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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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요망지게, 안녕해!

오디오클립에서 작가가 직접 읽어주는 '듣는 연재 소설'로 먼저 만난 『복자에게」. 작가는 "완청은 사랑"이라고 했지만, 듣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는 완청하지는 않았고 맛만 보았다. 무엇보다 담담하게 읽어주는 작가의 목소리가 좋았다. 평소 글에서 느꼈던,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런 목소리였다.

가죽 사업을 하던 부모님의 부도 때문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 가족들. 동생 영웅이는 어려서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남게되고, 영초롱은 제주의 한 부속섬에서 보건소 의사로 일하고 있는 고모에게 맡겨진다. 서울에 남은 사람이, 내년이면 중학교에 입학해야 되는, 게다가 공부까지 잘하는 자신이 아니라 동생이라는게 원망스러웠던 영초롱은 새벽마다 깨어 옥상을 오르내렸다. 그러다가 실수로 발목을 다친 영초롱은, 새로 전학가는 학교에 이 상태로 갈 수 없으니 등교를 미뤄달라고 했고 고모는 그렇게 하라고 한다.

동생 영웅과 통화를 하다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게 된 영초롱은, 우연히 복자를 만나게 된다. 영초롱이 보건소 의사 선생님의 조카라는 걸 알아본 복자는, 섬에 들어와서 할망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서 발목을 다친거라며 영초롱을 할망당으로 데려간다. 성당 고해소도 아니고 신부님도 없는데 뭘 말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댔던 영초롱도 할망당에서 자연스럽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우리집이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24쪽)하며. 그렇게 영초롱과 복자는 가까워진다. 하지만 복자가 따르던 이선 고모와의 일 때문에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되고, 영초롱은 진학 때문에 고고리섬을 떠나게 된다.

말하기 싫은 날들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입을 열어서 공기를 들이쉬고 혀를 움직여 어떤 소리라도 만들어내고 싶지가 않았다. 말은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니까. 복자와 나를 불행으로 몰아넣고 이선 고모와 나의 고모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고 사랑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79쪽

마치 어른들의 감정싸움을 대리하듯이 복자와 나의 관계는 끊임없이 나빠졌다. 그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른들 같은 기만의 기술이 없었고 한 번 받은 상처를 아무렇지 않은 듯 포장하는 기술도 없었다. 잃어버린 친구의 신뢰를 회복할 방법도 알지 못했다. 더이상 이전과 같은 일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98~99쪽

처음에는 석명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보기도 했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 불리한 상황을 소송 당사자들에게 일깨워주는, 판사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상대편 변호사의 항의를 듣거나 지나친 개입이라며 업무상 경고를 받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그 짓도 그만두었다. 결국 분노의 목적과 명분은 사라지고 그냥 분노라는 상태만 남아 활활 탔다. 화는 눈덩이처럼 뭉치고 뭉쳐져서 차가운 불면의 밤이 왔고 병원의 처방약이 없으면 잠들기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위원회에 불려가 그런 소명을 열심히 한 끝에 나는 여기에 서 있는 것이었다. 36~37쪽

영초롱은 판사가 되어 제주도로 돌아온다. 법정에서 욕을 하는 바람에 좌천된 것이다. 제주도로 돌아오 영초롱은 복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다시 만나게 된 복자는 영광의료원과 소송 중이었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복자는 산업재해를 당했고, 의료원과의 소송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복자는 그 소송과는 별개로 그저 친구 영초롱을 보고 싶어했을 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영초롱에게 영광의료원 소송이 배당되었고, 두 사람이 동창인 걸 알게 된 영광의료원 쪽에서 압박이 들어왔다. 복자 또한 영초롱이 회피 신청을 해주길 바랐다. "회피인가 할 수 있다며, 판사가 그렇게 하면 안 맡게 된다며. 나한테 중요한 재판이고, 나도 나지만 여전히 치료비가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래. 우리 재판에서 이겨야 해."(216쪽) 복자는 아마도 소송에 지게 될 경우, 영초롱을 원망하며 지낼 수도 있어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복자의 그런 마음도 모른채 영초롱은 서운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위에서 (영초롱이 닮고 싶어하는) 양선배에게 그 사건을 다시 배당했고, 그 일 때문은 아니지만 영초롱은 법복까지 벗게 된다.

