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피아니스트의 전설 : 일반판 (47분 추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팀 로스 외 출연 / 아트비젼엔터테인먼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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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틴 헌드레드’ 이야기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00, 1998



  배에서 태어나 배에서 죽은 ‘피아노 연주자(피아니스트)’가 있다. 이녁은 배에서 태어나 살면서 뭍을 밟은 일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이녁이 태어났다는 ‘출생기록’이 없다. 그리고, 배에서 죽었기 때문에, 어디에도 이녁이 죽었다는 ‘사망기록’이 없다. 이녁은 배에 보금자리를 꾸렸고, 배에 모든 살림을 두었으니, 이녁과 얽힌 발자취는 다른 곳에 없다. 이리하여, ‘피아노 연주자’ 한 사람과 얽힌 이야기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쏭달쏭하다고 여길 만하다. 거짓으로 여겨도 되고, 참으로 생각해도 된다.


  생각해 보면, ‘피아노 연주자’뿐 아니라 ‘배를 모는 밑바닥 일꾼’한테도 출생기록이나 사망기록이 없다. 커다란 배가 바다를 가르도록 배 밑바닥에서 내내 일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이들이 ‘종(노예)’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이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아프리카에서 종처럼 팔린 사람이라면, 이들이 온 아프리카라는 나라에서 이들과 얽혀 ‘출생기록’을 꾸린 적 있을까?


  영화 〈‘나인틴 헌드레드’ 이야기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에 나오는 ‘나인틴 헌드레드’는 1900년에 태어난 아기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이 사람은 과일상자에 담긴 채 배에 남았는데, 과일상자에 적힌 글(TD. 레몬)도 이녁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니까, 이름이란 덧없기도 하지만 뜻있기도 하다. 우리 삶은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삶은 어느 한곳에 붙박히지 않는다. 우리 삶은 깊은 바다처럼 흐르고, 우리 이야기는 깊은 바다를 품는 너른 하늘처럼 파랗다.


  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피아노를 만난 아이가 피아노를 치면서 맞이하는 모든 이야기는 바다와 바람한테서 온다. 그리고, 바다와 바람을 배에서 함께 쐬면서 이 바다와 바람을 가르는 사람들한테서 온다. 무엇보다, 피아노를 마주한 사람이 스스로 마음속에서 이야기를 길어올린다. 이야기는 세 갈래이다. 바다와 바람. 다른 사람들. 여기에, 바로 나.


  ‘피아노꾼’이랄까, ‘피아노지기’랄까, ‘피아노님’이랄까, 피아노를 한몸으로 여기고, 배도 한마음으로 생각하는 ‘나인틴 헌드레드’는 ‘바다밖에 모르는 사람’일까, 아니면 ‘바다만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바다를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바다를 가르는 바람을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바다를 가르는 바람을 마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일까.


  무엇을 바라보는가. 어디를 바라보는가. 어느 곳에 서서 누구를 바라보는가. 어디로 나아가려는 삶인가. 무엇을 누리면서 마음에 이야기씨앗 한 톨을 심으려는가. ‘나인틴 헌드레드’한테는 피아노와 배와 바다와 바람이 있는데, 우리한테는 무엇이 있는가. 4348.3.8.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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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畵ドラえもん「新·のび太の宇宙開拓史」アニメ版 (てんとう蟲コミックスアニメ版) (コミック)
후지코 F. 후지오 / 小學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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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라에몽 :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

