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사랑말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시골마을에서는 읍내 장날에 맞추어 바깥마실을 합니다. 읍내 마실을 한다고 읍내 모든 곳을 두루두루 누비지는 않습니다. 읍내로 마실을 할 때면 새삼스레 보거나 느끼는 모습도 많아요.

 저번에는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함께 마실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음성읍 끝자락에 자리한 ‘무지개 아파트’를 보았습니다. 시골 읍내에도 아파는 참 많으며 새로 짓는 아파트 또한 많은데, 이 가운데 수수하며 시골스러운 이름이 붙는 곳이 더러 있어요. 시골 아파트라 하면 영어보다는 토박이말을 사랑할 듯하다고 여길 만할까요? 시골 아파트라 해서 토박이말을 잘 쓰지는 않아요. 되레 영어나 한자말 이름이 많다 할 수 있어요. 도시 아파트라 해서 영어나 한자말 이름이 많을까요? 외려 ‘개나리 아파트’라든지 ‘진달래 아파트’라는 이름을 만나기도 합니다.

 다만, 아파트 이름으로 ‘무지개’나 ‘개나리’나 ‘진달래’를 쓰는 곳은 크기가 작아요. 영어나 갖가지 바깥말을 섞어서 쓰는 ‘xi’나 ‘來美安’ 같은 아파트들은 크기도 큽니다. 요사이는 ‘에코메트로’나 ‘에코빌’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더라고요.

 처음에 ‘에코메트로’나 ‘에코빌’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에는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이 또 얄궂게 이름을 붙이는구나 하고 여겼습니다. ‘에코라이프’니 ‘에코우먼’이니 ‘에코러브’라느니 ‘에코북’이라느니, 더구나 ‘에코북시티’라는 말까지 나돌아요.

 환경운동이란 자연 터전만 곱게 지키자는 흐름이 될 수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란 자연과 사람과 삶이 한결같이 아름다우면서 참답고 착하도록 이끄는 흐름이 되어야 올발라요. 그런데 ‘환경사랑’조차 아닌 ‘에코러브’라 하거나 ‘푸른환경’이 아닌 ‘그린에코’라 하거나 ‘환경책’이라 않고 ‘에코북’이라 하면 어떻게 될까요. ‘환경마을’이나 ‘환경사랑마을’에서 살 수는 없을는지요. ‘푸른마을’이나 ‘푸른책마을’이나 ‘푸른꿈책마을’이나 ‘푸른사랑책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綠色’은 일본 빛이름입니다. ‘草綠’은 중국 빛이름이에요. 한국 빛이름은 ‘푸름’이나 ‘풀빛’입니다. ‘綠色’이란 ‘풀(綠) + 빛(色)’이고, ‘草綠’이란 ‘풀(草) + 푸름(綠)’이에요. 우리들이 이 나라에서 이 터전과 이 겨레를 사랑하면서 벌일 환경운동이라 할 때에는 참다이 한겨레 삶터에 걸맞게 어깨동무하는 일마당이 될 수 있어야 아름다워요. 삶과 터와 사람과 사랑과 말과 글을 한동아리로 살필 수 있어야 슬기롭습니다.

 참다운 살림집이란 사랑스러운 살림집이라고 생각해요. 착한 환경운동이란 믿음직한 환경운동이라고 생각해요. 고운 말글이란 따스한 말글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들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만 예쁘장하게 꾸밀 노릇이 아니라, 우리 삶을 꾸밈없이 사랑하거나 아끼는 가운데 말과 글 또한 꾸밈없이 사랑하거나 아껴야 한다고 느껴요. 우리 스스로 내 삶을 꾸밈없이 사랑하거나 아끼는 결을 고스란히 환경운동으로 옮기고 책읽기로 옮기며 공부와 살림살이로 옮겨야 한다고 느껴요.

 두 가지 사랑말을 곱씹어 봅니다.