"나? 편지 써."

"누구에게?"

"그냥 친구에게 써."

"뭐라고?"

"안녕하냐고."

"안녕, 이렇게만 적어요?"

"아니, 다른 말들을 길고 길게 쓰다가 마지막에야 그렇게 쓰지. 안녕하냐고, 오늘도 안녕히 있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이상한 방식으로 쓰는 편지였다. 보통은 첫머리에 인사를 넣고 다른 소식들을 적기 시작하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안녕이라는 인사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뜻 아닐까. 그 인사마저 꺼려지고 미안한 마음을 고모가 계속 품고 있었다는 의미 아닐까. 28쪽

고고리섬에서, 영초롱의 고모는 밤마다 타자기로 편지를 썼다. 편지봉투에는 "청주여자 교도소 이규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훗날 법 공부를 하면서 이규정의 판결문을 찾아보게 된 영초롱은 왜 고모가 "안녕"이라는 말을 그렇게 어려워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법복을 벗고 한국을 떠난 영초롱은, 고모처럼 복자에게 편지를 쓴다. 팬데믹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뜨지 않아서 지금 당장은 부칠 수 없지만 곧 부치게 될 편지를.

복자야,

우체통은 시청역 4번 출구 앞에 정말 있어. 거기에 그게 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이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그곳에서 이 편지를 부칠 거야. 그때까지 다만, 요망지게, 안녕해. 237쪽

법정에서 욕까지 하며 열렬하게 판결을 내렸던 영초롱(나는 이 인물이 문학상을 거부하던 작가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다)이, 어떤 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법복을 벗고, 심지어 복자 옆에서 소송을 도와주는게 아니라 한국을 떠나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게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우리에게 "팬데믹"이라는 상황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어떻게 끝맺음 되었을까. 읽고나면 이런 질문들과 여운이 남는 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김금희 스타일"이었다. 우리 삶엔 언제나 드라마틱한 전개란 없으니까,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흘러가는 일들도 많으니까.

마지막 이 편지는 팬데믹 상황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버티고 있는 모든 복자에게, 즉 우리들에게 던지는 안부인사 같기도 하다.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하루가 활기차다고도 했다. 81쪽

책상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잘 안 되면 다 쏟아부어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마음 같은 것. 자주 상처받고 여러 번 실망한 아이가 쉽게 선택하는 타인에 대한 악의. 96쪽

밤의 공중에서 보면 도시는 여름과 겨울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이 도시가 어느 때보다 여름이 창창하다고 내게 말하는 듯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나 얼음을 찾는 승객들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마음이 어떤 때보다도 와글거리기 때문이었다. 많은 기억들이 흔들리고 부유했다. 기억을 되살린다는 건 그렇게 한없이 풍성해지는 일인 듯했다. 통제를 벗어난 많은 것들이 나의 재단을 훼방하고 흐트러뜨려놓는 상태,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름을 닮은 시간들이었다.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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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1-23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열심히 읽고 계시는군요...

keep going ~

뒷북소녀 2020-11-23 15:13   좋아요 1 | URL
요망지게 안녕하시죠? 매냐님에 비하면, 더 열심히 읽고 기록해야죠.^^
 
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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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던 리베카 솔닛의 대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때까지 내가 쓴 예닐곱권의 책들이 다룬 주제는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나는 2003년 그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마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

나는 내게 할당된 배역, 순진한 아가씨라는 배역에 워낙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같은 주제에 관한 다른 책이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그걸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벌써 그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장광설을 펼치는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자신의 권위라는 저 멀고 흐릿한 지평선에 지그시 시선을 고정한 얼굴로.

