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
콘노 키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랑을 물려주고 죽는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22] 콘노 키타,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



 치마처럼 길게 내려오는 겉옷을 잠자리맡에서까지 입으려 하고, 머리띠와 머리핀을 누워서까지 하려는 아이한테 “안 돼. 이제 자야 해. 얼른 벗어.” 하고 말하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아이가 말을 들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응, 이제 그만 벗고 다음날 또 입자.” 하고 말하면 으레 말을 듣습니다. “내일 또 입자.” 하고 말하면 “내일 또 입자? 내일 또 입어?” 하고 되묻고, “다음날 또 입자.” 하고 말하면 “다음날 또 입어? 응, 다음날 또 입어.” 하고 되묻습니다. 이러면서 옷을 벗겨 달라 하거나 스스로 벗습니다. 서른두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는 제 아버지 어머니하고 이렇게 말을 섞습니다.

 제 어버이가 짜증스레 말하면 아이 또한 짜증스레 대꾸합니다. 제 어버이가 살가이 말하면 아이도 살가이 대꾸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말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살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부터 듣기 좋도록 말해야 할 노릇이고, 내 입에서 나올 때부터 말하기 좋도록 말해야 할 일입니다.

 내 입에서 톡톡 쏘는 말투라 한다면, 듣는 사람에 앞서 말하는 사람 입이 망가집니다. 내 입에서 포근하게 우러나오는 말씨라 한다면, 듣는 사람에 앞서 말하는 사람 입이 어여쁩니다.

 예부터 ‘어른이 되라.’고 말해 왔습니다. 옛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라 하지 않았고 ‘멋진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늘 ‘어른이 되라.’고 말했으며, ‘어른이 그게 무슨 짓이냐.’고 말했습니다.

 한편, ‘아이라면 아이답게 굴어야지.’ 하고 말해 왔습니다. 내 주제를 알고 내 나이값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어른처럼 군다든지 일찍부터 철이 든 애늙은이 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 했습니다. 아이들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집일을 거들고 논밭일을 함께해야 했으나, 아이한테는 어른과 똑같이 일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꼭 아이 몸과 마음에 걸맞게 일을 시켰습니다. 아이들이 일을 하다가 놀러 나간다며 내쁘든 일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든 나무라지 않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살살 어루만질 뿐입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만하고, 잘못을 저지르면서 크며, 잘못을 하나하나 딛으며 삶을 깨우칩니다.


- “그 (엄마) 사진 좋아? 그럼 사야가 가져.” (8쪽)
- “그래. 국수는 엄마가 좋아하던 거였지.” (12쪽)
- “따라한다고?” “반만. 엄마가 해 주는 얘기는 신데렐라도 엄지공주도 ‘끝’이 없었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다음엔 늘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라고 했거든.” (24쪽)


 내 삶자국을 곰곰이 돌아보면, 어느 하루도 더없이 올바르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히 걸었던 적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삐딱하게 걷는다든지 흔들흔들 걷는다든지 엉터리로 걷는다든지 뒤로 걷는다든지 옆길을 걷는다든지 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용케 오늘까지 죽 살아옵니다. 어느 하나 잘 나거나 잘 하는 일이란 없으나,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도란도란 살아냅니다. 가만히 살피면, 한 사람 삶이란 ‘뜻한 모든 일을 빈틈없이 이룰 때’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즐거울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참사랑을 열다섯 나이부터 깨달아, 열다섯부터 티없고 훌륭하며 멋스러이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엉뚱하든 뚱딴지 같든 어설프든 어리숙하든, 스스로 부딪히거나 마주하거나 복닥이면서 살아내는 하루입니다. 잘못 보았다 싶은 사랑이라지만 내 마음을 쏟아서 사랑합니다. 엉터리로 본 사랑이라 하더라도 내 삶을 바치면서 껴안습니다.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땅을 파는 일은 부질없을 수 있습니다. 쓸데없이 힘을 버리는 셈일는지 모릅니다. 제 어버이가 애써 차린 밥을 먹고 엉뚱한 데에 힘을 쏟는다 할 테지요.

