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일각 신장판 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김동욱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만화책

만화책시렁 240


《메종 일각 1》

 타카하시 루미코

 김동욱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19.9.30.



  오른손으로 밥을 먹으면서 왼손으로 《메종 일각》 첫걸음을 쥐고서 읽다가 곁님한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아이들더러 밥 먹으면서 책 읽지 말라면서, 으째 어버이인 그대는 그런 몸짓이느냐 하는 말을 듣고서 조용히 만화책을 내려놓았습니다. 새옷을 입은 “도레미 하우스” 또는 “메종 일각”은 삯집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아련한 이야기를 그립니다. 삯집지기부터 무언가 수수께끼에 싸인 삶이요, 삯집사람도 저마다 수수께끼를 품은 살림입니다. 이들은 서로 어떤 길을 걷다가 오늘 이 삯집에서 이웃이나 동무로 만났을까요? 이들은 오늘 이곳을 지나 앞으로 어떠한 길을 갈까요? 이 삯집에서 뒤엉키며 웃고 노래하고 떠드는 하루를 즐길까요, 아니면 새로운 삯집이나 보금자리를 찾아서 살살 손을 저으며 떠날까요? 그야말로 밑자리라 할, 또는 마을 한켠이라 할, 그저 수수하거나 털털한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판인 《메종 일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수수하거나 털털한 사람들이 복닥이거나 노닥이거나 허덕이는 나날이야말로 웃음꽃하고 눈물꽃이 곱디곱게 피어난다고 하는 대목을 밝히지요. 아름다운 만화책입니다. ㅅㄴㄹ



“괜찮아요, 괜찮아. 이렇게 떠들어 줘야 모의시험을 망쳐도 핑계가 생기잖아요. 뭐든지 남 탓만 하면서 살 수 있다니, 그것도 참 행복한 거라니까.” (19쪽)


“요츠야 씨나 아케미 씨한테 바보 취급을 당하는 건 익숙해. 하지만 관리인님의, 동정 어린 시선만은 견딜 수가 없거든.” (117쪽)


‘살아 있다면 여러 결점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무적이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상적인 모습만이 증식을 계속한다.’ (151쪽)


“말리지 마세요! 저 자식, 술기운이라도 빌리지 않고선 아무 말도 못 한다니까요. 서, 서글픈 녀석이라고요.” (18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9-11-0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메종일각이 다시 재간되었군요.참 재미있게 본 책인데 역시 명작은 다시 나오는군요.

숲노래 2019-11-04 05:42   좋아요 0 | URL
모두 열다섯 걸음으로 다시 나온다고 합니다.
주머니를 든든히 채워 놓아야 해요 ^^
 
커피 한 잔 더 5 - 완결
야마카와 나오토 지음, 채다인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만화책

만화책시렁 234


《커피 한 잔 더 5》

 야마카와 나오토

 채다인 옮김

 세미콜론

 2012.3.23.



  바람이 따뜻하게 불면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살갗을 거쳐 들어옵니다. 바람이 차갑게 불면 몸 구석구석으로 차가운 기운이 살갗을 따라 훅훅 끼칩니다. 따뜻하거나 차가운 바람을 쐬면서 이 바람을 고스란히 먹는 살갗을 쓰다듬다가 생각합니다. 어떠한 기운이든 차근차근 스며들면서 우리 몸을 이루리라고, 이렇게 이루는 우리 몸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마음이 되리라고. 따뜻한 바람이기에 따뜻한 몸이자 마음이 될 수 있고, 차가운 바람이기에 차가운 몸이요 마음이 될 수 있는데, 이 바람에 섞인 온누리 이야기를 새록새록 누린다고. 《커피 한 잔 더》는 다섯걸음으로 커피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커피 한 모금을 사이에 놓고서 온갖 사람이 얼크러지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기쁜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있어요. 따뜻한 이야기도 온몸에 찬기운이 도는 이야기도 있고요. 똑같은 커피 한 모금이지만, 이 커피를 손에 쥐고 홀짝이는 마음은 다 다릅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길도, 헤어졌다가 만나는 길도, 가없이 그리는 길도, 가슴에 맺은 멍울이며 사랑도 피었다가 스러지고 스러졌다가 피면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최근에야 눈치 챈 게 있는데,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서른셋이었어.” (15쪽)