ドラえもん―新のび太の宇宙開拓史, 2009



  아이들은 만화를 보면서 자란다. 오늘날 아이들은 만화를 보면서 자란다. 옛날에는 만화가 따로 없었으니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를 볼 일이 없었으나, 문화나 문명이나 예술이나 책이라고 하는 것이 발돋움하면서 만화가 함께 태어났고, 이무렵부터 아이들한테는 둘도 없이 반가운 동무로 만화가 곁에 있다. 만화는 언제부터 아이들한테 살가운 동무가 되었을까? 아무래도 도시가 생기면서 ‘아이가 뛰놀 자리’를 어른한테 자꾸 빼앗길 뿐 아니라, 마음껏 하늘을 가르지 못하고 냇물을 마시지 못하는 몸으로도 꿈을 키우려는 뜻이 만화에 고이 깃들리라 느낀다. 왜 그런가 하면, 만화가 이 땅이나 이웃나라에 아직 없던 때에는, 모든 아이들이 숲에서 뛰노는 숲아이였고, 모든 아이들이 어버이와 함께 시골살이를 누리는 시골아이였다. 숲을 이루는 시골에서 하늘과 냇물과 흙과 나무와 풀과 꽃과 벌레와 짐승과 새를 마주하면서 푸르고 파란 마음으로 살았으니, 이러한 하루는 언제나 ‘만화와 같’고 ‘영화와 같’다고 할 만하다.


  해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하나씩 태어나는 만화영화로 ‘극장판 도라에몽’이 있다. 이 가운데 2009년에 나온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ドラえもん―新のび太の宇宙開拓史)〉를 보면, ‘때와 곳(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우주 문’ 이야기가 흐른다. 때와 곳을 가로지르는 우주 문이란 무엇인가. 때와 곳은 왜 가로지르는가. 온누리에는 지구별 말고 어떤 별이 더 있고, 다른 별에는 어떤 삶을 짓는 어떤 사람이 이웃으로 있을까. 아름답게 발돋움한 문명은 어떤 모습이요, 온누리를 휩쓸면서 바보스러운 길을 걸어 이웃을 이웃 아닌 종으로 부리려는 사람은 또 어떤 짓을 할까. 지구사람 아닌 별사람도 지구에서 하듯이 바보스러운 짓을 하고, 지구사람 아닌 별사람도 지구에서와 같이 사랑스러운 삶을 지을까.


  때와 곳을 가로지르는 ‘우주 문’은 문짝 모습을 할 수 있지만, 아무런 모습을 안 할 수 있다. 어떤 모습이든 대수롭지 않다. 어린이가 보는 만화영화이기에 한결 쉽게 느끼면서 생각하도록 ‘어디로든 문’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구나 싶은데, 맑은 넋으로 착하게 삶을 지으려 하는 다른 별 사람들 꿈이 잘 녹아드는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라고 느낀다.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를 보면, 진구(노비타)는 이슬이(시즈카)한테 거의 기대지 않고 따로 매달리지 않는다. 이 만화영화에서 진구는 지구별 아닌 다른 새로운 별에서 ‘나다움’과 ‘기쁨’을 누린다. 누군가 저(진구)를 바라거나 기다리는 다른 새로운 별이 그립고 반가우면서 이끌린다. 지구별에서는 늘 퉁퉁이(자이언)한테 얻어맞지만, 다른 새로운 별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놀라운 힘을 길어올려 이웃과 동무를 돕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 누구한테나 놀라운 힘이 있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제대로 느낄 수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놀랍고 새롭게 멋진 힘을 쓴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지 않으면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도 못 쓴다. 장난감 총을 아주 잘 쏘는 진구이지만, 두려움에 떨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마음을 오롯이 모으면 진구도 ‘못 하는 일이 없는’ 아이로 거듭난다. 이슬이는 이런 진구를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랑스러운 아이일 테지. 그래서 이슬이는 언제나 진구와 퉁퉁이·비실이 사이를 따사롭게 이어 준다.


  〈도라에몽, 새 노비타 우주개척사〉에서 진구가 지구별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새로운 별에 남는다면, 이리하여 다른 새로운 별에 남아서 그곳 우주선을 새롭게 고쳐서 ‘차원 넘나드는 여행’을 해서 지구별로 돌아온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엮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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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 일반판 (3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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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Snowpiercer, 2013



