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인터스텔라 : 한정판 스틸북 (2disc) (+SEM 초도한정)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마이클 케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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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Interstellar, 2014



  ‘고전 문학’은 읽을 까닭이 없다. 굳이 읽으려 한다면 읽어도 되지만, 삶을 밝히고 싶은 사람은 ‘고전 문학’을 읽을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고전’은 ‘낡은’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낡은 문학을 읽는다면 내 마음이 새로울 수 있을까? 새로울 수 없다. 우리가 읽을 문학이라면 ‘새로운 문학’이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문학은 무엇인가? 갓 나온 문학이 새로운가? 아니다. 지난해에 나온 문학이라면 새로운가? 아니다. 천 해나 만 해를 묵은 문학이라 하더라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서 새로운 넋으로 이끌 만한 문학일 때에 비로소 ‘새로운 문학’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을 문학은 ‘새로운 문학’이면서 ‘읽을 만한 문학’이어야지, ‘고전 문학’이라든지 ‘명작’이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여서는 삶이 발돋움할 수 없다.


  오늘날 물리학(과학)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고전 물리학’이고, 둘째 ‘양자 물리학’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블랙홀 같은 구멍을 말한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온갖 첨단장비를 써서 우주선을 만든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한정된 연료’로 ‘한정된 우주’만 ‘한정된 여행’을 해서 ‘한정된 정보’만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참모습이다. 고전 물리학으로는 우주여행을 할 수 없고, 고전 물리학으로는 지구별을 새롭거나 아름답게 가꾸는 길을 엿볼 수 없다. 고전 물리학으로는 전쟁무기를 끝없이 만들어서 지구별에 전쟁과 경쟁과 경제개발만 끝없이 되풀이할밖에 없다.


  우주로 가려면 달라져야 한다. 아니, 우주로 가려면 거듭나야 한다. 아니, 우주로 가려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어떻게 해야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아주 쉽고 수수하면서 또렷하게 밝힌다. 우주로 가려면 ‘stay’를 하라고 외친다. ‘스태이’는 무엇인가? ‘있으라!’는 소리이다. ‘여기 있으라!’는 소리이다. ‘여기 나한테 있으라!’는 소리이다. 여기 이곳에서 나를 보면서, ‘내가 나’인 줄 바라보라는 소리이다.


  ‘양자 물리학’은 바로 ‘내가 나’인 줄 바라보도록 이끄는 과학이다. 양자 물리학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인 줄 바라볼 수 없으며, 내가 나인 줄 바라보지 못하기에 ‘새로 태어나’는 길로 가지 못한다. 내가 나인 줄 모르는데 어떤 모습이 되겠는가? 참모습을 알 수 있을까? 슬기롭게 머리를 깨우칠 수 있을까?


  내가 나인 줄 바라보지 못했을 적에,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아저씨는 그저 ‘일류 비행사’일 뿐이다. 내가 나인 줄 바라보았을 적에,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아저씨는 그야말로 ‘내’가 되어, 또 다른 나이면서 새로운 나인 이녁 ‘딸’한테 말을 걸 수 있다. 바로 내가 나한테 말을 거는 셈이요, 내가 너한테 말을 거는 셈이다.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바로 오늘 여기’를 찾아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나인 줄 바라보면서 깨닫기에, 비로소 넷째 조각(넷째 차원, 4차원)이 열리고, 넷째 조각이 열리면서 ‘때와 곳을 넘어서’니,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며, ‘오롯한 사랑’이 된다. 오롯한 사랑이 되면, 이제부터 ‘낡은(고전)’ 것은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따사로운 숨결이 되니, 이제부터 언제나 평화이다. 전쟁도 경쟁도 경제발전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웃이 늘기를 빈다. 멋진 화면과 줄거리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슬기로운 깨달음으로 빛에서 어둠을 짓고 어둠에서 빛을 짓는 기쁜 삶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동무가 늘기를 바란다. 4348.2.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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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 일반판 (1disc)
이안 감독, 이르판 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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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



  ‘파이’라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지었다. 어릴 적부터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하루를 지었고, 어른이 된 뒤에도 언제나 하루를 새롭게 지었다. 다만,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을 뿐인데, ‘파이’는 드넓은 바다에서 꽤 오랫동안 떠돌아야 하던 무렵에 천천히 철이 든다. 삶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면서 이제껏 겪거나 누리지 못한 숨결을 헤아린다.


