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는, 정신 나간 짓이다!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서문」 10쪽

약 오 년 전 밤, '나'는 아르헨티나 작가 '비오이 카사레스'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일인칭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됐습니다. 그들이 논쟁을 벌이던 별장의 복도 끝에는 거울이 달려 있었는데, 그 거울을 보고 비오이 카사레스는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화자가 이 말의 출처를 정확하게 따져 묻자 비오이는 『영미 백과사전』의 '우크바르' 항목에 그 기록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즉시 별장에 구비되어 있던 백과사전에서 '우크바르' 항목을 찾아보지만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비오이는 우크바르라고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철자들을 뒤졌지만,우크바르라는 항목은 없었습니다. 화자는 비오이가 자신이 한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즉석해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비오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비록 자신이 말한 것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백과사전 46권에는 우크바르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그노시스 교도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환영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궤변이다. 거울과 부권(父權)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13쪽

화자가 비오이에게 그 책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자, 며칠 후 그가 그 책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분명히 46권 921페이지에 우크바르 항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별장에서 그들이 함께 확인했던 똑같은 백과사전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페이지 수가 달랐습니다. 별장에 있던 백과사전은 917페이지 밖에 없었지만, 비오이가 가져온 백과사전에는 4페이지가 추가된 921페이지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또, 46권은 Tor에서 시작해 Ups로 끝나서 알파벳 순서 상으로는 결코 마지막 항목에 우크바르가 실릴 수 없었습니다. 이 백과사전에는 우크바르의 국경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었고, 그들의 역사는 물론이고 언어와 문학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믈레흐나스와 틀뢴이라는 두 환상적인 지역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크바르'라는 미지의 항목을 추가해 넣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혹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우크바르라는 곳이 존재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 책에서 나는 그가 17세기 초 '장미 십자회'라는 상상적 단체에 관해 쓴 독일 신학자이며,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가 예시한 것을 모방하여 실제로 그런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16쪽

그로부터 이삼년 후, 화자는 한 책에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의 단체를 한 신학자가 언급한 후에 실제로 그 단체가 설립되었다는 글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른 책에서 우크바르와 틀뢴과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또다시 접하게 됩니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그 기록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우크바르 혹은 틀뢴 역시 한 비밀 결사의 작품으로 직잠합니다.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세대의 틀뢴주의자들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대담한 생각은 우리를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회귀하게 한다. 즉, 틀뢴을 만든 것은 어떤 사람들인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라는 복수는 피할 수 없다. 하나의 무한한 라이프니츠처럼 표면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어둠 속에서 일하는 단 한 명의 창조자라는 가설은 만장일치로 기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멋진 신세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천재의 주도하에 천문학자, 생물학자, 기술자, 형이상학자 시인, 화학자, 대수학자, 윤리학자, 화가, 기하학자 등으로 구성된 비밀 결사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20쪽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해킹한 데이터를 저장한 디스크를 책 속에 숨겨두고, 감독은 일부러 그 책의 제목을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 책은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입니다.

이 책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지칭하며,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인 '시뮬라크르 하기'입니다. 이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재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재현'은 존재했던 것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어서 원본 조차 없는 것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시뮬라크르'가 더 촘촘하게, 그리고 완벽해질수록 우리는 실재와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믿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틀뢴주의자'들이 했던 작업들도 '시뮬라시옹'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가상의 행성을 만든 다음, 책 여기 저기에 그것의 기록을 남겨 놓습니다. 처음에는 화자처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쉽게 믿어버리는 백과사전이나 지리책 등에 그것에 대한 언급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가상의 행성에 대해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행성을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실제로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어떤 것보다 이 행성의 존재를 더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우주를 한 명의 신이 창조했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인거죠. 세계 곳곳에는 그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남아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를 믿고 성지순례를 하는데 혹시 이것도 '시뮬라크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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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21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뮬라시옹, 예전에 사두었는데 읽었는지 당최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마도 안 읽을 것으로...

뒷북소녀 2019-01-30 14: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안 읽었다고 생각해서 읽다보면... 읽었고... 그런 책들이.
아마 갈수록 제 기억은 더 희미해지겠죠 ㅠㅠ
 

2018년, 나와 함께 한 책들이다.

