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모두 알거나 모두 모르는 말

 


  우리가 쓰는 말은 모두 아는 말이거나 모두 모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을 가만히 돌아보면, 국어사전을 그때그때 들추면서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모로 보면 모두들 ‘어느 말이든 다 안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살피면 제때 제자리에 제대로 옳거나 바르게 쓰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느 말이든 다 안다’ 하듯이 쓰는 말이지만, 정작 ‘서로서로 어느 말이든 다 모른다’고 할 만해요.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포노,2013)라는 책을 읽다가 115쪽에서 “그 잊지 못할 말을 쓰는 사람은 한편으로 새로운 것을 지어내고, 또 한편으로는 언어의 속성을 압니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줄거리가 좋구나 싶어 밑줄을 긋고 여러 차례 되읽다가 문득 한 가지 더 깨닫습니다. 이 글월은 앞과 뒤가 살짝 어긋나는군요. 보기글 앞쪽에는 “잊지 못할 ‘말’”이라 적지만, 보기글 뒤쪽에는 “‘언어’의 속성”이라 적어요. 한쪽은 ‘말’이고, 다른 한쪽은 ‘언어’예요.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말’을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라 풀이합니다. ‘언어(言語)’는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이라 풀이해요. 자, 그러면 ‘말’과 ‘언어’는 서로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요. 아니, 두 낱말은 다르다 할 수 있을까요. 두 낱말을 다르게 쓰거나 가르는 일은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요. 두 낱말을 애써 나란히 적어야 글쓴이 마음을 깊거나 넓게 나타낼 수 있나요.


  ‘사람’과 ‘인간(人間)’ 사이에서도 그래요. 어른들은 두 낱말을 조금 다른 자리에서 쓰지만, 아이들한테는 두 낱말이 똑같아요. ‘밥’과 ‘식사(食事)’라든지, ‘아침’과 ‘오전(午前)’, ‘빠른전철’과 ‘급행(急行)전철’, 또 ‘늦다’와 ‘지각(遲刻)하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쉽고 바르며 고운 말 한 가지만 쓰기를 바랍니다. 어렵거나 딱딱하거나 메마른 말은 재미없어요.


  한쪽은 한국말입니다. 다른 한쪽은 한국말 아닌 한자말입니다. 한겨레가 예부터 이 나라 삶터에 걸맞게 지어서 쓰는 낱말이기에 한국말입니다. 한국말을 쓰는 한겨레가 토박이말로는 어딘가 모자라거나 아쉽다고 여겨, 또는 한국 바깥에서 쓰는 말이 한겨레한테도 도움이 되거나 좋다고 여길 때에 받아들이면, 이 ‘한자말’인 ‘바깥말’을 한겨레도 쓸 수 있습니다. 곧, 한국말은 토박이말이고, 한자말은 바깥말, 그러니까 외국말입니다.


  오늘날 누구나 흔히 쓰는 ‘버스’와 ‘택시’는 틀림없이 영어입니다. 바깥말, 곧 외국말이에요. 그러나, 외국말이자 영어인 ‘버스’와 ‘택시’는 한국사람 누구나 즐겁게 쓰는 낱말이에요. 뿌리는 한겨레 삶터하고 걸맞지 않지만, 오늘날 흐름하고는 잘 어울리니까 받아들여서 씁니다. 이 흐름을 헤아린다면, ‘인간·식사·오전·급행·지각’ 들을 한겨레한테 도움이 된다고 할 때에는 넉넉히 받아들여 쓸 만해요. 이 낱말들이 한겨레한테 도움이 안 된다고 할 때에는 굳이 받아들일 까닭이 없으니 안 쓰면 돼요.


  나는 우리 시골집에서 우리 아이한테 ‘인간·식사·오전·급행·지각’ 같은 낱말을 안 씁니다. 쓸 일이 없습니다. 내 둘레 다른 사람들은 이 낱말을 쓰지만, 나와 아이들이 이 낱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나와 아이들이 이 낱말을 안 쓰고 다른 사람이 이 낱말을 쓰더라도 알아들어요.


  그나저나, “언어의 속성(屬性)을 압니다”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와 같이 쓰는 말은 우리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먼저 ‘속성’이 무슨 뜻인지부터 살펴야겠지요. 이 한자말은 “사물의 특징이나 성질”을 뜻합니다. ‘특징(特徵)’은 또 “다른 것에 비하여 특별히 눈에 뜨이는 점”을 뜻해요. ‘특별(特別)’은 다시 “보통과 구별되게 다름”을 뜻하지요. 이룰 간추리자면 ‘속성’은 “어느 사물 하나가 다른 사물하고 다른 모습”을 일컫는다 할 수 있어요. “언어의 속성을 압니다”는 “말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압니다”라는 이야기이고, “말은 어떤 속살인가를 압니다”라든지 “말빛이 무엇인가를 압니다”라는 이야기가 되기도 해요.


