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다 쓰고 나서 살피니, 황미나 님이 연재를 다시 한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 글에서 표절과 창작이라는 고갱이를 놓고 해야 할 말을 다 적었기에 글을 손질하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황미나


 ‘창작’과 ‘표절’과 ‘상상력’은 아주 다른 테두리입니다. 두 가지 다른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뜻밖에 거의 똑같아 보이거나 아주 똑같은 창작품이 나올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달리 거의 비슷한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슬프게 거의 똑같이 보이거나 어떠한 창작품 밑얼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을 때에는 도둑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똑같거나 하나라도 비슷할 때에도 도둑질입니다. 흔한 말로 ‘표절’이란 말을 쓰기도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베끼기’이거나 ‘훔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지만 ‘훔치기’도 ‘베끼기’도, 또 ‘시늉하기’나 ‘흉내내기’마저 아니곤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기’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기’이기 때문입니다. ‘모시기’라든지 ‘따르기’일 때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닮곤 합니다.

 앞선 사람들 땀방울과 슬기와 보람을 밑거름으로 삼아 알뜰히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뜰히 배우는 첫무렵에는 거의 똑같이 따르는 듯 보이지만, 차츰차츰 제 빛깔을 내고 제 무늬를 그리면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이가 제 어버이 삶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하나하나 똑같이 따르면서 차츰 배우듯,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가르치며 배우는 매무새가 삶으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제 어버이를 베꼈다’라든지 ‘제 어버이를 훔쳤다’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어버이가 걷는 길을 똑같이 따를지라도 ‘도둑질’이라 일컬을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한길을 서로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걸어가니까요.

 장사에는 동무장사가 있습니다. 서로서로 한뜻 한마음이 되어 장사를 함께할 때에 동무장사입니다. 둘이는 한 가게에서 함께 일할 수 있고, 다른 가게를 차리며 나란히 일할 수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중국땅을 벗어나 온누리 어디를 가더라도 중국사람거리를 이룹니다. 서로 ‘중국 밥집’을 차린달지라도 값을 더 싸게 해서 판다든지 무얼 한다든지 하며 피 튀기며 다투지 않습니다. 제 살 깎아먹기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도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한국사람거리’를 만들곤 합니다. 그렇지만 중국사람거리처럼 북적거리거나 아름답거나 살가이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한국땅에서도 똑같습니다. 순대골목이니 냉면골목이니 하지만, 가게마다 다 다른 빛깔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서로 값을 낮춘다든지 부피를 늘린다든지 할 뿐입니다.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들한테는 참다이 창작이나 상상력이라는 문화가 삶으로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내 삶을 일구도록 배우지 못하는 배움터요 마을이며 집입니다. 제도권학교이고 제도권사회이며 제도권문화인 가운데 제도권예술 테두리에서 허덕입니다. 어느 집이건 이웃이나 동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이나 동무를 마구 밟고 올라서서 1등이 되라고만 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이름값은 더 높이 얻으며 힘은 더 세져야 한다고 들볶거나 등떠밉니다.

 연극이든 영화이든 문학이든 ‘재연’이라고 있습니다. 우러르는 작품에 바친다는 뜻과 넋으로 ‘밑바탕이 되는 어느 창작품’에 있는 이야기를 되살리거나 새롭게 바꾸면서 바치는 작품입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아톰 만화를 우라사와 나오키가 님이 ‘새로운 로봇 만화’로 다시 그리는 일이라든지, 최규석 씨가 김수정 님 둘리 만화 ‘비꼬아 다시 그리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다시 그리기’를 하든 ‘비꼬아 그리기’를 하든, 새롭게 그리려는 사람들 자유이며 창조이며 상상력이라 할 만합니다. 누구나 다시 그릴 수 있고 비꼬아 그릴 수 있어요. 딱히 의무가 없는 권리요, 문화이며 예술이라 합니다. 구태여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이 보기에는 내 작품을 바탕으로 다시 그리거나 비꼬아 그릴 때에 반가이 여길 수 있으나 못마땅히 여길 수 있어요. 자그마한 대목 하나를 따오는 일 하나 때문에 몹시 거슬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훔치기나 베끼기란 ‘아주 자그마한 대목 하나’ 때문에 훔치거나 베끼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훔치거나 이야기를 훔치지 못합니다(때로는 이런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마저 있어 사람들을 놀래킵니다만). 주인공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큰 고빗사위를 훔치거나 베끼지는 않아요(때때로 이런 짓까지 일삼는 사람이 있어 사람들 뒷통수를 칩니다만).

