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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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 본성은 어두운가? 진실은 소설과 정반대였다!

만약 어린 소년들이 어른 한 명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원자 폭탄이 떨어지고 전쟁이 한창일 때, 비행기 한 대가 적군에게 공격받아 태평양의 무인도에 추락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다섯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영국 소년들뿐이다. 자신들이 무인도에 떨어졌다는 것과 어른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인식한 소년들은 소라를 불어서 아이들을 모은 금발의 소년 랠프를 대장으로 선출한다.

랠프는 그들만의 규칙을 만든다. 어른들이 찾아올 때까지 신나게 놀 것. 단, 어른들이 발견할 수 있게 봉화를 올리고 소라를 가진 사람에게 발언권을 줄 것. 이것이 그들의 규칙이다. 처음에는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기도 하고, 당번일 때는 열심히 봉화를 피웠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잭이 사냥 팀도 꾸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내 해야 하는 일은 잊은 채 놀기만 한다. 배가 지나갈 때 봉화가 꺼져 있어서 구조 요청을 할 기회도 놓쳐 버린다. 아이들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랠프와 안경 쓴 '돼지'(피기)는 규칙을 지키길 원했지만, 잭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점점 더 난폭해진다. 처음에는 멧돼지조차 죽이지 못했던 아이들인데, 급기야 동료에게까지 폭력과 고문을 가하고 '돼지'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 소년은 모두 잭이 어째서 죽이지 않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칼을 내리쳐서 산 짐승의 살을 베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용솟음칠 피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43쪽

한편 아이들은 숲속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공포에 떨기도 한다. 그곳에 무서운 짐승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몰랐다. 어두운 곳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가 짐승이 아닌 인간의 본성의 어두운 면이라는 것을.

그렇게 몇 주가 흐른 뒤, 아이들이 피운 연기를 보고 무인도에 도착한 해군 장교는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 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 …… 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302쪽

이것은 윌리엄 골딩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소년들은 아직 덜 문명화된 인간이다. 랠프, '돼지', 잭은 각각 사회적 위치, 지식, 힘을 상징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결국 잭이 승리했다는 것은, 문명화되지 않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는 힘, 즉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려 했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진실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휴먼카인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할 때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라며, 이 소설을 반박하기 위해 실제 사례를 찾는다. 그리고 찾아냈다. 소설 속 소년들처럼 아타섬이라는 무인도에서 발견된 소년들은 규칙을 만들고 서로 협력하며 지냈다. 소년들은 1년 이상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살폈고, 다투는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화해시켰다. 심지어 다른 소년이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절벽 아래로 내려가 소년을 구하고 부목을 대 뼈가 잘 붙도록 해주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지만 무엇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우리 본성은 윌리엄 골딩이 말하는 것처럼 어둡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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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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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인가?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났는가? 반대로 악하게 태어났는가? 우리 본성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굳이 나누자면)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홉스는 인간을 자연 상태로 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므로, '리바이어던'을 통해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반면 루소는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났는데, 문명의 발전과 사회제도 때문에 악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시작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나의 탐구'는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거쳐 『휴먼카인드』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책들은 (극단적을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휴먼카인드』만이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저자 브레흐만 역시 "이 책은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휴먼카인드』는 우리 인간이 친절하다고 말하는 책이다. 브레흐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났지만 어떤 사회적인 요인들로 인해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면, 즉 폭력성이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브레흐만은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와 문학 작품들, 여러 사건들을 분석하며 말 그대로 '펙트'를 바로 잡아준다.

『파리대왕』 : 과연 인간 본성은 어두운가? 진실은 소설과 정반대였다!

만약 어린 소년들이 어른 한 명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까? 『파리대왕』은 윌리엄 골딩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려 했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진실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브레흐만은 의문을 품었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할 때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라며 이 소설을 반박하기 이해 실제 사례를 찾는다. 소설 속 소년들처럼 아타섬이라는 무인도에서 발견된 소년들은 규칙을 만들고 서로 협력하며 지냈다. 소년들은 1년 이상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살폈고, 다투는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화해시켰다. 심지어 다른 소년이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절벽 아래로 내려가 소년을 구하고 부목을 대 뼈가 잘 붙도록 해주었다.

