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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더 귀하다 - 아픔의 최전선에서 어느 소방관이 마주한 것들
백경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1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병원 기록에 의하면 남자는 오래도록 심장병을 앓아서 재작년인가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게다가 당뇨 합병증으로 몸속 여기저기가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목숨을 잃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 놓쳤기 때문에 남자가 목숨을 잃은 것 같았다. 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늘이 돕는 상황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내가 죽였다. 변변치 않은 나를 향한 의심과 질책이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마음의 댐은 늘 한계 용량에 가깝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문을 열었다. 꽁꽁 막아둔 기억이 벌컥벌컥 밀려 나왔다.
p.28
이후로 다행이란 말은 나에게 구급차 내 금기어가 되었다. 뭐든 내 기준으로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벗겨지지 않고 까져서, 잘리지 않고 찢어져서, 죽지 않고 살아서 다행이란 말은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요새는 그냥 속으로만 뇐다.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그건 당신의 삶이 죽음에서 벗어난 것을 안도하는 내 마음의 소리다. 나름 애틋함의 표현이다.
p.42
나는 스스로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우월감에 도취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건 원래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결국 제일 인간답지 않았던 건 나였다.
p.54
편지엔 저희 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하단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같은 사람이란 말이 왜 그렇게 우울하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사실, 세상에 큰 죄를 짓는 건 가난이 아니라 큰돈인데 오히려 가난을 죄라고 말한다는 참 우스운 일입니다.
당신 아들은 그런 나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당신을 모욕하고 삶에서 영영 떨어뜨려 놓은 사람을 두고 편지에 은인이라고 썼습니다.
pp.64~65
마주하는 모든 죽음에 눈을 빼앗기면 마음이 남아나질 못한다. 그래서 출동부터 귀소까지 머릿속에 주문처럼 뇐다.
내 가족 아니고 내 친구 아니다. 그게 룰이다.
pp.71~72
대신 세상에서 보통 사람이 가지는 역할이 하나 있다. 그건 가장 보통의 역할이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바로 타인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는 것, 그래서 세상을 보통 사람들의 온기로 채우는 것이다. 나는 그 역할이 우리가 사는 땅에 지금껏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믿는다.
p.105
우울한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닌데 미안해. 여하튼 네가 죽으면 내가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완벽한 해결책이 되진 않을 텐데 이렇게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밖으로 나가서 걷는 거야.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으면 억지로 뭐도 좀 먹고, 목마르면 편의점에서 물도 사다가 마시고. 그러다가 막 뿜뿌가 오는 물건이 눈에 들어오면 질러버리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걷는 거니까. 그렇게 걷다 보면 꼭 괜찮은 사람을 만난다거나 쓸 만한 뭔가를 줍게 되어 있거든. 인생이 그래.
p.199
백경, <당신이 더 귀하다> 中
+) 이 책은 소방관으로, 119 구급 대원으로 살아가는 저자의 이야기를 단상 형식으로 담고 있다. 정확히는 저자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저자가 접한 죽음들, 저자가 느낀 감정들을 진솔한 문장으로 쏟아냈다.
평생 누군가의 죽음을 한두 번 보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방관이나 구급 대원들은 거의 매일 한 두 번씩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스러움과 이승을 떠나 저승의 길에 들어선 이들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 심적 동요는 상당한 충격이라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직업으로 반복되면서 저자는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에 거리두기를 한다. 그게 스스로의 위치에서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진상일 수 있나 싶은 사람들부터, 구급 대원을 만나서 정말 다행인 사람들, 형식적으로는 돕지 않아도 되지만 인간적으로 돕게 되는 사람들까지.
너무나 솔직하게 쓰인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에 함께 슬퍼했고 아파했고 속상했고 씁쓸했다. 또 저자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며 동감했다.
소방관들과 구급 대원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 책이었다. 어떤 직업이 사명감이 없겠냐마는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가장 위급할 때 제일 먼저 접하는 그들의 몸과 마음이 어떨지 깊이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또한 인간에게 실망하면서도 인간에게 희망을 갖는다는 걸 이 책의 여러 사람들을 통해 다시 한번 느꼈다. 저자의 말처럼 보통 사람이 따뜻한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를 위해, 그리고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과 숭고한 죽음을 위해 심리적 거리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 먼저 지켜야 할 규칙들과 선을 따라 행동하는 것, 그게 더 많은 이들을 살리고 더불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지 않나 싶다.
당신이 더 귀하다는 저자의 말에 새삼 뭉클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세상에 숭고하지 않은 죽음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하는 소방관과 구급 대원들의 모습에 감사함을 갖게 해준 책이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소방관의 삶과 마음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진솔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