의 책일지 짐작이 됐다.

학 전문가도 아닌 내가 왜 사회인을 위한 철학책을 쓰고자 했을까? 그 이유는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이 사회를 이루고 영위하는 데 크고 작은 역할을 맡고 있는 개인들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4쪽

물론 철학 전문가만 철학책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그의 말도 맞다. 그런데 뭔가 당돌한 구석이 없지 않다. 굳이 자신이 철학책을 쓴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소위 철학 입문서가 차고 넘친다. 인터넷 서점에 '철학 입문'이라고 검색하면 철학의 대가인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무려 만 권이 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까지 많은 입문서가 쓰였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대표할 만한 책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므로 새롭게 철학 입문서를 쓰는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이렇게나 많은 철학 입문서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쓰인 유사 도서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를 드러내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다. 26쪽

러셀이 일부 학자들의 혹평을 받고 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러셀의 작품을 콕 집어 언급한 뒤에 아직 대표할 만한 책이 쓰여지지 않았다고 하다니. 자신감이 넘치는 저자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각설하고 러셀, 군나르 시르베크가 쓴 『서양 철학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철학 입문서들은 연대기 순으로 목차를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저자가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를 둬야 한다고 언급했듯이) 이 책은 연대기 순이 아닌 네 가지 콘셉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 네 가지 콘셉트는 사람, 조직, 사회, 사고인데 지극히 비즈니스 컨설팅 대가다운 콘셉트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 네 가지 콘셉트에 맞춰 50가지 핵심 철학 사상들을 선정했는데, 이것을 선정한 기준은 철학사의 학문적인 중요성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쓸모(적용)'이다. 그래서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칸트도 저자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빠져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좀 더 솔직하게 덧붙이고 있는데, 사실은 '너무 대단해서' 저자가 사용하기에 불편하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책에서는 철학ㆍ사상의 핵심 개념을 다루는 데 철학사의 학문적인 중요성은 반영하지 않았다. 분명 철학이나 근대 사상에 익숙한 사람은 칸트, 스피노자, 키르케고르가 싹 빠져 있는 철학 입문서는 허용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이러한 비판도 고려하지 않았다.이 책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업인 조직과 인재에 관한 컨설팅과 실생활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유용성을 토대로 편집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35쪽

저자는 이렇게 자신이 철학책을 쓴 의도를 시작부터 밝히고 있으니, 이 의도만 꼼꼼히 읽는다면 실패 혹은 실망하지 않고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천여 명의 CEO가 극찬한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인문학?

앞서 저자가 밝혔듯이, 철학 사상을 나누고 있는 네 가지 컨셉트는 지극히 비즈니스적이다. 사람, 조직, 사회, 사고에서의 철학의 쓸모를 이야기하다보니, 인문학적인 접근 보다는 경영이나 자기계발에 가까운 설명들이 많다. 특히, 읽다보면 왜 2천여 명의 직장인들이 아닌 CEO들이 극찬했는지 알 수 있다.

리더의 자리에서 서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황에 따라 환영받지 못하는 결정이나 부하에게 상처를 주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는 비즈니스든 사회 조직이든, 혹은 가족 안에서든 장기적인 번영과 행복에 책임감을 갖고 있는 리더는 과감히 결단을 내리고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134쪽

통상 비즈니스 세계에서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과급 정책이 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창조성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과를 유도하기 위해 제공하는 '당근'이 조직의 창조성을 높이는 데 의미가 없을뿐더러 되레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대가와 학습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65쪽

CEO가 아닌 내가 위로 받은 부분도 있었는데, 바로 말콤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을 반론한 부분이다.

글래드웰의 주장은 '어떤 분야에서든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면 1만 시간 동안 훈련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반드시 최고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대담한 법칙을 제안한 데 반해 책에 나와 있는 논거는 일부의 바이올리니스트 집단과 빌 게이츠(프로그래밍에 1만 시간을 열중했다), 그리고 비틀스(데뷔 전에 무대에서 1만 시간 연주했다)에게서 이 법칙이 관측되었다는 것뿐으로, 주장의 근거가 너무나 취약하다. 이는 비단 글래드웰에게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재능보다 노력'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책에 나타나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259쪽

