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건축 7 - 수원성
주명덕 사진 / 광장 / 1981년 10월
평점 :
품절




 오늘을 찍는 발자국인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8] 주명덕, 《수원성》(광장,1981)



 수원에는 수원성이 있습니다. 수원성은 자그마한 성입니다. 자그맣지만 야무지고, 한국전쟁 때에도 씩씩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수원성은 수원시내 한복판에 자리합니다.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고, 수원성을 따라 버스며 자동차며 수없이 오고갑니다.

 우리 나라에 사진이 들어온 첫무렵부터 수원성은 으레 좋은 사진감이 되었습니다. 한국사람이건 일본사람이건 서양사람이건 수원성을 즐겨찍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사진 가운데에도 수원성 둘레 모습을 담은 사진을 어렵잖이 찾아봅니다. 꽤 예전 사진을 찾아보면, ‘오늘날 보기에 수원성이 몹시 작아 보이’지만, 지난날 수원성 둘레 풀집들이 지붕 낮은 채 빙 두른 모습을 볼 때면, 이 수원성은 ‘하나도 안 작은 성’이었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고 찾아서 살피면 수원성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원사람 가운데 수원성을 뒤로 하며 사진 한 번 안 찍은 사람은 드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수원성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구석구석 낱낱이 사진으로 담아내어 사진책으로 일구는 일 또한 드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성곽을 사진으로 담는 분이 꽤 있기는 하지만, 우리네 성곽을 담은 사진이 사진책으로 나오는 일도 퍽 드물기는 합니다. 더욱 깊이 담아내지 못한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책이 못 나온다 할 만합니다. 애써 사진책을 내놓지만 즐거이 장만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출판사로서는 책 만드는 돈을 거둘 수 없으니 선뜻 마음을 기울이지 못한다 할 만합니다. ‘기록’으로 찍거나 ‘예술’로 담기는 하지만, 정작 성곽을 성곽답게 바라보거나 껴안으며 사진으로 빛내기까지는 못하는 탓인지 모릅니다.

 중국 만리장성을 사진으로 일구는 모습을 보면 무척 남다릅니다. 만 리라는 길이가 되는 기나길고 크디큰 성이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사진으로 일굴 때에 무척 남다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큰 성이건 작은 성이건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마음이 대수롭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조금 더 깊이 보듬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성이든 큰 성이든, 모습이 알뜰히 남아 사람들 삶터에 절로 녹아든 성이든 산속 깊이 파묻힌 성이든, 사진으로나 그림으로나 글로나 알뜰살뜰 실어내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주명덕 님이 담은 《수원성》(광장,1981)을 봅니다. 이 사진책이 처음 나오던 때에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저로서는 이 사진책이 새책방에서 자취를 감춘 지 서른 해가 지나고서야 헌책방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 가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 이 사진책을 그무렵에 새책으로 한 권 사 준 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사진책을 1981년부터 서른 해가 지난 어느 날 헌책방에서 몹시 고맙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책 《수원성》은, 수원에 깃든 수원성을 차분히 돌아봅니다. 멀고 가까이, 코앞에서 밀찍이서, 겨울날 여름날, 온갖 얼굴 온갖 느낌이 감도는 수원성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다만, 1981년에 나온 사진책 《수원성》은 수원성을 ‘건축 테두리’에서만 살핍니다. 건축 테두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 수원성이 깃든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까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마흔여덟 쪽짜리 얇은(그렇지만 판짜임은 큰) 사진책에서 풀이말을 뺀 마흔두 쪽으로만 사진을 담으니까, 건축 출판사에서 내놓은 이 사진책이 건축 테두리 아닌 사람 테두리에서 수원성을 담기란 어렵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람 테두리를 살피지 않았다고 여길 만합니다. 사람 테두리에서 수원성을 다룰 사람은 나중에 누구라도 하면 될 노릇이고, 으레 수원성을 ‘한국 건축 발자취’에서 놀랍고 빼어난 예술이라고 일컫지만, 막상 얼마나 놀랍거나 빼어난 예술인가를 드러내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은 많지 않습니다. 참 드물다고 해야 옳습니다.

 수원성 둘레에서 살아가며 수원성을 마주하고 지낸 이야기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길어내는 수원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이들 가운데, 수원 가까이에서 사는 터라 수원마실을 즐기면서 수원성 이야기를 적바림해 내는 이들은 그다지 안 보입니다. 다 안다 할 만하고, 이름이야 흔히 듣는다지만, 수원성을 가까이와 멀리에서 곰곰이 되새기면서 사진꽃으로 피우는 손길이 아주 드물어요.

