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말(인터넷말) 21] 50% OFF 반값 주간 베스트 10

 “50% OFF 반값”이 맞는 말이 될까 하고 한참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말마디를 생각하느라 애먼 나날을 갉아먹지 않느냐 싶습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아랑곳하지 않으며 받아들이니까요. 가만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50%를 깎은 반값”이라는 소리이니까요. 그런데, ‘반값’이면 반값입니다. 반값이니 굳이 반값 앞에 ‘50%’라는 꾸밈말을 달 까닭이 없습니다. 반값이라면, 에누리를 했다는 소리이니 ‘OFF’ 같은 말마디 또한 붙일 일이 없습니다. 말을 말다이 쓰지 못하는 삶이니, 말을 말다이 여미지 못하면서, 저절로 내가 미국사람이라도 되는듯이 ‘best ten’ 같은 영어를 어디에나 손쉽게 적바림합니다. (4344.1.2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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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29 20:02   좋아요 0 | URL
뭐 우리 말에도 그런 것이 꽤 많지요.동일한 뜻인데 우리말+한자의 조합 말이에요.이렇게 적고 보니 갑자기 그런 단언들이 생각나질 않네요^^;;;;

파란놀 2011-01-29 20:35   좋아요 0 | URL
요 얼마 앞서 제가 낸 <사랑하는 글쓰기>가 그런 얄궂은 말들 사례를 108가지 모아서 엮었어요. 이루 셀 수 없이 참 많답니다.

흔히 쓰는 "부담감을 느끼다"나 "공포감을 느끼다" 같은 말투가 바로 카스피 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조합이기도 해요. '부담감'이란 "부담스러워 하는 느낌"이고 '공포감'은 "공포스러워 하는 느낌"이니까 "부담을 느끼다"나 "공포를 느끼다"라고만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웬만한 한자말 말투 끝에 '-성'을 붙일 때에도 거의 겹말이 되곤 해요. '진정성'이 아닌 '진정'이라고만 해야 합니다. "진정성이 없다"가 아니라 "진정이 없다"처럼... '-화'를 붙이는 말투들, 이를테면 "세계화되다"나 "현대화하다"나 "특화되다"가 모두 겹말이에요...
 

 

- 2011.1.20. 

아빠 손전화로 사진찍기를 즐기는 아이. 

 

아빠 좀 쉬자는데 얼굴 들이밀지 마라이... 

 

상자에 들어가 삐삐 상자 읽으며 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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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고다씨 이야기 2
오자와 마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21



아픔을 먹고 눈물을 마시는 어여쁜 삶

― 이치고다 씨 이야기 2

 오자와 마리 글·그림

 정효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10.12.25.



  일본을 다녀온 이들이 늘 똑같이 느끼며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일본을 이룬 옛 역사를 돌아보면서 옛 일본 삶자락 가운데 한겨레 옛 삶자락이 스며든 자국이 참 많다고 느끼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절집이라든지 불상이라든지 무엇무엇이라든지 옛 한겨레 삶자락이 꽤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자락을 돌아보면, 한국에는 가운데 일본에서 흘러든 삶자락이 아주 넓게 퍼졌습니다. 그야말로 작은 삶자락 하나부터 작은 물건 하나까지, 일본에서 들어오거나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투성이입니다.


