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 ? 믿음의 글들 47
미우라 아야코 지음 / 홍성사 / 1988년 11월
평점 :
절판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한다
 [헌책방에서 만난 책 5] 미우라 아야꼬,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



- 책이름 :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
- 글 : 미우라 아야꼬(미우라 아야코)
- 옮긴이 : 김갑수
- 펴낸곳 : 홍성사 (1988.11.5.)


 (1) 몸과 마음


 새벽부터 밤까지 집일을 붙잡다 보면, 잠자리에 들 즈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쑤신 곳이 없습니다. 손끝 발끝에다가 머리카락 끄트머리마저 욱씬욱씬합니다. 이렇게 쑤시고 결리며 저릴 때에는 그저 꼼짝없이 드러누워 아이고 아이고 읊을 뿐입니다. 이렇게 몸이 고단해서야 어찌 살아가나 싶으며 겨우 눈을 감습니다.

 그러나 아직 내 몸이 제법 튼튼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잠든 지 너덧 시간이 흐르면, 또는 대여섯 시간이나 예닐곱 시간이 흐르면, 어느 만큼 새힘이 솟습니다. 욱씬거리던 몸이 제법 풀립니다.

 새벽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며 아이 오줌기저귀를 갑니다. 둘째를 밴 옆지기 몸을 조금 주무릅니다. 새벽녘에 새힘으로 일어나 맞이하는 새날을 곱씹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고마운 목숨을 하늘이 베푼 새삼스러운 하루를 즐겁게 맞아들입니다. 사람은 죽지 않고 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죽을 때가 되면 죽겠지만, 살아야 할 때에는 이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떻게든 사는 목숨이고, 어떻게는 살아가면서 내 길을 내 나름대로 걷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 나는 군국주의 시대의 여학생으로서 여러 차례 신사참배라는 것에 끌려나갔다. 전교생 천 여 명이 신사의 뜰에 정렬하여, “경례!” 하는 구령으로 일제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그렇게 머리를 숙일 때 우리 학생들의 가슴속에는 대체 무엇이 떠올랐을까. 오직 구령에 맞추어 머리를 숙이는 것일 뿐, 진심으로 기도하는 자는 없지 않았을까. 남의 구령에 따라 머리를 숙이는 ‘기도’란 아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 참된 신이란 어떤 분인가, 신 앞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면 우리 일본인의 생활은 좀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  (8∼9, 10쪽)


 내 몸이 요즈음보다 한결 튼튼하다고 느낄 때에는 옆지기 몸을 꽤 오래 꾹꾹 누르며 주물렀습니다. 내 몸이 차츰 힘들어진다고 느끼며 옆지기 몸을 못 주무르기도 하고, 애써 주물러도 조금만 주무르고 맙니다. 제 몸이 옆지기보다 더 안 좋은 몸이라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보살필 노릇이었을까요. 아픈 사람끼리 골골거리며 복닥였을까요.

 믿음이란 늘 내 곁에 있다고 느낍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내 몸이라고 느낍니다. 내 곁에 있는 모든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가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봄을 맞이해 새롭게 돋는 풀과 새로 피는 꽃 모두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겨울날 꽁꽁 얼어붙는 날에도 새벽바람으로 일어나 먹이를 찾으며 재잘거리는 멧개가 곧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도시에서도 참새나 까치나 비둘기가 먹이를 찾으러 부산을 떱니다. 도시사람은 도시 비둘기를 가리켜 닭둘기라고 비아냥거리곤 하는데, 도시사람 스스로 자연을 잃고 오로지 돈만 벌면서 밥·옷·집이 어디에서 비롯하여 어디로 흐르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두고는 그닥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닭둘기라는 이름은 닭한테도 비둘기한테도 몹쓸 말이요 모진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들 사람은 스스로 사람다움을 잃거나 잊은 채 살아가면서, 정작 내 삶과 내 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이제는 하나도 안 아름답게 망가뜨리가를 느끼지조차 못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시에 살거나 도시를 좋아하는 일이 궂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내 삶을 읽어야 합니다. 도시를 좋아하든 시골을 좋아하든 내 사람됨을 사랑해야 합니다. 착한 넋으로 착한 몸을 보살피고 착한 말을 나눌 때에 비로소 한 사람 목숨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의 청정함을 모르면 자신의 추악함을 모르는 법이다 … 얼굴을 씻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씻어 하루를 출발한다는 것은 얼마나 상쾌한 일이겠는가 … 상대방과 헤어질 생각이라면 몰라도 일생을 같이할 사람이라면 역시 기도할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을까. 아니, 기도 드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법이 아닐까 …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당했을 때 사람은 단지 슬퍼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을까. 슬퍼해도 좋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다, 좋고 나쁘고를 따질 겨를이 없다. 슬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  (23, 24, 32, 51쪽)


 도시에는 논밭이 없습니다. 논밭 하나 없는 도시이지만 온갖 곡식이 골고루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안 나는 블루베리 같은 먹을거리도 있고, 한겨울에도 수박이 있으며, 딸기철이 되려면 멀었으나 벌써부터 딸기가 백화점이든 마트이든 길거리이든 수북합니다.

