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1. 18.

 잠들기 앞서, 어머니가 책을 읽어 준다. 인형을 안고 함께 책을 본다.

 

혼자 책을 읽으며 꼼지락꼬무락거리는 네 발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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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푸른말


 말만 예쁘장하게 쓰는 사람이 있어요. 삶이나 매무새는 하나도 예쁘장하지 않을 뿐더러, 넋이나 얼 또한 조금도 예쁘장하지 않을지라도 말만큼은 예쁘장하게 쓰는 사람이 있어요.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 이름을 아는 말사랑벗은 몇 사람이나 있으려나요. 말사랑벗들은 어릴 적부터 이원수 님 동요나 동시나 동화를 읽었는가요. 읽은 벗님이 있고, 이름을 모르는 벗님이 있겠지요. 이원수 님은 《얘들아 내 얘기를》이라는 수필책을 어린이가 읽도록 1975년에 내놓은 적 있는데, 이 책에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이름을 붙인 짧은 글이 실렸어요. “마음이 곧은 사람은 곧은 글을 쓰고, 마음이 슬픈 사람은 슬픈 글을 쓰고, 성격이 괄괄한 사람은 괄괄한 모양의 글을 쓴다.”고 하면서, 글을 읽으면 이 글을 쓴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말사랑벗들은 말만 참 예쁘장하고 삶은 엉망이거나 짓궂거나 미워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참말 말은 훌륭하거나 멋진데, 하는 모양은 엉터리인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원수 님은 “그러나 그 속에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생각은 없었다. 그 시를 쓴 사람을 나쁘다고 한 것은 그가 속은 좋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좋은 듯이 꾸미고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고 덧붙입니다.

 저 또한 이와 같이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제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오로지 제 삶 테두리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그대로 이야기를 엮어서 나눌 뿐입니다. 저부터 아름다이 살아가지 못하면서 아름답다 싶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요. 저부터 더 착하게 살아가지 않으면서 착한 마음이나 넋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저부터 집에서고 밖에서고 어디에서고 바르며 고운 말을 즐겨쓰지 않는다면, 이 책에서만 바르며 고운 말 이야기를 적바림할 수 없어요.

 푸른말을 생각합니다. 푸른말이란 말사랑벗님이 보내는 10대라는 나이에 둘레에서 들으면서 말사랑벗님 스스로 쓰는 말을 일컫습니다. 푸름이가 쓰는 말이기에 푸른말이에요. 또한, 내 삶과 넋을 푸르게 가꾸고픈 꿈으로 쓰는 말이 푸른말이에요.

 나이로 치면 10대 푸름이가 쓰는 말이지만, 나이를 넘어 누구나 푸른 모두를 사랑하고플 때에 쓰는 푸른말입니다. 옷차림만 푸름이답기보다 마음차림부터 푸름이다우면 좋겠고, 나이를 세는 밥그릇으로만 푸름이가 되기보다 사랑을 담는 마음그릇부터 푸름이다우면 좋겠어요.


1. 배움집 : 우리는 ‘학교(學校)’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이 한자말은 한자말이라기보다 그냥 우리말이 되었기에 굳이 한자를 밝힐 까닭이 없어요. 초등학교는 ‘초등학교’이지 ‘初等學校’가 아니고, 중학교는 ‘중학교’이지 ‘中學校’가 아닙니다. 그런데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배우는 곳이지요. 배우는 곳이기에 ‘배움곳’이나 ‘배움터’일 테고, 건물이 선 학교뿐 아니라 마을이나 집 어디에서나 사람들 누구나 배우기에 ‘배움마을’이요 ‘배움집’이며 ‘배움누리’이고 ‘배움마당’입니다. 


2. 스승 : 해마다 5월 15일 하루만 ‘스승날’이라 하면서 ‘스승’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다른 때에는 ‘교사’나 ‘선생’이라고만 해요. 우리한테는 좋은 낱말 ‘스승’이 있지만 좀처럼 이 낱말을 못 쓰며 살아요. 참다운 스승, 곧 참스승이 없기 때문인가요. 내 마음에 참스승을 못 모시며 살아가기 때문일까요. 


