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카 평전 - 사회적 통념을 거부한 역사가
조너선 해슬럼 지음, 박원용 옮김 / 삼천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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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진 책이다. 모든 역사란 과거에만 얽매여 있는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밝혀주는 까닭이다. 그만큼 그 책은 카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E.H.카는 처음부터 역사학자로서 인생을 산 게 아니었다. 그가 학자로서 길을 걷기 전 영국의 외교관으로 일을 했고,〈타임스〉의 부편집인으로서 언론계에 종사한 적도 있다. 더욱이 도스토옙스키나 바쿠닌의 전기를 비롯해 게르첸과 같은 러시아 사상가들을 다룬 저작들도 많다. 외교관으로 재직할 당시 자본주의와는 다른 노선을 걸은 러시아에 흠뻑 젖어든 까닭이다.

외교관을 떠나 학자로서의 삶을 살 때 처음 관심을 둔 분야는 국제관계학이었다. 애버리스크위스의 '우드로 윌슨 기금교수'직에 임명된 그는 일본의 침략행위와 히틀러의 베르사유조약 폐기,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과 같은 복합적인 국제연맹의 질서들을 파헤쳤다.

그로부터 출발한 1939년의 초기 저작인 〈20년간의 위기, 1919-1939〉는 양차대전 사이의 국제관계에 대한 탁월한 분석서로 호평을 받는다. 물론 그것은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국제 질서의 필요성을 제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편 1944년 52살에 집필하여 33년이 지난 65살에 완성한 14권의〈소비에트 러시아사〉는 그의 위대한 역작으로 손꼽힌다.

"카는 전기 작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양의 출판물 말고는, 1925년부터 1960년까지 쓴 비망록과(그 이후 기록들의 행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얼마 되지 않은 육필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형편은 카의 삶을 백지 상태에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을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던 까닭이기도 하다."(10쪽)

이는 조너선 해슬럼의 〈E.H.카 평전〉에 나오는 머리글이다. 카에 대한 일대기를 그려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그만큼 그가 쓴 책들과 몇 몇 비망록 이외에는 그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해슬럼이 그를 아는 친인척들을 비롯해 그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까지 직접 찾아다니면서 그에 관한 사항들을 들으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18년 4월, 이제 카는 확실히 러시아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다른 외무부 직원들처럼 러시아어에 능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암거래 단속국에서 러시아와 인접 국가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북유럽과로 부서를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세 사람으로 구성된 팀의 막내로서 정치적 차원에서 볼 때 볼셰비키 혁명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처음으로 다루게 되었다. 나무지 두 사람은 '보통의 외무부 직원'이었다."(57쪽)

이는 캠브리지를 졸업한 카가 영국의 외교관에 임시적으로 발탁돼 수행한 일을 밝혀주는 내용이다. 물론 그로부터 20년 동안이나 외무부에서 일하게 될지는 카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카는 러시아의 물자가 외국으로 흘러가는 공급경로를 보호하고 있었다.이른바 경제전쟁을 수행하는 '암거래단속국(Contraband Department)'의 직원이 그의 일이었다. 물론 그가 수행하는 탁월함에 비해 러시아어가 뒤떨어져 결국 북유럽과로 옮겨가는 설움도 겪는다.

그러나 리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영국 공사관에서 근무할 땐 달랐다. 그는 전 남편에게서 세 자녀를 얻고 있던 '앤'을 만나 혼인하고, 막내아들 존까지도 새로 얻는다. 그 시절 그는공사관의 따분한 업무보다 러시아어를 배우는데 힘을 기울였고, 그것을 계기로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푸시킨,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을 읽어나간다. 1929년 4월 런던의 외무부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도스토옙스키〉평전을 본격적으로 써 나간다.