  적잖은 사람이 영화 〈설국열차〉를 보았다 하고, 이 영화가 좋았다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안 본(보았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하나였다). 먼저, 시골에는 극장이 없다. 그러니, 시골사람은 극장에 갈 수 없고, 극장에 갈 일도 없으며, 극장에 갈 일조차 없다. 시골에는 극장보다 훨씬 재미난 쉼터가 많다. 이를테면 바닷가라든지 골짜기라든지 마을 빨래터라든지 ……. 그러면, 〈설국열차〉는 보았는가? 디브이디로 나오고 나서 보았다. 한국에서 거의 천만 사람 가까운 숫자가 이 영화를 보았다 하니, 나는 ‘한국사람 아닌 사람’으로도 손꼽을 만할 텐데, 얼마 앞서 본 〈인터스텔라〉를 뺀다면, ‘한국 역대 관객 순위’ 열 손가락 안팎에 드는 영화 가운데 내가 본 영화는 거의 없다. 〈괴물〉은 지난해에 비로소 보았고, 〈아바타〉는 지지난해쯤 본 듯하다. 〈디워〉는 극장에서 본 듯한데, 〈동막골〉도 지지난해쯤 보았지 싶다.


  그러면 이런저런 영화를 왜 안 보았거나 뒤늦게 보는가? 내 마음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영화는 젖히고 〈설국열차〉를 2015년에 접어들어 본 느낌은 어떠한가? 따분하며, 덧없는 싸움질이 흐르고, 덧없는 싸움질조차 매우 어설프구나 싶다. 어린 가시내가 앞칸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올는지 미리 알아채는 모습이 곧잘 나오는데, 사람한테는 누구나 ‘셋째 눈(온눈, 제3의 눈)’이 있기 때문에, 이 눈을 뜬다면 얼마든지 알아챌 수 있다. 바퀴벌레 먹는 모습이 끔찍하기라도 하듯이 나오는데, 항생제와 농약과 비료로 절디전 곡식과 열매와 고기를 먹는 오늘날 사람들 밥버릇은 안 끔찍할는지 아리송하기도 하다.


  아무튼, 영화 〈설국열차〉는 만화책 《설국열차》를 바탕으로 찍었을 텐데, 만화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찬찬히 살리려는 몸짓이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영화에서만 남달리 보여줄 수 있는 숨결도 따로 도드라지지 않는다고, 아니 나타나지조차 않는다고 느낀다.


  다만, 영화 〈설국열차〉는 만화책 《설국열차》에서 가장 아쉽고 어설프다고 할 만한 대목을 영화감독이 눈치를 챈 듯, 이 대목을 맨 마지막에서 넌지시 보여준다.


  그렇다면, 만화책 《설국열차》에서 무엇이 가장 아쉽거나 어설픈가? 바로 ‘열차에 그대로 머물면 모두 죽는다’는 대목에서 아무도 벗어나려 하지 못하는 모습이 가장 아쉽고 어설프다. 만화를 그린 이한테는 이런 생각힘(상상력)이 없었구나 싶다. 왜냐하면, 끔찍한 전쟁무기 때문에 지구별이 꽁꽁 얼어붙었으면, ‘끔찍한 전쟁무기를 만든 생각과 힘과 슬기’를 ‘꽁꽁 얼어붙은 지구별이 다시 녹을 수 있도록 이끌 생각과 힘과 슬기’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이 이를 깨닫고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었는지, 아니면, 원작 만화와는 아무튼 다르게 꾸미고 싶어서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끼워넣었는지 알 길은 없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두 아이가 살아남아서 ‘눈이 그치는 바깥누리’로 걸어서 나가는 모습을 그리지 않았으면, 나는 〈설국열차〉라는 영화를 한낱 덧없는 돈놀이로 흐르다가 그친 쓰레기 영화라고밖에 더 할 말이 없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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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に花 (單行本)
太田 蘭三 / 角川書店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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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이 영화는 디브이디가 없구나. 참 아쉽구나...

..

시니바나
死に花, Shinibana, 2004


  그루터기에 꽃이 핀다.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뎅겅 베고 나서 그루터기만 남지만, 이 그루터기에 꽃이 핀다. 몸통이 모두 잘렸어도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줄기가 하나 오르고, 새로운 줄기에서는 새로운 잎이 돋으며, 새로운 움이 트니, 그루터기에서도 꽃이 핀다.