 도시에는 짐승우리가 없습니다. 도시에서 소를 치거나 돼지를 치거나 닭을 치거나 개를 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은 짐승우리에서 똥오줌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을 모를 테고, 짐승 한 마리 기르는 일이란 ‘사람 하나 건사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손이 많이 가야 하는 줄을 모릅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은 오직 돈만 벌고 돈만 쓰면서 갖은 곡식과 고기를 즐깁니다. 삼치 한 마리나 참치 한 마리를 어떻게 낚는 줄을 알까요. 갈치 한 마리와 오징어 한 마리를 어떻게 잡는 줄을 느낄까요.

 벼 한 포기가 자라기까지 햇볕과 물과 흙과 바람을 얼마나 맞아들여야 하고, 이 벼를 어떻게 베고 깎아 쌀로 만들어야 비로소 밥거리가 되는가 하는 흐름을 어느 만큼 알는지요. 같은 10킬로그램 쌀자루라 할 때에 몇 만 원 더 얹으면 유기농 쌀을 사다 먹을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유기농 쌀은 돈 몇 만 원이 아닙니다. 유기농 푸성귀 또한 돈 몇 만 원이 아니에요. 유기농이란 똥과 오줌을 삭혀 거름으로 쓰고, 풀약을 안 치면서 사람이 손으로 풀을 하나하나 뽑으며 짓는 흙일굼입니다.

 돈을 치르지 말고 스스로 흙을 만져 볼 노릇입니다. 삼성이라는 재벌회사를 꾸리는 분이든, 한 해에 7억 원을 받는다는 운동선수이든, 은행에서 일하는 분이든, 7급 공무원이든, 초등학교 교사나 교장이든, 누구나 밥을 하루 세 끼니씩 먹는다 한다면, 한 해에 한 번쯤이라도 내가 비우는 밥그릇이 어디에서 비롯하여 어떻게 손질하여 내 밥상에까지 오르는가를 깨닫도록 몸을 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가을철이면 ‘농번기 방학’을 열흘쯤 두어 가을걷이와 가을일에 아이들도 품을 거들도록 했는데, 오늘날에도 도시사람들은 누구나 가을날 한창 바쁠 때에 열흘쯤 회사일을 쉬면서 ‘내 밥을 마무리짓는 가을일’이라도 스스로 겪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영혼의 문제를 놓고 만족할 만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은 그렇게 흔치가 않다. 그것이 언제까지나 나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 때문에, (나는 그들(부모)에게 무엇을 해 드렸단 말인가) 하며 후회하는 것이다 … 진정으로 사람의 생명을 애석해 한다면 그 죽음을 계기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영혼의 문제와 맞서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생명을 아끼는 일이 아닐까 … 한 사람의 죽음에 의해 자신이 크게 변화되는 것이 참으로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을 몇 사람씩이나 사별하면서도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56, 57쪽)


 몸으로 움직이지 않고서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깨닫습니다. 몸으로 아파하지 않고서야 마음으로 아파할 수 없겠다고 깨닫습니다.

 사람이라는 짐승은 생각을 한다기에, 생각으로 ‘아픈 이웃’을 어림하곤 합니다. 가난한 이웃이 얼마나 고될까 하고 생각한다든지, 불쌍한 이웃이 얼마나 힘들까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내 이웃이 얼마나 고되거나 힘든지 몸으로는 모르지만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불우이웃돕기’를 합니다. 저기 멀리, 이웃나라 일본으로도 따스한 손길을 보내자고 이야기합니다. 막상 집 잃고 식구 잃으며 모든 삶뿌리를 잃은 사람한테 물 한 병 보내 주자고 이야기합니다.

 돌이켜보면,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이 살아숨쉬는 동안 틈틈이 이웃돕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쓴 글이 책으로 되어 나올 때에 퍽 많은 사람이 사서 읽어 준 터라, 이렇게 당신이 뜻밖에 벌어들이는 돈을 푼푼이 모은 다음 우체국에서 찾아 십만 원이고 이십만 원이고 그때그때 나누었습니다. 때로는 꽤 목돈이다 싶을 돈을 이런저런 곳에 이름없이 맡기기도 했습니다.

