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손수건 - 미선이와 효순이에게 보내는 이용남의 포토에세이
이용남 지음 / 민중의소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난 2004년에 처음 쓴 글인데, 다시 읽어 보니 너무 섣불리 쓴 대목이 많아서 크게 고쳐서 아주 새로 썼습니다. 이용남 씨가 음독자살을 꾀한 날 부랴부랴 쓰느라 어설픈 데가 많을 수밖에 없겠더군요. 모쪼록, 이 소중한 사진이야기책이 제대로 알려지고 읽히고 가슴에 새겨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겉똑똑이 아닌 속똑똑이로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이용남 씨는 2004년 5월 25일에 효순이와 미선이 추모비 앞에서 음독자살을 하려 했으나, 다행스레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고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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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름 : 어머니의 손수건
 - 사진+글 : 이용남
 - 펴낸곳 : 민중의소리(2003.3.15)
 - 책값 : 35000원

 미선, 효순을 그리며 부른 슬픈 사랑노래
- 이용남 씨가 담은 《어머니의 손수건》


 〈1〉 이용남 아저씨, 살아나셔야 합니다


 슬프다. 안타깝다. 괴롭다. 끔찍하다. 씁쓸하다. 눈물이 난다. 창피하다. 가슴이 탄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넘어온다……. 이용남 씨가 파주에서 살면서 담아낸 ‘미군부대 만행과 이 땅 보통사람 역사와 삶’ 이야기인 《어머니의 손수건》(민중의소리,2003)이라는 사진책을 본 제 느낌입니다. 흐지부지되고 있는 ‘소파 개정’ 문제,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 없는 미군범죄 사실을 밝히는 어려움과 이런 데에는 눈길도 안 두는 우리들 모습, 여기에다가 이 모든 현실에 마음아파 하고 안타까워 하다가 끝내 자기 목숨까지 놓으려고 한 이용남 씨 소식을 들었을 때 제 느낌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제 눈가에 눈물이 핑 돕니다. 왜 이럴까요. 왜 이렇게 힘들까요. 왜 이렇게 촛불 하나도 함께 들지 못하고, 왜 이렇게도 ‘뚜렷하게 보이는 주한미군 범죄’를 범죄라고 말하지 못할까요? 지난날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못한 슬픔을 안고 살았다는데, 우리는 ‘주한미군 범죄를 범죄라 하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사는 게 아니냐 싶습니다.

 모쪼록 이용남 씨가 건강을 되찾길 바랍니다. 지금은 가슴아파하며 쓰러졌어도 다시 주먹 불끈 쥐고 일어나서 더 꿋꿋하게, 더 힘차게, 더 가멸차게, 더욱 입술 질끈 깨물며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들은 우리가 이렇게 쓰러지기를 바랄 테니까요. 저들은 이런 지루하고 힘겨운 싸움에 지쳐서 우리 스스로 나가떨어지기를 바랄 테니까요. 저들은 바로 우리들끼리 이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다가 농약 먹고 죽기를 바랄 테니까요. 살아남아서 더욱더 사진기에 힘을 싣고, 손가락에 힘을 싣고, 두 눈 부릅뜨고 이 세상을 똑바로 보고, 사진으로 올곧게 담아내야 합니다.


 〈2〉 《어머니의 손수건》이라는 책


 저는 아직 《어머니의 손수건》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책을 보는 동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너무 아파서 빨리 읽을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보면서, 참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어쩜 이런 일이 고쳐지지 않고, 우리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을까, 어떻게 같은 나라 사람끼리 서로 생채기를 보듬지 못하는가…… 하고 느낍니다. 다 읽으려면 1/4을 더 읽어야 하지만, 이용남 씨 슬픈 소식을 들은 뒤, 여태껏 읽은 느낌만으로라도 서둘러 알려야겠다,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많이 사서 보고, 미선이와 효순이 일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이 저지른 온갖 범죄와 만행을 제대로 알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 촛불이 광화문 네거리에 멈춰 섰습니다. 재벌 수구언론으로 불리는 신문사의 건물이 양쪽에서 내려다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월드컵 때문에 여중생 사건이 그냥 묻힐 뻔했다고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월드컵이 없었어도 아마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대한민국 언론이 해 온 일을 보면 알 수 있지요 ..  〈171쪽〉


 월드컵 축구 바람이 한창이던 때, 경기도 어느 시골길에서 중학생 둘이 장갑차에 치여서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냥 친 게 아니라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주검을 아주 곤죽으로 만들었다지요? 시골길이라 사람이 안 보니 그렇게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요. 자취를 없애 버리듯 짓밟으면 누구인지 모를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이용남 씨 말마따나 두 여중생이 죽은 일은 ‘월드컵이 아니었어도’ 보도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월드컵에 묻혔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론사 기자들이 제대로 안 다루고 지나쳤는데, 그렇게 크게 불거져 나온 모습에 깜짝 놀라며 내뱉는 핑계입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에 끄집어낸 핑계입니다. 하긴, 기자들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기사로 나왔어도 우리들 가운데 제대로 눈길을 둘 사람이, 마음쓰며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기자나 우리들 보통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힘겹고 바쁘다는 핑계를 날마다 내뱉으면서 ‘아유, 그런 데까지 어떻게 마음써요?’ 하고 둘러댑니다. 꽁무니를 뺍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연속극 볼 시간은 잘만 있습니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 부를 시간은 잘만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가 다 끝난 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던 즈음입니다. 두 가녀린 중학생을 기리는 촛불집회가 슬금슬금 일어납디다. 2002년 12월 7일 촛불시위는 고빗사위였습니다. 이 고빗사위에,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둔 때, 대통령후보로 나온 세 사람이 촛불시위 현장에 왔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참으로 두 아이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자 왔을까요? 아니면, 표얻기를 바라는 마음에 왔을까요? 이날 촛불시위를 하는 광화문에 들어오려는 대통령후보 세 사람(노무현, 이회창, 권영길)은 끝내 마이크를 잡는 ‘영광’이라든지 무대 앞쪽에 다가가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네들 ‘선거 홍보 차’가 못 들어오게 막았으니까요. 적어도 월드컵이 끝난 뒤에 한 번이라도 코빼기를 비쳤다면 모르되, 뻔히 다 보이는 꾐수를 썼으니까요.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한미 여러 조약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더 얄궂은 불평등 조항을 담은 새로운 조약이 다시 맺어질 판입니다. 애꿎은 목숨을 죽여 버린 살인자는 어떠한 조치도 제재도 벌도 안 받은 채 고이 잘살고 있습니다. 외려 그 병사가 피해자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라크에서 학대받은 포로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어쩌다가 포로수용소에서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핑계를 댑디다. 하지만 따져 보셔요. 지구 곳곳 어디든, 미국 발길이 닿는 어느 곳이든, 이렇게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와 학대를 받으면서 죽거나 다치지 않는지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아이티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라크에서도.