"카는 이 자리에서 트레벨리언 강연을 되풀이하듯 다음과 같이 강조햇다. "역사가가 무엇인가를 중요하다고 여길 때, 그 기준은 ……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필연적으로 현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움직이고 있고 학문의 대상으로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현재 이 대학 강의 내용은 대부분 1914년 이전의 역사이다. 이런 강의는 지금도 여전히 서유럽, 특히 대영제국을 역사의 주인이라고 간주한다. 이런 상황은 말이 되지 않는다."(398쪽)

이는 63살의 카가 모교인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칼리지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개혁파교수들과 함께 '교과과정 개편'에 관한 제안서를 이사회에 제출한 내용이다. 그만큼 그는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거부한 학자였던 셈이다. 그걸 계기로 대학 당국은 미국학 연구를 비롯한 많은 근현대 연구자들을 충원했다고 밝힌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의 인지도가 가장 급부상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가 책으로 나오기 전,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강연한 캠브리지 밀레인의 '트레벨리언 강좌'와, 그 강연 내용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인 '이사야 벌린'의 공격은 카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는데 한 몫 톡톡히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 전과는 확실하게 다른 대학당국의 개혁바람이 카의 인지도를 실제적으로 끌어 올린 배경일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박원용 교수는 이 책이 카의 개인사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그의 역작인〈소비에트 러시아사〉가 담고 있는 그 의미와 비중에는 약하다는 뜻이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학자로서 보는 당연한 안목이지 않을까?