  《아메나시 면사무소 산업과 겸 관광담당》(대원씨아이,2011)이라는 만화책 3권 23쪽을 읽습니다. “시식회가 아니라 스미오 팬모임 같구만.”이라는 글월을 봅니다. 빙그레 웃습니다. ‘팬모임’이라는 낱말에 눈을 번쩍 뜹니다. 그래요. ‘팬모임’이 될 테지요. ‘팬클럽(fan club)’이 아닌 ‘팬모임’이 될 테지요. ‘팬’이라는 낱말은 이럭저럭 쓴다 하더라도, ‘클럽’은 ‘모임’으로 얼마든지 거를 수 있어요. ‘동아리’로 풀어도 되지요.


  우리 스스로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면 ‘팬’이라는 영어도 살짝 풀어낼 만해요. “시식회가 아니라 스미오 좋아하는 모임 같구만.”이라 하든지 “시식잔치가 아니라 스미오 사랑모임 같구만.”이라 할 수 있어요. “맛보기잔치가 아니라 스미오잔치 같구만.”이라 해도 앞뒤가 잘 맞습니다.


  살려서 쓰려고 하면 살려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이냥저냥 쓰려고 하면 그야말로 이냥저냥 쓰고 마는 말입니다.


  말 한 마디 읊을 적에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와 살아가니까, 두 아이한테 밥을 차리는 마음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이들한테 아무 밥이나 차려서 내밀 수 없고, 아이들한테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 읽을 그림책을 아무것이나 값싸게 장만해서 건넬 수 없어요. 아이들이 아무 짓이나 함부로 해도 아름다울 수 없어요. 곧, 아이들한테 가장 맛나며 좋은 밥을 차려서 내줄 때에 즐겁고, 이러한 밥은 어른인 내가 먹을 때에도 즐겁습니다. 아이들이 듣기에 가장 곱고 쉬우며 맑은 말을 읊을 때에 아이들한테 반가우며, 이러한 말은 어른인 내가 듣거나 쓸 적에도 반갑습니다.


  사랑을 담은 밥일 때에 맛나게 먹고, 사랑을 담은 말일 때에 즐거이 나누며, 사랑을 담은 삶일 때에 서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나날을 누립니다. 봄볕은 봄꽃을 곱게 피우고, 여름볕은 여름꽃을 환하게 피웁니다. 고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운 말을 주고받고 싶습니다. 4346.3.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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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주는 선물 - 친구를 위한 감동 내 친구는 그림책
후쿠자와 유미코 글.그림, 엄기원 옮김 / 한림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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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54

 


내가 나한테 선물한다
― 친구에게 주는 선물
 후쿠자와 유미코 글·그림,엄기원 옮김
 한림출판사 펴냄,2004.12.20./1만 원

 


  밥을 맛있게 차려서 먹습니다. 옷을 곱게 입습니다. 말을 상냥하게 합니다. 얼굴에 웃음 가득 담습니다. 하루하루 즐겁게 누리고 싶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먼 데 사는 반가운 벗한테 글월 하나 띄웁니다.


  내가 먹고 옆지기가 먹으며 아이들 함께 먹을 밥을 아무렇게나 차릴 수 없습니다. 정갈한 먹을거리로 밥상을 꾸리고 싶습니다. 내가 입고 옆지기가 입으며 아이들이 입을 옷을 아무렇게나 빨거나 건사할 수 없습니다. 정갈히 빨래하고 곱게 개어 건사합니다. 내가 누군가한테 들려줄 말이건, 내가 누군가한테서 들을 말이건, 서로서로 상냥하며 아름다운 말을 나눌 때에 즐겁습니다. 얼굴에 웃음꽃 피우며 도란도란 이야기꽃 맺을 때에 즐거워요. 지식 쌓는 책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책을 읽으며 마음이 포근해요.


.. 숲속이 나뭇잎으로 울긋불긋하게 물든 무렵, 곰네 편지통에 편지가 왔습니다 ..  (2쪽)


  언제나 내가 나한테 선물합니다. 누군가한테 골을 부린다면, 어느 다른 사람한테 골을 부린다기보다 바로 나 스스로한테 골을 부리는 노릇입니다. 누군가한테 따순 말마디 건넨다면, 어느 다른 사람한테 따순 말마디 건넨다기보다 바로 나 스스로한테 따순 말마디 건네는 셈입니다.


  고소한 밥내음 솔솔 풍기는 밥상은 옆지기와 아이들 누리는 밥인데, 나는 곁에서 밥내음만 맡아도 배부릅니다. 즐겁게 밥먹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마음이 뿌듯하면서 빛납니다. 사랑 담은 글월 하나 띄울 적에도 내 가슴속에서 따사로운 사랑이 펄떡펄떡 일어납니다. 좋은 꿈을 가슴에 품으면 좋은 이야기가 가슴에서 자라고, 맑은 생각을 가슴에 두면 맑은 슬기가 가슴에서 뻗어나옵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늘 살점을 내어줍니다. 어버이는 당신 살점이며 숨결을 모두 내어주면서 아이를 낳아 돌봅니다. 그런데, 어버이는 당신 살점과 숨결을 모두 내어주면서 새 살점이 자라고 새 숨결이 태어나요. 주면 줄수록 더 줄 수 있어요. 나누면 나눌수록 더 나눌 수 있어요. 언제까지라도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언제나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꽁 하고 걸어 잠그면 늘 꽁 하고 걸어 잠그곤 말지요. 꽝 하고 닫아 걸면 노상 꽝 하고 닫아 걸 뿐입니다. 사랑이기에 사랑을 낳고, 미움이기에 미움을 낳아요. 꿍꿍셈은 꿍꿍셈을 낳고, 슬기는 슬기를 낳아요. 콩을 심는데 팥 나올 까닭 없고, 배추씨 뿌리는데 무 나올 일 없어요.