컴퓨터게임 : 26%

악기 : 21%

스포츠 : 18%

교육 : 4%

지적 전문직 : 1%

이 수치를 보면 글래드웰이 주장한 '1만 시간의 법칙'이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얼마나 위험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노력은 보상받는다는 주장에는 일종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어 매우 아름답게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의미 있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공정한 세상 가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공정한 세상 가설, 즉 노력은 언젠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사고는 실증 연구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노력의 누적량과 성과의 관계는 해당 경기나 종목에 따라 달라진다고 밝혀졌다. 다시 말해 섣불리 이 사고에 사로잡혔다간 승산이 없는 일에 쓸데없이 인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261쪽

즉, '1만 시간의 법칙'은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 효과적으로 나타나는 분야는 컴퓨터게임, 악기, 스포츠와 같은 분야에 한정되어 있으니 승산 없는 일에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제목에서부터 일본스러움이 풍기는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철학 입문서보다는 경영서나 자기계발서에 가깝다. 이 책은 핵심 철학 사상의 목록을 엿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더 깊게 알고 싶다면 진짜 철학 입문서나 해당 사상가의 저서를 직접 찾아 읽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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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종례 - 맛있는 학교생활을 위한 다정한 레시피
이경준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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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선생님이 건네는 다정한 편지! 다정한 자극!

매주 금요일 종례시간, 시인이자 국어 선생님인 작가는 담임을 맡고 있는 반 학생들에게 짧은 편지를 건넵니다. 학생들은 늘 잔소리 같은 선생님의 말씀 대신 짧은 편지를 읽는 것으로 한 주를 마무리할 수 있는데, 이 편지가 아주 효과가 좋은 모양입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학생들 앞에서, (특히 종례시간에) 선생님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온전히 할 수 있어서 좋고, 학생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짧은 편지만 읽으면 되니 좋습니다. 선생님은 소란스러운 교실을 정리하고 학생들을 집중시키는데 힘 뺄 일이 줄어들고, 학생들은 종례시간이 줄고 그만큼 집에도 일찍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매주 학생들에게 편지(작가는 '쪽지'라고 부르지만 분량을 보면 '편지'에 더 가깝습니다)를 쓴다는 것,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말보다는 학생들에게 더 오래 각인될 수 있어서 좋겠지만, 오히려 그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을텐데 작가는 매주 정성들여 편지를 씁니다.

문득 학창시절 우리 선생님들을 떠올려봅니다. 작가처럼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 분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늘 잔소리처럼 들렸고,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의 말씀을 차근차근 듣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그때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좀 더 귀 기울여 들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심지어 작가는 담임 선생님이 바뀌어 궁금해하는 학부모에게도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씁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전역 후 4년 동안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잘 되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시를 썼는데 마침 그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고 그해 겨울, 시험에도 합격해 경기도 국어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빵과 책을 좋아하고, 블로그 등 SNS를 통해 소통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블로그를 통해 작가를 알게 됐고, 그가 블로그에 꼬박꼬박 올려주는 감수성 짙고 섬세한 글들이 좋아서 반가운 마음에 책을 읽었습니다.

작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만, SNS를 통해 읽는 것과 종이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는 글맛은 확실히 다릅니다. 같은 글이라도 매체에 따라 전해지는 느낌이 이렇게 다른데, 그래서 작가는 '편지'라는 것을 떠올렸나 봅니다.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학부형도 아니고 주변에 학생 닮은 사람도 없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작가지만, 책을 읽다보면 마치 인생 선배가 들려주는 것 같은 조언들, 지금도 하지 못해서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유용할 것 같은 잔소리(!)들이 더러 있습니다.

올 여름에는 작은 것을 보고 처지를 상상하는 감수성을 연습해 보자. 감수성을 죽이는 가장 큰 독약은 귀찮음이니까, 주의하시고. 귀찮음은 감수성만 죽이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자신도 병들게 만든다. 170쪽

작가의 감수성에 반했던 나, 사실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이 '감수성'이라는 것인데 정말 나는 귀찮고 게을러서 감수성이 부족한 게 맞습니다. 비록 덥고 지치지만 올 여름에는 작가처럼 부지런하게 감수성을 다듬는 연습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마지막으로 꼭 소개하고 싶은 '편지'가 있습니다. 이 책에는 '맛있는 학교생활을 위한 다정한 레시피'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12월 22일에 쓴 편지에는 진짜 레시피가 등장합니다. '초코 소라빵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편지인데, 좋아하는 빵 하나를 먹는데도 이렇게 열정 넘치는 선생님이라니. 프레즐 대신 초코 소라빵이 이 책 표지에 실렸어야 했어요.

