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45주년 기념 컬렉션
줄리 앤드류스 (Julie Andrews)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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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랫소리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 1965



  노랫소리가 흐르는 집은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다. 노랫소리가 끊긴 집은 오직 규율과 질서만 내뱉는 군대 같은 바람이 흐른다. 노랫소리가 감도는 집에서는 온갖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노랫소리가 없는 집은 웃사람이 시키는 말을 아랫사람이 곧이곧대로 따르기만 해야 한다.


  노래란 무엇인가. 삶을 밝히는 빛이다. 소리란 무엇인가. 사랑을 들려주는 꿈이다. 노랫소리란 무엇인가.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노래를 부를 수 있기에 활짝 웃는다. 노래를 부르지 않기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노래를 부르기에 부드러우면서 따사로운 넋으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한다. 노래를 안 부르기에 이웃이나 동무는 아무도 없이 그저 짓밟거나 깔아뭉개면서 권력을 떨치려고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어떤 모습인가. 학교에 사랑이나 평화나 꿈이 있는가? 그렇다면 학교에 노래가 흐르겠지. 학교에 아무것도 없이 그저 입시지옥으로 갑갑한가? 그렇다면 학교에 노래가 없겠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읊는 상업가요가 아닌, 사람들 가슴속에서 스스로 터져나와서 웃고 울면서 부르는 노래가 이 나라에 어느 만큼 있는지 돌아볼 노릇이다. 도시와 시골 어느 곳에 참다운 노래가 있는지 살필 노릇이다.


  노래하듯이 쓰는 글인가? 노래하면서 읽는 글인가? 노래하듯이 쓰는 책인가? 노래하면서 읽는 책인가? 노래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없고, 노래를 하기에 사랑이 있다. 노래를 생각하지 않기에 꿈과 이야기가 없을 뿐 아니라, 평화와 평등과 민주도 없다. 노래를 생각할 때에 꿈과 이야기를 빚으며, 평화와 평등과 민주로 나아갈 수 있다. 조그마한 시골마을 아이들한테서 누가 어떻게 노랫소리를 이끌어 냈을까? 4347.10.1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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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전쟁
사토 신스케 감독, 오카다 준이치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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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전쟁

圖書館戰爭, Library Wars, 2013



  책과 책방과 도서관을 이야기감으로 삼은 영화 〈도서관 전쟁〉을 보았다. 이 작품(만화와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그럴 만하다’ 싶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만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진작 이런 일이 있었다. 책 하나를 놓고 국가보안법 잣대를 들이밀면서 불태우는 짓이 얼마나 잦은가. 게다가 아직 이런 짓이 끝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우익’이나 ‘보수’라고 밝히는 이들이 ‘책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또한, 한국에서는 스스로 ‘좌익’이나 ‘보수’라고 밝히는 이들마저 ‘책 불사르기’를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책을 아무렇게나 마주한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를 지키겠다면서 군대를 만드는 사람은 평화를 지킬 뜻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평화를 지키려면 평화가 평화가 되도록 하는 길을 가야 한다. 도서관을 지키려고 군대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 군대가 있는 도서관은 무엇을 지키는가? 책을 지키는가, 책이라고 하는 껍데기를 지키는가, 책이 있는 도서관을 지키는가, 도서관이라고 하는 껍데기를 지키는가?


  책과 도서관은 지키더라도 숲을 지키지 못한다면 책과 도서관은 모두 사라진다. 최첨단 장비와 시설이 있기에 책과 도서관을 지킬 수 있지 않다. 숲이 있어야 책과 도서관을 지킬 수 있다. 지구별에 물과 바람과 햇볕이 없어도 책과 도서관이 남을 수 있을까? 아니지, 없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두 덧없다. 이들은 모두 숲 앞에서는 한 줌 재일 뿐이다. 어느 누구라도 밥을 먹으며, 물을 마시고, 바람으로 숨을 쉬면서, 볕을 쬐어야 목숨을 잇고 삶을 누린다. 전두환도 밥을 먹고 똥오줌을 눈다. 독재자 박정희와 이승만도 밥을 먹었으며 똥오줌을 누었다.