 


.. 큰 곰은 조그마한 빨간 조끼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끼를 입은 내 친구 겨울잠쥐를 보고 싶은걸.” ..  (9쪽)


  내 어버이는 나한테 이녁 온 사랑을 내어줍니다. 나는 내 아이한테 내 온 사랑을 내어줍니다. 내 이웃은 나한테 당신 온 믿음을 베풉니다. 나 또한 내 이웃한테 내 온 믿음을 베풉니다.


  우물물은 푸면 풀수록 더 맑아요. 풀은 뜯으면 뜯을수록 더 싱그럽지요. 햇볕은 쬐면 쬘수록 더 따스해요. 삶은 일구면 일굴수록 더 즐거워요.


  노래하며 삶을 즐기는 아이들은 언제나 새 노래를 새삼스레 부르면서 하루가 한결 즐겁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뛰노는 어른은 날마다 새 꿈을 지으면서 하루를 한결 환하게 밝힙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아이들 스스로 선물을 빚어서 스스로 선물을 줍니다. 우리 어른들은 모두 아이였고, 좋은 사랑을 먹으며 자라 어른이 되었어요. 곧, 우리 어른도 누구나 스스로 선물을 빚어서 스스로 선물할 만합니다. 저마다 ‘내가 나를 즐겁게 사랑하는 참다운 길’을 찾을 노릇입니다. 누구나 ‘내가 나를 따사롭게 사랑하는 착한 삶’을 꿈꿀 노릇이에요.

 

 


.. 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시 도토리를 찾으러 갔습니다. 겨울잠쥐는 곰이 떠나는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  (23쪽)


  후쿠자와 유미코 님 그림책 《친구에게 주는 선물》(한림출판사,2004)을 읽습니다. 숲속 작은 쥐하고 숲속 큰 곰은 서로서로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마음 깊이 아끼면서 선물 하나 마련합니다. 서로서로 가장 쓸모있으며 가장 즐겁고 가장 사랑스러울 선물을 생각합니다.


  웃는 삶을 생각합니다. 노래할 삶을 생각합니다. 춤출 삶을 생각합니다. 마음속에 넉넉한 품을 두고, 마음밭에 기름진 흙을 마련하며, 마음자리에 살가운 손길 어루만집니다.


.. “이거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  (34쪽)


  무엇을 선물받고 싶은지 생각해 봐요. 내가 선물로 받고 싶은 한 가지를 헤아려 봐요. 그리고, 내가 선물받고 싶은 한 가지를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옆지기나 아이들이나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해요. 내가 선물받으며 아주 즐거웠다고 느낀 한 가지를 내 살가운 사람들한테 선물해요. 4346.3.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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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3-21 09:59   좋아요 0 | URL
내가 나한테 선물한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친구에게 주는 선물>, 이 책 정말 좋을 것 같아요. ^^
살포시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3-03-22 02:54   좋아요 0 | URL
네, appletreeje 님 아이들한테 이 그림책 읽힐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
아이들이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어른인 우리 스스로 즐기면
다 좋은 그림책이리라 느껴요.

저는,
아이들한테 그림책 사 준다는 생각보다
내가 좋아할 그림책을 사곤 햐요 ^^;;;;

appletreeje 2013-03-23 09:09   좋아요 0 | URL
히히..저도 제가 좋아서 읽을 그림책을 사요..
<친구한테 주는 선물>. 배송되어 읽었는데 아주 재밌고 좋더라구요. ^^
오늘 저녁엔 <둥지 상자>를 읽을 수 있겠지요.
늘 좋은 책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3-03-23 14: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아이들이 나이 먹어도
어머니 좋아하는 예쁜 그림책 아끼면서
고운 마음 오래오래 누릴 수 있으면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우리는 맨손으로 학교 간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지음 / 양철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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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9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 우리는 맨손으로 학교 간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엮음
 양철북 펴냄,2013.3.4./12000원

 


  한국글쓰기연구회 교사들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부대낀 삶을 찬찬히 적바림한 글을 엮은 《우리는 맨손으로 학교 간다》(양철북,2013)를 읽습니다. 전국 골골샅샅 여러 학교에서 씩씩하게 일하는 교사들은 아이들 씩씩한 얼굴과 웃음을 마주하면서 새삼스레 웃습니다. 아이들한테 교과서를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교사라 하지만, 막상 아이들은 교과서 바깥 이야기를 더 많이 배웁니다. 교사 또한 교과서를 벗어난 자리에 서면, 아이들한테서 새로운 삶을 마주하고 배워요.