언론이 만든 방관자 효과

'방관자 효과'로 널리 알려진(나 역시 저널리즘 전공시간에 배웠었다.) 캐서린 제노비스의 이야기도 반박하고 있다. 뉴욕의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제노비스는 칼에 찔려 죽었다.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목격자들이 38명이나 있었지만 아무도 범인을 쫓겨나 신고하지 않고 제노비스가 그대로 죽게 내버려뒀던 사건, 사람들은 38명의 방관자들 때문에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는 달리, 신고한 사람이 여럿 있었고 경찰로부터 이미 신고 전화를 받았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오지 않았다. 신고를 했는데도 경찰이 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살인사건이 아닌 취객의 주정이나 부부싸움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언론에서 부각되었던 측면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폭격을 받으면 사람들이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일상생활을 이어갔던 사람들(하지만 폭격을 가했던 사람들은 진실을 보려하지 않고 의미없는 공습을 계속 가했다.), 배가 침몰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 브레흐만은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며 우리 인간의 본성에는 선함이 있다,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친절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휴먼카인드』는 같은 연구자료를 두고도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자신이 원하는 연구 결과를 얻기 위해 조작하거나 유도했기 때문이라며 그 실체를 과감하게 보여준다.

진상을 모르는 냉소주의자가 아닌 새로운 현실주의자가 되라!

브레흐만은 우리에게 당부한다. 진상을 모르는 냉소주의자가 아닌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새로운 현실주의자'가 되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인 행성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의 본성에 충실하고 타인에게 우리의 신뢰를 보여주어라고 말이다. 우리는 가장 우호적인 존재로 태어난, 유아적인(귀여움) 외모로 진화한 호모 퍼피니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브레흐만이 "사람들은 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자가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냥 '선하다'라고 옮겼을 뿐, 사실 저자가 의미하는 것은 "내심으로는 상당히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친절하며 선의를 지니고 있다"에 가깝다.

매일매일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뉴스를 접하고 있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리고 기대고 싶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친절한 선의"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사상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앞서 읽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책들은 과학자가 쓴 책이어서, 그런 책들과 비교하면 조금 가볍지 않을까 하는 깊이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휴먼카인드』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장점을 잘 살려 쓴 책으로,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사례들에 대한 펙트 체크 중심의 글쓰기가 흥미롭다.

브레흐만은 우정과 친절, 협력과 연민이 얼마든지 전염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우리가 본성으로 가진 선함을 믿고, 예외적인 사건을 과장하는 뉴스에 휘둘리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더 나은 휴먼카인드가 된다고 주장한다. 13쪽

그는 낙관적인 세계를 이끌 희망의 단초가 우리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판단은 여전히 독자들이 몫이기에, 이 책을 포함해 폭넓은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인간관을 만들어보길 권한다. 14쪽

우리는 뉴스가 스포트라이트처럼 작동하는 것을 보았다. 공감이 특정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오도하는 것처럼 뉴스도 예외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속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더 나은 세상은 더 많은 공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덜 용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해자와 더 많이 동일시할수록 적에 대해 더 일반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소수에게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적의 관점은 보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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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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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의 '이선 프롬'을 만나다!

작가 이디스 워튼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와 썰매가 떠오른다. 대부분 원제 그대로 『이선 프롬(Ethan Frome)』이라는 제목을 번역본에 붙였지만 유독 한 번역가만이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보통은 원제 그대로 따른 제목을 좋아하지만, 이 소설만큼은 이 제목이 더 좋다. 소설의 분위기와 주인공(이선 프롬)의 상황을 아주 잘 표현해 주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역해서 제목을 붙이는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번역했을 때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김욱동 번역가도 최근에 다시 낸 책은 원제 그대로의 제목을 붙였다. 나의 『그 겨울의 끝』이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푹푹 찌는 여름이 왔다. 바깥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든 계절, 나에게 언제나 겨울 작가로 각인되어 있었던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어떨까? 왠지 청량할 것만 같아서 책을 펼쳐 들었는데, 그곳에는 숨 막히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마을이라니. 하지만 계절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장은 정말 좋았다.

6월의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봄처럼 투명한 하늘이 마을의 지붕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목초지와 낙엽송 숲에 은빛 햇살을 퍼부었다. 산들바람 한 줄기가 언덕 등성이에 걸린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불어와 들판을 가로질러 풀이 우거진 노스도머 거리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몰고 갔다. 이 마을은 지대가 높고 탁 트인 곳에 자리 잡아 좀 더 아늑한 뉴잉글랜드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리 연못 주변의 수양버들 덤불과 해처드 부인네 문 앞에 있는 노르웨이 전나무들이 그나마 유일하게 길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길은 로열 변호사의 집과 마을의 다른 쪽 끄트머리에 있는 교회 위쪽에서 시작해 공동묘지를 둘러싼 검은 솔송나무 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6월의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길거리를 따라 내려가며 해처드 부인네 전나무 가장자리를 애처롭게 흔들더니, 그 아래를 막 지나가고 있는 젊은이의 밀짚모자를 낚아채어 길 맞은편 오리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6~7쪽