  영화 〈도서관 전쟁〉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영화는 이야기감을 ‘책과 도서관’에서 따오기만 할 뿐, 막상 보여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전쟁과 폭력과 총질’이지 싶다. 그러니까, ‘새로운 총질 싸움’을 보여주려고 하는 영화라고 할까.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손에 연필과 호미를 쥐지, 총이나 칼을 들지 않는다. 책을 올바로 읽은 사람이라면, 시골로 가서 숲과 들을 가꾸지, 도시에서 최첨단시설에 온갖 전쟁무기를 갖추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 4347.10.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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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오리 새끼
유재영 외 감독, 오달수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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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오리 새끼
2012


  방위병으로 여섯 달을 머물다가 군대를 마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가지 까닭이 있었으니 여섯 달 만에 군대를 마칠 수 있었는데, 군대 안팎에서 이들은 여러모로 아픈 생채기가 남는다. 군대에 있는 여섯 달 동안에도 고단하고, 사회로 돌아온 뒤에도 고단하다. 왜 한국 사회는 아프거나 힘든 사람한테 더 아프거나 힘든 굴레를 들씌울까?

  노닥거리면서 지낼 만한 군대는 없지만, 노닥거리면서 지내는 아이들이 있다. 여섯 달 만에 군대에서 벗어난대서 노닥거리지 않는다. 가슴에 현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노닥거리는 아이들이 참으로 많다. 이 아이들은 군대에 왜 왔을까. 노닥거리려면 차라리 군대에 안 오면 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노닥거리려고 군대에 오는 아이들이 있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이들이 하는 어떤 일에서는 ‘현역 딱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는 ‘군대에서 노닥거렸는지 안 노닥거렸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현역인지 아닌지’를 따질 뿐이다. ‘남들처럼 군대에서 여러 해 썩었다’는 티를 ‘숫자로 보여주’면 다 끝나는 듯이 여긴다. 정치도 문화도 경제도 교육도 모두 이렇다. ‘숫자’와 ‘졸업장’과 ‘자격증’만 볼 뿐이다. 속내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곽경택이라는 분이 찍은 영화 〈미운 오리 새끼〉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 영화는 왜 찍었을까? 군대 속살을 보여주려는 영화인가?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대려는 영화인가? 폭력을 무시무시하게 저질러 놓고 ‘미안하다’라든지 ‘어쩔 수 없었다’라 말하면 된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영화인가?

  군대에서고 어디에서고 폭력을 둘러댈 수 없다. 군대에서 어떻게 폭력을 안 쓰고 버티느냐 하고 물을는지 모르나, 참말 그 끔찍한 군대에서 손찌검이나 거친 말 없이 슬기롭게 지내는 사람이 꼭 있다. 참과 거짓 사이에서 참에는 등지고 거짓에 기대면서 휘두르는 폭력이다. 영화에 나오는 ‘여섯 달 방위’인 주인공 삶은 어떠한가? 이 아이는 얼마나 거짓스럽게 살아왔는가. 모든 것에 등을 지고, 모든 것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으면서, 얼마나 스스로 핑계만 내세우면서 살았는가. 아버지가 핑계이고, 주인공이 마음에 둔 여군 하사관을 다른 아이가 여관에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았으니 핑계인가. 행자라고 하는 만만한 ‘군대 죄수’가 핑계이고, 바보스러운 중대장이 핑계이니, 이 아이는 언제 어디에서나 마구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가?