 사진책 《수원성》은 이 한 권으로 수원성에 깃든 모든 이야기 실타래를 풀지 않습니다. 48쪽짜리 얇은 책에 걸맞게 이야기를 보듬습니다. 1981년까지 우리 스스로 일군 땀방울 값만큼 알뜰히 엮습니다.

 서른 해가 지난 오늘날 이 자리에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수원성》 이야기를 이때 1981년부터 새삼스레 꾸준하게 더 이었으면 2011년에는 어떠한 사진이야기가 꽃을 피울 만할까 하고.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사진으로 읽는 수원성 이야기’를 누군가 바지런히 적바림했으면, 수원성을 말하는 사진으로뿐 아니라, 한국 성곽을 말하는 사진으로도, 또 한국 성곽뿐 아니라 세계 성곽을 말하는 사진으로도, 더욱이 성곽뿐 아니라 건축 사진으로도, 이리하여 사람들 살림터를 말하는 사진으로도, 마침내 사람을 말하는 사진으로도 참으로 돋보이면서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새로운 사진삶을 이룩했겠지 하고 느낍니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어제를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앞날도 찍지 못합니다. 사진은 오로지 오늘만 찍습니다. 사진은 오늘 하루 내가 살아가는 발자국을 가만가만 찍습니다. 오늘을 찍어 하루가 흐르고 나면 오늘 찍은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는 삶자국입니다. 잘난 기록이나 못난 기록이 아닙니다. 그저, 나 스스로 살아가며 남기는 사진이요 발자국입니다.

 사진이 사진으로 되는 까닭은 돋보이거나 밉보이는 모습을 찍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수수하게 내 삶을 사랑하는 결을 고스란히 담아서 엮기 때문에 사진이 사진으로 됩니다. 누군가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수원성을 알차게 사진으로 담았다면, 이 사진은 틀림없이 훌륭하며 멋진 사진책으로 태어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오늘 2011년부터 2041년까지 누군가 차근차근 새롭게 사진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이러한 사진은 또 이러한 사진대로 2011년부터 2041년까지 아름다운 발자국와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사진책으로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찍어야 하거나 저렇게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2011년에 수원에서 태어난 아이를 안고 수원성 앞에서 한 장 찍고,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식구들이 모여서 사진을 한 장씩 찍기를 서른 해쯤 하기만 해도 멋진 ‘수원성 이야기 감도는 사진’입니다. 이러한 사진찍기를 꾸준히 잇는다면, 한 집안 사람들 살아낸 발자국이 사진책에 알알이 스미겠지요. 2011년부터 2111년까지 이와 같이 사진찍기를 한다면, ‘수원성은 그대로이지만 수원사람은 늘 달라지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사진은 만들지 못합니다. 사진은 꾸미지 못합니다. 사진은 치레하지 못합니다. 사진은 그저 찍을 뿐이고, 사진은 그예 찍기만 하며, 사진은 그대로 찍으며 이야기가 됩니다. (4344.3.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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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수수 말리기


 서울로 볼일을 보러 오다. 여관에서 하룻밤 묵다. 아침에 여관 텔레비전을 켠다. 텔레비전에서는 중국땅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나라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나온다. 나로서는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땅을 내려다볼 일이 없을 테니까, 이러한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그림으로 보는 일이 놀랍다. 아, 이렇게 보이는구나.

 중국땅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나오는데, 중국에서는 옥수수를 거두어 말려야 할 때에 널따란 고속도로를 가득 채우도록 펼쳐서 말리기도 한단다. 이리하여 옥수수 거둠철에는 고속도로를 막아 차가 못 다니도록 한단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시골에서도 곡식을 말리느라 찻길 한켠에 죽 펼치곤 한다. 도시에서도 골목길 한켠은 고추를 말리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어느 골목은 한 사람이 지나갈 틈만 남기고 돌계단까지 빼곡하게 고추를 널곤 한다.

 다시금 생각해 본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서 죽고 만 효순이와 미선이를 기리며 ­‘미군부대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 삶’을 담은 사진책 《어머니의 손수건》(이용남 사진,민중의소리 펴냄)이 떠오른다. 이 사진책을 들여다보노라면 미군부대가 군사훈련을 하는 시골마을 사람들은 거둠철에 곡식을 찻길 한켠에 널어서 말리는데, 미군부대 장갑차나 탱크는 일부러 곡식을 깡그리 밟으며 지나간단다. 한국으로 온 미국 군인 가운데에는 미국땅에서 농사꾼도 있을 테고, 미국땅에서 농사짓는 어버이를 모시는 이도 있을 텐데, 왜 미국 군인은 한국에 와서 이런 몹쓸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까.

