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1.28. 

충북 음성 읍내리 

읍내 고양이를 만난다. 여럿 만난다. 이 가운데 두 아이 사진을 담았다. 

 

시골 읍내 고양이는 도시 골목 고양이하고 얼마나 다른 삶을 누리려나. 

아마 도시보다는 보금자리가 한결 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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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73] 폐도

 문과나 인문계를 다니든, 문학을 하든, 국어학을 하든, 이런 사람들만 우리 말과 글을 배워야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살자면 마땅히 영어를 배워야겠지. 수학을 하든 건축을 하든, 아니면 여느 가정주부로 살든 운동선수가 되든, 나라밖에서는 영어를 마땅히 잘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잘 배워서 잘 써야 한다. 아파트를 짓든 쇼핑센터를 짓든, 이들은 한국말은 한 번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머지, “이 길은 아파트를 지으면서 더는 다닐 수 없으니 너그러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처럼 적을 줄 모른다. 시골 읍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이 알림판을 어떻게 알아보든지 말든지 마음을 쓰지 못한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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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22] GIFT 소셜 쇼핑 앵콜 EVENT

 한국에서 살아가지만, 내가 한국사람이 맞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꽤 잦습니다. 틀림없이 한국땅 한국사람이 한국글로 적은 말마디일 텐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마디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마디를 적바림한 분이라든지, 이런 말마디를 읽고 찾아가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꽃을 피우겠지요.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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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1.27.
 : 눈길 달리기



- 집살림 도맡는 아빠가 혼자서 할 수 있는 반찬은 늘 어슷비슷하기 때문에 반찬을 얻으러 마실을 가기로 한다. 큰길가에 있는 보리밥집 아주머님한테서 얻을 생각이다. 아주머님은 늘 반찬을 그냥 주시는데, 밥을 사먹는 셈치고 반찬값을 받으라 말씀드리지만, 언제나 반찬을 그냥 담아 주신다. 반찬값을 안 받으시면 미안해서 다시 찾아오기 힘들지만, 그래도 다시 안 갈 수 없고, 거듭 말씀을 여쭈지 않을 수 없다. 반찬값을 안 받으시니, 노상 다른 여러 가지를 산다. 그러나 다른 여러 가지를 산다 한들 반찬값에 댈 수 있으랴. 거꾸로 생각해서 내가 밥집을 꾸리는 아저씨라 할지라도, 누군가 반찬을 얻으러 올 때에 반찬값을 받기는 쉽지 않겠지. 그러나 나는 반찬값을 값대로 받으면서 살며시 덤을 더 얹어 주리라 생각한다.

- 집 앞 길머리에서 논둑길로 갈까 마을길로 갈까 어림한다. 논둑길은 눈을 치우지 않아 고스란히 쌓였다. 내리막으로 가야 하기에 자칫 미끄러질까 걱정스럽다. 마을길로 가기로 한다. 마을길은 발굽병인가 때문에 이리로 못 가도록 막아 놓기도 했는데, 오늘은 막아 놓던 헌바퀴더미가 없다. 발굽병 때문에 바깥 자동차 못 들어오게 막는다지만, 여기를 이렇게 막는다고 일이 풀리겠는가. 발굽병이라는 병이 퍼지는 까닭이 자동차 때문이겠는가. 고기를 즐겨먹는 도시사람 때문에 생기고, 고기를 더 싸게 더 많이 먹어치우는 도시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병 아닌가. 시골사람은 고기 먹을 일이 드물 뿐더러, 시골사람이 고기를 즐겨찾는다든지 자주 먹는다든지 하는 일도 없다. 온통 도시 때문에 생기거나 퍼지는 병인데, 이런 병이 생기면 늘 시골사람만 골탕을 먹는다.