 돈을 벌었기에 돈을 맡긴다 여길 수 있지만, 돈을 벌지 않던 때에도 사랑과 믿음을 나누며 살아오셨기 때문에, 돈이 있을 때에는 돈을 나눌 줄 알던 권정생 할아버지라고 느낍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돈이 없는 대로 무엇을 나누며 살아야 좋은가를 알았겠지요. 내 몸이 아프면서 내 이웃 몸이 얼마나 아파 힘들까를 느낍니다. 머리로 품는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 느낌입니다. 밥을 굶고, 또 밥을 굶으면서, 배고픔이란 얼마나 사람을 미치도록 갉아먹거나 쓰러뜨리는가를 깨달은 사람은 배고픈 이웃한테 내 밥그릇을 내밀어 줍니다. 돈이 있어 밥 한 그릇 사먹으면 되지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밥 한 그릇에 얼마나 고마운 목숨이 깃드는가를 몸이 알기에 살며시 내밉니다.

 안다는 일이란 부질없습니다. 지식을 갖춘다는 일이란 덧없습니다. 더 알든 덜 알든, 사람이라면 살아야 합니다. 삶이란 지식으로 꾸리지 않습니다. 요리 지식이 있대서 밥하기를 잘 해내지 않습니다. 밥을 할 때에 쌀알을 낱낱이 세거나 무게를 꼼꼼이 재면서 하지 않습니다. 밥물을 비이커에 몇 그램인지 따져서 맞추지 않습니다. 전기밥솥에 안치면 그만인 밥하기인 오늘날이라지만, 예부터 아주아주 오랫동안 밥하기는 불을 지펴서 했고, 불을 지필 때에 장작을 얼마나 쓴다든지 불을 몇 분 몇 초 동안 지핀다든지 하는 통계란 없습니다. 그저 나와 내 살붙이가 먹을 밥에 들이는 땀과 품과 사랑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란 삶이요 사랑이며 몸과 마음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란 돈이나 겉치레나 눈치레가 아닙니다.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누리는 삶이고, 몸으로 맞아들여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2) 미우라 아야코 님 문학


 미우라 아야코 님은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라는 책을 씁니다. 일본에서는 1978년에 마무리지은 글이고, 한국에서는 1988년에 옮겨집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은 모두 열두 꼭지로 나누어 열두 갈래로 돌아볼 만한 우리 삶자락에 따라 어떻게 내 삶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두 손길을 모아 비손하면 좋을지를 톺아봅니다.

 비손이란 돈바람이나 이름바람이 아닙니다. 비손이란 나 하나만 잘 되기를 비는 속좁은 꿍꿍이가 아닙니다. 비손이란 나 스스로 그닥 착하게 살아오지 못했다고 뉘우치면서, 이제부터 부디 착하게 살아가도록 힘을 보태어 달라고, 아니 이제부터 착하게 살아갈 테니까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나를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며 북돋우기도 해 달라는 다짐입니다.


.. 남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유연성을 허용하지 않는 매서운 것이다. 자신이 받은 상처는 자신이 아파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함께 앓자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질병을 앓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에 그친다면 질병이란 자신에게 단지 마이너스의 기간을 의미할 따름이다 … 내가 병에 걸린 이상 환자로서 생각해야 할 것은 완쾌에 대한 노력과 동시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  (26, 31, 42쪽)


 미우라 아야코 님은 머리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스스로 ‘머리로 글을 쓸 만큼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미우라 아야코 님은 오래도록 몸앓이를 하며 드러누운 삶에 따라 글을 씁니다. 당신이 몸으로 부대낀 삶만큼 글을 씁니다. 당신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 눈높이라든지, 당신보다 덜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 눈높이로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당신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을 우러르며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당신보다 덜 아픈 사람을 얕잡으며 글을 쓰지도 않아요. 그저 당신이 겪는 아픔만큼 글을 씁니다. 당신으로서는 당신만큼이라는 무게와 깊이와 너비가 이만하다고 들려줍니다. 자랑도 아니지만 들추기도 아니에요. 그저 미우라 아야코 님 삶을 보여주기만 합니다. 아프기만 했던 삶에서 아픈 삶으로 나아지고, 아픈 삶에서 눈물나는 삶으로 달라지다가는, 눈물나는 삶에서 웃는 삶으로 시나브로 옮기는 모습을 글로 찬찬히 담습니다.