  생각해 보면, 옛 일본으로 스며들었다는 한겨레 삶자락은 ‘여느 사람 삶자락’은 아닙니다. ‘지배 계급 삶자락’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옛 일본 지배 계급은 한겨레 지배 계급 삶자락을 받아들였을 테지만, 옛 일본 여느 사람들까지 옛 한겨레 여느 사람 삶자락을 받아들였다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1900년대를 거쳐 2000년대를 살아갑니다. 2000년이 지나 태어난 어린이가 있고, 1990년대 한복판에서 태어난 푸름이가 있으며, 1980년대 한복판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들이나 이들을 낳아 키우는 어버이는 ‘현대 한국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봅니다. 먼 앞날이나 까마득히 오래된 지난날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갈 뿐 어제나 글피를 살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2100년이나 2200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터질는지를 하나도 모릅니다. 1800년대에 살던 사람이 2000년대를 알 수 없거나 헤아리지 못하던 일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기울이면, 다가올 2100년이나 2200년을 살아갈 뒷사람들이 ‘한국 역사’나 ‘일본 역사’를 갈무리할 때에 무슨 이야기를 적바림할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만합니다. 2200년대나 2500년대를 살아가는 한겨레나 일본겨레는 저희들 1900∼2000년대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거나 느낄까요. 그무렵 일본겨레라면 한겨레 사회와 문화 가운데 일본에서 보내지 않은 것이 없다 말할 테고, 한겨레는 ‘우리 땅 옛사람들은 무엇 하나라도 스스로 즐기며 살아가지 않으면서 죄다 일본에서 들여왔구나’ 하고 느끼겠지요. 한글이 온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글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한글과 겨레말을 알뜰살뜰 보듬지조차 않고 일본말을 함부로 받아들여서 쓸 뿐 아니라, 한손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말투를 털자 하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이런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말투를 고스란히 쓰는 바보스러운 모습을 그예 보여준다고 여기겠지요.



- “그때는 나도 같이 살았는데, 여름방학 때 집에 가다가, 지로네 아저씨한테서 들어서 알게 됐지. 가족인데, 나만 몰랐다니.” (16∼17쪽)

- “너도 혼자 도쿄로 가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니까,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싶더라. 일이랑 집안일, 그리고 널 돌보느라, 2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엄마가 된 기분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널 독립시켜 주자 싶었어.” (20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둘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은 곱다고 여기면서 읽는 책입니다. 만화책이기 앞서 ‘곱다고 느끼는’ 책입니다. 이 만화는 일본 만화입니다. 일본 만화이기 앞서 ‘곱다고 느끼는’ 만화입니다.


  어떤 이는 《이치고다 씨 이야기》를 순정만화에 넣겠지요. 그러나 이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는 순정만화이기 앞서 ‘곱다고 느끼는’ 만화입니다.


  순정만화를 좋아하건 아니건, 다른 만화를 좋아하건 아니건, 그닥 눈여겨볼 까닭이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무들(다 남자들)이 ‘순정만화’를 보면 계집애라고 놀리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명랑만화’이든 ‘로봇만화’이든 ‘전쟁만화’이든 ‘공상과학만화’이든 굳이 더 좋아해야 할 까닭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곱다고 느낄’ 만화여야 내가 읽지, 내가 곱다고 느끼지 않는데, 내가 사내아이라서 순정만화를 보면 안 되고, 계집아이들만 순정만화를 보라는 법이 없습니다. 계집아이이건 말건 ‘스스로 곱다고 느끼’면 명랑만화이든 로봇만화이든 즐기면 됩니다.



- ‘떨어진 물방울은 따뜻했다.’ (35쪽)

- ‘하지만 그렇게 예쁘다면 또 한 번 봐 줘야지. 와아, 진짜 예쁘다.’ (61쪽)

- ‘내가 사랑하는 이온의 주머니.’ (146쪽)



  제가 곱다고 여기며 즐기는 만화는 ‘이야기가 있는’ 만화입니다. 이야기가 ‘만화쟁이 삶에서 길어올린 따사롭고 착하며 아름다운’ 만화를 곱다고 여기면서 즐깁니다.


  나 스스로 곱다고 여길 만화를 찾아서 읽는 만큼, 이 만화 하나가 ‘일본 만화이건 한국 만화이건’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중국 만화면 어떻고 미국 만화면 어떻습니까. 미국사람이라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이니 끔찍한 전쟁무기를 만드니 하면서 다 나쁘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내가 한국사람이니 한국사람이라면 다 좋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 가운데에도 ‘사람됨으로 보기에 모자라거나 안타깝거나 슬픈’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날 일제강점기에도 ‘제국주의 일본’을 나무라면서 착하며 아름다이 살던 일본사람이 많습니다.