다만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카의 인생역정을 비롯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점철된 국제질서, 그리고 카를 중심으로 다룬 아놀드 토인비와 루이스 네이미어와 아이작 도이처와 이사야 벌린 등의 사상적 논쟁을 읽어나가는데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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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 - 국망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거울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2
박은식 지음, 김태웅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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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구성하는 요소가 있다. 때와 땅과 사람이다. 사람 중에서도 내가 활동하는 영역은 국사(國史)가 된다. 만국사(萬國史)는 다른 사람이 활동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비록 공간은 다를지라도 한 때와 한 땅을 위해 일한다면 그 역시 국사가 된다. 1910년 일본에게 강제병합 당해 만주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동시대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경술년 국망(國亡)하던 그 시절에 많은 유학자들이 자결했다. 박은식도 그때 자결해야 했지만 부득이하게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윤세복 형제가 세운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함이었다. 다만 길거리의 아이들조차 그를 향해 망국노(亡國奴)라 놀려대던 욕지꺼리는 기꺼이 짊어져야 했다.
그가 쓴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슬픈 역사'만을 뜻한 게 아니다. 1915년 중국 상해에서 그걸 출판할 때 그는 빼앗긴 나라의 슬픔을 품으면서도 민족혼만큼은 지켜내고자 했다. 그것이 역사를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그 스스로 밝힌 이유였다.
"터키가 이집트를 멸망시켜도 왕을 존속시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던 데 반해 한국의 황제는 모든 지위를 잃고 일본 화족(華族) 체제에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캐나다를 예로 들면서 영국이 캐나다와 다른 나라 사이에 맺은 조약을 보존토록 한데 반해 한국인은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34쪽)
이는 김태웅 교수가 역해(譯解)한 〈한국통사(韓國痛史)〉에 나오는 서언 부분이다. 이른바 일제의 극심한 차별정책을 다른 제국주의 정책과 비교하여 설명하는 부분이다. 물론 무턱대고 박은식의 견해만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 해설집 속에는 박은식이 참조했을 만한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해 정교의 〈대한계년사〉와 황현의 〈매천야록〉등 다양한 책들을 함께 비교분석하여 설명한다.
"서원을 바로 철거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지체 없이 관직을 빼앗고 죄를 물었다. 여러 도에서는 이러한 소리를 듣고 벌벌 떨며 일시에 헐어버리고 그 땅에서 생산되는 양곡은 거두어 군량으로 삼았다. 이에 사족들은 그 근거지를 상실하여 마음속으로 앙앙대고 대원군을 헐뜯으며 동방의 진시황이라 욕하였지만, 백성들은 한결같이 그의 현명한 결단을 칭송하였다."(72쪽)
이는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第三章 書院撤廢'에 나오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내용이다. 김태웅 교수는 당시의 박은식이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서원 철폐만큼은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그 다음 장에 이어지는 대원군의 조세개혁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밝힌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의 심복으로 지목되었던 자도 모두 배척되었고 갑신지변(甲申之變)으로 개혁당과 가까이 한 흔적이 있는 자도 모두 제거되었다. 중요한 자리에서 세력을 잡고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의 명령을 맡은 자는 오직 외척인 민씨 일가뿐이었다. 설사 척신(戚臣)으로서 어질더라도 한 나라의 업무는 큰 것이어서, 한 집안이 홀로 짊어질 수 없다. 하물며 모두 재주가 뛰어나지도 않은데, 총애를 믿고 세력에 의지하여 교만하고 사치하며 탐욕스럽고 방종한 무리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나라의 앞길이 더욱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123쪽)
이는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第十章 甲申革黨之亂'에 나오는 글귀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김태웅 교수는 일제의 부당한 제국주의 정책을 알린 한국통사의 '서언'과 함께 이 부분이야말로 한국통사의 '별미'라고 손꼽는다. 그것은 박은식이 갑신정변의 동시대를 살았다는 점 때문이다. 다만 김태웅 교수는 정변세력이 공포한 국정개혁안에 대한 소개가 없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꼬집는다. 그건 박은식이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을 직접 만나지 못한 이유라고 풀어낸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일제의 기만적인 침략을 한국의 주요 사건과 연결시켜 비판한 점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이른바 동학란, 러일전쟁, 을사늑약, 일진회 공작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고종의 강제퇴위, 화폐정리사업, 자원수탈, 군대해산, 교육탄압 등을 들어 일제의 침략상도 크게 부각시킨다. 그만큼 김태웅 교수는, 박은식의〈한국통사(韓國痛史)〉에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그 망국노(亡國奴)의 얼과 혼이 깊이 베어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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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 돈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3
이시백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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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세 아이들은 돈이 있으면 군것질을 하고 딱지를 산다. 초등학교 3학년 큰 딸이 두 녀석을 모두 이끈다. 집에서 놀다보면 녀석들은 어김없이 딱지치기를 한다. 재밌는 것은 서로 따기도 하고 내 주고 하는데 그때마다 큰 딸아이가 이긴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건 끝에 가서는 모두 본래 몫으로 되돌려 준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천원 단위 안에서 쓰는 것들이다. 어쩌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주는 만 원 단위의 용돈은 모두 엄마가 관리한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자기들 것을 왜 뺏느냐며 엄마에게 대든다.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아이들 나름대로 돈 쓰는 법을 익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시백 외 5인의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는 그에 따른 좋은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돈의 가치, 행복을 위한 소득, 주체적인 재정 계획, 규모 있는 소비지출 등 청소년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야 할 '돈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물론 딱딱한 경제교과서 수준이 아니다. 삶 속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길담서원의 청소년인문학교실에서 '돈'을 주제로 한 강연 원고를 엮은 것이다.

"학생이 잘못했을 때 벌금을 받는 것, 그 밑바탕에는 문제를 돈으로 해결한다는 자본주의적인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그랬을 때 좋은 점도 있겠지만 나쁜 점이 더 큽니다. 가장 큰 폐해가 뭡니까?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 돈으로써 자기의 잘못을 보상, 혹은 배상할 때, 그 학생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지각 한 번에 500원이라 하면, '선생님, 나 만원 낼 테니까 20일간은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벌금은 지각을 줄이기는커녕 지각을 합리화하게 되는 거죠."(31쪽)

