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연필을 씁니다 - 젊은 창작자들의 연필 예찬
태재 외 지음 / 자그마치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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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몽당연필에 대한 로망

여전히 연필을 쓴다. 연필이 좋아서 연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몽당연필이 갖고 싶어서 연필을 쓴다. 투병한 유리병에 몽당연필을 차곡차곡 넣어 책장 위에 올려두고 싶다.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를 읽으면서 나처럼 몽당연필에 대한 로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몽당연필 만들기 동호회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유리병에 차곡차곡 모으기는커녕 몽당연필을 한 자루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일 년 내내 쓰고 깎아도 한 자루도 만들 수 없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거나 책에 살짝 메모하는 용도로만 연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몽당연필이 갖고 싶어서 일부러 쓰임새를 찾아낸 것이다. (덕분에 애정 했던 마일드라이너는 안녕히!)

상상해 본다. 내가 쓴 몽당연필을 모아 놓는 상상을.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 내 서랍을 열었을 때, 그 속에는 몽당연필 몇 자루도 남겨 놓고 싶다. 나의 노력을 은근하게 과시하고 싶다. 20쪽, 태재

하나 사면 한참을 쓴다. 몽당연필을 만들려고 억지로 깎을 정도다. 아, 뾰족한 심을 좋아해서 매번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쓰는 분들은 금방 닳을 수도 있겠다. 나는 뭉툭하게 닳은 연필도 좋아하는 편이라 연필을 많이 사용하지만 소비가 정말 더디다. 일 년에 몽당연필을 세 자루 정도 만들어 내는 듯하다. 얼른 몽당연필들을 모아서 투명한 유리병에 보관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연필이 잘 줄어들지 않는다. 160쪽, 펜크래프트



일 년에 한 자루도 만들기 어려운 몽당연필. 이 정도 속도라면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몽당연필은커녕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연필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미술관을 가면 굿즈로 연필을 사는 버릇이 있어서 몸값 비싼 연필들도 꽤 많다.

조급한 마음에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얼마나 작아져야 몽당연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기부나 나눔 같은 것을 할 때 7cm 이하의 연필은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7cm? 아니 이건 너무 긴 것 같고 5cm? 연필 깎이로 연필을 깎는 나는 더 이상 연필 깎이로 깎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몽당연필이라 부르기로 했다.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는 시인, 만화가, 에디터, 에세이스트, 유튜브 크리에이터, 작곡가, 디자이너 등 연필과 일상이 맞닿아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좋았던 이야기는 손글씨 크리에이터 펜크래프트의 연필로 필사하는 이야기와 연남동에서 작은 연필 가게 '흑심'을 운영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연필 이야기였다. '흑심' 디자이너들은 연필을 팔 때, 단순히 오래된 연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왜 연필을 파는지, 이 연필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 함께 소개해 준다고 한다. 연필에 숨겨진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는 따로 한 권의 책으로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끼는 무언가를 사용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 중 하나다. 더군다나 연필은 점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더 아까운 마음이 든다. 연필을 수 천 자루 모은 우리도 아끼는 연필은 아직 선뜻 쓰지 못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일을 할 때나 소중한 글을 적을 때는 아끼는 연필로 써 보길 추천한다. 쓰면 더 소중해지기도 하니까. 물론 안 써도 좋다. 그 연필이 10년 뒤 또는 20년 뒤에 누구에게 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는 쓰지 않고 간직해 준 덕분에 우리도 이 소중하고 오래된 연필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도 우리는 오래된 연필에 환호한다. 194쪽, 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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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꿈 열린책들 세계문학 12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종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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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도끼 책을 원한다면 이 책으로!