- 이제 아이는 추운 겨울날 자전거마실을 잘 깨닫는다. 처음 몇 번은 장갑을 안 낀다 하고 모자를 안 쓴다 하며 손을 밖으로 내밀어 놓으려 했으나, 이제는 아빠가 장갑 끼우고 모자 씌우며 이불을 꼭꼭 여미면 얌전히 있는다. 우리가 갈 곳까지 거의 아뭇소리 없기까지 한다. 그래도 가는 길에는 꽁꽁 얼어붙으며 꼼짝을 않으나, 오는 길에는 조잘재잘 떠든다. 아마, 마실을 나가서 이것저것 얻어먹기도 하고 귀여움도 많이 받으며 돌아오니까 신이 나겠지.

- 오늘도 마실 나가는 길은 맞바람. 겨울 맞바람은 참 끔찍하다. 혼자 살던 지난날, 이 끔찍한 겨울철 맞바람을 맞으며 멧골집부터 서울에 있는 헌책방까지 어떻게 자전거로 달렸나 놀랍기만 하다. 오늘 내 나이보다 조금 어리거나 젊었다 할지라도, 그때에도 틀림없이 손이며 얼굴이며 사타구니며 꽁꽁 얼었을 텐데, 어떻게 견디며 그 먼길을 꿋꿋하게 주마다 오갈 수 있었을까.

- 개를 키우고 소를 치며 돼지를 기르는 곳 옆을 지난다. 소를 쳐서 소젖을 짜는 분들은 소젖을 거두어 가는 우유공장에서 내주는 사료만 사서 먹여야 한단다. 젖소 키우는 짐승우리에서 병이 생긴다면 젖소 키우는 사람 탓이 아니라 우유공장 탓이다. 그러나, 젖소 키우는 우리에서 발굽병 따위가 생겼을 때에 우유공장한테 잘잘못을 캐묻는 일은 듣도 보도 못한다.

- 공장 옆길을 지난다. 마을길을 거치면 공장 옆을 지나야 해서 싫지만, 이웃사람 살림집 옆을 지나는 마을길을 안 지날 수 없다. 이 공장 옆을 지날 때면 언제나 매캐하고 코를 뚫는 듯한 쇳가루 냄새를 맡아야 한다. 땅값 싼 시골마을 깊숙한 데로 공장을 지어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우리 나라 경제란, 더 값싼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모르면서 그저 더 싸게만 사려는 도시사람을 키워 내는 제도권 사회라고 느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신들 아파트나 살림집 곁에 제철소나 중화학공장이 있어 쇳물이 흐르고 쇳가루가 날리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 고향 인천은 곳곳에 중화학공장이며 제철소며 제련소며 유리공장이며 자동차공장이며 득시글득시글한데다가 화력발전소까지 있다. 다른 데도 아닌 옛도심 한복판에 이런 공장들이 가득하고, 여느 살림집과 5층짜리 낮은 아파트 옆으로 이런 공장투성이를 이룬다. 서울사람들은, 더욱이 지식인들은, 또 글쟁이들은 공장이 어떤 곳인 줄 참 모른다.

- 보리밥집에 닿는다. 수레에서 안전띠를 끌러 아이를 내린다. 아이는 아무 말도 없더니, 밥집으로 들어가 모자를 벗기니까 비로소 웃음을 띤다. 많이 추웠지?

- 아이는 장갑을 벗겠다 하며 밥집을 이리저리 콩콩 뛴다. 얼마나 뛰고 싶었을까.

- 반찬을 얻고 몇 가지 까까를 산다. 씨있는 달걀 마흔 알을 산다. 가방에 차곡차곡 담는다. 아이하고 함께 보리밥집 아주머님들한테 인사를 한다.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안전띠를 채운다. 아빠도 자전거에 올라탄다. 영차영차 달린다. 공장 곁 스쳐야 할 마을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논둑길 쪽으로 간다. 마을 또다른 개장수 있는 논둑길 옆으로만 눈이 그대로 쌓였다. 바퀴가 폭폭 잠기는 길을 달린다. 고스란히 쌓인 눈을 폭폭폭 밟으며 달리는 맛을 오랜만에 느낀다. 그냥 좋다. 생각보다 미끄러지지 않는다. 아마 어설피 눈을 쓸거나 치워서 바닥이 얼었으면 미끄러지겠지. 외려 눈을 안 쓸어 그대로 있으니 바닥도 안 얼어 안 미끄러지는구나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뒷바람. 얼굴로 찬바람이 칼바람처럼 불지 않으니 그리 안 춥다고 느낀다. 아이도 똑같이 느끼는지, 수레에 앉아 “아빠, 저거 뭐야?” 하면서 묻는다. “응, 볏짚말이. 볏짚을 동그랗게 만 볏짚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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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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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은 한국을 읽지 않는다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38]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 책이름 : 아파트 공화국
- 글 : 발레리 줄레조
- 옮긴이 : 길혜연
- 펴낸곳 : 후마니타스 (2007.2.1.)
- 책값 : 15000원