“그 가게는 추억의 장소니까 가고 싶지 않아. 가고 싶으면 너 혼자서 가렴. 나는 죽고 나서 천국에 있는 아빠랑 같이 유령이 돼서 갈 테니까.” (20∼21쪽)


“아무것도 아니라면 같이 가자.” “가자니, 어디로?” “그거야 당연하지. 나 알고 있는걸.” (120쪽)


‘아아, 세상이란 멋진 거구나. 작전 같은 거 새우지 않아도 사랑과 용기가 있으면 마음은 닿는 거였다.’ (17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살림말


훌쩍 가다 : 등허리가 결리다는 곁님을 주무른다. 온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도록 주물러 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손을 씻고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어느새 한 시간쯤 흘렀지 싶다. 벌써? 가볍게 주물렀다고 생각했으나 훌쩍 갔구나. 하루가 참 잘 흐른다. 결린 자리를 가볍게 풀기에 한 시간쯤 쓴다면, 결린 자리를 말끔히 풀자면 두 시간쯤 써야 하려나. 문득 돌아보면 어릴 적에 아버지 팔다리 등허리를 주무르느라 거의 날마다 한 시간씩 쓰곤 했다. 한 시간이란, 이 몸에 결리거나 아픈 구석을 풀고서 새로 깨어나려고 쉴 만한 겨를이지 싶다. 2019.11.2.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웃는 사진 : 한국 사진밭은 참 오래도록 몇 가지 틀에 박힌 채 헤어나려 하지 못한다. 이쪽도 저쪽도 그쪽도 엇비슷하다. 사람을 찍으며 ‘웃는 낯’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여겨 버릇한다. 누구보다 신문기자가 이런 데에 너무 매인다. 이러다 보니 어느 사진은 줄줄이 ‘웃는 낯’투성이인데, 또 어느 사진은 줄기차게 ‘우는 낯’투성이가 된다. 삶을 담는 사진이라면, 사람을 담는 사진이라면, 사랑을 담는 사진이라면, 줄줄이 ‘웃는 낯’이나 ‘우는 낯’만 담아서 얼마나 어울릴까? 웃는 사람도 웃다가 가만히 쉬면서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슬프기도 하다. 우는 사람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노래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이 얼굴을 찍어야먼 ‘사람 사진’이 되지는 않는다. 손만 찍어도, 등짐만 찍어도, 등판만 찍어도, 신만 찍어도, 빗만 찍어도 얼마든지 ‘사람 사진’이 된다. 이 나라 사진님 스스로 틀을 깨지 않는다면 이쪽 저쪽으로 갈라 놓고서 밥그릇을 다투는 사진밭이 될 뿐이다. 부디 ‘웃는 사진’을 내려놓기를 빈다. 그리고 ‘우는 사진’도 접어놓기를 빈다. 우리는 웃고 울며 노래하고 고요히 잠자다가 이야기꽃을 터뜨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인 줄 살살 바라보면서 고루 담아내는 사진빛이 되기를 빈다. 2015.4.5.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숲마실


이 작은 아름책집 (2017.11.24.)

― 경남 진주 〈형설서점(즐겨찾기)〉

경남 진주시 진주대로 1149-1

055.748.4785.



  경상도 진주라는 고장은 남다릅니다. 진주 남강 때문에 남다르다고 여기기도 할 테지만, 진주에는 교육대학교가 있고, 작은 도시인데에도 헌책집이 무척 많았습니다. 요즈음에도 헌책집이 여럿 그대로 있어요. 작은 도시 가운데 헌책집이 그대로 살림을 잇는 고장은 드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책을 덜 읽는다고 여길 만하지만, 이보다는 너무 바쁘거나 힘들거나 팍팍하다는 생각에 젖었다고 여길 만하지 싶습니다. 요즈음 새책 하나가 15000∼20000원이라면, 이 책은 헌책집에서 6000∼8000원에 장만할 수 있습니다. 책을 아주 많이 빨리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책 한 자락을 장만해서 사나흘이나 이레나 열흘이나 보름에 걸쳐서 읽겠지요. 때로는 한 달 동안 책 한 자락을 읽기도 할 테고요. 새책으로 쳐도 15000∼20000원이요, 헌책으로 쳐도 6000∼8000원 즈음 되는 돈을 이레나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벌 종이책에 들이지 못한다면, ‘책을 안 읽는다’가 아닌 ‘스스로 짬을 내어 느긋하게 새로 이웃 삶을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삶을 가꾸는 길’에 설 마음을 내지 못한다고 보아야지 싶어요.