 그러나, 뜻없는 놀이를 하든 값없는 시간죽이기를 하든, 아이한테는 아이대로 부질없는 짓으로 하루를 보내는 삶이 즐겁습니다. 아직 말이 또렷하지 않은 아이한테 또박또박 말하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글을 쓰라 할 수 없습니다. 예닐곱 살쯤 되었으면 잔심부름이나 잔일쯤 거들어야 할 터이나, 다 큰 어른처럼 도마질을 하든 국을 끓이든 하라고 도맡길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배울 일이 아니라, 차근차근 익히는 삶입니다.


- “저번 학교에도 그런 애가 있었어. 교실 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쉬는 시간엔 혼자서 책을 읽곤 했던 애야. 반에서 겉돈다는 느낌보단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고양이 같았어. 고양이의 눈으로 우리랑은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달까. 하지만 나도 가끔 알 것 같아. 아, 이 아이는 지금 여행 중이구나. 그 시끄러운 교실 안에서 그 아이는 자기 시간 안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어.” (47∼48쪽)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권을 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림을 그리 잘 그리지는 못하는 만화라고 알아챕니다. 그러나, 모든 만화쟁이가 처음부터 그림을 빼어나게 잘 그리라고 바랄 수 없습니다. 만화를 그리든 그림을 그리든 그림은 그림대로 제대로 그려야 하는데, 새내기나 풋내기인 만화쟁이한테는 지나치게 바라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루하루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발돋움해야지요.

 그런데 그림결은 몹시 빼어나다 할지라도 마음이 와닿지 않는 만화가 많습니다. 그림투는 아주 대단하다 할지라도 가슴을 적시지 못하는 그림이 많아요. 사진과 글도 마찬가지이고, 춤과 노래도 비슷합니다. 놀랍게 부르는 노래가 있으나, 놀랍기만 할 뿐,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는다면, 이러한 노래를 노래라 할 만할까요. 엄청난 작품이라고 손가락을 추켜세운달지라도, 내가 차분히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불처럼 일어나는 기쁨이나 슬픔이 없다면, 이런 작품을 작품으로 여겨야 할는지요.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는 초등학생쯤, 얼추 열한두 살부터 열서너 살쯤 되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내놓은 만화라고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만화를 보면서 ‘만화를 잘 그렸다’라든지 ‘만화를 못 그렸다’라든지를 따질까 궁금한데, 아예 안 따지기도 할 테고, 어린이 나름대로 따지기도 하겠지요. 그림이란 누구나 보면 느낌으로 아니까요. 그림이란(또 글과 사진이란) 전문가가 바라보는 잣대로 값을 매기는 그림이 아닙니다. 그림이란, 즐기는 내가 바라보는 눈썰미로 사랑할 그림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는 아직 옹글게 영글기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수수한 내 삶을 수수한 그대로 아끼면서 보듬으려는 만화쟁이 넋을 어렴풋이 느끼며 집어듭니다. 공상과학이라든지 판타지라든지 하는 줄거리를 짜야만 놀라울 만화는 아니에요. 여느 삶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또한 놀라울 만화이며, 줄거리가 그닥 놀랍다 할 만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알뜰히 즐길 만한 만화입니다.

 왜냐하면 만화 또한 삶이거든요. 사람들이 살아가며 부딪히거나 부대끼거나 겪거나 치르는 이야기를 담는 만화이기에, 만화는 고스란히 삶입니다.


- “봐,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고. 어제까진 못했던 일도 내일은 할 수 있거나, 여태 손이 안 닿았던 곳에 닿기도 한단 말야.” (71쪽)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권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는 틈틈이 펼칩니다. 아이가 밥을 먹다가 자꾸 딴짓을 하니, 아빠는 아이가 밥을 언제 먹나 기다리다 지쳐, 그만 한손에 책을 펼칩니다. 아이가 딴짓을 쉬고 입을 벌릴 때에 비로소 밥을 퍼서 입에 넣어 줍니다. 이럭저럭 하는 동안 어느새 1권을 다 읽고, 아이한테도 밥을 다 먹입니다.

 줄거리를 살핍니다. 이웃집에 새로 옮겨 온 사람들을 마주하는 ‘이쪽 한 동네에서 오래오래 살아오던 식구’들이 ‘일찍 죽은 엄마’를 그리워 하는 말마디로 가득합니다. 아,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는 1권에서 그리움을 말하는구나.