 (1) 아파트·골목집·살림집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 잘 쓴 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프랑스 학자가 한국 서울땅 아파트 얼거리를 살피며 쓴 ‘논문’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 한국에서도 서울땅 아파트 얼거리를 돌아보며 ‘한국 사회 읽기’를 하고자 쓴 논문이지, ‘한국사람하고 한국 사회 읽기 함께하기’를 하고자 쓴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 《아파트 공화국》을 ‘프랑스에서 한국 읽기’를 헤아리며 읽어 본다면 퍽 잘 썼다고 여길 만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아파트가 좋으냐 나쁘냐’라는 금긋기가 아니라 ‘한국사람한테 아파트란 무엇이요, 한국 정부와 권력자와 재벌 기업한테 아파트란 무엇인가’를 밝히기 때문입니다.


.. 2000년 현재 1960년 이전에 지어진 도시 주택은 5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어진 가옥은 극히 드물다. 간신히 3퍼센트 정도 된다 … 1960년에 존재하던 서울의 문화재 중 2/3 이상이 1990년 현재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섰다 … 아파트와 그 동네가 ‘깨끗하다’는 말은 ‘더럽다’는 말과 상반되기보다는 오래되어서 낡고 값어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와 상반되는 것이다 ..  (17, 182쪽)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나오기 앞서까지, 한국땅 지식인이나 건축가 가운데 아파트 문제를 찬찬히 다룬 적이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낱권책으로는 거의 나온 적이 없는데, 대학교에서 논문으로 누군가 쓴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 길이 없으니까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나온 지 어느덧 네 해째 지납니다. 그러나, 네 해째 지나더라도 그닥 달라지는 구석이 없습니다. 2009년에 《아파트에 미치다》라는 책이 한 번 나왔으나, 이 책은 ‘아파트 겉모습 훑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파트 속모습 엿보기’라든지 ‘아파트 삶 들여다보기’라든지 ‘아파트 사람들 만나기’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이루지 않습니다. 2006년에 《아파트의 문화사》라는 책이 하나 나왔는데, 이 책은 ‘아파트 = 이제는 한국사람한테 빼도 박도 못할 문화’라는 틀을 먼저 세운 다음 썼습니다. 한국사람이 아파트에서 거의 모두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아파트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아직 퍽 많은데, 너무 섣불리 ‘끝마무리를 틀에 박은 나머지’ 기울어짐 없는 차분한 눈썰미를 엿보기 힘듭니다. 2009년에 나온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같은 책은 책이름 그대로 ‘첫 아파트 발굴, 이 가운데 서울 아파트’에 눈길을 맞추면서, ‘오래된 아파트에 살던 사람 추억 이야기’ 같은 틀에서 헤매고 맙니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는 ‘골목길 = 옛 추억’이라 여기는 흔하디흔한 얼거리하고 똑같습니다. 아파트가 ‘값싸고 목 좋아진’ 땅을 차지하려고 골목동네를 마구 때려부수며 밀고 들어오면서 골목길이 많이 사라졌으나, 아직도 ‘아파트 재개발을 노리는 골목동네’는 무척 많이 남았습니다. 이 책 또한 처음부터 ‘아파트는 꿈조차 꾸지 못한 사람들(그러니까 ‘서민’이라는 사람들이든 ‘하층계급’이라는 사람들이든)’은 싹 도려낸 채 아파트를 바라보고 맙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 지식인들이 한국땅 아파트를 차분하게 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지식인 자리에 올라서거나 대학교수가 되거나 건축가가 된 사람들치고,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아파트 아닌 골목집이나 시골집에서 나고 자랐을 수 있으나, 이분들이 뜻을 이루며 돈을 번 뒤로는 한결같이 아파트로 삶터를 옮깁니다. 아파트에 안 살면서 아파트를 살피며 연구하거나 다루는 지식인이나 건축가가 있기나 할는지요.

