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5.11. 

숲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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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5-12 13:02   좋아요 0 | URL
야야야~~~~ 덩달아 숲보면서 소리한번 질러봅니다^^

파란놀 2011-05-13 07:53   좋아요 0 | URL
아... 이웃집이 시끄럽다 하더라도
그냥 소리질러 보셔요~ ^^;;;
 
The Children (Paperback) - Refugees and Migrants
Sebastiao Salgado / Aperture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사람들과 사진으로 사랑을 나누기
 -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the children》(aperture,2000)



 돈없는 사람이 돈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이란 없습니다. 드물다 할 만한 일이 아니라,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돈없는 사람은 사진을 찍을 일조차 드뭅니다. 그러나, 사진길을 걷고픈 꿈을 꾸는 돈없는 사람이 저와 비슷한 돈없는 이웃을 사진으로 찍는 일이 있습니다.

 돈없는 사람이 저와 비슷한 돈없는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둘로 갈립니다. 첫째, 사진을 찍기 앞서와 사진을 찍는 동안과 사진을 찍고 나서 한결같이 살가이 이웃으로 지내려는 매무새입니다. 둘째, 사진을 찍고 나서 돈있는 사람 자리에 서려는 매무새입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없는 사람도 사진으로 찍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을 들여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돈없는 사람은 아주 드물게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으나, 말 그대로 너무 드문 일입니다. 돈없는 사람이 ‘돈없는 삶으로 담은 사진’을 기꺼이 책으로 엮는다든지 두루 알린다든지 하는 일이란 참으로 드뭅니다.

 다큐멘터리라 하는 갈래를 이루는 사진을 생각합니다. ‘돈있는 사람’을 찍은 사진을 놓고 다큐사진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직 이러한 사진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돈없는 사람’을 찍은 사진을 가리켜 인물사진이라 하거나 패션사진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이제껏 이러한 사진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큐사진이라 하면 으레 ‘가난하거나 힘들거나 어렵거나 고단한 사람’을 찍어야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듯 여기곤 합니다.

 사진기를 쥐고 다큐멘터리를 이루려 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찾아나섭니다. 가난한 사람하고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를 함께 지내곤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동무로 삼는다면서 자주 찾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다큐사진을 하는 이들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만 온삶을 붙잡으며 사진찍기를 하겠다’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다른 이야기를 찾아나섭니다. 사진책 한 권 또는 사진잔치 한 번 할 만한 부피만큼 사진을 찍고는 ‘또다른 가난한 사람’을 찾아나섭니다.

 이효리 님을 찍은 패션사진을 헤아립니다. 이효리 님을 더 예뻐 보이도록 하는 사진이 가득합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 가난하다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떠올립니다. 하나같이 가엾어 보이거나 굶주려 보이거나 슬퍼 보이는 사진입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님 사진책 《the children》(aperture,2000)을 들춥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아이들》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으나,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책 이름은 ‘가난한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입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이 내놓은 사진책에 붙은 이름을 곱씹습니다. 한국 다큐사진쟁이 가운데 ‘아이들’이라는 이름을 수수하게 붙이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스스로 다큐사진이라 여기지 않고 ‘놀이를 즐기는 아이’를 찍은 편해문 님은 《소꿉》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은 적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은 김기찬 님은 ‘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골목 안 풍경’이라고 덧말을 달았습니다.

 《the children》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제 모습을 제 사진기로 저희 스스로 찍을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바깥에서 누군가 찾아와서 저희 모습을 찍은 다음 돌아갑니다.

 사진책에 드러나는 아이들은 한결같이 가난합니다. 한결같이 외롭습니다. 한결같이 고단합니다.

 그런데, 이 가난하고 외로우며 고단한 아이들은 모조리 ‘아이들’입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workers》라는 사진책에서도 ‘일꾼’ 모습만 보여주었습니다. 가난하며 외롭고 고단한 일꾼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그저 ‘일꾼’이라는 이름만을 붙이며 일꾼만을 보여주었습니다.