초코 소라빵을 맛있게 먹는 방법. 113~114쪽

1. 파리바게뜨에서 비닐 포장된 초코 소라빵을 산다.

2. 사온 즉시 냉장고에 넣는다. (가장 중요함. 초콜릿을 차갑게 해야 함.)

※ 차갑게 식히지 않으면, 프라이팬을 초콜릿 범벅으로 망쳐서 부모님께 등짝 맞을 수 있음.

3. 프라이팬을 약불로 달군 뒤, 버터를 손가락 한 마디만큼 넣는다.

4. 버터가 녹아서 한두 방을 기포가 올라올 때 초코 소라빵을 팬 위에 놓는다.

5. 빵의 겉면 전체에 버터가 골고루 발라지도록 빵을 굴린다.

6. 버터 코팅이 된 빵을 겉이 노릇해질 때까지 약한 불로 굽는다.

 

'우리는 햇빛을 피부로 흡수하면서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날이 좋으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발랄해지기도 하지만, 하늘이 궂으면 뭘 해도 진짜 미소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아서.

지치지 말자.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견뎌보자.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즐겁게 보내면서, 어둑어둑한 날에 견딜 수 있는 힘을 길러 보자.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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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을유사상고전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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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비판으로 철학자의 권위에 도전한 러셀!

개인적으로 숙원사업과도 같았던 『러셀 서양철학사』를 읽으려고 펼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걱정 하나. 1,0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열심히 읽으면 읽을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방대한 내용을 과연 정리할 수 있을까? 그냥 읽기도 힘든데, 러셀은 어떻게 『러셀 서양철학사』 를 쓸 수 있었을까? 심지어 번역가도 대단해 보입니다.

 

러셀은 '철학'이라는 말을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하자고 제안합니다. 그가 말하는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 측면을 포함"(17쪽)하기도 하고,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권위보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17쪽)하기도 합니다. 그 둘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철학의 영역입니다. 그는 신학과 과학이 답할 수 없는 부분, 비록 정답이 없더라도 그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며 사람들을 위해 철학은 기꺼이 그 일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러셀은 철학사를 크게 세 파트로 나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초에 그리스 문명이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헬레니즘 세계와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의 고대 철학, 중세부터 르네상스 전까지 서양 철학의 중심이 됐던 가톨릭 철학, 그리고 르네상스부터 러셀이 몸담고 있는 논리분석철학까지 근현대 철학으로 나눠 그만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대한 철학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의 비판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그는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비판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분야의 권위자이긴 하지만 과대평가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지금도 해당 분야에서 그들의 '권위'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을 반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그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죠.

이뿐만 아니라 러셀은 한결같이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혹평을 했습니다.

 

어떤 서평은 러셀이 철학사를 쓰고 있는지 논쟁의 역사를 쓰고 있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고, 역사를 오해했다고 비판한다.

다른 서평은 러셀이 능란하고 재치가 넘치는 저술가이지만 러셀의 저작 가운데 최악이라고 혹평하면서, 근현대 철학은 비교적 공정하게 논의했으나 고대와 중세 철학에 대한 논의는 무가치하다고 덧붙였다. 「해제」 1027~1028쪽

 

학자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러셀은 이런 혹평에 대하여 여러 학파와 철학자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변론을 전합니다.

 

라이프니츠를 제외하면, 여기서 다루는 철학자들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다른 학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 책을 저술하려면 피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우리는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책을 쓰는 사람은 한 저자나 짧은 시기에 집중하여 연구한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어느 한 부분에 할애하지 못한다. (…) 역사의 변화 과정에는 통일성이 있으며, 먼저 일어난 일과 나중에 일어난 일이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하자. 이 점을 밝혀내려면 앞선 시기와 나중 시기를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종합해야 한다. 「지은이 서문」 7쪽

 

비록 내용이 방대하긴 하지만, 꽤 잘 읽히는 편입니다. 러셀이 이 책 덕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였으니, 날카로운 비판 속에도 위트있는 문장들을 더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철학(역사)'를 짚어준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비단 철학 뿐아니라 서양의 여러 문화와 역사에 걸쳐져 있는 가톨릭의 역사를 알지 못해서 가끔씩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혹평들 때문에 책 읽기를 꺼려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 혹평들 때문에 이 책을 아예 읽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혹평들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철학책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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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2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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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에게 죽음이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자신이 사망할 경우 화환도 추도문도 추도식도 다 생략하고 가장 간소한 장례 절차를 지켜 달라"(154쪽)고 유언장에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덤에는 십자가나 묘비도 없고 그 어떤 안내판도 없어서 그저 흙더미 위에 풀이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사전 정보가 없다면 분명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겁니다.