  굳이 책이 아니어도 즐길거리나 읽을거리나 볼거리는 많습니다. 어느 것을 즐겨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찬찬히 생각해 봐야지 싶어요. 영화나 방송이나 유튜브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합니다. 저쪽에서 보여주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와 달리 책은 언제나 스스로 읽어내야 하지요. 저쪽에서 어떤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펴서 책으로 묶었든, 이 책에 흐르는 알맹이나 줄거리나 사랑을 우리 스스로 알아내고 느껴내며 생각해서 삭이고 받아들여야 하지요.


  책읽기가 남다르다면, 스스로 나서야 하는 일이요, 스스로 배워야 하는 일이며, 스스로 배운 것을 우리 삶에서 다시 스스로 삭여서 우리 것으로 녹이는 살림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대목이라고 느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야 하거든요. 책을 고르는 일, 책을 알아보는 일, 알아본 책을 사는 일, 산 책을 집으로 들고 오는 일, 들고 온 책을 읽으려고 짬을 내는 일, 짬을 내어 읽는 동안 머리를 바지런히 움직여 생각을 꽃피우는 일, 생각을 꽃피워서 알아낸 이야기를 삶으로 녹이는 일, 삶으로 녹인 이야기를 새롭게 가꾸어서 즐겁게 하루를 맞이하는 일 …… 이 모두 남이 해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책읽기나 책숲마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새롭게 살아가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작은 몸짓이 됩니다. 남한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배우면서, 손수 익혀서 살려낸 새로운 사랑을 스스럼없이 이웃한테 새삼스레 펼치는 길이 바로 책읽기요 책숲마실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진주 〈형설서점(즐겨찾기)〉은 진주에 있는 그야말로 빛나는 책집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진주라는 고장에 산다면 이틀이나 사흘마다 걸음을 하리라고 여기는 곳입니다. 그러나 제 삶자리하고 진주가 썩 가깝지 않으니 한 해에 한 걸음을 하곤 하는데, 때로는 여러 해 만에 한 걸음을 합니다.


  이 자그마한 헌책집에 들어서기 앞서 언제나 숨을 고릅니다. 주머니를 들여다보며 살림돈이 얼마나 있는가를 살펴요. 오늘 어떤 책을 얼마나 만날는지 하나도 모릅니다만 ‘이 값을 넘어설 만큼 책을 쳐다보지 않기로 하자’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합니다.


  자, 문을 엽니다. 책집지기 아재한테 꾸벅 절을 합니다. “어? 이게 누구야? 종규 씨 아냐?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진주에 볼일이 있어서 왔나? 반갑네? 밥은 드셨소? 커피 한 잘 줄까?”


