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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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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광고문구가 그럴 듯했다. 게다가 따끈따끈하고.

날도 마음도 더워 시를 읽는 것이 공부 수준이 되어 버리고 근래 소설에 눈길이 돌려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그저 따끈따끈하다, 라는 것이 이 책을 든 이유였다. 실망을 했다기 보다 지겹다,라는 것이 우리소설 읽기 중단의 이유였으므로 근래 나는 그 지겨움에서 많이 빠져 나온 듯하다. <공허의 1/4>. 재밌다기보다는 잘 썼다.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공동 수상작
생의 고통과 그것을 응시하는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이 엿보이는 완성도 높은 소설

오늘날의 기성 작가들 속에서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역량, 특히 단 한 군데서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 확고한 안정감을 보여준다. ― 김화영(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삶의 신산스러움에 대한 이해도 깊고, 문장도 정확하고, 문학적인 재능도 보이고, 구성력도 뛰어나다. ― 이남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선정자들의 말 또한 맞다. 빨리 읽어나갈 수 있게 쓰는 것은 재능이다. 단문으로 서술되는 이야기는 읽는 사람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뒤에 수록된 단편 두 개는 그런 점에서 좀 미흡했지만 그걸 뛰어 넘어 버렸다는 점에서도 이 작가 한수영을 높이 산다. 허점이 없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허점이 없으므로 잘 읽히는 것이고 빨리 읽을 수 있는 것.

바하를 닮아버린 삼십대 독신여자,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려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는 못생긴 여자의 이야기가 재미있을 리는 없다. 유머러스하다는 광고는 그래서 허위다. 그러나 블랙유머라고 한다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 아파트에서 한 한 달 정도 단지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보면 그 안의 일은 여기 빠삭하게 드러나 있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형상화 면에서 빈틈이 없다.

관절염과 10년도 넘게 비가 오지 않기도 한다는 룹알할리사막의 연계, 살찐 엉덩이와 사구沙丘의 유사성, 서로 이유야 다르지만 공동의 목적일 수 있는 한 개 이상향의 상정. 이것은 작가의 스토리장악력을 뜻한다. 나는 스토리를 장악한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다만 그 안의 생활이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것이 읽기의 최대 난점. 환타지를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 있음을 생각한다면 내가 전적으로 만세를 부를 수는 없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소설가 하나 만났다는 사실 하나로 읽은 시간이 아깝지 않다.

- 심수봉의 노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어떤 사람이 정말 클래식 애호가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시험지. 아무리 열렬한 클래식광이라 해도 비 오는 날 바흐나 쇼팽의 음악보다 심수봉의 노래에 더 가슴이 찡해지면 그 사람은 꽝. (p.170)

; 나는 클래식광도 아니고 그런 날 심수봉의 노래에 찡하지도 않는다. 그런 날이면 동사서독 OST를 듣는 편이다. 그러나 심수봉의 노래가 심사를 아주 긁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레토릭이 없는 그의 가사가 거슬리는 점을 빼면 그런 대로 들어줄 만한 날도 있긴 하다. 어쨌거나 저 리트머스 시험지는 나를 시험하지 못한다. 물론 주요인은 내가 클래식광이 아니라는 것.

-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인터넷을 타고 룹알할리로 간다.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룹알할리 사막의 석양 무렵 풍경이 깔려 있다. '공허의 사분의 일'이라는 이름답게, 모니터에 뜬 룹알할리는 텅 비어 있다. 온통 붉게 물든 모래언덕뿐이다. 언젠가는 꼭 저곳으로 가야지.(p.12)

; 왜 주인공이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는 읽어봐야 알고.(스포일러는 좀 삼가야지) '공허의 사분의 일'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가끔 공허가 무섭지만 공허가 세상 모든 생명체의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게 빈번하게 마음을 가볍게 한다. 언젠가는 꼭 가야지, 하는 '저곳'이 없는 나로서는 현재의 삶이 공허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찾아야 하는 걸까, 저곳이라는 것을? 매번 문학작품을 통해 '저곳'을 엿보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내게 '저곳'은 없다. 이는 풍경에 어린 상처가 없음일 것이고, 그만큼 내가 무심하게 세상을 거치고 보내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에 대해 불만도 만족도 없다는 것이고. 그럼 나는 왜 사나? 어째 이런 물음, 꽤 낯익다. 왜, 라는 것은 집어쳐 버린지 오래됐고 대신 '어떻게'를 집요하게 파보자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 '어떻게'가 공허에 닿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같은 여름날이야말로 참으로 공허를 닮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릴없이, 치우침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공허의 날이, 사막같은 나날이 흘러간다. 이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내 몸 속의 물은 적당하다.

