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예제대한 귀족 출신 영국대령과 이튼 출신이지만 한낱 시골의 무화과장수가 아버지였던 안쓰러운 사기꾼 윌리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주인 하나만을 섬기며 함께 죽음을 불사하는 승조원 블라디미르와 선의로 가득 차 과장스러운 호기를 부리지만 결국은 삶의 방향으로만 치닫는 그런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 세린느와... 그리고 한때 의학박사였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살인을 했고, 그래서 감옥에 간 남자와 자신의 모든 것, 신분도, 사랑도, 직업도, 이름도 모두 버리고 새로 태어난 전락자와 그렇게 얻은 곳이 다시 그의 둥지가 되어 냄새나고 누추하고 지저분한 그 곳에서만 편안히 죽을 수 있게 된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그런 쉰일곱살의 노인이 된 그를 자기 아이처럼 사랑해준 선량한 브뤼셀 출신의 여자. 정말 자기 애를 다루듯 하며 한 가족으로 살았던 선상 위의 삶. 심농의 작품에는 참으로 애잔하고 끈끈한 人情이라는 게 반드시 흐르고 있다. 추리소설을 읽고 이런 여운을 느끼게 하는 작가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느낀 탁월한 공간 묘사력은 인물에게로 향한다. 갈레씨도, 생틸레르도, 갈레의 부인 오로르도, 갈레씨 아들 앙리도, 그리고 그의 정부도... 거기에 군경관이나 뫼르스 같은 검사관이나 세관원 등등에 대한 묘사는 그 각각의 개성이, 개성을 넘어 정형화에까지 이르겠다 싶을 정도로 예리하다. 매그레의 혼돈과 답답함을 읽는 내내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막판 그의 결론은 역으로 어찌나 명쾌하던지... 물질적인 단서들을 모아놓았을 때 사실들이 단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흐릿해진다면, 그것은 그 단서들이 조작되었다는 뜻이지. - 225 신분과 관련된 강력한 아이러니로 역시 강력한 반전을 꾀한, 문학성마저 엿보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