- “앗. 편지도 들어 있다. ‘사야에게. 물려주는 거라 미안해. 내 몫까지 예쁘게 신어 줘. 하라다 사호.’ (씨익 웃고) 그럼 상자에 넣어 둬야지.” “구두를?” “사호 언니 편지! 사야가 처음 받은 편지잖아. 첫 편지.” (127∼128쪽)
- “사야가 답장 썼어.” “와. 고마워.” “빨랑 읽어 봐.” “‘예쁜 구두 고마워. 너무 좋아. 아껴서 신을게. 사야가.’ 기뻐. 얼른 휴대폰이 생겼으면 했는데, 편지도 나름 좋은걸.” (145쪽)


 문득문득 우리 집 딸아이 손금을 들여다봅니다. 아마 여러 달 만에 한 번쯤 들여다보지 싶은데, 어린이라서 그럴는지 몰라도, 참 정갈합니다. 다른 아이들 손금도 이렇게 정갈할는지 궁금합니다. 꼭 어린이라서 정갈하다 할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아이가 몇 살 나이로 클 때까지 아버지랑 어머니 될 우리 둘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보곤 합니다. 내가 앞으로 꾸릴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되며, 내가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딸아이가 아이를 낳아 손녀를 볼 즈음까지 살 수 있을는지, 갑작스레 차에 치여 꼴까닥 하고 숨을 거둘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오래오래 산다고 더 즐거울는지 모르고, 일찍 흙으로 돌아간다고 더 슬플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되어도 삶이고, 저렇게 되어도 삶입니다. 삶이란, 어떠한 길에서 뒹굴거나 맴돌더라도, 내 목숨을 고이 여기면서 즐기는 하루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에 나오는 어머님은 일찍 숨을 거두는 바람에 아이들이 한껏 큰 모습을 못 보아서 서운할까요. 이제 좀 귀엽게 말꽃을 피우면서 마음꽃 또한 무럭무럭 흐드러지는 모습을 못 보기에 슬플까요. 숨을 거두기 앞서까지 돌보거나 어루만지거나 보살핀 나날로 흐뭇할까요. 그동안 그만큼 얼굴을 보고 살결을 부비며 지냈으니 즐거울까요.


- “하늘이 모르는 물은 눈물을 말하는 거야.” (116쪽)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은 이름있고 힘있으며 돈있는 사람한테나 할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로서는 사람은 죽으면서 사랑을 남긴다고 느낍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손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손가락이 천천히 벌어지는 이때에, 여태껏 고이 움켜쥐던 사랑을 가만히 내려놓으면서 뒷사람들이 더욱 따사롭거나 넉넉히 살아가도록 사랑을 남겨 준다고 느낍니다.

 돈이 아닌 사랑을 물려주는 어버이입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보다 일찍 흙으로 돌아간달지라도 이 아이들 또한 제 어버이한테 사랑을 남기고 떠난다고 느낍니다.

 하늘이 모르는 물처럼, 사람은 한삶을 사랑으로 얼싸안습니다. 하늘이 아는 물처럼, 사람은 온삶을 사랑으로 마무리짓습니다. (4344.1.30.해.ㅎㄲㅅㄱ)


―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 (콘노 키타 글·그림,김승현 옮김,대원씨아이,2010.12.15./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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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한 줄로 읽는 사진 1
 : 문두근 님 시 〈판잣집에서 오키드꽃 피운다〉



.. 우리 대한민국 / 외국의 누가 다녀갈 때 / 빌딩이 서고 / 고층 아파트촌이 생긴다 / 그곳에 살던 철거민들 / 생활을 잃고 / 투사가 된다 // 오늘도 / 타일랜드 사람들은 / 세계의 모든 사람들 보든 말든 / 세계의 모든 사람들 웃든 말든 / 메남강에 붙어 / 판잣집 난간에 / 오키드꽃 피운다 ..  (판잣집에서 오키드꽃 피운다)


 시쓰는 문두근 님이 쓴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혜화당,1993)를 읽으며 무척 좋았습니다. 이 나라에 이러한 시도 있었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판잣집에서 오키드꽃 피운다〉를 읽다가 글월 한 줄 두 줄에 내 눈길을 오래오래 박았습니다.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봅니다. 한국 사진쟁이들은 나라밖으로 나가서 태국이든 인도이든 티벳이든 베트남에서든 ‘가난한 사람들 모습’을 마음껏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렇게 담은 사진으로 ‘가난한 나라 사람들’ 헐벗은 모습을 선보인다든지 가난하면서도 웃음꽃 잃지 않는 모습을 알려준다든지 합니다. 때때로 한국땅 가난한 사람들 터전을 찾아가서 이런 사진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내 삶터를 꾸밈없이 들여다보며 담지는 않습니다. 사진으로든 그림으로든 글로든 내 삶터를 스스럼없이 밝히지는 않습니다.