룹알할리를 검색 중에 이런 책이 나왔다. 어쩌다 생각나면 읽어 봐야지. 그래서 포스트잇한다.

절대를 찾아서 / 윌프레드 세시저 지음


아라비아의 남동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 사막인 엠프티 쿼터(Empty Quarter) 건조하고 광대한 이 사막을 저자가 1945년에서 1950년까지 5년간의 아랍 유목생활에 대한 저자의 체험여행 기록한 보고서이다.
낮과 밤의 극심한 온도 차, 타는 듯한 갈증, 때로는 낙타를 죽여 식량으로 삼아야 할 만큼 혹독한 배고픔, 아랍 부족들 간의 습격과 약탈, 그에 따른 추적과 보복 등 그 사막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배두인들의 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들어있다.
영화「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인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 - 국내에서는 <사막의 반란>과 더불어 아랍 여행기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5년간의 아랍 유목생활 체험이 과장없이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때묻지 않은 거대한 사막과 더불어 아랍의 문화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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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 - 전4권 (양장)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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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를 읽던 시간의 기억이 참 오래간다. 이영도는 참으로 출중한 소설가다. 아무리 뒤집어놓고 봐도 이만한 소설가를 찾기 힘들구나, 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각권당 500페이지를 넘기고야 마는 이 긴 소설을 읽는 데 일주일도 안 걸렸다. 환타지장르를 토착화하기 위해 이만큼 노력하는 작가도 드물다. 그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읽다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여기에는 다섯 개의 종족이 나온다.

-나가:발자국 없는 여신(물)의 선민 종족. 아라짓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들로 심장을 적출하여 반 불사의 몸이 되었으며. 말보다는 니름이라는 정신적 의사소통수단을 사용한다.

-레콘: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땅)의 선민 종족. 숙원의 추구자들이며 강대한 힘과 체력을 갖고 있으나 물을 두려워 한다.

-인간:어디에도 없는 신(바람)의 선민 종족. 자신들을 이끌어줄 왕을 찾아 헤매거나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다.

-도깨비:자기를 죽이는 신(불)의 선민 종족. 두번 죽는 자들. 불을 사용하며 불을 주로 세상에 희극적 요소를 부여하는 데 사용하길 즐긴다. 모든 도깨비는 거의 완벽한 씨름꾼이다.

-두억시니:자신을 보지 못하는 신의 선민 종족. 첫번째 종족. 자신들의 신보다 더 위대해진 첫번째 종족이 남기고 간 찌꺼기. 왜 자기 종족이 신을 잃었는가를 탐구하는 찌꺼기들.

전설의 형태로 드러나는 새로운 세계. 기반이 튼튼해뵈는 전설은 이야기의 토대가 되고 수수께끼의 열쇠가 된다.

-키탈저사냥꾼들의 옛이야기:

네 마리의 형제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새는 피를 마시는 새,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눈물을 마시는 새요.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 밖으로 절대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 밖으로 흘려 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 보내겠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2권 366)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빨리 죽소. ...... 왕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는 사람, 저 토디 시노크(자칭 왕)는 이제 선지자(왕을 추대한 자)가 흘리는 눈물을 받아먹지 않아도 되니 살아남을 수 있을 거요.(2권 430)

이제 왕은 없다. 그리고 왕이 이 모욕에 사과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왕이 없으리라. 당연히 사과의 왕과 귀환의 왕은 다른 인물일 수밖에 없다. 과거를 정리할 왕과 미래로 나아갈 왕은 다르다.(4권 525)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유료도로당이었다. 이들의 정체성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여행자와 유료도로당:

'여행자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 유료도로당은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위해?'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3권 118)

삶에 대한 시각이 드러났다 생각되는 부분이다.