 〈3〉 왜 문제인가?


.. 주민들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며 탱크 앞에서 연좌했다. 윌시 참모는 다시 주민들에게 “우리 병사들이 훈련에 지쳐 빨리 부대에 돌아가 목욕을 하고 잠을 자야 한다”며 비켜 줄 것을 요구했다. 주민들의 감정이 폭발했다. “뭐라구? 피곤해서 목욕을 해야 한다고…” ..  〈22쪽〉


 주한미군은 말 그대로 고생입니다. 고향을 멀리에 두고 말도 물도 낯선 나라에서 훈련을 받으며 사니까요. 게다가 ‘훈련 좀 하겠다’는 자기들이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게 가로막는 ‘무식한(?)’ 주민까지 있습니다. 미군들이 보기에 참말 골때리겠지요. 은혜도 모르고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라크에서도 ‘평화’와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재건’을 시켜주겠다는데, 사람들이 제대로 안 알아준다며 투덜투덜대고 있겠지요?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미군은 한국땅에서 고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애먹으면서, 욕먹으면서 한국땅에 있으려 합니까. 구태여 먼 나라에 와서 고생할 것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됩니다. 자기 나라에서 즐겁게(?) 군사훈련을 하고, 자기 나라 땅에서 즐겁게(?) 사격장과 폭격장을 만들어서 미사일과 총알을 쏘아대면 됩니다. 굳이 이라크에 있을 까닭도 없습니다. 제 나라 미국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이루도록 힘쓰면 됩니다.


.. 미2사단 민사참모 윌시 소령이 냉랭한 표정으로 불만을 털어놨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 왔다. 훈련을 가로막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19쪽〉


 문제 고갱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국땅으로 왔다는 미군이 참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투사(?)다운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느냐입니다. ‘평화로운 군사훈련이나 전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왜 군대가 있어야 하고, 왜 무기를 만들어야 할까요. 왜 군인은 ‘민간인’을 그토록 괴롭힐까요. 민간인들이 이렇게 괴로움에 시달리고 들볶여야 한다면, 민간인들이 누려야 할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니 처음부터 평화란 아예 없는 것, 누릴 수 없는 것 아니었을는지요.


.. 두 여중생의 죽음은 우연한 교통사고가 아닌 살인이었다. 여중생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탱크 피해를 참다못한 파주 주민들이 탱크를 몸으로 가로막자 “민간인은 깔아 죽여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한 미군 장교의 망언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  〈7쪽〉


 이용남 씨는 《어머니의 손수건》이라는 책으로 우리들한테 이야기를 건넵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가장 큰 발판은 ‘미군 장갑차가 짓밟아 죽인 두 여중생’이지만, 정작 큰 문제, 말썽거리, 아픔과 슬픔은 ‘전쟁무기에 길들어 버린 우리들’, ‘전쟁을 몰아내고 평화를 찾아야 하는데, 이런 데까지 마음을 안 두고 있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도록 하는 데에 있다는 이야기를 건넵니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죽기까지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한국땅에서 주한미군 범죄에 시달렸나요. 얼마나 넓은 우리 삶터가 주한미군 군사훈련으로 더럽혀지고 망가지고 무너졌는가요. 한국땅에서도 이러할진대, 나라밖 다른 곳에서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숱하게 일어날까요. 이라크에서 일으킨 전쟁 소식만 들어도 그렇잖습니까. 이번 전쟁으로 이라크는 역사와 문화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유적지도 무너지고 박물관도 부서지고 학교며 우체국이며 발전소며 주유소며 약국이며 자전거가게며 구멍가게며, 모든 곳이 싸그리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미군이 말하는 그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4〉 미선이와 효순이뿐일까


.. 엄마의 손에는 손수건이 꼭 쥐여 있습니다. 딸이 세상을 떠난후 손수건은 늘 엄마와 함께 있습니다. 손수건에는 딸의 내음이 흠뻑 배어 있습니다. 딸의 서랍게 곱게 접혀 있던 손수건이 엄마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  〈57쪽〉


 효순이 어머님은, 또 미선이 어머님은 사진에서만이 아니라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실 테지요. 죽은 자기들 딸내미 때문에 눈물을 흘리겠지만, 자기들 딸내미 말고도 죽은 아이들 때문에, 또 앞으로도 죽을 수밖에 없을 또다른 아이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또 손수건으로 그 눈물을 훔쳐낼 테지요.

 당신들 딸내미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을 보고, 걸상을 보고, 물건을 보고, 자수를 보고, 사진을 보면 눈물만 나고 한숨만 나온다는 어머님. 그래서 걸상을 태우기도 하고, 딸내미들이 쓰던 물건을 버려 보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가슴에 사무친 아픔까지 사라질까요.


.. 논 한가운데 경고 팻말이 박혀 있다. ‘대포 및 소총 사격 지역’이라는 내용이다. 이 스티커를 벗겨내면 ‘미국 정부 재산’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이 땅은 등기까지 되어 있는 개인 땅이다. 그런데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들에게 준 땅이라며 ‘미국 정부 재산’이라는 경고문을 붙였다. 재산세는 농민이 내고 사용은 미군이 하는 스토리사격장의 풍경이다. 농민이 수없이 항의를 해 보지만 그럴 때마다 ‘주의’자가 하나 붙는다. 이른바 반미주의자. 끽소리 못하고 이렇게 수십 년을 살아왔다 ..  〈69쪽〉


 《어머니의 손수건》은 미선이와 효순이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미선이와 효순이보다 더 끔찍한 아픔과 생채기를 안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더 끔찍한 아픔과 생채기를 안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두 팔과 다리를 모두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한 해 만에 죽은 이한테 미군은 달랑 60만 원 던져주며 ‘그걸로 끝’이라고 했다지요?

 주한미군 사격장은 쉴새없이 ‘중금속 오염 폐수’를 쏟아붓습니다. 최첨단 무기와 장비를 쓰는 미군이건만, 중금속 오염 폐수는 그냥 논과 밭과 도랑으로 흘려보냅니다. 가을에 벼를 베어 길가에 널어 두면, 미군 차량과 장갑차와 탱크는 ‘보란 듯이’ 그 널어 놓은 벼를 짓밟고 뭉개 놓은 채 지나갑니다. 길이 좁아서 밟는 게 아니라, 일부러 가던 길을 돌아와서 ‘착실하게 밟아 주고’ 가던 길을 다시 간답니다. 거짓말 같다고요? 그래, 거짓말 같으면 파주에 가 보셔요. 파주에 가서 그곳 농사꾼들을 붙잡고 물어 보셔요. 파주 농사꾼들 말이 믿기지 않으면 주한미군이 군사훈련을 할 때 몰래 지켜보셔요.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셔요.