  책집에 들어서자마자 책집지기 아재가 진주말로 이모저모 물어보십니다. 저도 반가이 이모저모 이야기를 합니다. 오랜만에 찾아왔기에 책시렁부터 돌아보며 이 책 저 책 들여다볼라치면 “책은 늘 보실 텐데, 오랜만에 왔으면 이야기라도 좀 하고 책을 보시지?” 하는 핀잔도 한 마디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눈치라고는 없이 책만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자그마한 헌책집이기에 더 많은 책을 건사할 수 없습니다. 자그마한 헌책집이기에 더 알뜰히 책을 살펴서 건사하기 마련입니다. 이 대목을 헤아려 본다면 ‘왜 저 조그마한 책집이 그대 아름책집이 되는가?’ 하는 물음을 쉽게 풀 수 있어요. 커다란 책집은 더 많은 책을 더 넉넉히 둔다면, 조그마한 책집은 더 알찬 책을 더 살뜰히 두거든요. 《집안에 감춰진 수수께끼》(M. 일리인/박미옥 옮김, 연구사, 1990)이며 《근원이 깊은 나무례 마을의 천년역사 1》(김상조, 경상남도사편찬위원회, 1986)이며 《모택동의 바둑 병법》(스코트 부어만/김수배 옮김, 기획출판 김데스크, 1975)이라는 책을 손에 쥡니다. 1975년 저때에 중국 모택동이 바둑을 어떻게 두느냐 하는 책까지 한국말로 옮긴 적이 있군요. 저때에 저런 책이 나올 수도 있었네요. 바둑책이었기 때문일까요.


  국민학교(서울 남산국민학교) 교장이던 분이 미국을 한동안 돌아보고 나서 느낀 바가 있기에 《어린이를 위한 미국 여행기》(김기서, 학문사, 1957)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없지만 앞으로 한국에 이런저런 것이 생기기 바란다는 뜻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여성, 최후의 식민지》(C.v.벨로프 외/강정숙 외 옮김, 한마당, 1987)를 손에 쥡니다.


  예전에 읽었는지 가물거리는, 가물거리니까 다시 살피자는 마음으로 《너무 순한 아이》(김경동, 심설당, 1987)를 손에 쥡니다. 이미 읽은 시집이지만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백창우, 신어림, 1996)를 집습니다. 노래가 된 시를, 노래가 될 시를 조용히 혀에 얹습니다. 다른 시집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강미정, 문학의전당, 2008)하고 《취객의 꿈》(김영승, 청하, 1988)도 손에 쥡니다.


상차림도 없이 서서 / 싱크대 커다란 입을 들여다보며 / 밥을 먹는다, 물에 말은 한 그릇 밥 / 자정의 시간으로 날이 쏟기고 / 기다림을 쏟으며 식구들은 자고 (강미정, 지독한 냄새/21쪽)


  밥하고 살림하는 아주머니란 자리에서 고스란히 옮긴 노랫가락입니다. 이 마음하고 삶을 읽을 줄 안다면, 아니 이 마음하고 삶을 우리가 나눌 수 있다면, 이 삶터는 사뭇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문득 눈앞에 《만주어 음운론 연구》(성백인, 명지대학 출판부, 1981)란 책이 보입니다. 만주말을 살핀 책이 있군요. 만주라고 하는 땅은 한겨레가 살던 터전하고 맞물립니다. 북녘뿐 아니라 남녘 곳곳에도 만주말 자취가 어느 만큼 흐르지 않을까요? 《B급 좌파, 세 번째 이야기》(김규항, 리더스하우스, 2010)를 보고 살짝 놀랍니다. 김규항 님이 이녁 ‘비급 좌파’ 이야기를 석 자락째 써낸 줄을 이제서야 압니다. 2010년이란 해에 큰아이를 돌보며 집살림을 하느라 매우 부산했기에 그때에는 이런 책이 나온 줄 까맣게 몰랐습니다. 비록 그때에는 몰랐어도 이렇게 헌책집 책시렁 한켠에 놓이니, 뒤늦게라도 알아보면서 반가이 맞이합니다.


문자 기록에만 의지해야 되는 언어사의 연구는 어느 나라 말의 연구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지만 만주어의 연구는 유달리 극복하기 어려운 여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만주어가 오늘날 사어가 되어버려서 만주어 문어를 잇는 현대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정통을 잇는 현대 구어를 알고 있기만 한다면 불과 400년도 못 되는 옛날인 17세기 만주어의 연구가 이렇게 막막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주어 음운론 연구, 2쪽)


  낯익은 책 《어린이 동시짓기》(이준범, 명문당, 1978)를 바라봅니다. 이 책은 우리 아버지 책시렁에 있었기에 낯익습니다. 초등교사로 일한 우리 아버지도 이 책을 곁에 두고서 수업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요새는 이 책을 들출 사람이 없을 테지만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저로서는, 바로 이런 책에 나오듯 ‘말을 억지로 꾸미고 이쁘장하게 보이는 시늉질’을 하는 동시쓰기를 해야 했습니다. 지난날 참으로 이 책에 나온 그대로 억지스러운 거짓 동시를 잔뜩 써야만 했던 끔찍한 일이 확확 떠오릅니다.