-도망치는 토끼:

토끼가 표범에게 不殺의 도덕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토끼도 웃을 것이다.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살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죄다. 자기가 약하니까 표범에게 먹혀야 된다고 믿는 토끼다. 토끼는 자신을 부정의 대상이 아닌 긍정의 대상으로 바꾼다. 표범보다 약한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신을 선택하는 대신 표범보다 작아서 잽싸게 토끼굴로 뛰어들 수 있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자신을 선택한다. 도망치는 토끼는 아름답다.

지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에게 족쇄를 두르는 것은 죄다.(6권 315) 

메모량이 스무페이지가 넘는다. 읽어 보니, 독서 중 이영도의 이 새로운 세계를 그리는 데 열중했던 듯.  책을 읽으면서 그가 무엇을 집요하게 탐구해가고 있는가가 보였다. 아직 정돈되지 못한 이 세상이 오히려 난관이었을 것이다. 이리 삐죽 저리 삐죽, 자꾸 드러나는 세계의 예각들. 그 예각들 하나하나를 모조리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 보였으나 아마도 스스로 만족하진 못했으리라.

문체의 문제도 좀 얘기하고 싶은데. 입담이 좋아지면 문체는 개성을 잃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개성이다 말할 수도 있겠으나, 미리 단정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은 문장이 힘을 잃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가는 조용히 조곤조곤 바라보고 있는 것이 가장 독자를 편하게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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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미학론
이상우 지음 / 시공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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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화하미학>이라는 책을 들고 끙끙댔던 생각이 난다. 당시 하일지의 '소설에 있어서의 거리 이론'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가 어딘가에서 잠깐 언급한 <화하미학>을 기억해냈다. 그 때 사서 들기는 했으나 다는 못읽었다. 중국의 미학책은 확실히 기반공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양의 미학책들은 그런대로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었는데 유독 <화하미학>은 읽히질 않아서 아직도 숙제처럼 책꽂이에 꽂혀 있다. 그걸 보면 아직도 아득하다. 동양의 미학. 그것은 과연 있었을까?

우리나라 사람,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서 북경대 가서 박사를 받았단다. 그 박사학위논문의 결론부분을 2년 동안 수정 보완한 책이 이것이란다.

읽는 도중에는,

'스스로 많은 질문을 하지만,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지만, 정작 확실한, 저자의 확신이 들어있는 답은 없다. 계단 하나하나가 질문이라면 올라서게 하는 힘이 답일 것이다. 그러나 답이 없고, 결과적으로 계단을 오르지 못해야 맞는데, 에스컬레이터인지, 이 사람, 잘도 끝까지 가고 있다. 도대체 이 계단들을 어떻게 이 사람은 넘어서는 것일까?'

라고 써놓았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그러니까 끝까지 읽고는 다시 이렇게 썼다.

'빈 계단들을 불안해 하면서 넘고 보니 대답의 산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자주, 아니 귀가 닳도록 들었던 것, 그러나 지금의 내 것은 아닌 것을 이 자는 가득 쌓아놓았다. 경청할 만하고 배울 만하다!

일단, 이렇게,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제 속에서 캐낸 답을 내는 사람을 본 것도 오랜만이다.

손쉬운 직관이 아니라, 탈도 쓰지 않고, 탐구와 지성으로 노력한 결과물이 분명하여 나는 끝에 다다라 즐거움을 느낀다.'

'경계'라는 말이 화두처럼 느껴지는 시대이기도 해서 이 책이 다루는 '경계'를 그것과 연관시킬 뻔 했으나, 후훗.. 애저녁에 그런 경계는 아니다. 여기서의 경계란 경지의 다른 말이라고 해도 된다. 벌써부터 좀  뻔해 보이지만. ^^;

밑줄친 부분은 참 많다. 그 중, 지금 딱 열어서 나온 것.