그에게는 평생에 걸친 두 가지 화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두 화두를 탐구했습니다. 첫번째는 '문명과 반대되는 자연' 입니다. 그에게 있어 문명이란, 인간이 만들지 않은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간단한 도구에서 기술, 과학, 관습, 사회 제도, 종교, 교육, 문화, 예술에 이르는 모든 것"(163쪽)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하며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무덤에 아무런 표식이 없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일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그는 자연을 넘어서는 것, 즉 "초자연적인 어떤 것, 영혼"을 강조했습니다.

두번째는 '죽음' 입니다. 필멸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 그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기도 하며, 평생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탐구했습니다.

삶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미완성 단편작인 「광기의 수기」는 '죽음의 공포'에 대한 톨스토이의 개인적인 체험이 담긴 소설입니다.

『전쟁과 평화』의 성공으로 이반 일리치처럼 성공가도를 달리던 톨스토이는 한 지방에 매물로 나온 영지를 보러 방문한다. 오랜 여행으로 피곤했던 그는 한 여관방에서 하룻밤 쉬기로 하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들 수가 없었고 오히려 어떤 공포를 느꼈다고 합니다. 다음날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새벽 2시였소. 너무나 피곤했소. 자고 싶었고, 피곤하다는 것 말고는 내 컨디션은 완벽했소. 그런데 갑자기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우울감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소. 이 모든 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알려 주겠소. 이토록 고통스러운 감정은 생전 처음이었소……." 174쪽, 역자해설

「광인의 일기」는 이때의 체험을 쓴 것입니다. 주인공 '나'는 어느 기관에 끌려가 정신 감정을 받는데, "미치지 않았다"는 판정을 받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유년시절에 발작과도 같았던 울음 두 번을 제외하면 미쳤다고 의심할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째 되던 해, 유년 시절 이후 처음으로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톨스토이가 겪었던 것처럼, 매물로 나온 영지를 확인하기 위해 떠났던 여행 중에 시작됐습니다. 그는 너무 지루하고 무서운 데다 피곤하기까지 해서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사각형 방을 빌려 하룻밤 머물기로 하는데, 그 방에서 '죽음의 공포'를 대면하고 맙니다.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뭐가 그토록 두려워 도망치려 하는 걸까.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려 하는 걸까. 무언가 끔찍한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나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 나다. 여기 내가 있다. 뻰자현의 영지건 그 밖의 어떤 영지건 나한테 무언가를 더해 주지도 못할 것이고 빼앗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나 자신이 지긋지긋하고 역겨워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 잠 속으로 도피해서 잊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었다. 나는 복도로 나왔다. (…) 나는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복도로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득달같이 뒤쫓아 나와 계속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 거지?>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죽음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거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래, 죽음이야. 죽음이 오고 있어, 바로 여기 와 있어.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실제로 죽음이 코앞에 찾아온다고 해도, 그때와 같은 공포는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다가오는 죽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로 그것이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전 존재가 나는 살아야 한다고, 그럴 권리가 있다고 외치면서 동시에 점점 더 강렬하게 죽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바로 이러한 분열이 가장 끔찍했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공포를 떨쳐 버리려 했다. 청동 촛대에 타다 남은 양초가 꽂혀 있는 게 보이기에 불을 붙였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과 촛대보다 작은 양초 토막은 여전히 같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삶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 내가 점점 죽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눕자마자 공포가 엄습해 와 벌떡 일어났다. 메스꺼움, 정신적인 메스꺼움, 토하기 직전의 뉘엿거림 같은 일종의 정신적인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죽음이 끔찍한 것인 줄 알았는데,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니 끔찍한 것은 죽어 가는 삶이었다. 어쩐 일인지 삶과 죽음이 하나로 뒤엉켰다. 137~138쪽

이런 일을 두 번 정도 겪고 난 그는 자신의 죄를 되새기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아내에게는 "이 영지의 수익은 사람들의 가난과 슬픔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지를 살 수 없다"(151쪽)고 말합니다. 교회 앞에 있던 걸인들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털어서 나눠줍니다.

