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체제전환과 기독교 한반도평화연구원총서 7
김회권.고재길.설충수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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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그와 함께 달라진 양상이 있었다. 그 전까지 음지에서 행하던 종교행위를 양지로 끌어올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권한과 주권을 갖는 건 아니었다. 국가의 시녀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적어도 루터의 종교개혁 때까지는 그런 흐름에 동조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는 어떤 위치인가? 대통령이 헌법에 손을 얹고 맹세할 정도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나라다. 하지만 외양만 그럴 뿐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들의 국교를 기독교라 단정할 수 없다. 다양한 인종과 그들의 종교적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는 까닭이다. 물론 선거철이 되면 달라진다. 그들의 정치권력은 기독교를 이용하고, 기독교사회는 그들과 곧잘 야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떨까?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으로 겉으로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삼자애국교회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일 뿐 내부적으로 전혀 다르다. 그들의 교회는 공산당의 정책과 동일노선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국교회가 안고 있는 한계점이다. 그것 때문에 삼자교회와는 다른 지하교회들이 활발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어떠할까? 독일은 현재까지 기독교, 다시 말해 가톨릭과 개신교를 국교로 인정한다. 신부나 목회자들도 국가가 녹봉도 지급한다. 어찌 보면 공무원들과 다르지 않는 직급이다. 물론 그런 양상이 한때 히틀러의 광기에 동조한 현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지금은 국가로부터 독립된 권한과 주권을 펼치고 있다. 

 

김회권 외 7인이 쓴 〈사회주의 체제전환과 기독교〉는 탈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일깨워준다. 독일, 폴란드, 러시아, 중국, 헝가리 등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가 개혁개방체제로 나아갈 때 그 속에서 취한 기독교의 활동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고, 그 일을 통해 남한의 기독교는 통일한국 시대에 무엇을 대비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한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이르는 모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기독교가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산물일 뿐이며 자본주의 소멸과 함께 기독교도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무지했고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기독교 비판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이루어진 비판이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33쪽)

 

김회권 교수의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대화의 역사와 전망'에 관한 내용이다. '얀 밀리치 로흐만'의 주장을 빌린 마르크스의 기독교 비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 비판한 게 아니라 기독교 내부의 정치권력의 남용과 맘몬 숭배 사상만을 꼬집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본래 '공산(公産)'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출발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점차 영적인 적개심으로 변질됐고, 지금은 합일을 이루기가 어려운 처지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남한의 기독교와 북한의 주체사상만 바라봐도 마찬가지다. 김일성을 신격화한 주체사상은 남한의 기독교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 그렇다고 남한의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유무상통'의 나라도 완전히 폐기처분된 사상은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북한도 처음에는 '유무상통'의 성경적 시각에서 출발했다가 지금은 주체사상으로 변질되었다고 꼬집는다. 그만큼 서로 간의 영적인 적개심만 벗겨내면 얼마든지 공통된 분모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남한의 기독교는 로마나 미국의 국교와는 달리 독일식 기독교의 위치에서 그런 합일을 이루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남한 정부는 그 일을 못한다 해도 남한의 기독교사회는 그걸 감당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독 내부에서 제기된 한 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독 교회의 도움이 결론적으로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여기에 대해 서독교회의 입장은 명확했다. 동독교회를 위한 서독 교회의 아낌없는 재정적인 후원은 두 교회 간의 '특별한'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였다. 그것은 일방성, 과시성, 일회성의 특성을 가진 도움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한 섬김과 인내와 희생에서 나오는 도움이었다."(86쪽)

 