(…)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은 내가 처음부터 그 정체를 알아차렸어야 마땅한 책에 대해서 거만하게 떠들었고, 보다 못한 쌜리가 끼어들어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니, 끼어들려고 시도는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12~14쪽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간 순서가 바뀌어서 이제야 번역되어 나왔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은 독자라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아마도 궁금했을 것이다.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는 누구인가?

1872년 봄, 머이브리지는 말 한마리의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들은 세상을 바꾸게 될 새로운 예술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가 찍은 이 유명한 사진은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머이브리지가 찍었던 말 옥시덴트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기로 손꼽히는 마차경주마로, 옥시덴트의 마주는 릴런드 스탠퍼드였다. 스탠퍼드는 북미 대륙횡단철도를 기획한 사람 중 한명으로, 그는 철도 사업을 통해 억만장자가 되었다. 스탠퍼드는 "말이 달릴 때 네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머이브리지의 사진이 해결해주리라 기대"(13쪽)하며 머이브리지의 작업을 후원했다. 지금이야 카메라 셔터 한 번만 누르면 사물이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해 빠르게 찍을 수 있지만, 당시만해도 대부분 정적인 사진만 찍을 때라 사진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다. 머이브리지는 여러 시도 끝에 말이 달리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냈고, 그 사진들 속에는 말의 네발이 모두 공중에 떠있는 순간도 있었다. 이후 머이브리지는 움직이는 말 뿐아니라 달리는 사람 등을 찍으며 동작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그의 작업들을 기초로 영화 산업이 싹트게 된다.


머이브리지의 사진과 스탠퍼드의 철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열차를 타거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더욱 가까이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다."(27쪽) 이전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폭발적인 속도를 세상을 둘러볼 수 있었고,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감을 직접 가보거나 체험하지 않더라도 사진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실재보다 어떤 공간 안에서 연출되고 재현된 속도에 더 열광하기도 했다.

훗날 스탠퍼드는 어릴 때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하기도 하는데, 머이브리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사진을 찍느라 함께할 수 없었던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고, 머이브리지는 그 불륜 상대를 죽여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업과 관련해서, 머이브리지는 언제나 독창적으로 방법을 찾아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작업 방식들을 빌려가 머이브리지보다 더 성공하기도 한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존경심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분명한 결점이 있었다. 그는 독점기업과 날강도 같았던 당시 기업가들을 위해 작업했으며 권력에 순종했다─이는 당시 서부의 다른 풍경사진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구할 수 있는 후원자는 돈을 펑펑 쓰는 정부, 그와 동시에 지역을 식민지화하고 정복하는 정부뿐이었다. (232쪽)

예술적인 장점을 평가할 때 작품과 예술가 본인의 사적인 삶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지는 우리 시대의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사의 파편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윤리─물론 이 둘은 절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이다. 예술에는 항상 예술가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머이브리지의 사적인 삶을 대변하는 소외는 그의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독립성은 이단아였던 그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거장다운 명징함은, 재판정에서 드러난 감정에 휩싸인 인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역사의 '위인' 이야기들이 근래에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를 살펴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가 없었다면 영화 매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근원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재능은 다른 데에서도 생겨날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재능을 가진 특정 인물의 흔적은 그렇지 않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이지만, 덕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흘러 다니는 이미지'의 시대를 낳은 완벽한 선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움의 시대, 진부함의 시대, 타락의 시대, 화려한 볼거리와 사악함의 시대,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극적인 성취의 시대 말이다. 1877년, 머이브리지가 플로라도를 개신교 고아 시설에 맡긴 다음 해에 그는 진정 시대의 부모 역할을 맡게 되었다. (233~234쪽)

사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머이브리지가 아니다. 머이브리지와 스탠퍼드로 대표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 특히 서부의 눈부신 발전과 새로운 문화 산업을 잉태하게 했던 당시의 분위기.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당시의 미국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선조' 혹은 '시초'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탠퍼드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탔고, 머이브리지는 그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스탠퍼드는 타고난 사업가이고, 머이브리지는 예술가니까.