.. 돌을 만지고 있는데 개구쟁이 이용우가 뭐라고 소리치며 들어온다. “선생님 이거 별이에요, 별!” 용우가 손에 들고 온 건 개나리인데 가지 끝에 핀 개나리꽃 세 송이가 노란 꽃잎을 벌리고 있는 게 마치 별 같다. “어쩜 이렇게 꽃잎이 이쁘니?” ..  (25쪽/노미화)


  아이가 개나리꽃을 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꽃은 별하고 같아요. 그러면, 교사들은 다른 별을 찾으러 교실을 박차고 나올 수 있어요. 자, 아이들아, 우리 다른 별도 찾으러 밖으로 나가서 봄을 한껏 누려 볼까, 하고 외칠 수 있어요. 수업 진도 나가야 한다고요? 그러면 교장 교감 두 분 함께 모시고 모두 교실을 박차면 되지요. 소풍이나 현장학습을 꼭 어느 날 어느 때에 맞춰서 해야 하지 않아요. 교장 선생님도, 교감 선생님도, 시멘트 건물 학교에서 낮에도 형광등 켠 채 일하시지 말고, 아이들도 교사들도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들로 나가요. 들이 없는 도시라면, 학교 꽃밭으로 가요. 그래서 모두 함께 봄바람 마시고 봄볕 즐기면서 봄을 이야기하는 하루를 누려요.


.. 순진한 녀석들. 참 귀엽다. 그런데 어디서 튀어나오는 한마디. “전에도 안 서 있으면 체육 안 하고 교실에 들어갔어요.”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체육에 목말라 하는데, 아까 장난으로 한 말이지만 체육 안 할지도 모른다고 애 태우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래, 그냥 좀 귀찮다고 체육 안 하고, 바쁘다고 체육 안 하고, 그런 일은 절대로 안 할게.’ ..  (58쪽/박선미)


  교사는 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학생을 윽박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교과서 지식 집어넣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사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교사는 학생들이 교사한테서 아름다움을 늘 느끼고 마주하면서 스스로 새 아름다움 빚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 그래도 나는 대구를 벗어난 시골 학교에 있으니까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출근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텁텁하던 공기가 상큼해진다. 우중충한 햇빛에서 눈부신 녹색 속으로 들어가는데 기분이 어떻게 밝아지지 않겠나 ..  (90쪽/이호철)


  아이들더러 학교에 올 적에 맨손으로 오라 말하기 앞서, 교사들부터 학교에 갈 적에 자가용 좀 제발 끌지 않기를 빌어요. 학교 운동장 한켠에 제발 자가용 세우지 않기를 빌어요. 교사들부터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에 오기를 빌어요. 교사들부터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기를 빌어요. 교사들 누구나 아이들과 나란히 길을 거닐면서 이야기 주고받기를 빌어요. 교사들 모두 아이들과 아침에 노래노래 부르면서 학교 가는 길이 신나고 아름답게 거듭나도록 이끌기를 빌어요.


.. 늦게 일어나서 마음이 바빴을 텐데 성현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았다. 떨어지려는 나뭇잎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더 이상 못 참아 엄마 품에서 떨어졌다” 그랬다.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서 엄마 나무 옆에 놔두고 다시 학교로 온 성현이는 교실에 와서 바로 일기를 썼다고 했다. 세상 귀찮은 듯 아무렇게나 다리 뻗고 앉아 있던 성현이를 겉모습만 보고 내가 섭섭해 했구나 ..  (212쪽/김숙미)


  교사는 아이들 속모습을 들여다보고 겉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곁지기입니다. 어버이 또한 아이들 속살을 헤아리고 몸가짐을 추슬러 주는 옆지기입니다. 곧, 교사도 어버이도 어른입니다. 어른이란, 나이 많이 먹어 밥그릇 숫자 많아야 어른이지 않습니다. 어른은, 마음속에 슬기로운 빛 한 줄기랑, 따사로운 사랑씨앗 하나랑, 포근한 꿈자락 하나 건사하면서 언제라도 이웃하고 나눌 때에 어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지요. 아름다운 어른을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아름다운 어른으로 자라지요. 사랑스러운 어른과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어른으로 자라지요. 믿음직한 어른하고 학교에서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아이들은 날마다 새록새록 꿈을 먹고 사랑을 키우며 이야기를 빚어요.


.. 이렇게 가르치려고만 드는 교육으로 아이들을 답답하게 하는 동화들이 책으로 나오고, 이런 책이 좋은 책으로 알려지고, 아이들이 읽게 하고, 책을 읽은 아이들이 더 답답해지고, 그래서 책읽기를 싫어하게 되고 ……. 이렇게 문제가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  (231쪽/박문희)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교사들 모두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땅 교사들 모두 어여쁜 꿈과 빛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누리 어른들 모두 살가운 손길과 눈빛으로 아이들과 부둥켜안고 뛰놀며 지구별 지킬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6.3.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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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숟가락 2
오자와 마리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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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227

 


서로 동무로 지내는 삶
― 은빛 숟가락 2
 오자와 마리 글·그림,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2013.2.10./5000원

 


  하늘빛은 하늘빛이라는 낱말이 아니고는 달리 가리킬 수 없습니다. 해는 햇빛이라는 낱말일 때에 비로소 나타낼 수 있어요. 물은 물빛이고, 흙은 흙빛입니다. 낯은 낯빛이고, 눈은 눈빛이에요.