이른바 고재길 교수가 쓴 '독일의 내적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독교회는 분단된 지 20년 동안에도 동독교회를 위해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를 두고 서독 정부나 다른 단체에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서독교회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이 꾸준하게 그 일을 추진해왔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세를 과시하거나 의를 드러내거나 일방적인 종속관계를 도출하고자 하는 뜻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남한 기독교사회가 본받아야 할 사안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정확히 말해 남한의 기독교는 국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독일의 기독교처럼 북한의 종교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책을 내 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씩 지원과 원조의 손길을 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정부의 눈치를 볼 때가 많다. 그만큼 정부로부터 독립된 주장이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유야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남한의 기독교는 북한을 돕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정부는 국민들의 정서와 눈치를 본다 할지라도, 기독교는 하나님나라의 관점으로 더 활발한 지원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괜히 정치권력에 휘둘리고 야합하여 미움을 받기보다,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과 통일한국을 앞당기는데 효자노릇을 한다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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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 외 지음 / 자리(내일을 여는 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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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개신교 예배당의 출입구에는 저마다 큼지막한 포스터가 하나씩은 붙어 있다. 이른바 '○○○ 이단의 출입을 금한다'는 게 그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걸 붙여 놓은 걸까? 교우들을 엉뚱한 교리로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빼내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정말로 그들이 기존의 교우들을 이리처럼 도둑질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개신교 내부에서도 스스로 점검해야 할 몫이 있지 않을까? 그 동안 가르친 교회 교리가 교우들을 붙잡아두지 못한 이유 말이다. 그에 대한 진정성을 성찰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물론 이단은 정통 교리와 어긋난 경향성을 드러내며 활약한다. 다만 이단 규정은 교리적인 차원보다는 주도권 다툼에서 빚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통이든 이단이든 교회 역사는 권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미정·김진호·이찬수 외 여럿이서 쓴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에는 그와 같은 '이단'이라든지, '성직'이라든지, '창조'라든지, '성전(聖戰)'이라든지, 기독교의 여러 가지 속살들을 드러내 준다. 물론 그것은 바른 치유책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경계선은 대체 어떻게 그어진 것인가? 초기 기독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애초부터 교리적 차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바우어는 주장한다. 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공식 교리의 진술(이른바 정통은 교회에 의해 규정된다)이 아니라 동일한 주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바우어에 따르면, 정통과 이단이라고 하는 분류체계는 각각의 사상이나 내적인 교리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권력 집단의 정치적 판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46쪽)

 

이는 제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인 정용택이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유세비우스(Eusbius)의 〈교회사〉와는 달리 독일의 발터 바우어(Walter Bauer)의 〈최초의 기독교에서의 정통과 이단〉이란 책에 초점을 맞춰 정통과 이단 간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그것이 곧 예수와 사도 시대의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관용되었던 다양한 교리들이 로마교회의 정치권력 아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배척되었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정용택은 지금의 한국교회와는 달리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준 관용성에 눈뜨도록 종용한다. 이른바 초기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때는 '단일한 개신교 교리'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비교적 원만하게 공존하던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더 큰 문제는 무엇일까? 기성교회가 제시한 메마른 교리와 답답한 의례에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이단종파로 규정한 집회에서는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와 열광적인 종말론 등으로 무장한 채 기존 교우들의 억압된 욕망을 분출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기성교회는 막강한 권력과 딱딱한 교리로 교우들을 옥죄려고 했지 그들처럼 교우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데는 등한시했다는 견해다.

 

그것은 구미정이 바라 본 '성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 시대의 목회자가 정녕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를 계승하고 싶은 욕망이 하늘을 찌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루터의 '만인사제'로 인해 '영적 평등주의'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 권위'를 수호하려는 목회자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결국 목사가 자기 자신을 평신도와 구분지어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고질병에서 헤어나는 게 관건이렸다. 이렇게 보면, 목사의 직분을 '성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뻣뻣한' 평신도를 곁에 둔 목사야말로 복 받은 사람인 셈이다. 그 평신도는 목사로 하여금 만인사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각성케 하는 고마운 스승이 될 테니 말이다."(133쪽)

 