이는 전직 선생님이었던 이시백 농부가 한 이야기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지각할 때면 뒤에다 벌을 세우거나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 지금은 돈을 내는 것으로 대체한다니 정말로 그럴까? 이시백은 벌써부터 돈으로 해결하는 신념과 습성을 심어주면 아이들이 배울 게 없다는 뜻이다. 교육만큼은, 그리고 농업만큼은, 돈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제 아이의 경우 인터넷이나 TV를 통해서도 정보를 얻더라고요. 신중하게 생각해요. 제한된 돈은 10만 원이에요. 자기가 3개월 동안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돈이 그래요. 그걸로 옷을 사야 하니까 자기 스타일도 생각하고, 자기는 청바지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 여러 벌 있으면 낭비다, 그러면서 청바지가 이미 두 벌 정도 있으니 다른 바지를 하나쯤 사야겠다, 근데 너무 튀는 색깔을 사지 말자. 이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거예요."(62쪽)

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용돈을 통해 경제교육을 해 온 제윤경 (주)에듀머니 이사의 말이다. 그녀는 요즘 청소년들이 필요보다 모방심리에 이끌려 욕구를 충족하는 세대라고 한다. 그런 세대와 달리, 중학생인 자기 아이에게는 주체적인 자기 돈 관리를 위해 한 달 용돈으로 16만원을 준다고 한다. 그것으로 급식비, 핸드폰 요금, 책값, 차비, 간식, 심지어 옷과 신발까지도 스스로 사게 한단다. 그에 따른 권리와 책임도 모두 아이의 몫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익히면 나중엔 정말로 규모 있는 삶을 살 것이다.

그와 같은 주체적인 재정 관리와 지출이 좋은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다는 점이고, 돈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하우스푸어'나 '아파트 노예'라는 말도 다들 빚 때문에 생긴 일들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남들처럼은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동조현상'에서 벗어나서 '결핍에서 오는 행복'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저희가 생각해 본 돈의 나쁜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많은 사람이 돈을 위해 꿈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돈 때문에 직업을 선택하잖아요. 두 번째는 친구를 사귈 때도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돈을 본다는 거예요. 돈 많은 친구랑 친해지려고 하고, 돈 없고 가난한 애들이랑은 멀리하려고 하는 거죠. 세 번째는 무조건 비싼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 명품이라면 하나씩은 꼭 가져 보고 싶어 하는 경향입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값 싸고 좋은 제품들도 많은데 유독 명품에만 주목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229쪽)

이는 광동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송승훈 선생이 강연한 '문학작품속의 돈'에 관한 내용을 듣고서 질문한 한 청소년의 고백이다. 그야말로 요즘 청소년들이 바라는 직업과 친구와 명품 등 돈을 둘러싼 솔직담백한 표현이다. 그런 청소년들이 우리사회 전반에 팽배한데 반해 아직도 뜻깊은 가치를 지향하는 청소년들이 있다는 게 가히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은 아이들이 길담서원의 청소년인문학교실에 더 많이 몰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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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3.11 - 대지진과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과 세계를 사유한다 아이아 총서 9
쓰루미 슌스케 외 지음, 윤여일 옮김 / 그린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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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후쿠시마 사태'가 지난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아직도 상황은 진행 중이고, 피해는 계속되고 있다. 지진과 해일로 한 달 뒤 사망자는 1만4천 명을 넘었고, 행방불명자도 1만2천 명에 달했다. 이재민 11만 명은 피폭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1년이 지나가는 동안 이들 중 200여 명은 목숨을 잃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임을 알면서도 왜 그들은 원전을 고집했을까. 원전 피해가 세계 여러 나라에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과연 일본의 원전사고로부터 무엇을 내다봐야 할까. 이 세 가지 궁금증이 지난 1년 동안 내 머리에서 맴돌았다.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은 그 궁금증을 없애줬다.

정남구의 <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과 쓰루미 슌스케 외 여럿이서 쓴 <사상으로서의 3·11>. 앞의 책은 <한겨레신문> 특파원인 정남구 기자의 후쿠시마 사태에 관한 일련의 취재기록이라면, 뒤의 책은 그 사태를 두고 일본 내 사상가, 평론가, 활동가 등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데 엮은 것이다.