1. 책사랑 : 저는 책을 만들거나 쓰거나 읽는 일을 해요. 좋은 짝꿍하고 살림을 꾸리기도 하고, 어여쁜 아이를 돌보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해 온 일은 책마을 책손으로 지내다가 책마을 일꾼이 되며 책을 만지는 일이에요. 저로서는 ‘책사랑’이라는 낱말을 퍽 예전부터 즐겨썼습니다. 저한테는 책사랑일 텐데, 아마 말사랑벗한테는 영화사랑이나 그림사랑이나 사진사랑이 될 수 있어요. 게임사랑이라든지 농구사랑이나 야구사랑이나 배구사랑이 될 수 있겠지요. 탁구사랑이나 수영사랑이 될 수 있고, 가야금사랑이나 기타사랑이 될 수 있어요. 노래사랑이나 춤사랑도 있습니다. 연극사랑이나 손말사랑이 있어요. 하느님사랑이나 부처님사랑이 있을 테고, 교회사랑이나 학교사랑도 있겠지요. 동무사랑이나 스승사랑이 있고, 동네사랑이랑 마을사랑이 있어요. 걷기사랑이나 자전거사랑이 있을 테며, 여행사랑이라든지 빨래사랑이라든지 있을 테지요. 말사랑벗한테는 어떤 사랑이 가장 애틋한가요. 말사랑벗이 가장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누군가는 외국어사랑을 할 만하고, 누군가는 역사사랑을 할 만합니다. 철학사랑이나 과학사랑을 해 볼 만합니다. 문학사랑이나 로봇사랑도 좋아요. 엄마사랑 아빠사랑 누나사랑 언니사랑 동생사랑 오빠사랑 모두 좋고요. 사랑을 하기에 ‘사랑’을 한다고 이름을 붙입니다. 어쩌면 말사랑벗 가운데에는 이름 두 글자가 ‘사랑’인 벗이 있겠네요. 최사랑이나 송사랑이나 김사랑이나 박사랑이나 전사랑이나 이사랑이나 고사랑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사랑’이라는 이름은 어릴 적에도 예쁘고 푸름이일 때에도 예쁘며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어도 예쁘다고 느낍니다. 듣는 사람부터 즐겁고, 말하는 사람 또한 기뻐요. ‘사랑’ 두 글자를 혀에 얹어 살며시 내보낼 때에 보드라우면서 따사로운 기운이 서린다고 할까요. 저는 책사랑을 하는 가운데, 헌책방사랑을 함께 합니다. 그래서 헌책사랑이라는 말도 쓰고, 한동안 〈헌책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조그맣게 소식지를 낸 적 있어요. 마땅한 노릇일 테지만, 〈우리말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소식지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짝꿍사랑인 사람사랑을 하고, 우리 집 두 아이를 아끼는 아이사랑을 합니다. 이와 함께 저와 옆지기를 낳아 길러 주신 어버이를 헤아리는 어버이사랑을 해야지요. 제가 뿌리내리며 지내려는 시골마을을 아끼는 시골사랑과 멧골사랑을 할 생각이며, 땅사랑 흙사랑 텃밭사랑 고구마사랑 감자사랑 나락사랑 배추사랑 무사랑도 하면서 살아야지요. 집식구들 함께 끓여 먹을 동태찌개를 앞에 둔다면 찌개사랑이 될 테고, 그러고 보니 날마다 밥사랑을 하는군요. 설거지사랑도 하고 걸레사랑도 하며 기저귀사랑도 합니다. 아, 이곳저곳 둘러보고 돌아보노라면 온통 사랑이네요. 버스를 타면 버스사랑이고 기차를 타면 기차사랑입니다. 이웃을 마주하면 이웃사랑이요, 제주섬 마실을 하면 제주사랑이며 섬사랑인데, 인천 골목동네 마실을 하면 인천사랑이자 골목사랑입니다. 사랑 아닌 일이란 없고, 사랑 없이 이룰 일이란 없어요. 이처럼 내 삶이 온통 사랑인 가운데 말사랑을 하고 글사랑을 합니다. 이야기사랑을 꽃피웁니다. 


2. 사랑편지 : 일본사람이 빚은 예쁜 영화에 붙은 이름은 ‘Love Letter’입니다. ‘러브레터’조차 아닌 ‘Love Letter’입니다. 일본사람은 한국사람 저리 가라 할 만큼 영어를 사랑합니다. 아마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라부레또’라 했겠지요. 그나저나 이 일본사람 영화를 한국사람이 즐기도록 들여오면서 ‘Love Letter’라는 이름을 고스란히 살렸고, 한글로 적어도 ‘러브레터’일 뿐입니다. 우리말로 알맞게 ‘사랑편지’라 적바림하지 않아요. 그래도 요사이에는 ‘사랑편지’라는 낱말을 그럭저럭 쓰기는 쓴다는데, ‘러브레터’라는 낱말처럼 두루 사랑받으면서 쓴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러브레터’라고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무언가 사랑스러운 마음을 나눈다고 여기지, ‘사랑편지’라는 이름으로는 썩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하는가 봐요. 참말로, ‘사랑소설’이라는 이름조차 없이 ‘연애소설’입니다. ‘사랑영화’나 ‘사랑연속극’이라는 이름은 없고 ‘멜로물’이나 ‘애정영화’입니다. ‘사랑노래’는 낡고 ‘러브송’은 싱그러운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해요”는 시답잖고 “알러뷰 코리아”는 귀여운지 알쏭달쏭합니다. ‘사랑라디오’는 고리타분하기에 ‘러브 에프엠’이라는 이름이 붙는지 아리송해요. 왜들 이렇게 우리 스스로 사랑을 나누지 못하며 살아가나요. 왜들 이렇게 나부터 사랑을 길어올리면서 오순도순 나누지 못하며 지내는가요. 이 나라가 사랑나라로 거듭나고, 이 누리를 사랑누리로 추스르며, 이 터를 사랑터로 가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담아 사랑글을 쓰고, 사랑글을 엮어 사랑책을 내놓으며, 사랑책으로 사랑넋과 사랑얼을 함께할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제 조그마한 사랑꿈과 사랑빛을 담아 사랑편지 몇 줄 적바림합니다. (4343.12.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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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가 되는 책읽기