  나부터 착한 사람됨을 볼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착하게 살아갈 일이라고 여깁니다. 나부터 착한 넋을 건사하면서, 내 이웃들 착한 마음씨를 곱게 껴안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 ‘이치고다 씨라면 분명 집으로 돌아올 거야. 그래, 벌써 집에서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73쪽)

- ‘그야, 이치고다 씨가 돌아왔을 때 내가 없으면 집안에 못 들어오니까.’ (82쪽)

- ‘가끔 있잖아.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오면 외로운 나머지 요정이다 뭐다 하는 망상 친구를 만들어 버리는 그런 거. 서글픈 이야기. 아니야. 이런 바보. 이치고다 씨가 없었을 리 없잖아.’ (88∼89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는 참으로 착한 사람들 착한 삶 착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1권이 나왔을 때에 얼른 장만해서 여러 차례 읽고, 2권이 나왔기에 기쁘게 맞아들이며 숱하게 읽습니다. 어느새 3권이 나왔는데, 1권과 2권을 조금 더 오래 삭이면서 즐기고 싶어서 아직 장만하지 않습니다. 3권을 장만하면 이때부터는 3권에 푹 빠져서 여러 차례 읽고 또 읽겠지요.


  줄거리로 읽어치우는 만화가 아니기 때문에, 한 번 보고 나서 가만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넘기고, 며칠 뒤에 또 보며, 얼마쯤 지나서 다시금 넘깁니다.


  볼 때마다 새롭습니다. 볼 때마다 새롭기에 장만해서 아끼고 사랑할 만합니다. 볼 때마다 새롭고 읽으면서 늘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이곳 내 삶터에서 내 살붙이들하고 복닥이는 하루하루를 더 알차고 싱그러이 돌보도록 힘을 내자고 다짐합니다.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돕고, 살아내는 사랑스러움을 깨닫도록 이끌며, 살아숨쉬는 아름다움을 둘레에 나누도록 북돋웁니다.


  고운 만화이기 앞서 고운 책입니다. 고운 책이기 앞서 고운 넋입니다. 고운 넋이기 앞서 고운 사람입니다. 고운 사람으로서 고운 삶을 일굽니다.



- ‘이 어둠 기억나. 그래, 이건 타미의 상자. 나가야 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마음이 체념으로 가득 차기 전에.’ (95쪽)

- ‘안녕, 아야. 목욕시켜 줘서 고마워. 다른 장난감들은 아껴 줘.’ (112쪽)

- “내가 와 버렸으니, 유미의 혼잣말은 누가 들어 줄까?” (148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를 읽든 다른 만화를 읽든 노상 느낍니다. 이야기가 곱다고 느낄 만한 만화는 그림을 아주 빼어나게 잘 그려내야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림을 엉터리로 그려서는 안 됩니다. 곱다고 느낄 책이란 글솜씨가 빼어나도록 가다듬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글솜씨를 엉망인 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만화학과를 나와 만화쟁이가 되어도 만화를 잘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화쟁이는 만화학과 있는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다녀야 태어나지 않습니다. 만화는 붓놀림이나 셈틀놀림이 아니니까요. 만화에 담는 이야기는 만화쟁이 삶이니까요.


  만화쟁이 스스로 살아내는 목소리와 숨결과 손길과 살결과 몸내음을 고스란히 담는 만화입니다. 글쟁이들은 글쟁이들 목소리와 숨결과 손길과 살결과 몸내음을 글에 고스란히 싣습니다. 사진쟁이들은 사진쟁이들 목소리와 숨결과 손길과 살결과 몸내음을 사진에 담뿍 담습니다.


  기자라면 기자로서 쓰는 글(기사)에 기자 목소리와 숨결과 손길과 살결과 몸내음을 통째로 얹어야겠지요. 교사라면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 서면서 교사다운 목소리와 숨결과 손길과 살결과 몸내음을 송두리째 바쳐야겠지요.