비록 100권을 못 채워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전과 세계문학을 많이 만나서 뿌듯하다.

 

나는 하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아서 뭔가를 꾸준하게 잘 못하는 성격인데,

민음사 세계문학 캘린더를 만난 이후로 꾸준하게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2019년에도 우리는 함께 할 것이다. 더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과 함께.

 

 

1. 일리아스 / 호메로스
2.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 라우라 에스키벨
3. 그날의 온도 그날의 빛 그날의 분위기 / 에그2호
4. 오뒷세이아 / 호메로스
5. 안녕 엄마 안녕 유럽 / 김인숙
6. 순이삼촌 / 현기영
7. 새로운 인생 / 오르한 파묵
8.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정은우
9. 천일야화 1 / 앙투안 갈랑
10.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11. 천일야화 2 / 앙투안 갈랑
12.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13. 천일야화 3 / 앙투안 갈랑
14. 천일야화 4 / 앙투안 갈랑
15. 천일야화 5 / 앙투안 갈랑
16. 천일야화 6 / 앙투안 갈랑
17.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18. 벚꽃동산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19. 침묵의 봄 / 레이첼 카슨
20.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 문태준
21. 이성과 감성 / 제인 오스틴
2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아즈 사강
23.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조 퀴넌
24.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 김언
25.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26. 설득 / 제인 오스틴
27. 백야 외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28. 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 로맹 가리,마누엘레 피오르
29. 피터 래빗 전집 / 베아트릭스 포터
30. 이성과 감성 / 제인 오스틴
31.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허연
32. 무엇이든 쓰게 된다 / 김중혁
33. 전쟁과 평화 1 / 레프 톨스토이
34. 창밖은 오월인데 / 피천득
35. 인연 / 피천득
36. 연인 / 마르그리트 뒤라스
37. 역사의 역사 / 유시민
38. 전쟁과 평화 2 / 레프 톨스토이
39. 전쟁과 평화 3 / 레프 톨스토이
40. 전쟁과 평화 4 / 레프 톨스토이
41.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42.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43.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 마스다 미리
44. 경애의 마음 / 김금희
45. 네 이웃의 식탁 / 구병모
46. 아무래도 싫은 사람 / 마스다 미리
47.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48. 이만큼 가까이 / 정세랑
49. 칼자국 / 김애란
50. 풍요와 거품의 역사 / 안재성
51. 있으려나 서점 / 요시타케 신스케
52.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53. 고고심령학자 / 배명훈
54. 열두 발자국 / 정재승
55. 문맹 / 아고타 크리스토프
56.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57. 뜨거운 피 / 김언수
58. 미스 플라이트 / 박민정
59.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마이클 부스
60.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 피터 스완슨
61. 눈먼 시계공 / 리처드 도킨스
62. 지하로부터의 수기 / 도스토예프스키
63. 열하일기 1 / 박지원
64. 쇼코의 미소 / 최은영
65. 열하일기 2 / 박지원
66. 퇴근길엔 카프카를 / 의외의사실
67. 첫사랑 / 투르게네프
68. 사소한 부탁 / 황현산
69.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 소포클레스
70. 토지 1 / 박경리
71. 토지 2 / 박경리
72. 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73. 파우스트 1 / 요한 볼프강 괴테
74. 파우스트 2 / 요한 볼프강 괴테
75. 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76. 토지 3 / 박경리 ---> 비록 몇 권 밖에 못 읽었지만, 다시 시작했다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77. 소설 보다 : 봄-여름 / 김봉곤,조남주,김혜진,정지돈
7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 작별 / 한강 외
79.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80.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81. 딸에 대하여 / 김혜진
82. 누구를 위하여 좋은 울리나 (상) / 헤밍웨이
83. 누구를 위하여 좋은 울리나 (하) / 헤밍웨이
84. 단 하나의 문장 / 구병모
85.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 허수경
86.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 혜민
87. 옥상에서 만나요 / 정세랑
88.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 백세희
89. 밤하늘 아래 / 마스다 미리
90.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유발 하라리
91. 사양 / 다자이 오사무
92.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93. 열하일기 3 /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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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01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로 고전을 읽으셨군요 -

제 새해 목표는 벽돌책 독파로 정했답니다.
과연 할 수 있을랑가는 모르겠지만요.

