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Charlotte's Web Collection (샬롯의 거미줄 컬렉션) (2013)(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Paramount Catalog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샬롯 거미줄

Charlotte's Web, 2006



  거미 ‘샬롯’이 있다. 돼지 ‘윌버’가 있다. 여리고 작은 돼지를 아끼는 어린 가시내가 있다. 어린 가시내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어린 가시내를 사랑하는 아버지한테는 늘 이녁을 믿고 보살피는 곁님이 있고, 이웃이 있다. 그리고, 아주 수수하면서 투박하다고 하는, 딱히 이름이 날 일이 없다는 시골마을이 있다. 〈샬롯 거미줄(Charlotte's Web)〉은 아주 수수하고 투박한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일을 들려준다.


  거미는 어디에나 있다. 돼지도 어디에나 있다. 어린 가시내랑 아버지와 어머니도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디에나 흔하거나 똑같이 있지 않다.


  거미가 거미줄을 짜는 일은 무엇일까? 그냥 흔하거나 너른 일일까? 아니면 언제나 놀라운 모습일까? 우리가 거미줄을 걷어내어도 거미는 이튿날이면 새 거미줄을 짠다. 이 거미줄을 또 걷어내어도 거미는 다음날에 새 거미줄을 짠다.


  〈샬롯 거미줄〉에 나오는 거미한테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따스한 마음’이다. 둘째는 ‘사람들이 알아보는 글씨를 거미줄로 짤 수 있는 솜씨’이다. 거미 샬롯한테는 따스한 마음만 있지 않다. 그리고, 거미 샬롯한테는 빼어나거나 놀라운 솜씨만 있지 않다. 거미 샬롯한테는 두 가지가 함께 있으며, 어느 한 가지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돼지 윌버는 거미 샬롯한테 ‘돼지인 내가 참말 대단하거나 눈부시거나 놀랍거나 다소곳한’가 하고 묻는다(some pig, terrefic, radiant, humble). 거미 샬롯은 돼지 윌버한테 딱히 어떤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다만, 거미와 돼지는 서로 동무라고 말한다. 거미는 돼지더러 ‘네(돼지)가 나(거미)를 다른 짐승들처럼 겉모습이나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고, 기쁘게 동무로 맞이해 주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 마음과 말이 모든 일이 놀랍고 사랑스레 일어나는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다.


  삶이 빛나는 까닭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떠도는 이야기라든지,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든지, 널리 알려진 이야기 따위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저마다 제 삶에서 스스로 빚어서 길어올리는 이야기가 있기에 삶이 빛난다. 거미 샬롯이 왜 아름다운가? 샬롯이 낳은 새끼 거미가 왜 아름다운가? 돼지 윌버가 왜 사랑스러운가? 어린 가시내가 왜 착한가?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왜 믿음직한가? 모두 이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면서 동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책으로 1952년에 처음 나오고, 영화로도 나온 〈샬롯 거미줄〉은 한국에서 “우정의 거미줄”이라는 이름으로도 옮기기도 했다. 거미와 돼지 사이에 피어난 ‘우정’이라고 할 텐데, ‘우정’이라는 한자말은 모든 실마리를 풀어 주지 못한다. 거미와 돼지는 서로 아끼고 어깨동무를 하는 ‘따스한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을 ‘열린 넋’으로 가꾸며, 이 넋을 ‘기쁘며 고운 솜씨’로 가다듬는다. 거미와 돼지는 서로 ‘참다운 사랑’으로 만난 맑고 환한 숨결이다. 4348.6.1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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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주피터 어센딩
라나 워쇼스키 외 감독, 채닝 테이텀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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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날다 (주피터 어센딩)

Jupiter Ascending, 2015



  ‘별을 나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르는 영화 〈주피터 어센딩〉을 본다. 열두 살부터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열두 살 어린이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어느 만큼 생각하면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실마리를 얻을 만할까. 스물네 삶 젊은이나 마흔여덟 살 어른은 이 영화를 보면서 저마다 생각과 슬기와 셈과 철을 얼마나 곱게 가다듬을 만할까.