 래미안 아파트에서 살며 래미안 이름 석 자 도드라지게 보이는 글자를 사진으로 아리땁게 찍어서 나누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자이 아파트에서 살며 자이 이름 두 자 돋보이도록 사진으로 어여삐 찍어서 사진잔치 여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눈오고 비오며 바람불고 안개낀 날마다 다 달리 보일 ‘아파트 높은 벽 글씨’ 하나 새삼스레 돌아보며 사진으로 나누는 사람은 못 봅니다. 그러나, 나라 안팎 가난한 사람들 집터를 속속들이 들추듯 들여다보면서 사진으로 찍어서 선보이는 사람은 참으로 많습니다.

 문두근 님 시가 아니더라도, 태국사람은 태국사람으로서 태국땅에서 잘 살아갑니다. 바깥에서 구경온 손님들이 사진을 신나게 찍든 말든 당신들 스스로 좋아하며 알맞게 일구는 삶입니다. 눈치를 볼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즐길 삶입니다.

 이 나라에도 눈치를 볼 삶이 아닌 하루하루 즐길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 동네나 마을이 곳곳에 소담스레 남았습니다. 다만, 이 소담스럽고 보배스러우며 대단한 동네나 마을 가운데 ‘재개발 대상’이 아닌 곳 없을 뿐입니다. 마을사람 스스로 오붓하게 잘 살아가는데, 문화를 하느니 예술을 하느니 하는 이들이 벽에다 페인트로 죽죽 그림을 그려 놓습니다.

 우리는 무슨 사진을 하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무슨 모습을 바라보는 사진쟁이인가요. 우리는 어떻게 사진을 찍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무슨 모습을 사랑스레 바라보는 사진쟁이인가요. 우리는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껴안는 삶으로 마주서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모슨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어 사진으로 엮을 줄 아는 사진쟁이인가요.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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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 봐서 아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철없던 적이 있기 때문에 철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보곤 합니다. 왜냐하면 손가락 끝이 다친 적 있기 때문에 손끝 한 번 다치면서도 얼마나 고달픈가를 깨달으니까, 손끝이 아닌 팔 하나 잘린다든지 다리 하나 부러진다든지 하면 어느 만큼 괴로우면서 힘든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끝이 아파 보았기 때문에 팔이 잘리는 사람 아픔과 괴로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렴풋이 헤아릴 뿐입니다. 똑같이 팔이 잘려서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팔이 잘리는 아픔을 알 수 없어요.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떠할까요. 같은 책을 읽었기에, “나, 그 책 읽어 봐서 아는데요.”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같은 영화를 보았기에, “나, 그 영화 한번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사랑을 해 본 사람이기에, “나, 사랑 한번 해 봐서 아는데요.” 하고 읊을 수 있을는지요.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나, 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아는데요.” 하고 말해도 괜찮을까요. 아이를 둘이나 셋, 넷이나 다섯, 여섯이나 일곱을 키운 어버이는 아이키우기를 한결 잘 안다 할 수 있는가요.

 야구를 일곱 해쯤 지켜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만할까요. 야구를 열일곱 해쯤 돌아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할 수 있나요. 야구를 스물일곱 해나 서른일곱 해, 또는 마흔일곱 해나 쉰일곱 해쯤 바라본 사람은 야구를 얼마나 잘 안다 해야 하나요.

 깊이 있게 보아서 좋을 때가 있고, 두루 보아서 나을 때가 있으며, 오래 보아서 훌륭한 때가 있습니다. 살짝 보아서 알맞을 때가 있고, 사랑스레 보아서 기쁠 때가 있으며, 따스히 보아서 즐거울 때가 있어요. 읽기에 따라 다른 삶이고, 읽는 매무새에 따라 새로운 삶이에요.