.. 기도란 이와 같이 점차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닐까 … 누군가에 대해 원한을 가지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는 없다 … 인생의 가장 깊은 슬픔을 맞았을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우러러 기도할 수가 있단 말인가 …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결코 아니다 ..  (36, 37, 51, 97쪽)


 그렇지만 워낙 아픈 사람이다 보니, 웃는 삶으로 나아가려 하다가도 금세 첫자리로 돌아갑니다. 스스로 바보짓을 하고 난 뒤 내 바보짓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가를 새삼스레 부끄러워 하면서 이 모습 또한 고스란히 적바림합니다.

 예수님은 바보스럽거나 멍청하거나 어리석거나 형편없는 제자들한테 다시금 같은 사랑과 믿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땅 숱한, 아니 이 땅 모든 어머님들은 당신 집식구한테 날이면 날마다 예순 해 일흔 해 여든 해에 걸쳐 하루에 두세 끼니 꼬박꼬박 밥을 차려 주었습니다. 집식구가 밥을 고맙게 먹든 그냥 입구멍에 퍼넣든, 이 땅 모든 어머님들은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청소를 하며 한삶을 보냈습니다.


.. 몇 해 전부터 나는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것은 사람들이 제공되는 요리를 거의 그대로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대로 남은 요리를 종업원은 아낌없이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쏟아 버린다. 음식을 남기는 자도 또한 남은 요리를 처리하는 자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조금도 아까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 도대체 물질적 번영이 가져다준 것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황폐만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물품의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는 자들에게 인간 생명의 존귀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 도시로 나올 때는 타락하리라는 것을 당사자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자기만은 결코 그런 사람과는 다르다 하며 꿈을 안고 도시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몇 해 만에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만큼 인간이 변해 버릴 수 있을까. 사람은 곧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변한다고 한다. 집을 떠날 때 가장 가까운 자는 친구이다. 바로 그 친구가 때로 악의 유혹자가 된다. 도박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어느덧 자신도 도박을 즐기게 된다 ..  (89, 104쪽)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는 성경과 예배당에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성경에도 깃들고 예배당에도 깃듭니다. 성경에 하느님이 안 깃든다든지, 예배당에 하느님이 안 깃들 까닭이 없습니다. 목회자 말씀에도 하느님은 깃듭니다. 신학자 연구와 논문에도 하느님이 깃듭니다. 하느님은 성당에도 깃들고 교회에도 깃듭니다. 하느님은 절집에도 깃들고 여느 살림집에도 깃듭니다.

 우치무라 간조 님이 무교회주의를 외쳤다지만 ‘무교회’ ‘주의’란 없습니다. 하느님이 깃든 자리가 어디인가를 제대로 깨닫자는 외침일 뿐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은 애써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하느님이고, 내 살붙이도 하느님이거든요. 내 밥 한 그릇 또한 하느님이고, 내 옷가지 한 벌 또한 하느님입니다.

 내가 디디는 땅을 이루는 흙알갱이 하나 또한 하느님입니다. 개구리와 뱀만 하느님이겠습니다. 도마뱀과 도룡뇽도 하느님입니다. 밥알 하나와 두부 한 조각과 깻잎 하나 또한 하느님입니다.

 물 한 모금이 하느님이고, 바람 한 점이 하느님입니다. 구름과 무지개를 비롯해서, 큰 물결과 모진 비바람이 하느님입니다.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라는 이야기책은 믿음이 있는 사람한테나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나, 아니 예배당에 나가는 사람한테나 예배당에 안 나가는 사람한테나 곱게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이야기책인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입니다. 날마다 받아들어 내 배를 채우는 밥그릇 하나가 얼마나 고마운지 기도해 보시지 않겠느냐고 말을 거는 이야기책입니다. 날마다 마주하는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를 깨닫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길잡이책입니다.


 (3)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한다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내 몸이 아플 때에 내 이웃을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몸이 그닥 안 아프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못 키운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에 쉽게 병원에 가고 쉽게 약을 사다 먹으니까 자꾸자꾸 이웃사랑을 놓치거나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 어떤 때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이마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도 아름답고, 늙은이를 섬기며 돌보는 젊은이도 아름답다 … 하나님은 죽어야 하는 그 당사자나 주위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시기를 택하여 죽음을 내리시는 것이다 … 사랑이란 입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임도 ..  (7, 55, 124쪽)


 몸이 아프지 않고서야 내 몸을 알기 어렵습니다. 몸이 아플 때를 맞이해야 비로소 바쁜 걸음을 멈춥니다. 다리를 절뚝이지 않고서야 다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없어 걸음이 더디거나 못 걷는 사람 슬픔과 아픔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자가용 모는 사람은 자전거 타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은 걷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걷는 사람은 바퀴걸상에 앉은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바퀴걸상에 앉은 사람은 아파서 자리에 드러눕기만 하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아파서 드러눕기만 하는 사람은 미처 태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숱한 목숨붙이 마음을 모릅니다.