 책을 읽는 사람들은 꾸준히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책을 살피거나 헤아리는 눈썰미가 넓어지지는 않는 듯합니다. 예부터 ‘책을 좋아하면, 자꾸자꾸 더 좋은 책을 자꾸자꾸 알고 말아 책읽기에 그만 풍덩 빠지고 만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책이 수천억 수조억쯤 쏟아지는 나날이 아닌, 고작 다섯 수레에 책을 실을 만큼 있던 지난날에 이런 말이 나돌았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슬기로워지기보다는 바보스러워지지 않느냐 느낍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 스스로 슬기롭게 살아가기보다는 지식을 잔뜩 쌓고픈 생각을 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바보스러운 길로 구르지 않느냐 느낍니다.

 참말로 왜 책을 읽으려나요. 책을 읽은 내 삶은 책을 아직 읽지 않던 어제 삶하고 견주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가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사진을 한 장 두 장 더 찍으면서 차츰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사진이란 아름다움을 찾는 삶자락이기 때문입니다. ‘예쁘장하거나 그럴싸한 모습’이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울거나 웃으면서 복닥이는 삶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사람들 삶을 내 삶결과 눈썰미에 따라 담는 일이 사진입니다. 그러니,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나 스스로 한결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맞습니다. 사진을 오래도록 알뜰히 찍은 사람은 손마디며 눈길이며 매무새이며 그지없이 아름다워야 옳습니다.

 책을 오래오래 읽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익은 벼’와 같아야 합니다. 책을 많이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쉽고 가난한 말’을 써야 합니다.

 이 나라에서 책을 오래오래 읽은 사람은 으레 ‘뻣뻣한 쭉정이’와 같습니다. 이 땅에서 책을 많이많이 읽었다는 사람은 누구나 ‘딱딱하고 어려운 말’, 또는 영어나 한문을 즐겨 섞어 씁니다.

 사람이 되는 책읽기를 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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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일구는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7] 데이비드 플라우덴(David Plowden), 《The Iron Road》(Four Winds Press,1978)



 《마더 존스 자서전》(평민사,1978)이라든지 《미국노동운동비사》(인간,1981)라든지 《정글》(동녘,1991)이라든지, 요즈막에 새로 나온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2010) 같은 책을 읽은 사진쟁이는 이 나라에 얼마쯤 될까요. 사진쟁이이든 아니든 이 책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The Iron Road》처럼 ‘철길 삶자락’을 훌륭히 담아낸 사진책을 보면서 뜻밖에 가슴이 뭉클뭉클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The Iron Road》는 틀림없이 잘 찍고 잘 담았으며 잘 엮은 사진책입니다만 철길이란 그냥 철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미국에서든 유럽에서든 철길을 놓을 때에는 예부터 이제까지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손을 맞잡고 서로서로 더 크고 센 권력을 누리려는 속셈을 꽃피웁니다. 참말로 여느 사람들 삶자리를 북돋운다든지 시골마을 사람들한테 발이 되어 준다든지 하려는 철길이란 없습니다. 더 많은 자원을 더 빨리 실어 옮겨 더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려고 놓는 철길일 뿐입니다. 이 나라 고속철도를 보아도 서울과 부산을 빨리 잇자는 생각일 뿐이지, 서울과 부산 사이에 있는 수많은 시골마을을 이으려는 생각이 아닙니다. 더욱이, 서울과 부산 사이에 숱하게 있는 시골마을을 이어 주던 ‘느린 철길’은 거의 모두 사라졌고, 남은 철길마저 머잖아 없애 버릴 판입니다. 서울에 지하철이 잘 뻗어 있다지만, 돈벌이 잘 되는 일터가 많은 곳으로 뻗는 전철길이요, 서울 둘레 전철들은 오로지 서울로 사람(노동자·소비자)을 빨리 보내도록 하는 데에만 맞춰집니다. 일산과 인천을 오가거나 인천과 수원을 오가거나 수원과 구리를 오가거나 구리와 의정부를 오가거나 의정부와 일산을 오가는 전철은 예나 이제나 놓을 생각이 없는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입니다.