  밥이란 무엇인가. 목숨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이고, 이 지구별은 무엇인가. 하늘은 어떤 빛이고, 바다는 어떤 물결인가. 나와 범은 서로 어떤 사이요,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는 또 어떤 사이인가.


  ‘파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름이 있지만, 이 이름 말고 스스로 제 넋을 담은 이름을 새롭게 짓고는, 이 이름에 걸맞게 스스로 씩씩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이 다른 길은 파이가 스스로 거듭나는 철든 사람이 되는 길이요, 이 길을 걸어가면서 파이는 다른 어느 누구도 겪거나 누리지 못한 새로운 빛물결을 맞아들인다.


  그러니까, 파이한테는 파이 이야기가 있다. 파이로서 이녁 삶이 있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나한테는 내 삶이 무엇이라 할 만한가. 내가 걷는 길은 어디이고, 내가 걷는 길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듣고 겪고 헤아리는가.


  하늘이 열리는 길을 걸어간 파이는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는가. 내가 겪는 삶은 내 이웃한테 ‘하늘이 열리는 길’을 밝히거나 알릴 만한 이야기가 흐르는가. 비쩍 말라 뱃가죽이 들러붙은 범을 무릎에 누이고 머리를 쓰다듬는 파이는 두 손에 따스한 사랑을 지어서 아름답게 다시 태어났다.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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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1disc)
팀 버튼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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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2005



  어머니와 아버지, 여기에 두 할머니와 두 할아버지가 조그마한 집에서 함께 산다. 늙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두 할머니와 두 할아버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늘 침대에 드러누워 지내고,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일삯을 벌려고 치약 공장에 다니는 한편, 어머니는 집일을 도맡으면서 ‘늙은 어버이 네 사람’을 보살핀다. 찰리라는 어린이는 이와 같은 집에서 자란다. 찰리네 집은 ‘바깥에서 보기’에 몹시 가난할 뿐 아니라 배를 곯는다고까지 할 만하다. 한 해에 한 번 초콜릿을 생일선물로 받을 때가 아니라면 ‘양배추 국물’만 먹는다.


  찰리는 이러한 집에서 어떤 마음일까? 찰리가 지내는 이 집은 어떠한 곳일까? 찰리네 어머니나 아버지는 웃음을 잃는 적이 없다. 다만, 노래를 부르지는 못한다. 찰리는 두 어버이와 두 할머니와 두 할아버지하고 지내는 집에서 넉넉함을 늘 누리고, 이 넉넉함을 바탕으로 꿈을 키운다. 찰리가 키우는 꿈은 ‘초콜릿 공장’이다. 퍽 오랜 나날에 걸쳐 하나씩 조각을 짜맞추어서 ‘초콜릿 공장 모형’을 만든다.