.. 나는 내 자신의 머리속에 추악한 장면이나 더러운 말들이 이 이상 기억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축적된 기억들이 문득 마음에 떠올라 언제 어느 곳에서 나 자신을 악으로 이끌어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  (106쪽)


 모든 씨앗은 사랑씨입니다. 풀도 짐승도 사랑씨입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씨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랑으로 이루어진 씨앗이래서 늘 사랑스레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사랑으로 맺은 씨라지만 막상 태어났을 때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삶이 되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누구나 몸이 아플 때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몸이 안 아플 때에도 온누리를 옳게 깨닫거나 바라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거룩하거나 멋지거나 아름다운 사람도 어김없이 있다고 느낍니다. 참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요. 하느님다운 사람이랄까요, 하느님을 가슴에 예쁘게 품는 사람이랄까요.


.. 어린아이가 아무리 졸라도 어른이 주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세 살짜리 어린이에게 자전거를 사 주거나 집을 마련해 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권총이나 칼을 사 주는 부모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에게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극진한 사랑이 부모에게 있기 때문이다 ..  (118∼119쪽)


 아픈 사람은 사랑을 나눕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못 나눕니다. 아픈 사람은 믿음을 나눕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믿음을 홀로 차지합니다.

 아파 보아야 깨닫습니다. 아프지 않을 때에는 그저 ‘알기’만 합니다. 아프며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프지 않을 때에는 온갖 책을 잔뜩 읽으면서 ‘알기’만 하겠지요.

 앎은 삶이 아닌 앎입니다. 삶은 앎이 아닌 삶입니다. 사람은 삶을 일구지 앎을 일굴 수 없습니다. 앎을 일구는 나날도 보람이 있거나 뜻이 있다 하겠지요. 그런데 하루하루 내 삶을 일구지 않고, 이 앎 저 앎 가득가득 머리에 담기만 하는 나날이란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좋다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처세책이나 경영책이나 자기계발책은 다 쓰레기입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경력증명서는 모조리 종잇조각입니다.

 돈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은 사람이지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늘 아파하다가도 깨어나고, 깨어나다가도 아파하며, 하루하루 슬프면서 고맙게 살아갑니다. 기쁘다가 아파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사람인 나머지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 하고 자꾸자꾸 말을 걸고 되뇌면서 살아갑니다. (4344.4.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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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과 살림살이와 집식구


 문을 닫는 헌책방 한 곳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 헌책방이 조용히 문을 닫는 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테니까, 고단한 몸과 마음을 일으키면서 밤을 새워 글을 적바림한다.

 시골집에서 살림을 잘 꾸리지 못하는 내 삶을 돌이킨다. 나는 책하고만 살아갈 목숨인가. 나는 책하고 떨어진 채 살 수 없는 목숨인가.

 헌책방 한 곳 아픈 발자국을 돌아보는 데에 마음을 쓰는 만큼, 내 보금자리 살림살이 예쁘게 건사하는 데에 마음을 쓸 수 있는지, 아니 제대로 쓰기는 하는지, 옳게 쓰려 한 적이 몇 차례쯤 될는지 되씹는다.

 집일과 집살림은 틀림없이 다르다. 책을 사는 일과 책을 아끼는 일은 매우 다르다. 책방마실을 자주 하거나 책방 이야기를 글로 쓴대서 책사랑이나 책방사랑이 되지 않는다. 살림 이야기는 아주 다르다.

 나는 이제껏 집일만 했지, 집살림은 하지 않았다. 집살림을 하지 않은 까닭이라면 집살림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집일만 생각하고 집일을 할 뿐, 살림을 어떻게 해야 내 몸과 식구들 몸이 튼튼할 수 있는지 곱씹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가슴에 응어리가 크게 지는 나머지 쉬 잠들지 못한다. 문을 닫는 헌책방 이야기가 가슴에 쿡쿡 파고들어 아프고, 내 시골집 보금자리를 사랑스러운 옆지기하고 어여삐 돌보지 못하면서 제대로 못 느낀 채 여태껏 살아온 내 나날이 아프다. 나는 내 바깥일대로 헌책방 사람들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며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안일대로 보금자리 살림살이를 돌아보며 쓰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삶과 말은 하나이고 삶과 사진은 하나이며 삶과 책은 하나이든, 삶과 살림은 하나이다. (4344.3.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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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닫은 헌책방


