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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하루
마르탱 파주 지음, 이승재 옮김, 정택영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당신의 하루는 어떤가요? 지루한 하루, 한 템포 늦은 하루, 너무 바쁜 하루...

여기 완벽한 하루를 꿈꾸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고, 다시 그 다음 날 눈을 뜰 때까지 오직 자살만을 생각하는 남자이다.

아침 뉴스 시작 2분 전에 잠이 깬 그는 아스피린 한 알을 먹고,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출근을 하기 위해 면도를 하면서, 성능 좋은 삼중 면도날 면도기로 자신의 대동맥을 베어 버린다. 갑자기 복통이 찾아오면 온갖 종류의 약과 술을 섞어 마신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는 쇠줄로 만든 올가미를 천장에 걸고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버팀목으로 삼아 목을 매단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컴퓨터를 켜고 시한폭탄을 설치한 뒤 타이머를 점심시간 1분 전인 11시 59분으로 맞춰 놓는다. 퇴근을 할 때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사무실 창문으로 뛰어 내린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 자신의 몸에 기름을 뿌리고 성냥에 불을 붙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변함없이 청명한 아침 햇살을 보게 된다.

난 양복 속으로 몸을 들이민다.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나는 매일매일 마치 선물용 포장 상자처럼 넥타이를 두른다. 하지만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한들 나라는 선물을 풀러 보는 사람이 없으니 개탄스러운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불만족스럽다. 사람들은 그저 선물 상자만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아무개라는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보여 주기 위해 직접 포장을 개봉하는 그런 유(類)의 누군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본문, p26~27>

그는 보통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복통을 호소한다. 그의 몸 속에는 길이 6미터 짜리 백상어가 살고 있어, 그의 몸 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의 내장 기관들을 갉아 먹고 다닌다. 그러나 이 백상어 또한 그의 자살에는 크나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그를 괴롭히기만 할 뿐이다. 그가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자 목 속으로 기어 올라와 결국 입 밖으로 뛰쳐 나가고야 만다.

그는 그 대신 완벽한 그를 대신할 배우를 사서 자신인양 연기하며 돌아다니게 하고, 예쁘고 귀여운 아내와 아이들을 고용한다. 동료들과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매주 개그맨과 대학 교수에게 자신이 나누어야 할 대화의 원고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남들 눈에는 그가 아주 지적이고 멋진 남자이며, 문화생활을 즐기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완벽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6개월전 친구 6명의 합동 영결식을 치루고 공동묘지에 묻었다. 비록 인간으로서는 존재하지만 친구로서는 이미 유령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도 없는 친구들의 합동 영결식을 지내고 매일 공동묘지를 찾아간다.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절망과 고독이 내 침대 위에 누워 서로를 얼싸안고 있다. 녀석들은 자제라는 말을 모르는지 밤만 되면 내 곁을 찾아와 수없이 사랑을 나누곤 한다. 난 다만 녀석들의 건강이 걱정될 뿐이다. 맥주를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연다. 텅 비었다. 어제 분명히 장을 봤는데... 순간 등 뒤에서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두려움이 내 마지막 캔 맥주를 염치없이 홀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문, p167>

그로테스크, 이 한 단어보다 이 책을 더 잘 나타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나 자신이 정형화된 인간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는 기발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그의 하루를 엿보다 보니 소설 속 그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스물다섯 살에, 나름대로 보수도 많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 받으며 살고 있는 그가 왜 매일 자살을 꿈꾸어야만 하는걸까? 왜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걸까?

그에겐 그의 고독을 달래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 그가 자살을 시도하는 순간 조차도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은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가면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진짜 얼굴은 무표정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숨막혀 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런 생활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미 중독되어 있다. 그는 값비싼 옷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완벽한 남자처럼 행동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 던진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웃고 있는 가면조차 보여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그것을 버리지는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나 자신은 한번도 죽음을 꿈꾸어 본 적이 없는지, 남들이 동경하는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아둥바둥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차마 그것에 맞서지 못하는 마음, 차라리 죽음이 쉬울거라는 자신감. 어쩌면 그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독백들이 자꾸 되뇌여 진다.