  《외계인 인터뷰》라는 책이 있고, 이 책을 놓고 제법 긴 느낌글을 쓴 적이 있다(http://blog.naver.com/hbooklove/220107844847). 《외계인 인터뷰》라는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쓸 적에 ‘새마을운동’과 ‘제도권학교’를 퍽 길게 이야기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채 바보스러운 굴레에 갇히도록 하는 얼거리를 따지지 않고서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 한 사람을 나무라거나 우러른다고 하더라도, 이쪽이나 저쪽 모두 ‘새마을운동’과 ‘제도권학교’ 울타리에서 맴돌 뿐이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똑같이 시멘트를 사랑하고, 대학교에 목을 맨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시골에서 살려고 하지 않으며, 도시를 아름답고 푸른 숲으로 가꾸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대통령 한 사람을 나무라든 우러르든,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사랑스레 짓는 길을 바라보려고 하는 하루를 여는 사람이 퍽 드물다고 느낀다. 왜 그러할까?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사랑스레 삶을 짓는 사람은 대통령을 바라보지 않는다. 삶짓기를 하는 사람은 신문도 방송도 책도 안 본다. 삶짓기를 하는 사람은 대학교도 제도권학교도 졸업장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삶짓기를 하는 사람은 바람을 읽고 흙을 읽으며 나무를 읽는다. 삶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은 별을 읽고 온누리를 읽는다. 삶을 사랑스레 지으려는 사람은, 서로 마음으로 꿈을 읽는다.


  영화 〈별을 날다(주피터 어센딩)〉에서 지구가 어떤 별인가 하는 대목을 참으로 똑똑히 보여준다. 지구는 ‘노예 별’이다. 다만, 스스로 노예인 줄 모르는 노예로 가득한 별이다. 지구는 틀림없이 ‘노예 별’인데, 온누리(은하계)에서 아주 구석진 곳에 있는 별일 뿐 아니라, 온누리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 별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가? 지구라는 별은 대단히 작으면서도, ‘대단히 작은 것 하나’에서 모든 것이 비롯하기 때문이다. 씨앗 한 톨이 우람한 나무가 되듯이, 대단히 자그마한 지구별 하나가 온누리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그러니, 아무리 무시무시한 힘을 뽐내는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사람 하나’가 이 무시무시한 힘과 울타리를 깨부술 수 있다. ‘따스한 숨결이 흐르는 사랑이라는 마음’이라면, 오직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노예인 모습을 떨쳐내고는, 온누리를 뒤흔들 기운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눈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보기’는 하지만,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 제대로 보려는 생각조차 못한다. 도깨비나 도깨비불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마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맨눈으로 ‘옵스’를 보거나 ‘차크라’를 보거나 ‘밴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여느 때에는 머리도 생각도 제대로 열지 않은 탓에 코앞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못 알아보는 사람이니, 사람은 그저 노예에 머문다. 그렇지만, 스스로 머리를 불태워서 불바람을 온몸에 일으키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슬기로운 숨결이 바로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은 별을 날아야 한다. 별을 날지 못한다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노예(종)가 된다. 생각이 없는데다가 별을 날지 않으려는 사람은, 영화 〈주피터 어센딩〉에 나오듯이 ‘다른 외계사람’이 수만 해를 살도록 도와주는 ‘물(생명수)’이 될 뿐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노예인 사람이 ‘다른 외계사람이 수만 해를 살도록 돕는 물’이 된다. 이 기운을 알아차리고 제대로 보아야 한다. 〈주피터 어센딩〉은 〈매트릭스〉 다음을 노래하는 영화이다. 〈매트릭스〉는 ‘나’를 돌아보도록 하는 영화라면, 〈주피터 어센딩〉은 ‘너’를 바라보도록 하는 영화이다. 4348.5.2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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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워터 호스
제이 러셀 감독, 에밀리 왓슨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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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호스
The Water Horse : Legend Of The Deep, 2007


  ‘켈트’라는 삶을 이루는 사람들은 ‘워터호스’라고 하는 ‘물님’ 또는 ‘바닷님’을 보기 몹시 힘들다. 그렇지만, 켈트 겨레는 워터호스라고 하는 님(물님·바닷님)을 거룩하게 모시면서 고이 여긴다. 늘 바다를 옆에 끼면서 삶을 잇는 사람들은 바다를 너른 품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한국에서 한겨레라고 하는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은 ‘미르’라고 하는 물님이나 하느님을 보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한겨레는 예부터 미르라고 하는 님을 거룩하게 받들면서 고이 여긴다. 다만, 오늘날 같은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미르를 그리려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도깨비라든지 지킴이를 살피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느낀다.