  새끼 오리는 밉지 않다. 새끼 오리는 그저 새끼(아기)이고 오리이다. ‘미운’이라는 말은 남이 붙이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나한테 붙인다. 영화 〈미운 오리 새끼〉에는 군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그악스러운 일이 처음에는 찬찬히 흐르는 듯하지만, 어느새 줄거리가 엉뚱하게 흐른다.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군대는 앞으로도 이렇게 가야 하는가. 삶은 앞으로도 이렇게 종살이처럼 되어야 하는가. ‘소재’를 다루는 몫은 감독한테 있다. 4347.10.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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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 아웃케이스 없음
스파이크 존즈 감독, 호아킨 피닉스 외 출연,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 / 하은미디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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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Her, 2013



  스파이크 존스라는 분이 만든 영화 〈Her〉가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영화에 마음이 끌리지 않아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곁님이 〈Her〉와 〈루시〉를 놓고, 〈루시〉는 죽고 죽이는 끔찍한 모습이 너무 많이 나오니 〈Her〉를 보자고 해서 디브이디를 장만해서 보기로 한다. 나는 바깥일을 보느라 부산을 다녀와야 했는데, 이동안 곁님이 먼저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니 어떠했느냐고 물었는데, 나더러 굳이 보지 말라고 얘기한다. 이러면서 이 영화가 사람들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까닭과 왜 볼 만하지 않은가 하는 대목을 들려준다. 가만히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헤아려 본다. 오늘날 현대문명 한국 사회에서 ‘큰식구’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하나, ‘다른 어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드물며,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았어도 아이와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나누는 일이 참으로 드물다. 요즈음 어른은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보내기만 하고, 요즈음 어른들은 ‘더 큰 어른’하고 따로 산다. 도시에서는 위층과 아래층과 옆집이 가까이 맞닿은 채 지내지만 정작 서로 만날 일이 매우 드물고, 만나더라도 깊이 말을 섞지 않는다. 참으로 외롭고 쓸쓸하게 바깥에서 돈을 벌거나 집에서 살림만 도맡는 얼거리로 갈린다. 이동안 저마다 무엇을 할까?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겨를은 참으로 길지만, 얼굴을 맞대고 한집 식구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조차 드물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는 ‘집안’이라는 말조차 쓰기 어렵다. 남과 여, 아니면 여와 남, 둘이서 오롯이 죽거나 살거나 붙어서 기나긴 나날을 보내는 얼거리가 된다. 남과 여, 또는 여와 남은 저마다 어떻게 살면서 무엇을 바라볼까. 둘은 어떤 꿈을 키우면서 어떤 삶을 가꾸는가. 커다란 도시에 사람은 되게 많지만, ‘이웃’이나 ‘동무’뿐 아니라, ‘어버이’와 ‘아이’조차 제대로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갈가리 쪼개져서 따로따로 움직인다. 도시에서 저마다 제 일터를 지키는 부속품처럼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고, 마음을 달래거나 보듬을 ‘한집 식구’조차 없다. ‘그 사람’한테만 자꾸 마음이 갈밖에 없다.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대로 힘드니, 서로 힘든 일로 부딪히기 일쑤요, 서로 힘들어서 서로 감싸야 살가울 테지만, 서로 힘들어서 서로 부딪히다 보니, 처음에는 남과 여 아니면 여와 남으로 만났으나 이윽고 갈라선다. 외롭거나 쓸쓸한 몸과 마음은 더 외롭거나 쓸쓸하게 바뀐다. 가상공간이든 현실이든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영화 〈Her〉를 보면 좀 나아질까? 영화 〈Her〉는 어떤 실마리를 보여줄까? 소재가 그저 소재로 끝나고 만 영화로구나 싶다.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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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라는 게시판에서는 별 다섯을 꾹 눌러서 줄 만한 영화 이야기만 쓰려 했는데,

아무래도 '아쉽다고 느낀 영화' 이야기도 안 쓸 수 없구나 싶어서

따로 게시판을 나누어 본다.


별 다섯 영화만 모으는 자리에

별 하나부터 두서넛을 붙이는 영화를

나란히 놓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느끼는 아쉬움이니,

다른 사람은

즐거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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