 ‘아파트맨(아파트사람이 아닌 아파트맨입니다. 아파트를 재거나 따지는 사람은 ‘남자 여자’ 골고루가 아니라 거의 ‘남자’들뿐이니까요. 게다가 아파트를 설계하고 건축하며 사고파는 사람 또한 죄다 남자라 할 만합니다)’은 아파트사람한테 눈길을 맞추어 아파트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제, 한국땅에서 아파트는 50%가 넘는 살림집, 이른바 ‘과반수 살림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가 과반수 살림집이 되기 앞서까지는 아파트 이야기를 할 때에 눈치를 볼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과반수 넘는 사람’은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가운데에는 퍽 값싸며 작은 아파트도 제법 남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잣대로 보자면 퍽 값싸며 작은’ 아파트이지, 이 작으며 값싸다는 아파트가 처음 설 때를 돌아본다면 조금도 값싸지 않고 하나도 작지 않은 살림집이었습니다. 오늘날 무슨무슨 팰리스나 어떤저떤 샵 같은 아파트하고 따지니 더없이 값싸거나 작아 보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작고 값싸다는 아파트라 할지라도, 여느 골목동네 사람들한테는 너무 크며 너무 비싼 집입니다. 달삯 5만 원이나 10만 원을 놓고도 손을 바르르 떠는 여느 골목동네 사람들한테 한 달 관리비가 아무리 싸서 5만∼10만 원쯤 된다는 작은 아파트일지라도 엄두를 낼 수 없을 뿐더러, 작다는 아파트 한 채를 사거나 얻자 하더라도 이런 집에 바칠 목돈을 모을 수조차 없습니다.


.. 개인주택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한옥 마당과 고불고불한 골목길은 콘크리트와 포장된 주차장·도로나 놀이터·테니스장 같은 공동 시설로 변모했다 … 시소와 미끄럼틀 옆에 대형 미키마우스가 빈둥거리는 유치원 안마당은 디즈니랜드를 옮겨 놓은 듯하다. 놀이터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노란 닭과 분홍색 토끼들이 용수철 끝에 매달려 유치원이 끝나고 몰려드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이렇듯 화려한 외장과 장식 속에서 아파트단지 내 규격화된 생활양식은 은폐되고 있었다 ..  (25, 74쪽)


 골목동네 살림집 가운데에도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 살림집이 있습니다.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든 여느 주택에 살든 홀가분합니다. 그저 어디이든 살고 싶은 데에 마음대로 살 수 있어요.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으나, 그저 ‘취향’ 때문에 골목집에서 살 뿐입니다. 이러한 ‘있는 사람’ 골목집에는 으레 마당이 널따랗게 있고, 마당가에는 꽃밭과 나무가 자라며, 2층이나 3층이 올라서고, 차를 대는 자리를 한둘쯤 마련합니다. 밥어미나 운전기사가 깃들 작은 곁방으로 드나드는 작은 문이 높다란 담벼락 한쪽에 조그맣게 붙기도 합니다.