  모든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줄기가 오르지는 않는다. 몸통이 뎅겅 잘린 뒤 그만 슬픔에 잠겨 죽거나 깊이 잠드는 그루터기가 있고, 몸통이 뎅겅 잘린 뒤에도 얼마든지 새 줄기를 올려서 새롭게 자라려는 그루터기가 있다.

  영화 〈그루터기꽃(시니바나死に花)〉를 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잔뜩 나오는 영화를 본다. 참말 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이가 많다. 이 영화를 찍을 무렵만 하더라도 거의 다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이러한 영화를 찍었을까. 이 영화는 어떤 숨결을 속삭이려고 우리한테 찾아올까.

  겉보기로는 으리으리하다는 ‘양로원(실버타운)’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하루하루 기쁜 삶일까? 으리으리하니까 기쁠까? 아니면, 으리으리한 곳에 버려진 채 사회와는 동떨어진 하루를 죽음을 바라보면서 걸어야 할까?

  삶은 돈으로 짓지 않는다. 기쁨은 돈이 끌어들이지 않는다. 사랑은 돈이 넉넉하대서 이루지 않는다. 삶과 기쁨과 사랑은 언제나 ‘어린이 같은 마음’이 되어 ‘씨앗 한 톨 심는 신나는 놀이’일 때에 스스로 일으킨다.

  아흔아홉 살을 맞이한 할아버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흔아홉 살을 기뻐할 살붙이가 곁에 없기 때문이다. 아흔아홉 살 할아버지네 살붙이는 어디에 있을까? 땅속에 있다. 왜 땅속에 있는가? 일본이 일으킨 엉터리 전쟁 때문에 방공호에 숨었다가 그만 네 사람이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혼자 어처구니없게 살아남았으니 할 말이 없을밖에 없다. 혼자 살아남은 채 쉰 해 남짓 목숨을 이었으니 그야말로 할 말이 없을 테지. 누구한테 말을 하나.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나.

  양로원(또는 실버타운)에서 가까운 동무로 지내던 할아버지 한 사람이, 아주 튼튼해 보이던 할아버지 한 사람이 갑작스레 일찍 숨을 거둔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는 다른 동무 할아버지한테 꿈을 한 가지 남긴다. ‘은행털이’를 하라는 꿈을 남긴다. 할아버지들은 뜻을 모은다. 양로원(또는 실버타운)에서 할 일이 하나도 없이, 술만 마시거나 여자를 밝히거나 책만 파면서 따분한 하루였는데, 비로소 할 일이 생겼다.

  그루터기에 꽃이 핀다. 그루터기 스스로 꽃을 피우려는 마음이 되기에 꽃을 피운다. 그루터기가 그저 시들시들거리다가 숨을 거둔다. 그루터기 스스로 아무런 꿈을 마음에 담지 못했기에 그대로 숨을 거둔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다. 삶을 생각하기에 삶이요, 죽음을 생각하니까 죽음이다. 목숨이 붙었기에 삶이 아니다. 꿈을 짓는 생각이 있는 사람만 언제나 삶이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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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 런
톰 튀크베어 외 감독, 니나 페트리 외 출연 / 썬엔터테인먼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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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롤라 (롤라 런)
Run Lola Run, Lola Rennt, 1998


  영화 〈달려 롤라(롤라 런, Run Lola Run, Lola Rennt)〉를 보면 세 가지 이야기가 흐른다. 다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다 다른 이야기가 흐른다. 다 같은 사람들이 다 같은 때에 살지만 다 다른 이야기가 흐른다. 왜 그럴까? 세 가지 이야기를 보면, 세 가지 때에 세 가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몸짓이 달라지고, 몸짓이 달라지니 ‘아주 작은 몸짓’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하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침을 하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짓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는가? 아침에 골을 부리거나 이맛살을 찡그리면 하루는 어떻게 될까? 아침에 아이들을 안고 어르면서 입맞추면 하루는 어떻게 될까? 아침에 밭에 가서 풀을 뜯고 맑은 바람을 마시면 하루는 어떻게 될까?

