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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76세. 죽음의 문턱에서 아름답고 명민하고 건방지고 오만했던 유사역사가 클라우디아가 세계의 역사를 쓴다. 자기만의 호흡으로, 자기만의 필체로, 자기만의 사소함으로 구성된 세계사를. 그렇지. 클라우디아는 비웃었지만 재스퍼의 말처럼 역사는 퍼블릭 도메인이다. 영특하고도 개성적 탁월함으로 역사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선명한 라인으로 구성하고 해석하지만 한 인간에게 진정한 역사는 역시 사생활의 직접개입을 통한 감정적 격발임을 돌이키고 만다. 클라우디아가 새로 쓰는 세계사는 자신과 단 하나의 연인 톰의 자리매김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으로 사각의 틀에 완벽하게 내접한 완결된 역사적 현장 하나가 추가된다.
한사코 밖에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화자. 시각에 따라 다를 수도, 틀릴 수도 있는 사람들의 심리, 그리고 행동의 원인과 결과들. 그리고 그에 따른 해석들. 모두가 독자의 인식을 흩뜨리고마는 작가의 미스샷 같지만, 어떻게 보아도 주 화자인 클라우디아의 해석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서술상의 결함이라기보다는 기교라는 생각이 앞섰다. 오랜만에 천천히, 숙고하며 읽어야 했던 작품이었다. 훌륭했다. 이집트 태생의 이집트 이야기 부분이 가장 멋졌다. 그리고 인간 역사의 전쟁 부분에 기록된 모든 사람의 얼굴이 다 그렇게 젊었다는 사실이 참 아릿했다. 자고로 역사가는(그 뿐 아니라 역사소설가까지도) 그 역사 속에 들어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낌없이 사랑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세심한 번역자 김선형씨께 감사도 함께. 많이 애쓴 번역임이 느껴졌다.
56_ 아직 이름이 불리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왔다가는 간다. 몇몇은 그저 다른 사람들 이상의 의미고, 특히 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 중요하다.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삶에서도 뜻밖의 일들이, 모퉁이 뒤에 숨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간이 다 지난 후 돌이켜볼 때, 그때 비로소 인과관계를 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잠시 우리의 무대배경을 설치하고, 이야기 구조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도록 한다. 나는 원래 시작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 모든 유년기를 낱낱이 분석하고 잘못된 일이 누구 탓인지 배분하는 흥미로운 작업을 하지 않는가. 나는 첫 출현의 순간에 중독된 사람이다. 역사가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하는 그 순수한 여명의 순간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평범한 문제들을 분주하게 고민하며 그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아한다. 굶주림이나 갈증, 조수의 흐름, 배가 항로를 이탈하지 않게 해야 한다든가, 사소한 싸움, 또는 신발이 젖었다든가, 아무튼 숙명만 빼고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터이다. 당대의 맥락 속에서는 전혀 야릇하지 않았을, (~ 블라블라블라)
83_ 과거나 미래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이, 도덕관념도 없는 자기만의 전언어(前言語)적 조건 속에 틀어박혀 있는, 이 작고 접근 불가능한 생경한 존재라니.
97_ 역사는 결국 퍼블릭 도메인이야.
108_ 신은 내가 쓰는 세계의 역사에 빛나는 주연을 꿰찰 것이다.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는가?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이 경이롭고 끔찍스러운 서사를 책임져야 한다. (중략) 역사시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물을 주관하는 막연한 난공불락의 권력을 믿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17_ 리사는 영혼 속에 자기도 모르는 문제들을 지니고 있어. 난 그게 흥미롭더군. 그게 정말 매혹적이라고 생각해, 정말로. 리사를 바라보면, 스텝 지대의 늑대들이 울부짖고, 보로디노에서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이리나가 모스코바를 위해 한숨을 짓지. 모든 건 파생되고, 모든 건 마음 속에 있는 법이지. 사실과 허구의 조합, 이거야말로 우리가 세계를 알게 되는 수단인 거야. 그렇지만 리사는 러시아인 할아버지가 있고, 그건 의미가 있지.
149_ 그 동안 내내 나는 공적인 삶과 동시대에 교감하는 등등 거창한 관념들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몰개성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요. 사는 게 안락하다 못해 호사를 부린 거라고, 지금은 깨닫게 되었지만. (중략) 약속하지만 이 모든 건 이제 달라졌어요. 사람을 아주 사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동시대와 교감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188_ 아니, 안 그럴걸. 나 때문에 죽었다고 탓할 거야. 물론,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혼자.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실비아의 말없는 비난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포인세티아를 가져오다니 정말 실비아다워. 꼭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구제불능 둔탱이가 심지어 자기도 모르는 새 잔인하기까지 하다니.
192_ 클라우디아는 몇 가지 대답들을 고려해 본다. 그러는 스스로에게 놀란다. 대답을 숙고하는 건 그녀답지 않다. 당돌하거나, 바보스럽거나, 회피하거나, 현학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226_ 나는 분별있는 시민이 될 겁니다. 대지의 자식이 될 거예요. 손이 더러워지도록 일할 겁니다. 농부가 될 수도 있고. 어디든 비가 아주 많이 내리고 식물들이 무섭게 자라는 그런 데서 살고 싶어요. 땅의 결실들이 번식하는 그런 걸 보고 싶어요. 미래를 위해 양식을 준비하고 싶어요. 천국을 믿지 않으니까, 지상의 부를 쌓고 싶어요.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푸르른 밭과 통통한 암소들과 떡갈나무들을 원해요. 오, 그리고 한 가지 더 원하는 게 있어요. 아이를 갖고 싶어요.
237_ 어떻게? 어디서? 즉사했을까? 아니면 천천히, 혼자서, 모래 위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힘이 없어서 조명탄도 발사하지 못하고. 물통도 못찾고. 그냥 누워서 죽기만을 기다리면서.
제발 즉사했기를.
334_ 그녀는 이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차라리 클라우디아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젠 그 말이 머무를 테니까.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머무르면서 만사를 복잡하게 만들 테니까.
360_ 전투 와중이 아니라, 전투 직전이 늘 최악이다. 공포에 대한 공포. 때가 왔을 때 공포로 꼼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릴까 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까 봐, 뭔가 지독한 병신 짓을 하고야 말까 봐 두렵다. 실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고, ~~~
377_ 나는 이제 당신보다 두 배나 나이를 먹었어요. 당신은 젊고, 난 늙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