 아니, 이 나라 정부는 왜 나라밖 군대를 제 나라에 고이 모시는가. 아니, 이 나라 정부는 가을날 거둠철에 농사꾼이 곡식을 말리느라 찻길에 죽 펼쳐놓아야 할 때에, 기쁘게 ‘자, 가을날 거둠철이니까 여기 고속도로는 막겠습니다.’ 하고 외칠 수 있는가. 시골길도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깔리는데, 가만히 헤아리면 이 시골길이란 지난날 농사꾼들이 곡식을 말리던 흙길이었다. 이 흙길에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덮이며 자동차가 오가고, 시골사람 또한 자가용을 마련해서 타고 다닌다. 이제 곡식은 길바닥에 펼쳐서 말리기보다 기계를 써서 말린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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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 111권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 111권을 사다. 예전부터 이 만화책을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예 안 보면서 지냈다. 50권쯤 나왔을 무렵 ‘아이고, 50권이나 되는 만화책을 언제 다 사서 보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지나치고 보니 어느새 100권이 나왔다. 그래, 100권까지 되고 보니 ‘으악, 100권이나 되면 이 만화책을 다 장만하자면 돈이 얼마가 되지? 눈알이 핑핑 도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나고 보니, 이제는 111권까지 나온다.

 예쁘게 쌓인 만화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만화책방에 찾아간 나는 《아빠는 요리사》 111권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본다. 바로 이 자리에서 이 111권부터라도 읽자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마 머잖아 150권이 나오는 모습을 볼 테며, 어느덧 200권까지 나오는 모습을 마주할 테지.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면, 나로서는 내 눈을 고이 감아 흙으로 돌아가는 때까지 《아빠는 요리사》를 한 권조차 못 보며 지내겠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 앞선 백열 권은 못 읽을 수 있다. 이제부터 읽으면 되지. 만화책방 일꾼한테 여쭈니, 앞쪽 1권부터 100권 사이에는 다시 안 찍는 책이 있기 때문에 짝을 다 맞추기란 몹시 힘들단다. 그러니까, 앞엣권을 사자고 한다면 배부른 꿈일 수 있다. 앞엣권을 빈틈없이 장만해서 읽어도 기쁠 테지만, 111권부터 읽어도 기쁜 일이 되리라 본다. 바야흐로 111권째를 그린 만화쟁이 한 사람 손길과 마음길을 곱씹으면서 이 한 권에 깃든 사랑과 꿈을 내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집에서 밥하기를 도맡는 아버지로서, 나는 우리 살림집에서 우리 살붙이한테 어떠한 밥을 어떠한 맛이 나도록 어떠한 손품을 들여 얼마나 알뜰살뜰 사랑스레 차리는가를 돌아본다. 아이가 밥상머리에서 딴짓을 하거나 제대로 말을 안 듣는다며 골을 부리면서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느냐 되씹는다. 아버지로서 사랑을 담아 밥상을 차리면 아이 또한 시나브로 아버지 사랑을 느끼면서 즐거이 먹지 않겠는가. 채근한대서 더 맛나게 먹을 수 없다. 닦달하거나 나무란대서 아이가 밥을 더 기쁘게 먹을 수 없다. 차리는 마음은 차리는 마음대로 웃음으로 차리고, 차린 밥상 앞에서 다 함께 조용히 비손을 하면서, 오늘 우리한테 좋은 먹을거리가 되어 준 목숨한테 고맙다고 꾸벅 절을 하면 넉넉하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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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완


 백기완 님이 어느 땅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 막상 떠올려 보자니 잘 생각나지 않는다. 황해도였던가 평안도였던가. 황해도가 아니었나 싶은데, 함경도이든 전라도이든 크게 보자면 한겨레 삶터에서 태어난 사람이요, 좁게 보자면 여느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백기완 님이 내놓은 책을 모두 읽었다. 예전 책부터 요즈음 책까지 모두 읽었다. 백기완 님이 쓴 시집 《젊은 날》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가지로 나왔던 판에 따라 다 있다. 예부터 백기완 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고 생각했다. 백기완 님은 ‘당신 고향마을을 몹시 아끼며 사랑하는’ 분이다.