 돈있는 집 아이도 아이입니다. 돈없는 집 아이도 아이입니다. 이름있는 집 아이도 사랑스럽습니다. 이름없는 집 아이도 사랑스럽습니다. 힘있는 집 아이도 예쁩니다. 힘없는 집 아이도 예쁩니다. 아이는 누구나 아이이면서 사랑스러운데다가 예쁩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이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책을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살가이 배우면 좋겠습니다. 겉모습을 키우거나 겉치레를 부리려고 ‘사진솜씨’를 북돋우는 길은 그만 배우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아이로 바라보고, 일꾼은 일꾼으로 바라보는 눈길과 손길과 몸길과 마음길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 스스로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 스스로 글로 써서 이야기하거나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는 일 또한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가멸찬 사람이든, 제법 돈이 있는 사람이 글·그림·사진으로 이야기를 꾸립니다. 가난한 사람 스스로 가난한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을 찍지 못하는 줄 또렷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려는 삶 가운데 하나로 사진찍기를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려는 삶 가운데 하나로 글쓰기를 할 수 있고, 밥짓기를 해서 나눌 수 있으며, 옷짓기를 해서 나눌 수 있어요. 언제나 ‘사람들과 사랑 나누기’를 하는 흐름에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진찍기입니다.

 가난하니까 더 꾀죄죄해 보인다거나 더 슬퍼 보이도록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가난하니까 이 가난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거나 도와주도록 생각하게끔 이끄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아이들’입니다. 가난한 아이가 아닌 ‘아이’입니다. 사랑스러운 목숨을 선물받은 아이요, 아름다운 목숨을 곱게 이을 아이입니다.

 사진은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진책 《the children》은 사진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사진이야기를 묶으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을 잇는 고리를 보여줍니다.

 아이를 사랑해 주셔요, 이뿐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요, 이뿐입니다.

 누군가는 당신 살림집 네 살 아이를 한 번 더 꼬옥 껴안으면서 사랑하겠지요. 누군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집식구 먹여살리는 짓은 그만두고 자전거공장이나 두부공장으로 일터를 옮긴다든지, 아예 시골마을에서 흙을 일구는 터로 보금자리를 몽땅 옮기면서 사랑하겠지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아이들을 아이들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길을 걷는 사랑을 나눕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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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책읽기


 아스팔트 밑이 어떻게 생겼다거나 어떻게 되었는가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어느 책에서 아스팔트 밑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읽으면 안다 말할는지 모른다. 어느 방송에서 아스팔트를 파헤쳐 밑바닥을 보여준다면, 이 방송을 본 사람은 ‘난 알아요’ 하고 이야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 아스팔트 밑을 파헤쳐 보지 않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만지다가 손이 데어 따끔한 느낌은, 손이 데지 않고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골짜기 물과 페트병 먹는샘물과 서울시 아파트 수도물이 저마다 어떠한 맛인가를 책을 읽거나 방송을 본대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자전거를 달리며 맞아들이는 바람과 시골집에서 창문을 열며 받아들이는 바람을 글읽기나 사진읽기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가난하다는 나라 힘겨이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글로 읽거나 사진으로 읽었대서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느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거나 ‘돕고픈 마음’이 된다 할 만할까.

 자동차를 몰 줄 모르면서 자동차 이름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동차를 아는 일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서 자전거문화나 자전거정책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전거를 아는 일이 아닐 뿐더러, 사랑하는 일이 될 수 없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을 읽었기에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이란 대단히 무섭다고 느낀다. 책을 읽는 까닭은 내 머리속에 앎조각을 가득 채워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날 한국땅 어느 분이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고 말했다는데, 하루라도 책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내 삶을 옳게 다스리는 새 기운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책을 읽어야 할까. 하루에 몇 쪽쯤 읽어야 책읽기를 했다 할 만한가.

 만 쪽에 이르는 책을 읽으면 책읽기를 한 셈일까. 한 쪽을 겨우 읽으면 책읽기를 못한 셈일까. 한 쪽조차 아닌 고작 한 줄을 읽었으면 책읽기를 안 한 셈일까.

 삼백 쪽짜리 책에서 고작 한 쪽조차 못 읽었으나, 한 줄만 가까스로 읽은 뒤에 이 한 줄에 깃든 이야기를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 곱씹으면서 내 삶을 예쁘게 다스리는 사람은 책읽기를 한 사람인가 안 한 사람인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나서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에, 언제나 참 슬프구나 하고 느낀다. 책읽기 아닌 지식읽기를 하고서는 마치 책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우쭐거리는 모습은 그저 슬프다. 한 달에 열 권을 읽든 한 해에 백 권을 읽든 뭐가 대단할까.