 아침 일곱 시부터 나르는 책 일은 아침 열한 시 이십 분 무렵 끝납니다. 몇 평쯤 될까 싶은 참 작은 헌책방에서, 그러니까 너덧 평쯤 될까 싶은 조그마한 헌책방에서 1985년부터 2011년까지 차곡차곡 쌓이기도 하고 꾸준히 팔리며 새로 꽂히기도 한 책을 차근차근 빼냅니다. 자그마한 헌책방 한 곳에 깃든 책은 어제 하루 짐차로 한 대가 나갔고, 오늘은 짐차로 석 대 나갑니다. 이 자리에서는 1985년부터이지만, 건너편에서는 1978∼79년부터였습니다. 건너편 헌책방은 훨씬 작았다니까, 어쩌면 한두 평이나 두어 평이었을까요.

 네 시간 즈음 여러 사람이 바지런히 나르고 쌓으며 책을 빼냅니다. 몇 만 권이었을까요. 몇 만 권은 몇 해가 이룬 더께와 이야기와 굳은살이었을까요. 우리는 돈으로 이 책을 어떻게 셈할 수 있을까요.

 헌책방 한 곳에 깃들던 책은, 이 책방이 튼튼하고 씩씩하게 서던 때에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차츰 줄었고, 문을 닫는다고 할 때에도 알아보는 사람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책들을 넘겨받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되살릴 때에 여느 책손은 어느 만큼 새롭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책 또한 물건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물건으로만 그치는 책이라면 굳이 헌책방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책 또한 지식으로 마주할 수 있으나, 지식으로만 맴도는 책이라면 애써 옛책을 되읽지 않습니다. 헌책방 일꾼은 당신이 건사하던 모든 책을 고이 내려놓고는 조용히 당신 일터를 마무리짓습니다. (4344.4.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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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일기 어린이를 위한 사진 동화 시리즈
이상교 지음, 황헌만 사진 / 소년한길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민들레꽃 한해살이를 사진으로 싣는 넋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2 : 황헌만·이상교, 《민들레 일기》(소년한길,2007)



 어느 한 해 4월 20일부터 이듬해 2월 2일까지 민들레꽃 한 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본 발자취를 담은 사진책 《민들레 일기》(소년한길,2007)는 이 땅 어린이가 이 땅 터전을 고이 돌아보도록 도우려는 작은 책입니다. 이 땅 어린이한테 이 땅 터전을 고이 느끼도록 돕는 이야기책이 퍽 드문 한국인데, 《민들레 일기》는 《민들레의 꿈》과 《내 이름은 민들레》하고 나란히 나오면서 ‘민들레꽃 한 송이로 읽는 자연’을 베풉니다.

 어린이가 보는 사진책을 내놓은 황헌만 님은 《섬서구메뚜기의 모험》(소년한길,2009)이라든지 《날아라, 재두루미》(소년한길,2010)라든지 《춤추는 저어새》(소년한길,2011)를 내놓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을 내놓겠구나 싶은데, 우리 어른들이 사진을 한다고 하면서 늘 놓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인 ‘누구한테 사진을 읽히려 하고 누구하고 함께 볼 사진을 찍으려 하는가’를 슬기롭게 풀어내려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글로 빚은 아름다운 책을 비롯해서 그림과 만화로 이루는 어여쁜 책에다가 사진으로 일구는 아리따운 책을 선물해야 하거든요. 어른들 스스로 ‘글만 있는 책’을 차츰 적게 즐기고 ‘사진을 함께 곁들이거나 사진을 퍽 많이 넣는 책’을 즐기면서, 막상 아이들한테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을 베풀지 않는 일은 알맞지 않습니다. 오늘날처럼 숱한 아이들이 손전화 사진기로도 사진을 찍을 뿐 아니라, 사진을 가까이에서 늘 마주하는 터전에서 ‘어린이 사진책’이 없거나 모자란 일은 몹시 안타깝거나 슬프다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여느 어른이 그려서 아이한테 보여준다는 그림이나 만화를 보면 ‘일부러 유치하게 그리는’ 그림이나 만화가 참 많거든요. 아이들한테 삶을 삶 그대로 보여주면서 삶을 찬찬히 읽거나 느끼도록 이끄는 그림이나 만화가 꽤 드뭅니다. 이런 흐름에서 어른들이 아이 앞에서 할 몫 가운데 하나는, 글은 글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만화는 만화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가장 훌륭하면서 어여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는 이제 막 꽃을 피운 민들레 꽃송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이야기를 엽니다. 시골자락 논둑에 피어난 민들레 꽃송이를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시골자락에서 논을 갈고 눈삶이를 하며 모를 심어 돌보다가 벼베기를 하는 분들은 민들레를 잡풀로 여겨 뽑을 수 있지만, 그냥 그대로 꽃구경을 하려고 둘 수 있습니다. 서양민들레가 짓궂게 널리 퍼지니까 때로는 ‘요놈 서양민들레!’ 하면서 뽑을 테지만, 서양민들레이건 아니건 고운 꽃이라 여기며 얌전히 지켜볼 수 있습니다.