 백기완 님을 일컬어 ‘우리 말을 잘 살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왜 사람들이 백기완 님을 일컬으며 이런 이름표를 붙이는지 알쏭달쏭하다. 백기완 님 책을 제대로 안 읽었기 때문일까. 엉터리로 읽었기 때문일까. 읽다가 덮었기 때문일까. 백기완 님 삶과 넋을 읽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리 말을 잘 살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는 백기완 님한테 걸맞지 않다고 느낀다. 백기완 님은 ‘우리 말을 잘 살리는’ 사람이 아니다. 백기완 님은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마을 사람들이 쓰던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마을, 곧 당신 고향마을 사람들 말마디 가운데 ‘한겨레 삶터’ 곳곳에서 함께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말을 즐겁게 나누는 사람이다. 전라도말을 전라도사람만 쓰거나 경상도말을 경상도사람만 쓰기보다, 서로서로 예쁘게 잘 쓰는 말을 다 함께 쓰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생각하며, 몸소 이러한 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백기완 님은 서울말을 표준말로 삼는 흐름을 달가이 여기지 않는다. 서울사람이 예부터 서울에서 살아오며 쓰던 말이 오늘날 서울말이 아니기도 할 뿐더러, 지식인들이 표준말이건 서울말이건 한국말이건 너무 좁다랗게 옭아매는 모습을 몹시 안타까이 바라본다. 우리가 쓸 말이란 우리 겨레가 저마다 뿌리내린 고향마을에서 살가이 주고받는 말을 한껏 북돋우면서 나누는 말이어야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이 백기완 님이라고 느낀다.

 백기완 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 말을 잘 살려서 쓴다고 뽐내지 않는다. 백기완 님은 당신이야말로 우리 말을 알뜰히 사랑한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당신 고향마을 사람들 구성지며 착한 말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온몸으로 아낀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인천사람으로서 인천말을 한다. 인천말은 부천말이나 수원말하고 다르다. 인천말은 서울말이나 경기말하고 다르다. 수원사람이 쓰는 수원말은 수원말대로 곱다. 내가 쓰는 인천말은 내 인천말대로 곱다. 더 곱거나 덜 고운 말이란 없다고 느낀다. 서로서로 똑같이 고울 뿐 아니라, 서로서로 나란히 예쁘다. 고운 사람으로서 고운 넋에 걸맞게 고운 말을 쓴다. 예쁜 삶을 사랑하면서 예쁜 꿈을 품고 예쁜 글을 쓴다. 백기완 님은 당신 고향을 예쁘게 사랑하며 곱게 아끼는 푸근한 할아버지이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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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차와 책읽기


 서울 홍대 앞에서 전철을 내린다. 사람들이 참 미어터진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 가운데 안 바쁜 사람은 아주 느리게 걷는다. 느리게 걸으면서 뒷사람 가운데 바쁜 이가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걸을 때에는 자리를 조금만 차지하면서 한쪽으로 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복판을 널따랗게 차지하며 여럿이 손을 나란히 잡으면서 걸으니, 이리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저리 빠져나가지도 못한다. 미적거리는 앞사람 궁둥짝만 멀뚱멀뚱 올려다보면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끙끙거려야 한다.

 나 또한 이 미어터지는 사람들하고 똑같이 미어터지는 한 사람이다. 나 또한 사람물결을 이루는 한 사람이다. 바깥으로 나와도 길에는 사람으로 꽉 찬다. 참 놀란다. 언제 보아도 놀라는 모습이다. 서울에는 어인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 좁은 곳에 어쩜 이렇게 복닥거리면서 서로서로 만나거나 사귀거나 어울릴 수 있는지 궁금하다.

 사람숲을 헤치고 만화책방에 들어간다. 만화책 28000원어치 고른다. ㅇ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만화책 두 권을 살까 하고 집어들다가는 150쪽이 안 되는 얄팍한 판인데 자그마치 12000원이나 붙은 모습에 깜짝 놀란다. 얌전히 내려놓는다. ㅇ출판사는 무슨 만화책을 이렇게 비싸게 찍어서 내놓을까. 더 값나가는 종이에 만화를 찍는다고 만화책 품격이 올라가는가. 여느 만화책은 물건값이 올랐어도 요즈음 4200원인데, ㅇ출판사는 왜 이리 비싼값을 버젓이 붙이는가. 여느 만화책 세 권 살 만한 값을 양장도 아니요 애장판도 아니며 빛깔그림이 들어간 만화도 아니면서 지나치게 비싸게 값을 붙인다.