-만일 구할 것이 있고 원하는 바가 있다면, '나'의 마음은 전도된 현상들의 무수한 유희를 만들어낼 것이다. 만일 세상에 복福을 누릴 만큼 누렸음을 알고, 세상의 화禍를 겪을 만큼 겪었음을 알며, 전도된 현상들의 유희를 할만큼 하였음을 깨닫는다면, 바로 '나'의 마음은 여여如如한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 망발하지 않으니 일체의 것이 적적寂寂하고 청정淸淨할 따름이다.

;'경계'를 세 수준으로 가르고 그 세 경계의 다름을 설명하는데 내게 다가오는 것은 '아름답게 살고자 하라'는 것이었다. 노장과 불교를 훑으며 저자는, 자신은 불교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밝힌다.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망발妄發이랜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따지면 그 망발의 부재, 바로 저 여여如如한 무대無待의 경지이니, 내 느끼기로 동양의 미학은 윤리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그야말로 術이기 때문이다.

-전략....뒤샹Duchamp의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괴이한 행위같은 것들은 인간과 예술의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이나 미학에서 물어질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런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된 기네스북Guinness Book과 같은 책에서 거론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인간에 관한 문제이든 예술에 관한 문제이든 의미있는 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자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을 '나'의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나타내려고 기획되었던 추상예술은, '나'의 합리적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두게 되는 것이므로 그 탄생 자체가 '총체적 미감(; 말 그대로 우리 전존재로서의 미감-shosha)'의 발현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p. 167)

;위험하다, 이 신념은. 이것도 분명 '나'가 아닌가. 그러나 무대無待의 경계를 최고미학으로 삼았다는 측면에서 그는 옳다고 느낀다.

나는 '나'를 중시하나 나의 '자격'에 관한 신념은 없다. 그래서 타자인 '나'를 보며 그 자격을 판단하는 '나'로 하여금 자격을 갖추도록 단련하고 있다. 그렇게 '나'의 문제는 도덕적 측면이 된다. '나'를 중시하나 결국 '나'는 '無我'로 가기를 원한다. 그것이 자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키치'가 극복되는 지점이라는 것을 요즘들어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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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에 바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31
이선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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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우, 마음이 많이 안 좋을 때 시가 아주 잘 읽혀요. 그래서 누가 '나, 요즘 시만 읽어!' 그러면 마음이 좀 심란해져요. -_- 

그렇게 말한 사람은 떠나고 나는 여전히 시집을 들고 앉아 읽고 있다. 시집을 꺼낼 때나 읽고 있을 때 그다지 슬프다거나 마음이 안 좋다거나 불편한 적이 없어서 나는 그의 염려에 대해 걱정 말라고, 내 가슴을 탕탕 쳐보였다. 그러나 이 시집을 읽고 있을 때, 이 시인의 평범이, 이 비범한 평범이 은근히 슬프고 서러워서, 나의 평범 또한 그지없이 불편해져서 괜스레 시집에서 눈을 떼고는 정처없이 방 안이나 창 밖을 헤매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내게 무척 잘 읽히는 시집이었다.