이는 스물아홉에 요절한 젊은 시인 기형도의 〈우리 동네 목사님〉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목회가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를 확장하는 걸 성공으로 생각하는 판에, 그 시인의 글에 등장하는 목사는 둘째 아이를 폐렴으로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복'을 기대했던 교인들조차도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마당이었고, 그 책임을 목사에게 묻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그 목사가 전능한 신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만큼 오늘날 교회는 목사도 그리고 교우들도 병이 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사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예배당을 크게 짓는데 혈안이 돼 있고, 교우들은 교회부흥의 실패원인을 목사에게 돌리는 병폐에 빠져 있다. 교회가 부흥되면 목사를 신격화하지만, 부흥이 저조하거나 교인수가 감소하면 무능한 목사로 낙인찍는 게 보편화된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교회의 암 덩어리는 교회 바깥의 이단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회 내부의 폐부와도 같은 권력욕과 딱딱한 교리들은 교우들을 더 병들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것들을 찢고 수술하지 않는 한 그 암덩어리는 더욱더 급속하게 확산될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그 속살의 암덩어리들을 이야기하겠는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교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암덩어리들이 무엇인지 바르게 진단하고, 그것들을 수술하여, 보다 더 내실을 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명의 신학자들은 그런 바람으로 각각의 꼭지를 맡아 이 책을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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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변주곡 클래식 - 음악의 기쁨을 아는 젊은 클래식 애호가를 위한 음악 토크 콘서트
류준하 지음 / 현암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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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ABC에 속하는 작품이 뭘까? A는 베르디의 '아이다', B는 푸치니의 '라 보엠', C는 비제의 '카르멘'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오페라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클래식을 즐겨 듣는 젊은 애호가들이라면 그 정도는 알 것이다.

 

푸치니의 '라 보엠'을 언젠가 다시 들은 기억이 있다. 작년 봄 어느 교회에서 펼친 4인조 혼성 교수들의 음악 무대였다. 남녀 교수들이 주인공이 되어 음악으로 사랑을 속삭였고, 그들의 노래 소리에 모두들 마음이 녹아들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을 더 즐겨 듣는가 보다, 하고 말이다.

 

류준하의 〈내 삶의 변주곡 클래식〉은 음악에 대한 취향과 수준이 다른 세 명의 등장인물을 대동하여 나누는 유쾌한 클래식 이야기다. 이 책에는 불멸의 작곡가와 연주가가 빚은 음악뿐 아니라 탱고와 국악, 월드뮤직과 대중음악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 등 80여곡이 넘는 음악 밥상이 차려 있다.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을 듣고 음악에 관한 책을 뒤적거리는 일이 더없이 즐겁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책과 음반도 사 모으게 되었다. 그냥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인데 이렇게 모은 물건들이, 채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채워주는 도구가 되고 비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비워주는 도구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머리말)

 

그렇다. 이 책을 쓴 작가는 현직 고등학교 지리 교사이자 차이코프스키를 사랑하는 음악애호가다. 클래식 음악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지만, 30여 년 전부터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배운 그 감동을 이 책에 밥상으로 차려 놓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학생 '류수연'의 발랄할 질문과 고집스런 직장인 '박은허'의 취향, 잡식성 음악의 대가인 '차선생'의 박식한 해설은 젊은 클래식 애호가들을 더 깊이 이 책에 빠져들게 할 것이다.

 

차선생  그런데 그런 바다를 과연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다행히도 적잖은 음악가들이 바다에 대한 제각기의 흥미로움을 오선지에 옮겨 놓았더군요.

박은허  물론 사람에 따라 바다에 대한 느낌이 다른 만큼 바다를 묘사한 음악도 작곡가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음악을 통해 바다를 느껴보는 것 또한 색다른 음악 감상의 묘미가 될 것 같네요. 재밌겠어요.(124쪽)

 

이는 이 책의 '제 1변주' 여덟 번째 장에 나오는 '다양한 색깔의 바다'에 관한 음악 감상 이야기다. 이 장에는 샤를르 트레네의 〈바다La Mer〉를 비롯해 둘체 폰테스의 〈바다의 노래Cancao do Mar〉, 클로드 드뷔시의 〈바다La Mer〉, 그리고 김민기의 〈바다〉에 관한 감상평도 올려 놓고 있다. 샤를르 트레네의 〈바다La Mer〉가 '나른한 바다'를 연상한다면 둘체 폰테스는 '유혹의 바다'를,  김민기는 '비장한 바다'를 기억케 한다고 한다. 물론 김민기 선생은 '민주'니 '투쟁'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강조한다.