..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미는 이념적 반미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짓밟는 주한미군의 횡포에 대한 저항, 즉 ‘민중적 반미’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71쪽〉


 〈5〉 할 일 많은 이용남 씨와 우리들


 이용남 씨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주한미군 범죄 끝내기와 사과 받기와 배상 받기와 재발 방지’는 아닙니다. 혼자서는 달걀로 바위 치기입니다. 하지만 이용남 씨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 어깨동무하고 일어선다면 달걀로도 바위를 깰 수 있습니다. 깨고 말고요.


.. 주한미군은 25일 이렇게 말했다.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방관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여중생이 누려야 할 삶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고도 주한미군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  〈130쪽〉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합니다. 참말로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반딧불(촛불집회 하는 사람들)이 버거킹(교보문고 앞 2층에 있는)을 향해 소리쳤다. 나와라! 버거킹 창 옆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우리 한번 불러 보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당신들이 있기에 효순이, 미선이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  〈145쪽〉


 주한미군 범죄, 한미주둔군지위협정(한미SOFA),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FTA), 여기에 수많은 조약들. 이 모두는 우리들이 풀어나갈 일입니다. 좋은 쪽으로든 궂은 쪽으로든 우리들이 풀어나갈 일입니다. 이 땅,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니까요. 이 땅, 한국땅에 온갖 무기를 가져다 놓고 우리를 윽박지르는 미군과 한솥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니까요.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둘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둘레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책이란,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만히 들려주는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어머니의 손수건》은 주한미군이 저지르는 범죄가 무엇인지, ‘소파’라고 하는 조약이 어떤 말썽거리를 담고 있는지 느끼도록 하고 알도록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이런 책을 손수 찾아서 읽지 않는다면 말짱 헛것, 도루묵입니다. 우리들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주한미군 범죄로 몸서리를 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소파 협정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효순이와 미선이 아픔을 느끼겠어요. 촛불 하나 함께 든다고 다 풀어질 일일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야기에 귀를 닫고 눈을 감고 고래를 절레절레 흔든다면, 앞으로도 이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우리들 소중한 딸내미와 아들내미가 미군 장갑차에 떡이 되듯 짓밟혀 죽고, 미군 폭격기에 산산조각 부서져 죽겠지요. (2004.5.25.처음 씀/2007.2.12.고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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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우리 아이 책벌레 만들기
폴 제닝스 지음, 권혁정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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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책벌레 만들기
- 글쓴이 : 폴 제닝스
- 옮긴이 : 권혁정
- 펴낸곳 : 나무처럼(2005.9.10.)
- 책값 : 1만 원


 어머니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했거나, 나중에라도 책을 가까이했다면, 딸이나 아들된 사람들도 책과 가까이하리라 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텔레비전을 가까이했거나, 나중에라도 텔레비전을 가까이했다면, 딸이나 아들 되는 사람도 비슷하게 영향을 받을 테고요.

 지난 열 해 사이, 어린이책이 참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린이책하고는 눈꼽만큼도 인연이 없던 출판사들도 어린이책을 펴내는가 하면 따로 부서를 꾸리거나 아예 새끼출판사를 차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 나라 어린이권리가 높아져서 어린이책을 이토록 많이 쏟아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즘 어린이책은 웬만하게라도 찍어내면 기본은 팔리기 때문에 책 펴내 돈을 버는 데에는 딱 알맞습니다.


― 아동작가들은 좋은 이야기는 어른까지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63쪽)


 어린이책을 쓰는 사람은 어른입니다. 어린이책을 사는 사람도 거의 어른입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거의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도움이 될 만한 책, 그러니까 교훈도 일깨우고 지식도 건넬 수 있는 책을 살피며 책을 사 줍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만한지, 아이들 눈높이에 걸맞는지까지는 못 살핍니다. 어른들이 보기에 괜찮다 싶은 책을 만들고 읽힐 뿐, 아이들이 참말로 즐겁게 받아들일 만한지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또한, 아이들 마음과 생각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가꾸고 이끌 만한지는 더더구나 헤아리지 않습니다.


― 먼저 책을 사랑하는 마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 (19쪽)


 왜 그럴까요? 다 까닭이 있겠지요. 어린이책을 쓰는 분들, 어린이책을 엮는 출판사 분들, 어린이책을 사 주는 어버이들은, 어릴 적부터 ‘어린이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이기 일쑤’라서 그렇습니다. ‘나중에라도 어린이책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책은 교훈과 재미로만 엮을 수 없어요. 아이들 감성을 건드린다고 해서 읽힐 만한 책이 아닙니다. 발달단계나 지능지수를 살피며 읽히는 책이 어린이책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책도 ‘책’입니다. 어린이도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린이책을 쓰거나 엮거나 사 주는 우리 어른들은 이 두 가지를 너무 손쉽게 잊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생각을 안 하는지 몰라요. 어린이책에 반드시 담겨야 할 이야기는 ‘책’에 담길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쓴 글을 읽을 때 철자가 틀린 단어도 그대로 읽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글의 가치를 줄어들게 하지는 않는다. (132쪽)


 어린이책을 쓰는 분들은 ‘자기가 쓴 책을 빼고 다른 어린이책을 몇 권이나 읽’어 보았을까요. 어린이책을 엮어서 펴내는 분들은 어떨까요. 어린이책을 사 주는 어버이들은 어떻지요? ‘아이들한테 읽힐 목적’만 앞세운 나머지, 자기 스스로 ‘어린이책을 책으로 즐기는’ 마음은 없지 않나요? 아이들 눈높이를 ‘낮게’ 보면서 아이들도 우리(어른)와 똑같은 ‘사람’임을 잊은 채 이야기를 엮어 나가지 않는가요?


― 당신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이런 사실을 책 읽는 상황에 주입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15쪽)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을 곧잘 만납니다. 초등학교 교사를 가장 자주 만납니다. 이분들을 뵐 때마다 꼭 한 마디를 합니다. “어린이책 좋아하셔요?” 언제나 듣는 대답, “글쎄요.” 교육대학교 다니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꼭 한 마디를 합니다. “어린이책도 읽고 있나요?” 늘 듣는 대답, “시험 치기 바빠요.”

 교사가 되기 앞서 어린이책 한 권 제대로 읽은 사람은 몇쯤 될까요. 자기가 딸아들을 낳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기 앞서 어린이책 한 권 제대로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자기가 어린이책을 쓰는 작가가 되기 앞서, 어린이책을 펴내는 출판사 직원이 되기 앞서 어린이책 한 권 찬찬히 살피고 헤아린 사람으로 누가 있을는지.