- “괜찮을까? 한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아무도 가지러 안 왔으니까, 괜찮, 겠지?” ‘안 괜찮아!!’ (119쪽)



  고운 만화를 읽는 마음은 아름다운 ‘교육책’을 읽어 아름다운 교사가 되려는 마음하고 한동아리입니다. 고운 책을 읽는 마음은 아름다운 ‘사진 솜씨’를 익혀 훌륭한 사진쟁이가 되려는 매무새하고 한솥밥입니다. 고운 삶을 읽는 마음은 어여쁜 살림살이를 꾸리면서 사랑스러운 밥과 옷과 집을 가꾸는 살림꾼 한삶하고 한몸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돌보고 싶으니 ‘곱다고 느끼는’ 책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힘든 나날이니까 ‘곱다고 느끼는’ 만화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 이 땅에 두 다리를 튼튼하게 딛고 서면서 동무들 두 다리도 이 땅에 튼튼히 딛고 서도록 어깨동무를 할 삶이라고 느낍니다.



- “그랬더니, 엄마가 착한 아이가 되면 생일 때 사 준대. 아직도 안 사 줬지만. 우리 엄마는 자주 깜빡깜빡 해. 아니면, 내가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그런가? 어떡해. 몸이 식겠다. 잘 자, 리나. 다음에 내가 잠옷 만들어 줄게.” ‘유미. 넌 착해. 유미는 착한 아이야.’ (132∼136쪽)

- “하룻밤이었지만 즐거웠어.” “네가 주워 준 거니? 고맙다. 다음에 꼭 보답할게.” ‘와, 왕자님이다.’ ‘안녕, 유미. 다정한 소녀. 그리고’ “어서 와.” “다녀왔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응, 미안해.” (143∼145쪽)



  너무 많다 싶은 책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모자라지 않도록 책을 읽으면 됩니다. 너무 많다 싶은 돈을 벌지 않으면 됩니다. 꼭 알맞춤하게 돈을 벌어 나누면서 웃고 울 수 있으면 됩니다.


  한 달 100만 원 벌이로 흐뭇한 삶을 일구고, 한 달 50만 원 벌이로 즐거울 삶을 보듬으면 됩니다. ‘88만 원 세대’ 같은 이름은 그야말로 허울입니다. 880만 원을 벌어야 아름답겠습니까. 8만 8천 원을 벌면 바보나 멍텅구리가 되겠습니까. 한 달에 돈을 얼마 버느냐는 아무것 아닙니다. 흙을 짓는 사람한테 쌀금이 얼마가 되느냐는 그리 대댄하지 않습니다. 살림하는 사람한테 살림돈이 얼마나 있느냐는 썩 큰 일이 아닙니다.


  흙을 지을 땅, 곧 흙이랑 햇볕이랑 물이랑 바람이랑 소담스럽습니다. 살림할 집안, 곧 부엌과 방과 마루와 살림살이가 알뜰합니다.


  값비싼 농기구가 있어야 흙을 잘 짓지 않습니다. 값진 시설을 갖추어야 밥을 맛나게 짓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탄대서 내 삶자락과 보금자리와 마을을 알뜰히 건사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만, 자동차만 타고 다닌다면, 또 커다란 자동차를 끌고 다닌다면, 더욱이 대중교통이라 하지만 스스로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는 매무새를 잃는다면, 내 삶은커녕 내 몸을 들여다보기 힘듭니다.


  다리가 아파야 하고, 허리가 쑤셔야 하며, 팔이 저려야 합니다.