3. 동무 : 북녘사람들은 나이나 계급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동무’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래서 1950년대부터 남녘땅 사회와 학교에서는 이 낱말 ‘동무’를 몹쓸 낱말로 여기고 말았어요. ‘어깨동무’ ‘길동무’ 하듯이 동무일 뿐인데요. ‘사랑동무’ ‘마음동무’ ‘공부동무’ ‘놀이동무’처럼 우리들은 좋은 벗님, 그러니까 너나들이를 사귀면 좋을 텐데요. 


4. 골마루 : 건물이나 집에서 나무로 바닥을 댄 거님길을 골마루라 합니다. 옛날 학교는 나무로 지어서 ‘복도’ 아닌 ‘골마루’였어요. 그런데 아파트에서도 ‘마루’이고 ‘부엌’은 똑같아요. 솥을 걸어야만 부엌이 아니고, 시멘트로 바닥을 대었어도 ‘골마루’랍니다. 


5. 푸름이 : 이름만 푸름이로 쓴다 해서 참으로 푸른 사람 푸른 꿈 푸른 날 푸른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지는 않지만, ‘청소년’이라는 이름에서는 푸른 빛깔과 맑은 무지개를 떠올리기 너무 어려워요. 


6. 사랑매질 : 예부터 학교에서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얼차려를 하거나 매질이나 주먹질을 했습니다. ‘체벌’이라고도 하는데, 참말 사랑을 담은 매질이라면 이름부터 ‘사랑매질’이라 붙여서, 거짓없이 사랑을 담은 손길로 우리들을 어루만지면 고맙겠어요. 


7. 개밥도토리 : ‘왕따’는 일본말이라 ‘집단 따돌림’이라 써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 나라에도 예부터 ‘개밥도토리’랑 ‘돌림뱅이’가 있었어요. 일본에서 들어온 못된 짓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우리들 살갑고 사랑스러운 벗을 괴롭히던 슬프며 못난 삶이 있었습니다. 


8. 건널목 : 나어린 아이들은 건널목을 건널 때에 손을 높이 들도록 시킵니다. 키가 작아 ‘자동차에 탄 어른들 눈에 잘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널목 앞에서 얌전히 서거나 기다리는 어른은 몇이나 되나요. 아이들은 어른들 차 모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중에 어른이 되어 차를 몰 때에 똑같이 슬픈 빛으로 차를 몬다고 느껴요.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건널목 앞에 서면 무섭습니다. 


9. 징검돌 : 시골 아저씨는 말사랑벗한테 징검돌 하나입니다. 말사랑벗이 저 같은 아저씨 한 사람을 밟고 새길을 걸으면서 슬기로우며 예쁜 넋을 북돋우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징검다리를 이루는 징검돌입니다. 나중에 말사랑벗님들이 씩씩하며 훌륭한 어른이 된다면 또다른 징검돌 노릇을 해 주셔요. 디딤돌이나 받침돌이나 밑돌 노릇도 좋아요. 걸림돌은 되지 말아 주셔요. 


10. 길잡이 : 가시밭길을 꿋꿋이 헤치면서 뒷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일컬어 ‘이슬떨이’라 합니다. 이슬떨이만큼 대단하게 살 수 없어도 길잡이 노릇으로도 즐겁습니다. 길잡이가 못 된다면 길동무로도 좋고, 그냥 길손이 되어도 괜찮아요. 


11. 꿈날개 : 꿈에 날개를 답니다. 생각에도 날개를 답니다. 마음에도 날개를 달아요. 이야기에도 날개를 달고, 책이나 글이나 선물이나 꽃이나 나무한테도 날개를 달아 봅니다. 


12. 삶이야기 : ‘판타지’란 어떤 이야기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은 우리가 읽을 문학을 손수 쓰거나 나라밖에서 들여오면서 ‘판타지문학’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우리 삶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라면 꾸밈없이 ‘삶이야기’라 해도 되고, 우리 꿈을 마음껏 펼치는 이야기라면 수수하게 ‘꿈이야기’라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3. 셈틀 : 아저씨도 ‘컴퓨터’라는 낱말을 쓰지만, 때때로 ‘셈틀’이라는 낱말을 쓰곤 합니다. ‘셈 + 틀’이라 셈틀이고, ‘셈’이란 ‘세다’에서 비롯했으며, ‘세다’는 ‘헤다’에서 온 말이요, ‘헤다’는 ‘헤아리다’로 가지를 뻗었습니다. ‘헤아리다’란 ‘생각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셈틀’이란 ‘생각틀’이요 ‘꿈틀’이기도 합니다. 