 독자 자리에 선 사람은 이런 창작도 보고 저런 창작도 볼 수 있습니다. 둘을 견주며 어느 쪽이 한결 낫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 창작을 내놓은 사람은 사람들이 이러거나 말거나 제 길을 조용히 걸을 수 있어요. 아무렇거나 내 삶을 알차고 사랑스레 꾸리면 ‘온누리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보아 주지 못할지라도 참속을 헤아리며 보듬는 사람’이 다문 하나라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가르치기와 배우기는 서로한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됩니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새로운 길을 틉니다. 제자는 스승한테서 배우며 새로운 눈을 뜹니다. 지식과 정보로 사귀거나 만나는 사이라면 스승과 제자가 아닙니다. 슬기와 깜냥을 북돋울 때에 비로소 스승과 제자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일 때에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내가 너를 따르든, 네가 나를 좇아가든 즐겁습니다. 고마워요. 그러나 베끼거나 훔치는 사이일 때에는 노상 괴롭습니다. 미우며 슬픕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도둑맞은 사람은 1원짜리 쇠돈을 앗기든 1000원짜리 종이돈을 털리든 똑같이 생채기를 받습니다. 1억 원이나 도둑맞아야 생채기를 받지 않아요. 팔다리가 잘릴 때에만 아프지 않습니다. 손톱 둘레에 거스러기가 생겨도 아파요. 파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어도 아파요. 살짝 꼬집어도 아픕니다. ‘흔하고 널린 설정이니 표절이 아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일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다 하지만 ‘이는 도무지 표절이 아니에요’ 하는 말이 나옵니다.

 손쉬운 달걀부침에도 ‘요리법’이 있고, 뜨개질이든 바느질이든 영어로 일컫는 ‘레시피’가 있습니다. 이 요리법에는 모두 저작권이 있어요. 다만, 저작권이 있는 사람이 굳이 저작권을 내세우지 않으니 누구나 거리낌없이 나누며 씁니다. 종이학을 접든 종이배를 접든 한결같이 저작권이 있어요. 그렇지만 첫 창작자가 이러한 저작권을 누리려 하지 않으니 누구나 ‘거저로 마음껏’ 쓰면서 새로운 종이접기 길을 틉니다.

 문학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만화이든 …… 문화와 예술은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고, 법정에 옳고 그림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법으로 따진다면야 저작권법이 있으니 첫 창작자는 제 권리를 지킬 수 있어요. 돈으로 갚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화와 예술을 하는 사람한테 돈이란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름값이란 무슨 보람이 있나요. 게다가 법정소송을 하면 제아무리 짧아도 한두 해는 걸리고, 2심이나 3심을 간다면 자그마치 열 해나 써야 해요. 창작을 하는 사람한테는 한 달만 제 일을 못해도 괴로워 죽을 판인데, 법정소송에 가면서 제 일을 못하면 그야말로 죽음보다 더 아프며 힘든 노릇입니다. 표절, 곧 도둑질로 받은 생채기를 법정소송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까닭은 ‘작품은 잃었어도, 그러니까 내 창작과 상상력은 빼앗겼어도 내 시간을 잃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앞으로 다른 작품을 내놓으며 내 새로운 창조와 상상력을 일구고 싶기 때문이에요.

 요즈음 불거지는 말밥을 살피면 더없이 슬픕니다. 한국땅 눈높이는 아주 낮기 때문입니다. 황미나 님이 지나치게 받아들였다고 여길 수 있고, 연속극 작가가 옳을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은 ‘어느 연속극이 내 만화에서 밑생각을 훔쳤다’고 따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황미나 님은 더는 만화그리기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일을 놓고 숱한 말이 오가지만,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를 짚는 말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마,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뿐 아니라, 다른 이 밑생각과 창조와 상상력을 훔친 사람 마음이 얼마나 메마르거나 팍팍할 뿐 아니라 가엾거나 딱한가까지 짚을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이 ㅂ이라는 작품을 더는 안 그리기로 한 일은 아주 잘했다고 느낍니다. 굳이 아쉬워할 일은 없으니까요. 황미나 님은 당신이 새내기 만화쟁이였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샘물처럼 시원하게 솟아나는 끝없는 창조와 상상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만화를 그린 분이에요. 가끔 긴머리 싹뚝 잘라 주지, 하는 마음으로 짧은머리 다시금 기르면 됩니다.