- “솔직히 난 이해가 안 돼. 3학년은 다들 취직 때문에 난린데, 아주 행복한 고민이잖아.” “하지만 테라노 선배는 할아버지의 원조를 전혀 안 받는다면서. 이런 낡은 아파트에 살면서 술집이다, 비디오 가게다, 알바도 열심히 하고.” “그건 그렇지만.” “그런 거 싫지 않을까. 전부 처음부터 준비된 듯한 미적지근한 환경.” “아아, 그렇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네.” (162∼163쪽)

- “생각해 보면 그 그늘에서 벗어나서 평가를 받은 적이 없더라고. 이제 그런 거 다 귀찮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테라노 선배는 가방 만드는 걸 좋아해서 만드는 거 아니었어요? 저, 선배의 가방 좋아해요.” “그건 네가 이상한 녀석이라 그런 거고. 아, 메시지다. 나 간다. 잘 마셨어.” “선배! 저보다 선배가 더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말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어요.” “뭐?” “이상한 사람이랄까,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 의미로. 솔직히 테라노 가방인지 뭔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러니 이제 가방이 싫어졌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테라노 가방이든 다른 곳에서든, 혼자든 아니든, 가방이야 어디서든지 만들 수 있잖아요.” (180∼183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둘째 권에서는 ‘아픔’ 가운데 한 갈래 이야기를 살포시 다룹니다. 아픔이란 참 아픕니다. 말 그대로 아픕니다. 아프니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면서 거듭 아픕니다.


  아픈 자리이기에 아뭅니다. 아프지 않은 자리는 아물지 않습니다. 다친 자리는 생채기가 납니다. 생채기가 난 자리이기에 고름이 흐르다가는 딱지가 앉고, 딱지가 떨어지면서 새살이 돋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자그마한 일본 만화책 하나’에서 ‘아픈 삶 아픈 이야기를 아프게 그리’면서, 서로 나눌 애틋하며 고마운 사랑을 즐거이 보듬는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맞아들일 수 있으면 얼마나 예쁠까 하고 꿈을 꿉니다. 다들 너무 바쁘지 않기를 빌고, 모두들 지나치게 배부르지 않기를 빕니다. 4344.1.2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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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쟁이 손가락 사진쟁이 손바닥


 새벽녘 쉬를 하러 일어서는 옆지기가 엉덩이가 몹시 아프다고 한다. 옆지기 발바닥부터 등뼈까지 천천히 주무른다. 발바닥과 종아리와 허벅지와 엉덩이와 등과 등뼈를 하나하나 주무르면서 생각한다. 집일에 치이고 아이하고 복닥인다면서 옆지기 몸을 주무른 지 퍽 오래되었다고 느낀다. 틀림없이 내 몸이 힘들거나 고되기 때문에 옆사람 몸을 찬찬히 돌아보지 못한다 할 수 있다. 옆지기 아픈 몸을 주무르면서 내 손가락이나 손목이나 팔이 제대로 힘을 내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여린 손으로도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고, 힘없는 손으로도 아픈 사람을 보듬을 수 있다. 힘들 때에는 힘든 만큼 조금씩 주무를 노릇 아니겠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일기를 쓰자면서, ‘책일기’하고 ‘사진일기’하고 ‘아이돌봄일기’ 세 가지를 날마다 한 줄이나마 공책에 끄적이면서, 막상 옆지기 팔다리와 등허리 주무르기는 하루에 오 분도 못한다면 집식구로서 할 말이 없다.

 찌개나 국에 마늘을 빻아 넣는 데에 1∼2분만 더 쓰면 된다. 팔다리를 주무를 때에 즈믄까지 숫자를 세어도 된다. 한 번 주무를 때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을 주무를 일이 아니라, 틈틈이 조금씩 보살필 수 있으면 된다.