뒷북소녀 2019-01-02 12:54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요즘 고전의 재미에 푹 빠져있답니다.
저도... 새해에 벽돌책 완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레삭매냐님은 어떤 책 독파할 계획이신지 궁금하네요.

목나무 2019-01-01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한해 정말 열심히 읽었구나.
올해도 뒷북소녀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

뒷북소녀 2019-01-02 12:55   좋아요 0 | URL
넵! 저도 언니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우리 올해는 작년보다 더 건강하게 만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건강하세요.

카알벨루치 2019-01-01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 우아 축하드립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경의감까지 ^^

뒷북소녀 2019-01-02 12:56   좋아요 1 | URL
어머, 경의감이라뇨... 감사합니다.
올해는 <부활>을 읽을 계획입니다.
카알벨루치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2018년 12월에 읽은 책들, 1일1책 실천!

 

12월 시작하면서부터 너무 신나게 놀아서 후반에는 좀 쉬면서 놀았다.

추운 날씨 탓도 한 몫해서, 이불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

2018년에 나온 책들은 2018년에 읽고 마무리하고 싶어서

마지막 주는 정말 1일1책을 하며 미친듯이 읽었다.

꼭 2018년에 마무리하고 싶었던 『열하일기』도 완독하게 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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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1 0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멋지다 뒷북소녀님! 나도 글쓰고싶은데 손가락 탓하며 댓글만 쓰고 있습니다 해피 뉴 이어~

뒷북소녀 2019-01-01 15:33   좋아요 1 | URL
민음사 세계문학 캘린더 덕분입니다.^^
꾸준하게 못하는 성격인데, 캘린더를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손글씨로 기록까지 남기게 되더라구요.
카알벨루치도, 2019년 더 많은 책으로 든든하게 채우시길 바랍니다.

blanca 2019-01-01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근사하네요. 일일 일책이라니요.

뒷북소녀 2019-01-01 15:34   좋아요 0 | URL
날씨 탓이에요. 너무 추워서요... 꼼짝도 하기 싫더라구요.^^

hnine 2019-01-01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만하지 않은 책들인데, 대단하십니다.

뒷북소녀 2019-01-01 15: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19년에 우리 더 재미있는 책들로 만나보아요.

cyrus 2019-01-01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하일기>를 읽었을 때가 고비였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즐겁게 1일 1독하세요. ^^

뒷북소녀 2019-01-01 15:36   좋아요 0 | URL
아, 어떻게 아셨어요?^^ 1권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갈수록 재미가 늘어지는게...
그래서 2018년에 끝내고 싶어서요... 몇 달 만에 3권을 완독하고... 뿌듯해 했어요.
네. 이젠 1일1책은 어려울 것 같구요... 1일1독으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잡으셔요.^^
 

당신의 동네 사람은 '오싹함'에서 안녕한가요?
단편소설 「동네 사람」, 강화길,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후보작
   서로 인사하고 지내는 동네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요? 사실 꽤 오랫동안 계획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만 산 저에게는 동.네.사.람.이라는 단어가 참 낯섭니다. 알고 지내는 동네 사람? 당연히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집 앞 슈퍼를 갈 때도, 집 근처 스타벅스를 갈 때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나갈 때가 많습니다. 어차피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동네인걸요.

   어디나 눈들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나를, 너를 빤히 바라보는 눈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주목을 끌면서 온 동네가 우리를 멋대로 마음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둔다. 127쪽

   그런데, 소설 속 '너'와 '나'가 살고 있는 동네는 '조금 피곤한' 동네입니다. 이런 동네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저는 생각만해도 피곤해집니다. 어디를 가든 '너'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동네 사람들도 일부러 귀를 기울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동네 구조상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뿐입니다.