 읽어 본 사람은 틀림없이 읽었기에 아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아직 못 읽었거나 곧 읽으려 하거나 애써 읽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 나름대로 무언가 가슴으로 느끼거나 보듬으려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모든 책은 앎(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책읽기는 앎읽기(지식쌓기)가 아닙니다. 모든 책은 삶이고, 모든 책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삶을 읽는 책이기 때문에, “읽어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 봐서 아는데.” 같은 말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이한테는 여태껏 살아 봤으니 “그이가 살아온 나날”을 알겠지만, 이이한테는 “이이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은, 참말 앞으로 살아 봐야 아니”까 어느 누구도 이이한테 ‘네 앞날이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거나’ 하고 섣불리 짚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이가 살아왔다는 나날조차 그이 스스로 얼마나 잘 안다 밝힐 수 있을는지요.

 이렇게만 살라는 법이 없는 나날처럼, 이렇게만 읽으라는 법이 없는 책입니다. 책은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대로 읽습니다. 책은 사람들마다 꾸리는 삶자락대로 엮어서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에 따라 책을 받아들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내 오늘 하루를 고이 담아 책을 내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삶에 따라 내 삶을 읽지, 책을 쓴 사람 삶을 읽지는 않거나 못합니다. 책을 쓴 사람 삶은 책을 쓴 사람만 압니다. 그러니까, 책을 쓴 사람 넋과 마음을 ‘책 읽는 이’가 알 수 없을 뿐더러, 어설피 비평이나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나는 이 책 하나를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어떻게 돌보겠다’ 하고만 말할 뿐입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란 없습니다. 좋은 내 삶이냐 나쁜 내 삶이냐만 있습니다. 아, 어쩔 수 없이 이 땅에는 나쁘다 할 만한 책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나쁘다 할 만한 책들조차, 이 책을 쥐어든 사람이 어떻게 삭여내거나 곰삭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사랑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사랑을 바꿉니다. 삶이 책을 바꾸고, 책이 삶을 바꿉니다.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는 책이란 내 삶을 사랑하는 넋이 더욱 따숩고 넉넉하도록 이끌고, 사랑하는 넋으로 보듬으며 꾸리는 내 삶은 내가 손에 쥔 책이 사랑씨를 고이 나눌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 줍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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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과 책읽기


 헌책방에 다니기 때문에 헌책을 따로 보고 새책을 갈라 보는지 모릅니다. 헌책방에 다니지 않았다면 모든 책을 똑같이 책으로만 바라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헌책방에 다니기 때문에 모든 책은 책이면서 헌책이요 새책이라고 새삼스레 깨닫는지 모릅니다.

 나 스스로 맨 처음에 새책으로 장만하여 읽었으나, 어느덧 스무 해가 흐르며 헐고 낡아 헌책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 책을 다시금 읽습니다. 선물을 받은 새책이지만, 하루이틀사흘나흘 흐르며 차츰 손때를 타서 헌책 이름이 붙는 책을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남긴 책을 돌아보면서, 당신이 젊은 날 읽었기에 아주 헌책처럼 보이는 빛바랜 예전 책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습니다. 이오덕 선생님도 헌책방마실을 하셨지만, 당신이 1950년대나 1960년대나 1970년대에 새책으로 사서 갖추었던 책을 오늘날 돌아볼 때에, 이 책은 무슨 책이라 해야 할까요. 멋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쉰 해나 예순 해를 한 사람 책꽂이에서 곱게 먼지 먹은 책이란 ‘헌책’일까요 ‘새책’일까요 ‘책’일까요.

 내가 읽은 책을 내 아이가 읽을 무렵이면, 이 책은 어떠한 책이 될까 헤아려 봅니다. 내가 읽은 책을 내 아이가 나중에 읽고 싶다 할 때에는 아빠 책꽂이를 살피면 되지만, 아빠가 이 책들을 헌책방에 내놓는다든지 다른 사람한테 넘긴다면, 아이로서는 도서관보다 헌책방을 뒤져야겠지요. 우리 나라 도서관에서는 쉰 해나 예순 해쯤 묵은 책을 잘 건사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쉬 빌려 주지 않으니까요. 우리 나라 도서관은 갓 나온 책이랑,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을 빌려 읽는 곳이지, ‘책’을 살피거나 나누는 자리는 못 됩니다.