14. 빛슬기 : 아저씨하고 아줌마는 첫째 딸아이 이름을 ‘사름벼리’라고 지었습니다. 아저씨랑 아줌마는 어버이 성씨를 둘 다 안 쓸 마음으로 딸아이 이름을 지으며 ‘사름’을 성으로 삼고 ‘벼리’를 이름으로 삼았어요. 호적에 올릴 때에는 아버지 성을 넣어야 했는데, 여느 자리에서는 아버지 성을 뺀 ‘사름벼리’라고만 불러요. 티없이 고우면서 꾸밈없이 어여삐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름 넉 자에 담았어요. ‘빛슬기’라는 낱말은 푸름이로 살아가는 말사랑벗들이 빛과 같은 슬기를 몸소 일구면서 나누면 좋겠다는 꿈을 담아 새로 지어 봅니다. ‘꿈슬기’를 지을 수 있고 ‘참슬기’라든지 ‘멋슬기’라 지어도 되겠지요. 더 많은 지식보다는 더 따스한 슬기와 더 너그러운 빛깔을 사랑해 주면 기쁘겠어요.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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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49 : 믿음책 읽기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 2010년 7월에 《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고인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이 책에는, “교훈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훈화나 도덕 교과서의 글같이 되었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지만, 교훈성 그 자체를 죄다 빼려고 하는 것은 어린이문학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훈을 꺼리고 무서워하는 사람일수록 재미없고 해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교훈이 없다는 것은 글쓴이의 의도가 없고 사상이 없다는 것이고, 역사와 사회·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정열·사랑에 없는 것을 말해 준다(98∼99쪽).”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배웁니다. 어른들은 틀림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교과서나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교과서나 책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살아내는 몸뚱이로 가칩니다.

 교과서란 지식입니다. 그야말로 지식덩어리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쥐어 줄 책은 으레 ‘삶책’이 아닌 ‘지식책’이기 일쑤입니다. 과학동화나 철학동화는 온통 지식책이에요. 동화책이라 하는 문학 또한 지식책으로 기울거나 값싼 ‘시간 때우기’ 책에 머물곤 합니다.

 어린이책을 잘 모르는 분들은 자칫 ‘어린이문학 = 가르침(교훈)’이어야 하는 듯 잘못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면, 이 모든 이야기는 ‘가르침’이 되고 ‘배움’이 됩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왁자지껄 떠는 수다 또한 서로서로 가르치는 말이요 배우는 말이에요.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비질과 걸레질 하는 모든 삶이 바야흐로 책이자 배움이요 가르침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삶이 배움입니다. 가까운 어른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둘레 어른이 읊는 말마디를 고스란히 배웁니다. 어른들이 아이를 태운 차를 거칠게 몰면 아이들은 시나브로 거친 매무새를 배웁니다. 어른들이 길가에 담배꽁초뿐 아니라 갖은 쓰레기를 버리니, 아이들도 과자봉지를 아무 데나 버립니다. 어른들이 바쁘다며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걸으니, 아이들도 동무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온삶이 그야말로 ‘교과서’입니다. 온삶을 따스히 어루만지지 않는다면 가르침과 배움이 올곧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부터 내 삶을 포근히 돌보며 넉넉히 일구어야 비로소 내 아이한테든 이웃 아이한테든, 사랑하는 짝꿍과 살붙이한테든 좋은 손길을 내밉니다.

 이 나라 한국에는 예배당이 대단히 많습니다. 딱히 부처님 나라나 하느님 나라가 아니지만, 불교·천주교·개신교를 믿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이리하여, 불경이든 성경이든 믿음을 담은 책이든 어마어마하게 쏟아집니다. 그렇지만, 막상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가르친 ‘사랑과 믿음’을 ‘따뜻함과 넉넉함’으로 나누는 사람은 드뭅니다. 수수한 여느 자리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믿음책이 제아무리 값지거나 훌륭하달지라도 참된 믿음이(신자)로 거듭나지 않으나, 좀처럼 깨닫지 않습니다. (4344.1.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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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한테 아름다운 삶을 보여줄 수 없을까
― 오사다 아라타(長田 新), 《페스탈로찌》


- 책이름 : 페스탈로찌
- 글 : 오사다 아라타(長田 新)
- 옮긴이 : 이원수
- 펴낸곳 : 신구문화사 (1974.5.1.)