   참, 그때 할머니 사고 난 거 그건 잘 해결했어요?
   (…) 할머니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그러던데 아니에요? 강아지 발이 부러졌댔나. 아무튼 잘 해결됐나 해서 물어봤어요.
   여자는 요 앞 철물점에서 들었다고 하고, 미용실에서 들었다고 하고, 목욕탕에서 들었었나, 하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120~121쪽

   '나'는 늘 동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가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시장 앞 좁은 공간에 주차를 하다가 폐지 줍는 할머니가 데리고 다니는 개를 친 것입니다. 사실은 개를 직접적으로 친게 아니라 할머니가 쌓아놓은 폐지를 차로 넘어뜨리면서 그 폐지가 개쪽으로 쏟아졌는데, 다행히 개도 멀쩡하게 잘 걸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에게 혹시나 몰라서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심환이라도 사드시라고 오만 원을 건네고 나온 것인데, 동네에는 '너'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그냥 갔다고 소문이 난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너'는 할머니 뿐만아니라 그 장면을 목격하고, 들었다는 사람들과도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더 주목받기 전에 '너'가 사과하고 마무리했으면 싶은데, '너'는 억울해서인지 사과를 하는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이상한 사람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직장이 없는 사람들. 가족이 아닌 사람들. 밤이나 낮이나 할 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나 하면 없고 없어졌나 하면 어디선가 또 나타나는 우리의 신분을 확인해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눈에 띄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계약이 종료되면 기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면서 몇 년간은 편하게 있고 싶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데에 얼마나 섬세하고 큰 노력이 필요한지, 너는 여전히 모르는 게 틀림없다. 125쪽

   물론 이사를 하는게 좀 힘든 일이 아니지만, '나'가 이토록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나'와 '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도를 넘는 호기심을 보이거나 혹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경계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나'와 '너'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너'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동네 사람들은 '너'의 편에 서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없고 가난한 할머니 편에 서서, 할머니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동네 사람들을 보며 오싹함을 느낍니다.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137쪽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도 그랬지만, 작가는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울타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씁니다. 그 방식 또한 너무 과하지 않아서, 저는 작가의 이런 시선이 좋습니다. 당분간 예의주시하고픈 작가이기도 하구요.

   너와 내가 매일 오가는그 길을 따라 우리가 모르는 어떤 말들이, 추측들이, 오해들이, 따라온다. 고작 사과를 하고 말고 하는 문제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불필요한 관심을 끌고 싶지 않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너와 나의 일상 근처를 어슬렁거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 135쪽

   그러니까 이 동네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너와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우리도 모르는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키우고 반드시 그게 어떤 부당한 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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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앙마 2018-12-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보면 우리 고향사람들이 그랬는데... 서로 대문도 없이 산다는 이유로..이런말 저런말..
흔한말로 그 집 숟가락이 몇갠지 안다는 이유만으로..
근데 정말 한번 틀어지면 죽을때까지 말도 안하는 이웃도 보고 맘 아팠고...
암튼...그 오싹함이 뭔지 살짜기...느낌이 오는기분..하지만 실제로는 그 오싹함을 겪지는 않았다는 진실..
아마도 그냥..그러려니 하고 산 고향이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동화된 듯..
 

2018년 11월에 읽은 책들

나름 열심히 읽은 11월의 독서 기록들.
주말마다 등산 가고, 사람들 만나느라 바빴지만 평일에는 책을 놓지 않았다.
출근에 대한 압박도 있었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열심히 읽었는데,
이 중 가장 고전(!)했던 책은 역시 '고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파우스트』.
하지만 이젠 괴테도 읽었다는 문학적 허세를 부릴 수 있을듯.

한달에 12권을 읽으니, 사진도 질서정연한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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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2-06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지>와 <파우스트>의 위용이 멋집니다 참.말.로.

뒷북소녀 2018-12-06 21:32   좋아요 0 | URL
아, <토지>는 네 권 정도는 읽었어야 했는데... 한동안 멈춘 상태랍니다.ㅠㅠ

빨강앙마 2018-12-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지금 토지2권 읽고 살짜기 멈춘 상태..ㅠ.ㅠ;;;;
다른책 좀 읽느라고.. 뒷북양 어여 따라 잡아야하는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