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던 사이언스 - 무엇이 왜 과학의 무대에서 배제되는가
현재환 지음 / 뜨인돌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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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과 촛불 시위, 신종플루와 메르스 사태, 삼성반도체 백혈병 논쟁,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등 현재진행형의 과학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떠한 시각에서 이해하고 대처할 것인가?

 

하나의 시각은 정부, 기업, 언론 등 권력기관이나 반대편의 시민운동가들, 또는 제3의 배후세력이 정치적, 상업적인 이유로 왜곡된 정보를 제공해서 진실을 오도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명 '용의자 X'에 해당한다.

과학 문제를 '용의자 X'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저자는 실제로는 누가 용의자 X인지 쉽게 알 수 없다고 단정한다. 또한 이 관점에서는 과학의 순수성과 가치중립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이에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용의자 X'를 극복할 대안적 관점을 모색하고 이에 기초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학 논쟁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자는 것.
이를 위해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라는 용어를 빌린다. 

이 용어는 미국의 데이디브 헤스가 "정부, 산업, 사회운동의 제도적 매트릭스 속에서 특정 지식에 대한 체계적 비생산이 이뤄진다"고 주장하며, 그렇게 생산되지 않은 지식들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수행되지 않은 과학'이란 뜻이다.

저자는 '언던 사이언스'를 좀 더 넓은 의미로 쓰고자 한다. 지금까지 어떠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과학적 지식이 생산되고 사용되는 과정에서 왜 어떤 것들은 강조되고 어떤 것들은 배제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지식의 정치'를 검토하기 위해 활용한다.

'언던 사이언스'의 관점은 용의자X를 찾는 진실 게임에서 벗어나 왜 어떤 것은 과학적으로 옳다고 '판단'되고 어떤 것은 틀렸다고 '간주'되는지 기본적인 전제 자체를 새롭게 논의하고 검토해 보려는 입장이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용의자X에게 이용당한 과학의 전형으로 꼽히는 사례들, 가령 유럽/북미의 여성호르몬 연구, 일본제국의 조선인 연구, 나치 독일의 장애인 연구를 검토한다. 2부에서는 과학지식의 생산이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들과 교차하면서 특정 방향으로 전개되며 그럴 수밖에 없음을 살펴본다. 3부에서는 우리와 우리 주변의 과학 문제들을 언던 사이언스 시각에서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저자는 과학이 결코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고 단언한다. 가령 2001년 영국의 광우병 사태가 대표적이다. 그는 당시 영국 정부의 대응은 '합리적인' 과학에 기대어 '비합리적인' 정책적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진단한다.

영국 정부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편적 공공선' 논리를 내세워 살처분을 강행했다. 당시 1천 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도축되었고, 관광산업이 심대한 타격을 입는 등 피해가 컸다.

저자에 따르면 '보편적 공공선' 담론에는 두 가지 국소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보편적 공공선을 정의하는잣대가 '경제적 관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는 축산업 수출과 관련된 특정 기업과 집단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는 어떠한 정책 결정이 과학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 보다는 구제역 백신과 관련된 과학적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방역을 둘러싼 논쟁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또 다른 과학적 근거, 사회적 논리, 경제적 근거가 무엇인지, 왜 배제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또한 나치 독일에서 인종위생이란 이름 하에 장애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우생학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흔히 우리는 나치 독일의 파쇼적 행태에 의해 과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알고 있지만 저자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이미 나치 집권 이전부터 독일의 과학자들은 장애인에 대한 불임시술과 안락사를 주장해 왔다. 이 주장이 나치 집권 때 현실화되었다는 것. 저자에 따르면 단지 용의자X를 찾는 것만으로는 장애인 학살의 과정과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이해하기 어렵다. 대신 어떠한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의제를 가진 과학 활동들이 이루어졌는지 그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언던 사이언스의 관점은 같은 사안을 두고 국제적 입장 차이를 보이는 경우에도 유용할 것이다. 가령 대만과 한국의 산재과학 지식 투쟁이 좋은 사례다. 대만에 설립된 미국 가전업체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에서 1990년대 암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2007년 삼성반도체서 일했던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대만과 한국의 노동자들 입장은 달랐다. 대만의 경우 법원이 역학에 기초한 과학적 증거만을 중요시하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 반면, 한국에서는 거꾸로 삼성과 용역업체에게 역학 연구의 기본을 올바로 지키라고 요구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대만 RCA는 1992년에 공장이 없어진데다 회사마저 GE에합병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현장이 없으니 역학 조사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삼성반도체의 경우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작업 공장의 문제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일부 유해 물질을 역학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저자는 언던 사이어언스의 관점에서 전후 맥락을 제대로 이해해야 문제 해결을 위한 올바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신선한 제안이 아닐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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