 저로서는 헌책방이었기에 만난 책이 몹시 많습니다. 저는 1975년에 태어났으니 1975년 무렵에 나온 책은 새책으로 만날 길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2∼3학년이던 1992∼93년에는 최인훈 소설과 황순원 소설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세로쓰기로 된 판을 찾으려고 인천에 있는 모든 새책방을 샅샅이 훑으며 하나하나 그러모으곤 했지만, 1970년대 끝무렵부터 1980년대 첫무렵에 나온 책을 1990년대에 새책으로 만나기란 아주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이러한 책은 헌책방에서 찾아야 하는 줄 깨닫습니다.

 도서관에서 갖추어 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갖추어 주지 못하는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이라 해서 모든 책을 골고루 갖추지는 않습니다. 또한, 서울에 있는 큰 도서관 한 곳에는 있을는지 모르나, 인천에 있는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 많습니다. 게다가,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는 도서관에서 철지난 책을 갖출 수 없는 노릇입니다. 1970∼80년대에 ‘신구문화사’에서 펴낸 ‘신구문고’라 하는 작은 책을 어느 도서관에서 몇 권이나 만날 수 있으려나요. 이 신구문고를 알아본 때는 1990년대가 저물 때요, 1990년대가 저물 때에 비로소 1970년대 책을 찾으려 했으니, 헌책방 아니고서는 만날 길이 없습니다.

 1998년 1월 첫머리에 권정생 님 이야기책 《몽실 언니》를 읽고는 어린이책을 차근차근 장만하여 읽습니다. 이원수 님 《해와 같이 달과 같이》도 이무렵에 비로소 읽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책을 어린이일 때에 못 읽었으니 참 슬프다고 여겼지만, 어린이일 때에 못 읽은 책을 어른이 되어 읽는 맛은 남달랐습니다. 어린이일 때에 한 번 읽고 어른이 되어 다시금 읽어도 훌륭한 책이지만,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부터 어른 누구한테나 아름다울 책인 줄을 비로소 깨닫도록 도왔다고 할까요.

 이원수 님 어린이책을 하나하나 사서 읽던 어느 날, 헌책방 책시렁을 살피다가 신구문고 가운데 하나인 《페스탈로찌》를 만납니다. 1974년에 옮긴 얇은 책 《페스탈로찌》는 바로 ‘이원수 옮김’으로 되었습니다. 헌책방에서 살핀 책 때문에 알았는데, 이원수 님은 공상과학동화라든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라든지 ‘미운 새끼오리’라든지 ‘장발장’을 우리 말로 옮기곤 했습니다. ‘미운 새끼오리’는 계몽사 판으로 나왔고, ‘장발장’은 학원사 판으로 나왔어요. 아마 일본책을 살펴 우리 말로 옮기셨을 텐데, 서양말에서 바로 옮긴 책은 아닐 테지만, 번역글이 몹시 정갈하며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페스탈로찌》는 어른이 읽는 책이라 퍽 딱딱한 말로 옮겼는데, ‘이원수 님 해적이’에는 나오지 않는 이 번역책을 뜻밖에 보면서, 어쩌면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을 이루는 밑바탕 가운데 하나로 ‘페스탈로치가 어린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넋’도 있겠구나 느꼈습니다.


.. 그러나 그(페스탈로치)는 일반적으로 자선 사업이란 빈민의 불행을 조장할망정 절대로 불행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방법은 그에게는 다만 거지를 양성하고 위선자를 배가하는 일체의 빈민 구제와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은 “구토를 일으킬 만큼 시대를 식상케 하는 고식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빈민을 구조하는 단 하나의 수단은 생활상의 용무, 의무 및 어떤 상태에 충분히 적합하여, 또 모든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내재하는 힘이 자극되고 발달되는 점에 있다고 하는 것이 그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으로써 나라 안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그 신체적·정신적 및 도덕적 손질을 개인적이요 가정적인 또는 시민적인 형편을 통하여 확실하게 도야하고 그 도야에 의해서 안식과 평화의 생활에 확고한 기초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빈민 학교의 상세한 계획을 발표했다 ..  (46쪽)