요즘 나는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 매일 누군가의 시집을 들고 읽으며 내 졸렬한 글쓰기를 통렬해 한다. 하긴 어쩌다 나의 시에 스스로 만족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니, 대개는 없다. 나는 그래서 시집을 텍스트로 사용하곤 했다. 그것은 이미 시집이 아니었던 것이고 매일 시집을 들고 읽고 있더라도 나는 시를 읽는 것이 아니었다. 그간 시집을 읽으며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그 속에 든 '시'를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 이 <평범에 바치다>이다. 읽으며 새삼 느꼈다. 내 마음, 참 안 좋은 때야, 지금....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가 어쩌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에게 들키고 말았다. 고로 나는 이제서야 이미 떠나간 그의 말을 이해한다.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는 일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게다가 '시인이 되고자 한다'는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이선영은 담담하게, 그러나 따끔하게 나를 일깨운다. 평이한 산문같은 시들이, 내가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순간에, 그 한 순간에 잃어 버리고만 시의 마음과 생각의 방향을 잊지 않고 걸어간다. 그 산문같기도 한 시들이 찰칵, 내가 순간 잃어버린 그것을 사진을 꺼내놓듯 불쑥 내 눈앞에 디미는 것이다. 그 앞에서 나는 그지없이 불편한 내 맘을 보고야 만다. 시를 읽으며 나는 매번 불편하다. 몸에서 마음에서 힘이 포옥 빠져나가 버린다. 그리고 나는 나의 '시'를 매번 포기해 버린다. 나의 평범이란 아직 바친 것 하나 없는 조야한 평범. 그래서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척 알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집 읽기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사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읽는다. 최근 신간 '일찍 늙으매 꽃꿈'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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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술 이해의 길잡이
쓰지 노부오 지음, 이원혜 옮김 / 시공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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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미술, 하면 나는 으레 화려한 색채 위에 금분을 입힌 꽉 찬 장식화를 떠올린다. 한 발 더 나가면 일본 귀족들이 가문의 문장으로 쓰던 자연물의 도안들, 더 나가면 기모노의 대담한 무늬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이 책표지의 우키요에를 생각한다. 역시 꽉 찬 그림이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선생님은 빈 화면이 없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하다못해 흰색 물감이라도 좋으니 다 칠하라고, 빈 화면은 남기면 안된다고. 기껏 8절 도화지 채우는 일도 끔찍한 노동이었다. 지금이라고 안 그러랴. 화면을 다 채우는 일은 지금도 극심한 노동이다.

그 노동의 격심함을 장식욕, 사치욕, 허세욕, 풍류욕으로 극복한 민족의 미술을 엿보려고 든 책이 이 책이다. 독후감을 한 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렵다. 일본미술이론가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면서 써내려간 책을 읽으며 묘한 느낌이 들었으니, 그것은 일종의 소외감이기도 하다. 그 철저한 자부심, 교묘한 눈가림, 부단한 띄우기, 침소봉대가 읽는 내내 내 속 어딘가를 긁었고 그나마 이렇게라도 바라보는 우리미술이론가를 찾을 수 없을까, 인터넷책방검색기를 들락날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 미술을 좋아한다. 서양의 그것과 비교해 나는 일본의 미술작품 앞에서 더 많이 멈춘다. 대개 그런 그림은 몇 점으로 한정되지만 빈도수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른다. 작품 앞에 서서 오래 바라볼 줄은 알지만 화가나 미술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문외한에 가깝다. 사실 '알면 그 만큼 더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지식의 개입없이 절대미감으로 작품을 대하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 되도록이면 작가나 화가, 음악가에 대한 지식을 피해 왔다. 아무래도 그 이유가 이 욕망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사실은 지금 몸소 체험 중이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이 책도 그 체험의 일부이다. 덕분에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어떤 것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짐작도 생겨났다. 이런 종류의 책읽기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바람부는 가을의 어느 해질녘 겐지는 아카시노 주구와 함께 그녀를 문안했다. 겐지는 고개를 숙이고 무라사키노우에는 얼굴을 소맷자락에 대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보면 볼수록 무상한 바람에 흩날리는 싸리꽃 위의 이슬'이라며 덧없는 자신의 운명에 비유하여 시 한 수를 읊게 되는데.... 화면 왼편에 은니銀泥로 미묘하게 처리한 마당부분의 공간에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싸리, 참억새, 마타리 등 가을풀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가을풀은 하나의 점경點景으로서가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의 감정, 아니 화면 전체의 감정이 그 속에 배어 들어 있음을 어느 누구라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감정을 당시의 말로 바꾸어 보면 다름아닌 '애틋함(아와래あはれ)'이 된다.-「겐지왕자이야기 두루마리그림」 중 '불법佛法 장면' 해설부분

이 마당 가을풀의 이미지는 시대를 달리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즉 에도 막부 말엽인 1820년경 사카이 호이쓰가 그린 「여름과 가을의 풀그림병풍夏秋草圖屛風」중의 '가을풀'광경이다. 한 차례 부는 바람이 가을풀들을 술렁이게 하고 단풍든 담쟁이덩굴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은박입힌 배경의 미묘한 수묵표현으로 인하여 사생풍으로 그려진 가을풀이 돋보임과 동시에 화면 전체에 서늘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어째 저 '아와래 あはれ' 부분에서 멈췄다. '애틋함'이라. 이렇게 콕 집어내는 것을 읽고 있자면 그림에서 애틋한 음악이 흐르는 것같다. 일본 만화 <음양사>를 읽다 보면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생활사가 한눈에 들어오는데(이 만화는 강추다! 그림도 볼만하고!! ) 저 아와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생각나기도 했다.