 ‘없는 사람’ 골목집은 반듯하지 않은 골목을 따라 왼편과 오른편으로 죽 이어집니다. 지붕이 모두 낮고, 높이도 한결같이 낮습니다. 멀리서 보면 햇볕 한 줌 제대로 들기 어렵다 싶지만, 골목집치고 햇볕이 안 드는 집은 없습니다. 서울처럼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어쩔 수 없이 땅밑을 파고 사람들을 억지로 쑤셔넣는 곳에서나 햇볕 한 줌 못 들지, 서울을 뺀 다른 도시 골목집들은 왼편 집이나 오른편 집이나 햇볕이 골고루 스며듭니다. 골목집 사람들끼리 서로 자그맣게 살림을 꾸리면서 아침이면 아침, 낮이면 낮, 저녁이면 저녁, 이렇게 햇볕을 돌아가면서 받도록 자리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골목동네로 사진찍기 하러 나오는 이들은 ‘골목집에 햇볕이 골고루 돌아가며 내리쬐는 때’를 잘 모르거나 처음부터 생각을 않고 찾아나서기 마련이라, 골목길 사진을 찍을 때에 노상 어둡거나 퀴퀴하거나 빛바랜 느낌이 드는데요, 골목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면서 골목을 모를 뿐 아니라 알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골목동네 사람들 삶자락을 글로 담아 학문을 하든 사진으로 찍어 예술을 하든, 막상 골목동네 사람(주민)으로 살지 않으면서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파트는? 아파트를 글로 담아 학문을 하는 사람은 어떠할까요?

 이제는 아파트를 다루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아니 모두 다라 할 만큼 아파트사람, ‘아파트맨’입니다. 한편, 예술을 할 생각으로 아파트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 한국의 경제 발전은 엄밀히 말해 ‘기적’이 아니라 1960년대 성인 계층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자 그들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었다 …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새로 지어진 아파트단지들은 시멘트에서 거실의 가구·문틀·비디오 경비 시스템·냉장고와 비디오 등,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재벌 기업의 제품이다. 그리하여 현대나 삼성의 마크가 찍힌 아파트단지들은 점점 재벌기업의 대형 광고판처럼 보이게 되었다 ..  (100∼101, 103쪽)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삶터를 바라보고 사람을 사귀며 사랑을 나눕니다. 살아가는 틀을 벗어나 삶터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걸맞게 사람을 사귈 뿐입니다. 내 삶에 따라 사랑을 합니다.

 골목동네 젊은이가 사랑을 속삭일 때에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자유로를 싱싱 달리겠습니까. 골목동네 젊은이가 ‘잠자는 데에 10만 원이 웃도는’ 호텔방에서 사랑놀이를 나누겠습니까.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은 ‘한국땅 아파트사람(또는 아파트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국땅 골목집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프랑스사람’입니다. 이분이 프랑스에서 여느 삶자락에서 살아가는지, 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퍽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한국땅 아파트를 말할 때에 아파트 권력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아파트 추억에 사로잡히지 않는데다가, 골목동네 추억에도 말려들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무디거나 무뚝뚝하게 한국땅 삶자락을 훑지 않습니다. 아주 따사롭게 손길을 내밀지도 않아요. 학문을 밝히고자 논문으로 쓴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살갑거나 포근한 읽을거리(삶이야기)로 쓴 책은 아닌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아파트가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두루 퍼지는 흐름이라든지, 이 아파트와 얽힌 한국사람들 삶자락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한국땅에서 아파트는 어떠한 빛깔이자 모습인지를 고즈넉히 보여줍니다. ‘손가락질’이나 ‘비웃음’이나 ‘씁쓸함’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또 이 가운데 서울에서, ‘아파트 = 한국 사회 노동자 희생으로 이루어진 경제 발전을 발판으로 재벌기업 상품시장으로 이루어진 살림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 책읽기·삶읽기


 내 이웃들이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읽겠다 할 때에는 이 책을 옳게 잘 읽어 주면 좋겠습니다. 줄거리를 섣불리 왼다든지, 글쓴이 생각이 무엇인가를 서둘러 파헤치려 한다든지 안 하면 좋겠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 그대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소리입니다.