  복숭아는 복숭아빛이라 할밖에 없습니다. 살구는 살구빛, 앵두는 앵두빛, 개나리는 개나리빛, 진달래는 진달래빛, 이렇게 말해야 비로소 참빛을 일컫는 셈입니다.


  너른 들을 바라봅니다. 봄날 들판은 어떤 들빛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그래, 봄날 들판이라면 봄들빛 될 테지요. 여름에는 여름들빛이요, 가을에는 가을들빛, 겨울에는 겨울들빛이에요. 참말 이 낱말 아니고는 가을날 눈부시게 물결치는 나락논 빛깔을 가리킬 수 없어요. 나락을 베고 난 겨울들은 겨울들빛이라 할밖에 없고, 겨울 지나 봄이 다가오며 푸릇푸릇 새 풀 돋으며 노르스름한 들판에 포근한 기운 감도는 빛깔은 봄들빛 한 마디로만 나타낼 만합니다.


  아이들 웃음짓고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아이들아, 너희들 웃음은 웃음빛이지? 아버지가 너희한테 차려서 내주는 밥상은 밥빛이라 할까?


  따사로운 마음은 마음빛입니다. 넓고 깊은 생각은 생각빛입니다. 너그러우면서 포근한 사랑은 사랑빛이지요. 아끼고 보듬는 좋은 믿음은 믿음빛이 돼요. 곧, 우리들은 누구나 사람이라는 목숨이니, 사람빛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 “그치만 커스터드 크림 만드는 방법이 적힌 부분에 슈크림은 만드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고 쓰여 있어.” “무슨 뜻일까?” “난이도가 높은 거 아냐?” (16쪽)
- “동생들이랑 지내느라 힘들지 않았니?” “아뇨. 시라베도 카나데도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고, 집안일도 나눠서 했거든요. 의외로 괜찮았어요.” (39쪽)


  반가운 벗을 만납니다. 함께 일하는 벗은 일벗입니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삶을 북돋우는 벗은 이야기벗이요 삶벗입니다. 도란도란 말을 섞는 벗은 말벗 되고, 밥 한 끼니 즐거이 나누는 벗은 밥벗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살아가느라 글월 써서 주고받으니 글벗이에요. 한식구 이루어 살아가는 짝꿍, 곧 옆지기이자 곁지기는 사랑벗입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어버이와 아이는 일벗도 되고 놀이벗도 되며 이야기벗이나 삶벗이나 말벗이나 밥벗이나 글벗까지 되어요. 그 어느 벗보다 가까이에 있으면서 서로 사랑과 꿈을 나누는 사이가 어버이와 아이로구나 싶어요.


  어버이로서 아이를 아끼고, 아이로서 어버이를 섬깁니다. 어버이로서 아이를 모시고, 아이로서 어버이를 돌봅니다. 아이들은 큰힘을 못 내어 무거운 짐 못 든다 하지만, 아이들은 굳이 무거운 짐 날라야 하지 않아요. “아버지 힘들어요?” 하고 살며시 묻는 말 한 마디로 어버이는 새힘을 냅니다. “아버지 함께 놀아요!” 하고 까르르 부르는 말 한 마디로 어버이는 새롭게 기운을 차립니다.


  아이들이 벼락돈을 깜짝깜짝 벌어들여 선물해야 어버이가 기운을 내지 않아요. 아이들이 연예인이 되거나 노래꾼이 되어야 어버이가 힘을 얻지 않아요. 옆에서 빙그레 웃기만 해도, 개구지게 놀다가 까무룩 곯아떨어져서 어버이가 품에 안아야 하기만 해도, 어느 어버이라도 애틋하게 삶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 “리츠 오빠가 없어도 어떻게든 된다는 걸 보여줘야지!” “그래! 마음 놓고 수험공부 하게 해 주자!” (47쪽)
- “대단한 얘기 못 해 줘서 왠지 미안하네.” “아냐.” “근데 앞으로도 대단한 말은 못해 줄지도 모르지만, 얘기는 뭐든 들을게.” “응, 고마워.” (86쪽)


  나무하고 나는 서로 벗입니다. 풀하고 나는 서로 벗입니다.


  시골에 있건, 서울로 볼일 보러 나오건, 늘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왜냐하면, 하늘 또한 나와 서로 벗이에요.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촘촘히 발라 빈틈 하나 만들지 않으려는 서울 큰길이나 골목길 거닐다가 풀포기를 보면 걸음 멈춥니다. 가방 내려놓고 쭈그려앉습니다. 예쁜 풀아, 여기에서 누구한테 네 푸른 기운 나누어 주면서 자라니?


  낮하늘은 낮하늘빛입니다. 밤하늘은 밤하늘빛입니다. 봄나무는 봄나무빛입니다. 겨울나무는 겨울나무빛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모르게 자꾸자꾸 새 낱말 빚습니다. ‘낮’이나 ‘하늘’이나 ‘빛’이라는 낱말은 먼먼 옛날 내 할매와 할배가 지었을 테고, 오늘 나는 이 낱말을 엮어 ‘낮하늘빛’이라는 새 낱말 짓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 사랑을 품으면 내 말빛은 사랑빛입니다. 사랑스레 하는 말은 사랑말이니, 이 사랑말은 사랑말빛이 되지요. 사랑 가운데에서도 참사랑을 찾으면서 이루려 할 적에는 참사랑말빛으로 나아가요.