해처드 기념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채리티 로열. 변호사 로열 씨는 그녀를 '산'에서 데려와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산'은 더러운 오점 같은 곳으로, 이 '산'에는 마을에서 죄를 저지르거나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도망쳐 간 곳, 무법자들이 사는 이상야릇한 곳이다. 술주정뱅이 범죄자인 채리티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자 변호사인 로열 씨에게 채리티를 '산'에서 데려가 키워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채리티를 서슴없이 내어주었다. 로열 씨는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아이를 내어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채리티는 자신이 '산' 출신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해한다. 이렇게 채리티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로열 씨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채리티에게 청혼하자 채리티는 로열 씨를 경멸하며 거절한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6월, 마을에 '하니'라는 청년이 나타난다. 그는 해처드 부인의 사촌 동생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가 채리티를 만나게 된다. 소문 때문에 '도시 청년과 놀아나는' 것을 걱정하는 채리티, 하지만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소문을 걱정한 로열 씨가 두 사람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하고, 또다시 청혼을 하자 채리티는 로열 씨의 집을 나온다. 채리티를 찾아 나선 하니의 설득으로 채리티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로열 씨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긴다.

이 정도 되면 결혼을 생각해야 할 텐데,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로열 씨가 추궁하자 그제서야 채리티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하니. 하니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채리티와 결혼하겠다고 하지만, 하니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해버린 하니의 아이를 임신한 채리티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또다시 '산'으로 향한다. 그곳이라면 하니의 아이를 낳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채리티가 도착한 날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고, 채리티는 자신을 데리러 온 로열 씨와 결혼한다. 결혼한 그날, 로열 씨는 자신과 함께 있으면 채리티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잠들지 않고 침대 끝에서 불편하게 잠든다. 계절은 이미 가을이었다. 그 여름의 일들은 이렇게 끝나버렸다.

"이 마을에서는 무엇이 되려고 애써봐야 모두 헛수고란 말이야." 채리티는 『이선 프롬』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이곳의 무더운 날씨도 그녀의 무기력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이디스 워튼이 54세 때 쓴 소설로, 미국 문단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초여름에 시작되어 한여름 내내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 가을이 되어서는 이내 식어버린 사랑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성장 소설'로 읽히지는 않는다. 후견인의 청혼을 당돌하게 거절하는 채리티를 보며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뭔가를 이루겠구나 예상했는데, 결국 혼자서는 헤쳐나가지 못하고 로열 씨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 시대에 순응하며 끝나는 결말이 아쉬웠다.

그렇다면 과연 채리티가 로열 씨의 결혼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만약 임신하지 않았다 해도 채리티는 결혼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평생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혹시 앞으로 태어날 아이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지는 않을까? 오늘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품 해설」,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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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미술사 - 현대 미술의 거장을 탄생시킨 매혹의 순간들
서배스천 스미 지음, 김강희.박성혜 옮김 / 앵글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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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아내>, 1868-1869


질투는 예술가의 힘! 그들을 거장으로 성장시킨 라이벌들

이 그림은 1868년 에드가 드가가 절친 에두아르 마네 부부에게 선물한 부부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드가는 마네의 아내 수잔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황톳빛 벽 뒤로 숨긴 것일까? 아니면 캔버스가 변색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그림의 오른쪽, 그러니까 황톳빛 벽처럼 보이는 부분은 사실 그림에서 잘려나간 부분이다. 마네의 작업실을 방문한 드가는 누군가 칼로 그림을 잘라냈고, 게다가 칼날이 수잔의 얼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림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드가는 마네가 자신에게 준 정물화를 마네에게 돌려보낸다. 드가의 그림을 훼손한 범인은 다름 아닌 마네였던 것이다.

마네는 왜 수잔의 얼굴을 칼로 잘라낸 것일까?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수잔은 남편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마네의 표정을 볼 수 있다. 마네의 시큰둥한 태도와 불만 가득한 표정, 아마도 마네는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켜버려서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얼굴을 칼로 그어버려야 했던 게 아닐까? 본인 입으로는 수잔의 얼굴을 만족스럽지 않게 그려서 잘라냈다고 했지만, 수잔의 초상화를 자주 그린 자신보다 드가가 훨씬 더 잘 표현했기 때문은 아닐까?