 하지만 교보문고만 가 보아도 어린이책 자리는 북적북적 저잣거리가 따로 없습니다.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새 어린이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버이들은 이 책들을 부지런히 가방에 주워담고 카드로 책값을 직 긋습니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너, 오늘은 몇 권 읽어.” 하는 명령을 듣겠지요. 히유.

 적어도 이 나라에서 초등교육을 맡는 교사들이라도, 또 어린이책을 펴낸다고 하는 출판사 분들이라도, 또 어린이책 작가라고 자기 소개를 쓰는 분들이라도 《책벌레 만들기》 같은 책 하나 차분히 읽어 본다면, 세상이 이렇게까지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4340.2.1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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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녀 백과사전 낮은산 너른들 2
김옥 지음, 나오미양 그림 / 낮은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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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청소녀 백과사전
- 글 : 김옥 / 그림 : 나오미양
- 펴낸곳 : 낮은산(2006.10.30.)
- 책값 : 8800원


이 책 하나 12 ― 청소녀 백과사전
: 내 백과사전에는 무슨 이야기가 적힐까

 
 시골집에 있을 때면 입을 꾹 다물고 지냅니다. 이웃집이 없고(지난 섣달그믐날 그만 불이 나서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찾아오는 사람 없는 한편, 작은 방에서 홀로 책하고 씨름하며 살고 있거든요. 저라고 무슨 할 말이 없겠습니까만, 그저 새하고 별하고 해하고 바람하고 나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뿐입니다. 때때로 천장에서 뛰어다니는 새앙쥐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한테는 제 속에 담은 말, 이를테면 ‘내 백과사전’에 담기는 말은 털어놓지 못합니다.


.. 내 나이 올해로 열세 살, 먹을 만큼 먹었다 ..  〈106쪽〉


 쉬가 마려워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가 풀밭에 볼일을 봅니다. 둘레가 퍽 밝다고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반달이 밝게 빛납니다. 아직 반쪽짜리 달이지만, 온 마을과 들판과 산을 하얗게 덮고 있는 눈 때문에 저리 밝게 보이네요. 얼어붙은 밤하늘이라는 말을 곧잘 들었는데, 오늘 밤하늘이 꼭 그 모습입니다. 달빛이 비쳐 하늘로 올라가는지 달 말고 다른 별은 잘 안 보입니다. 구름도 없는 이 밤, 멧새들은 일찌감치 서로 몸을 바싹 붙이며 잠들었지 싶습니다. 새벽만 되어도 창밖에서 부지런히 지저귀며 하루를 여는데.

 조용하군요. 지나가는 차가 없고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참 조용하군요. 해 떨어지고 밤이 되니 더 조용합니다. 어제그제 눈이 내려 읍내 마실을 못했으니 집구석에서 입을 열 일도 없습니다. 자리에 드러누워 밝은 노래를 틀어 놓고 흥얼흥얼 따라할 때, 밥을 먹을 때 잠깐잠깐 입을 엽니다.


.. “엄마도 화장하고 파마도 하잖아.” “나하고 너하고 같아? 나는 어른이고 너는 학생이잖아.” “그럼 엄마처럼 바쁘다는 핑계로 딸 밥도 잘 안 챙겨 주는 거는 엄마 노릇 잘하는 거야?” 나는 울면서 소리쳤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누군 구누야 엄마가 좋아서 엄마 인생을 사는 거지. 나는 바보처럼 공부만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해 보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살 거야. 그리고 절대로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다 ..  〈22∼23쪽〉


 1995년 4월, 부모님 집을 떠나 서울 이문동으로 살림을 옮기던 때가 떠오릅니다. 집에서 학교를 다니기에는 너무 멀고 찻삯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 즈음 저는 집에 붙어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집에서 크게 울려퍼지는 텔레비전 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새로 살림을 꾸리는 곳에는 텔레비전이 없어 좋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린 뒤, 신문사지국 형들과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간 다음, 학교도서관과 구내서점에서 시간제 일을 하고, 저녁에는 학교 앞 헌책방에 들른 뒤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여섯 달을 보낸 뒤 11월에 군대로 끌려갔습니다(우리 나라 군대는 강제징집제니까).


.. 의욕에 넘친 나는 사인펜을 들고 1면을 향해 돌진하다 말고 멈칫 했다. 가족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  〈52쪽〉


 군대 가기 보름쯤 앞서 부모님 집으로 잠깐 돌아옵니다. 하지만 잠깐도 못 있고 이날 곧바로 집을 다시 나갑니다. 아버지하고 크게 싸웠거든요. 싸움 빌미는 제가 벗어 놓은 옷(신문배달을 하며 입던 땀에 전 옷)을 아버지가 “이런 걸레를 아무 데나 두면 어떡해?” 하면서 제 속을 긁었기 때문. “걸레를 걸치는 사람도 걸레겠죠.” 하고 대꾸를 했고, 아버지는 “뭐야?” 하면서 주먹을 휘두릅니다. 저는 아버지 주먹을 막으며 밀칩니다. 아버지는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옆방에 있던 형이 나와 “야, 아버지한테 뭐 하는 거야?” 하며 제 따귀를 올려붙입니다. “그래, 내가 나가면 다 되겠네.” 하고 그 길로 부모님 집을 나왔습니다.


.. 수학여행 가서 지킬 일에 대한 교장 선생님의 기나긴 당부 말씀이 끝나고 드디어 버스에 올라탔다. 철이랑 나는 ‘맨 뒷자리에서 만나.’ 하는 눈빛을 서로 나누었다. 하지만 차에 먼저 타 있던 선생님은 통로에 버티고 서서 말했다. “여자는 오른쪽, 남자는 왼쪽. 키 순서대로 앉고 맨 뒷자리는 비워 둬라.”  좋다가 말았다. 키가 작은 나는 앞자리고 키가 큰 철이는 뒤쪽에 앉게 되어 우리는 견우 직녀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  〈138쪽〉


 입대를 하루 앞두고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옵니다. 군대에 간다는 말은 안 했거든요. 아버지한테 “저를 보기 싫으면 안 보셔도 되지만, 앞으로 두 해 동안 볼 일이 없으실 테니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겁니다.” 하고는 큰절을 한 뒤 집을 나섭니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아파트 툇마루에 서서 저를 배웅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신가? 고개를 돌리고 걷다가 다시 뒤돌아보니 어머니는 그대로 계십니다.


