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연보
1867년 0세
2월 9일(음력 1월 5일) 현재의 도쿄 신주쿠〔구 에도(江戶) 우시고메바바시타(牛込馬場下)〕에서 출생. 나쓰메 나오카쓰(夏目直克)과 후처 나쓰메 치에(夏目千枝) 사이에서 5남 3년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 태어나자마자 요쓰야(四谷)의 만물상에 양자로 보내졌다가 곧 돌아온다.
1868년 1세
11월, 요쓰야의 시오바라 쇼노스케(鹽原昌之助)와 시오바라 야스(鹽原やす) 부부에게 다시 입양된다.
1870년 3세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흉터가 약간 생긴다. 이는 소세키에게 평생 고민거리가 된다.
1872년 5세
시오바라 가의 장남으로 호적에 오른다.
1874년 7세
4월, 양부모의 불화로 양모와 함께 잠시 친가로 돌아온다.
11월, 아사쿠사(淺草)의 도다 소학교에 입학.
1876년 9세
양아버지가 아사쿠사의 동장에서 면직되어, 소세키는 시오바라 가에 적을 둔 채 생가로 돌아온다.
5월, 이치가야(市ヶ谷) 소학교로 전학.
1878년 11세
2월, 친구들과 만든 잡지에 「마사시게론(正成論)」을 발표한다. 4월, 이치가야 소학교 졸업. 긴카(면화) 학교 소학심상과(小學尋常科)에 전학하고 11월에 졸업한다.
1879년 12세
3월, 간다(神田)의 도쿄 부립 제1중학교 정칙과(正則科)에 입학.
1881년 14세
1월 21일 생모 치에 사망.
봄에 도쿄 부립 제1중학교 중퇴.
4월경, 한학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니쇼(二松) 학사로 전학.
1882년 15세
봄에 니쇼 학사를 중퇴한다.
1883년 16세
봄에 도쿄 대학 예비문(현재의 도쿄 대학 전신 중 하나) 시험 준비를 위해 세리쓰(成立) 학사에 입학한다.
1884년 17세
9월, 도쿄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 입학 직후 맹장염을 앓는다.
1885년 18세
9월, 도쿄 대학 예비문 예과 3급으로 진급.
1886년 19세
7월, 복막염 때문에 학년 말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낙제한다.
9월, 에토(江東) 의숙 교사가 되어 의숙 기숙사에서 제1고등중학교(도쿄 대학 예비문이 개칭함)에 다닌다.
1887년 20세
3월에 맏형이, 6월에 둘째 형이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9월, 제1고등중학교 예과에 진급. 이 시기에 과민성 결막염을 앓는다.
1888년 21세
1월, 시오바라 성에서 나쓰메(夏目) 성으로 복적.
9월, 제1고등중학교 본과에 진학해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1889년 22세
1월부터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사진)와 가깝게 사귀기 시작한다.
5월, 시키의 한시 문집인 『나나쿠사슈(七草集)』에 대해 한문으로 평을 쓴다. 9편의 칠언절구를 덧붙이면서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한다.
9월, 한문체의 기행문집 『보쿠세쓰로쿠(木屑錄)』 탈고.
1890년 23세
7월, 제1고등중학교 본과 졸업.
9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영문학과 입학, 문부성 대여장학생〔貸費生〕이 된다.
1891년 24세
7월, 문부성 특대생이 된다. 셋째 형의 부인 도세(登世)가 입덧 때문에 죽자 큰 충격을 받는다.
12월, 영문과 주임 J. M. 딕슨 교수의 부탁으로 일본의 고전 『호조기(方丈記)』를 영역한다.
1892년 25세
4월 5일, 병역을 피할 목적으로 친가로부터 분가하여 본적을 홋카이도(北海道)로 옮긴다.
5월, 도쿄 전문학교(현재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가 된다.
8월, 마사오카 시키가 그의 고향인 시코쿠(四國) 마쓰야마(松山)에서 요양 중일 때 방문하여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와 처음으로 만난다.
1893년 26세
7월,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10월, 도쿄 고등사범학교의 영어 촉탁 교사가 된다.
1894년 27세
12월 말~1895년 1월, 폐결핵에 걸려 가마쿠라(鎌倉)의 엔카쿠지(園覺寺)에서 참선을 하며 치료에 임한다. 이때의 경험은 나중에 소설 『몽십야(夢十夜)』와 『문(門)』의 소재가 된다. 일본인이 영문학을 한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며 이즈음 신경쇠약 증세가 심해진다.
1895년 28세
4월, 시코쿠 에히메(愛媛) 현에 있는 진조(尋常) 중학교에 부임한다(월급 80엔).
8월~10월, 시키가 마쓰야마로 돌아와 소세키의 하숙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하이쿠에 열중하며 많은 가작(佳作)을 남겼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도련님(坊っちゃん)』의 소재가 된다.