  그런데,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면, 찰리는 ‘한 해에 한 번’만 먹을 수 있던 초콜릿을 ‘자그마치 한 해에 세 차례’째 먹는다. 하나는 생일선물로, 둘은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셋은 길에서 주운 돈으로, 이렇게 세 차례째 먹는다. ‘금딱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다른 집 아이들은 돈이나 권력이나 머리 따위로 ‘금딱지’를 찾는데, 찰리는 오직 스스로 지어서 불러들인 꿈으로 금딱지를 찾는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찰리뿐 아니라 ‘초콜릿 공장’을 지은 아저씨는 모두 꿈을 지어서 이룬 사람이다. ‘초콜릿도 사탕도 먹을 수 없던 집’에서 태어나 자란 ‘윌리 윙카’ 아저씨는 오래도록 꿈을 꾸고 바라면서 생각을 지은 끝에 온누리에 하나만 있는 초콜릿을 만들어서 팔 수 있었고, 찰리 또한 스스로 오래도록 꿈을 꾸고 바라면서 생각을 지었기에 온누리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멋진 보금자리를 지키면서 ‘초콜릿 공장’을 함께 꾸리는 삶을 누릴 수 있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줄거리로도 멋스럽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딥 로이’라는 배우가 보여준 ‘움파 룸파’ 연기가 눈부시다. 꿈과 사랑을 키우는 줄거리만 담으려 했다면 이냥저냥 수수한 영화로 그쳤을 테지만, 이 영화를 웃음과 노래로 빨려들게 이끄는 ‘움파 룸파’란 더없이 아기자기하면서 달콤하다.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꿈과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그러면 꿈과 사랑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나? 웃음과 노래로 이루어진다. 웃음과 노래는 다시 춤과 이야기로 이루어지니,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참말 두고두고 남을 만한 즐거운 이야기잔치라고 하겠다. 4348.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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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01 07:27   좋아요 0 | URL
이야기책과 영화 둘다 잘 본 기억이 납니다.

숲노래 2015-01-01 08:03   좋아요 0 | URL
아이들과 두고두고 보면서 즐거운 작품이에요~
 
은하철도의 밤
스기이 기사브로 감독 / 블루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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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의 밤

銀河鐵道の夜, Night On The Galactic Railroad, 1985



  하늘에 별이 빛난다. 밤에도 낮에도 별은 언제나 빛난다. 밤에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낮별을 볼 수 있을까. 낮에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밤별을 어떻게 바라볼까. 아침이 되어 동이 트면, 지구를 가장 밝게 비추는 해가 다른 뭇 별빛을 잠재운다. 그러나, 햇빛 사이사이 별빛은 이 지구별에 드리우고, 햇빛과 별빛을 고루 느낄 수 있는 가슴이 되면, 사람으로서 이곳에 서서 살아가는 뜻과 숨결을 읽을 수 있을 테지.


  이웃이 서로 아끼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별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동무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햇빛을 늘 보면서도 햇빛이 어떠한 숨결인지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해가 비추는 한낮에도 땅밑으로 파고들어 쳇바퀴 같은 일을 하면서 돈만 바라보는 얼거리가 된다. 낮에는 해를 잊고 밤에는 별을 잊는 도시살이인데다가, 학교도 낮과 밤을 잊은 채 대학입시로 아이들을 들볶는다. 어른도 스스로 깨어날 마음이 없지만, 아이도 스스로 깨어날 틈이 없다.


  만화영화 〈은하철도의 밤〉은 미야자와 겐지 님이 쓴 어린이문학 《은하철도의 밤》을 살뜰히 따르는 작품이다. 두 작품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가. 어린이문학과 만화영화는 미리내와 별과 해와 지구가 서로 어떻게 맞물리면서 삶이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려 하는가. 바로 사랑이고, 사랑을 가슴에 품는 즐거움이며, 사랑을 가슴에 품어 즐겁게 하루를 맞이하려는 슬기와 기운과 꿈이다.


  기쁨과 슬픔은 따로 있지 않다. 꿈과 사랑은 둘로 가르지 못한다. 웃음과 눈물은 한 사람한테서 함께 샘솟는다.