.. 평범하고 조용한 그 아이.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 애가 진짜 내 영웅이다. 나는 얼른 단짝인 애리 손을 꼭 잡았다. 지금이 바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때 아닐까? ..  〈131쪽〉


 혼자 기차역에 가서 혼자 기차를 타고 훈련소에 닿습니다. 표를 두 장 끊었지만 같이 갈 사람이 없습니다. 수원쯤이었나, 어느 할머니가 힘겹게 올라타기에 “제 옆자리는 비었으니까 앉으셔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훈련소 둘레에는 부모며 애인이며 동무들이며 온갖 사람들하고 함께 온 사람들로 득시글득시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뭔 저런 꼴값을 떠나 하고 생각. 훈련소에 들어가 한 달 남짓 얻어맞고 구르고 흙과 땀에다가 갖은 욕을 먹습니다. 잘하면 욕, 못하면 욕에다가 주먹다짐. 문득문득 ‘이렇게 구르느니 바로 하사관 지원해서 나중에 이 훈련소 조교들한테 똑같이 앙갚음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생각을 할 틈조차 거의 없이 뺑뺑이로 한 달은 훌쩍 지나갑니다. 그리고 자대배치를 받아야 하는 날.


.. 비밀 정원이 우리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집은 손바닥만한 뜰조차도 없는 작은 아파트이다 ..  〈163쪽〉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운이 지지리 없다고 해야 할지, 저를 비롯한 얼마 안 되는 훈련소 동기들만 논산에 다시 남아 두 주 동안 새로운 훈련을 받게 됩니다. 새로 받는 훈련은 ‘주특기훈련’. 제가 서 있던 줄은 무반동총(106) 주특기훈련을 받습니다.

 운이 좋다고 한다면, 훈련병으로 한 달이 지났으니 어깨에 빨간 계급장 한 줄(요즘은 까만 계급장으로 바뀌었습니다)을 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중에 들어온 훈련생들 앞에서 우쭐댈 수 있습니다(참 웃긴 일이지만). 운이 지지리 없다고 한다면, 두 주 동안 주특기훈련을 더 받는 우리들은 거의 모두(퍼센트로 따지면 99%) 최전방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 제 운명은 최전방으로 떨어졌는데, 그 최전방에서도 가장 앞에 있는 곳으로 가고야 맙니다.


.. “치, 그런 게 어디 잇어. 순 거짓말이잖아.” 엉터리 말에 나는 웃어 버렸다. 아빠는 늘 나를 즐겁게 해 주려고 애쓰지만, 나는 솔직히 부자인 별이네 아빠가 더 부럽다. 가난한 우리 아빠는 늘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만 주니까 말이다. “우리 영자 사랑해.” 하며 내게 그려 보이곤 하는 사랑 모양도 두 팔을 내려 버리면 그뿐이고, 작년까지도 늘 잠들 무렵이면 해 주던 ‘사랑하는 따님에게 바치는 잘 자라 뽀뽀’도 아빠가 방에서 나가기도 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별이네 아빠는 정말로 보이는 것들, 만질 수 있는 것들을 줄줄 풀리는 화장지처럼 끝도 없이 사 준다 ..  〈164쪽〉


 주특기훈련 두 주를 끝마칠 즈음입니다. 실기시험(사격 연습)을 치르는데, 저는 운이 좋게 ‘어깨쏴’와 ‘엎드려쏴’ 두 가지 쏘기에서 잇달아 10점 만점을 쏩니다. 사실, 이 실기시험에서 1점이라도 깎이면 누구라 할 것 없이 기나긴 얼차려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쏘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운은 저 말고 다른 동기들은 아무도 20점 만점을 못 쏜 덕분에 훈련을 마치고 부모님을 불러 드디어 면회를 하게 되는 날, 연대장 표창하고 휴가증 하나를 받습니다.

 넉 주 훈련소살이에 두 주 훈련소살이를 더하니 집에서는 소식이 뚝 끊어져 애가 무척 타셨던 듯.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부모와 자식 사이였을까요. 다른 집 자식들은 넉 주 뒤에 면회 오라고 연락이 왔다는데 왜 너만 연락이 없었느냐고(두 주 동안은 편지도 쓸 수 없었으니),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아셨답니다. 어쨌든 면회 오시는 날, 주어진 시간은 무척 짧으니 단출하게 도시락쯤만 준비해 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으나, 어머님은 무슨 잔치상 비슷하게 차려 오십니다. 그 무거운 걸 어찌 들고 오셨을꼬. 그런데 다른 동기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 고작 한 시간 면회에 그 많은 걸 어떻게 먹을까요. 하지만 여섯 주 동안 밥다운 밥 한 번 못 먹은 우리들은 게걸스럽게 잔치상을 입에 처넣습니다. 말할 틈 없이 바쁘게 우겨넣습니다. 물 마실 틈 없이 바삐 쑤셔넣습니다.

 짧은 면회는 끝. 이제 내무반으로. 조교들은 ‘그사이 잘 먹었느냐?’면서 히죽히죽. 꼬투리를 이것저것. 뭐가 문제라느니 뭐가 잘못이라느니. 데굴데굴. ‘한 시간 동안 잘 먹었으니 이제 되지 않느냐’고 한 마디. 괴로운 얼차려를 못 참고 게워내는 동기들 여럿.


.. 그럴 때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가슴이 아파 왔다. 마치 소중한 나만의 것을 빼앗긴 듯한 이 이상한 기분. 만약에 별이가 뽑히고 내가 떨어졌어도 선생님은 내게 낮은 음을 맡겨 주셨을까? 절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  〈180쪽〉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양구 보며 살아야지.”라는 짤막한 노래가 있습니다.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노래입니다. 고달픈 군대살이를 하며 누군가 읊다가 입에서 입으로 이어온 노래이지 싶은데, 줄을 잘 섰거나 뒤가 든든한 녀석들은 대전이며 서울이며 춘천이며 살기 좋은(군인한테만) 곳에 자기 보금자리를 틀고, 줄을 못 섰거나 뒤가 하나도 없는 저를 비롯한 열여섯 사람은 열서너 시간 동안 눈이 가려진 채 기차를 타다가 춘천에서 내린 뒤, 군대짐차를 두 번 갈아타고, 배를 한 번 타고, 다시 군대짐차를 타고, 두 번 더 군대짐차를 옮겨탄 뒤 비로소 양구에 떨어집니다. 마지막 가장 밑바닥 중대까지 온 훈련소 동기는 모두 다섯. 자대에 떨어진 밤에도 눈은 펑펑 내렸고, 신병임에도 빗자루 하나 얼결에 받아들고 부지런히 눈쓸기를 합니다. 이튿날 새벽에도 일찌감치 깨워 빗자루 들리고 한 시간 넘게 산을 타라고 하더니 길을 쓸라고 합니다. 이 눈쓸기는 1995년 12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참 징하게 했습니다. 넉가래로 눈 예술품을 만들 수 있을 만큼.