 

류수연  황병기 선생에 얽힌 재미난 일화 같은 건 없나요?

차선생  언뜻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 중에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낙제생이었으며, 그러고는 다시 한 학기 만에 우등생이 됐다는 것, 그리고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 국립국악원에 가야금을 배우러 다녔다는 사실 등이 있어요. 체계적인 작곡법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만큼 수준 높은 가야금 독주곡을 만들어냈다는 것과 오선지로 기보한 최초의 독주곡 작곡가인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383쪽)

 

이 책 '제 4변주'의 '전통음악 속의 사계절'에 수록된 가람 황병기 선생에 관한 내용이다. 클래식하면 서양 곡만을 엄선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책에는 단가의 〈사절가〉를 비롯해 황병기의 〈춘설〉, 전순희의 〈봄〉, 이상규의 〈대바람 소리〉등 우리나라의 전통음악 속에 깃든 클래식을 발군해 내기도 한다.

 

음악을 음식에 즐겨 비유하는 류준하 선생. 음악 감상회 프로그램을 자주 이끄는 그로서는 음악감상 프로그램들을 밥상에 빗대기도 한다. 채울 건 채우고 비울 건 비워내는 밥상 말이다. 지적 욕구나 문화적 욕구는 채우고, 일상에 쌓인 스트레스는 비워내는 게 그가 말하는 음악감상의 묘미다.

 

이 책에 수록된 밥상의 메뉴들은 이렇다. 제 1변주 '고독한 영혼을 위한 환상곡', 제 2변주 '걸작을 만든 음악가의 위대함', 제 3변주 '거부할 수 없는 매혹과 낭만', 그리고 제 4변주 '낯선 음악의 풍경 속으로' 등이 그것이다. 아무쪼록 80여곡이 넘게 올라와 있는 음악 밥상 이야기를 마음껏 즐겨 읽고, 채울 것을 잘 채워넣고 동시에 스트레스는 말끔히 비워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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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개발탐사 어디까지 갈 것인가 - 지난 50년의 역사와 미래의 전망
민영기 지음 / 일진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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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인간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인구폭발과 식량난과 환경공해 등 풀기 어려운 숙제에 점점 부딪히고 있는 까닭이다. 그 누구도 자원고갈과 환경공해를 막을 수는 없다. 탄소규제협약이라는 것도 그만큼의 양을 줄이자는 뜻이지 완전 제로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만큼 지구의 수명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진원지는 어디에 있을까? 지구가 한정된 공간이라면, 그래서 언젠가 수명이 다한다면, 지구 밖 어디로 눈을 돌릴 수 있을까? 그렇다. 광활한 우주가 그 해법이 될 수 있다. 무한한 우주 공간에는 주거 공간과 자원까지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

 

민영기 박사의 〈우주개발탐사 어디까지 갈 것인가〉는 그런 뜻에서 참으로 귀한 책이다. 1957년의 구소련이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을 발사한지 50여년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우주개발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양상으로 그 개발이 전개될 것인지를 상세하게 전해준다. 

 

"우주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서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고 있다. 우리 머리 위에는 수천 개의 각종 인공위성이 지구궤도를 돌면서 방송 통신 중계, 기상관측, 자원탐사, 환경오염감시, GPS 등으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직접 제공한다."(머리말)

 

그렇다. 지금도 지상에서는 관측하기 어려운 천체를 관측을 위해 우주공간에 많은 망원경을 쏘아올리고 있다. 또한 우주정거장에는 인간이 상주하면서 여러 가지 과학실험을 하고 있고, 더 먼 외계로 진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주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언제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1957년10월 4일,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쏘아 올리면서부터다. 그 때부터 냉전관계에 있던 미국도 소련에 못지않게 우주개발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1958년 8월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서명한 'NASA(국가항공우주법)'의 창설과 궤를 같이한 것이고, 1969년에 아폴로 11호를 달 표면에 착륙시킨 것도 그 전환에 따른 결실이라고 한다.