12월, 귀족원 서기관장(현재의 참의원 사무총장) 나카네 시게카즈(中根重一)의 장녀 나카네 교코(中根鏡子)와 맞선을 보고 약혼한다.
1896년 29세
4월, 구마모토(熊本)의 제5고등학교 강사로 부임(월급 100엔).
6월 9일, 나카네 교쿄와 결혼. 구마모토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7월, 제5고등학교의 교수가 된다.
1897년 30세
4월, 교사를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하고 싶다는 뜻을 시키에게 편지로 이야기한다.
6월 20일, 아버지 나쓰메 나오카쓰 사망.
7월, 교코와 함께 도쿄로 간다. 구마모토에서 도쿄까지 장거리 여행이 원인이 되어 교코가 유산한다.
12월, 오아마(小川) 온천을 여행하며 『풀베개(草枕)』의 소재를 얻는다.
1898년 31세
6월, 제5고등학교 학생으로 문하생이 된 수필가 데라다 도라히코(寺田寅彦)에게 하이쿠를 지도한다. 도라히코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에 나오는 이학사 간게쓰의 모델이라 일컬어진다.
7월, 교코가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며 구마모토 현의 자택 가까이에 흐르는 시라카와(白川)의 이가네부치(井川淵) 하천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지만 근처에 있던 어부가 구한다.
1899년 32세
5월, 맏딸 후데코(筆子)가 태어남.
6월, 영어과 주임이 된다.
9월, 구마모토 주위에 있는 아소(阿蘇) 산을 여행하며 『이백십일(二百十日)』의 소재를 얻는다.
1900년 33세
6월, 문부성으로부터 영문학 연구를 위해 2년 동안 영국 유학을 다녀오라는 명을 받는다(유학비 연 1800엔)
9월 8일, 요코하마에서 출발.
10월 28일. 런던 도착.
1901년 34세
1월 26일, 둘째 딸 쓰네코(恒子)가 태어남.
5~6월,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가 런던을 방문해서 함께 하숙 생활을 한다. 이케다의 영향으로 『문학론(文學論)』의 구상을 결심하고 귀국할 때까지 저술에 몰두한다.
7월, 신경쇠약이 재발한다.
1902년 35세
3월, 장인 나카네 시게카즈에게 편지를 보내 일영동맹 체결에 들뜬 일본인들을 비판하고 대규모 저술 구상을 언급한다.
9월, 신경쇠약이 극도로 악화되자, 일본에도 나쓰메 소세키의 증세가 전해짐. 문부성은 독일 유학생 후지시로 데이스케(藤代禎補)에게 소세키를 데리고 귀국하도록 지시한다.
11월, 마사오카 시키가 7년 동안 앓던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다카하마 교시의 편지를 받고 알게 된다.
12월 5일, 일본 우편선에 승선해서 귀국길에 오른다.
1903년 36세
1월 24일, 도쿄 도착.
3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는 도쿄 혼고(本鄕) 구(현재의 분쿄구) 센다기(千馱木)로 이사.
4월, 제1고등학교 강사가 된다(연봉 700엔). 또한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교수를 겸한다(연봉 800엔).
9월, 제1고등학교의 제자인 후지무라 미사오(藤村操)가 게곤(華嚴) 폭포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세키는 다시 신경쇠약이 악화된다. 교코와 불화가 심해져 임신 중인 부인을 친정으로 보내고 별거한다.
11월, 셋째 딸 에이코(榮子)가 태어난다.
1904년 37세
2월, 러일 전쟁이 시작된다.
7월,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집에 들어오고, 교코가 귀여워한다.
9월, 메이지(明治) 대학 고등예과 강사를 겸임한다(월급 30엔).
12월, 시키의 제자로 당시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를 주재하고 있던 다카하마 교시로부터 작품 집필을 권유받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장을 문학 모임에서 낭독한다.
1905년 38세
1월~1906년 8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호토토기스》에 발표. 1회분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호평을 받아 11회에 걸쳐 장편으로 연재한다. 이때부터 작가로 살아갈 뜻을 굳힌다.
1월, 「런던탑(倫敦塔)」을 《데이코쿠분가쿠(帝國文學)》에, 「칼라일 박물관(カーライル博物館)」을 《가쿠토(學燈)》에 발표.
4월, 「환영의 방패(幻影の循)」를 《호토토기스》에 발표.
5월, 「고토노소라네(琴のそら音)」를 《시치닌(七人)》에 발표.
9월, 「하룻밤(一夜)」을 《주오코론(中央公論)》에 발표.
11월, 「해로행(薤露行)」을 《주오코론》에 발표.
12월 14일, 넷째 딸 아이코(愛子) 탄생.
1906년 39세
1월, 「취미의 유전(趣味の遺傳)」을 《데이코쿠분가쿠》에 발표.
4월, 『도련님』을 《호토토기스》에 발표.
9월, 『풀베개』를 《신소설(新小說)》에 발표.
