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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걷는 시골길



  삼월꽃과 사월꽃이 저문다. 이제 오월꽃이 핀다. 그런데 오월꽃이 핀대서 벌꿀 모이는 이들이 벌통을 두지는 않는다. 오월로 접어드니 비로소 벌통을 치운다. 사월에 흐드러졌던 갓꽃이랑 유채꽃은 거의 다 저물었고,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후박나무도 후박꽃이 많이 떨어졌다. 아직 모든 꽃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꽃과 저런 꽃이 지더라도 새롭게 오월꽃이 핀다. 이를테면, 오월이 되면서 찔레꽃이 피고 붓꽃이 핀다. 장미꽃도 오월부터 핀다. 젓가락나물꽃도 오월에 고운 빛이 노랗다. 괭이밥꽃은 사월에도 피지만 오월에도 예쁘다. 토끼풀꽃도 사월뿐 아니라 오월에도 한껏 흐드러진다. 아무튼 꽃은 봄부터 가을까지 꾸준히 피니까, 벌도 봄부터 가을까지 꾸준히 있는데, 삼월과 사월처럼 벌이 마구 날아다니지는 않는다. 이제 벌 소리를 거의 못 들으니, 큰아이는 벌에 쏘인 일을 곧잘 잊으면서 마당에서 잘 논다.


  작은아이는 벌에 쏘이지 않았다. 작은아이는 벌에 안 쏘였기에 벌을 무섭게 여기지 않고, 마실을 신나게 다닌다. 큰아이가 집 바깥으로 안 나가겠다고 하는 날 작은아이만 데리고 마실을 다니다가 생각에 잠긴다. 작은아이가 벌에 쏘였으면 어떠했을까. 큰아이는 안 쏘이고 작은아이만 벌에 쏘였으면, 큰아이는 제 동생을 어떻게 이끌었을까.


  얘들아, 너희가 뛰놀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진대서 다시 안 뛰니? 너희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몸이 고단해 코피가 주루룩 흐른대서 일찍 자니? 벌한테 쏘일 수도 있는 일이야. 벌이 또 쏘면? 또 맞지 뭐. 다시 쏘면? 또 맞으면 돼. 괜찮아. 벌한테 쏘여도 며칠 지나면 다 가라앉아. 네 아버지를 보렴. 모기한테 물리든 벌한테 쏘이든 아랑곳하지 않아. 건드리지도 긁지도 쳐다보지도 않아. 우리는 우리가 하고픈 일을 하면 돼. 너희는 너희대로 놀고 싶은 대로 실컷 놀면, 벌은 우리와 아주 살가운 동무가 되어 고운 노래를 들려준단다. 4347.5.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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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53] 뜀박질

― 놀고 일하며 쉬는 곳



  나는 국민학교를 다닐 적까지 ‘집’이 어떤 곳인 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만큼 내 어버이가 살림을 알뜰살뜰 꾸리셨기에 즐겁게 뛰놀았구나 싶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집’을 생각합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여섯 해 다니는 동안 새벽 다섯 시 반이나 여섯 시 사이에 집을 나섰고, 학교에는 열한 시까지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걷거나 버스를 타느라 길에서 보내는 때를 빼니, 중·고등학교 여섯 해에 걸쳐 ‘집’이라는 곳에 머무는 때는 고작 다섯 시간 즈음이었습니다.


  하루 다섯 시간, 게다가 이 다섯 시간이란 누워서 자는 때라면, 집은 어떤 곳일까요. 집이 집다울 수 있을까요. 짐은 그저 “자는 데”을 뿐이고, 학교가 학교이면서 집 구실을 해야 하는 셈 아닐까요.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 머물지만, 학교는 학교 노릇도 집 구실도 하지 않습니다. 학교는 오직 입시지옥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슬기나 즐거움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입니다. 사람이 기쁘게 웃고 어깨동무하는 슬기를 보여주지 않는 학교입니다. 이웃이 서로 아끼고 동무가 서로 사랑하는 길을 밝히지 않는 학교입니다. 게다가 이런 학교에서는 뛰거나 놀지 못합니다. 수업을 받으며 웃어도 안 되고, 쉬는 때라서 노래를 해도 안 됩니다. 허울은 ‘학교’이지만 속내는 ‘감옥’과 같습니다.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아가며 날마다 ‘집’을 생각합니다. 집은 어떤 모습일 때에 집이 될까요. 집이 모인 마을은 어떤 빛일 때에 마을이 될까요. 그저 여러 집이 모이면 마을이지 않습니다. 집은 집답게 예뻐야 하고, 마을은 마을답게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웃고 떠들면서 노래할 수 있을 때에 집입니다. 농약바람이 아닌 풀바람이 흐르면서 풀내음이 싱그러울 때에 마을입니다. 나무가 우거지면서 나무그늘과 나무노래가 감돌 때에 집이면서 마을입니다. 함께 놀고 함께 일하며 함께 쉬는 곳이 집이 되겠지요. 함께 웃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이야기꽃 피우는 데가 집이 될 테지요. 4347.5.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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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 전화



  두 아이를 재우면서 나도 함께 곯아떨어진다. 오늘은 작은아이가 먼저 자고 싶다 말한다. 웬만해서는 이 아이들이 스스로 자겠다는 소리를 않는데 참말 고단한가 보다. 그럴 만하다. 자전거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레에서 잠든 작은아이가 더 자지 않고 집에 닿자마자 다시 일어나서 놀았으니.