도스토옙스키는 24세 때인 1845년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벨린스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하지만 이내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적 사상을 옹호하고 당대 러시아 상황에 대한 비판적 모임이었던 뻬뜨라셰프스끼 서클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창작 활동은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기준으로 초기ㅡ중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아저씨의 꿈』은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로 유배를 다녀온 뒤 처음으로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 중기 창작 활동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아저씨의 꿈』은 허영심도 많고 말도 많지만 수완 역시 좋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모스깔료바가 자신의 딸 지나를 쇠약한 K 공작에게 시집보내려는 계획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담고 있다. 지나에게 구혼 중인 모즈글랴꼬프는 마리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차 사고를 당한 K 공작을 친척 집 대신 마리야의 집으로 모셔온다.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K 공작은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고 기억력과 판단력 또한 흐려진 상태다. 마리야는 폐병에 걸려 병석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가정교사에게 마음을 뺏긴 지나에게 K 공작과 결혼하라고 설득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입도 뻥긋 못하게 했던 지나는 자신이 부유한 공작의 미망인이 된다면 가정교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결국 승낙하고 만다. 수완 좋은 마리야는 K 공작 역시 잔뜩 술이 취한 상태에서 지나에게 청혼을 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를 모두 엿듣게 된 모즈글랴꼬프는 잠에서 깨어난 K 공작(사실 모즈글랴꼬프의 아저씨뻘쯤 된다.)에게 그것은 '꿈'이었다고 말한다. K 공작 역시 나이 어린 지나에게 청혼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아마 꿈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원래 작은 소도시에서는 소문도 빨리 퍼지는 법. 모즈글랴꼬프의 방해로 계획도 들통나고 결혼도 무산된 마리야 일가는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모즈글랴꼬프 역시 취직해 그곳을 떠나게 되는데, 가장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간 곳에서 시장의 아내가 된 지나를 만나게 된다.

불행은 언제나 한 가지만으로 그치는 법이 없는 모양이다. (…) 운명이 한번 어떤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 주면 그 불행의 타격은 끝없이 계속되게 마련이다. 232쪽

한 편의 드라마(혹은 연극)를 보는 것처럼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왜 '아저씨의 꿈'일까? 처음에는 '어머니 마리야의 꿈(신분 상승)'이었다가 '모즈글랴꼬프의 꿈(결혼)' 때문에 결국 '아저씨의 꿈(백일몽)'으로 끝나버리는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그렇게 끝나버리니 '아저씨의 꿈'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텐데, 그렇다면 '지나의 꿈'은 무엇일까? 한때 꿈꿨던 가난한 가정교사와의 사랑이 그의 죽음으로 끝나버리자 결국 체념해 버린 것일까? 정작 본인의 결혼을 두고 가장 목소리가 작았던 지나. 지나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주제의 결이 사뭇 달라 보이는 이 소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평하는데, 그 이유를 다음의 글에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유형 생활을 한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여전히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배 생활을 통해 인간 도스토옙스키도,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모두 성장했다고.

15년 동안 나는 『아저씨의 꿈』을 한 번도 다시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읽어 보니 형편없군요. 나는 당시 출옥한 직후 시베리아에서 이 작품을 썼는데, 그때 유일한 집필 목적은 문학 활동을 개시하는 데 있었고 또한 검열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쩔 수 없이 검열에 걸리지 않을 온건한 작품을 썼던 겁니다. 이 작품은 가벼운 보드빌로 만들 수 있겠지만, 희극을 만들기에는 내용이 부족하며, 이 중편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지한 인물인 공작에게서도 내용은 부족합니다. 283~284쪽,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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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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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이지만 이것 또한 삶이었다!

좋은 작품을 읽은 후에는 리뷰를 쉽게 쓸 수가 없다. 이렇게 좋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좋았다고만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으면서 "초등학생 일기도 아니고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는 없을까?" 이렇게 투덜대곤 했었는데, 지금 되짚어보니 그들도 지금의 나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이 좋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는 1년이 지나도 못 쓸 것 같아서 그냥 편하게 써보기로 한다. 아무튼 이 책의 좋았던 부분을 이 부족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만 유념해 주길 바라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연작소설 『무엇이든 가능하다(2017)』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2016)』과 이어지는 이야기로, 소설 곳곳에 '루시 바턴'을 비롯해 전작에서 언급됐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순서대로 읽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이 책만 따로 떼내어 각각의 단편소설로 읽어도 충분히 매력 있는 책이다. 단,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것.

