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로 사는 법
이주은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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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중의적인 의미다. 실제로 어떤 물건을 팔기 위해 마케팅을 한다고 하면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 끊임없이 마케팅 전략을 세워야 한다. 마케팅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마케팅 공부를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그런 이유로 여전히 마케팅 관련 책들을 찾고 있다.

『마케터로 사는 법』을 선택한 이유는 저자의 이력 때문이다. 저자는 제일제당 공채 1기로 입사해 28년간 CJ에서 근무했다. 다양한 마케팅 업무를 경험하며 백설팀장, 햇반팀장, 가정간편식 사업부장, 비비고 브랜드 그룹장 상무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밥상을 바꾸는 것은 물론 한식의 세계화를 꿈꾸며 마케터로 일한 저자의 감각과 시선을 엿보고 싶었다.

마케터, 상품기획자의 삶에서부터 조직 생활까지 총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 각 장들 마지막에 Tip으로 간단하게 정리까지 해준다. 누군가에게 상품의 핵심을 전달해야 하는 마케터로서의 습관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현재 그녀는 파이어족이 되었다. 휴가를 계획하던 중, 크리스마스이브에 갑작스럽게 퇴직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예민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만 하고 있을 뿐 어떤 이유로 퇴직을 하게 됐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역할이 최정점을 찍었을 때 퇴사하게 됐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28년간 대기업에서 근무한 마케터의 이야기라고 해서 솔깃했었는데, 예상과 달리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책이다. 자신의 히스토리를 나열하기만 했을 뿐 마케팅의 핵심이 빠져있다. 그녀의 경력기술서를 아주 긴 책으로 보는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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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문구점 아저씨 - 좋아하는 일들로만 먹고사는 지속 가능한 삶
유한빈(펜크래프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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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취향은 OOO입니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로이텀에서 나온 노트를 독서노트로 사용하고 있다. 여러 노트를 써보고 정착한 노트이다. 가격은 착하지 않다. 이 노트를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똑같은 노트를 계속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고,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싫증이 나서 도중에 멈추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독서노트를 몇 권이나 쓴다고, 기껏해야 한 권일 텐데 마음에 드는 노트를 한 권 사서 끝까지 사용하는 게 오히려 효율적인 게 아닐까? 종이 쓰레기도 줄이고.

나와 똑같은 생각으로 노트를 사용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우선 반갑고, 게다가 놀랍기까지 하다. 나는 내 취향에 맞는 노트를 찾아 꽤 오랫동안 방황했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노트가 없자 직접 만들어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노트를 많이 쓰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필사를 하더라도 노트 한 권을 다 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오래 쓰는 제품인데 조금 아끼자고, 조금 더 벌자고 퀄리티를 포기하기는 싫었다. 112쪽

좋은 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쓰게 되기 마련이다. 180쪽

온라인에서 펜글씨 장인, '펜크래프트'로 더 유명한 저자 유한빈(이니셜은 HB, 문구 덕후가 되기에 딱인 이름이라고.)은 안 팔리면 자신이 평생 쓴다는 생각으로 노트를 만들었다. 진짜 없어서 직접 만든 사람이 여기 또 있다니. 비록 노트 한 권이지만 대충 만들지 않았다. 본인이 두고두고 쓸 작정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신경 썼을 테지만, 게다가 성격까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INTJ란다. 그런데 이 노트를 어디에서 팔까?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문구점에서 판다. 어릴 때부터 "이 담에 크면 문구점 아저씨가 될 거야"라고 말했던 저자가 진짜 '문구점 아저씨'가 된 것이다. 그것도 코로나 시국에, 망원동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초등학생은 절대 들어올 일이 없는 분위기의 문구점을 오픈한 것. 저자를 보면서 "좋아하는 일들로만 먹고사는 지속 가능한 삶(이 책의 부제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역설적으로 손글씨를 쓰지 않는 요즘이 손글씨가 가장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게다가 손글씨는 한번 연습해 놓으면 평생 써먹을 수 있을 만큼 가성비가 좋다. 171쪽