 아무쪼록,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믿음직함이 고루 어우러지면서 따사롭고 너그러운 새 만화를 즐거이 그리시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가지 한둘이 뚝 부러져도 이듬해에 새 가지를 씩씩하게 다시 냅니다. 리영희 님이든 이오덕 님이든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으셨을 텐데, 당신들이 쓴 글은 모두 ‘창작’이었지, 어느 글 한 조각조차 ‘베끼기’라든지 ‘훔치기’라든지 어설픈 글이 태어난 적이란 없습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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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29] 무지개아파트

 자전거를 타고 읍내 장마당을 찾아가서 먹을거리를 잔뜩 장만한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왼편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살피다가 문득 읍내 아파트 한 곳을 올려다봅니다. 아파트 이름은 ‘무지개아파트’입니다. 시골 읍내에 선 아파트라 서울 한복판에 서는 아파트들마냥 갖가지 영어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참 예쁜 이름을 붙였구나 싶고, 이십 층이든 삼십 층이든 하는 아파트들도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이면 한결 나으리라 싶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길을 오르며 생각합니다. 무지개아파트도 좋고 흰구름아파트도 좋으며 실개천아파트도 좋습니다. 솜구름아파트라든지 소나기아파트라든지 사마귀아파트도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보금자리가 아닌 아파트한테 이러한 이름을 붙일 때에 참말로 어울릴까 하고 생각하니 어쩐지 아니다 싶습니다. 고갯마루에서 자전거를 멈춥니다. 가방 무게에 눌려 안장이 조금 낮아졌다고 느껴 안장을 삼 밀리미터쯤 올립니다. 내리막을 신나게 달리며 춥지만 시원하다고 느낍니다. 시골 읍내 아파트이니까 무지개아파트란 이름을 붙일 만하지만, 시골 읍내 아파트라도 그냥 영어로 이름을 붙여야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아파트이니까요. 아파트라서요.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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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20일부터 2011년 1월 31일까지, 서울 시립미술관 별관이 있는 '경희궁 한켠'에서 "서울사진축제"가 펼쳐집니다. 이 서울사진축제에서는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자리가 함께 있는데, 이 자리에는 제가 꾸리는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에서 책 300권을 빌려서 꽂아 놓았습니다. 

 여느 자리에서는 거의 구경해 보기 어려운 책을 많이 내놓고 더 널리 보도록 해 놓았습니다. 틈 나는 분들은 경희궁으로 마실을 해 보소서... (그나저나 행사 안내종이네는 저한테 책을 잔뜩 빌려가 놓고 '협조'나 '후원'이나 '자료제공' 같은 말은 한 마디도 안 적어 놓았더군요. 쓸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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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는 마음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 걸음이 누구보다 빨라 가장 앞장서서 걸을 수 있지 않더라도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 걸음이 누구보다 느려 가장 뒤처져 걸을지라도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에는 사랑하는 짝꿍이랑 아이가 함께 있습니다. 짝꿍이랑 손을 잡고 걷든 어깨동무를 하며 걷든 혼자 걸을 때보다 한참 더디 걸어야 합니다. 때로는 오래도록 한 자리에 머물거나 아예 며칠을 지내거나 때로는 그예 눌러살아야 합니다. 아이하고 손을 잡고 걷든 아이를 품에 안고 걷든, 아이 빠르기와 결을 살펴야 합니다. 더욱이, 아이가 힘들면 새근새근 잠들도록 바람 안 불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아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길을 걷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길을 걷습니다. 사진을 찍는 길을 걷습니다. 집살림을 도맡으며 집식구를 돌보는 길을 걷습니다. 조그마한 몸뚱이 하나로 버티기란 버겁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튼튼하다지만, 알고 보면 퍽 여린 몸뚱이로 이 숱한 일을 해내자니 벅찹니다. 그런데 용케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다가올 밤에 잠든 채 다시는 못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고맙게 다시 눈을 뜨며 새날을 맞이합니다. 새날을 맞이하며 새롭게 글을 쓰고 새롭게 사진을 찍으며 새롭게 아침을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합니다. 글과 사진은 날마다 새롭게 빚는데, 빨래랑 밥 또한 날마다 새롭게 보듬어야 합니다. 아이랑 어제 하루 신나게 놀았으니 오늘은 아이 혼자 내버릴 수 없습니다. 엊저녁 옆지기 다리를 주물렀으니 오늘은 못 본 척하며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시골에 사람이 크게 줄어 시골길을 거닐 때에 사람을 마주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드문드문 할매랑 할배를 마주칩니다. 시골길을 거니는 동안 사람보다 자동차를 훨씬 자주 마주칩니다. 그래도 도시처럼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동차를 부대껴야 하지 않습니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걷는 동안 바람소리를 듣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구름이 흐르는 소리와 해가 기우는 소리를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면서 느껴 봅니다.