9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무엇이든 가능하다』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후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과 학대가 평생 흉터처럼 남아있는 사람들. 소도시 특성상 이 정도 근황쯤은 쉽게 알 수 있고, 다른 누군가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소홀하게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을 통해 스트라우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었을 테다. 타인이 멀리서 본 상처와 직접 주인공의 입으로 말하는 상처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과 연대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 때론 그곳 출신인 작가 루시 바턴의 책을 통해서도 위로받곤 한다. 그들은 절망의 순간에도 좌절하기보다는 그 순간에 함께한 친구를 '선물'이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다. 어차피 '삶'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닥친 불행이나 불안을 이해하거나 피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삶을 "살아내는 중"(83쪽)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347쪽)

그 화재는 하느님이 그에게 이 선물을 꼭 간직하고 살아가라고 내려준 계시 같았다. 그 생각을 혼자만 간직한 것은, 비극적인 사건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시」, 12쪽

그는 나이가 들수록ㅡ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ㅡ자신이 선과 악의 이 혼란스러운 다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계시」, 22쪽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ㅡ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ㅡ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계시」, 41쪽

불안은 본래부터 장착되어 있거나 혹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 장착되고, 사람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뿐이라는 사실. 「엄지 치기 이론」, 149쪽

고통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당신은 결코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엄지 치기 이론」, 158쪽

하지만 이것이 삶이었다! 그리고 삶은 엉망이었다! 「미시시피 메리」, 199쪽

언제나처럼 스트라우트의 감정 묘사는 섬세하고 구체적이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이지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있다.

ㅡ 그것은 가려움증과 같아서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228쪽

ㅡ 행복감이 따뜻한 액체처럼 몸속을 도는 것이 느껴졌다. 230쪽

ㅡ 뚜렷한 이유 없이, 어쩌면 바로 그 순간 견목 바닥 위로 해가 비스듬히 들어왔다는 것 이상의 이유는 없이, 불현듯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기억이 도티를 찾아왔다. 262쪽

이런 섬세한 감정 묘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처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최근 나의 최애 작가로 급부상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2016)』과 이어지는 이야기인 걸 알면서도 제목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니, 이런 세계관은 정말 질색이다. 표지 또한 그런 느낌이라서 더더욱 손이 가지 않았다. 원제 역시 그랬으니 제목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고, 제발 나처럼 제목 때문에 이 책을 기피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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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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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질문일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가장 먼저 가치 있는 답변을 들려준 사람은 찰스 다윈이다. 그는 '진화론'으로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다윈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논점에 대하여 진화론이 초래하는 결과를 두루 살펴보기 위해"(46쪽) 『이기적 유전자』를 썼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46쪽)이다.

나는 선택의 기본 단위, 즉 이기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52쪽

리처드 도킨스는 일반적인 다윈주의자들과는 달리 종(또는 집단)이 아닌 유전자의 관점에서 진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진화가 종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 다윈주의자들의 가정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진화는,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 진행되며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그저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일 뿐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한 운반자, 생존 기계라는 것이다.

40억 년 전 스스로 복제 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다. 이 고대 자기 복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것들은 절멸하지 않고 생존 기술의 명수가 됐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자유로이 뽐내고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것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 지어 마치 뒤뚱거리며 걷는 로봇 안에 안전하게 들어있다. 그것들은 절멸하지 않고 생존 기술의 명수가 됐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자유로이 뽐내고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것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 지어 마치 뒤뚱거리며 걷는 로봇 안에 안전하게 들어있다. 그것들은 원격 조종으로 외계를 교묘하게 다루고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것들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전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짜 넣은 로봇 기계이다. 이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 뿐만 아니라 세대 간 그리고 암수 간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볼 수 있다.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며,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물의 이기적 행동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옮긴이의 말」, 5~6쪽

그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혈연 선택, 가족 계획, 세대 및 암수 간의 전쟁 등을 예로 든다. 특히, '근연도'라는 개념을 통해 가족 내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근연도'란 두 사람의 혈연자가 1개의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을 나타내는 지표인데, 부모와 자식 간의 근연도는 언제나 반드시 1/2이다. 형제자매 역시 부모와 똑같은 1/2이다. 따라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형제자매 간의 관계에 비해 '유전적'으로 더 특별할 것은 없다"(174쪽)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말해, 부모의 자식 돌보기와 형제자매의 이타주의가 진화할 수 있는 이유는 똑같다."(175쪽)