 내게도 친구가, 진정한 친구, 소꿉친구, 여자 친구들,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정을 붙일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거리감, 거짓말로 인한 상처, 성인이라 착각하며 갖게 되는 서로 다른 성향, 이기주의적인 태도, 비열하고 무기력한 생활, 자존심 세우기, 매사에 심각하게 대하는 태도, 소리 없이 주고받는 상처, 미소와 무관심으로 치장한 채 행하는 공격 등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온갖 종류의 벌레들 때문에 이제 내 주변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슬픈 일은 아니다. 슬프지 않다는 그 사실이 슬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그 자체로는 그다지 슬프지 않다. 나는 시간과 삶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는 그런 우정은 좋아하지 않는다. 갑자기 절교를 하거나, 그럴싸한 일로 욕설을 주고받는다거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의 우정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시나브로 자연스럽게 사라져 간다. 우리를 이어 주던 그 연결 고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끊어진다 하더라도 그 고리가 너무도 가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정의 소멸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 몸의 모세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게 바로 그 연결 고리이다. 어느 날, 그 연결 고리의 모세 혈관이 모조리 끊어지고 나면 우리는 모두 남남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모르는 타인처럼 말이다.  가끔은 그렇게 잊혀졌던 친구들이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는 일도 있다. 간만에 동창회나 저녁 식사 모임 같은 "그래, 요즘은 무슨 일 하는 거야? 어떻게 사는 거야?"라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자리에 나오라는 연락을 한다. 우리는 무조건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어떻게 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변치 않는 존재로 머물 수가 없다. 가장 좋은 것은 누군가가 되는 것, 그것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자신에 불과했을 뿐이다. <본문, p17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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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로시카 다이어리
메리 발렌티스 외 지음, 어윤금 옮김 / 마디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러시아에서는 행운을 불러오는 인형이라고 불려지는 "마트로시카", 여행길에 우연히 사서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내 열쇠고리에 항상 달고 다니는 인형이다. 내 열쇠고리에 달린 마트로시카 인형은 모든 것을 벗어버린, 가장 알멩이만 남아있는 작은 인형이다. 그래서 제목을 보는 순간, 참 반가웠던 책이다.

난 여행길에서 마트로시카 인형을 샀는데, 다시 그 인형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이라. 그 여행이 끝나면 기념품으로 '용기'를 가지고 올 수 있다니, 정말 멋진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내게 너무나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용기.

예전에는 이 말만 들어도 가슴 속에서 용기가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 말을 들으면 자꾸 뒷걸음치게 된다. 굳이 용기를 내지 않아도 그냥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용기만 낸다고 잘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설사 용기를 냈다하더라도 그 용기를 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들어 이미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들이 먼저 앞서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아는게 많아질수록 점점 가지기 어려운 것이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용기, 그것을 가지기 위해선 솔직해 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까지 솔직해져야 한다. 싫어도 좋은 척, 아니면서도 그런 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쌓이게 하는지 모른다. 타인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분노를 참다가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한다. 결국은 자신감 부족의 원인이 되어버린다. 누구에게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 말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충고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느끼고 있지만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다이어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니 나 자신조차 다이어리를 쓰면서 솔직하지 못할 때가 있다. 다이어리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개인의 기록이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 솔직하게 쓰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먼 훗날 나 자신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서 일 것이다. 그러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솔직하게 써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힘들고 싫었던 기억은 무엇이며, 지금의 내 감정은 어떠한지 솔직하게 써야 한다. 그러다보면 그 속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때론 그런 글을 통해서 아무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도 있고, 분노를 잠재울 수도 있다.

용기라는 것에 항상 선행되는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모험'이다. 여자들 뿐만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모험을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험에는 항상 위험이라는 기회비용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험이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이 모험이라고 자각을 못할 뿐이지, 사실은 항상 곁에 있는 것이다. 위험이 항상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듯이 말이다.

매순간 모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용기를 내는 것이 좀 더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지금이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까지 매순간 모험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잘해 왔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불쑥 용기가 쏟아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 '용기'를 찾아 떠나는 새로운 여행

1. 빛나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아보라.

2. 과거는 묻어 두고 미래를 꿈꾸라.

3. 자신을 제한하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4. 가식의 가면을 벗어라.

5. 두려움을 던져 버려라. 두려움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이다.

6. 새로운 개성을 창조하라. 성격도 변할 수 있다. 장점을 극대화하라.

7. 인생의 사명을 찾아라. 우선순위를 정하면 방향이 보인다.

8. 분노를 지혜롭게 풀어라. 분노를 용기로 승화시켜라.

9. 모험을 즐겨라. 과감하게 도전하고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하라.

10. 독립적인 인간관계를 추구하라.

11.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12. 진정한 자아를 찾아라. 깨어 있는 삶을 위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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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신간 『굽이치는 강가에서』로 나에게 다가온 작가 온다 리쿠. 그녀에게 굵직한 상을 두개나 안겨준 『밤의 피크닉』까지 읽게 되자 드디어 그녀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도무지 어떤 내용의 책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 붉은 표지의 책 속에서 걸어나오는 남자가 그려진 책 표지를 보고서야 "책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을 어슴프레 짐작할 수 있었다.

