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의 별


 너는 우리의 별이야 → 너는 우리 별이야 / 너는 우리한테 별이야

 저 하늘의 별처럼 → 저 하늘 별처럼 / 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내 마음의 별과 같아 → 내 마음에 별과 같아


  “-의 별”이란 얼거리로 붙인 토씨 ‘-의’는 덜어내면 됩니다. 또는 알맞게 토씨를 붙일 수 있어요.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도 되어요. ㅅㄴㄹ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의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는 걸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나라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로 가서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로 올라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 사람이 죽으면 모두 하늘에서 별이 된다는데 할아버지 별은 어디 있을까요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권정생, 우리교육, 2000) 58쪽


조금 큰 젖먹이동물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예요

→ 조금 큰 젖먹이짐승을 만나기란 하늘 별따기예요

→ 조금 큰 젖먹이짐승을 만나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예요

→ 조금 큰 젖먹이짐승을 만나기란 하늘에 돋은 별 따기예요

《도롱뇽이 꼬물꼬물 제비나비 훨훨》(이태수, 한솔수북, 2016) 78쪽


“밤하늘의 별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지.” “로맨틱해요∼.”

→ “밤하늘 빛나는 별 같아서 지은 이름이지.” “멋져요!”

→ “밤하늘 별 같아서 붙인 이름이지.” “사랑스러워요!”

→ “밤별 같아서 붙인 이름이지.” “아름다워요!”

《내가 걸으면 꼬리에 닿는다》(우노 타마고/오경화 올김, 대원씨아이, 2018) 18쪽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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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한테 왜 ‘패러디 동시’를 시키지?


어린이하고 동시를 즐기는 동시놀이는 언제나 새롭겠지. 어린이는 어른이 시키지 않아도 놀이를 하듯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어린이는 ‘동시’란 이름을 몰라도 신나게 글놀이를 한다. 그러나 적잖은 어른·동시인·교사는 으레 아이들한테 “동시 베껴쓰기”나 “동시 흉내내기(패러디)”를 시키고 만다. 그들도 어린이로 살았으면서 정작 어른이란 몸을 입고서는 어린이 숨결을 잊은 셈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스스로 짓고 빚으면서 활짝 웃는데, 어른 흉내나 시늉을 하도록 내몰면서 어린이 날갯짓이나 활갯짓을 송두리째 꺾는 셈이다. 생각해 보라. 어른 흉내를 내면서 ‘패러디 동시’를 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글을 쓸까? 잘 쓰든 못 쓰든 스스로 제 삶을 제 나름대로 엮어서 이야기로 꽃피운 아이가 아니라, ‘잘 썼다는 추김질’을 받는 ‘어른 동시’를 고스란히 베껴서 쓰다가 흉내를 내야 한다면, 이 아이들 마음에 새로운 눈길이 싹트기 좋을까? 어른이나 어버이로서 아이들하고 글놀이를 할 적에는 꼭 하나만 하면 된다. 아이들이 어떤 글을 쓰든 모두 받아들일 노릇이다. 가끔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알려주면 되는데, 이마저도 거의 안 알려주면 된다. 아이 스스로 나이가 들며 스스로 다 알아차릴 테니, 일찌감치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가르쳐 줄 일도 없다. 그저 어깨동무하면 된다. 그저 어른이나 어버이 스스로 하루를 이야기 짓는 살림으로 누리면서 웃으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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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글쓰기



아는 것만으로는 아는 데에서 그치지 싶다. ‘아는’ 사람은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이다. ‘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하는’ 사람도 있으나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알면서 하지 않는다면, 이이가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와 맞물려, ‘하는’ 사람이 있다. ‘알’지는 못하나 그냥 ‘하는’ 사람은, ‘하다’ 보니까 어느새 ‘알’기도 한다. 하면서 스스로 배우고, 차근차근 익혀 가는 동안 저절로 아는 셈인데, ‘한다’고 해서 다 ‘알’면서 하지 않을 뿐더러, 꾸준히 배우거나 익히더라도 ‘잘 하는’ 몸짓에서 그칠 뿐, ‘아는’ 길에는 접어들지 못할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알’려고 ‘배우’는 길을 걸을 만하다. 그런데 알기만 한다면, 배우기만 한다면, 익히기만 한다면, 이때에 우리는 무엇이 될까? 아는 채로 끝나고 배우는 채로 끝나며 익히는 채로 끝날 테지. 그래서 앎과 배움과 익힘을 함으로 녹이는 길도 늘 함께 걸을 노릇이지 싶다. 옛말에 “낫 놓고 기역 글씨 모른다”고 하는데, 이는 앎 하나만 다룬다. 낫을 놓고 기역이란 글씨를 읽을 줄 ‘알’면 무엇이 달라질까? 낫이 있으면, 이 낫으로 풀이나 나락을 베는 ‘함’을 스스로 누리도록 움직여야 비로소 앎은 앎대로 살아나지 않을까? 그리고 낫을 쥐어 풀이나 나락은 벨 줄 알되, 낫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 이때에는 늘 무엇을 하기는 하되, 어떤 길을 가는가를 바라보기 어렵겠지. 배워서 알든, 들어서 알든, 읽어서 알든, 익히면서 알든, 안 다음에 할 일이나 갈 길이란, 스스로 즐겁게 꽃을 피울 삶을 짓는 몸으로 무엇이든 ‘하는’ 하루이지 싶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 밥을 하든, 빨래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이야기를 하든, 글쓰기나 책읽기를 하든, 돈을 버는 일을 하든, 나들이를 하든, 참말로 ‘하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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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노래