 작은 책 《페스탈로찌》를 알아보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교사들도 이런 책을 찾아 읽지 않고, 교사가 되려는 이들 또한 이와 같은 책을 찾아 읽지 않습니다. 페스탈로치 님이 쓴 《숨은 이의 저녁놀》(또는 “은자의 황혼”) 같은 책을 찾아 읽는 교육자 또한 몹시 드뭅니다. ‘국민 기초 교육’ 발판을 닦아 퍼뜨린 페스탈로치 님인 만큼, 초등교사들이라면 누구나 대학교에서 학문으로 페스탈로치 이야기를 듣기는 들었을 텐데, 막상 페스탈로치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초등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사랑하려 했는지를 살피지는 않아요.

 신구문고 가운데 23번으로 나온 《페스탈로찌》를 살피면, 앞머리에 민병산 님이 소개글을 적습니다. 민병산 님은 “페스탈로찌는 수도원의 승방이나 황야의 암굴에 들어박힌 성자가 아니라, 사회에 뛰어든 성자, 가난한 사람들·배우지 못한 사람들·버림받은 사람들·어둠에 갇힌 어린이들과 더불어 ‘인간의 희망’을 증명하기 위해서 투쟁한 성자라는 사실(4쪽)”이라고 적바림하면서 거룩한 뜻을 섬깁니다. 그런데, 소개글 끝자락을 보면 《페스탈로찌》를 쓴 일본사람 이름을 ‘나가다(長田)’로 적습니다. 게다가 책 뒤쪽 간기를 살피면, 정작 글쓴이 ‘長田 新’이 어떠한 사람인지 한 줄로조차 적지 않습니다. 옮긴이 이원수 님 소개만 이원수 님 동화책 이름 하나를 적고는 끝입니다.


.. 페스탈로찌는 드디어 50인의 빈민 아동을 목표로 하여 빈민 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거기에 나서서 아동을 모아 왔다. 그는 이 아이들과 같이 여름에는 땅을 갈고 겨울에는 면화를 실이나 베로 가공하여 경영을 유지하려 했다. 특히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의 마음에는 다만 빈곤을 극복하여 자신을 자립으로 끌어올리는 노동의 쾌감이 생길 뿐 아니라 자활하면서 그들이 내적인 여러 가지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페스탈로찌의 신념이었다.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노동을 하는 사이에 지적 도덕적 및 종교적 여러 힘은 말하기·읽기·쓰기·외기 등에 의하여 연습되고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 큰 세대에서는 사랑이 그 수호신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더우기 아이들의 마음속에 모든 인간적인 고상함과 위대함을 자각케 하고, 그리고 그것을 공고히 하는 가정의 힘은 그 수호신으로서의 사랑 가운데 들어 있어서 거기서부터 흘러나온다. 이러한 수호신이 페스탈로찌의 빈민 학교를 강력히 지배했다. 그러나 페스탈로찌가 그들의 식탁에서 같이 먹어도, 아니 그들에게는 맛난 감자를 먹이고 자기는 험한 음식을 먹어도 이 훌륭한 사람은 그들에게서 비난을 받았다. 관청도 그를 원조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는 이런 사업에 대한 세세한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채무는 점점 불어 가서 1780년에는 학교를 해산하는 비운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  (47쪽)


 ‘長田 新’이라는 분은 온누리에 손꼽히는 ‘페스탈로치 연구 권위자’입니다. 이름은 ‘오사다 아라타(おさだ あらた)’로 읽고, 1887년 2월 1일에 태어나 1961년 4월 18일에 숨을 거둡니다. 이분이 엮은 다른 책으로 《原爆の子》가 있는데, 이 책은 일본에서 1951년에 처음 나왔고, 한국에서는 1996년에 학문사에서 《원폭의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옮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사다 아라타’라는 이름을 ‘나가다’라 잘못 읽든, 이 작은 책 《페스탈로찌》를 알아보지 않든, 우리들은 우리 터전에서 우리 아이들을 얼마든지 사랑하거나 아낄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원자폭탄에 애꿎게 쓰러진 어린이가 있다면, 한국에는 입시지옥에 슬프게 쓰러지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이 나라에서 아름다운 삶과 꿈을 헤아리며 어린이한테 맑거나 밝은 길을 가르치거나 이끌지 못하기에, 《페스탈로찌》이든 다른 어떤 아름다운 책이든 스스로 즐겁고 기쁘게 쥐어들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리라 봅니다. (4344.1.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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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혼인을 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머니’가 되지 못합니다. 혼인을 했으나 아이를 낳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버지’가 되지 못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매한가지입니다. 당신 아이가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됩니다.