 

그 뒤에도 소련은 1961년 4월 12일에 보스토크1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렸고, 미국은 1961년 1월 머큐리 레드스톤2가 침팬지를 태우고 준궤도 비행을 성공시킨 후 해군의 앨런 셰퍼드 대령을 우주로 보내는데 성공시켰다고 한다. 한편 1965년 3월 18일에는 소련의 레오노프가 우주선 밖을 떠다니면서 우주에서 움직임을 조종하는 쾌거를 거두었다고 한다. 물론 현재까지 우주비행 도중에 사망한 우주인의 수는 18명이라고 한다. 그만큼 우주개발은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이라고 한다.

 

"약 50억 년 전에 탄생한 태양은 앞으로 40-50억년 후에는 팽창하여 표면이 현재의 금성 궤도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지구는 이미 높은 태양열 때문에 온도가 높아져서 바다는 증발해버리고 수성암에서는 탄소가 튀어나와 대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형성하여 온실효과를 가중시킬 것이다. 그 때의 지구는 현재의 금성과 같이 용광로가 되어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을 것이다."(267쪽)

 

이것이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진 태양을 탐사하려는 이유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원인 화석연료를 비롯해 수력, 풍력, 조력 에너지도 실은 태양에 근원을 두고 있는 까닭이다. 태양관측 전담 위성은 아니지만 우주에서 최초로 태양을 탐사한 위성은 미국의 육군이 1958년 2월에 발사한 익스플로러 1호라고 한다. 이른바 태양에서 품어내는 감사선, X선, 자외선, 태양풍과 태양우주선입자들을 관측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태양의 대기권으로 직접 들어가 태양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할 자동차 크기의 탐사선도 발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우주개발은 어디쯤 와 있을까? 우리나라는 1992년 8월에 실험용 과학위성 우리별1호를 발사하여 우주개발의 첫발을 내 딛었고, 1993년 9월에는 KAIST의 기술진에 의해 제작된 우리별 2호가 아리안 로켓에 실려 궤도로 올라갔고, 1996년 1월에 델타2 로켓에 의해 발사되어 상용위성을 보유한 22번째 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2009년에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 과학기술위성 2호를 쏘아보내긴 했지만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하는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7년까지는 한국형 발사체를 자력으로 개발할 포부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금성을 비롯해, 목성, 토성, 천왕성, 혜왕성 명왕성, 핼리혜성 등 여러 천체들을 관측한 우주선을 밝혀주고 있고, 현재까지 우주관광여행을 다녀 온 일곱 사람의 모습도 담아내고 있고, 우주공간으로 물질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우주엘리베이터'에 관한 내용도 밝혀주고 있다. 

 

"앞으로 인간의 우주 진출은 우주의 실생활 활용과 우주의 과학적인 정보획득의 양면으로 진행될 것이다. 값싸게 우주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새로운 운반 수단이 개발되어 각종의 위성이 실생활에 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우주선들이 태양계 공간을 누비고 다닐 것이다. 지구에서 가까운 우주공간에는 우주정거장, 우주호텔, 우주식민도, 우주엘리베이터가 건설되어 누구나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우주여행은 보편화되고, 인간이 우주에 상주하게 될 것이다."(367쪽)

 

이 책을 보면 세계열강들이 우주개발에 열을 올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지구의 한정된 자원과 공간 때문에 그곳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개발의 시대, 무엇이든 먼저 선점하는 나라가 큰 목소리를 낼 것은 뻔한 이치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 않는 위험부담도 감수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우주개발탐사에 관한 사항들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책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개발될지, 우리나라는 어떤 대비책을 세워야 할지, 여러 가지 것들을 내다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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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이재익 장편소설
이재익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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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리 큰 사건도 언론이 드러내지 않으면 땅 속에 묻히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반대도 있다. 하찮을 사건인데 언론이 부풀리면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경우다. 물론 중요치 않는 사건도 작가가 발굴하여 세상에 내 놓으면 화제가 되기도 한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그랬다.