 나는 한 해에 천 권 책을 장만하고 만 권 책을 읽는다. 어쩌면 더 살는지 모르고, 어쩌면 더 읽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해에 책을 백 권이나 열 권만 산다면, 또 한 해에 책을 열 권이나 한 권만 읽는다면 어떠할까. 천 권을 사들이는 사람과 열 권을 사들이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십만 권을 읽는 사람하고 한 권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

 누군가는 한 해에 천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한 달에 백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열 사람씩 새 동무를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100킬로미터를 달릴는지 모른다. 자동차로든 자전거로든. 누군가는 날마다 백만 원을 벌는지 모른다.

 그런데, 책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여행이든 무어든, 얼마나 대수롭다지?

 사랑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책이 된다. 책읽기란 사랑읽기이다.

 사랑으로 사귈 때에만 비로소 사람이 된다. 사람삶이란 사랑삶이다.

 한 해에 책 만 권을 읽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고, 논 만 평을 혼잣힘으로 일구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쌍둥이 아이를 돌보든 다섯 아이를 돌보든 한 아이를 돌보든, 아이 없이 살아가며 이웃 아이를 사랑하든, 모두 똑같은 사랑이고 삶이며 사람이다.

 사랑을 안 담은 책을 백만 권 읽는들 무엇하랴. 사랑이 안 담긴 책을 사랑을 안 실으며 읽고서는 사랑을 싣지 않는 ‘서평’이나 ‘신간소개’나 ‘독후감’ 따위로 끄적인들 무엇하랴.

 새로운 책은 읽을 까닭이 없고, 읽을 보람이 없으며, 읽을 값어치가 없다. 아름다운 책일 때에만 읽을 까닭이 있고, 읽을 보람이 있으며, 읽을 값어치가 있다.

 새로운 판으로 되살리는 옛책이란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구며 아름다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선보였기 때문에 새로운 판으로 되살린다.

 책은 그저 책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다. 새로운 책이냐 예전 책이냐 하고 따질 수 없다. 새로운 사람이냐 해묵은 사람이냐 하고 가릴 수 없다.

 나는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을 하나도 안 좋아한다. 왜냐하면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은 예전에는 예전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고, 나중에는 또 나중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를 스스로 씻거나 털면서 아름다이 살아갔다면,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는 탓하거나 나무랄 까닭이 없다.

 내 둘레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들 아름다운 사람들이 옛날 옛적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마냥 아름다운 사람들이지는 않았다. 저마다 예전에는 이렁저렁 얼토당토않거나 뚱딴지 같다 싶은 모자란 삶을 모자란 줄 모르며 바보스레 지내곤 했다. 당신들 스스로 당신 삶을 천천히 사랑하면서 시나브로 아름다운 길을 깨달아 거듭난다.

 나는 이원수 님 같은 사람을 참 좋아한다. 참으로 바보스럽다 할 만한 시민단체와 ‘진보 껍데기’ 지식인과 기자는 이원수 님을 가리켜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인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친일부역시를 썼대서 이이한테 이런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쇠사슬 밤나라에서 이원수 님이 ‘독재부역 문학’을 어느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이원수 님은 ‘반성문’이나 ‘참회록’ 같은 이름을 붙여서 글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걸어온 삶이나 남긴 문학을 읽으면, 이이 모든 삶과 문학이 곧바로 ‘반성문’이나 ‘참회록’이다. 한때 ‘아름다운 사랑’을 저버린 슬프며 모자라고 못난 짓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며 말도 못하는 몸짓으로 당신 가슴을 후벼파면서 한 줄 두 줄 적바림한 문학을 가만에 손에 쥐어 읽을 때면 늘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이러한 글삶을 일군 이원수 님이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고맙다고 느낀다.

 나는 전두환이나 노태우처럼 바보스러운 이들이 참 바보스러워서 딱하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이들이 모든 권력과 돈과 이름값을 내려놓은 다음, 수수하고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텃밭 쉰 평에 논 삼백 평을 얻어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당신 삶을 꾸린다 한다면, 이들을 좋아할 수 있다. 텃밭에 감자와 오이와 토마토와 당근과 배추와 무와 고추와 가지와 상추와 시금치를 골고루 심어 손수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땀을 흘리는 흙일꾼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이들 지난날 발자국이 어떠했다 하더라도 반가이 맞아들일 수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정책을 끊이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잘난 척하지 말고 힘과 돈과 이름을 송두리째 내려놓으며 흙일꾼이 된다면 즐겁겠다.