"실제 3·11 대지진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지진에 의한 건물 붕괴가 아니라, 대부분 쓰나미에 의한 것이었다. 2011년 3월 12일 아침 <요미우리신문>은 11일 오후 11시 경찰청 집계를 인용해 사망자가 110명, 행방불명자가 350명이라고 보도했다. 2011년 3월 12일 석간에서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해 1200명이 넘는다고 전했다. 이는 실제 피해보다 엄청나게 적게 집계된 것이었다."(<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 31쪽 중)

이는 지진 피해보다 쓰나미 피해의 심각성을 알린 정남구의 취재기록이다. 진도 6강 이상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를 도입한 건축물이 많아 지진에 의한 붕괴 피해는 적었지만, 10미터 높이의 거대한 쓰나미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쳤던 까닭에 피해가 컸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원전 폭발사고에 있었다. 그때 1호기와 3호기와 2호기에서 연일 폭발 사고가 일어났는데, 더 큰 문제는 사용후 핵연료에 있었다고 한다. 그걸 냉각시키기 위해 헬기로 바닷물까지 투입했는데, 결국은 하이퍼소방대의 진압으로 제자리에 서게 됐다고 한다. 헌데 그곳에서 새 나오는 방사성 물질은 30km내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몰아냈고, 그로부터 2011년 4월 25일까지 45명이 원전사고로 죽었다. 원전난민은 무려 11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과연 '원전지진 재앙'을 예측하지 못하고서 그런 화를 당한 걸까. 아니다. 이시바시 가쓰히코 고베대학 도시안전연구센터 교수는 1997년 10월과 1999년 8월 27일에도 원전지진재앙이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걸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노우라 고지 도호쿠대학원 교수는 <일본삼대실록>에 나오는 869년 7월 9일에 일어난 '조간(貞觀) 지진'을 연구한 결과, 800년에서 1100년에 그와 비슷한 지진이 한 차례 더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고 한다.

대지가 무너지는 순간 약탈이 시작된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원자력발전을 고집했던 걸까. 사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원자폭탄과 8월 9일 나가사키에 터트린 플루토늄 핵폭탄으로 인해, 일본은 그 전부터 추진해온 핵무기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고 한다.

문제는 1954년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그 여론 몰이는 미국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코자 했던<요미우리>의 사주인 쇼리키가 했다고 한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은 어떻게 피폭국가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을까. 전후 성립된 냉전 체제에서 소련과 핵 경쟁에 나선 미국은 일본에 원자력을 추진하도록 권했다. 그리고 정치인- 행정관료 - 산업계 - 매스컴 - 학계로 짜여진 '원자력 마피아'가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을 사회에 유포시켰고, 그때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자가 당시 <요미우리>의 사장이었던 쇼리키 마츠타로다."(<사상으로서의 3·11> 27쪽 중)

3·11 원전피해가 세계 여러 나라에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사상으로서의 3·11>을 통해 여러 사상가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말한다. '대지를 지키고, 세계를 지키자'고 말이다. 하나의 대지가 무너지는 순간 그 조화가 무너지고, 점차 약탈과 전쟁과 테러로 가속화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해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원전 가동은 중단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원전이 '제어된' 원폭이라는 점에서 원전과 원폭이 구별된다고들 하지만 수사에 불과한 말이다. 원폭이 다른 고전적인 대량살상무기와 다른 점은 폭발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잠재적 에너지는 티끌만큼도 소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원폭이 폭발하면 가공할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 아무리 처참하다고 해도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원폭 투하로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이 마주하는 것은 종지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휴지부이며, 그것은 언제까지고 미해결로 남겨지는 과잉된 문제의 지속이다."(<사상으로서의 3·11> 250쪽 중)