이런 식으로 유전자는 다른 개체(자식, 형제자매와 같은 혈연관계) 내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자신의 복사본을 돕기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복사본을 늘리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결국은 유전자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인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타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단순히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기계이자 운반자라는 이론은 우리를 허무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단 말인가? 겨우 인간의 존재 이유가 그것뿐이란 말인가?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는 '밈(meme)'이라는 새로운 자기 복제자를 통한 진화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유전자에 의한 진화는 여러 종류의 진화 중 하나일 뿐이며, 다른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에게는 문화적 진화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복제자인 '밈(meme)'은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로,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gene)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단어다. 그에 따르면, 느리게 진행되는 유전적 전달과 달리 문화적 전달은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며, 유전자 전달이 '모 아니면 도'의 성질을 가졌다면 밈의 전달은 연속적인 돌연변이를 거치며 다른 것과 혼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를 보강하지만 때로는 대립하기도 한다.

밈의 대표적인 예로 '신'을 들 수 있다. "이는 마치 의사가 처방하는 위약과 같이 상상을 통해 그 효력을 갖는다. 이것이 신의 관념이 세대를 거쳐 사람의 뇌에 그렇게 쉽게 복사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재한다."(324쪽)

밈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진화는 유전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진화로도 바꿀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 책의 결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41쪽)는 그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또 다른 저서인 『확장된 표현형』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에서 제2판을 인쇄하면서 추가된 부분으로, 작가가 쓴 책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과학자이면서 탁월한 마케터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을 '불멸의 유전자'나 '이타적인 운반자', '협력적 유전자'가 아닌 『이기적 유전자』로 정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3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그는 내용은 수정할 부분이 없지만, 오해를 살 수 있는 제목은 수정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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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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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난하다 가난하다 해도 어쩌면 그렇게도 가난한지, 세상에! 31쪽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은 1846년에 발표한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가난한 관리인 마까르는 하숙집 부엌 한쪽에 있는 칸막이 방에 거주하고 있다. 이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고 시끄러운 방이지만, 장점이 있다면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바렌까의 방이 보인다는 것. 먼 친척 사이인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주고받는데, 그 편지 속에는 자신들과 주변 사람들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17살 때 근무를 시작해서 근속 30년째인 마까르(알렉세예비치 제부쉬낀)는 러시아 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관리의 전형이다. 9등문관인 그는 '각하'의 문서를 정서하고 있지만, 승진은커녕 직장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가난'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의 유일한 낙은 먼 친척 아가씨인 바렌까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는 돈이 생길 때마다 바렌까에게 보내거나 선물을 보냈다. 나이 많은 자신이 바렌까와 함께 있으면 바렌까에게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 봐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은 절대 방문하지 않았는데, 하숙집에서 그만 그 편지가 발각되어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만다.

12세 때 뻬쩨르부르그로 이사 온 바렌까(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척 아주머니인 안나 표도로브나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 집에는 뽀끄로프스끼라는 대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숙비 대신 바렌까와 사촌동생 사샤를 가르쳤다. 바렌까를 늘 어린애 취급했던 뽀끄로프스끼, 바렌까는 그의 생각을 바꾸려면 그가 읽고 있는 책을 자신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렌까 어머니의 병간호와 책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 그러나 갑작스럽게 뽀끄로프스끼가 죽고 만다. 바렌까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안나 표도로브나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샤와 바렌까를 망가뜨리려 하자 바렌까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다.

그러나 이사 온 바렌까의 집으로 비꼬프 씨가 1년 만에 찾아와 지난 일은 모두 안나 표도로브나가 나쁜 마음을 먹고 한 짓임을 알았다며 느닷없이 그녀에게 청혼한다. 놀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 상황(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왜 바렌까는 마까르를 선택하지 않았나?