10월, 『이백십일』을 《주오코론》에 발표. 평소에 그의 자택에 출입이 잦은 문하생들의 방문을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이후로 정해서 '목요회'라고 불리게 된다.
11월, 요미우리(讀賣) 신문사에서 입사 의뢰가 왔으나 거절한다.
1907년 40세
1월, 『태풍(野分)』을 《호토토기스》에 발표.
4월, 제1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 강사를 사직한다. 그리고 아사히(朝日) 신문사에 소설을 쓰는 전속 작가로 입사한다.
5월, 『문학론』(大倉書店) 출간.
6월 5일, 장남 준이치(純一)가 태어난다.
9월, 도쿄 우시고메 구 와세다미나미초(早稲田南町)로 이사한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소세키 산방(漱石山房)이라고 불린 이 집에서 거주했다.
6-10월, 『우미인초(虞美人草)』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
1908년 41세
1~4월, 『갱부(坑夫)』 연재.
6월, 「문조(文鳥)」 연재(오사카 《아사히 신문》).
7~8월, 「몽십야(夢十夜)」 발표.
9~12월, 『산시로(三四郞)』 연재.
12월 16일, 차남 신로쿠(神六)가 태어난다.
1909년 42세
1~3월, 「영일소품(永日小品)」 연재.
3월, 『문학평론』(春陽堂) 출간.
6~10월, 『그 후(それから)』 연재.
9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인 친구 나카무라 제코의 초대로 만주와 한국을 여행한다. 이때 신의주, 평양, 서울, 인천, 부산을 방문한다.
10~12월, 기행문 『만한 이곳저곳(滿韓ところどころ)』 연재.
11월, ‘아사히 문예란’을 새로 만들고 주재한다. 위경련으로 고통 받는다.
1910년 43세
3월 2일, 다섯째 딸 히나코(ひな子) 출생.
3~6월, 『문(門)』 연재.
6~7월, 위궤양 때문에 나가요(長與) 위장병원에 입원한다.
8월, 슈젠지(修善寺) 온천에서 다량의 피를 토하고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이를 '슈젠지의 대환'이라 부른다.
10월~1911년 3월, 슈젠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각나는 일들(思い出す事など)』을 32회에 걸쳐 연재한다.
1911년 44세
2월, 위궤양으로 입원 중에 문부성으로부터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통지받지만 거절한다.
8월,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의뢰로 간사이(關西) 지방에서 순회 강연을 한다.
11월, ‘아사히 문예란’이 폐지된다. 아사히 신문사에 사표를 내지만 반려된다. 다섯째 딸 히나코가 급사한다.
1912년 45세
1~4월, 『피안 지날 때까지(彼岸過迄)』 연재. 신경쇠약과 위궤양이 재발하여 고통 받는다.
7월, 메이지 천황 서거, 연호가 다이쇼(大正)로 바뀜.
10월경, 남화풍의 그림을 그린다.
12월, 자택에 전화가 들어온다.
12월~1913년 11월, 『행인(行人)』 연재.
1913년 46세
4월, 위궤양이 재발하고 신경쇠약이 심해져 『행인』 연재 중단(9월부터 재개).
1914년 47세
4~8월, 『마음(こころ)』 연재.
11월, '나의 개인주의'라는 주제로 가쿠슈인(學習院) 보인회에서 강연을 한다.
1915년 48세
1월, 제자 데라다 도라히코에게 보낸 연하장에 금년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쓴다.
1~2월, 『유리문 안에서(硝子戶の中)』 연재.
3~4월, 교토(京都)를 여행한다. 위통으로 쓰러짐.
6~9월, 『한눈팔기(道草)』 연재.
11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구메 마사오(久米正雄)가 처음으로 목요회에 참가한다. 이들은 마지막 문하생이 된다.
1916년 49세
1월, 『점두록(點頭錄)』 발표.
2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작품 『코(鼻)』를 격찬한다.
4월, 당뇨병 진단을 받고 치료에 들어간다.
5~12월, 『명암(明暗)』 연재.
8월, 오전에는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한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11월 초, 목요회에서 만년의 사상으로 알려진 '칙천거사(則天去私)'에 대해 처음 언급한다.
11월 16일, 마지막 목요회가 열리고 모리타 소헤이, 아베 요시시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메 마사오 등이 출석한다.
11월 21일, 위궤양 악화로 쓰러진다.
12월 2일, 내출혈로 재차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12월 9일 오후 6시 45분 사망.
12월 14일, 도쿄 《아사히 신문》에 『명암』이 제188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된다. 장례식 접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담당했으며 모리 오가이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조문을 했다.
12월 28일, 도쿄 도시마(豊島) 구에 있는 조시가야(雜司が谷) 묘지에 안장되었다. 조시가야 묘지는 그의 작품 『마음』의 주인공 K가 자살 후 묻힌 장소다.
*출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현암사, 628~6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