2024년까지 원전 13기 추가 증설... 문제 있다

후쿠시마로부터 약 1240km에 떨어져 있는 우리는 무얼 내다봐야 할까. 현재 우리나라는 21기의 원전이 돌아가고 있고, 원전 개수는 일본의 절반 수준이지만 국토면적의 원자력 발전 용량은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2024년까지 원전 13기를 추가로 증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60%까지 끌어 올리고, 2020년까지 6조 원을 원전에 쏟아 부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안전지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우리도 후쿠시마처럼 언제라도 시한폭탄이 터질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지진 때문은 아닐지라도 군사적 대치 상황이 그걸 가늠케 한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도 지난 5년 동안 아홉 차례나 사고가 난 '고리원전'을 통해서도 떠오르는 게 있다. 누적된 피로가 쌓이면 어느 한 순간 그게 폭발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문제는 또 있다. 핵 폐기장 건설이 바로 그것. 그곳은 대부분 안전한 곳보다 정치적 반대가 적은 곳에 들어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수명이 30년에 불과한 원전을 해체하려면 1기당 1조 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들어간다. 그것들이 누락되거나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가 가장 값싼 에너지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원전 건설을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시한폭탄처럼 터질지 모르는 원전가동도 점차 다른 에너지로 준비하고 중단시켜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것이 곧 우리의 대지를 지키고, 세계를 지키는 길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3·11 사태 이후 우리가 1년 동안 논의하고 내다봤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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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 - 현지 특파원이 울며 기록한 2011년 3월 11일 이후
정남구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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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후쿠시마 사태'가 지난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아직도 상황은 진행 중이고, 피해는 계속되고 있다. 지진과 해일로 한 달 뒤 사망자는 1만4천 명을 넘었고, 행방불명자도 1만2천 명에 달했다. 이재민 11만 명은 피폭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1년이 지나가는 동안 이들 중 200여 명은 목숨을 잃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임을 알면서도 왜 그들은 원전을 고집했을까. 원전 피해가 세계 여러 나라에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과연 일본의 원전사고로부터 무엇을 내다봐야 할까. 이 세 가지 궁금증이 지난 1년 동안 내 머리에서 맴돌았다.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은 그 궁금증을 없애줬다.

정남구의 <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과 쓰루미 슌스케 외 여럿이서 쓴 <사상으로서의 3·11>. 앞의 책은 <한겨레신문> 특파원인 정남구 기자의 후쿠시마 사태에 관한 일련의 취재기록이라면, 뒤의 책은 그 사태를 두고 일본 내 사상가, 평론가, 활동가 등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데 엮은 것이다.

"실제 3·11 대지진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지진에 의한 건물 붕괴가 아니라, 대부분 쓰나미에 의한 것이었다. 2011년 3월 12일 아침 <요미우리신문>은 11일 오후 11시 경찰청 집계를 인용해 사망자가 110명, 행방불명자가 350명이라고 보도했다. 2011년 3월 12일 석간에서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해 1200명이 넘는다고 전했다. 이는 실제 피해보다 엄청나게 적게 집계된 것이었다."(<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 31쪽 중)

이는 지진 피해보다 쓰나미 피해의 심각성을 알린 정남구의 취재기록이다. 진도 6강 이상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를 도입한 건축물이 많아 지진에 의한 붕괴 피해는 적었지만, 10미터 높이의 거대한 쓰나미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쳤던 까닭에 피해가 컸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원전 폭발사고에 있었다. 그때 1호기와 3호기와 2호기에서 연일 폭발 사고가 일어났는데, 더 큰 문제는 사용후 핵연료에 있었다고 한다. 그걸 냉각시키기 위해 헬기로 바닷물까지 투입했는데, 결국은 하이퍼소방대의 진압으로 제자리에 서게 됐다고 한다. 헌데 그곳에서 새 나오는 방사성 물질은 30km내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몰아냈고, 그로부터 2011년 4월 25일까지 45명이 원전사고로 죽었다. 원전난민은 무려 11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과연 '원전지진 재앙'을 예측하지 못하고서 그런 화를 당한 걸까. 아니다. 이시바시 가쓰히코 고베대학 도시안전연구센터 교수는 1997년 10월과 1999년 8월 27일에도 원전지진재앙이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걸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노우라 고지 도호쿠대학원 교수는 <일본삼대실록>에 나오는 869년 7월 9일에 일어난 '조간(貞觀) 지진'을 연구한 결과, 800년에서 1100년에 그와 비슷한 지진이 한 차례 더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고 한다.