그 역시 처음부터 예쁘게 글씨를 썼던 것은 아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몽블랑 만년필을 사서 글씨를 썼는데 그의 글씨는 몽블랑 만년필의 품격에 걸맞지 않은 초등학생 글씨 그 자체였던 것. 만년필과 어울리는 품격 있는 글씨를 쓰기 위해 여러 책들을 보면서 연습해서 만든 글씨가 지금의 글씨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씨 쓰기 강연도 하고 유튜브도 하는데, 글씨 쓰기를 통해 번 돈으로 문구점을 차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그의 삶은 덕업일치가 아닌가.

좋아하는 게 비슷해서인지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나는 책을 읽어야 해서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데, 내가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면 책을 읽곤 했다. 그런데 저자는 나와 똑같았다. 이렇게 똑같다니, 정말 신기할 정도다. (저자는 INTJ, 나는 ISTJ인데 말이다.)

음악을 들으며 글씨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일을 못한다. 우리의 뇌는 음악 청취와 작업을 빠른 속도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동시에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214쪽

이어폰은 끼고 있지만 음악은 켜지 않는다. 그냥 귀마개의 역할을 할 뿐이다. 231쪽

스프링 노트는 음, 일단 못생겼다. 173쪽

어쩌다 읽게 된 책인데, 이 책을 몰랐다면 정말 아쉬울 뻔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가 운영하고 있는 동백 문구점도 한번 방문해 보고 싶고, 그가 했던 것처럼 김훈 작가의 소설을 다시 한번 필사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가 소개했던 펜들은 이미 사서 사용하고 있다.) 솔직히 다음 에세이가 기다려진다. 그런데 문구점 이름이 왜 '동백'일까?

여러분도 인생 책이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써보는 경험을 살면서 꼭 한 번은 해봤으면 좋겠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책의 새로운 면모까지 보게 될 것이다. 뿌듯함은 덤. 200쪽

필사를 하면 구사 가능한 어휘가 다양해져 어휘력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문장력이 향상된다. 또 손으로 쓰면 기억에 오래 남고, 천천히 읽게 되니 눈으로 읽었을 때 놓쳤던 부분을 자세히 보게 된다. 따라서 심오한 의미가 담긴 문장을 필사를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211쪽

중요한 내용이 담긴 노트는 그 사람만의 보물이 된다. 179쪽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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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2-06-28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이텀 좋죠!!

뒷북소녀 2022-06-28 14:22   좋아요 1 | URL
왜 그동안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집착했는지 모르겠어요.
시즌마다 바뀌는 디자인, 정말 싫었거든요.
이제 로이텀으로 깔맞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보물선 2022-06-28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겉모습도 보고 싶어요.

뒷북소녀 2022-06-28 14:24   좋아요 1 | URL
지금 사용하는 노트가 이제 3페이지 밖에 남지 않아서 조만간 독서노트에 대한 포스팅을 올릴 예정입니다.
기다려주세요, 제발~~~~~~~~~~~ㅋㅋㅋ

보물선 2022-06-2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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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예술가의 부드러운 손놀림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한낱 클럽에서의 주먹질에 불과하다!

러시아 문학 작품 소개들을 읽다 보면 종종 나보코프의 평들과 마주하게 된다. 대부분 아주 짧게 실려 있어서 어떤 이유로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궁금해서 찾다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발견했지만 절판돼서 아쉬웠는데 개정판이 나왔다.

189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나치 정권을 피해 194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보코프는 1941년부터 대학에서 유럽과 러시아 문학 강의를 했고, 1955년에는 『롤리타』를 발표했다.