 아빠 된 사람은 그때그때 나오는 책들을 건사하면서 아이한테는 헌책이 될는지 모를 책을 차곡차곡 갖춥니다. 아빠 된 사람은 틈틈이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아빠가 처음 마주하여 읽을 때’부터 헌책이라 할 만한 책을 알뜰살뜰 돌봅니다.

 인터넷을 뒤지며 숱한 자료와 정보를 찾아보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내 살림집과 내 자그마한 시골 도서관 책꽂이에서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살포시 뽑아들어 찬찬히 넘기며 읽을 수 있는 책을 모시는 일이 한결 좋습니다.

 사람을 모시고 삶을 모시기에 책을 모십니다. 옆지기를 섬기고 아이를 섬기니까 책을 섬깁니다. 시골 삶자락을 받들고 논밭과 멧골짝을 받들면서 저절로 내 삶을 함께 받듭니다.

 책만 사랑할 책사랑은 없다고 느낍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어우러지는 삶터에다가 뭇 푸나무와 짐승과 벌레가 복닥이는 터전을 사랑할 때에 바야흐로 책사랑으로 고이 이어진다고 느낍니다.

 어젯밤 느즈막히 잠든 아이가 일어나면 함께 먹으려고 새벽부터 조용히 마련해 놓은 밥과 국을 오늘은 언제쯤 먹을까 손꼽습니다. 홀로 일어나 쌀을 씻어 불리고 밥을 안치는 동안, 밥 익는 냄새 구수히 배어듭니다. 내 두 손으로 모아 쥘 밥그릇이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손으로 서툰 숟가락질을 할 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엄마 배에서 잠자는 둘째랑 둘째를 아기방에 따스히 보듬는 옆지기랑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곁에, 꽤나 어지러이 늘어놓기는 했으나, 참말 고마우며 사랑스러운 책이 가득가득 있습니다. (4344.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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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눈물 2011-01-30 22:26   좋아요 0 | URL
야나기 무네요시 책을 찾아보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들이 너무 많네요. 주욱 읽다 제가 좋아라하는 헌책방 애기가 있어 댓글을 씁니다.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마음가짐이 너무 좋아 보이십니다. 저도 배워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도서관은 갓 나온 책이랑,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을 빌려 읽는 곳이지,‘책’을 살피거나 나누는 자리는 못"된다고 하시는 님의 말 십분 동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단순히 책을 찾아보고 읽는 곳이 아니라 책을 두루 살필고 더듬을 수 있는 곳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설 잘 보내세요^^ 종종 찾아 뵙겠습니다!!

파란놀 2011-01-30 23:33   좋아요 0 | URL
도서관마다 '책 새로 살 예산'이 모자라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도서관도 '인건비'로 돈을 가장 많이 쓰고, 다음이 전기세나 뭐 이런 데에 돈을 많이 들이거든요. 처음부터 너무 큰 건물로 지으니 건축비랑 인건비로 다 쏟아붓고 말아요... 참으로 책을 책답게 건사할 도서관으로 일구는 삶이 되자면, 우리부터 삶을 잘 꾸려야 할 텐데요...

말씀 고맙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빚은 글에 담긴 좋은 빛을 사람들이 잘 읽고, 모자라거나 아쉬운 대목은 우리가 즐거이 보듬어 주면 기쁘겠어요~~
 

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일말


 낱말책에는 ‘밥하기’하고 ‘밥짓기’라는 낱말이 안 실립니다. 이 책을 여기까지 읽은 말사랑벗들은 이제 어렴풋이 느끼리라 생각하는데, 남녘땅에서 낱말책에 안 실린 낱말은 글로 적바림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는지 떠오르나요.

 낱말책에 안 실린 낱말 ‘밥하기’하고 ‘밥짓기’는 남녘나라 말법에 따른다면 ‘밥 하기’하고 ‘밥 짓기’처럼 띄어서 적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가지 낱말을 띄어서 적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느 사람들 또한 두 가지 낱말을 띄지 않습니다. 그저, 책이나 신문 같은 데에서는 두 낱말을 으레 띄어 놓습니다.

 ‘밥하다’라는 낱말은 낱말책에 실립니다. 그래서 ‘낱말책에는 안 실린 낱말’이기는 하지만 ‘밥하기’는 살그머니 붙인 채 적바림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낱말 씨끝이 바뀐다고 여기면서 ‘밥하- + -기’로 여기면 됩니다.