어쨌든 내 마음에 든 그림은 사카이 호이쓰의 그림이다. 일본에 가게 된다면 저 병풍을 꼭 한번 구경하고 싶어졌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담쟁이덩굴과 화면 밖으로까지 뻗어나가 보이지 않는 가을풀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역시 만화지만 <후쿠야당의 딸들>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교토라는 곳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집 둘째딸 이름은 아라레, 싸락눈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 걸맞는 과자를 후쿠야당의 장인이 만드는데 그 또한 아라레. 애틋함이라는 아와래와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집 둘째딸은 내 기억 중의 하나가 된다. 이름이 참 이쁘지 않은가. 그런 풍취가 있다는 것이 마음을 기울게 한다.

;이 '애틋함'에 대비되는 정서도 있다 한다. 자연의 생동감에 의탁한 적극적 감정의 방출은 역동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특히 꽉 찬 화면으로 나타나는 그림들이 그 예가 된다. 하세가와 도하쿠(1539~1610)의 「소나무와 가을풀 그림松に秋草圖」는 높이 2m나 되는 화면 윗부분까지 참억새, 부용 등이 쭉쭉 뻗어 있다. 화면을 비스듬히 질러간 거대한 소나무가 금색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잎줄기들은 화면의 양 상단부를 덮고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화면은 꽉 차있다. '화면을 벗어나 공중 속으로 계속 그려가는 듯한' 이 구성 감각은 쾌활하게 상대에게 열려진 심정이 화면에 개입된 것이라 하는데 이런 마음을 '명랑함をかし'라 한다 한다. 확실히 화면 밖으로 사라진 것들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바깥으로 확장되는 화면을 느낄 수 있는데 이전통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유명한 판화연작인「후지산의 삼십육 경치富嶽三十六景」가운데 유명한 '가나가와의 파도'(1831)와 닿아 있다고. 꽉 찬 화면이 좀 답답해 보인다면 화면 바깥을 보면 된다는 얘기겠다. 사실 호쿠사이의 저 부악삼십육경은 참 보기 좋다. 보고만 있어도 그 거친 파도의 감각이 충분히 전해진다. 그 감각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히 있는 화면 바깥의 거친 바다가 들어 있다. 이들의 꽉 찬 화면에서 '명랑함をかし'를 느껴나 보자, 앞으로...

흑백도판으로 본 하세가와 도하쿠의 금색 구름도 꼭 보고 싶다.

;일본미술책을 읽으며 오히려 만화 생각을 더 많이 하게된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도판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화에 지나지 않는 그림들을 올려 놓고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이도 느꼈으며, 그래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하기도 했다. 일본을 간과하지는 않지만 그네들 말을 그대로 듣고 끄덕거려주고 싶지도 않은 내 심사는 결국 우리 그림 이해의 숙제를 남겼다.

덤!

음양사(오카노 레이코 작 ~13권, 미완)

비록 5등신으로 보이는 인물체이기는 하나 그림 좋고 내용 좋다. 영화 <음양사>도 나왔거니와 물론 그 주인공 아베노 세이메이가 여기서도 주인공이다. 이 만화를 보고나서 영화를 보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영화보다 아마 백배는 낫지 싶다. 영화는 아직 안 봤다. 얼핏 영화장면을 보았는데 세이메이가 세이메이가 아니어서 지금 볼까 말까 하고 있다.

옴니버스라서 천천히 읽는 맛을 볼 수 있고 주변 인물들과 배경이 실사에 못지 않다. 고증이 잘된 작품이랜다. 구비해놓고 싶은 작품이다. 헤이안 시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좋은 일본사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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