『러시아 문학 강의』는 당시 나보코프가 러시아 작가들에 대해 강의했던 강의록 필사본 중 일부를 실은 것으로, 러시아 작가 6명(니콜라이 고골 1809~1852, 이반 투르게네프 1818~188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1821~1881, 레프 톨스토이 1828~1910, 안톤 체호프 1860~1904, 막심 고리키 1868~1936)의 작품 세계에 대해 냉철하면서도 신랄한 분석과 비평을 담고 있다.


'러시아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그 개념 자체에 대해 비러시아인들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명의 위대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우선 떠올린다. 산문뿐 아니라 번역 불가한 시인들까지 포함시키는 러시아 독자들에게는 그 범주가 더 확장되지만, 이들 역시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눈부신 대작들이 탄생한 19세기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 문학'은 최근의 사건이다. 게다가 특정 시기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러시아 문학을 이미 완성되고 종결된 것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난 40년간 소비에트 체제 아래에서 보잘것없는 주변 문학들만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7쪽

보통 '러시아 문학'은 19~20세기의 몇몇 작가로 대표된다. 다른 나라 문학에 비해 역사도 짧고 폭도 좁은 것처럼 보인다. 나보코프는 본격적으로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를 통해 왜 이런 오해가 빚어지게 됐는지 언급한다. 다른 나라 문학들은 몇 세기에 걸쳐서 발전해 왔지만, 러시아 문학은 그런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시작됐다. 늦게 시작했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오래전 서구 국가들이 이루었던 문화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문학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40년간의 절대 통치 기간 동안 예술에 대한 통제를 놓은 적이 없었다. 나보코프는 "19세기 예술가의 혼을 앗아 가려 했던 세력, 소비에트 경찰국가가 예술에 가한 압박은 안타까움보다는 혐오를 자아낸다(45쪽)"며 "21세기의 러시아가 지금보다는 더 매혹적인 나라가 되어 있기를 기대한다(12쪽)"고 썼다. 현재의 러시아가 그의 기대만큼 매혹적이지 않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아쉬워할까?

이 책에 실려 있는 6명의 작가들(니콜라이 고골,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에 대한 나보코프의 평은 고르지 못하다. 나보코프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를 순서(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호프, 4위 투르게네프)대로 꼽고 있는데 충격적이게도 이 순위에 도스토옙스키는 없다.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무려 163쪽에 걸쳐 분석하고 있는데, 그는 안나를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꼽기도 했으며 작품 자체는 별로 대단치 않다고 평가한 조지프 콘래드를 어이없는 망언을 한 사람으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를 향한 그의 애정(편애)은 책 전반을 통해 드러나지만, 반대로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는 아니다. 훌륭한 유머가 번득이긴 하나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황량함을 지닌 평범한 작가에 불과(196쪽)" 하며 감상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고 나서 톨스토이의 글들이 좀 더 내 성향과 맞다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 신랄한 비판이라니. 그것도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직 낯선 자국의 대작가를 소개하는 강연에서 말이다.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 자신의 형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208~209쪽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이 낯선 미국 대학생들을 위해 해당 문장들을 언급하며 아주 디테일하게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런 분석적인 해설은 아마도 그가 문학 작품들을 단숨에 읽지 않고 잘게 쪼개고 아삭아삭 씹어서 오랫동안 음미하는 방식으로 읽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러시아 문학처럼 방대한 분량의 작품들을 읽을 때는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기보다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약을 삼키듯이 단숨에 읽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려면 통독을 한번 한 뒤에, 나보코프처럼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보코프의 분석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나보코프는 본인이 활동했던 시기의 러시아 문학 작품들은 소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나보코프처럼 해외 망명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학의 전성기가 또다시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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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노래하듯이
오하나 지음 / 미디어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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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살고 있는 그들의 노래!