 

대지가 무너지는 순간 약탈이 시작된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원자력발전을 고집했던 걸까. 사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원자폭탄과 8월 9일 나가사키에 터트린 플루토늄 핵폭탄으로 인해, 일본은 그 전부터 추진해온 핵무기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고 한다.

문제는 1954년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그 여론 몰이는 미국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코자 했던<요미우리>의 사주인 쇼리키가 했다고 한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은 어떻게 피폭국가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을까. 전후 성립된 냉전 체제에서 소련과 핵 경쟁에 나선 미국은 일본에 원자력을 추진하도록 권했다. 그리고 정치인- 행정관료 - 산업계 - 매스컴 - 학계로 짜여진 '원자력 마피아'가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을 사회에 유포시켰고, 그때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자가 당시 <요미우리>의 사장이었던 쇼리키 마츠타로다."(<사상으로서의 3·11> 27쪽 중)

3·11 원전피해가 세계 여러 나라에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사상으로서의 3·11>을 통해 여러 사상가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말한다. '대지를 지키고, 세계를 지키자'고 말이다. 하나의 대지가 무너지는 순간 그 조화가 무너지고, 점차 약탈과 전쟁과 테러로 가속화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해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원전 가동은 중단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원전이 '제어된' 원폭이라는 점에서 원전과 원폭이 구별된다고들 하지만 수사에 불과한 말이다. 원폭이 다른 고전적인 대량살상무기와 다른 점은 폭발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잠재적 에너지는 티끌만큼도 소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원폭이 폭발하면 가공할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 아무리 처참하다고 해도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원폭 투하로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이 마주하는 것은 종지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휴지부이며, 그것은 언제까지고 미해결로 남겨지는 과잉된 문제의 지속이다."(<사상으로서의 3·11> 250쪽 중)

 

2024년까지 원전 13기 추가 증설... 문제 있다

후쿠시마로부터 약 1240km에 떨어져 있는 우리는 무얼 내다봐야 할까. 현재 우리나라는 21기의 원전이 돌아가고 있고, 원전 개수는 일본의 절반 수준이지만 국토면적의 원자력 발전 용량은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2024년까지 원전 13기를 추가로 증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60%까지 끌어 올리고, 2020년까지 6조 원을 원전에 쏟아 부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안전지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우리도 후쿠시마처럼 언제라도 시한폭탄이 터질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지진 때문은 아닐지라도 군사적 대치 상황이 그걸 가늠케 한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도 지난 5년 동안 아홉 차례나 사고가 난 '고리원전'을 통해서도 떠오르는 게 있다. 누적된 피로가 쌓이면 어느 한 순간 그게 폭발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문제는 또 있다. 핵 폐기장 건설이 바로 그것. 그곳은 대부분 안전한 곳보다 정치적 반대가 적은 곳에 들어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수명이 30년에 불과한 원전을 해체하려면 1기당 1조 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들어간다. 그것들이 누락되거나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가 가장 값싼 에너지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원전 건설을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시한폭탄처럼 터질지 모르는 원전가동도 점차 다른 에너지로 준비하고 중단시켜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것이 곧 우리의 대지를 지키고, 세계를 지키는 길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3·11 사태 이후 우리가 1년 동안 논의하고 내다봤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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