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으로 올라가니(행1:12-14절)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좋은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지닌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교인들이 꽉꽉 찰지라도 예배 행위를 뺀 나머지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비록 교인 수가 적을망정 모든 교인들이 생명력을 지닌 채,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산다면 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통해 이 사회를 새롭게 하시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지니신 채 구름에 안겨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휘황찬란하게 변한 주님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두 천사는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11)일러 주었습니다. 그 일은 성경 속 비유적인 해석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역사로 다가올 것을 약속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하필 두 천사는 제자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만큼 주님과 함께 3년동안 동고동락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승천의 장면을 직접 바라본 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은연 중에 자기들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것마냥 자기 교만과 자기 아집에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경계하도록, 자신들의 근본된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러 줬던 것입니다. 그만큼 갈릴리 출생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앞으로도 겸손하게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을 본문 12절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은 감람나무, 다시 말해 올리브 나무가 많은 감람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승천하신 주님을 보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확신한 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예전 변화산상의 베드로처럼 세상 사람들을 도피하여 산 속에서 신선노름 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자신들이 두 발로 딛고 살아야 할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14절은 그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어디에 모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소위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들은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기도모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 모임으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은 성령님의 임재를 바라는 낮고 낮은 심령을 지닌 ‘갈릴리 사람들의 모임’(행1:11, 행2:7)이었습니다. 그 모임은 자신들의 욕망이나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사교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임은 연약하고 볼품없는 자신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가 그 땅에 흘러 퍼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임이었습니다.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임이었기에, 오순절 날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재 하셨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그들의 모임 장소를 ‘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다락방’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페룬’(hypeeron)은 그 집의 가장 높은 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을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칭합니다. 그 집 주인의 이름이 마가라고 하기 때문에 붙인 호칭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처럼 그 집을 마가의 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는 그 집을 가리켜서‘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유인 즉 주님을 위해 그 집을 내어 놓은 사람은 마가가 아니라, 마가의 어머니였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관습상 여자의 이름보다는 남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관례였기에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들의 기도모임을 1층 접견실이 아닌 2층 다락방에 두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고층 빌딩과 같은 집은 짓지는 않았습니다. 단층집이거나 높아야 2층이었습니다. 1층은 남자들이 기거하면서 손님 접대용으로 삼았고, 2층은 여인들이 머물며 일하는 공간(the highest part of the house, the upper rooms or story where the women resided)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120명 정도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1층 접견실에서 모여야 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은 그 모임 장소를 1층이라 하지 않고 2층‘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2층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머물던 장소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과 뗄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락방과 관련하여, 신약시대보다 앞선 구약 시대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생명과 관련된 생생한 역사를 증언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은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이란 동네에서 행한 일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 동네에 갔을 때에 그는 한 여인의 집 다락방에 머물게 됩니다. 어느 날 그 집 주인의 어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자신이 기거하던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그 다락방의 침상에 아이를 누인 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줄 것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 아이는 살아나게 됩니다. 바로 그 집의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후계자였던 엘리사 역시 그와 동일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이란 동네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한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다락방을 지었고, 엘리사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게 됩니다. 본래 그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난 후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안고, 아들의 시신을 엘리사가 기거하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돌아 온 엘리사의 기도로 인해 그 아이가 다락방에서 살아납니다.
그처럼 구약시대의 다락방은 하나님의 생명을 모신 자가 있다면 그곳은 죽음과 절망의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의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 장소가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진리의 말씀을 유훈으로 전해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찾아와, 당신 자신의 몸을 보여주시면서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그렇듯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받들어 그곳 마가의 다락방에서,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 기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르밧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과 수넴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처럼, 마가의 다락방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머잖아 그곳 마가의 다락방은 오순절 날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곳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는 생생한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마가의 다락방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우리의 모임이 무엇을 위한 모임이 되어야 하는지 더욱 생생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위한 모임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도,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교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는 모임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모이는 장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곳이 크고 화려한 공간이든, 비좁고 볼품없는 장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이 1층이든, 아니면 마가의 다락방처럼 2층이든, 그도 아니면 지하나 3층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는 모임의 장소가 어떤 곳이든지 간에, 그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나누고 받드는 통로가 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공간에만 임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심령이 낮고 낮은 자들을 통해서만, 그 마음이 비고 비인 자들을 통해서만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모임을 갖든, 우리 마음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모인다면, 그곳이 바로 오늘의 마가의 다락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존 번연은 자신이 쓴 《천로역정》 중 목동의 노래를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자는 쓰러질 염려가 없고,
낮은 자는 교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나니
겸손하자는 영원토록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이곳을 낮고 낮은 마음으로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으로 삼으십시다. 진정으로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십시다. 아니 우리가 거하는 그 어떤 곳이든 그곳을 마가의 다락방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때에 진리와 생명 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 하시사,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생명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죽음과 절망을 몰아내는 생명의 참된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의 교회가 참된 마가의 다락방이 되길 원합니다.
그 옛날 사르밧 과부의 다락방처럼,
수넴 여인의 다락방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바라보는
참된 심령의 소유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좇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곳들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는
이 시대의 마가의 다락방이 되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