 우리 삶터 밑자락과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슬프고 씁쓸한 일투성이입니다. 철길을 보아도 슬프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제도권 교육을 보아도 씁쓸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 대접을 보아도 슬프며 쇠밥그릇 아닌 착하고 참된 공무원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씁쓸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이 목숨 하나 붙잡고 사는 까닭에 섣불리 고개를 떨구지 못합니다. 둘레를 살펴보느니 슬프고 아픈 일이 그득그득이라지만, 이러한 가운데 기쁘며 고운 일을 내 두 손으로 일구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기쁘며 고운 일을 남들이 먼저 스스로 잘 깨달아 펼치기를 바라기 앞서, 나 스스로 내 깜냥껏 깨닫고 찾아낸 기쁘며 고운 일을 나부터 힘차며 즐거이 꾸리면 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철길이 어떻게 놓였고, 철도 노동자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떠올린다면, 《The Iron Road》 같은 사진책은 더없이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어떻게 여느 사람을 부려먹거나 들볶는다 할지라도, 철도 노동자인 사람들을 살가이 보듬을 수 있거나 이들하고 이웃하며 지내는 사람들이랑 오순도순 알콩달콩 지낸다면 아름다운 노릇이리라 생각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을 막대접 한달지라도 내 손으로 키운 푸성귀를 내 이웃과 동무한테 기쁘게 나누어 줄 수 있고, 철도 노동자를 죄 비정규직으로 내몰거나 일삯을 제대로 챙겨 주지 않는달지라도 내 가난한 살림살이를 쪼개고 나누며 내 둘레 더 어렵고 버거운 동무와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다 함께 넉넉하고 따스한 일이요, 우리들이 섬길 믿음은 서로서로 아름다우며 씩씩한 믿음이며, 우리들이 나눌 사랑은 모두들 즐거우며 빛나는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무언가 노리거나 꾀하기 앞서, 꾸밈없이 넉넉하고 따스하게 사진을 찍습니다. 무엇을 이루겠다고 바라기 앞서,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자리 그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무슨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밥그릇 다툼에 앞서, 콩 한 알 나누는 사랑을 고이 실어 알뜰살뜰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다큐멘터리만 사진이지 않습니다. 모델이나 옷 벗은 아가씨를 찍어야만 예술 사진이 아닙니다. 산 들 냇물 바람 바다 들짐승을 찍어야 풍경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포토샵이니 셈틀이니 디지털파일이니 만지작거리거나 인화·현상을 남달리 해 본다고 현대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도록 하자면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사진에 담는 이야기가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되도록 하자면 내 삶과 내 이웃 삶이 맑고 밝으며 곱고 착한 삶이 될 수 있게끔 우리 모두 땀흘려야 합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게끔 힘쓰고자 사랑을 바치고 믿음을 쏟으며 내 이야기 알알이 가꾸는 가운데 내 이야기 나눌 삶터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일구면, 우리가 사진기를 들 때에는 사진으로 빛을 뿌립니다. 볼펜을 들고 있으면 글로 빛줄기를 선사합니다. 붓을 들고 있으면 그림으로 빛살을 나누고, 악기를 들고 있다면 노래로 빛무늬를 이루며, 맨몸이라면 춤으로 빛접은 무지개를 피어올립니다.

 다큐멘터리라는 갈래가 따로 나오기 앞서, 사진이란 모두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상업이나 만듦이나 예술을 생각하며 갈라 놓기 앞서, 사진이란 모두 내 살붙이 밥벌이가 되는 일이요 내 삶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며 내 꿈을 이루는 예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사진이 사진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다큐멘터리도 상업도 만듦도 예술도 되지 못합니다. 덧없이 조각나고 하릴없이 용두질을 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헤아리는 사진쟁이는 좀처럼 태어나지 못하고,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가까스로 헤아렸어도 삶을 일구는 살림꾼이나 일꾼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한국땅에서는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말하거나 사진을 엮어 책을 만들거나, 모두들 우물에 갇힌 개구리 모양입니다. (2010.7.2.)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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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콩콩 책읽기


