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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술 이해의 길잡이
쓰지 노부오 지음, 이원혜 옮김 / 시공사 / 1994년 10월
평점 :
품절
일본의 미술, 하면 나는 으레 화려한 색채 위에 금분을 입힌 꽉 찬 장식화를 떠올린다. 한 발 더 나가면 일본 귀족들이 가문의 문장으로 쓰던 자연물의 도안들, 더 나가면 기모노의 대담한 무늬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이 책표지의 우키요에를 생각한다. 역시 꽉 찬 그림이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선생님은 빈 화면이 없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하다못해 흰색 물감이라도 좋으니 다 칠하라고, 빈 화면은 남기면 안된다고. 기껏 8절 도화지 채우는 일도 끔찍한 노동이었다. 지금이라고 안 그러랴. 화면을 다 채우는 일은 지금도 극심한 노동이다.
그 노동의 격심함을 장식욕, 사치욕, 허세욕, 풍류욕으로 극복한 민족의 미술을 엿보려고 든 책이 이 책이다. 독후감을 한 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렵다. 일본미술이론가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면서 써내려간 책을 읽으며 묘한 느낌이 들었으니, 그것은 일종의 소외감이기도 하다. 그 철저한 자부심, 교묘한 눈가림, 부단한 띄우기, 침소봉대가 읽는 내내 내 속 어딘가를 긁었고 그나마 이렇게라도 바라보는 우리미술이론가를 찾을 수 없을까, 인터넷책방검색기를 들락날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 미술을 좋아한다. 서양의 그것과 비교해 나는 일본의 미술작품 앞에서 더 많이 멈춘다. 대개 그런 그림은 몇 점으로 한정되지만 빈도수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른다. 작품 앞에 서서 오래 바라볼 줄은 알지만 화가나 미술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문외한에 가깝다. 사실 '알면 그 만큼 더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지식의 개입없이 절대미감으로 작품을 대하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 되도록이면 작가나 화가, 음악가에 대한 지식을 피해 왔다. 아무래도 그 이유가 이 욕망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사실은 지금 몸소 체험 중이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이 책도 그 체험의 일부이다. 덕분에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어떤 것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짐작도 생겨났다. 이런 종류의 책읽기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바람부는 가을의 어느 해질녘 겐지는 아카시노 주구와 함께 그녀를 문안했다. 겐지는 고개를 숙이고 무라사키노우에는 얼굴을 소맷자락에 대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보면 볼수록 무상한 바람에 흩날리는 싸리꽃 위의 이슬'이라며 덧없는 자신의 운명에 비유하여 시 한 수를 읊게 되는데.... 화면 왼편에 은니銀泥로 미묘하게 처리한 마당부분의 공간에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싸리, 참억새, 마타리 등 가을풀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가을풀은 하나의 점경點景으로서가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의 감정, 아니 화면 전체의 감정이 그 속에 배어 들어 있음을 어느 누구라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감정을 당시의 말로 바꾸어 보면 다름아닌 '애틋함(아와래あはれ)'이 된다.-「겐지왕자이야기 두루마리그림」 중 '불법佛法 장면' 해설부분
이 마당 가을풀의 이미지는 시대를 달리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즉 에도 막부 말엽인 1820년경 사카이 호이쓰가 그린 「여름과 가을의 풀그림병풍夏秋草圖屛風」중의 '가을풀'광경이다. 한 차례 부는 바람이 가을풀들을 술렁이게 하고 단풍든 담쟁이덩굴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은박입힌 배경의 미묘한 수묵표현으로 인하여 사생풍으로 그려진 가을풀이 돋보임과 동시에 화면 전체에 서늘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어째 저 '아와래 あはれ' 부분에서 멈췄다. '애틋함'이라. 이렇게 콕 집어내는 것을 읽고 있자면 그림에서 애틋한 음악이 흐르는 것같다. 일본 만화 <음양사>를 읽다 보면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생활사가 한눈에 들어오는데(이 만화는 강추다! 그림도 볼만하고!! ) 저 아와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생각나기도 했다.
어쨌든 내 마음에 든 그림은 사카이 호이쓰의 그림이다. 일본에 가게 된다면 저 병풍을 꼭 한번 구경하고 싶어졌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담쟁이덩굴과 화면 밖으로까지 뻗어나가 보이지 않는 가을풀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역시 만화지만 <후쿠야당의 딸들>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교토라는 곳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집 둘째딸 이름은 아라레, 싸락눈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 걸맞는 과자를 후쿠야당의 장인이 만드는데 그 또한 아라레. 애틋함이라는 아와래와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집 둘째딸은 내 기억 중의 하나가 된다. 이름이 참 이쁘지 않은가. 그런 풍취가 있다는 것이 마음을 기울게 한다.
;이 '애틋함'에 대비되는 정서도 있다 한다. 자연의 생동감에 의탁한 적극적 감정의 방출은 역동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특히 꽉 찬 화면으로 나타나는 그림들이 그 예가 된다. 하세가와 도하쿠(1539~1610)의 「소나무와 가을풀 그림松に秋草圖」는 높이 2m나 되는 화면 윗부분까지 참억새, 부용 등이 쭉쭉 뻗어 있다. 화면을 비스듬히 질러간 거대한 소나무가 금색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잎줄기들은 화면의 양 상단부를 덮고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화면은 꽉 차있다. '화면을 벗어나 공중 속으로 계속 그려가는 듯한' 이 구성 감각은 쾌활하게 상대에게 열려진 심정이 화면에 개입된 것이라 하는데 이런 마음을 '명랑함をかし'라 한다 한다. 확실히 화면 밖으로 사라진 것들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바깥으로 확장되는 화면을 느낄 수 있는데 이전통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유명한 판화연작인「후지산의 삼십육 경치富嶽三十六景」가운데 유명한 '가나가와의 파도'(1831)와 닿아 있다고. 꽉 찬 화면이 좀 답답해 보인다면 화면 바깥을 보면 된다는 얘기겠다. 사실 호쿠사이의 저 부악삼십육경은 참 보기 좋다. 보고만 있어도 그 거친 파도의 감각이 충분히 전해진다. 그 감각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히 있는 화면 바깥의 거친 바다가 들어 있다. 이들의 꽉 찬 화면에서 '명랑함をかし'를 느껴나 보자, 앞으로...
흑백도판으로 본 하세가와 도하쿠의 금색 구름도 꼭 보고 싶다.
;일본미술책을 읽으며 오히려 만화 생각을 더 많이 하게된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도판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화에 지나지 않는 그림들을 올려 놓고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이도 느꼈으며, 그래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하기도 했다. 일본을 간과하지는 않지만 그네들 말을 그대로 듣고 끄덕거려주고 싶지도 않은 내 심사는 결국 우리 그림 이해의 숙제를 남겼다.
덤!
음양사(오카노 레이코 작 ~13권, 미완)
비록 5등신으로 보이는 인물체이기는 하나 그림 좋고 내용 좋다. 영화 <음양사>도 나왔거니와 물론 그 주인공 아베노 세이메이가 여기서도 주인공이다. 이 만화를 보고나서 영화를 보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영화보다 아마 백배는 낫지 싶다. 영화는 아직 안 봤다. 얼핏 영화장면을 보았는데 세이메이가 세이메이가 아니어서 지금 볼까 말까 하고 있다.
옴니버스라서 천천히 읽는 맛을 볼 수 있고 주변 인물들과 배경이 실사에 못지 않다. 고증이 잘된 작품이랜다. 구비해놓고 싶은 작품이다. 헤이안 시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좋은 일본사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