 논둑에 피어난 민들레는 논둑에 피어났기에 다른 자리에 피어난 민들레보다 좋은 보금자리를 얻었다 할 만합니다. 논에는 늘 물을 대니까 이곳 민들레는 물 걱정이 없겠지요. 게다가 논은 다른 흙땅보다 기름질 테니 먹이 얻기에 한결 나을 테고요.

 《민들레 일기》를 들여다보면, 흙을 일구는 일꾼이 이 사진책 때문에 민들레 꽃송이만 뽑지 않았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민들레 둘레 논둑은 말끔하게 풀베기를 해 놓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자연스레 담은 민들레 사진은 아닙니다. 《민들레 일기》를 펼칠 때에도 사진이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작은 꽃송이와 넓은 무논을 보여주고자 광각렌즈를 써야 할는지 모르지만, 민들레를 바라보는 거리하고 뒤편 무논하고 어우러진 모습이 살짝 어중간하지 않나 싶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민들레를 바라보며 담는 사진이기는 하되,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틀에 박혔다 할 만합니다. 그리고 너무 맑은 날에만 사진을 담아서, “민들레 일기”라는 이름이 썩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흐린 날이 있고 궂은 날이 있으며 비오는 날이 있습니다.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라든지 아주 쨍쨍한 날이 있을 테지요.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에서는 따로 ‘날짜 일기’를 옆에 보여주지 않는다면 언제쯤 모습일는지를 읽기 어렵습니다. 이 사진책을 읽을 눈높이는 높은학년 어린이만이 아니요, 낮은학년 어린이부터 읽는 줄을 헤아린다면, 또 이 그림책을 볼 어린이란 시골 어린이가 아닌 도시 어린이임을 살핀다면, 사진 찍음새와 책 엮음새에 더 마음을 쏟았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그냥 ‘논둑에 핀 민들레 한해살이’만 들여다본다면, 굳이 시골자락까지 찾아가서 민들레를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보는 민들레를 찍어도 됩니다. 어쩌면, 도시 어린이한테는 도시 어디에서나 보는 민들레 한해살이를 담을 때에 더 남다르거나 돋보인다 할 수 있어요. 도시 어린이로서는 길가 한 귀퉁이에서 애처롭거나 간당간당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고 꽃을 피운 민들레가 어찌저찌 살아남는가를 지켜보면서 ‘민들레를 비롯한 숱한 풀꽃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민들레 일기》는 일부러 논둑 민들레 하나를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이야기를 빚는 뜻을 더욱 끌어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논둑에 민들레 한 송이만 남기고 다른 풀은 모조리 베어낸 썰렁한 모습 때문에 사진을 찍는 틀이 딱딱하게 굳을밖에 없다 여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농사꾼이건 논둑밀이를 다 합니다. 논둑에 난 풀을 다 뽑아내지는 않으나(이렇게 하다가는 큰비가 찾아올 때에 논둑이 무너지니까요), 낫으로 풀을 다 베어요. 외려 ‘논둑 다른 풀은 모두 베었으나 민들레 한 송이만큼은 남긴 모습’을 찬찬히 보여주면서 또다른 이야기라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논둑 풀을 베는 모습도 보여주면서 ‘아, 민들레는 농사꾼 아저씨 낫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하는 말을 넣을 만하며, ‘이야, 농사꾼 아저씨는 노랗고 예쁜 꽃 한 송이는 곱게 남겨 놓았습니다.’ 하는 말을 넣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서 농사짓기를 하면서 풀베기란 얼마나 고된 일인지 느끼도록 할 테고, 농사를 지을 때에 민들레 또한 벨 수밖에 없는 풀이 되기도 하겠다고 느끼도록 할 테며, 우리 삶터와 자연과 풀꽃이 어떤 이음고리로 이어지는가를 살피도록 할 터입니다.

 한 자리에서 찍자면 말 그대로 아주 똑같은 한 자리에서만 찍을 노릇이지, 살짝 한쪽으로 기울인다든지 뒷모습이 자꾸 조금씩 움직인다든지 하는 일은 썩 반갑지 않습니다. 아예 똑같은 한 자리를 못을 박고 찍거나, 민들레 둘레 시골 논밭자락을 두루 느끼도록 이끌 때에 반갑습니다.