.. 잠실처럼 평수가 작은 서민 아파트라 할지라도 대부분 한국의 아파트는 중간계급 이상의 주거지라는 특성을 갖는다 … 매매를 기본 원칙으로 한 주택정책이 공식화된 것은 1957년이었다. 이 원칙은 주택의 소유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기본 골자로 했다. 따라서 최하위 계층을 포함해 누구든 자신 소유의 주택을 손에 넣으려면 그만한 재산을 동원할 수 있기까지 상당한 물질적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 ‘아파트는 현대적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아파트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 상황에 대한 결정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아파트 이외에 다른 선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층 단독주택의 대안을 논쟁에서 배제시킨다 ..  (69, 99, 178쪽)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많이 살아가니까 ‘아파트 공화국’이 아닙니다. 한국땅 화폐경제가 ‘아파트’를 한복판에 세워 놓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진보 빛깔은 아니지만 진보라고 일컫는 신문 〈한겨레〉조차 ‘아파트 투기’와 ‘아파트 재개발’과 ‘아파트 광고’를 기사로 날마다 다룹니다.

 스스로 진보라 말하려면, 또 스스로 진보로 살아가자면 아파트를 떠나야 합니다. 한국에서 아파트가 50%뿐 아니라 60∼70%는 되고, 머잖아 80∼90%까지 될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파트에서 살지 말라 하느냐 하면서 따지고 싶더라도, 진보라는 믿음을 지키고 싶다면 아파트를 버리든 아파트에서 떠나든 해야 합니다.

 진보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떠날밖에 없습니다. 아파트에서 죽치고 살아가면서 외치는 진보는 거짓입니다.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이 《아파트 공화국》에서 밝히듯, ‘아파트 = 돈굴리기를 하는 살림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막상 ‘진보를 이루려 할 때에 내 이웃으로 삼아야 할 사람’하고 너무 동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부자하고도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진보는 가난뱅이하고도 손을 맞잡으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밝히거나 외치는 사람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하고 손을 맞잡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요. 가난한 사람들 골목동네에서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일터를 오가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지요.

 골목동네 여느 일꾼들은 이 추운 겨울에도 장갑을 두툼하게 끼고는 짐자전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 할아버지들도 두툼하게 낀 장갑으로 엉금엉금 달리면서 볼일을 보고 논밭을 둘러봅니다.

 누군가는 까만 빛깔 큰 자가용을 몰면서도 ‘아름다운 진보’나 ‘훌륭한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진보도 알차게 이루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웃하고 벗삼는 진보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난하게 두 다리로 걷는 진보, 가난하게 자전거를 타는 진보도 있어야 하겠지요.

 집에서 살림하는 진보도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집 시설과 무상급식에 목매다는 진보도 있어야 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도맡아 돌보는 진보도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집 시설은 틀림없이 빈틈없게 갖추어야 하나, 나 스스로 사람됨과 어버이됨을 알뜰살뜰 건사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 사랑은 어린이집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하고 더 오래 더 자주 더 깊이 살을 부비며 마음을 따사롭게 나누어야 비로소 내리사랑입니다.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교에서 무상급식을 받아도 좋겠지요. 여기에서 더 헤아려야 합니다.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제 어버이(엄마만 아니라 아빠 또한)가 마련한 도시락을 먹을 때 더욱 즐거우며 한결 기운을 차립니다. 밖에서 맛난 바깥밥을 사 먹여야 아이가 즐겁지 않아요. 조그마한 집에서 조촐히 차리는 저녁밥을 식구들 모두 둘러앉아서 즐길 때에도 저녁잔치를 이룹니다.


.. 대학교수나 유명 건축사 등 엘리트에 속하는 건축가나 도시계획가들의 입장에서 주택 문제, 특히 아파트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아파트는 이미 너무 많이 지어졌고, 이제 와서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들 대부분의 생각이다 … 대단지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의 주택 문제에 대해, 대다수 건축가들과 지식인들의 입장은 모호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 … 한국의 중간계급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비공식 금융시장에 기초한 저축과 대출 때문이었다 … 권위주의 국가는 인구 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 발전에 헌신하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  (110, 111, 144, 147쪽)


 진보란 삶입니다. 보수도 삶입니다. 진보가 더 낫거나 보수가 더 나쁘거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찾을 사람들이고, 착한 삶을 사랑할 사람들이며, 참다운 삶을 아낄 사람들입니다.