.. 그동안 나는 학교에서 조금 삐딱한 아이였다. 눈부시게 흰 실내화를 신은 아이들 사이에 오직 나만 군청색 슬리퍼를 직직 끌고 다녔다. 앞뒤가 꽉 막힌 실내화는 답답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노랗게 염색한 단발머리를 늘어뜨려 한쪽 얼굴을 온통 가려 버렸다. 그러고는 아이들 몇과 화장실 구석으로만 몰려다니다가 선생님들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그냥 어른들이 싫었고 늘 어디론가 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은 모두에게 구제 불능의 삐딱이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 집 앞 커다란 교회의 지하실로 향하는 돌계단에서 몇 시간이고 조용히 책 속에 빠져드는 아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일요일이면 언덕 너머에 내가 좋아하는 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어두워지도록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싸돌이라는 것도 아무도 모른다 ..  〈90쪽〉


 1997년 12월 31일, 현역군인한테는 마지막 특명이 떨어져 엿새 일찍 전역을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뽑히며 군대조직이 꽤나 많이 바뀌었더군요. 제가 전역하는 이듬해부터 예비군제도가 바뀌게 되었는데, 이렇게 바뀌는 제도에 끼워맞추려고 제 또래 동기들이 특명을 받았던 것.

 하지만 이 특명을 고맙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부처님오신날까지 눈이 내리는 양구 깊은 산골짜기를 떠나게 되어 홀가분했던 마음은, 버스 두 번 타고 서울에 내려 참으로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는 동안 어두워집니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지는 한강이 내다보이는 그때, 제가 앉은 맞은편에는 생활정보지를 무릎에 얹어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머리가 하얗게 센 양복쟁이 아저씨가 있었으니. 흔들흔들 하던 아저씨 머리는 콩 하고 문가 손잡이에 부딪히고, 그 결에 무릎에 얹어 놓은 생활정보지는 바닥으로 우수수. 퍼뜩 놀라 잠에서 깬 아저씨는 바닥에 흩어진 생활정보지를 엉거주춤 줍고.

 인천에 있는 부모님 집에 들어오지만 반기는 사람 없이 텔레비전 소리만 윙윙윙. ‘내가 지금 전역한 것 맞나?’ 윙윙윙거리는 아홉 시 새소식에는 ‘아이엠에프가 어쩌고 저쩌고’. ‘아이엠에프가 뭐지? 제기랄, 뭔지 몰라도 한 두어 달쯤 아무 생각 없이 좀 쉬어 보자. 너무 긴 이태였어.’


.. 오히려 엄마는 다른 애들 다 뚫는 귀를 나만 못 뚫은 채 있으면 더 걱정할 것이다. 행여나 내 자식이 귀 하나도 못 뚫는 용기 없는 바보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문제적인 아이들을 보면 근심스레 내 얼굴부터 살피는 분이 바로 우리 엄마다. 행여나 내 자식도 안 보이는 데서 저런 짓이나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빠는 아무 눈치를 못 챘다. 저녁 밥상에서도 엊그제 본 내 학원시험 점수가 언제 나오는지, 얼마나 오를지만 궁금해할 뿐이다 ..  〈115쪽〉


 1998년을 맞이하고 닷새 뒤, 또다시 집을 나섭니다. 군대 가기 앞서 일했던 신문사지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언제든 와.’ 하는 한 마디.

 눈칫밥 먹는 부모님 집에서는 하루도 더 있기 힘든 형편. 군대에 있는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을 수 없었기에 두어 달쯤 질리도록 책 좀 볼까 싶었지만, 나라살림도 힘든 판에 집에 밥벌레 하나가 얹혀졌다고 느끼셨는지.

 아무 미련 없이 짐을 꾸립니다. 집에 남아 있는 제 책과 짐은 얼마 뒤 짐차 한 대 불러서 모두 가지고 서울로 뜹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 “엄마도 화장하고 파마도 하잖아.” “나하고 너하고 같아? 나는 어른이고 너는 학생이잖아.” “그럼 엄마처럼 바쁘다는 핑계로 딸 밥도 잘 안 챙겨 주는 거는 엄마 노릇 잘하는 거야?” 나는 울면서 소리쳤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누군 누구야 엄마가 좋아서 엄마 인생 사는 거지. 나는 바보처럼 공부만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해 보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살 거야. 그리고 절대로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다 ..  〈22∼23쪽〉


 그리고 2007년. 멋대로 살아가는 둘째아들은 다른 친척들 앞에 내보이기 부끄럽다며, 사촌동생 장가가는 날에 ‘오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곧 설 명절. 설 명절에는 집에 ‘오라’고 하실는지. 또 ‘오지 말라’고 하실는지. 전화를 걸어 한 번 여쭈어 보면 될는지. 어찌하면 좋을까요.


.. 문제아인 애들도 진짜 속까지 문제아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애들도 그게 편하니까 그런 척할 뿐이다. 어른들만 속고 있지 애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  〈14쪽〉


 제 ‘백과사전’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몇 줄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제 아버지 백과사전에는, 또 어머니 백과사전에는, 형 백과사전에는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요.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우리 식구들은 무슨 이야기를 당신들 백과사전에 적으셨을까요. 앞으로 그 백과사전에 적힌 이야기를 들여다볼 날이 있을까요. 부모님이나 형은 제 백과사전에 적힌 이야기를 들여다볼 날이 있을까요. 글쎄, 글쎄요. (4340.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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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
리타 골든 겔만 지음, 강수정 옮김 / 눌와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
- 글쓴이 : 리타 골든 겔만
- 옮긴이 : 강수정
- 펴낸곳 : 눌와(2005.4.30.)
- 책값 : 14000원


 재미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딱히 잡혀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꼭 이래야 하거나 저래야 하는 법이 없으니 재미있지 싶어요. 시험을 치를 때 꼭 100점을 맞아야 하지 않아요. 99점만 맞아도 좋아요. 뭐, 80점으로 흐뭇할 수 있고, 50점만으로도 기쁠 수 있습니다. 10점이나 5점 맞고 웃을 수 있어요. 제 고등학교 때 성적표를 보면, 영어 94점, 한문 97점, 수학 24점, 윤리 51점, …… 이랬습니다. 수학점수가 10점대였던 적도 있지 싶고 골치아픈 서양철학만 외우게 하는 윤리는 30∼40점에 머문 적도 있지 싶습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좋았습니다. ‘난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더 많이 할 테야’ 하고 생각했거든요.