2021년 1월 소한부터 2021년 12월 동지까지 꼬박 일 년 동안 좋아하는 자연 속에서 하나, 둘, 셋, 하고 모은 푸르고 고운 것들을 글로 꿰어 전합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며 일으키는 계절과 바람의 리듬에 맞춰서 세세하게 움직이는 만물의 순간을 포착하며 제가 얻은 건 밝은 마음이었습니다. 이유는 자연이 늘 환하고 다정해서가 아니라 때론 매섭고 생명을 앗아갈 만큼 가차없더라도 모든 순간이 진실한 데 있는 듯합니다. 「작가의 말」, 214~215쪽

『계절은 노래하듯이』는 음악 하는 남편, 반려견 보현, 귤 나무와 함께 제주에서 지내고 있는 시인 오하나가 1년 24절기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오래전부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절기에 맞춰 농사일을 했다. 그녀 역시 절기에 맞춰 귤 나무를 가꾸고 계절을 보내고 있다.

강병수 할아버지의 성탄 카드로 시작하는 이 책. 그 성탄 카드 덕분에 나는 음악 하는 남편과 시인 오하나의 정체를 단숨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일부러 감춘 것인지,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정체를 알고 나자 이 책을 읽는 내내 나긋나긋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다. 심지어 책 속 남편의 목소리는 음성지원까지 되는듯했다. 아마도 나처럼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까 봐 드러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러기에는 나처럼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단 말이지.

그의 음악과, 그녀의 글과 꼭 닮은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 동화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농사일에 동화 같은 에피소드가 있을 수는 없는데, 자연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나 마음가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녀는 귤 나무를 귤 선생이라 불렀고, 농사일을 귤 선생의 수업이라 말했다. 절기 소설(小雪)에 쓴 「소설」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동화였다.

다가올 일 년이라는 빈 노트를 나는 무엇으로 채울까.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가보는 일. 바람을 타고 여행 중인 씨앗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일. 매일매일 달라지는 하늘의 색과 구름 모양, 바람의 냄새를 눈치채는 일. 새를 바라보는 일. 나무와 함께 흔들리는 일. 감추어져 있지 않으나 작고 가만해서 지나치기도, 없다고 착각하기도 쉬운 것에, 하지만 각자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높고 위대하게 세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그들과 둘도 없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일. 그런 일들로 채워진 노트는 훗날 나 자신에게 살아갈 힘으로 반드시 되돌아오리라. 17쪽

나는 일 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 즈음에 태어났다. 내가 유일하게 챙기고 있는 절기인데, 일 년 동안 나는 이 계절을 얼마나 다채롭게 채우고 있을까.


덧. 이렇게 리사이클링 된 것들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게 될까? 겨우 기념품 정도인데, 이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버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리사이클링한 의미가 있을까. 리사이클링을 하려면 분명 페트병 뚜껑에 무언가 더해진 것이 있을텐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도저히 메울 수 없는 나란 사람의 빈틈을 누군가가 감싸주며 받아들인다. 그렇게 받아들여진 나는 전보다 겸허한 자리로 내려가서 다른 이의 모자람과 불완전함을 받아주는 사람으로 점점 변해간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나아가 세상 사는, 누군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여 지탱되고 잇는지도 모르겠다. 21쪽

남편은 이 무렵에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남편은 밤과 낮을 절반씩(어쩌면 밤을 조금 더) 품고 있는 사람 같다.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이고, 늘 꿈꾸면서 현실감각을 절대로 잃지 않는다. 무모한 사랑을 신중하게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준 이도 남편이다. 56쪽

몸으로 삶의 춤을 추던 시간을 글로 남기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결코 아니지만, 글로 써보지 않으면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삶의 진실 또는 의미라는 게 있는 듯하다. 89쪽

사랑하는 자연과 한데 뒤섞여 살고 있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래서 자연을 배려하고 위하는 행동을 얼마나 하고 사는지 물으면 생각보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남기지 않는 정도? 손수건과 텀블러, 장바구니를 챙겨 다니는 정도일까? 그마저도 바쁘면 잊고 만다. 92쪽