『그림자의 강』이 나오기 전부터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는 리베카 솔닛의 주된 관심사였다. (…) 그런 작가에게 머이브리지라는 인물, 서부가 '형성'되던 시기를 말 그대로 관통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던 인물이 눈에 띄었을 것은 자명하다. 머이브리지를 깊이 들여다보자 스탠퍼드가 등장했고, 스탠퍼드는 서던퍼시픽 철도나 그의 이름을 딴 대학과 동의어였다. 그런 다음에는 미국 대륙 횡단열차 건설으 ㅣ이면에서 잊혔던 아메리카원주민과 중국인들의 존재가 드러났고,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 이념이 어덯게 현재의 실리콘밸리를 낳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책이 담겨 있다.

사진의 역사에 대한 책은 많다. 캘리포니아를 소개하는 책은 더 많고, 철도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책도 이미 다수 나와 있다. 하지만 그 세 가지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서로를 어떻게 가능하게 했는지 전하는 책으로는 솔닛의 『그림자의 강』이 유일해 보인다. 그 결과 철도와 사진과 캘리포니아는 각각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서로 엉키며 19세기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솔닛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삶의 조건들에 머이브리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의 아내 플로라가 어떻게 대응했고 아메리카원주민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기술의 발전과 세계관의 변화라는, 자칫 공허한 담론이 되어버릴 수 있는 주제를 삶의 단계로 내려온 '이야기'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398~399쪽

나에게도 중요한 것은 머이브리지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단순히 '리베카 솔닛'이라는 저자의 명성 때문에 선택했고, 역자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솔닛의 '연구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역작"(398쪽)이라고 평을 했지만 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모임에서 만났던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과 같은 실수를 내가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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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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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소설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1790~1793) 중에서 「지옥의 격언」(1793)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토카르추크는 이 제목을 놓고, 편집자와 논쟁을 벌인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길고, 발음하기 힘든 데다 기괴한 제목이라 판매에 지장을 초래할 게 뻔하다며 출판사 측에서 완강히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제목을 고수한 이유에 대해 토카르추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너무 아름다운 시구(詩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한 줄의 문장이 바로 작품의 모토(motto)이자 메시지이고, 상징이자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 379~380쪽

편집자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이 기괴한 제목이 나를 끌어 당겼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소설이면 이렇게 고딕한 제목을 붙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두셰이코는 체코의 통신 주파수가 더 잘 잡히는 폴란드의 어느 산간 마을에서, 혹독한 겨울을 피해 마을을 떠난 사람들을 대신해 집을 관리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오직 이웃인 '괴짜'와 다른 집들보다 조금 높은 곳의 오두막에 사는 '왕발'과 두셰이코만이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곳에서 지냈다. 그런데 한밤중에 '괴짜'가 찾아와서 '왕발'이 죽었다고 한다. 체코의 통신 주파수가 잡히는 바람에 경찰에 빨리 신고할 수 없었던 그들은, 처참하게 죽은 '왕발'의 몸을 정돈하면서 '왕발'이 자신이 사냥한 사슴의 고기를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이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도 여기저기 사슴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그런데 늦게 도착한 경찰은 눈 때문에 사라진 사슴의 발자국을 보지 못했다.)

"그자는 자기가 밀렵해서 잡아먹은 사슴의 뼈에 질식당한 거예요. 무덤 너머의 복수인 거죠." 63쪽 두셰이코는 '괴짜'의 아들이자 '검정 코트'를 입은 지방 검사에게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검정 코트'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는 노인으로 여길 뿐이다. 그녀가 '동물의 복수'를 주장하면서 점성학까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점성학이라니. 심지어 그녀는 점성학을 통해 자신이 죽는 날짜까지 알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를 읊조리며 불길한 미래를 예감한다.