.. 나는 누군가 다른 이의 삶을 살고 있다. 근사한 레스토랑과 유쾌한 사람들, 아카데미니 그래미니 하는 각종 행사들로 채워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다. 24년을 함께 산 남편과 나는 유명 인사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고, 최근 영화들을 시사회에서 감상한다. 로스앤젤레스의 도서 관련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초대된다. 남편이 유명한 잡지의 편집자문 일을 하는 덕분에 우리는 남들이 흔히 누리지 못하는 특권과 화려함으로 채워진 삶을 구가한다. 하지만 이젠 그런 자리에 가더라도 특권을 향유한다는 뿌듯함 대신 눈부신 화려함이 왠지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은 나라고 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명품의 세계에 살고 있다 ..  〈13쪽〉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난 내가 살고픈 대로 살 테야’ 하고 마음먹으면서 살고 있고, ‘난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을 테야’ 하면서 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읽습니다.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기를 즐기는데, 올겨울에는 손발이 많이 시려워서 때때로 고속버스를 타고 1시간쯤 따뜻하게 가곤 했습니다. 얼어붙는 손발을 부여잡고 낑낑대며 달릴 때에는 ‘참 괴롭구나’ 싶었지만, 글쎄, 괴롭기는 해도 즐겁더군요. 더우면 더운 대로 ‘이게 바로 더위구나’ 하고 느꼈고, 추우면 추운 대로 ‘이게 바로 추위구나’ 하고 뼛속 깊이 느꼈습니다.

 고속버스를 타면 몸은 느긋했지만, 마음은 무겁습디다. ‘이거 너무 몸이 느긋하게 다니는 셈 아닌가’ 싶었고, 돈 몇 푼(찻삯)으로 자꾸만 손쉬운 길을 가면 마음까지 흐물흐물 늘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더군요. 그래서, 고속버스에서 내린 뒤 다시 추위를 와락 껴안으며 달릴 때면 참 시원하데요. 그 짜릿한 추위와 칼바람이란! 하하!


.. 지금은 내가 선택한 삶의 자유와 독립을 구가하는 중이다. 만약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면 니카라과에는 결코 가지 못했을 것이다 ..  〈117쪽〉


 곧 설 명절이 다가옵니다. 설 명절에 부모님 집에 갈까 말까 망설입니다. 저는 제가 살고픈 대로 살기 때문에, 저 한 사람한테는 좋다고 하겠지만 이웃사람, 이 가운데 집안식구들한테는 썩 좋지 못합니다. 혼인과 이혼도 멋대로 했으니 집안식구들로서는 달가웁지 않겠지요. 제 둘레에 있는 다른 분도 비슷하리라 봅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다고 느끼는 일이지만, ‘야, 니가 고생하며 사는 걸 너 빼고 누가 좋아하겠냐?’ 하고 말하는 선배들 말을 들으면, ‘그렇구나. 나는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질구질하게 뭐 하는 짓이냐고 느끼겠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지내는 시골집을 슥 둘러보시더니 ‘무슨 피난민 수용소 같네’ 하던 부모님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 코네티컷의 부모님 댁에서 일주일을 머문다. 두 분은 내 인생에 대해 무척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신다. 딸이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꾸리길 원하신다는 걸, 내가 아무리 행복하다고 말해도 믿지 않으신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래도 당신들이 더 잘 안다. 여자는 남편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걸. 그게 인생이라는 걸. 엄마는 딸과 이혼한 옛 사위에게 얼마 전에 생일 선물을 보냈다고 얘기하신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내심 우리가 다시 화해하기를 바라신다 ..  〈89쪽〉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셈일까요? 남들이 말하는 잘사는 삶을 꾸려야 할는지, 집안식구들이 말하는 잘사는 삶을 꾸려야 할는지, 아니면 자기가 생각하는 잘사는 삶을 꾸려야 할는지요? 이 모두가 하나로 모일 수 있는 삶을 꾸려야 잘사는 삶일까요?


.. “의료 교육을 받으셨나요?” 내가 묻는다. “아니오.” 그녀가 대답한다. “그렇지만 엄마들이라면 다 아는 일들인걸요.” 그녀는 자식이 다섯에, 손자는 열다섯 명을 두었다 ..  〈106쪽〉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난 미국여자 한 사람이 세계 여러 곳을 두루 다닌 이야기를 끄적였나 싶어 따분할지 모르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남 보란 듯이 꾸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즐겁게 꾸리는 삶’을 찾고자 위자료 한 푼 안 받고 이혼을 마음먹은 뒤, 제3세계를 중심으로 홀몸으로 낯선 세상과 사람들을 부대끼는 이야기임을 깨달은 뒤에는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군요.

 남들 따라 살지 않고 나 따라 살아가니까 그럴까요. 한 번 살고 떠나는 이 세상에서 굳이 미련이나 아쉬움을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자유롭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살아가니까 그럴까요. 더 많이 움켜쥐거나 가지려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부대끼고 즐기려는 삶이라서 그럴까요. 떠날 때는 바람, 머물 때는 햇살. 그래, 그렇군요. 가볍게 살되, 한 자리에 머물 때는 따순 마음을 펼칠 수 있어야겠군요. 저는 바람처럼 살는지 모르나 햇살처럼 못 머물고 있었습니다. (4340.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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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전민조 지음 / 눈빛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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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2005년 5월, 전민조 선생 전시회를 보고 난 뒤 쓴 글입니다. 이래저래 검색을 해 보다가, 이 좋은 사진책 하나가 제대로 빛을 못 받고 있구나 싶어서, 예전에 써 두었던 소개글을 살짝 붙여 봅니다.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고, 우리 삶터를 살가이 돌아보는 눈길을 쓰다듬어 주는 사진이 묻혀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간직한 '섬' 사진
- 전민조 사진책 <섬>을 보다



<1>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서해안 백령도, 홍도, 소흑산도, 성남도, 진목도, 대마도, 소마도, 라매도, 조도, 관매도, 여서도, 우도, 연화도, 연대도, 수우도, 오륙도, 울릉도, 독도… 들을 두루 다닌 전민조 님 사진책이 나오고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15일에는 서울에 있는 전시장에서 조촐한 강연자리도 있었습니다.

사진책은 진작에 눈빛 출판사 인터넷 누리집에서 소식을 들었고, 성균관대 앞 <풀무질>에서 책방 아저씨와 함께 구경했지만, 아직 사 놓지 않았습니다. 전민조 님 강연자리에서 말씀을 들은 뒤, 그날 그 자리에서 사면 책에 서명을 해 준다고 해서요.

사진 전시장에 들어서니 맨 처음으로 우리를 반기는 사진은 어린 계집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풀로 엮은 자리에 눕혀 놓고 재우는 모습입니다. 동생은 궁둥이가 트인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풀자리(짚이 귀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들과 산에서 나는 풀을 베어다가 자리를 엮었다고 합니다) 옆에는 누나가 신는 듯한 검정 고무신과 어린 동생이 신는 듯한 꽃신이 흩어져 있습니다. 둘이 있는 풀자리 앞 돌담 위에는 까만 돼지가 둘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벽에 차례차례 걸린 사진을 봅니다. 하나같이 수수한 옷차림에 얼굴 까맣고 눈 맑은 사람들 모습입니다. 섬사람들 사진인 터라 사진이 찍힌 곳도 바다나 바닷가, 갯벌, 배 위나 배 둘레입니다. 섬에서는 텃밭 하나도 소중하기에 손바닥 만한 밭 하나도 일구려고 힘쓰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발을 보니, 거의 다 고무신을 신습니다. 맨발인 사람도 참 많습니다. 운동화나 구두를 신은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군요. 좀더 거슬러 올라간 옛날엔 고무신도 드물고 짚신이 훨씬 많았겠죠?