내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지금 여기 있든 앞으로 사라지든 상관없이, 세상은 늘 모든 존재에게 활짝 열려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축복의 노래를 이어간다고. 이런 생각이 오늘따라 내게 안식을 줬다. 133쪽

예전엔 어른이 되는 일이 더 강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 나약해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어.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새로운 어둠을, 절망을 알게 되는 과정. 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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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완독 책방 - 인생이 바뀌는 독서법 알려드립니다, 2022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조미정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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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로 오늘의 마음을 일으키세요! 187쪽

독서노트를 엿보고 있는 인친(나혼자 팔로우)의 신간으로, 이 책 역시 그녀의 독서노트를 엿보기 위해 선택했다.

온라인에서 '미료'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 조미정은 한국에서 구성작가로 일하다가 호주로 이주했다. 모국어가 그리워 책을 독파하다가 읽고 쓰는 삶을 업으로 삼게 됐다는 그녀는, 북튜브를 운영하며 자신의 독서노트를 공유하고 있다.

『30일 완독 책방』은 30일 동안 한 권의 책을 완독하고 독서노트를 작성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알려준다. 먼저 독서력과 취향(개인적으로 성실한 통독가이며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유형이었다)을 점검한 뒤에 가볍게 책과 친해지는 방법, 펜과 노트를 들고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을 찾는 방법, 읽기가 쓰기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독서 노트를 작성하는 방법, 그녀의 인생 책까지 세세하게 담겨있다.

책을 읽는 것보다 서평 쓰는 게 어려운 나에게 관심사는 역시 서평 쓰기다. 그녀는 일기처럼 가볍게 서평을 써보라고 말한다. 어쩌면 '서평'이 아니라 '독서 일기'에 더 가까울 테지만, 그래야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녀가 소개한 책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이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완독에 실패한 책이었는데, 저자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녀처럼 나도 이 책과의 궁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찾을 수 있도록 매년 시도해 보아야겠다.


많은 독자가 추천해서 여러 번 읽기를 시도했지만 50페이지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실패한 책도 있습니다. 가령,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책을 구매한 지 6년 만에 완독했어요. 이렇게 훌륭한 책을 왜 책꽂이에 먼지가 쌓이게 놔두었을까 의아할 정도로 좋더라고요. 나와 책의 화학작용이 독서라고 정의할 때 그 반응이 폭발하는 타이밍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좋은 책임에는 틀림없는 듯한데,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면 매년 시도해 보세요. 언젠가 그 책과의 궁합이 딱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순간이 분명 찾아옵니다. 96쪽


사실 책 한 권 읽는 게 어렵지 않은 나에게 그녀의 독서법은 새로울 게 없다. 평소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인데 미처 글로 정리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해서 들려주는 느낌이라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좋다. 무엇보다도 막힘없이 술술 잘 읽힌다. 아마도 구성작가를 했던 경력 덕분이리라.


작가는 무형의 생각을 유형의 언어로 빚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똑같은 경험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껴도 오랫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남다르게 표현해 내죠.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아이의 마음을 엄마가 자신의 능숙한 언어로 대신 알아주고 표현해 주는 것처럼요.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아, 나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말로 표현해 내다니 멋지다!' 하고 감탄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문장에 밑줄을 그어요. 111쪽


'인생이 바뀌는 독서법 알려드립니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드라마틱 하게 바뀌는 일은 흔치 않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바뀌는 독서법이 아니라 책 한 권 읽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렇게 꾸준하게 책을 읽고 남기다 보면 어느 순간 나에게 스며들어 바뀌어 있지 않을까.


저는 책 한 권이 세상을 단숨에 바꿀 만큼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책의 가치란 봄날의 꽃향기나 겨울의 바스락거리는 아침 공기처럼 슬며시 다가와 기분 좋게 퍼졌다 사라지는 정도인 것 같아요. 왔다가 사라지지만 결코 의미 없지는 않죠.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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