 걷다 보면 땀이 나고, 땀이 나면서 가방을 멘 등허리가 쑤시고, 아이가 힘들어 할 때에는 아이를 안느라 팔다리가 몹시 결립니다. 때때로 도시로 마실을 나와 시내를 걸어야 하면 아이는 잠들지 못합니다. 시끄럽기도 시끄럽지만, 아이 눈을 사로잡는 가게 불빛이며 온갖 모습이 번쩍거리기 때문입니다. 시골길이나 골목길을 거닐 때에는 조용하기도 조용하지만, 시골자락과 골목자락이 보드라이 아이를 품어 줍니다. 아이는 시골길이나 골목길 마실을 할 때에 아빠 품에 안기거나 엄마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곤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더 자주 책방마실을 하고 더 많이 책을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우리처럼 가난뱅이 식구는 조그마한 집을 빌려도 달삯을 많이 치러야 합니다. 밑돈(보증금)을 거의 못 내는 살림이니까요. 도시에서는 밑돈 꾸랴 달삯 벌랴 눈썹 휘날리도록 휘둘리며 바빠야 하고, 쓰기 싫은 글이나 찍기 싫은 사진을 뽑아내려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기계처럼 글과 사진을 뽑아낼 때에도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만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착하고 참다이 내 삶을 사랑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고 싶습니다. 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 조용히 잠들면서 바람결을 볼따구니로 느끼는 삶자리에서 일하며 땀흘리고 싶습니다. 더 많이 쏟아내어 더 많이 읽힐 글도 나쁘지 않겠지요. 더 빨리 달리는 자동차로 음성 읍내가 아니라 충주 시내로 다녀오면서 더 값싼 먹을거리나 살림살이를 장만해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래도, 저랑 옆지기랑 아이로서는 읍내 조그마한 롯데리아 몇 백 원짜리 얼음과자로도 즐겁습니다. 그냥 작은 구멍가게 막대얼음과자로도 기쁩니다. 장마당 500원짜리 어묵꼬치를 우물우물 냠냠해도 신납니다. 빨래하느라, 밥하느라, 설거지하느라, 방바닥 쓸고닦느라, 이불 털고 빨고 말리느라, 아이랑 놀고 아이한테 그림책 읽어 주느라, 하루가 몇 해나 되는듯 아침부터 밤까지 등허리 펼 겨를이 없는데, 이런 삶이지만, 이런 삶밖에 안 되지만, 이냥저냥 즐거이 내 길을 걷습니다. 저녁나절 잠자리에 일찌감치 드러누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가 안 오고 놀겠다면 그냥 놀라 하고 아빠는 이동안 책이라도 몇 줄 읽으려고 합니다. 이러면 아이는 으레 “아빠 책 읽어 줘.” 하면서 달려옵니다. 그냥 너 혼자 더 놀다 오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다가는,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 하는데 안 읽어 주는 못된 어버이가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잠자리맡에 늘 놓아 두는 그림책을 집고 아이는 아빠 오른팔 베개로 눕히며 그림책을 읽습니다. 그림책에 적힌 글은 ‘어린이 눈높이에 걸맞지 않게 잘못 쓴 말투와 어려운 낱말이 잔뜩 깃들었’기에, 아빠는 이 말투를 모조리 고쳐서 새로 읽습니다. 아이는 눈알을 초롱초롱 빛내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도 이렇게 나한테 그림책을 읽어 준 적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안 읽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뭐, 못 읽어 주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먹고살기에 빠듯하고, 돈을 벌랴 집살림 꾸리랴 등허리가 휘셨으니까요. 출퇴근에 네 시간이 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돌아오는 평교사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뻗어서 쓰러지고 형이랑 나는 날마다 아버지 다리와 허리를 주물렀는데 아버지가 우리한테 그림책이건 동화책이건 읽어 줄 틈이 어디 있겠어요. 학교에서 학교 아이들한테는 읽어 주겠지만요.