  워터호스를 본 사람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서로 말을 섞기 힘들다. ‘괴물’이 아닌 ‘물님’을 본 사람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서로 마음이 다르기 마련이다. 가만히 보면, 눈부시게 쏟아지는 밤별을 본 사람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여러모로 다르다. 짙푸른 풀내음이 가득한 숲바람을 쐬는 사람하고 쐰 적 없는 사람도 여러모로 다르다.

  전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랑, 전쟁터에서 장교나 지휘관 노릇을 하면서 노닥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둘은 또 얼마나 다를까. 전쟁터에서 목숨을 거의 잃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하고, 전쟁영웅이 되려는 바보짓을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둘은 또 얼마나 다르겠는가.

  군대나 전쟁무기가 있기 때문에 평화롭지 않다. 이쪽 나라도 저쪽 나라도 모두 군대나 전쟁무기가 아니라 ‘사랑’하고 ‘꿈’이 있어야 평화롭다. 나라를 지키는 힘은 사랑하고 꿈이다. 총이나 칼이나 탱크가 나라를 지켜 주지 않는다. 총이나 칼이나 탱크는 서로 윽박지르는 멍청한 몸짓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서로 동무나 이웃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내가 너한테 총을 겨누는데, 네가 나랑 동무가 될까? 네가 나한테 칼을 휘두르는데, 내가 너랑 이웃이 될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이다. 아무렴, 그렇다. ‘사람’과 ‘워터호스’는 어떻게 서로 동무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마음으로 아끼고 생각으로 그리면서 함께 짓는 사랑을 헤아릴 때에 두 넋은 비로소 동무나 이웃이 된다.

  영화 〈워터호스〉를 보면 합성화면이라든지 그래픽이 이모저모 어설프기는 하다. 아무래도 이런 대목을 조금 더 살피지 못해서 아쉽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첨단장비로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어야 하지는 않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영화이다. 이야기가 없는 책은 책이 아니요, 이야기가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워터호스〉에서는 전쟁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멍텅구리와 같은 짓인가를 넌지시 보여주면서, 두 넋(사람과 워터호스라는 님)이 동무로 지내려면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를 차분히 알려준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4348.5.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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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 [할인행사]
캐롤 발라드 감독, 캠벨 스코트 외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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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Duma, 2005



  아이는 무엇을 배울 때에 즐겁게 살아갈까.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무엇을 보고 배우면서 사랑을 삭일 적에 아름다운 숨결이 될까. 나는 오늘 어른으로 살고, 지난날에 아이였다. 오늘 아이인 숨결은 머잖아 어른이 된다. 곧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날 테고, 곧 새로운 어른들이 나타날 테지. 이들은 저마다 어떤 넋과 숨결과 목숨으로 이 땅에서 삶을 지을 때에 사랑스럽다고 할 만할까?

  영화 〈듀마〉는 그저 영화일 수 있지만, 그저 영화라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고 들과 숲을 이웃으로 삼는 아이한테는 제도권학교가 덧없다. 도시에서 제도권학교를 다니면서 온갖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여서 일자리를 얻는 아이한테는 시골과 들과 숲은 뜻이 없다.

  무늬범(표범)은 어떤 짐승인가? 숲짐승이다. 어떤 숲짐승인가? 스스럼없고 홀가분하게 삶을 가꾸려는 숲짐승이다. 그러니, 영화 〈듀마〉에 나오는 ‘젠’과 ‘듀마’는 서로 동무가 될 수 있다. ‘젠’이라는 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시골일과 삶일을 안다. 이와 달리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학교에는 다니면서 공부는 잘할는지 모르나, 시골일도 삶일도 모른다. 게다가 도시 아이들은 듀마라고 하는 무늬범을 그저 무서워하기만 한다.

  영화에 나오는 아이 ‘젠’은 어릴 적부터 무늬범을 한식구로 삼아서 함께 살았으니 무서워하지 않는다고도 하겠으나,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왜 두려움이 있어야 하는가? 왜 숲이나 들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왜 삶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우리는 저마다 즐겁게 삶을 짓는다. 우리는 스스로 기쁘게 사랑을 노래한다. 나는 영화 〈듀마〉를 보면서 바로 이 대목을 읽는다. 그래서 나 혼자서도 이 영화를 기쁘게 보고, 여덟 살과 다섯 살 두 아이와 함께 차근차근 함께 본다. 얼마나 아름다운 영화인가.