 아이를 하나 낳아 기르고, 곧 둘째를 낳아 기를 어버이로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아이 아버지로서 내가 좋아하는 글이란, 아이 아버지답게 내가 쓰는 글이란, 언제나 어린이를 살피는 글입니다. 어린이를 생각하지 않고 지식을 생각하며 쓰는 글은 예전부터 쓰기 싫었고 쓰지 않았으며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흔히 인문책은 지식책인 줄 잘못 알지만, 인문책은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지식을 다루면 지식책일 뿐입니다. 지식책이란 ‘기술서’입니다.

 인문책이란 삶을 다루는 책입니다. ‘삶책’을 한자말로 옮기니 ‘인문(人文)책’이 됩니다. 우리는 삶을 다루는 책인 인문책을 읽어야 하고, 앞으로는 ‘인문책’이라는 이름은 내려놓고 ‘삶책’이라는 이름을 옳고 바르며 쉽고 살가이 말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제 이름을 제대로 말하면서 제 삶을 제대로 꾸려야 비로소 내 삶이며 내 책이고 내 글인 가운데 내 꿈입니다.

 어린 날부터 책을 읽을 때면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담은 이야기가 깃든 책을 좋아했습니다. 동화책이든 만화책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담지 않은 책은 재미있지 않았어요. 그리 당기지 않고, 손을 뻗기 어렵습니다. 《마징가 제트》 같은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는, 어린 날에도 그리 재미있지 않았을 뿐더러, 어른이 되어 다시 보아도 따분합니다. 《우주소년 아톰》 같은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는, 어린 날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넘겨도 눈물을 흘립니다. 똑같은 ‘로봇’ 만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로봇이 벌이는 싸움박질과 로봇을 앞세워 싸움박질을 하는 못난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다른 하나는 로봇에 깃들이는 사랑과 로봇뿐 아니라 뭇목숨을 아끼는 사랑스러운 넋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가 쓰는 글처럼 살가우면서 따스한 글은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막상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들 가운데 글을 쓰는 분은 몹시 드뭅니다. 더구나, 애 어머니가 쓰는 글을 책으로 묶는 일은 훨씬 드물 뿐 아니라, 책으로 내야겠다고 찾아나서는 사람조차 드뭅니다. 아니, 애 어머니는 누구한테 내보이려고 글을 쓰지 않아요.

 아이를 낳았어도 다른 사람 손에 맡긴 채 글을 쓰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꽤 많습니다. 이분들 또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글을 쓰는 어버이라 할 만하지만,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못미덥습니다. 이모저모를 떠나, 이런 어버이들 글은 참 따분합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로서는,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하루로 고되면서 즐거울 뿐, 애써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고마우면서 하루하루 잊고 새롭게 하루하루 맞이하는 나날입니다. 글까지 쓰도록 넉넉한 말미가 아니요, 그림이나 사진을 할 만큼 한갓진 겨를이 없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기 때문에 더욱 포근하면서 보드랍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딱딱하거나 거칩니다. 어린이 입맛을 살피며 밥을 하듯, 어린이 눈높이를 살피며 글을 씁니다. 어린이 살결과 몸을 돌아보며 옷을 입히듯, 어린이 살결과 몸을 돌아보는 매무새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린이 눈썰미에 맞게 손을 잡고 마실을 다니듯, 어린이 눈썰미에 맞는 자리에서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이랑 복닥이며 함께 살아가야 바야흐로 어머니나 아버지입니다. 그래, 어머니들은 글도 잘 안 써 버릇 할밖에 없도록 집살림에 바쁘며, 책을 읽을 만큼 느긋하거나 호젓하지 않아요. 책을 쓰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읽을 만하’게 책을 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머니가 즐겁게 짬을 내어 읽을 수 있는 책이어야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4344.1.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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