 ‘일하다’와 ‘놀다’라는 낱말도 낱말책에 실립니다. 이리하여 ‘일하기’랑 ‘놀기’ 또한 넉넉히 붙여서 쓸 만합니다.

 날마다 먹는 밥이요, 날마다 내 손으로든 어머니 손으로든 할머니 손으로든 아버지 손으로든 밥을 차려서 나란히 먹거나 혼자 먹거나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마다 누구나 먹는 밥이고, 날마다 누구나 밥상을 차리지만, 정작 ‘밥하기’ 같은 낱말은 낱말책에 실리지 못합니다. ‘밥짓기’하고 ‘밥짓다’ 같은 낱말도 매한가지입니다.

 낱말책에는 ‘요리(料理)’라는 낱말이 실립니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요리사’입니다. 한자말 ‘요리’ 뜻풀이를 찾아보면 “여러 조리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듦”으로 나옵니다. 다시금 ‘조리(調理)’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이 한자말은 “요리를 만듦”을 뜻한답니다.

 다시금 무언가 어렴풋이 느낄 말사랑벗이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요리를 만듦”이 ‘조리’라 한다면, 이 말풀이는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요리’란 “음식을 만듦”이라고 풀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풀이를 살피면 “조리 = 음식을 만듦을 만듦”이 되고 말아요. 거꾸로 ‘요리’ 말풀이도 엉망입니다. “여러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듦”이 ‘요리’가 되거든요.

 한 번쯤 곰곰이 짚어 볼 일입니다. 우리네 낱말책은 낱말풀이가 이다지도 얄궂은데 왜 도무지 바로잡히지 않을까요. 우리들은 우리말을 담은 낱말책을 뒤적일 때에 이 같은 낱말풀이가 얄궂다고 느끼기는 하는가요. 우리는 우리 삶을 알뜰살뜰 낱말책에 담아서 즐거이 나누는 길을 걸을 수 없는가요.

 요리를 하는 사람은 요리사라면, 밥을 하는 사람은 ‘밥꾼’이나 ‘밥지기’입니다. 살림을 하는 사람이 살림꾼이듯, 밥짓기 하는 사람은 밥꾼이거나 ‘밥짓기꾼’입니다. 농사를 짓기에 농사꾼이라면, 농사를 짓는 일이란 ‘농사짓기’나 ‘농사하기’입니다. 사람들 누구나 밥을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밥하기와 밥짓기라는 낱말만큼 대수로우면서 소담스럽다 할 낱말이 ‘농사짓기’하고 ‘농사하기’이지만 이 낱말도 낱말책에는 안 실립니다. 그래도 밥만 먹고 살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지, 고기를 잡는다는 ‘고기잡이’는 낱말책에 실려요. 옛말로 ‘농사(農事)’는 ‘여름지이’라 했고, 농사짓는 사람을 일컬어 ‘여름지기’라 했습니다. 어쩌면 토박이말로 ‘여름지이’와 ‘여름지기’와 ‘여름짓다’를 살릴 수 있을 테고, 이러한 낱말을 살린다면 아주 반갑습니다. 다만, 살리는 낱말은 살릴 낱말이고, 두루 쓰는 낱말은 두루 쓰기 좋도록 가꾸어야 아름답습니다.

 우리 둘레 말삶을 더 돌아보면, ‘식수(食水)’나 ‘생수(生水)’란 낱말은 버젓이 쓰이면서 낱말책에 냉큼 실리지만, ‘마실물’이나 ‘먹는샘물’ 같은 낱말은 여태껏 낱말책에 안 실립니다. ‘생수’는 일본말이기에 ‘먹는샘물’로 고쳐써야 한다고 정부에서 틀을 세운 지 한참 지났으나, 이러한 틀을 낱말책에 알뜰히 담지 못해요. 그나마, ‘먹을거리’는 낱말책에 실어 놓으나, ‘마실거리’는 낱말책에 없습니다. 고작 ‘음료수(飮料水)’ 한 마디만 실립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삶을 꾸리는 여느 사람이 일하고 놀며 복닥이면서 주고받는 말마디가 제대로 사랑받지 못합니다. 말글학자는 말글학자대로 사랑하지 않고, 여느 자리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인 우리들 또한 알맞고 착하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1. 손빨래 : 빨래는 예부터 손으로 했습니다. 기계로 빨래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나라에 빨래기계가 들어온 지 몇 해쯤 되었으려나요. 기껏 스무 해 남짓 되었을까 싶고, 서른 해나 마흔 해 앞서만 해도 빨래란 으레 손빨래입니다. 오늘날에는 손으로 빨래하는 일이 거의 자취를 감추다 보니, 사람이 손으로 하는 빨래는 ‘빨래’가 아닌 ‘손빨래’가 됩니다. 발로 밟는 이불빨래를 가리켜 ‘발빨래’라 하지 않는데, 여느 빨래만큼은 ‘손빨래’가 되고 맙니다. 기계로 빨면서 ‘기계빨래’라 하지 않을 뿐더러, 빨래를 해 주는 기계는 ‘빨래기계’가 아닌 ‘세탁기(洗濯機)’이고, 빨래를 해 주는 곳은 ‘빨래집’이 아닌 ‘세탁소(洗濯所)’입니다. 