 손가락으로 힘을 쓰기 벅차 손바닥을 쓰고, 손가락을 안으로 곱아 손가락 등으로도 눌러 본다. 문득, 내 손가락이 꽤나 뻣뻣하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손가락 그림이 모조리 지워진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갈 무렵이 되면 온몸이 뻣뻣해진다는데, 핏기가 사라지며 뻣뻣해지는 가운데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이러한 내 손가락은 슬픈 손가락이라 해야 할까, 여태껏 온갖 일을 수없이 치러내 주었으니 고이 쉴 수 있는 기쁜 손가락이라 해야 할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닥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손가락을 놀려 할 수 있는 일 또한 그다지 많지 않다고 깨닫는다. 나는 내 삶에 어떠한 책을 곁에 놓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떠한 손가락으로 돌보는가. 지쳐 나가떨어질 듯한 하루하루이다 보니, 글 한 줄을 쓰면서도 이 글 한 줄에 들이는 품이 몹시 애틋하다.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삶이었다면, 틀림없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싶을 책을 그야말로 대단히 많도록 사고 읽으며 건사했을 테고, 이렇게나 많은 책을 사들이며 읽는 사람은 나라 안팎에 거의 없을 테지. 그렇지만, 아이를 함께 낳아 키우는 삶을 보내면서, 책을 읽는 다른 길을 들여다본다. 곧 둘째를 함께 낳아 키울 때가 되면, 책을 읽는 새삼스레 다른 작은 길을 들여다보겠지.

 어느새 내 손가락은 글쟁이 손가락하고 멀어진다. 차츰차츰 내 손바닥은 사진쟁이 손바닥하고 동떨어진다. 어쩌면 비로소 글쟁이 손가락이 되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이제서야 사진쟁이 손바닥이 된다 할는지 모른다. 천천히 동이 튼다. 이제 곧 쌀을 씻고 불려 아침을 차려야 한다. (4344.1.2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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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삶과 공부하는 아이
― 현진건, 《B舍監과 러브레터》



- 책이름 : B舍監과 러브레터
- 글 : 현진건
- 펴낸곳 : 동서문화사 (1977.9.1.)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시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소설을 읽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잘 치러 이름난 대학교에 더 많이 들어가도록 채찍질을 하고자 현대소설을 가르칩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서던 1988년 3월, 학교에서는 갱지에 등사한 종이를 나누어 줍니다. 1991년 3월에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갱지에 등사한 종이를 나누어 줍니다. 이 갱지에는 ‘중학생이 읽을 권장도서’라든지 ‘고등학생이 읽을 필독도서’가 깨알같이 적힙니다.

 중학교에 들어서거나 고등학교에 들어서며 받는 ‘꼭 읽으라 하는 책’을 살피면, 그즈음에 나온 새로운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즈음뿐 아니라 ‘오늘날 두루 읽히거나 읽을 만한 책’ 또한 하나도 없습니다. 문학이라 하면 모두 현대소설로 쏠리고, 김동인이니 이광수이니 현진건이니 김유정이니 이효석이니 황순원이니 하는 분들 작품 가운데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쓴 작품에 쏠립니다. 해방 뒤에 문학을 한 사람들 작품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을 뿐더러 입시에서도 다루지 않습니다. 더러 한두 작품 한두 대목이 나오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작품에 견주면 아무것 아닙니다. 문학이란 철지난 문학이고, 문학하는 사람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빛을 보는 셈입니다.