저는 지난해 가을부터 고무신을 신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시골에서 일할 때만 신었는데 이제는 서울로 갈 때도 고무신을 신습니다. 한동안 고무신과 제 발이 맞지 않아 뒤꿈치가 긁히고 살갗이 벗겨졌지만, 이제는 하루 내내 고무신만 신고 다녀도 발이 긁히거나 아프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어느새 고무신과 제 발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2> 야윈 소를 먹이는 아이


사진책 <섬> 겉을 수놓은 사진은 바다가 보이는 섬 들판에서 풀을 먹이는 아이 모습입니다. 등에는 자기 키 만한 지게를 진 아이도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소는 눈이 퀭해 보이는데 등이 칼날처럼 곧습니다. 갈비뼈도 보입니다. 배가 홀쭉하군요. 섬사람들도 배불리(또는 마음껏 많이) 먹기 어려웠을 테니, 이 섬사람들이 기르던 소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고 보니 사진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넘겨보았을 때 '살이 찐 사람'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모두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합니다. 먹을거리가 많지는 않았어도 서로 나누며 살았기에 이렇게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해 보일까요? 다시 사진책을 넘기며 옷차림을 주욱 살피니 입성도 비슷합니다. 옷도 신도 몸도 비슷한 이들은 마찬가지로 비슷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방에서 살아갑니다.

어린 계집아이가 홀로 툇마루에서 밥을 먹는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 숟가락도 한 손으로 꼬옥 쥐지 못하는 어린 아이인데, 살이 통통합니다. 그렇다고 살이 찐 몸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살짝 통통한 편입니다. 보리밥에 물만 반찬으로 먹는 아이인데도 몸이 이러하군요. 먹는 밥은 넉넉하지 못해도, 넉넉한 바다와 공기와 물과 바닷것이 있기 때문일까요?

고깃배가 가득가득 넘쳐서 돌아왔습니다. 어른들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잡은 고기들을 부려 놓습니다. 그 옆에 발가벗은 사내아이도 일손을 거듭니다. 이어지는 사진에서도 발가벗은 아이가 나옵니다. 반바지만 입은 아이하고 갯벌에서 놀다가 사진 한 장 찍혔습니다. 반은 발가벗은 채로 엄마가 일하는 시늉을 하는 아이도 보입니다. 어머니처럼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싶은지 텅 빈 바소쿠리를 이고 엄마 앞에서 길을 이끕니다. 그 뒤로는 엄마가 있고, 그 뒤로는 어린 누나가 머리에 짐을 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뭍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섬 안에서 맴돌지만, 이 섬에서도 저희들끼리 즐겁고 놀고 즐겁게 어울리며 즐겁게 일을 합니다(그렇지만 늘 '즐겁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바쁠 때면 그지없이 고단하고 고달픈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제 밥값을 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 몸에 맞는 지게를 지고 땔감이고 풀베기고 무엇이고 해야 할 테니까요). 요새로 치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만한 나이에도 어른과 함께 일을 하고,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우리 삶터를 오롯이 들여다보기


전민조 님이 담은 '섬 사진'에 드러나는 모습은 섬사람들 삶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삶입니다. 뭍이건 섬이건 가릴 것 없이 보통으로 우리가 살아온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보통으로 살아온 사람은 우리 자신이 살아온 자취를 남기지 못합니다. 남길 틈도 없고, 남길 만한 장비(사진기, 필름 따위)도 없습니다. 어쩌면 전민조 님처럼 사진기자가 되어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잃어버리거나 잊혀진 모습이 되었을 '우리들 삶터 사진'이에요.

사진책 <섬>은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서 빛이 바래는 한편, 도시사람들 구경거리와 놀이터로 무너져 버린 섬 모습을 아직은 깨끗한 채로 있을 때를 비추어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고이 남은 몇 안 되는 소중한 발자취이자 생활문화 역사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섬사람들 삶으로 좀더 깊숙하게 들어가지 못했다는 대목. 전시회 사진과 사진책 사진에는 미처 들어가지 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섬사람들 살림살이, 집안 구석구석,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고된 일을 하는 모습이 좀더 낱낱이 드러나지 못했다는 대목이 아쉽습니다. 일하는 어른들 모습도 좀 멀찍이 떨어져서 살펴본 구경꾼 눈이라는 대목도 보입니다.

그러나 전민조 님을 다른 구경꾼하고 똑같이 여길 수 없습니다. 지금은 잠깐 들렀다 가지만 앞으로 다시 찾아올 뭍손님입니다. 섬에서 섬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은 아니지만, 살갑게 찾아와 부드럽게 손을 맞잡고 한 밥상에서 보리밥을 나눠 먹는 고맙고 반가운 뭍손님입니다. 섬에서만 사느라 뭍 소식을 모르고 뭍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들한테 뭍 소식과 뭍 세상을 차근차근 일러 주는 이야깃손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섬 소식과 섬 세상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 주는 사랑손님이 되기도 할 테고요.


.. 수평선을 바라보며 염소와 송아지를 모는 귀여운 아이들, 물동
이와 땔감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소녀들과 아낙네들의 표정은 너
무나 평화로웠다 .. <전민조 님 말>



강연자리에서 전민조 님은 "어린이를 천사로 봤어요. 꾸밈이 없어요. 그런데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은 꾸밈이 많아요. 각색이 되고 조작이 되고… 어린이들이 어른한테 표정을 꾸미고 해서 만들 수 없잖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섬사람들 얼굴에서 느낀 평화로움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지 싶습니다. 남 앞에서 꾸미거나 가릴 것이 없이 착하게 사는 모습, 서로 살가운 이웃으로 여기며 길손한테도 밥상 하나 차려 주는 마음씀, 이런 평화로움이겠지요.

그런데 1970년대 첫머리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두루 평화로움을 잃었습니다. 이 '평화로움을 잃음'은 바로 오래된 봉건통치 사회를 거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몇몇 독재정권까지 이어오는 동안 짓밟히고 짓눌리고 시달리느라 마음이 다치고 곪고 병들어 버린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생겨 버린 사회이자 삶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세상이 팍팍하고 사람들 마음씀도 거칠어질 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전민조 님이 찾아다닌 섬에서 만난 사람들한테서 느낀 수수함과 살가움은 사진마다 고이 남고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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