  조용히 새책집에서 자취를 감춘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장승욱, 하늘연못, 2010)을 만납니다. 고맙게 장만하기로 합니다. 묵은 교과서 여럿이 곁에 나란히 있습니다. 오랜 말결을 살피면서 새롭게 살릴 만한 말길을 엿보고자 이 묵은 교과서도 하나하나 고르기로 합니다. 《생물 상》(남태경, 장왕사, 1952), 《국사지도》(편집부, 홍지사, 1965), 《일반 과학 물상편 2》(신효선·이종서》(을유문화사, 1947), 《사회교육문고 성인교육교재 16 겨레의 발자취 하 (우리 생활과 과학)》(문교부, 1962)까지 꾸러미로 챙깁니다.


  그런데 이 묵은 교과서까지 챙기기로 하면서 슬몃 걱정스럽습니다. 이러다가 이달 살림돈을 모조리 책에 쏟아붓는 셈은 아닐는지?


  책시렁을 더 둘러볼는지, 이제 그만 책값을 셈해야 할는지 망설입니다. 주머니를 다시 뒤적입니다. 오늘 온 이곳에 아마 이듬해쯤 다시 올 텐데, 한 해 사이에 다른 아름다운 책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떤 마음이 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주머니가 헐거워 장만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구경은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힙니다. 《새땅을 밟으며, 만화로 보는 농업·농민 문제》(이재웅, 도서출판 알, 1991)란 만화책을 봅니다. 대구에서 나온 ‘만화 학습 교재’라고 하며, 그무렵 우르과이라운드를 비롯한 농업정책을 나무라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허웅아기》(편집부 구성·김윤식 그림, 조약돌, 1984)라는 만화책은 제주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투박하지만 멋스러운 그림결이 좋습니다.


  묵은 잡지 《주간경향》 583호(1979.11.4.)에는 박정희 사진이 큼직하게 실립니다. 총에 맞아 죽고 나서 나온 잡지입니다. 죽은 대통령을 기리는 잡지에는 “농촌의 아들, 꾸밈없이 소박, 먹걸리 즐기고”라든지 “자상한 인간미 서민적 체취 물씬 풍기며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언제나 솔선수범” 같은 말이 끝없이 흐릅니다. 퍽 낯부끄럽습니다. 《남강다목적댐 공사지》(건설부, 1970)는 진주 남강에 세웠다는 댐하고 얽힌 자료를 그러모았습니다. 아직 댐이 서기 앞서, 한창 댐을 지을 무렵, 댐을 다 짓고 나서, 이런 얼거리로 남강 언저리 모습을 사진으로 빼곡하게 담았습니다. 건설부는 진주 남강 둘레에서 찍은 사진을 필름으로 잘 건사해 놓았을까요? 그 사진은 모두 우리 자취를 돌아보도록 이끄는 알뜰한 자료일 텐데요.


  이제 손바닥책을 살핍니다. 《바람》(김석중, 상성미술문화재단, 1982)을, 《역옹패설》(이제현/남만성 옮김, 을유문화사, 1971)을, 《취락지리학》(이영택, 대한교육연합회, 1972)을, 《니일의 사상과 교육》(霜田靜志/김은산 옮김, 대한교육연합회, 1972)을 차근차근 고릅니다.


필자는 ‘聲也’라는 말을 발음한다는 말로 풀이한다. 그래서 ‘낙옹비설’이라고 읽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또 많은 인사들이 ‘역옹패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역옹패설, 6쪽)


  우리한테는 한국말이 있습니다만, 조선 무렵에 훈민정음이 나왔습니다만, 지난날 글님은 으레 중국 한문을 썼어요. 《역옹패설》이란 책은 고려 무렵에 나왔다고 하니 훈민정음하고는 동떨어집니다만, 이 나라에 살림꽃이 제대로 섰다면 훈민정음이 태어난 뒤 이 한문책을 훈민정음으로 옮기는 일을 했겠지요. 그때 제대로 훈민정음으로 이 한문책을 옮겼다면, 책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또 우리가 오래도록 쓰던 말씨가 어떤 글씨로 나타나는가를 또렷이 아로새길 만했으리라 봅니다.