 빨래와 아이 씻기기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아이는 아빠를 앞질러 저 앞에서 콩콩콩 뛴다. 아이는 그냥 걷지 않는다. 언제나 콩콩콩 뛰면서 걷는다. 조그마한 아이가 콩콩콩 내닫는 소리가 ‘콩콩콩’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아이를 바라볼 때면 내 귀에는 ‘코옹 코옹 코옹’ 하는 소리가 톡톡톡 들린다. 아이는 저렇게 가볍게 콩콩콩 내닫는데, 아빠는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끙끙끙 걷는다. 너무 무겁게 걷나? 아이 외할머니가 “어쩜 벼리는 저렇게 콩콩콩 뛰냐? 하기는, 아이 때는 다 저렇게 뛰더라.” 하고 말씀할 때에 비로소 우리 집 아이가 콩콩콩 뛰는 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아이뿐 아니라 이웃한 어느 집 아이들이건 콩콩콩 뛴다. 때때로 콩콩콩 안 뛰는 아이를 보기도 하는데, 콩콩콩 뛰지 못하거나 않는다면 아이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아이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갸웃하곤 한다.

 콩콩콩 어린이는 집에서 혼자 책을 펼칠 때이든 아빠나 엄마가 곁에서 책을 읽어 줄 때이든 노상 콩콩콩 책읽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그림을 되삭일 때에는 어쩜 이렇게 깊이 빠져들 수 있을까 싶은데, 옆에서 불러도 알아듣지 못한다. 온통 그림에 마음을 쏟는다. 요사이는 글자를 알아본다. 글자가 무엇을 적바림했는지를 알아보지는 않는다. 꼬물꼬물한 ‘구림’이라고 여긴다. 아빠는 늘 수첩이나 공책에 요모조모 쪽글을 쓰니까, 아이는 아빠 곁에서 “아빠 공부해?” 하고 묻는다. 글을 쓰는 일이 마치 ‘공부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서 들었을까. 이 소리도 외할머니한테서 들었던가? 이리하여, 요사이 그림책 글자를 알아보는 아이는 ‘구림’이라고 말하다가는 “구림 아냐. 공부야.” 하고 고쳐 말한다. 아빠가 곰곰이 글을 쓰면, “아빠 공부해? 응, 공부해.” 하다가는 저도 작은 수첩과 볼펜을 들고 아빠 옆에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한’다. 작은 수첩에 꼬물꼬물 글씨를 줄을 가지런히 맞추면서 요모조모 그린다. 게다가 꼬물꼬물 줄맞춘 그림그리기를 한 쪽 가득 하고, 다음 쪽 가득 또 한다.

 예전부터 늘 느끼지만,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 집안이다. 아이들이 읽는 책을 살피면, 이 집 어버이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아이들이 책을 건사하는 매무새를 들여다보면, 이 집 어버이가 책을 어떻게 마주하거나 다루는가를 환히 읽을 수 있다.

 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영어를 말하거나 영어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아이를 만날 때면, 이 아이가 더없이 불쌍하지만, 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가 참으로 딱하며 안쓰럽다. 퍽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갖가지 학원에 다니거나 온갖 지식을 주워섬기는 아이를 마주할 때면, 이 아이가 그지없이 가여우면서, 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그토록 슬프며 안타까울 수 없다.

 왜 즐겁게 살아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사귀지 않을까. 왜 즐겁게 책을 읽지 않을까. 책이란 즐겁게 읽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즐거이 어우러지는 고운 목숨이다. 삶이란 즐거이 태어나서 즐거이 흙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콩콩콩 가벼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하루하루 콩콩콩 맑고 밝은 말마디를 노래하듯 읊으면서 지내면 사랑이요 평화이다. (4344.1.26.물.ㅎㄲㅅㄱ)
 

 

이 그림책은 '영어 그림책'이 아닌 '리처드 스캐리' 그림책. 아직 우리 나라에 번역이 안 되었을 때 헌책방에서 찾아낸 아빠 보물. 그러나 아이는 아빠 보물이건 뭐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이 예쁘니까 책이 낡고 닳도록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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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69] 주폭(酒暴)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걱정이라면, 술집을 없애거나 술을 없애면 될까. 술을 마구 마시는 사람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니까, 술꾼들 보라며 걸개천을 내걸면 될까. 술꾼들 읽으라고 걸개천을 내걸었을 텐데, 술꾼들은 ‘주폭(酒暴)’ 같은 말을 알아들으려나. 술꾼들이 이런 글을 읽으면 무엇을 생각할까.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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