구렁이란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매력도 그런 구렁 같은 것이길 바라며, "책에 대한 책"을 향한 무조건적인 지지로 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각 장마다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에서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소설 책을 찾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그 책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라는 것이다. 단지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 속에서 책의 위력이 증폭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제2장 이즈모 야상곡」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작가를 찾아 두 편집자가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제3장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에는 앞으로 소설로 쓸 이야기가 담겨있다.

「제4장 회전목마」에tj는 이 작가가 이 책을 지금 쓰기 시작했으며, 작가가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책을 쓰는지, 그리고 4부작인 책의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히려면 책을 금지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제1장에 등장하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은 익명의 작가가 자비로 200부를 제작해 배포했으나 곧바로 회수되었다는 수수께끼의 책이다. 또 그 책에는 단 한 사람에게 단 하룻밤만 빌려줄 수 있다는 금기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을 소장하고 있거나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상야릇한 환상을 품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느날 우연히 알게 된 책 한권이 절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책을 읽기 위해 온 헌책방을 뒤졌던 기억이 있다. 언제든지 사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아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으리라.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건 여기 있는 우리들과 몇몇 사람들에게 국한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독서란 본래 개인적인 행위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책을 좀 읽는다고 자만하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도 터무니없는 환상이에요.  인간이 한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거든요. 서점에 가면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늘 절망합니다. 내가 읽지 못하는, 천문학적인 수효의 책들 중에 내가 모르는 재미가 넘치는 책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어요. 이야기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만, 그러니까 뭐랄까.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삼월》 또한 독자가 대단히 원하는 작품인가 하면,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 끌어내봤더니 빛을 잃어버리는, 그런 작품일지도 모르죠."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 中, p58>

나 또한 아직 읽지 못한 많은 책들을 보며 좌절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열심히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책들은 조조지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근사한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그런 절망감을 희석시켜 버리곤 한다. 책에 대한 갈망, 이것 또한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인 듯하다.

책 속의 책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 또한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이야기들은 『흑(黑)과 다(茶)의 환상』,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의 백합의 뼈』라는 가제로 곧 출간 예정인 책들이다.

온다 리쿠, 그녀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이다. 그녀의 책을 한번 손에 들면 엄청난 흡인력 때문에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고. 비록 그 책을 다 읽었다 하더라도 또다른 책을 찾아 헤매게 된다. 불행인지 아니면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그녀의 책들이 한국에서는 많이 소개되지가 않았다. 그녀의 다음 작품들을 손꼽아 기다려 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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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숨가쁘게 몰아치는 이야기보다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읽고 싶어지는 계절이 왔다. 아무래도 가을이 찾아왔는가 보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가 만난 책이 바로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다. 수식이라, 게다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것일텐데 과연 따뜻함이 느껴질까?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문득 『뷰티풀 마인드』의 천재 수학자 존 내쉬가 떠올랐다. 그래, 수식이라고 차갑고 딱딱하라는 법은 없지 싶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박사는 80분 밖에 지속되지 못하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어제의 기억은 20여년 전 그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날의 기억이다. 그는 80분 밖에 지속되지 못하는 자신의 기억력을 돕기 위해 입고 있는 양복 여기저기에 클립으로 메모지를 붙여 놓았다. 죽은 형의 미망인과 함께 살고 있는 그에게는 파출부가 필요했지만, 그는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파출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오직 '수식'뿐이었다. 그는 모든 사물을 수식으로 대했다. 파출부의 생일과 전화번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었고, 머리가 평평한 파출부의 아들에게는 '루트(√)'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 매일을 수식과 보내는 박사에게도 조금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는 한신 타이거스의 왼손 투수 에나쓰 유타카의 열렬한 팬이었다. 박사가 사고를 당한 후에 에나쓰는 다른 팀으로 이적하여 그곳에서 은퇴를 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박사에게 에나쓰는 여전히 영웅이었다. 비록 한번도 야구장을 가거나 중계를 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승률을 계산할 수 있었고, 기록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박사는 어린 아이를 끔찍히 여겼다. 어린 아들을 혼자 집에 두고 온다는 파출부의 말을 듣고, 박사는 아들을 데리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한번도 자식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박사에게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박사는 루트를 사랑했다. 가족이라고는 파출부인 어머니 밖에 없는 루트에게 박사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좋은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박사의 기억력은 점점 짧아져 결국에는 사고를 당한 이후의 것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이 슬픈걸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슬픈걸까? 그건 아마도 후자 쪽일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기억되진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해 질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해 질 수 있는 어떤 기억도 떠올릴 수가 없을테니 말이다. 함께 있으면 행복한 사람들, 그에게 많은 추억들을 선사했던 사람들, 그러나 결코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의 모습이 너무 슬프다.