소설은 이렇게 미완성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톨스토이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이 죽음의 공포를 대면하는 장면은, 당시 그가 겪었던 공포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죽음은 끝났다!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김철수'와 같은 맥락의 이름입니다. 그만큼 러시아에서 '이반'이라는 이름은 흔하고 평범한 이름인거죠.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가 평범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끔찍하다고 말합니다.

법학대학을 졸업한 이후 승진을 거듭하며 성공의 길을 걸었던 그. 그는 새로 장만한 집을 단장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병을 얻습니다. 겨우 45세였는데, 유능하다고 소문난 의사를 여럿 만나보아도 말로는 나을 수 있다고 하는데 치료에 진척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왜 하필 자신인지, 왜 하필 그날 그것이 그곳에 있어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는지, 반문합니다. 그의 동료들 또한 말합니다. 그런 병에 걸린게 자신이 아닌 이반 일리치라서 다행이라고 말이죠.

이런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환자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자로서 '연민'을 품어주길 바라는데, 사람들은 곧 나을 수 있을거라는 말을 던지며 그의 고통을 외면합니다. 심지어 그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역시 하루종일 아픈 그의 곁에 있으면서 같은 고통을 겪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런 그의 곁에, 오직 환자로만 대해주는 하인 게라심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던 중 고통이 극에 달하고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 이반 일리치는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자신 또한 부정해왔던 죽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라는 것을,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헤벌린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내도 안쓰러웠다.

<그래, 내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 그는 생각했다. <다들 불쌍해. 하지만 내가 죽으면 좀 편해질 테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힘이 없었다. <아니야, 뭣 하러 말을 해. 그냥 보여 주면 돼.> 그는 생각했다. 124쪽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는 두 시간이나 더 사경을 헤매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가슴께에서 뭔가 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뼈만 앙상한 육신이 경련을 일으켰다. 부글거리던 소리도, 쌕쌕거리는 숨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126쪽

소설 속 인물들은 말합니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혹은 "왜 하필 나인가!"하고 말이죠. 하지만 아무도 죽음을 제대로 직시한 사람은 없습니다. 필멸의 존재라면, 누군든지 죽을 수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을 흔하디 흔한 '이반'으로 설정했을테구요.

톨스토이는 90편에 달하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 몇 작품되지 않는다는게 아쉽습니다. 어디라도 좋으니, 어서 빨리 "톨스토이 전집"을 기획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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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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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쟁이란 말인가! 적과는 만날 수도 없는데!

1936년 12월 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으로부터 불과 일곱 달 전이다. 그럼에도 이미 엄청난 거리 밖으로 멀어져버린 시기이다. 뒤에 일어난 사건들이 그 시기를 지워버렸다. 1935년이나 1905년을 지운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12월이나 1월에 들어서면서 이미 혁명기가 끝나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막 건너온 사람에게는 바르셀로나의 상황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은 도시에 들어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1쪽

1936년, 전세계 젊은이들이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을 단순히 '스페인' 한 나라만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고, 스페인에서 파시즘 세력을 몰아내면 다른 곳에서도 승리할 수 있으며 더불어 세계대전도 막아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도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스페인 내전을 지켜본 그 둘은 각각 엄청난 작품들을 발표합니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에 대항한 민족주의자들이 처형되었던 장소인 론다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써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조지 오웰 역시 1936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의용군으로 참전해 직접 경험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전쟁은 전쟁이라고 할 수 없었고, 군대도 모든 것이 잘 훈련된 군대가 아닌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총 조차 지급되지 않았고, 그나마 지급되더라도 제대로 된 총이 없었습니다. 수류탄도 불발이거나 엉뚱하게 터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병사들의 군복 또한 제각각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선이라고는 하지만, 적과는 만날 수 조차 없었고 총 한번 제대로 겨눠볼 일도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전세계 젊은이들이 모두 모였는데, 하는 일이라곤 그저 경계근무, 정찰 근무, 땅파기 밖에 없으니 얼마나 한심하고 시간이 아까울까요. 조지 오웰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병영 전체는 더럽고 혼란스러웠다. 의용군은 건물을 점령하기만 하면 모두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15쪽

당시의 의용군 대오는 아주 특이해 보이는 오합지졸 집단이었다. 16쪽

의용군 체계 전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병사들은 어중이떠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자원병은 줄고, 쓸 만한 병사들은 이미 전선에 나가 있거나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몇 퍼센트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들이었다. 20쪽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자들이 다룰 줄도 모르는 낡아빠진 소총을 가진 이런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 무리라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졌다. 31쪽