2. 아이키우기 : 모든 어버이는 아이를 낳아 기릅니다. 내 아이를 낳아 기르든 다른 살붙이나 이웃 아이를 보살피든 어버이 되는 사람은 아이를 맡아 기르며 돌봅니다. 아이를 키우니까 ‘아이키우기’요, 아이를 기른다면 ‘아이기르기’이며, 아이를 돌본다면 ‘아이돌보기’인데, 학문이나 보건이나 복지로 넘어서면 ‘육아(育兒)’가 됩니다. 


3. 구멍가게 : 조그마한 가게라서 구멍가게입니다. 요즈막에는 ‘나들가게’라는 이름을 붙여 마을 작은 살림터를 돕는다고 합니다. ‘나들가게’라는 낱말도 좋습니다. 마을에 있기에 ‘마을가게’라 할 만하고, ‘동네가게’라 해도 잘 어울립니다. ‘수퍼’나 ‘수퍼마켓’은 미국에서 찾을 노릇입니다. 


4. 저잣거리 : 크고작은 도시와 온 나라 시골마다 ‘마트(mart)’가 치고 들어왔습니다. 시골에서마저 농협은 ‘하나로’라는 고운 이름을 앞에 달기는 하나, 뒤꼭지에는 ‘마트’를 붙여 ‘하나로마트’입니다. 아직 시골 저자는 ‘장(場)마당’이라 하는데, 날마다 가게를 여는 장삿집이 모인 도시에서는 ‘저자’나 ‘저잣거리’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재래시장(在來市場)’이라는 이름만을 씁니다. 


5. 밥집 : 머리카락을 손질하거나 깎을 때에는 머리집이나 머리방에 갑니다. 책을 볼 때에는 책집이나 책가게나 책방에 갑니다. 차를 마시려고 찻집에 갑니다. 술을 자시는 어른은 술집에 가요. 밥을 밖에서 사다 먹을 때에는 ‘밥집’에 갑니다. 


6. 밤샘 : 지난날에는 공장 일꾼들한테 밤새도록 일을 시키며 들볶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밤새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에 빠듯하거나 아이를 가르치기에 벅차다고 합니다. 이른바 ‘철야(徹夜)’와 ‘야근(夜勤)’입니다.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쓰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나날이 되고 맙니다. 일도 공부도 놀이도 온통 밤샘입니다. 밤일이요 밤공부요 밤놀이입니다. 


7. 풀약 : 나와 내 살붙이가 먹을 밥을 거두는 땅이라 한다면 그리 안 넓어도 되고, 애써 풀약을 칠 까닭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굴려야 하고, 아이들을 대학교까지 넣어야 하며, 온갖 물건을 사들여야 하니까 더 넓은 땅을 일구어 더 많은 곡식을 거두어야 하고, 이러는 동안 풀베기나 풀뽑기를 손으로 할 수 없어 풀약을 칩니다. 풀은 풀약을 먹으면서 죽고, 풀하고 이웃한 곡식은 풀약을 함께 먹고 자라면서 사람들 몸뚱이에 수은이며 납이며 카드뮴이며 차곡차곡 쌓입니다. 삶이 고단하면서 살림살이가 고단하고, 살림살이가 고단하다 보니 일거리가 고단하고, 일거리가 고단한 탓에 넋 또한 고단한 만큼, 나날이 나누는 말마저 고단하고야 맙니다. (4343.12.3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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