우리 집 아이들이 여덟 살에 이르기까지는 두 아이 입에서 터져나온 말을 되도록 모두 수첩에 받아적었다. 두 아이가 터뜨리는 말은 언제나 꽃말이면서 노래였으니까. 큰아이가 열 살이 넘을 즈음부터는 큰아이 스스로 제 말을 제 공책에 제 손으로 적도록 이야기한다. 열 살 문턱에서 큰아이는 제 말을 저 스스로 제 공책에 적기를 쉽지 않다고 여겼지만, 열한 살을 넘어서고 열두 살에 이르니, “응, 그 말을 내가 공책에 쓸게.” 하면서 매우 또박또박 즐겁게 잘 쓴다. 우리 어른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자란다. 우리 어른도 아기일 무렵부터 여덟 살을 지나 열 살 문턱을 넘고 열두 살이 될 즈음, 참말로 “모두 시인”이기 마련이다. 깨닫든 못 깨닫든 누구나 시인이다. 이런 시인 곁에 있는 어른이라면, 어린이가 문득문득 터뜨리는 말을 수첩에 옮겨적으면 된다. 옮겨적는 대로 언제나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걸. 시를 쓰기 어렵다고 여기는 분이라면 아주 쉽게 시를 쓸 수 있다. 몸은 서른 살이나 쉰 살이나 일흔 살이어도 되지만, 마음은 여덟 살이나 열 살이나 열두 살로 바꾸면 된다. 이렇게 마음을 바꾼 몸을 즐거이 받아들이면서 두 손에 연필하고 종이를 쥐어 보자. 이렇게 하면 누구나 언제라도 상냥한 시인이 되어 아름답게 노래를 꽃피우는 글을 써서 나눌 수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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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00원, 또는 5000원



어제 고흥읍 우체국에 다녀왔다. 수원·서울·일산·서울·인천마실을 사흘 사이에 기차·버스·전철·택시로 거의 잠을 이루지 않으면서 하노라니, 고흥으로 돌아와서 하루 뒤인 2월 1일 금요일 아침에 무릎이 좀 시큰거리더라. 며칠 뒤에 설인 줄 뒤늦게 알았는데, 인천에서 고흥 돌아가는 버스를 알아보다가 ‘서울-고흥’ 찻길은 목요일부터 자리가 빡빡하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곧 설이 아니었으면 인천에서 하루를 쉬듯이 누린 뒤에 고흥으로 돌아왔을 터이나, 하루만 늑장부려도 고흥 돌아올 길이 없겠구나 싶어서 좀 서둘렀다. 이렇게 돌아와서 하루를 묵는데, 금요일이 지나 토요일이 되고 설이라며 여러 날 우체국이 안 열면 글월을 못 부치겠네 싶어 부랴부랴 몸을 추스르고 마음에 새숨을 담아서 큰아이하고 나들이를 나왔다. 글월은 두 군데에. 하나는 내 사진을 말없이 가져다가 쓰면서 마치 저희 것이라도 되는 듯 성명표시권까지 어긴 언론사에 보낼 내용증명. 다른 하나는 일본 도쿄 ‘책거리’로. 열한 해 이야기땀을 들여서 지은 《우리말 동시 사전》이기에 기쁘게 새 동시를 하나 써서 ‘책거리 + CUON’ 김승복 님한테 책을 띄운다. 책이 고흥에서 도쿄로 날아가는 데 드는 삯은 24500원. 그런데 사흘 동안 바깥마실을 하며 서울에서 우체국을 찾아 좀 헤매야 했다. 시골에서는 읍내에 가면 우체국이 있고, 조금만 걸어도 닿으나, 서울에서는 우체국이 어디에 숨었는가 알기도 어려울 뿐더러, 금융을 맡지 않는 곳이 꽤 있어서 여러 곳을 헤맸다. 그런데 서울에서 우체국을 찾아가서 ‘착불 택배삯 5000원’을 보냈는데, 고흥에 돌아오고 보니, 택배회사에서 손전화 번호를 잘못 알아 엉뚱하게 나한테 ‘착불 택배삯 5000원’을 보내라고 했단다. 이 돈을 낼 사람은 경기도 안성에 산다지. 그러니까 우리 집에 오지도 않은 ‘착불 택배’를 둘러싸고서 나로서는 참으로 뜬금없이 두어 시간 즈음 서울 시내를 헤매고 다니면서 5000원을 보내려고 용을 쓴 셈. 그렇다고 짜증이 났는가? 아니다. 서울 강남 골목길하고 한길을 두 시간쯤 걸었는데, 서울에서도 강남이라고 하는 넉넉마을조차 거님길이 엉망이더라. 돌돌돌 끌고 다니는 수레짐을 이끌고 강남 거님길을 걷는데 바닥돌이 깨지거나 기울거나 튀어나오거나 패인 데라든지, 턱이 높은 데라든지 얼마나 많던지. 서울 강남에서는 다들 자가용만 타고 다니느라 거님길이 엉망일까? 설마, 아닐 테지. 아무리 자가용을 오래 타더라도 차에서 내려 몇 걸음은 디뎌야 하지 않나. 엉뚱하게 5000원을 바람에 날리면서까지 헤맨 며칠 앞서, 참 재미있었다. 즐겁게 우표값 24500원을 들여 동시 하나 새로 써서 일본으로 책을 부친 어제 낮, 무릎은 시큰거리고 졸음은 쏟아지면서 길바닥에 드러누워 단잠이 들고 싶었는데, 큰아이가 아버지를 잘 이끌고 토닥여 주어서 보금자리에 잘 돌아왔다. 집이란, 사랑이 흐르는 집이란, 언제나 이야기가 피어나고 샘솟기에 글을 쓸 살림거리나 노래거리가 그득그득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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