 그렇다. 진보이니 개혁이니 혁명이니 변혁이니 하고 신나게 외치기는 하지만, 막상 손수 흙일꾼이 되려고는 안 하는 지식인들은 전두환하고 똑같으며 이명박하고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참말,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은 정당이다. 여기에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그닥 다를 구석이 없다고 느낀다. 아주 똑같은 정당은 아니다. 틀림없이 외침과 삶과 넋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삶과 눈물방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날마다 두세 끼니 밥을 먹는 사람인 줄을 또렷이 깨달으면 좋겠다. 내가 먹는 밥을 어떻게 마련해야 좋은가를 조금 더 일찍 깨달으면 좋겠다. 스웨덴 정책이나 핀란드 정책도 다 좋기는 좋은데, 내 작은 마을에서 내 작은 손으로 내 작은 삶을 사랑할 수 없다면, 스웨덴 정책이나 미국 정책이나 마찬가지이고 핀란드 정책이나 북녘 정책이나 매한가지이다.

 군대를 키우거나 미사일을 만들거나 경찰을 늘린대서 평화를 지키지 못한다. 도시를 떠나든 도시에서든 내 살림집 앞마당을 텃밭으로 일구면서 차근차근 나 스스로 흙일꾼으로 살아가는 나날을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평화를 이룬다.

 사랑하는 책읽기란 사랑하는 삶읽기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느냐를 밝힐 때에, 바야흐로 책읽기를 어떻게 즐기며 나눌 때에 아름다운가를 몸으로 배운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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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씨


 우리 멧골자락 단풍나무 한 그루에서 벌써 씨가 맺는다. 어제와 그제는 이 단풍나무를 미처 못 보았으니, 요 며칠 사이에 씨가 맺지 않았나 생각한다. 5월을 갓 넘긴 이무렵, 단풍나무는 단풍꽃을 떨구면서 단풍씨를 맺는구나. 단풍나무는 참말 일찍 꽃과 씨를 내고 나서 겨우내 붉디붉은 단풍잎을 예쁘게 지키는구나.

 단풍씨는 단풍꽃처럼 사람들 눈에 거의 안 뜨이면서 아주 조용히 흙으로 떨어지겠지. 아스팔트가 깔린 도시에 심은 단풍나무는 꽃을 피운들 알아볼 사람이 없고, 씨를 떨군들 싹이 틀 자리가 없다. 오직 흙바닥 멧자락에서 살아가는 단풍나무일 때에만 꽃을 즐길 수 있고 씨가 살아날 수 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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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만박 - 아즈망가 대왕 10주년 기념본!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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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석 장 느낌글 011] 오사카 만박


 《오사카 만박》을 읽는 사람이라면, 《아즈망가 대왕》 네 권을 장만해서 읽은 사람이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아즈망가 대왕》을 안 읽었으나 《오사카 만박》을 장만해서 읽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즈망가 대왕》 열 돌을 기리며 나온 《오사카 만박》을 《아즈망가 대왕》을 안 읽거나 모르는 채 읽거나 장만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장정일 문학을 읽지 않았어도 ‘장정일 삼국지’를 읽을 수 있고, 이문열 문학을 읽지 않았어도 ‘이문열 삼국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만, 《오사카 만박》은 《아즈망가 대왕》 을 알뜰히 읽었을 뿐 아니라, 숱하게 되읽은데다가 퍽 사랑하는 사람만 즐거이 사서 읽으며 두고두고 되새기고픈 사람한테 도움이 될 선물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선물판 책이라 한다면 어떻게 엮어야 선물판 책이 될까요. 요미·오사카·사카키 들을 여러 가지로 새로 그리거나 다시 그려서 보여줄 때에? 수많은 나라에서 저마다 다른 빛느낌으로 옮겨진 모습을 보여줄 때에? 갖가지 캐릭터 상품을 한 자리에 그러모아 보여줄 때에? 《아즈망가 대왕》한테 바치는 ‘새로 읽는 아즈망가 만화’를 보여줄 때에? 302쪽에 걸친 《오사카 만박》은 ‘소장용’일 텐데, 어떤 마음을 오래도록 건사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 아즈마 키요히코·요츠바 스튜디오 엮음, 대원씨아이 펴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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