 망원역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책값을 셈한 다음 가방에 넣는다. 헐레벌떡 달려서 길을 건넌다. 푸른불이 깜빡거릴 때에 겨우 찻길 한복판 버스타는곳에 들어선다. 히유, 한숨을 돌린다. 어느 버스를 타야 하나 살핀다. 버스길 알림판을 여러 곳에 붙이면 좋으련만 한쪽에만 붙여놓아서 들여다보기 참 힘들다.

 271번 버스를 탄다. 버스가 들어올 때부터 안에 사람이 꽤 많이 탔다. 타도 되나 고개를 갸웃하는데, 내리는 사람이 제법 된다. 그러면 타고 되겠구나. 두 정류장을 더 가니, 내리는 사람은 적고 타는 사람만 많다. 버스를 모는 일꾼이 새로 타려는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한다. “뒷차 금방 오니까 뒷차 타세요. 너무 밀려요.” 그렇지만 뒷차를 기다려 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이 버스에 오른다. 가뜩이나 미어터지는 버스는 더욱 미어터진다.

 내가 버스에 타려 할 때에 버스 일꾼이 뒷차를 타라 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바삐 가야 한다면 그냥 탔을까. 곰곰이 헤아린다. 음, 나도 그냥 버스에 오르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까. 옆지기하고 아이랑 함께 마실을 와서 서울버스를 타야 하는 몸이었으면 어떠했을까. 아무래도 나는 미어터지는 차를 타지 말고 텅 빈 뒷차를 타라는 버스 일꾼 말을 따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뒷차를 기다리다 보면 ‘버스 일꾼 말처럼 뒷차가 금세 오기’도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뒷차는 올 생각을 않는’ 때가 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때를 맞추어 가야 하기는 하지만, 서울에는 버스도 많고 차도 많으니까 그냥 기다려 보겠지. 그러나, “뒷차 타셔요”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들다고 느낀다. 겪어 보니 그렇다.

 시골집으로 옮기기 앞서를 떠올린다. 아직 인천에서 살아가던 때, 식구들과 함께 마실을 간다며 시내버스를 기다리던 일을 떠올린다. 시내버스에 사람이 꽉 차면 으레 이 꽉 찬 차를 보냈다. 좀 홀가분한 뒷차를 기다렸다. 꽉 찬 버스가 지나가면 으레 뒷차는 텅 비기 마련이요, 곧 새로 오기 일쑤인데, 이러하지 않을 때도 꽤 되지만, 홀가분한 뒷차가 금세 오는 적도 잦다.

 나는 새로 나오는 책을 그때그때 읽는 일을 좋아한다. 이와 함께, 새로 나오는 책을 한두 해쯤 묵힌 다음 읽는 일도 좋아한다. 때로는 다섯 해나 열 해쯤을 기다린 끝에 읽기도 한다. 모든 새로 나오는 책을 모두 그때그때 맞추어 읽을 수 없기 때문이요, 내 마음밭을 차분히 가다듬은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내 가슴이 어느 책 하나를 받아들일 만큼 넉넉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면, 책상맡에 오래도록 꽂기만 한다. 때로는 나중에 사자고 생각한다. 요사이는 나중에 사자고 생각하기보다는, 어찌 되든 사 놓고 보기 일쑤이다. 요사이는 한두 해쯤 지나고 나서 품절이 된다든지 새책방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는 책이 퍽 많기 때문이다. 헌책방에서는 한 번 지나치면 두 번 다시 못 만나는 책이 매우 많기도 하다.

 그때그때 새로 나오는 흐름에 맞추어 읽는 책은, 새로 나온 느낌을 곱씹으면서 즐겁게 읽는다. 몇 해쯤 묵힌 다음 읽는 책은, 이 책이 참말로 내가 오래도록 곁에 두면서 읽을 만한 책인가를 돌아보면서 즐거이 읽는다.

 어떠한 책이든 한 번 읽고 치운다면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책이든 한 번 읽고 나서 두 번 세 번 잇달아 읽는다든지, 한두 해 뒤에 다시 읽고프다고 생각할 만큼 되어야 비로소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열 번쯤 되풀이해서 읽는다든지, 여러 사람하고 돌려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살 만한 값이나 보람이나 뜻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뒷차 기다리기를 좋아한다. 앞차를 타고 먼저 간다고 해서 나쁘지 않다. 사람들 물결이 앞차로 쏠리면서 버스타는곳에 미어터지던 사람이 싹 줄어 호젓해지는 느낌이 좋고, 한결 홀가분한 뒷차를 가뿐히 타면서 창밖을 느긋하게 내다보는 느낌이 좋다. (4344.3.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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