당신은 제가 쏟아 낸 감정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셨더라고요. 제가 느끼는 감정은 부성애입니다. 순수한 부성애 말입니다,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서러운 고아 신세인 당신에게 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모두 제 진심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혈육의 정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어찌 됐건 저는 당신의 먼 친척입니다. <사돈의 팔촌>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쨌든 친척은 친척이죠. 게다가 지금의 당신에겐 제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고 보호자 아닙니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배신감과 분노만 느꼈지요. 21~22쪽

비록 마까르가 바렌까보다 나이가 많고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그녀를 아끼는 마음이 크다면 돈만 생각하는 비꼬프 씨 대신 그와 결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바렌까는 마까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마까르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가난'했던 게 아니라 정신적(문학적)으로도 빈곤했던 사람이다. 마까르와 바렌까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었던 것은 정신적(문학적)인 면에서의 간극 탓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바렌까가 사랑(동경) 했던 뽀끄로프스끼는 늘 책을 가까이했고, 뿌쉬낀과 같은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반면 마까르는 바렌까가 읽어보라고 한 고골의 「외투」마저 형편없다고 비난하며 저급한 연애 소설만 읽었고, 바렌까에게 쓴 편지의 문장조차 두서없었다. 마까르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편지를 주고받고, 그녀에게 (작지만)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서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늘 마까르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마까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바렌까,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발닦개만도 못한 인생이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3류 작가들의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은 모두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죠. 그들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것도 있어서는 안 되고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풍자 작가들은 여기저기 살피고 다니면서 이런 말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 발바닥을 전부 땅에 대고 걷나, 아니면 까치걸음을 하나?> 혹은 <어떤 관청에 다니는 9등 문관 아무개 관리는 신발 밖으로 맨 발가락이 비어져 나왔네. 팔꿈치도 다 해져서 구멍이 났잖아>. 그들은 자기 글에 이런 것을 묘사해 넣고 쓰레기만도 못한 것을 책이랍시고 찍어 낸단 말입니다…… 129~131쪽

도대체 그런 글은 왜 쓴답니까? 그런 게 왜 필요하대요? 이런 책이 나오면 독자 중 누군가가 외투라도 하나 장만해 준답니까? 새 신발이라도 사준대요? (…) 그런데 이 소설이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죠? 뭐가 잘됐다는 거예요?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생활에서 시시하고 공허한 한 단면만 썼을 뿐이잖아요. 도대체 당신은 이렇게 이런 책을 저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바렌까, 이건 몹쓸 책이에요.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요. 그런 관리는 있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이런 책은 읽고 나서 반드시 불만을 얘기해야 합니다, 바렌까. 정식으로 항의해야 해요. 117~119쪽

고골의 「외투」에 등장하는 관리 '아까끼'와 마까르는 닮았다. 만년 9등 문관으로 정서 업무를 하고 있고, '외투' 하나 사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 아니 아까끼보다 마까르가 더 가난하다. 마까르가 이토록 고골을 비난한 이유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고골의 소설을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 몹쓸 책이라고 비난하면서 현실성이 결여된 연애소설만 읽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걸작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사관학교에 다니면서 학과 공부보다 문학에 더 열중합니다. 틈틈이 프랑스 소설을 읽고 습작을 하던 시기에 쓴 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리고로비치라는 친구에게 읽어주고, 이 친구가 당시 『동시대인』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던 시인 네크라소프에게 보여줍니다. 네크라소프가 다시 그 길로 당시 최고의 비평가인 벨린스키에게 달려가 작품을 보여주자 벨린스키가 격찬을 하죠. 그래서 네크라소프와 벨린스키가 한밤중에 무명의 작가 지망생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와서 "자네가 도대체 무슨 작품을 썼는지 알고나 있나?" 하고 감격해 서로 껴안고 했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두고두고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가장 우쭐했던 시절이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야말로 비존재였는데 당대 최고의 시인과 비평가가 찾아와서 "자네가 쓴 것은 걸작이야"라고 했으니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겠죠.

하지만 그 좋은 시절은 얼마 못 갑니다. 지나치게 우쭐해서 자신이 대작가라도 된 양 거만하게 행세하는 바람에 벨린스키와 투르게네프가 절도 없는 생활을 비난하고 나설 정도였습니다.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 19세기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193쪽

문학이란 정말 좋은 것이더군요. 정말 굉장해요. 문학이란 정말 심오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하고, 그리고 또 저기…… 아무튼 문학 속에는 그런 다양한 이야기가 씌어 있어요. 정말 훌륭합니다! 문학은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그림 같고 또 거울 같기도 합니다.(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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