  두 아이 사이에 누워서 자장노래를 부르는데, 서너 가락쯤 부를 무렵 목과 배에서 힘이 스르르 풀린다. 졸려서 오락가락하는 몸으로 겨우 끝까지 부른 뒤 “예쁜 아이 잘 자렴.” 하고 인사를 마치고는 이내 꿈나라로 간다. 이러다가 집전화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일곱 차례째 울릴 때에 일어나서 받는다. 사흘 앞서 람타학교에 같 곁님이 이 늦은 때에 전화를 했나 싶다. 그러나 아니다. 전남도지사 여론조사 때문에 전화를 했단다. 여론조사를 한다는 분도 늦은 때에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다 말한다. 전화를 끊고 보니 밤 열 시이다. 참말 늦은 때네. 도시라면 모르지만 이곳은 시골인데. 게다가 요새는 한창 일철이라 저녁 여덟 시만 되어도 마을에 불을 하나도 안 켜고 잠드는데.


  한 시간 반쯤 잤나. 찌뿌둥하다. 도로 누울까 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불리려고 둔 그릇을 설거지한다. 뭘 또 할 일이 있나 살피다가 물을 한 잔 마신다. 큰아이를 반듯하게 눕히고 이불깃을 여민다. 귀를 기울이면 개구리 밤노래잔치가 왁자지껄하다. 사이사이 소쩍새 울음소리가 섞인다. 호젓하며 좋은 밤이다. 4347.5.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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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그릇



  작은아이가 밥그릇을 들고 마루를 돌아다니다가 그만 툭 떨어뜨려서 퍽 깨진다. 두꺼운 그릇이기에 꽤 무거운 만큼 밥상에 놓고 먹어야 하는데, 작은아이가 이 장난 저 장난을 하다가 떨어뜨려 깨뜨린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그릇과 잔을 수없이 깨먹는다. 나도 어릴 적에 곧잘 그릇과 잔을 깨먹었다. 물이든 밥이든 밥상 언저리에서만 마시고 먹은 뒤 갖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소리를 참 징하게 안 들었다. 이런 내 어린 나날 모습이 우리 아이들한테 똑같이 이어졌을까. 왜 아이들은 잔이고 밥그릇이고 자꾸 들고 다니면서 놀려 할까. 손에서 안 미끄러지도록 잘 붙잡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모습을 어른한테 보여주고 싶을까. 나 이렇게 잘 들고 돌아다닌다고 자랑하고 싶을까.


  깨진 그릇은 어찌해야 할까. 어쩔 길 있나. 돌담에 얹어야지. 또는 밭자락 끝에 얹어야지. 4347.5.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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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찾는 아이한테 노래 한 가락



  곁님이 오늘 아침 일찍 시골집을 나선다. 강화섬에서 하는 람타학교 강의를 들으러 간다. 내가 갈까 싶었으나 어제그제 곁님이 끙끙 앓아누운 모습을 보자니, 내가 집을 비울 수 없다. 아프더라도 배우면서 아프면서 천천히 나을 노릇이요, 집에서 아이들과 조용히 지내면서 살림을 매만져야겠다고 느낀다.


  아직 아이들이 일어나기 앞서 일찍 길을 나서는데 큰아이가 눈치를 채고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큰아이가 깬 김에 인사를 하다 보니 아직 자는 작은아이한테도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서려니, 작은아이가 어머니 집을 나간다고 한참 운다. 입으로 인사를 하지 말고 마음으로만 인사를 하고 가야지, 이러면 어떡하나. 며칠 동안 내내 울보가 될 텐데.


  저녁이 되어 두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는, 천천히 재운다. 작은아이는 오늘 많이 뛰놀아 고단했는지 일찍 잠든다. 그런데, 잠든 지 한 시간쯤 지나 갑자기 운다. 아침에 집을 나선 어머니가 떠올랐는가 보다. 눕힌 채 가슴을 토닥이다가 울음이 잦아들 무렵 부엌으로 가서 쌀을 씻는다. 이튿날 아침에 먹을 쌀이다. 쌀을 씻자니 다시 운다. 아이를 안아서 등과 궁둥이를 토닥인다. 울먹울먹하다가 천천히 그친다. 자리에 누이고 이불깃 여민 뒤 노래를 부른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서 나긋나긋 노래를 부른다. 이제 작은아이는 고요히 꿈나라로 간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웃고 잘 노래하다 보면 어머니가 돌아오지. 너희는 너희대로 너희 웃음과 놀이와 노래를 스스로 배우렴. 4347.5.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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