  가만 보면 우리는 다른 나라 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에 앞서, 아직 우리 글씨가 없던 무렵 한문으로 쓴 책을 오늘날 우리 글씨로 알맞게 옮기는 일이 매우 서툴거나 늦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 삶자리에서 삶말이 되도록, 너나없이 쉽게 읽고 쉽게 익혀서 쉽게 나누는 길로 이어가도록 종이책을 가꾸는 살림이 매우 모자랐어요.


  손수 시를 옮겨적은 《無名詩集 1》(조성래 엮음, 1977)는 이 글꾸러미를 묶은 분이 무척 좋아하던 시를 또박또박 옮겨서 엮은 꼭 하나만 있는 책입니다. 이 《무명시집》을 묶은 분은 벗님하고 주고받은 글월도 《강변에서 1 (편지 모음집)》(김선아·하계남·최명자, 1975)하고 《강변에서 2 (편지 모음집)》(손정혜·고순남, 1975) 같은 이름을 붙여서 알뜰히 여미었습니다. 지난날 손글월 자취를 고이 엿봅니다.


  겉그림이 조금 뜯겼으나 《고어독본》(정태진, 연학사, 1947)을 손에 쥐면서 후끈후끈합니다. 이 오랜 책을 살뜰히 읽은 분 손길을 느끼고, 여러 손길을 거치고 돌면서 오늘까지 잘 살아남아서 제 눈앞에 놓인 숨결을 마십니다.


  마지막으로 잡지 《朝鮮》(朝鮮總督府 文書課長) 351호(1944.8.)를 고르기로 합니다. 잡지 《朝鮮》은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짓밟은 다음 조선총독부를 세우자마자 바로 펴냈다고 합니다.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선보인 홍보잡지인 셈입니다. 이 잡지에 실은 글이나 사진이란 바로 ‘친일부역’이지요.


  한국으로서는 온통 친일부역으로 가득한 이 잡지는 기나긴 날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제가 만난 이 잡지는 ‘동경 한국연구원 도서관 1976.8.4.’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나왔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온 셈입니다.


  쓸쓸한 뒷그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잡지를 쥔 손을 파르르 떱니다. 갓 식민지가 되던 이 땅에서 이 잡지 첫 호가 나오고, 100호가 넘고 200호가 넘고 300호가 넘도록 나오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어쩔 수 없으니 그저 친일부역으로 먹고살자고 여겼을까요, 이 잡지가 다달이 새로 나올 적마다 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을까요? 잡지 《朝鮮》을 가만가만 넘기다가 불쑥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해방이 되기 무섭게 나라 곳곳 도서관이며 시청이며 군청이며 면사무소이며 동사무소이며, 바로 이 《朝鮮》이란 잡지를 비롯한 친일부역 자료를 낱낱이 뒤져서 불쏘시개로 삼거나 불살랐을 수 있겠다고. 뒷그늘 자국을 누가 알까 두려워 꽁꽁 숨기려고 이런 잡지나 책을 없애려고 바빴으리라고.


  고른 책을 다 들고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밖에도 많습니다. 숨을 가늘게 쉽니다. 책값을 셈하고 보니, 이달치 살림돈뿐 아니라 다음달치 살림돈까지 한몫에 나갑니다.


  바보짓을 한 하루일는지, 참짓을 한 오늘일는지, 사라질 수 있는 책을 건사한 날인지,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를 만난 자리인지, 어느 한 가지로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디 이 온갖 책이 징검다리가 되어 새로운 삶길로 가는 씨앗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 곁에서도, 이 땅 곳곳에서도, 아름책집 한 곳에서 깨어난 책이 아름노래로 술술 퍼질 수 있기를 빕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