  봄나무빛 누리면서 생각합니다. 봄풀빛 마주하며 생각합니다. 봄꽃빛 바라보고 까르르 웃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생각합니다. 봄에 사랑을 하는 이들은 봄사랑 담아 봄사랑꽃을 바라보겠지요. 봄에 사랑을 맺는 이들은 봄사랑빛을 퍼뜨리겠지요. 봄에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은 봄사랑이야기 들려주겠지요. 봄에 사랑을 꿈꾸는 이들은 봄사랑노래 부르겠지요.


- ‘피가 어떻다는 둥, 그런 바보 같은 얘기는 믿지 않았다.’ (63쪽)
- “호적등본을 뗀 것도, 단지 외숙모의 말에 질질 끌려다니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지, 이런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의심할 여지도 없을 정도로 가족 그 자체였다는 뜻이잖아? 그렇다면, 아무것도 예전이랑 달라진 건 없는 거잖아. 지금까지처럼 지내도 상관없는 거 아냐?” (82∼83쪽)


  모든 아름다운 말은 내 가슴속에서 자라납니다. 어느 대단한 학자라야 짓는 말이 아니에요. 학교 문턱 못 밟은 시골 할매라서 못 짓는 말이 아니에요. 가슴속에 사랑을 품는 사람일 때에 말을 짓습니다. 가슴속에 사랑을 품지 못하기에 자꾸 어려운 한문이나 서양나라 영어랑 프랑스말 끌어들여 겉치레 자랑을 하고 말아요.


  사랑을 품는 사람은 밥 한 그릇 지을 적에, 그저 쌀이요 보리요 수수요 있지만, 고소하며 맛깔나게 밥 한 그릇 차릴 수 있습니다. 나물이나 김치 반찬만 있어도, 사랑 품어 차리는 밥은 누구라도 맛나게 먹으며 씩씩하게 기운을 얻어요. 대단한 오페라 가수가 불러 주어야 노래가 아니에요. 여느 수수한 할매가 투박한 목소리로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자장노래 한 가락이 아름답지요.


  사진작가한테 맡겨야 우리 식구 사진을 멋있게 찍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웃고 노는 삶 한 자락 살며시 한 번 찍으면 멋있으며 아름다운 사진 하나 태어납니다.


- “하지만 이름은 벌써 정했단다. 리츠(律)라는 글자는 선율(旋律)의 율이니까, 시라베(調)나 카나데(奏)처럼 음악에 관련된 이름으로 지을 생각이야.” “선율?” “멜로디 말야. 피아노학원에서 여러 가지 멜로디를 연주하잖아?” “리츠라는 글자는 멜로디의 ‘멜로’야?” “음, 굳이 말하자면 ‘디’일까나? 어느 쪽이든 엄마가 사랑하는 귀여운 멜로디란다.” (90∼91쪽)
- “여기에서 곧장 가면 리츠 오빠가 일하는 편의점인데?” “응? 아. 그러네.” “엄마, 혹시 매일 밤 여기를 지난 거야?” “운동 코스잖니.” (110쪽)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2013) 둘째 권을 읽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빚는 아름다운 삶에서 아름다운 사랑이 태어나 아름다운 꿈이 자라나는 이야기를 만화책 하나에서 읽습니다.


  우리 둘레에도 이렇게 따사로운 사랑 누리는 이웃 있어요. 먼먼 어느 둘레를 찾지 않더라도, 바로 내 보금자리가 따사로운 사랑입니다. 누구나 이녁 보금자리를 스스로 따사롭게 돌봅니다. 아직 서툴거나 어수룩하다면, 이제부터 알뜰살뜰 어여삐 꾸리면 됩니다. 여태껏 엉터리였거나 바보스러웠으면, 바로 오늘부터 야무지고 당차게 일구면서 예쁘게 가꾸면 돼요.


- ‘맛있는 이유는 알고 있어. 리츠 형 자리에 리츠 형이 앉아 있고, 엄마 자리에 엄마가 앉아서 가족이 다 함께 먹기 때문이야.’ (123∼124쪽)
- “부모는 아이를 선택할 수 없고, 아이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지만, 네 부모님이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널 선택한 것처럼, 너도 네 부모님을 선택했구나.” (173쪽)


  하룻밤 백만 원짜리 호텔에서 묵어야 식구들이 웃지 않습니다. 열일곱 평 조그마한 시골집 조그마한 방 한 칸에 네 식구 올망졸망 뒤섞여 함께 잠자리에 들어도 식구들은 웃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웃고, 사랑이 없으면 못 웃습니다. 꿈이 있으면 웃음을 빚고, 꿈이 없으면 웃음을 못 빚어요. 생각을 곱게 건사하면서 삶을 빛내고,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거나 잊어버리면 삶 또한 아무렇게나 흐릅니다. 나도 당신도 이 삶에서 가장 즐겁게 웃으면서 누릴 이야기와 사랑이 무엇인가를 넉넉한 손길로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6.3.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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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울음상점 랜덤 시선 33
장이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외버스, 김밥, 시집
[시를 노래하는 시 46] 장이지, 《안국동울음상점》

 


- 책이름 : 안국동울음상점
- 글 : 장이지
- 펴낸곳 :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11.30.)
- 책값 : 6000원

 


  아이들을 시골집에 두고 혼자 읍내로 장보러 가는 길에 시집 한 권 챙깁니다. 이 마을 저 마을 구비구비 돌며 천천히 달리는 군내버스에서 시 몇 줄 읽습니다. 가방 가득 여러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나서, 읍내에서 시골마을 돌아가는 군내버스 기다리며 다시 시 몇 줄 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면 아이들 바라보느라 종이책 손에 쥘 수 없고, 아이들 없이 혼자 움직이면 내 눈은 종이책을 바라봅니다.