 요즈음 초등학교에서도 ‘식물 관찰 일기’를 쓰도록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둘레 터전에서 ‘스스로 자라 스스로 씨앗을 맺고 스스로 흙으로 조용히 돌아가는 들꽃’을 얼마나 지켜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해를 두루 통틀어 꽃송이 하나를 바라보며 아이 스스로 아이 마음밭을 한 해를 통틀어 곱다시 보살피도록 돕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는 민들레꽃 한 송이를 빌어 민들레 한 송이만 예쁘장하게 바라보자는 사진이야기가 아니요, 민들레꽃 한 송이와 마찬가지로 어여쁘면서 착하고 좋은 내 ‘어린 나날’ 삶임을 깨닫거나 느끼도록 이끄는 사진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사진을 한다는 이가 꽤나 많은 만큼, 한국땅에서 사진을 한다는 이들 가운데 1/10이든 1/100이든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기르는 사진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꿈을 꾸어 봅니다. 황헌만 님은 민들레이니 저어새이니 두루미이니 섬서구메뚜기이니를 찍었지만, ‘민들레 사진이든 메뚜기 사진이든 이렇게 달리 찍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매무새로 새롭게 민들레 사진책을 빚는 젊은 사진쟁이가 태어난다면 기쁘겠습니다. 냉이라든지 꽃다지라든지 쑥을 들여다보는 ‘어린이 사진책’을 일구어도 기쁘겠습니다. 개구리라든지 지렁이라든지 참새라든지 까마귀라든지 다람쥐라든지 참나무라든지 두릅나무라든지 은행나무라든지 얼마든지 살필 수 있으며, 우리 둘레 수수한 목숨붙이를 ‘어린이 사진책’ 눈높이와 눈썰미와 눈결을 돌아보면서 사진이야기를 빚으면 참으로 기쁘겠어요.

 틀에 박지 않으면서 틀에 매이지 않는 좋은 어린이 사진책을 기다립니다. 다 다른 어린이가 다 다른 삶틀을 스스로 가꾸면서 나날이 좋은 마음밭 일구는 목숨빛을 내도록 어여쁜 빛그림을 베푸는 한국땅 사진쟁이를 기다립니다. (4344.3.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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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닫는 헌책방


 엊저녁 서울 ㅎ동에 오래도록 자리하며 책삶과 책사랑을 나누어 온 헌책방 일꾼 한 분한테서 전화가 오다. ㅎ동 헌책방 일꾼은 이제 더는 헌책방 살림을 꾸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당신 헌책방에 건사한 책을 통째로 넘겨받을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며, 한번 알아보아 주면 좋겠다 하면서, 문을 닫기 앞서 밥 한 그릇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수많은 동네새책방이 일찌감치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 수십 군데나 수백 군데가 아닌 수천 군데 동네새책방이 참으로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 문화체육관광부나 통계청에는 ‘한국에서 문닫은 동네새책방 숫자’를 해에 따라 표로 만들었을까. 이런 통계를 갖추었을까. 책을 읽자느니 책을 읽히자느니 하지만, 정작 책을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사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마음을 쓰는 공무원이나 책벌레나 평론가나 지식인이나 기자는 몇이나 있을까.

 헌책방 일꾼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러 서울마실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속이야기를 속시원히 나눌 만한 책손이 나날이 줄다가는 그예 자취를 감추는 오늘날이기에 헌책방 일꾼 한 사람은 책방살림 꾸리기 힘드셨겠지요. 밥동무이든 말동무이든 술동무이든 고작 하루밖에 안 될 테지만, 마지막 책동무이든 내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숱하게 많던 동네새책방들이 문을 닫던 때, 동네새책방을 고이 이어오던 그분들은 마지막 자리에서 누구하고 마지막 밥과 말과 술과 책을 나누었을까. 문을 닫는 헌책방이 있으면 문을 여는 헌책방이 있을 테고, 문을 닫는 가게만큼 문을 여는 가게가 있겠지.

 서울에는 사람도 많고, 서울에는 자가용도 많고, 서울에는 아파트도 많고, 서울에는 출판사도 많고, 서울에는 돈도 많은데, 서울에는 헌책방 하나 동네에서 예쁘장하게 살아숨쉬기란 참 버겁구나. 아, 그러고 보니, 서울에는 자전거도 많고, 비싼 자전거도 많으며, 자전거 동아리도 참 많구나. (4344.3.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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