마네는 매력적이었고 온화했으며 대담했다. 사람들은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는데 드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상화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7년간 드가는 마네와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다. 하지만 드가로서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만큼 마네를 알아갈 기회가 그때까지 없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초상화 모델이 되어달라고 마네에게 부탁한 것도 어쩌면 조용히 경쟁적이던 우정 관계를 다지기 위한 방법, 또 누구보다 사교적인 사람이었던 마네의 보다 내밀한 삶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기 위한 방법이었을 수 있다. 39쪽

드가의 초상화에 대해 마네가 화가 났다면 그것은 아마도 초상화를 훼손한 이유로 드는, 즉 수잔을 돋보이게 그리지 않았다는 미온적이고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최고조로 늘어난 위협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간단히 말해 드가가 마네의 결혼 생활, 그리고 그 속에 감춰둔 비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마네가 그 그림을 칼로 그어버린 데는 어쩌면 자신과 모리조 간의 미묘한 상황 속으로 불쑥 침입한 드가에 대한 분노가 일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런던 여행을 제안했다가 불발되었을 때부터 높아졌던, 그러니까 드가가 더 이상 제자나 동료가 아닌 진정한 라이벌이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근원적 의심이 마네를 자극한 것일 수도 있다. 마네가 수렁으로 빠져드는 동안에도 왕성히 나아가던 존재, 그게 드가였다. 게다가 드가는 마네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고, 지나치게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마네의 인생에서 매우 중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결혼 생활에서 비롯된 좌절감이 마네의 분노에 불을 지폈을 수도 있다. 마네가 칼로 잘라낸 건 결국 수잔으로 특정되는 부분이었다. 드가의 초상화가 우울한 그 무엇, 대충 꿰맞춘 무언가를 떠오르게 만듦으로써 두 사람의 조합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지게끔 했기 때문일까? 그림을 그어버린 마네의 행동은 혹 수잔과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114쪽

드가의 그림을 그어버린 직후 분노를 가라앉힌 마네는 보다 부드럽고 보다 호의적으로, 드가의 초상화처럼 똑같이 피아노 앞에 앉은 수잔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봐. 이렇게 해야지.'

하지만 또 한편으론 마치 사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16쪽

드가와 마네의 일화로 시작하는 『관계의 미술사』는 덕분에 상당히 흥미롭게 시작한다. 『 The Art of Rivalry 』이라는 원제처럼 이 책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한 8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ㅡ 에두아르 마네 (1832.1.23~1883.4.30) vs 에드가 드가 (1834.7.19~1917.9.27)

ㅡ 앙리 마티스(1869.12.31~1954.11.3) vs 파블로 피카소(1881.10.25~1973.4.8)

ㅡ 빌럼 드쿠닝(1904.4.24~1997.3.19) vs 잭슨 폴록(1912.1.28~1956.8.11)

ㅡ 루치안 프로이트 (1922.12.8~2011.7.20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vs 프랜시스 베이컨 (1909.10.28~1992.4.28 :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후손)

이 여덟 명의 이름만 봐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예술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름을 알리고 사랑받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뇌했던 시간들이 있었으며,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비난받는 시절도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기도 하고, 때론 지나친 질투심 때문에 자기 한계 속에 갇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요즘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 마티스의 작품인데, 마티스와 피카소의 일화가 포함되어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저자 서배스천 스미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예술 비평가로, 흥미 위주의 단 몇 페이지로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깊이 있어서 좋은 반면 가끔은 그들의 일화를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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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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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읽어보시라!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한국문학에 대해 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 책들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읽힐까? 트렌드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이미 검증된, 지난 세대의 문학을 읽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딱히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읽을 만큼 읽어서 그 시절을 모르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시절을 반추해 지금을 생각하기엔 세상이 너무나도 변해버렸으니까.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한 편씩 읽으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에세이는 몇 편 읽었지만 소설은 애써 피해왔었다. 평소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독자들이 감탄하는 부분에서 혼자 공감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키울까 봐 걱정돼서였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은 지난 세대들이 그린 것보다 더 이전의 시절(1950년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힘이 넘치고 새롭다. 문장 자체도 고와서 책장을 쉽게 넘길 수가 없다. 작품 전체를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문장이 많다.

『엄마의 말뚝』은 세 편의 「말뚝」연작과 여섯 편의 단편이 함께 실려있는 소설집이다.

「엄마의 말뚝 1」은 개성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터를 잡은 박완서 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아들과 딸이 서울에서, 그것도 서울 문안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하며 살림을 키우다가 기어코 서울에 집을 장만해 말뚝을 박는다. 그들은 그곳을 '괴불마당' 집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주인공이 서울에서 학교를 나와서 '신여성'이 되길 원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신여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신여성은 서울만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란다. 신여성이 되면 머리도 엄마처럼 이렇게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까미로 빗어야 하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통치마를 입고 뾰죽구두 신고 한도바꾸 들고 다닌단다."(33쪽)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34쪽) 하지만 '나'의 눈에는 시시해 보였던 신여성. 아마도 어린 '나'는 몰랐을 것이다.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는 훗날 어머니의 바람대로 '신여성'이 된 후에야 그걸 깨닫는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고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다.