.. 전깃줄들을 따라 무수한 전파가 흐르는 하늘. 군중들이 피곤한 직장을 가방 속에 넣고 집으로 흘러간다 ..  (군함 말리의 우주여행)


  책을 좋아하기에 책을 읽는달 수 있지만, 멧길을 오르거나 숲길을 거닐며 종이책 손에 쥐는 일은 없습니다. 나무를 보고 풀을 보는 즐거움이 온몸으로 스며들 뿐 아니라, 멧자락과 숲자락에서는 내 눈을 푸르게 쉬도록 이끄는 빛깔 가득하기에, 나무책 읽고 풀책 읽습니다. 메책 읽고 숲책 읽어요.


  시골 버스역에도 광고판 많고, 시골 읍내에도 가게 많아요. 집 바깥으로 나가면, 마을에서 벗어나면, 온통 눈을 어지럽히는 것투성이입니다.


  때때로 시외버스 타고 시골을 한참 벗어나 도시로 갈라치면, 종이책 여러 권 챙깁니다. 시외버스 덜덜거리는 소리에, 시외버스 달리는 고속도로 메마른 모습에, 좁은 걸상에서 옴쭉달싹 못하며 시달리는 몸은, 종이책마다 서린 이야기로 젖어들며 비로소 쉽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종이책 읽으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잊고, 메마른 모습을 잊으며, 고단한 몸을 잊어요.


.. 아버지가 고향을 잃고 한참 뒤에 어머니가 고향을 잃은 세상에서 나는 깨어난다. 버스비를 아끼느라 바지 속의 토킅을 만지작거리며 세 정거장이나 걸어왔다는 삼동 어느 날 아버지의 추운 이야기가 잘 아물지 않아 다시 수면제를 찾는다. 지갑 속에 명함이 늘어가고 시계 속의 숫자들이 허물을 벗어놓고 날아간다 ..  (셔벗 랜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꼭지를 틀면 집집마다 가게마다 물이 콸콸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느 살림집을 들여다보더라도 정수기를 으레 들입니다. 새로 짓는 아파트에는 아주 마땅히 정수기가 붙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도 먹는샘물 페트병에 담아 팝니다. 나라에서 어마어마하다 싶을 돈을 퍼부어 댐을 세우고 물관 박고 물꼭지 붙이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수도물 그대로 마시지 않습니다.


  댐을 세우거나 물관 박거나 이래저래 하는 데에 들인 돈을 헤아린다면, 도시이건 시골이건 냇물과 도랑물 정갈하고 깨끗하도록 지키는 데에 돈이나 품을 썼으면, 누구라도 거저로 가장 맑으며 좋은 물을 마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리 안 많은 돈과 품을 들여도 냇물과 도랑물은 정갈하면서 깨끗할 수 있어요.


  왜 빗물을 마시지 못할까요. 왜 냇물을 마시지 못할까요.


  왜 빗물도 냇물도 흐뭇하게 마시지 못하는 삶터로 만들고 말까요. 왜 이러한 삶터에서 물 한 모금 느긋하며 한갓지게 즐기지 못하는 하루를 보내고 마나요.


.. 대학 입시 때인가 처음 정월 보름달에 빌었다. 고향집 앙상한 목련나무 꼭대기, 대머리 달은 내 인생의 편집자처럼 앉아 있었다. 내 생의 스토리를 다 안다는 듯 / … / 달은 그렇게 아버지처럼 늘 곁에서 걸었다 // 달빛에 기대어 잠시 졸아도 좋으리 ..  (십칠야 날씨, 포근함)


  서울로 마실 가는 길에 읍내 김밥집에서 김밥 두 줄 장만합니다. 시외버스에서 김밥을 먹으며 시집을 읽습니다. 천천히 씹으며 천천히 읽습니다. 시외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며 더 빠르게 달리자, 멧자락에 낸 구멍길이 자꾸자꾸 나옵니다. 밝음과 어둠이 되풀이되고, 눈이 따가우며, 속이 메슥거립니다.


  고속도로란 이런 길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더 빨리 달리자며 낸 고속도로란, 숲을 무너뜨리고 시골을 망가뜨리면서 다니는 길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자가용을 타든 시외버스를 타든, 이 탈거리는 기름을 태워 배기가스를 내뿜고, 자동차 한 대 만들기까지 숱한 지구자원을 쓸 뿐더러, 열 해 즈음 달린 자동차는 어느새 쓰레기 대접을 받으며 참말 끔찍한 쓰레기 내놓으며 지구별 더럽히지, 하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달리는 수레라고 하는 자동차는 스스로 달린다고 할 만할까요. 스스로 달리는 수레에 탄 사람은 걱정없이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할 만할까요. 왜 먼길을 애써 가야 하고, 왜 먼길을 애써 갈 때에 이렇게 빨리 달려야 할까요.


