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모두 동시인이다



나는 말한다. “아줌마는 모두 동시인이다.” 하고. ‘시인’이 아닌 ‘동시인’이라 했는데, 그냥 시인이라고만 해도 좋다. 다만 아줌마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그냥 시인이라고 할 적에 어깨에 짐이 있는 듯 여기는구나 싶어 동시인이란 이름을 써 볼 뿐이다. 다시 말해 본다. “모든 아줌마는 바로 오늘 동시를 신나게 쓸 수 있다.” 하고. 집안일을 하고 살림을 가꾸며 아이를 낳아 돌보는 길을 걸어왔거나 걸어가는 모든 아줌마는 그야말로 누구나 동시인이라고 느낀다. 다만 동시를 쓸 겨를을 못 내었을 뿐이다. 아이하고 함께 누리는 하루를 돌아보면서, 아이랑 같이 읽을 동시 한 줄을 즐겁고 상냥하게 글로 옮겨 본다면, 아줌마 손끝에서는 늘 동시가 피어난다. 삶이 무엇인지 알고, 살림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며, 사랑을 어떻게 길어올리는지 아는 아줌마라는 자리에 선 사람은, 참으로 누구나 동시인이라고 본다. 이와 맞물려 한마디를 보탠다. “아저씨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또 보탠다. “모든 아저씨는 아직 멀었다.” 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아이를 돌보지 않고, 아이가 걸어갈 꿈길을 함께 그리면서 같이 배우지 않고, 집안일하고 살림을 맡지 않고, 보금자리 바깥에서 돈버는 길만 걷는 아저씨는 동시를 쓸 수 없고 읽을 수 없는 자리에 있다고 느낀다. 온누리 아줌마여, 이제부터 동시를 쓰자. 밥은 그만 짓고, 빨래는 그만 하고, 아이는 곁님인 아저씨더러 사랑으로 돌보라고 맡기고서, 즐겁게 동시를 쓰자. 여태 지은 살림을 고스란히 동시로 풀어내어 삶을 사랑스레 노래하자.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탄 양념 짜장국수



나는 몰랐는데 아이들하고 먹은 짜장국수 양념이 탔다고 한다. 어딘가 좀 시커멓고 느끼하구나 싶었는데 양념을 태워서 이랬구나. 짜장국수 양념에 탄맛이 돌 적에 부엌지기한테 ‘탄 양념 짜장국수를 물리고 새로 해 주도록’ 바라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중국집 부엌지기가 앙념을 태운 줄 몰랐을까? 양념을 태우고도 그냥 먹으라고 내놓을 수 있을까? 중국집 일꾼은 양념이 탄내가 나는 짜장국수를 손님한테 멀쩡히 내놓으며 먹으라고 해도 될까? 그들 부엌지기하고 일꾼이 이녁 아이한테도 ‘태운 양념 짜장국수나 밥’을 먹으라고 내밀려나? 우리가 쓴 글에서 어느 한 곳이 일그러졌거나 엉성하거나 어정쩡하다면, 말씨나 글결이 어설프거나 얄궂거나 뒤틀렸다면, 이때에는 통째로 버리고 새로 쓸 노릇이다. 태운 양념 짜장국수는 버리고 새로 볶아서 내주어야 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삶글 3



이오덕 어른이 “삶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쓰자”고 가르쳤을까? 어쩌면 이런 한마디로 간추릴 수 있을는지 모르나, 내가 이오덕 어른을 읽고 헤아리기로는, 이녁 삶글은 이 한마디가 아니지 싶다. 이오덕 어른이 멧골아이를 가르치고 함께 배우는 동안 빚은 글쓰기 넋이란, “삶을 즐겁게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노래하듯 쓰자”이지 싶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에 사는 노래



  시골로 삶터를 옮긴 지 꽤 되었구나 싶은데, 요즈막 들어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시골에서 살고부터 ‘사람 목소리가 들어가는 노래’를 거의 안 듣는다고. 도시로 볼일 보러 나올 적에는 언제나 귀에 소릿줄을 이어 노래를 듣지만, 시골집에 있을 적에는 풀벌레하고 개구리하고 새하고 바람하고 나무하고 구름하고 별하고 해가 들려주는 노래만 듣는다. 요즈음 사람들이 대중노래를 흔히 들을 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나 가게에서나 일터에서나 집에서나 자동차에서나 텔레비전·라디오를 켜고서 ‘사람 목소리가 들어가는 노래’를 듣는 까닭은, 오늘날 도시에서는 풀벌레도 개구리도 새도 바람도 나무도 구름도 별도 해도 노래할 틈바구니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노래가 있어도 자동차나 기계나 갖가지 물질문명 소리가 왁자지껄 시끌벅석 어지럽기 때문이겠구나 하고도 느낀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왜 꾸밀까



글을 꾸며서 쓰는 사람을 보면 아리송하다. 그렇지만 아리송하다고만 여길 뿐 도무지 왜 꾸며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러다가 엊그제 문득 깨닫는다. 이야기가 스스로 흘러넘치는 사람은 글을 안 꾸민다. 아니, 꾸밀 생각을 처음부터 안 한다. 스스로 가슴에 품고 보듬어도 끝없이 흘러넘치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기느라 바쁘니, 이를 꾸밀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그대로 옮기면서 삶을 글로 담는 보람을 누린다. 다시 말해서 글을 꾸며서 쓰는 사람은, 이야기가 흘러넘치지 않는 셈이다. 이야기가 없는데 쥐어짠다든지, 이야기가 메말랐는데 어떻게든 써내려고 하다 보니 꾸미지 싶다. 쓸 글이 없다면 안 쓸 적에 가장 낫다. 이야기가 흘러넘치도록 하루하루 삶을 지어 어느 때에 연필을 붙잡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날 비로소 삶을 글로 옮기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