'나'는 "어머니가 낯설고 바늘 끝도 안 들어가게 척박한 땅에다가 아둥바둥 말뚝을 박으시면서 나에게 제발 되어지이다,라고 그렇게도 간절히 바란 신여성보다 지금 나는 너무 멋쟁이가 돼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머니가 생각한 것으로부터는 얼마나 얼토당토않게 못 미처 있는가. 엄마의 생각은 그 당시에도 당돌했지만 현재에도 역시 당돌했다. (…)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이란 것의 기준이 되었던 너무 뒤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밖 의식, 그건 아직도 나의 의식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식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81~82쪽

문밖에 살면서 일편단심 문안에 연연한 엄마는 내가 그 동네 아이들과는 격이 다른 문안 애가 되길 바랐다. (…) 엄마는 자기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이상향과 당장 처한 현실과의 갈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자식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식이 겪는 갈등에 대해선 무지한 편이었다. (…) 한동네 사는 애들하곤 격이 다르게 만들려고 엄마가 억지로 조성한 나의 우월감이 등성이 하나만 넘어가면 열등감이 된다는 걸 엄마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우월감과 열등감은 다같이 이질감이라는 것으로 서로 한통속이었다. 67쪽

「엄마의 말뚝 2」는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나'가 집을 비울 때마다, 밖에 나가서 집이라는 존재를 잊고 있을 때마다 집에서는 사고가 터진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길에 넘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사고의 당사자가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 어머니여서 조금 안도한다. 뼈가 부러진 어머니는 괴불마당 집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때도 어머니는 눈길에 미끄러져 손목을 다쳤고, 오빠와 '나'는 돈 걱정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몰래 산골을 구하러 나선다. 산골이 나는 곳은 한 곳뿐이었는데, 그곳을 지키던 사람은 약간의 돈을 받고 산골을 아이들에게 내주면서 정성을 들였으니 이내 나을 거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어머니의 손목은 이내 나았고, 어머니는 이때까지 그 산골의 효험을 믿고 있는 것이다. 전쟁 때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고향이 보이는 바다, 그곳을 갈 수 없는 고향땅 개풍군이라고 생각하며 그곳에 아들의 유해를 뿌렸다. 어머니는 자신도 그 아들처럼 장례를 치러달라고 당부한다.

「엄마의 말뚝 3」에서 어머니는 그 후 7년을 더 사셨다. 그리고 유언처럼 또다시 '나'에게 자신의 장례를 당부했지만, 장손은 자신의 어머니 곁에 할머니를 모셨다. 그게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생각한다. "한을 품은 세대가 속속 죽어가니 느희끼리 잘들 해보라."(171쪽)고. 이제 어머니의 성함이 쓰인 말뚝이 산소 앞에 꽂혔다.

「엄마의 말뚝 1ㆍ2ㆍ3」에는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고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세대의 안타까움이 베여 있다. 한국의 현대사를 거창하지 않고 작가 가족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소소하게 조명해 준 방식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이와 더불어 「유실」, 「꿈꾸는 인큐베이터」,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꿈을 찍는 사진사」, 「창밖은 봄」, 「우리들의 부자」를 통해 지난 세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보편적으로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 여성의 경제력(혹은 일자리), 계층 갈등 같은 문제들이다. 작가의 소설이 여전히 힘이 있고 새롭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이다. 시절도 바뀌고 세계도 바뀌었는데, 왜 이런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말뚝」 연작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편의 단편들도 모두 매력 넘치는 작품들이지만, 일일이 소개하지 않는 이유는 그 매력을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말밖에 없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들의 고통을 털끝만 한 잔재도 안 남기고 뿌리 뽑아내는 내 솜씨는 참으로 영검했다. 마음속에 여자가 받는 그런 고통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있음으로써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나였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337쪽

흰 꽃을 문 뱀처럼 유연하고 민첩한 학부모의 손길이 흰 꽃 대신 가시를 물고 내 수치심을 찔렀다. 「꿈을 찍는 사진사」, 407쪽

밉지도 않고, 싫었을 뿐이다. 미움은 적어도 정열의 일종이지만 싫증에는 그런 열기조차 없다. 「꿈을 찍는 사진사」, 414쪽

올봄은 내일보다는 멀지만 착실히 다가오고 있다. 내일처럼 영원히 도망치지는 못한다. 「창밖은 봄」, 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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