  삶은 객관도 주관도 아니다. 삶은 교육도 훈육도 아니다. 삶은 정석도 비주류도 아니다. 삶은 오로지 삶이다. 삶은 사랑으로 빚는 아름다운 하루이다. 하늘은 파랗고 들은 푸르다가 누렇다. 숲은 언제나 푸르고, 모든 목숨은 뜨거운 피로 끓으면서 따스하다. 4348.5.10.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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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마니 대원 애니메이션 아트북 20
조앤 G. 로빈슨 지음, 선우 옮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 대원키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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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가 있던 자리 (추억의 마니)

思い出のマ-ニ-, When Marnie Was There, 2014



  ‘안나’라는 아이와 ‘마니’라는 아이가 나오는 만화영화를 본다. 두 아이는 여느 이름이 아니다. 영어로 붙인 이름이라고 할까. 가만히 보면, 안나도 마니도 눈알이 파랗다. 안나는 까만 기운이 도는 파랑이라면, 안나는 맑게 파랗다. 안나는 머리카락이 밤빛이나 흙빛이라면, 마니는 머리카락이 샛노랗다.


  둘은 어떤 사이일까. 둘은 어떤 삶을 지냈을까. 둘한테는 언제나 가시밭길인 삶일까. 둘은 기쁨도 즐거움도 없이 늘 괴롭거나 고단한 하루를 누려야 했을까.


  안나는 마니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고, 마니는 안나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내 둘은 누가 누구를 부럽게 여길 까닭이 없이 스스로 삶을 새롭게 일구면 되는 줄 알아차린다. 서로서로 아끼고 기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어디에서나 언제나 스스로 가슴속으로 사랑을 지필 수 있는 줄 깨닫는다.


  여느 자리에서는 웃음도 보이지 않고 눈물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오직 둘이 있는 동안에는 함께 웃고 함께 운다.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둘 사이에만 맺는 따사로운 믿음과 꿈과 이야기가 흐른다.


  마니가 있던 자리는 바로 안나가 있던 자리이다. 마니가 생각하는 꿈은 바로 안나가 생각하는 꿈이다. 마니가 바라는 사랑은 바로 안나가 바라는 사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있다. 두 사람은 활짝 열어젖힌 마음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다. 마음을 닫으면 못 만나지만, 마음을 열기에 만난다.


  안나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웃음을 짓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낫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는 할머니 숨결을 이어받은 새로운 사랑이다. 그리고, 마니도, 아마 먼 옛날에 마니를 낳은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그러니까 마니한테 할머니가 되는 분한테서 사랑스러운 숨결을 이어받은 바람과 같은 넋이리라.


  바람이 한삶을 거쳐 이 다음 삶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꽃이 한살이를 거쳐 이 다음 한살이에서 새롭게 자란다. 사람이 한사랑을 거쳐 이 다음 사랑에서 새롭게 무르익으면서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나는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았을까. 우리 집 아이들은 내 어버이(아이들한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을까.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앞으로 낳을 새로운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 숨결이 될까. 푸르게 우거지는 숲과, 파랗게 빛나는 못물과 하늘, 여기에 두 아이 맑은 눈망울이 파랗게 눈부신 모습을 가만히 헤아린다.


  그나저나, 일본에서는 이 만화영화에 〈思い出のマ-ニ-〉라는 이름을 붙였고, 영어로는 〈When Marnie Was There〉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국에서는 〈추억의 마니〉로 적는데, 〈마니가 있던 자리〉로 옮겨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니를 생각할 때”나 “마니를 생각하며”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안나는 마니를 생각할 때에 마니를 만난다. 안나 스스로 마니를 생각하지 않으면 마니를 만나지 못한다. 한편, 영어로 옮긴 이름을 마음에 그리니 “마니가 그곳에 있던 때”라는 이름도 떠오른다. 한자말 ‘추억(追憶)’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을 뜻한다. 그나저나 ‘추억의 마니’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추억 어린 마니’나 ‘추억에 남은 마니’처럼 고쳐써야 맞다. 말뜻을 살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다. 한국말로 제대로 옮겨야지. 일본말 ‘の’는 ‘-의’로 적는대서 번역이 되지 않는다. 4348.4.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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