.. “그래 음악회에 가기 싫단 말인가?” “자네 혼자서 다녀오게.” “여보게 음악은 모른다 하더래도,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그려. 주최가 여학교 측이고 보니, 그 학교 학생은 물론이겠고, 서울 안의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끌어올 것일쎄.” 하고 매우 초조한 듯이, “입장권은 내가 삼세. 음악이 싫거든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 “왜?” “왜라니,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자는밖에.” “여학생은 보아 쓸데가 무엇이란 말인가?” ..  (216쪽/까막잡기)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갱지를 훑으며 ‘들어 본’ 이름과 ‘처음 듣는’ 이름을 헤아립니다. 들어 본 사람 작품이건 처음 듣는 사람 작품이건 하나하나 찾아서 읽기로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 갱지에 적힌 사람들 작품을 ‘학교에 책을 가져가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읽는다’면 무어라 따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학교에서 읽으라 한 책인 만큼 이러한 책을 읽는다 할 때에 책을 빼앗는다든지 무어라 꾸중할 핑계거리가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현진건 님 작품 〈빈처〉와 〈운수 좋은 날〉을 읽으라 했지, 〈불〉이나 〈그립은 흘긴 눈〉은 읽으라 하지 않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나 〈피아노〉 같은 작품이 ㅅㄱㅇ 같은 대학교 논술시험에 나오기도 하니, 학교 모의시험에 이들 작품 지문이 나오기는 하지만, ㅅㄱㅇ 논술시험 지문하고 똑같이 나올 뿐입니다. 〈우편국에서〉나 〈할머니의 죽음〉이라든지 〈사립정신병원장〉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다루거나 이야기하는 국어 교사는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 가운데 이들 작품을 읽은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어쩌면 이들 작품은 안 읽거나 못 읽은 분이 더 많을는지 모릅니다. 교대나 사범대에 다닐 때뿐 아니라, 막상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면서도 ‘당신들이 학생 적에 못 읽은 한국 현대문학’을 뒤늦게 읽는다든지, 이때부터 바지런히 읽는다든지 할 겨를을 못 내는지 모릅니다.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하나둘 그러모읍니다. 현진건 문학을 읽으려고 생각한 때에는 현진건 님 문학책을 펴낸 갖가지 판본을 모두 살펴서, 겹치지 않은 작품이 하나라도 실렸으면 냉큼 사들여서 읽습니다. 이무영 소설이든 안수길 소설이든 박태원 소설이건 마음껏 읽습니다. 장용학 소설이건 이청준 소설이건 즐거이 읽습니다.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또 현대를 지난 오늘날 소설을 읽으면서, 오늘날과 가까울수록 문학하는 사람들 말이 재미없다고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면서 적어 내려간 작품에는 ‘깰락졸락’이라느니 ‘큰심부름 잔심부름’이라느니 ‘꾸중받이’라느니 ‘맞방망이’라느니 ‘염통이 파득파득’이라느니 ‘신트림’이라느니 ‘여기 오는 맡’이라느니 ‘퉁을 주었다’라느니 ‘까막잡기’라느니 ‘멋질린’이라느니 ‘뭇주룩하게’라느니 ‘겅성드뭇’이라느니 ‘무안새김’이라느니 ‘치훑고 내리훑고’라느니 ‘샐닢’이라느니 하는 말마디를 마주합니다. 따로 살려쓴다는 토박이말이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주고받는 말마디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마디 가운데에도 “만족의 미소” 같은 일본 말투가 끼어들곤 합니다.


.. “저를 모르시겠읍니까. 제가 ××이 아닙니까.” “응, 네가 ××이냐…….” 우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그윽하나마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듯하였다. 그 개개 풀린 눈동자 가운데도 반기는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할머니의 병환이 어젯밤에는 매우 위증해서 모두 밤새움을 한 일, 누구누구 자손을 찾던 일, 그 중에 내 이름도 부르던 일, 지금은 한결 돌린 일 …… 온갖 일을 중모는 나에게 아르켜 주었다. 나는 그날 밤을 누울락앉을락, 깰락졸락 할머니 곁에서 밝혔다. 모였던 자손들이 제각기 돌아간 뒤에도 중모만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교의 독신자인 그는 잠오는 눈을 비비기도 하고 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밤새도록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  (130∼131쪽/할머니의 죽음)


 오늘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한테 ‘권장도서목록’이나 ‘필독도서목록’을 내어주며 이러한 책을 안 읽으면 두들겨 팬다든지 몽둥이찜질을 한다든지 할까 궁금합니다. 문학이란 대학입시를 치르며 살필 시험문제로만 여기면 그만이라고 다루는지 궁금합니다. 삶을 다루는 문학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학교에는 아이들 삶이 있는지 궁금하고, 집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사랑하며 일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지 궁금합니다. (4344.1.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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