 

이재익의 장편소설 〈41〉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14살 소녀를 41명의 고등학생이 1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성폭행한 실화를 바탕으로 쓴 까닭이다. 2004년도 경남 밀양에서 일어난 사건이 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언론에서 잠잠한 이유가 아닐까.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의 부모와 지방 유지들은 그 사건이 조용히 묻히길 원했다. 어쩌면 언론도 그들과 교감하지 않았을까.

 

이 책의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전반적인 사건전개는 가설로 꾸몄다. 41명 중 가장 지독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4명을 살해하는 두 명의 연쇄살인범과 그들을 추격하는 경찰 두 명의 탐색전과 추격전이 그것이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문체도 간결하며, 사건전개도 흥미진진해서 책을 읽는 이들은 좀체 이 책을 놓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놓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과연 그 사건을 담당한 판사는 정당한 판결을 내렸을까? 한 번 재판이 끝난 사건은 다시는 파헤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이 경우에도 타당할까? 41명이나 되는 그 녀석들이 어떻게 형사처분 없이 풀려날 수 있었을까? 만약 자기 자식이 그런 변을 당했다면 그 변호사는 어떻게 대했을까? 그런 저런 생각들이 이 책을 덮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몇 년 전에 어느 대학에서 같은 과 여학생이 자는 동안 성추행하고 동영상으로 촬영한 대학생들이 실형을 받은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놈들도 전부 이 년 이상의 실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 네 살짜리 아이를 일 년 동안 수십 번이나 윤간하고 폭행하고 협박한 놈들이, 마흔 한 명이나 되는 놈들이 전부 무죄라니요?"(181쪽)

 

공조한 연쇄살인범을 쫓던 강력계 형사 중 한 명이 던진 말이다. 하지만 어떤가? 이 책에서도 드러내지만, 이 사건을 언론에서 대서특필하여 사회적인 이슈가 되게 했다면, 모두가 41명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원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들을 파멸로 몰아 넣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함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와 변호사에 대해서도 신상을 공개하도록 요구하지 않았을까?

 

지금 그 여중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그 가해자들은? 그 여중생은 그 당시 다른 데로 전학했지만, 가해자들 부모가 찾아와 탄원해 달라는 소란 때문에, 그 학교마저 다닐 수 없었고, 급기야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그때 그 가해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당시의 일을 어린 시절의 불장난쯤으로 생각하며 까마득히 잊고 지내지는 않을까?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찾은 것 외에 이 작품을 특징짓는 것은 곳곳에 드러나는 노골적인 폭력성입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쓴 소설들 중에 폭력적인 장면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요. 읽은 동안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폭력으로 변하는 요즘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학교 폭력에 대해서요."(321쪽, 작가의 말)

 

그렇듯 학교 폭력과 약육강식의 패턴은 점점 더 극악무도해질 것이다. 개개인의 심성도 그만큼 악해지고 있고, 사회집단도 이기적으로 급변하는 까닭이다. 비록 이 책의 사건전개가 가설이긴 하지만 충분한 개연성과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미 우리사회 곳곳에 폭력과 자살과 정신질환과 연쇄살인이 난무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는 어디서부터 끊어야 할까? 모든 것은 뿌리로부터 비롯된다. 기성세대의 부조리가 근절되면 청소년 폭행도 해결되기 마련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은 당연히 맑아지게 된다. 대통령부터 촌부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에게라도 공감할만한 법 집행이 실현된다면, 파멸이 아닌 환생을 위한 공의로운 법 집행이 구현된다면, 그 일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책도 그걸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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