  아이야, 기운을 내렴. 어른아, 힘을 내렴. 우리 눈망울이 맑게 빛날 적에 우리가 두 다리로 선 이 지구별이 환하게 빛난다. 지구별이 환하게 빛날 적에 온누리에 새로운 미리내가 태어나서 다른 먼먼 별에 고운 빛물결로 흘러갈 수 있다. 지구로 찾아오는 고운 별빛처럼, 지구가 보내는 고운 별빛이 어우러지면, 어디에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조물조물 깨어나면서 하얀 노래가 넘치리라. 4347.12.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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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 스페셜 에디션 (2disc) - True Classic
빅터 플레밍 감독, 주디 갈랜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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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The Wizard Of Oz, 1939



  어릴 적에 텔레비전으로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여러 차례 보았다. 만화영화로 나온 〈오즈의 마법사〉도 즐겨보았다. 두 아이와 함께 새삼스레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데, 내가 어릴 적에는 이 영화에 흐르는 ‘노래’는 거의 귀여겨듣지 않았다고 깨닫는다. 집이 날아가고, 도로시가 동무를 만나고, 도로시네 동무들이 무슨 일이든 두려움에 벌벌 떨고, 날개 달린 원숭이가 하늘을 까맣게 덮고, 두 마녀가 뜬금없다시피 바보스레 사라지고, 빨간 구두를 톡톡톡 치고, 이런 모습만 드문드문 떠오른다.


  나는 어릴 적에 무엇을 보았을까. 나는 어릴 적에 영화를 보기는 보았을까. 내가 뛰놀고 사는 우리 집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채, 내가 앞으로 살아갈 길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나날은 아니었을까 하고 곰곰이 돌아본다.


  영화에 나오는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집채와 함께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던 까닭은 제 꿈을 노래에 담아 늘 부르면서 언제나 마음에 담기 때문이다. 마음 깊이 살가운 동무를 바랐기에 동무를 만나고, 동무들과 어떤 일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동무들과 사이좋게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면서 이를 어떻게 이루는가 하고 알아차렸기에 도로시가 스스로 바라는 대로 다시금 ‘새로운 곳(우리 집)’으로 돌아간다.


  마법이란 무엇일까. 남이 못하는 일을 짠 하고 하루아침에 해내는 솜씨가 마법일까? 어느 모로 본다면 이렇게 볼 수 있을 테지만, 마법이란 스스로 온마음을 기울여 삶을 바꾸는 하루라고 느낀다. 스스로 온마음을 기울여 삶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기쁘게 웃고 노래할 테지. 삶을 스스로 바꾸면 아주 기쁘고 신이 나면서 춤을 추고 기운이 넘칠 테지. 어떤 부자도 ‘웃고 노래하는 사람’처럼 넉넉하거나 너그럽지 못하다. 어떤 권력자도 ‘웃고 춤추는 사람’처럼 기운차거나 씩씩하지 못하다. 어떤 글쟁이나 지식인도 ‘웃으며 노는 사람’처럼 멋스럽거나 아름답지 못하다.


  ‘무지개 저편’이나 ‘무지개 너머’를 헤아려 본다. 이곳에서 보기에 저곳이 무지개 너머가 될 텐데, 저곳에서는 바로 이곳이 무지개 너머이다. 오늘 이곳에 있는 내가 저곳을 그린다고 하면, 저곳에 있는 너는 바로 이곳을 그린다. 내가 그리는 저곳, 그러니까 무지개 너머로 가자면 나는 마음속에 깃든 앙금이나 응어리를 스스로 지우거나 털면서 새로운 넋이 되어야 한다. 가방을 싸들고 내뺀다고 해서 일이 풀리거나 말썽이 사라지지 않는다. 똑바로 바라보면서 마주하고 지켜보아야 비로소 스스로 거듭난다. 뛰어난 마법사한테 찾아가야 이루는 마법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바꾸어야 이루는 마법이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어릴 적에 여러 차례 보았어도 어느 대목이든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날개 달린 원숭이’만 무서워 할 뿐이었는데, 어른이 되어 아이들과 이 영화를 다시 볼 적에는 ‘내가 나답게 거듭나는 길’을 어느 만큼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나는 나한테 사랑스럽고 반가우면서 아름다울 무지개 너머를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새벽별이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빛나는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본다. 방바닥에 불을 넣는다. 4347.12.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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