  날마다 똑같은 몸짓으로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내 하루는 늘 똑같을 수밖에 없다. 날마다 새로운 몸짓으로 새로운 생각을 한다면 내 하루는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생각하지 않기에 아무것도 못 하거나 못 이루고 만다. 생각하기에 모든 것을 이룬다. 생각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늘 무엇이든 이룬다.

  영화 〈달려 롤라〉에서 처음에는 롤라가 아무 생각이 없다. 무턱대고 아버지한테 기대고, 무턱대고 짝꿍한테 다가가려고만 한다. 이리하여 롤라가 죽는다. 이때, 죽음 문턱에 닿는 롤라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끝없이 생각하면서 온힘을 쏟고, 이 힘에 따라 롤라는 ‘둘째 길’에 들어선다. 둘째 길에서 롤라는 조금 더 생각한다. 무턱대고 아버지한테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이 얕다. 얕은 생각으로 뜻을 이루려 하니, 어이없이 짝꿍이 차에 받혀 죽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때 롤라는 다시금 가없는 생각을 한다. 다시금 이대로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젖 먹던 힘을 짜내고, 어머니 뱃속에 있던 기운까지 쏟아내면서 ‘셋째 길’에 들어선다. 셋째 길에서 롤라는 서두르지 않는다. 셋째 길에 들어선 롤라는 앞선 두 길에서와 ‘똑같이’ 달리지만, 처음부터 달림새가 다르다. 외곬에서 사나운 개와 장난꾸러기 위로 훨훨 날아서 계단을 가로지른다. 둘레를 가만히 살피면서 달린다. 롤라 혼자만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신나게 달린다. 롤라는 생각하고 다시 생각한다. 철없이 아버지한테만 기대려 하던 ‘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본다. 나를 나대로 바라볼 수 있는 롤라는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스스로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이제 롤라는 ‘롤렛 게임’을 하는 카지노에 들어간다. 카지노라는 곳은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바보스레 휩쓸리면 온 집안을 들어먹지만, 온마음을 쏟으면 온갖 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롤라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한탕을 얻으려’는 생각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리하여, 첫 열매를 얻는다. 첫 열매를 얻고 나서 롤라는 이제 ‘내 길’을 안다. 처음 카지노에 들어설 적부터 ‘그런 차림’이면 안 된다고 하지만, 롤라한테는 ‘안 된다는 생각’이 없고, 100마르크에서 돈이 모자라지만 ‘모자라다는 생각’이 없다. 게다가, 카지노에 들어선 다음 롤라를 내쫓으려는 사람들한테 ‘나는 내가 할 것이 있다’는 뜻을 다부지면서 가볍게 보드라운 말로 읊는다. 이러고 나서 롤라는 꼭 한 가지를 한다. 이제껏 롤라한테 있던 모든 기운을 한꺼번에 쏟아서 숨을 내뱉는다. 숨을 외친다. 숨을 터뜨린다. 롤라가 내뱉고 외치며 터뜨리는 숨은 카지노에 있는 모든 유리잔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들이 귀청이 떨어지도록 할 만큼 놀랍다. 새롭다. 이리하여 롤라가 바라는 숫자대로 롤렛이 끝나고, 롤라는 이녁 짝꿍을 살릴 돈을 얻는다.

  그러면 영화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롤라가 다 했으니 이대로 끝날까? 아니다. 롤라는 둘레 사람들을 바꾸면서 제 삶을 바꾸었다. 이리하여, 롤라 짝꿍도 롤라가 내뿜은 사랑스러운 기운을 받아서 스스로 바뀌었다. 총을 내려놓는다.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 그리고, 깨끗하게 손을 씻는다. 어둠에서 빛이 되고, 빛에서 새로운 길로 간다. 롤라와 짝꿍은 가볍게 다시 만나고, 모든 앙금을 털었으니 홀가분하게 웃으면서 손을 맞잡고 아주 새로운 길을 걷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어서 보여주는 영화인 〈달려 롤라〉이다. 달리면 된다. 무턱대고 달리면 안 되지만,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면서 사랑을 가슴에 담아서 달리면 다 된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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