전선을 보고 나자 나는 심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이것이 전쟁이란 말인가! 적과는 만날 수도 없는데! 34쪽

나는 스페인에 있을 때 전투를 본 적이 거의 없다. 35쪽

그러던 중, 오웰은 '어쩌다가' 총에 맞습니다. 새벽에 보초들에게 교대 준비를 하라고 말하는 도중이었는데, 갑자기 총에 맞습니다. 교전도 아니었고, 자신을 쏜 상대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다만 엄청난 충격을 느꼈고, (대작가인 그 조차)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총을 맞는 경험이 자주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나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한 명쯤 쓰러뜨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파시스트를 쓰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파시스트 저격병이 나를 쓰러뜨렸다. 전선에 가서 열흘쯤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총알에 맞는 경험은 아주 흥미롭기 때문에 자세히 묘사할 가치가 있을 것 같다. 238쪽

통증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모호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내가 틀림없이 기뻐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늘 내가 부상당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야 큰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순간 갑자기 어디를 맞았는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궁금해졌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총알이 몸의 앞쪽 어딘가에 맞았다는 것은 의식하고 있었다. 말을 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희미하게 꺽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시도를 하자 어디를 맞았냐고 물을 수 있었다. 목이라고 병사들이 말했다. 들것 담당자인 해리 웹이 붕대와 함께 응급치료 때 쓰라고 준 작은 알코올 병 하나를 가져왔다. 병사들이 내 몸을 들어올리자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뒤에 있던 스페인 병사가 총알이 목을 관통했다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알코올 기운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엄청나게 따가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상쾌할 정도로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239쪽

나는 제대증을 받았다. 29사단 직인이 찍혀 있었다. <무능>이라고 적힌 의사의 증명서도 받았다. 이제 마음대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제 비로소 스페인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260쪽

어떻게 지난 여섯 달 동안 그런 것을 보지 못했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제대증을 호주머니에 넣자 다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261쪽

오웰은 목에 관통상을 당해 제대 확인증을 받게 됩니다. 이즈음 상황이 급변해서 오웰과 같은 소속으로 활동했던 의용군들은 단순히 무기를 소지했다는 이유 등으로 체포되고 처형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웰 역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고, 스페인 국경을 빠져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제대 확인증이 있어서 아내와 함께 스페인을 무사히 빠져나가게 됩니다.

전투다운 전투도, 군대다운 군대도 없는 곳. 정작 이 전쟁을 왜 하는지 조차 모르는 스페인 사람들. 그는 이런 모습에 환멸을 느껴 하루라도 빨리 스페인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전쟁과 무관한 프랑스와 영국 땅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스페인으로 가고자 합니다.

당신이라면 전쟁중인 나라를 떠나 평화로운 땅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292쪽

이상하게도 불안정한 시간이었다. 폭탄, 기환총,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늘어선 줄, 선전, 음모 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한적한 어촌에서 우리는 깊은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껴야 마땅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스페인과의 거리는 멀어졌을지만, 스페인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들이 뒤로 물러나 적당한 비율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쏜살같이 우리 뒤를 덮쳐, 모든 것이 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페인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꿈을 꾸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스페인에서 나가면> 지중해 근처의 어딘가로 가서 한동안 조용히 지내며 낚시라도 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막상 그런 곳에 오니 따분함과 실망뿐이었다. 날씨는 쌀쌀했다. 바다로부터 끈질기게 바람이 불어왔다. 물은 탁하고 물결은 거칠었다. 항구 둘레를 따라 재, 코르크, 생선 내장이 더껑이를 이루어 돌에 부딪히고 있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아니 오히려 누군가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해도, 우리 둘 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투옥된 상태이기를 바랐다. 스페인에서 보낸 몇 달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외적인 사건들은 약간씩 기록을 했지만, 그 사건들이 나에게 남긴 느낌은 기록할 수 없다. (…) 바라건대 그들 모두가 여전히 안전하기를. 그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들이 전쟁에서 이겨 독일인,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할 것 없이 모든 외국인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294쪽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는 환멸을 느꼈을지 모르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을 느낍니다. 때론 너무 느긋하고 비효율적이라서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열정에는 무한한 애정을 느낍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스페인 사람들의 아량에 대해 '스페인적인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스페인에 대해서 매우 나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이 거의 없다. 285쪽

이 소설(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에는 카탈로니아에 대한 '찬가'는 없습니다. 반어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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