.. 사람들은 마음대로 삶을 규정해. /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은 내가 / 그런 삶의 시를 쓴다면 위선이야. / 사람들은 내게 위선을 바래. / … / 내가 꿈이야. 나는 텔레비전 속으로 잠들어 ..  (TV 채널들 사이를 떠도는 노래)


  지난날 사람들은 걸어서 움직였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명나라나 청나라에 갈 적이건,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올 적이건, 누구나 으레 걸어서 움직였습니다. 전라남도 시골에서 서울로 가든, 서울에서 전라남도 시골로 오든, 누구나 마땅히 걸어서 움직이던 지난날입니다.


  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던 이들은 몇 해에 걸쳐 오갔다 할 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몇 해에 걸쳐 먼길 한 차례 오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온몸으로 가득 붙잡습니다. 시골에서 서울을 여러 달 걸쳐 오가던 사람도 숱한 이야기를 온몸으로 듬뿍 사로잡아요.


  옛사람은 금강산 나들이 한 차례 하더라도 책 열 권 쓸 만합니다. 옛사람은 서울마실이나 시골마실 한 차례 하더라도 책 다섯 권 쓸 만합니다. 오늘사람은 외국마실 열 차례 하더라도 책 한 권 쓰기 어렵습니다. 오늘사람은 서울마실이나 시골마실 열 차례 하더라도 책 한 줄 쓰기 힘들어요.


.. 편의점 아가씨, 예쁘기도 하지, 어쩜 / 저 찻집 이름, lonely, 아름답기도 하지, / 여고생 깻잎 머리, 귀엽기도 해라, / 나는 구름 빛이고, 아까 산 〈탄토 템포〉를 / 듣는다 ..  (탄토 템포)


  나는 빨리 달리고픈 마음 없습니다. 나는 빨리 태어나서 빨리 죽고픈 마음 없습니다. 나는 빨리 먹고픈 마음 없습니다. 나는 밥을 빨리 차려서 아이들한테 밥을 후다닥 먹일 마음 없습니다.


  나는 자가용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할 생각 없고, 운전면허증 딸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군내버스를 가끔 타지만, 으레 자전거를 타고, 언제나 두 다리로 걷습니다.


  나는 들길을 느끼고 싶어요. 나는 마을길을 헤아리고 싶어요. 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구름빛을 살피고 싶어요. 나는 새와 벌레와 풀을 이웃으로 삼아, 고즈넉한 시골자락 삶을 일구고 싶어요.


.. 군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안의 괴수들처럼 보였다 ..  (철남)


  서울은 넓습니다. 아파트와 건물과 찻길이 끝없이 이어질 만큼 넓습니다. 서울은 서울대로 넓은 만큼, 서울사람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시골은 넓습니다. 들과 숲과 바다와 벌이 멀리멀리 잇닿을 만큼 넓습니다. 시골은 시골대로 넓은 터라, 시골사람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다만, 이제 글을 쓰거나 시를 쓰거나 노래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며 이것저것 합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며 글을 쓰는 이는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서 흙 돌보며 대학교수로 일하는 이는 아주 적습니다. 시골에서 흙 먹으며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대통령 하는 이는 아주 없다 할 만합니다. 시골에서 흙 누리며 변호사나 법관이나 의사나 경찰이나 군인이나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이는 몇이나 될까요.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설산 사진이 / 둘러쓴 이불 밑으로 언 발을 집어넣는다. / 세상 참 춥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멀리 있다. / 고마운 텔레비전이 그곳에 대해 / 저능아처럼 논평한다. / 아비가 자식의 목을 눌렀다네요 ..  (천국, 내려오지 않는)


  장이지 님 시집 《안국동울음상점》(랜덤하우스코리아,2007)을 읽습니다. 장이지 님은 전남 고흥에서 어린 나날 보냈다고 합니다. 군내버스에서 이 시집을 읽다가, 읍내 버스역에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군내버스 기다리며 이 시집을 읽다가, 전남 고흥에서 흙 부대끼는 할매와 할배는 이 시집을 어떻게 읽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쁜 총각이 이쁜 시 하나 썼네, 하고 생각하실까요. 이쁜 젊은이가 이쁜 시집 하나 냈네, 하고 여기실까요.


.. 제일 깨끗한 눈은 딸에게 줄 / 선물이라지요 ..  (마술사와 눈, 노숙자의 꿈)


  시집을 덮습니다.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 깃든 가장 정갈한 글월 한 자락은 장이지 님 할매나 할배한테 베푸는 말꽃, 곧 선물이라고 느낍니다.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 담은 가장 따사로운 글월 두 자락은 장이지 님이 오늘 살아가는 서울에서 마주하는 이웃한테 건네는 말빛, 그러니까 선물이지 싶습니다.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야기를 춤으로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야기를 고소한 밥 한 그릇처럼 한껏 차리는 시입니다. 이야기를 씨앗 한 톨로 심는 시입니다. 4346.3.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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