"나이 든 여성분들은 왜 그렇게 동물에 대해 신경을 쓰는지 말이죠. 혹시 자식들이 이미 다 장성했기 때문에 보살피고 돌볼 대상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요? 본능적으로 자꾸만 대체할 대상을 찾는 거죠." 159쪽

겨울을 피해 떠났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온 이후에도 죽음은 계속되었다. 사냥꾼이 죽었고, 그들의 사냥을 합법적으로 눈감아 준 경찰서장이 죽었다. 그들의 죽음 근처에서는 늘 동물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동물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거야. 이건 그렇게 괴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동물들은 강하고 지혜로워."(113쪽)

평소 그녀는 사람들이 동물 사냥을 하는 것에 대해 행정기관에 민원을 넣거나 그런 행위들을 고발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합법적으로 동물 사냥을 한다며 그녀를 미친 늙은이 취급했다. 게다가 그즈음 그녀가 딸처럼 키우던 개 두 마리가 사라졌다. 그녀는 사냥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은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마치 범죄 스릴러처럼. 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범인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다. 바로 작가가 주구장창 강조하고 있는 그녀의 신념과 가치관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동물 학대, 사냥, 동물을 먹는 것 등에 한결같이 목소리를 내왔고, 두셰이코는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인물이다.

두셰이코는 자신이 사냥한 사슴을 먹다가 죽은 '왕발'을 보면서 생각했다. '왕발'의 집 밖에서 마주친 사슴들이 그녀가 "사슴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심판해 주기를 원했다"(348쪽)고. 그들에게는 다른 발언권이 없으므로, 고기를 먹지 않는 자신이 그들로부터 선택 받았으며 그들의 복수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이 모든 게 동물의 복수라고 계속 주장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게 바로 진실이었다. 난 그들의 도구였다." (357쪽) 그렇게 두셰이코의 살인은 시작되었다.

동물들이 아니라 동물들의 계시를 받은 두셰이코가 직접 살인을 했다는 사실, 게다가 죄를 받는 대신 유일한 친구 '왕발'과 '기쁜 소식'의 도움으로 두셰이코가 무사히 체코에 도착하는 결말은 동물을 먹는 것조차 꺼려하는 작가의 행보와 다소 상충하는 장면이라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사실적인 묘사와 문체들은, 스웨덴 한림원이 왜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그녀를 선택했는지 보여준다.

왕발의 죽음이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를 혼란스러운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을 그의 해코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니까. 그렇다, 갑자기 나는 죽음이 살균제나 진공청소기와 마찬가지로 정의롭고 유익한 것임을 깨달았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8쪽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148쪽

"사실 인간은 동물이 그들의 고유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가축들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애정을 돌려주는 건 인간의 의무입니다. (…) 인간이 동물을 지옥으로 내모는 순간,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합니다. 왜 다들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어째서 인간의 이성은 사소하고 이기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156쪽

세상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의 편안함이나 쾌락을 위해서 창조된 건 더더욱 아니다. 168쪽

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은 만천하에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곤충의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222쪽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어요. 더 다정하고 현명하고 쾌활했죠 …….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생명체가 아닌 물건인 양 취급하죠." 282쪽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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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 라이브 앨범 KIMDONGRYUL LIVE 2019 오래된 노래 [2CD]
김동률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작년 콘서트 때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라이브 앨범.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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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 라이브 앨범 KIMDONGRYUL LIVE 2019 오래된 노래 [2CD]
김동률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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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 오픈되자마자 예약주문 해놓고 배송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눈 빠지는 줄 알았다.

예판 기간 중에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품절 됐었는데,

다행히 일찍 주문한 덕분에 출시되자마자 바로 받았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콘서트도 없을텐데, 라이브 앨범이 있어서 정말 다행인듯.

들을수록 작년 콘서트 때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LP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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