 참말 돈은 못 벌고, 살림을 꾸린다지만 꽤 엉터리로 꾸리는데, 이럭저럭 어설프며 어줍잖은 하루하루라지만, 짝꿍이 있고 아이가 있기에 시골집에서 내 길을 내 깜냥껏 더디더디 걷습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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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는 책과 사람과


 나는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하고는 달리 살아간다. 그래서 내가 읽는 책은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이 읽는 책하고 다르다. 내가 사귀거나 만나는 사람 또한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이 사귀거나 만나는 사람하고 사뭇 다르다.

 삶이 다르니 넋이 다르다. 삶이 다르기에 쓰는 말이 다르다. 삶이 다른 만큼 찾아서 읽는 책이 다르고, 삶이 다른 터라 읽어서 아로새기거나 곰삭이는 이야기가 다르다.

 다 다른 사람은 다 달리 살아가며 다 달리 말을 하고 다 달리 책을 읽고 다 달리 사랑을 하며 다 달리 책을 읽는다. 이 다 다른 사람들은 몇 가지 잘 팔린다는 책을 읽으며 삶을 살찌울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다 다른 줄을 까맣게 잊는다.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인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인 줄 생각조차 못하고 만다.

 몇 가지 책들이 수십 수백만 권 팔리는 모습을 보면 몹시 슬프다. 수천 수만 가지 책이 골고루 사랑받지 못할 때에 이 나라 앞날은 새까맣게 어둡기만 하다. 새로 나오는 책은 애써 광고를 할 까닭이 없어야 하고, 광고 하는 데에 돈을 써서는 안 된다. 책을 써내는 사람한테 알맞게 글삯이 돌아가야 하고, 책값은 가난한 사람 누구나 사 읽을 만큼 알맞게 붙여야 하며, 도서관마다 새로 나오는 책을 도서관 빛깔에 따라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출판사는 새로운 책을 꾀하는 데에 돈을 써야지, 몇 가지 책을 수십 수백만 권 팔아치우는 일에 돈을 써서는 안 된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달리 살아가며 다 달리 사랑하고 믿으며 나누는 나날을 일굴 때에 아름답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달리 읽은 책을 다 다른 느낌으로 나누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 아름답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아이를 낳아 다 다른 목숨을 빛내며 돌볼 때에 아름답다.

 나는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하고, 발을 움직이며 다니기를 좋아한다. 나는 내 손을 써서 일을 하고 싶고, 내 발을 움직이며 걷거나 마실을 하고 싶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결대로 책을 찾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삶무늬대로 글을 써서 책을 내놓는다.

 2004년 6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책방에 넣는 책 아홉 가지에, 1인잡지로 내놓는 책 열 가지에, 책방에 넣지 않는 비매품 책 네 가지를 만들었다. 2011년에는 몇 가지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새해에는 열 권쯤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다. 아이가 일어났다. 아이가 깨기 앞서 밥물을 올렸다. 이제 슬슬 밥이 익겠구나. 집식구 먹을 아침을 차려야겠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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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ferry 2010-12-22 13:05   좋아요 0 | URL
다 다르게 생긴 모양새 만큼 생각하는 것도 다른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인데, 저 또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 그럴 수도 있지...겉으로만 그런 체 하고 속으로는 존중하지 아니하며 발끈하는 나날 속에 중생의 삶을 삽니다.정말 마음으로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쉽지 않은 수행입니다.^-^;

파란놀 2010-12-22 16:46   좋아요 0 | URL
저라고 이런 글을 쓰면서 '내가 잘났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때그때 내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내가 옳고 착하게 잘 걸어가는가를 헤아려 봅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아름다운 내 삶이자 길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도 즐겁게 내 모자라거나 아쉬운 대목을 예쁘게 쓰다듬어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