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앞

 


  집앞이 어떤 곳인가를 생각한다. 아이들과 집앞에 서면 으레 사진을 한 장 찍고 본다. 날마다 다른 빛이고 철마다 다른 모습이라, 집앞을 나서는 모습을 한 장씩 찍고 보면, 우리가 지내는 시골마을 이야기가 저절로 이루어지겠다고 느낀다.


  시골마을에 우리 집 논이나 밭은 없다. 우리 집만 덩그러니 있다. 그러나 우리 집을 둘러싼 논이나 밭이나 길이나 숲은 모두 우리가 함께 누리는 터전이다. 이웃집 할배가 논밭이나 길가에 농약을 치면 고스란히 우리 집으로 흘러들고, 이웃집 할매가 논둑이나 밭둑에서 쓰레기를 태워도 고스란히 우리 집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이런 농약 기운과 쓰레기 태우는 냄새는 이웃집 어디에나 가만히 흘러든다.


  집앞이 자가용 세우는 곳이 되면 집은 어떤 삶터가 될까 생각한다. 집앞이 자동차 싱싱 달리는 찻길이 되면 집은 어떤 보금자리가 될까 생각한다. 아이들이 집앞에서 놀 수 없다면, 집집마다 아이들이 집앞에서 못 논다면, 어느 집이건 어른들이 집앞에서 해바라기를 하거나 나무그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하루를 누리지 못한다면, 이런 집들 모인 마을은 얼마나 사람이 살 만한지 생각한다.


  집안도 잘 가꾸고 마당도 잘 돌볼 노릇인데, 집앞이 어떤 자리가 되도록 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모두 똑같다. 그런데, 도시사람은 집앞을 어떻게 두는가? 도시사람 집앞은 으레 찻길이나 주차장 아닌가? 집앞에서 들이나 숲이나 나무나 꽃밭을 누리는 도시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날마다 늘 보는 ‘집앞 모습’이 살갑거나 사랑스럽거나 푸르거나 맑은 도시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4346.7.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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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자리

 


  똑같은 책인데, 도서관에 있으면 ‘도서관 장서’라는 이름이 붙는다. 새책방에 있으면 조금 헐거나 다쳤어도 그냥 ‘새책’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헌책방에 있으면 아무 때를 안 탄 빳빳한 새 것이라 하더라도 ‘헌책’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도서관에 있던 책이건, 새책방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책이건, 헌책방에서 오래 묵은 책이건, 이 책들이 고물상으로 가서 있으면 ‘고물’이 된다. 폐지수집상이나 폐지처리장에 가는 책이라면 ‘폐지’가 된다. 이 책을 누군가 건사해서 집에 들이면 ‘개인 소장 자료’나 ‘서재 장서’가 되겠지.


  어느 자리에 있건 모두 같은 책이다. 도서관에 있기에 더 돋보일 까닭 없고, 이름난 학자가 읽어서 서재에 두었으니 더 훌륭할 까닭 없다. 철거를 앞둔 골목집 한쪽에 놓인 책이라면 건축쓰레기와 함께 버려지는 종이쓰레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언제나, 어느 자리에서나, 책은 그예 책이다.


  그렇지만, 책은 늘 다른 자리에 놓인다. 똑같이 태어난 책 2천 권이나 2만 권이라 하더라도 2천 가지 삶터로 흩어지고, 2만 가지 살림터로 갈린다. 어느 책은 대통령 옆에 놓일 테고, 어느 책은 치과 손님방에 놓일 테며, 어느 책은 북카페 책상에 놓일 테지. 어느 책은 닳고 닳도록 읽힐 테고, 어느 책은 손때 한 번 안 탈 테며, 어느 책은 시골마을 흙이 묻을 테지.