284번째 학장상 기념으로 받은 박사의 시계와 파출부의 생일 2월 20일,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교집합이라는 돈독한 관계를 찾아내는 박사. 그런 박사에게 어느새 나도 중독되어 버렸는지, 책을 덮고나서 내 생일이며, 신발 사이즈, 나이 등을 적기 시작했다. 의미있는 숫자를 발견하기 위해 한참을 적어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서 서운해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문득 나와의 교집합을 찾지 못해 나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들이 떠올랐다. 박사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서툴렀는지도 모른다.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박사처럼 직관적으로 수식을 찾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더이상 이 가을이 외롭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정말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따뜻해진 내 가슴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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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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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독특한 제목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표지도 참 예뻤다. 과연 치바는 어떤 사신(使臣)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들었다. 치바가 사신(死神)이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 보니 '死神'이라는 작은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겁이 났다. 난 저승사자라는 것을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쳐지는데. 그래도 예쁜 표지를 믿으며 한장 한장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신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던 그런 모습의 사신들이 아니다. 우리가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듯이, 그들은 '사신(死神)'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의 일이란,  '죽을 예정인 사람'이 맡겨지면 1주일 동안 그 사람이 죽어도 되는지에 대해 조사를 한 후 '가(可)' 혹은 '보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보고한다. 만약 '가'로 보고가 되면, 그 다음날 그 사람은 죽게 된다. 하지만 '보류'라고 보고하는 사신들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예정대로 죽게 된다.게다가 그들은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틈만 나면 음반매장에 들러 음악을 듣고, 음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대충 일을 마무리 짓기도 한다. 또 더 오랫동안 음악을 듣기 위해서 일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시간 끌기 기술을 사용하여 마감임박을 즐기기도 한다. 치바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가 다른 사신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일을 할 때는 항상 비가 내린다는 것과 다른 사신들과 비교해 좀 더 성실하게 일을 한다는 점이다.무시무시한 저승사자보다는 오히려 영화 <시티오브엔젤>에서의 천사 세스(니콜라스 케이지 역)를 떠올리게 하는 사신들이다. 하지만 인간(맥 라이언 역)을 사랑하고 감정적이었던 천사 세스와는 달리 사신 치바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치바가 조사를 맡았던 6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고객불만 전화를 응대하며 힘들게 살고있던 중 찾아온 가수의 기회를 눈치채지 못한 여자, 의리를 소중히 여겨 복수를 다짐한 야쿠자, 사랑하는 아들의 복수를 하려는 늙은 어머니, 짝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고 싶었던 옷가게 점원,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하면서 또다른 살인을 계획하는 살인 용의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낸 미용실 노파, 그들 앞에 나타난 치바는 어김없이 '가'를 보고 하지만, 단 한명에게만은 '보류'를 보고한다. 치바는 가수가 될 기회를 얻은 가즈에가 그 기회를 잡든지 말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보류'를 보고한다. 결국 가즈에는 그 기회를 잡아 인기많은 가수가 된다.

어떻게 보면, 긴 내 인생에서 고작 1주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될 수도 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게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고작 1주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 1주일 후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1주일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 하나로 치바의 마음을 돌려 놓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가즈에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치바보다 먼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멋진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괴로워하며 죽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가즈에가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괴로워하며 치바를 실망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 것 같지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래서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우리 삶에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잊지 말자. 화이팅~!


[기억에 남는 구절]

"죽는 것은 두렵지 않나요? 내 역할은 눈치 채고 있겠죠?"

"당신은 내가 죽는 것을 지켜보러 왔지요? 그야, 죽는 것은 두렵지만 말이죠.

더욱 괴로운 것은... 주위 사람들이 죽는 일이죠. 그에 비하면 자신이 죽는 것은 그나마 낫다니까요. 자신의 경우에는 슬퍼할 겨를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가장 최악인 것은..."

"최악인 것은?"

"죽지 않는 것. 오래 살면 살수록 주위 사람들이 죽어가요. 당연한 일이지만."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자신이 죽는 것은 크게 두렵지 않아요. 아픈 건 싫지만. 미련이 남는 일도 없고."

"정말 없나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까지 포함한 납득일지도 모르죠."

 

<치바미용실 노파의 대화,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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