 이리하여, 진보를 바라는 사람도 아파트를 버리거나 떠나야 하는 한편, 보수를 꿈꾸거나 외치는 사람도 아파트를 버리거나 떠나야 합니다. 올바른 보수란, 우리 삶터를 아름다우며 참답게 돌보고픈 생각을 지키는 사람들이니, ‘아파트 = 돈굳히기 살림집’이라 할 때에, 돈이 아닌 ‘사랑굳히기’를 하고 ‘믿음굳히기’를 하도록, 지붕 낮고 이웃하고 가까운 골목동네 여느 살림집으로 옮겨야 합니다. 겨울을 맞이해 한두 번 ‘연탄 나르기’를 하면서 사진찍히기를 하지 좀 말고, 겨우내 여느 골목동네 연탄불 살림집에서 오순도순 함께 살아가면서 ‘참된 보수’를 외쳐야 올바릅니다.


.. 결국 기업에서 월급쟁이 군단의 징집병들이 되는 것은 3년 간의 군 생활로 ‘교육된’ 남자들이다. 고지서의 납부 기한을 알리는 아파트단지의 스피커와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도록 경비원들에게 전달되는 지침은 군사독재의 유신과 관련이 있다. 차단기가 군부대를 연상시키듯, 경제 발전을 추동한 권위주의 국가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군사주의로부터 오늘의 한국 사회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233쪽)


 이제 《아파트 공화국》을 덮습니다. 2007년에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섣불리 이 책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아파트 이야기’를 얼마나 더 깊이 헤아리거나 톺아보는가를 기다린 뒤에야 이 책을 말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느덧 네 해가 흐르는 동안, 한국사람 스스로 아파트를 살가이 살핀다든지 속속들이 꿰뚫는다든지 하는 모습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람은 아파트만 제대로 못 읽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땅을 제대로 읽지 못해요.

 아니, 한국사람은 이름은 ‘한국’이지만, 정작 저 스스로 발을 디딘 이 나라를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미국을 읽고 일본을 읽으며 프랑스를 읽습니다. 한국사람은 중국을 읽고 러시아를 읽으며 인도를 읽습니다.

 왜 한국사람은 한국을 이리도 안 읽을까요. 어찌하여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을 이처럼 못 읽는가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을 사랑한다면 한국을 못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한겨레로서 한겨레붙이를 아낀다면 한국말을 사랑할 테고, 한겨레 넋이며 얼이며 두루 돌볼 테지요.

 새삼스레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이 고맙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앞으로 2107년쯤 된다면, 그무렵을 살아갈 뒷사람 누군가가 ‘지식인들 말씨’가 아닌 ‘수수한 여느 사람들 말씨’로 이 책을 되옮겨 되펴낼 수 있겠다 싶습니다. 2000년대에 한국땅 모습을 차분하면서 그윽히 읽어낸 책을 한국사람 스스로 쓰지는 못했기 때문에, 2107년이나 2207년에 2000년대 한국 터전을 돌아보고자 할 우리 땅 뒷사람들은 어김없이 프랑스 판으로 이 책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새로운 우리 말글로 아로새겨 주리라 믿습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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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눈물 2011-01-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3년 정도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저자인 발레리 줄레조와 같은 전공이어서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죠. 우리나라 '아파트'에 관한 논의는 '교육' 문제 만큼이나 어려운것 같습니다. 참고로 줄레조 교수의 <한국의 아파트 연구>라는 책도 있습니다. 절판이긴 하지만. 이 책은 <아파트 공화국>보다 더 딱딱합니다만, 타자의 시선으로 본 우리의 모습이기에 참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파란놀 2011-01-30 23:34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책도 나온 적이 있나 보군요. 말씀 고맙습니다~~~~~ 찾아서 살펴야겠어요.

'딱딱한' 책이라기보다는 '번역이 딱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 책 느낌글에는 굳이 안 적었지만, 이분 책을 옮긴 분 '번역은 그야말로 형편없기 짝이 없었'어요.... ㅠ.ㅜ 왜 이렇게 번역에 마음을 못 쏟는지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