  저마다 다른 사람이 읽기에, 책이 있는 자리는 삶이 있는 자리가 된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삶을 일구는 자리에 다 다른 책이 깃들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끌어낸다. 다 다른 이야기는 다 다른 사랑이 된다. 다 다른 사랑은 다 다른 빛이 되고, 다 다른 꿈으로 다시 태어날까. 헌책방 한쪽 무너진 책시렁에 얹힌 책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4346.7.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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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07-02 16:02   좋아요 0 | URL
책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는 말씀이 마음에 착 감기네요 ^^ ㅎㅎ
같은 책을 읽어도 자신의 삶과 함께 책을 읽기 때문에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읽혀지는 것이 또 책인 듯 합니다 ^^
요즘 도서관에 가면 , 제 책이 더 많다는 생각을 가끔 하고 옵니다 하하 ~
그게 괜히 뿌듯하고 그런 ... ^^
늘 좋은 날들 되세요 ~

파란놀 2013-07-02 18:24   좋아요 0 | URL
모든 책은 읽는 사람 것이니까요.
읽고 즐기는 사람 '소유'이지요~

Nussbaum 2013-07-03 22:23   좋아요 0 | URL
어느날부터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 라는 것 때문에 정말 좋은 책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주위의 작고 깊은 삶 또한 밀려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누군가 순위를 매겨 놓은 걸 살펴보기 보다는 조금 천천히, 더 깊이 책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파란놀 2013-07-04 00:12   좋아요 0 | URL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되도록 '베스트셀러' 아닌
'책'을 말할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지 싶어요.

그래야 '책'이 읽혀요.
그렇지 않다면 '베스트셀러'만 읽히면서
우리 삶이 한쪽으로 치우쳐 버리겠지요.

내 삶을 읽고 누리듯
내 '책'을 찾아서 읽을 때에
아름답구나 싶어요.
 

 

《이오덕 일기》 3권 느낌글을 마무리짓다.

무엇보다 팔과 손와 팔뚝과 어깨 모두 저리다.

 

아마 원고지로 100장쯤 되는 글을 쓴 듯하다.

책에 실린 일기 옮겨적은 대목이 40장쯤,

내가 쓴 글이 60장쯤 되겠지.

 

《이오덕 일기》 읽는 분들이 부디 이 책이

'한낱 기록물'이 아닌 줄 깨닫도록

조그맣게나마 밑거름 되는 느낌글이

될 수 있기를 빈다.

 

이오덕 님은 '기록을 남기려'고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러면 왜 일기를 쓰셨을까?

 

조금 앞서 올린 《이오덕 일기》 3권 느낌글을

읽어 보시면서 찬찬히 짚을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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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한국 사내를 만나 함께 살기로 하고 한국으로 와서 열두 해째 지내는 독일사람이 책 하나를 내놓는다. 이녁은 처음에 서울에서 지냈는데, 서울이라는 곳을 도무지 ‘한국’으로 느끼지 못하다가, 커다란 도시를 벗어나 강원도 시골마을에 조용하며 호젓한 자리를 마련해 지내는 동안, 비로소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하고 깨닫는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시골에 보금자리를 얻어 지냈으면 한국에서 훨씬 잘 지냈을까? 처음에 서울에 깃들어야 했고, 끔찍하다 할 온갖 일을 겪는 동안 차츰차츰 삶과 사랑과 사람을 새롭게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아름다움과 평화와 사랑과 즐거움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으며,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보살피면서, 어떻게 가꾸는가 하는 이야기를 참 조곤조곤 나긋나긋 예쁘게 들려주는 책을 기쁘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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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또 이 책도 읽고 싶어집니다. ^^
함께살기님의 기쁜 느낌글도요~

파란놀 2013-07-02 15:09   좋아요 0 | URL
아침에 붙잡아 낮에
아이들과 빨래터에서 청소하며
후다닥 다 읽었네요~ ^^

후애(厚愛) 2013-07-0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담가야겠어요.~

파란놀 2013-07-02 18:24   좋아요 0 | URL
저도 우연하게 이 책을 알고 장만해서 읽었는데,
참말 이런 책은 언론홍보도 거의 못 받고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잘 읽히지도 못하는 듯해요.

글 쓰신 분은 올해에 대학교수 일 그만두고
삼척에서 아마 '카페'를 만들려고 하시는 듯해요.
 

바다에서

 


물결은 자동차를 멈추게 하고
바람은 손전화를 끄게 하며
햇살은 사진기를 내려놓게 한다.

 

태평양 먼 바다
바라보는
고흥 끝자락에
서서

 

찰방찰방 뛰고
모래밭 파다가
손가락으로
노란 꽃 한 송이
그린다.

 


4346.5.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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